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제국대학 출신의 선구적 연극인
서항석(徐恒錫, 1900~1985)
1929. 4. 동아일보 정치부, 학예부 기자, 학예부장, 1938. 9. 퇴사
‘우리의 장래가 이 신문에 달렸다’
제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것은 1929년입니다. 제 나이 30살 때였습니다. 당시 저명한 실업가의 집에 방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무슨 일을 하느냐고 주인이 물어요. 한껏 폼을 재고 동아일보 기자라고 대답했더니 기자 같으면 방을 빌려드리기가 좀 곤란하대요. 깜짝 놀라서 왜 그렇습니까, 하니까 신문기자라는 것은 악덕 형사나 다름없다는 것이에요. 남의 비밀이나 캐고 소문이나 퍼뜨리고 하는 사람들인데 조심스러워서 어찌 한 지붕 밑에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런 기자가 아니라 동아일보에서 외국어 번역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무슨 학교를 나왔느냐고 묻더군요. 동경제국대학 독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니까 그런 학교를 나와 가지고 기자를 하느냐고 의아하게 쳐다보더군요. 3.1운동 직후에 나온 신문이니까 그 당시 우리 전 민족이 투쟁하고 나선 것으로 보아서 민족이 나왔겠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민중이었다가 나중에 그것이 민족으로 바뀌어진 데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일제 치하에서 처음부터 민족을 들고 나올 수 있었겠느냐는 점입니다. 민중이라는 말이 민족보다는 부드럽기 때문에 그렇게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한 가지는 나중에 민족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은 1923년 당시의 우리나라 사정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신간회(新幹會) 운동 등으로 민족의식이 더욱 고양되고 해서 그것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봐집니다. 제가 동경에 있을 때 동아일보 하면 그저 신뢰감을 가졌어요. 우리 민중운동, 민족운동은 그저 동아일보를 통해서 이뤄진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일반 학생들도 우리의 장래가 이 신문에 달려있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연극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 유학생들이 나와서 연극을 하고 강연회도 했다는 것이 우리 연극사 기록에도 나옵니다. 그 분(인촌 김성수)은 외모로 봐서는 대단히 얌전합니다. 그러나 그 분의 일에 대한 집착과 책임감은 타인이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만들어요. 세종로에 동아일보 사옥을 건축할 때 자신이 직접 와서 공사감독을 해요. 자기로서는 그런 것을 안 해도 될 것인데…. 그런가 하면 굉장히 순진하신 면도 지니고 계셨어요. 어느 날 집에 오셔서 스냅사진을 한 장 찍자는 거예요. 옛날 점잖은 것을 숭상할 때에 그런 식의 천진난만한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도 그 분의 한 일면이었어요. 나는 처음 보성학교에 다녔는데 4학년 때 일인 선생에 대한 배척운동을 벌였어요. 이때 교장은 최린 선생이었는데 우리가 자진퇴학원서를 냈거든요. 그런데 학교 당국은 ‘퇴함을 명함’이라는 방을 내걸었어요. 그래서 최린 선생 댁을 찾아갔어요. “우리가 자진해서 퇴학한다는 데 왜 그것을 수리하지 않고 퇴학을 명합니까? 우리들은 인제 퇴학을 당해서 다른 데도 갈수 없는데 이렇게 우리들의 길을 막을 작정입니까”하고 항의했더니 너희들 잘못은 없지만 학교 체면으로서는 할 수가 없으니 이해해달라고 하시면서 인촌 선생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에요. 아마 우리 문제로 상의하신 모양인데 인촌 선생께서 모두 받아 주신다고 하신 모양이에요. 소위 문제아들인데 인촌 선생은 모두 받아들였어요. 웬만한 교육자적 결심이 없으면 힘든 일이지요. 또 1929년경 몇몇 사람이 뜻을 모아 문화원을 하나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운영비를 염출할 방법이 없었어요. 인촌 선생을 뵙고 말씀 드렸더니 쾌히 응낙하시더군요. 그 일이 성사되진 못했지만 역시 젊은이의 뜻을 이해하신 인촌 선생의 일면이 나타난 것이지요. 처음 석 달 동안은 전액을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석 달 동안은 반액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어 2달인가를 못 주었어요. 그런데 사원들이 신문사는 우리가 지켜야하지 않겠는가, 해서 매일 출근했어요. 그런데 요새 신문사들이 기업처럼 돼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데에 너무 기울지 말고 나갔으면 합니다. 기자들도 동아일보에서 일하고 있다는, 단순히 직업이라는 생각 이상의 각오를 가지고 전통 있는 동아일보를 통해서 자기의 이상을 이뤄가도록 움직여 주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민족지로 키워온 사람들,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좌담회, 신동아 1980년 4월호 298~305쪽)
그는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1, 3등을 차지하자 8월 12일자 조간 4면 ‘손·남 양군 승전사(勝戰詞)’ 에서 ‘승전고 두리둥 치며 어깨 펴고 춤추자’ ‘3천리 자든 강산도 함께 깨어 울린다’ 고 노래했습니다.
