시조시인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982)
1932.10. 신동아 기자, 1935. 4. 퇴사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가고파’ ‘동무생각’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 주옥같은 노래 말을 지은 이은상. 그는 1932년 10월 ‘동아 식구’가 됐습니다.
“본지 창간 1주년 기념사업으로 신동아의 누이 잡지로 ‘신가정’이란 가정잡지를 신년호부터 발간하려고 지금부터 사원 총출동으로 바쁘게 준비 중이올시다. 이은상 씨를 새로 맞이하여 씨의 능란한 솜씨가 신년호부터 양지 지면을 찬란하게 빛낼 것입니다.” (주요섭, 신동아 1932년 11월호 226쪽 편집후기)
“내가 동아의 신문지상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세 때의 일이었다. 뒤미처 동경유학시절에 있어서도 동아의 원고료를 가지고 학비의 보탬이 되기까지 했었고 26세에 귀국한 뒤로도 국내의 명산답파의 기행과 손대는 이 드물었던 국문학 연구 등으로 한때 동아의 문예란은 그야말로 나의 득의한 무대처럼 여겼던 것이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사원 이상으로 친밀감을 가진 기관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내가 정식으로 동아의 식구가 된 것은 30세 때!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편을 놓고 옮겨 앉은 것이었다.” (이은상, ‘나의 신가정 편집장 시절’, 여성동아 1967년 11월 복간호, 458쪽)
“여성지 발간계획이 결정되자 그 기획 편집의 총책임은 당시 30세의 노산 이은상이 맡게 됐다. 노산(鷺山)은 약관 20세 무렵부터 명산 답파의 기행과 손대는 이 드물었던 국학연구에 이미 그의 재필(才筆)을 전국에 떨치고 있었으며 동아의 기고가로서 동아일보는 그의 득의의 무대처럼 되어 있었다. 그를 가리켜 총독부의 일인 관리는 ‘단군 갓을 쓰고 세종대왕 두루마기를 입고 이순신 신을 신고 다니는 놈’으로 아주 기휘(忌諱)하던 인물이었다.” (이문환 동아일보 여성동아부 차장,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0쪽)
“형식상으로는 동아의 총체적인 사장이 계셨지마는, 이 신가정 편집에 있어서는 거의 전적으로 나의 독자적인 플랜에 의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억압 속에서나마 새로운 광명을 찾아보려했고, 또 그것을 민족 전체의 행복이라는 점에 집약시켜 보려했다.” (이은상)
그래서 그는 창간호 편집여묵에 “여러분에게 새로운 출발이 있어지이다. 여러분의 가정에 새로운 행복이 있어지이다. 이것이 곧 새 조선의 출생입니다. 본지는 오직 그것만을 위하여 났고, 또 그것밖에 다른 아무 소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하기 전에는 본지의 생명이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적었습니다.
“1933년, 내 나이 31세에 이르기까지 그때의 내 정열은 거의 이 잡지 편집에 쏟아놓았던 것이다. 가정이 바로 서면 남성들의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들에게 민족정신을 전도하는 것으로써 새 조선 운동의 첩경을 삼았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일제의 검열을 묘하게 통과시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라도 한 가지라도 더 써낼 수 있을까하는 것에 지략을 모으기도 했었다. 글로써 다 못쓰는 것은 말로써 라도 보태고자, 이런 모임, 저런 모임 등을 만들어서, 강당에서도 모이고 산과 들에 가서도 모이고…”
노산 이은상 선생의 글이 동아일보에 처음 실린 것은 1925년 1월, 그의 나이 23살 때였습니다.
1925년 1월 30일자와 2월 9일자 부록 3면에는 두성생(斗星生)’이란 필명으로, 2월 16일자와 23일자에는 ‘이은상’ 본명으로 4회에 걸쳐 기고한 ‘아관남구문학(我觀南歐文學-내가 보는 남유럽 문학)’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농부와 어부가 곳간과 어망을 가득 채우려하듯 사람은 배우고, 알아야 한다며 “예술은 없는 우주를 꿈꾸는 공상이나 허무가 아니요, 있는 세계의 이상화를 노래하고 힘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남구(南歐) 예술은 ‘아폴로’적이요, 북구(北歐) 예술은 ‘디오니소스’적이라 정의하고 북구(北歐) 예술이 이성적, 각성(覺醒)적, 객관적인 반면 남구(南歐) 예술은 정열적, 도취적, 주관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1925년 1월 30일자 부록 3면, 두성생(斗星生)’ (전 4회)
1927년 4월 30일자 15면 ‘시조 문제’ 1, 이은상(전 4회)
1928년 2월 9일자 3면 ‘시조 문제 소론’ 1, 이은상(전 7회)
1928년 4월 18일자 ‘시조단형추의(芻議)’ 1, 이은상 (전 8회)
이은상 선생은 동아일보 1927년 4월 30일자 15면 ‘시조 문제’(전 4회)로 부터 1932년 3월 30일자 ‘시조창작문제’(전 10회), 그 이후에도 시조에 대해 끊임없이 중요성을 강조하고 관심을 촉구했는데 그의 관심은 시조 뿐 아니라 넓고 깊었습니다.
1927년 6월 23일자 3면 ‘아관중국문학(我觀中國文學)’ 제1회(전 4회)
1929년 1월 13일자 3면 10년간의 조선시단 총람 제1회(전 7회)
1929년 5월 27일자 3면 ‘여류음악가’(이상범 화) 전 9회
1929년 10월 1일자 4면 사상(史上)의 로만쓰, 3국시대편 대야성(大耶城)을 사수한 죽죽(竹竹) 제1회
이은상 선생은 1929년 10월 1일자 4면 사상(史上)의 로만쓰, 3국시대 편 대야성(大耶城)을 사수한 죽죽(竹竹) 제1회로 시작해 이후, 도미(都彌)와 그 아내, 백결(百結) 선생, 이차돈, 고려 태조와 류(柳)씨, 포은 정몽주 선생의 순절, 함흥차사(咸興差使), 소년 성삼문, 효령대군, 토정비결의 토정(土亭) 선생, 어사 박문수, 황산전야(黃山戰野)의 두 인물 계백(階伯)과 관창(官昌), 연산사화(燕山士禍)의 한 삽화(一揷話), 서산대사, 솔거, 김유신, 온달(溫達)과 공주, 도선국사(道詵國師), 이태조(李太祖)의 소시(少時) 삽화 등등 조선의 역사를 장기간 연재했습니다.
“노산은 1918년 16살 때, 영남 교육계의 선구자요 신앙이 깊은 아버지가 세운 마산 사립 창신학교 고등과를 마쳤다. 학교에는 안 나오고 뒷산 노비산에서 주로 지냈다. 그래서 뒷날 아호를 ‘노산’으로 하게 된다. 성경과 한문은 99점도 없이 언제나 100점이었으나 다른 과목은 깜깜했다. 교주의 아들이고 천재라 밀어내기로 졸업한 것이다. 1923년 21살 때 연희 전문 문과에 다니는데 유찬식, 이선근 등이 영어하는 것을 보고 콘사이스를 첫 페이지부터 외어버렸다. 1925년 4월, 23살 때부터 1927년 3월까지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부에서 청강했다. 1927년 8월, 25살 때부터 1928년 5월까지 도쿄(東京) 동양문고에서 국문학을 연구했다. 그 무렵, 유학 친구들이 모여 술자리라도 벌이면 ‘외기겨룸’도 했는데 노산이 100개를 넘겨 90개를 넘긴 무애 양주동(梁株東) 보다 앞섰다는 한동아리였던 안용백 씨 회고담이다. 1928년에 돌아와 6월부터 계명 구락부에서 조선어 사전 편집 위원으로 일하다가, 1929년 10월, 27살 때 월간 잡지 ‘신생’의 편집장이 되었다. 1931년 29살 때, 4월부터 이화여자 전문학교 문과 교수로 있다가 만 1년 만에 그만두었다. 노산은 단연코 민족시인의 으뜸이거니와 특히 그만의 두 줄 시조는 새로운 형식을 생각해 낸 창작이다. 그 첫 작품이 이 해 10월 20일에 나왔다. 1932년 30살 때 4월부터 동아일보사 기자가 되면서 언론계에 진출하고, 월간 잡지 ‘신가정’을 창간하여 1935년 5월까지 편집했다. 그 해 6월, 33살 때부터 조선일보사 편집국 고문과 출판국 주간이 되어 1938년까지 지내는데 그때가 일본이 ‘노구교(蘆溝橋)사건’을 꾸며서 중일 전쟁을 일으켜 한창 중국 땅을 먹어 들어가고 있을 때라 우리가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처지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노산도 35살 한창 때를 울분 속에 지냈다. 1937년 7월 28일에 길 잃은 깊은 산속을 헤매는 양 시조 한 수(풋내기 어린 나무 저라사 우줄대도 숨기신 깊은 뜻이야 나 아니고 누가 알랴 다람쥐 줄을 태우며 교만스레 누웠다)가 그 때의 심정을 나타낸다. 1938년 여름, 그들은 우리 문학자들을 들들 볶아서 붓끝을 자기들 붙좇는 쪽으로 돌리려고 총독부에서 우리 문학자와 일본 문학자들을 합쳐서 ‘조선문인협회’를 조직했다. 노산이 신문 만들어지는 꼴이 보기 싫어 신문사를 물러난 36살 때다. 문인협회에 들기 싫어 문필생활을 아니 하겠다고 선언했다. 붓을 꺾어 버리고 장삿길로 나가겠다는 사람더러 문인협회니 뭐니 하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겠기 때문이었다. 노산은 그 길로 서울을 떠나 부산 어느 친구의 상회에 가서 점원 노릇으로 소일했다. 그러나 감상에만 젖어 있을 수가 없었다. 뒤쫓는 마수가 달려드는 것만 같다. 광양 백운산에 있는 금광 주인이 친한 사람이라 그 곳에 가서 심심풀이로 날을 보내기로 했다. 산 첩첩, 물 겹겹 백운산으로 들어간다. 