동아일보 1936년 8월 12일자 조간 4면
지화자 조흘시고 이겻고나 이겻고나
형아 아으아 2천만 다나와서
승전고 두리둥치며 어깨젓고 춤추자
기정(基禎)아 승룡(昇龍)아 너이 보내고 죄든가슴
이아침 터저나니 한바탕 환호로다
3천리 자든 강산도 함께 깨어 울린다
동해물 백두산이 길러준 이피 이뼈
오늘사 뽐내보니 두려울것 전혀없다
세계도 우리억센줄 알앗은가 하노라
지화자 조흘시고 팔걷고 다나오라
빛나던 옛조선에 우리아니 그 자손가
이후엔 세계무대를 활개치며 가리라
“경안(서항석)은 이미 일본 동경제국대학 독문학부 출신의 신문기자이자 사회인으로서 다른 동인들의 선배였다. 학력, 연령 그리고 사회인의 자격으로서 한 걸음 앞서 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동아일보사가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또 동아일보사 시설을 빌어 ‘연극영화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 것도 경안이 그 자리에 있던 덕분이었으리라는 추측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39년 ‘극예술연구회’가 일경에 의해 해산 당할 때까지 실질적인 극단대표로서 연극운동을 지속시켜 나온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가 경안을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연극계 원로’로 떠받드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차범석 극작가, 예술원 회원, 한국언론인물사화, 한국언론인회, 1992년)
그는 동아일보를 통해 서구 문학과 연극을 대중에게 전했고 동아일보는 기꺼이 그의 활동 무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1931년 10월 28일자 서거한 A·슈니출레르 오국(墺國, 오스트리아) 문호, 그의 경력과 작품을 소개함(전 4회)
1932년 3월 22일자 독일의 세계적 시성(詩聖) 괴테의 경력과 작품, 그의 사후(死後) 100년제를 제(際)하야(12회 연재)
1933년 2월 1일자 우정(友情, 원명 유아나) 전 8회
1934년 1월 1일자 세계 문단 회고와 전망(전 11회)
1934년 4월 13일자 나치스에게 추방된 낙백(落魄)의 문인학자, 그들은 어데서 무엇을 하나?(전 5회)
1934년 5월 17일자 나치스 독일의 문학아카데미위원을 중심으로(전 5회)
1936년 7월 16일자 괴테가 살인자라면, 의문에 쌓인 쉴러와의 관계(전 4회)
1939년 6월 25알자 석간 5면
본사가 공모한 영화소설 현상모집에 당선된 ‘애련송(愛戀頌)’을 본사의 후원으로 영화로 제작 완성했다는 내용입니다.