그 날이 1939년 10월 23일.(예서부턴 집도 없고 인적도 끊어지고 다만 하늘과 나와 송림과 산새들과 오르고 내리고 또 오르고 백운산으로 가네) 백운산으로 간 그 때부터 노산의 또 하나 인생 ‘이보달 시대’가 시작된다. 노산은 이름을 숨기기 위해 ‘이보달’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이름을 그렇게 고친 까닭은 첫째로 ‘보따리’란 뜻을 가진 나그네 심정을 곁들인 이름이오, 둘째는 진짜로 촌사람 이름같이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이오, 셋째는 ‘관세음보살이 보달락가산에 거한다’는 불경 구절을 생각하고, 글자는 다를망정 음은 같기 때문에 가슴 속에 항상 관세음보살이 거하라는 생각에서 이름을 그같이 지었고, 그래서 그 고을 사람들은 노산이 ‘이보달’이란 사람으로만 알았다. 총독부의 어떤 일본 고관이 ‘노산은 단군 모자를 쓰고, 세종 두루마기를 입고, 이 순신 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로 주관이 투철하고 뚜렷했던 터라 어찌 나라를 사랑하고, 글을 읽고, 글을 짓고, 글을 사랑하는 버릇이야 하루아침에 버릴 수가 있을 것이랴. 서울에 있는 친일 문학자들 속에 같이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붓을 꺾어 버린 사람으로 내세웠던 것이지마는 백운산 속에 와서야 본색을 버릴 필요도 없었고 또 버려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미 써 놓았던 묘향산 기행, 한라산 기행, 설악산 기행, 지리산 기행들 묵은 원고들을 수정도 하고 보태기도 하는 것으로 날을 보냈다. 밖으로는 이보달이 광산에서 사무 보는 사람으로 행세를 하고 속으로는 노산으로 돌아와 글을 다시 다듬는 일을 했고 또 거기서도 시조 창작조차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한 군데에만 오래 있으면 본색이 드러나기 쉬우므로 잠방이로 농부차림을 하고, 갈대밭에 나가기도 했다. 하루는 천만뜻밖에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한뫼(환산) 이윤재 스승의 편지였다. 서울의 노산 본집에 가서 주소를 알아 가지고 편지를 쓴 것이다. 사전편찬을 해 주기로 하고 영창서관에서 원고료를 미리 가져다 썼는데 원고를 넘겨주지 못하니까 ‘노산의 글만을 모은 신문발췌첩’이나마 넘겨 달라고 하기에 넘겨주었으니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일제 때 노산 자신도 나온지를 몰랐던 ‘노산 문선’이란 책이다. 노산은 쾌히 승낙한다는 답장을 보냈었다. 그것은 지리한 나날에서 하나의 변화이기는 하였으나 이보달인 노산과는 상관없는 딴 세상의 환상 같기도 했다. 이르바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졌다. 1942년 10월 1일, 서울에 있는 한글학회 선배, 동지들이 모두 붙잡혀 갔다. 노산은 시골 백운산 백운암에서 그 같은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사흘 뒤인 초나흗날 아침, 광양 경찰서 유도 경찰을 앞세우고 함경도 형사 셋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네가 여기 숨어 있는 줄을 모르고 우리가 두 달이나 찾고 다녔다.’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고는 아무런 내용도 말하는 것 없이 그동안 찾고 다닌 것이 분하다면서 발길로 두어 번 차고는 쇠고랑을 채우는 것이었다. 한뫼의 가택수색 끝에 노산의 답장을 보고 주소를 알아가지고 광양까지 내려왔던 모양이었다. 이보달 시대가 여기서 끝난다.(정재도 한글학자, ‘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 편-하’, 한국언론인회, 1992년, 296~304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