1939년 6월 30일자
1940년 5월 12일자 신연극 20년의 소장(消長)
고형곤, ‘동우’, ‘구우회고실’, 1964년 5월호 7쪽
그 다음엔 서항석씨의 지각. 나는 예나지금이나 시간관념이 희박해서 강의에도 지각, 약속에도 지각, 국회에도 지각하기로 마련이지만 젊은 시절에도 그 버릇이 그 버릇! 내가 헐레벌떡 헐레벌떡 2층 편집국에 뛰어올라갔을 때는 출근부는 이미 영업국 서무과장 책상에로 내려간 때이다. 원래 신문사 시간이란 원고마감시간의 긴한 것이요 아침 열시에 출근하고 않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닌 것만도 그때 서무과장으로 계시던 석강 김철중 씨의 출근시간 여행(勵行)은 이마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각은 지각이로되 정확한 지각-예나 지금이나 15분 지각하기로 마련이다. 매일매일 내가 서무과장 책상에 가서 미안한 양 도장을 찍고 서무과실을 나오량이면 번번이 그때서야 서항석씨가 들어서게 된다.
서항석, ‘동우’, ‘구우회고실’, 1964년 8월호 9쪽
사내에서는 노산(이은상) 청전(이상범) 여심(주요섭) 제우(諸友)와 자별하여 편집시간 끝나기가 바쁘게 곧잘 어울려서 다방에 나가곤 하였다. 그 무렵 서울 전역에 다방이라곤 두, 세 군데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단골로 다니는 데는 부청 앞에서 소공동으로 빠지는 초입에 자리 잡은 낙랑다방이었다. 그 다방은 이순석 화백이 취미로, 여급도 안두고, 손수 운영하는 곳으로서, 하나의 멋으로 바닥에 톱밥을 깔았는데, 어느 날 내가 느닷없이 “여기다 병아리를 키웠으면 좋겠네” 했더니
여심-병아리? 휘저어 놓을 걸!
청전-그러면 큰 닭을 쳐
노산-큰 닭은 더 휘젔지
청전-아냐, 닭도 큰 놈은 점잖을거야.
일동폭소.
이런 식의 해학 섞은 담소로 시여(時餘)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 거의 일과였다. 그런데, 젊은 우리들이 몰려다니는 다방이라는 데가 대체 어떤 곳인가 하고 고하 선생은 부청 앞을 지날 때마다 눈여겨 살폈던 모양이다. 부청 앞에는 주유소가 하나 있었고 거기에는 이른바 ‘개솔린 껄’이 있었다. 어느 날 고하 선생은 우리들더러 “제군들이 잘 가는 거기에는 여자도 있두만”하시면서 좀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다. 주유소를 다방으로 아신 모양이니, 지금으로 보면 격세의 감이 있는 옛이야기다.
1982년 9월 11일자 7면
원로 연극인 서항석 옹 인터뷰, ‘친일인사 분수 알아야’
일본이 걸어온 길 되새겨
다신 굴욕 없게 대처를
일장기말소 때 ‘孫·南 양군 축전사’ 썼던 일 못 잊어
“일제의 악랄한 행동은 오늘에 와서까지 한국 사람을 죽인 셈이라 할수 있어요.”
원로연극인 서항석 옹(82)은 지난 1일 관동대지진 59주년을 맞아 그 당시 희생된 한인위령추모강연회에 연사로 나왔다가 졸도, 사망한 강석천 옹의 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노인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60년 전의 일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강연에 나설 수 있었던 분이 그토록 갑작스럽게 쓰러졌겠느냐”면서 서 옹은 극도로 울분이 치밀었기 때문에 당한 변으로 봐야한다고 했다.
우리는 영원한 한국인
-요즘 대일감정이 극도로 나빠진 가운데 독립기념관을 짓기로 했는데….
“때가 늦은 감은 있지만 국민적 자각을 바탕으로 우리의 독립기념관을 세운다는 건 매우 뜻있는 일이지요. 일본과 일본 사람들이 걸어온 길도 보다 더 잘 알아 다시는 우리가 굴욕을 당하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도 더욱 중요하고…”
이말 끝에 그는 ‘터키모자’라는 한 프랑스소설 이야기를 꺼냈다.
빈 몸으로 파리에 살러갔던 터키 청년이 미모의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살면서 자신도 파리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다가 부부싸움 끝에 자신의 정체를 새삼 깨닫고 헤어졌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 이 청년이 터키를 떠나올 때 가져온 옷가방 속에 쳐박혀 있던 터키모자를 꺼내 쓰고는 “그렇지. 나는 터키인이야”하고 여인에게서 떠나갔다는 것.
재일동포에 뿌리 강조
서 옹은 지난 63년 재일교포 위문강연을 갔을 때 “편의상 일본에 귀화를 한 사람일지라도 한국인은 절대로 일본인이 될 수가 없다”는 점을 가는 곳마다 강조했었다고. 민족은 영원한 것이고 우리 한민족은 언제고 한민족으로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는 것.
-최근 들어 이른바 친일에 대한 비판이 다시 일곤 하는데….
“나 자신은 대학(동경대 독문학과)을 졸업하면서부터 기자생활을 하고 연극 관계 일을 한다고 하면서 적극적인 항일활동은 못한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때 살아가던 일을 생각하면 꼭 벼랑 위를 걷는 것 같았지. 친일로 몰린 사람들도 벼랑에서 떨어졌다고 할까, 그렇게 동정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때의 행적이 말썽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중요한 공직에 앉거나 민족적 대의명분이 있는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마땅치 않아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정간 당할 때도 동아일보에서 일하셨는데….
“신문사에 있으면서 연극 관계 활동에 많이 관여했는데 그때는 학예부장으로 있을 때였어요. 우리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올림픽 승전보가 날아들었을 때 내가 그때의 감격어린 승리를 축하하는 시를 신문에 직접 썼던 일이 지금도 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사를 쓰고 글을 쓴다는 건 모험처럼 힘든 일이었지. ‘孫·南양군 축전사(祝戰詞)’라는 4연으로 된 시가 신문에 나간 후 며칠 안 있다 일장기 말소사건이 있었지만…”
연극 소형화 찬성 못해
-평생을 줄곧 연극에 깊이 몰두해오셨는데 요 몇 년 사이 연극이 활기를 띠는데 대해서….
“공연이 많다고 활기를 띠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소극장활동이 많은데 장소만이 아니고 내용까지 소형화해선 안돼요. 현대연극이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바탕위에서 발전해 가야 해요. 그렇지 않고 단순한 명맥 유지나 외국 것을 흉내 내는 일에 그쳐선 그러지 않아도 재중에게 외면당하는 궁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거야…”
서 옹은 사회적인 관심과 이해 속에서 본격적인 연극이 활성화되면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재력과 영향력을 겸비한 언론기관 등에서 하나의 뜻있는 사업으로서 이끌어주고 뒷받침해줄 필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김봉호 기자)
“서항석은 1900년 3월 18일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咸鏡南道 洪原郡 龍源面 中湖里 136)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명석한 두뇌와 번득이는 재질로 신동이라고까지 칭송을 받으며 소년기를 보낸 서항석은 29년 3월 31일 일본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독문과를 졸업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모든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지식 청년의 본보기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따라서 아직도 봉건제도의 잔재와 무대예술에 대한 인식의 열악성이 뿌리 깊었던 환경 속에서 서항석 같은 지식인이 연극계에 뛰어들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이변이자 이단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일본 동경제국대학이라면 일본의 최고지성들이 모이는 상아탑이다. 그리고 함경도 변방이기는 하나 대지주이자 세도가의 집안에서 자라난 서항석이 하필이면 연극계에 뛰어들었으니 어찌 이단이 아니며 이변이 아니었겠는가. 내가 경안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49년 여름이었다. 제1회 전국 남녀대학 연극경연대회를 앞두고 각 대학연극부 대표들이 회의를 가진 날이었다. 서항석의 첫인상은 체구가 오척단신이기는 하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올백머리와 혈색이 좋은 동안의 용모는 어딘지 귀티가 느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목이 약간 짧은데다가 어깨가 퍼지고 날카로운 눈초리에는 핏발이 서 있어서 어딘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 하는 예리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어딘지 가까이 할 수 없는 어떤 위엄과 권위 같은 것이라고 나는 직감하였다. ‘어느 학교지?’ 경안 선생이 나에게 물었다. ‘연희대학교 학생입니다’ ‘이번 연극의 레퍼토리는?’ ‘소포클리스의 오이디푸스 왕입니다’ ‘희랍 비극을?’ 경안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눈빛에 금세 놀라움과 대견함이 곁들여진 빛깔이 감돌았다. ‘그렇지! 학생극은 실험정신이 생명이니만큼 희랍비극은 한번 해 볼만도 하지. 학생들은 기성연극을 흉내 내서는 안 되네! 신파연극 꽁무니를 따라다니지 말라구! 알았어?’ 나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참뜻을 알게 된 것은 훨씬 세월이 흘러간 뒷일이었다. 공식적이건 사적이건 내가 경안의 인생관, 예술관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값진 수양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유치진(柳致眞), 박진(朴珍) 그리고 오영진(吳泳鎭), 이른바 ‘연극계의 3진’이 한해 사이에 세상을 뜨자 경안은 어쩌면 연극계의 외로운 봉우리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안의 담담하고도 깔끔하고 의젓한 모습은 이른바 작은 거인이라는 칭호에 걸 맞는 연극계의 어른으로 남게 되었다. 경안은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명문의 가문과 대학에서 장성하는 동안 그 5척 단구의 작은 체구 속에 꽉 들어찬 것은 자존심이다. 자존심은 결코 오만이 아니라 신념이다. 아집이 아니라 개성인 것이다.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도 흐트러짐 없이 항상 곱게 빗어 넘긴 그 은백의 올백머리는 바로 그의 자존심의 상징이다. 때로는 고집스럽고 유아독존의 전형 같이 보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독선적이고 완고하여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때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경안의 지론인 연극의 정도를 가는 길과 원칙론을 고수하려는 데서 일어난 충돌과 상극의 소리였다. 연극의 심사회의나 토론석상에서의 그는 처음에는 결코 겉으로 나서지 않은 소극성을 지녔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서 말문을 열게 되면 그것은 금세 열(熱)이 되고 불이 된다. 연극의 정도를 역설하거나 후배의 잘못을 지적할 때의 그 언성은 한 옥타브 높은 자리에서 쨍그랑 울려 퍼진다. 약간의 함경도 사투리가 풍기지만 정확하고 당찬 발음과 차근차근 조여드는 말투는 그의 자존심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를 않는다. 적당히 넘기거나 어물쩍 타협하는 그런 유연한 말투가 아니라 흑과 백을 혼동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논리가 앞서 있다. 그래서 그가 연극계 후배들로부터 본의 아니게 따낸 별명은 ‘족집게’이다. 경안의 예리한 판단력과 분석은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작품분석이나 연기 비평에서의 정확하고도 무자비한 논리성의 확연함은 바로 족집게의 구실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안에게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너무나 정확하고, 강직하고, 타협을 안 하는 데서 때로는 분란도 있었고 적수도 생겨난 것이다. 원만하게 둥글게 세상을 살아가는 측이 아니라 원리원칙과 정도를 가려는 인생관의 발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안은 욕심이 없고 낙천적 기질이라고 볼 수가 있다. 어떤 이권(利權)을 놓고 그것을 쟁탈하거나 모사를 한 적은 없다. 한때 중앙국립극장장 자리를 놓고 있었던 동랑 유치진과의 오랜 반목은 결코 이권에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생겨난 우정의 균열이라고 해서 결코 오진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맑은 물에는 고기가 안 논다는 속담처럼 경안의 주변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 고독한 사람의 것은 아니다. 나는 먼 훗날에 가서 그의 고독은 다름 아닌 이권을 찾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철새족들이 그려 놓고 간 그림이었을 뿐 경안 자신의 그림은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정확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살아나가기 힘든 면이 있다. 이른바 적당주의를 유지하면서 타협도 하고, 아첨도 하고, 모사도 해야 하는 풍토가 존재한다. 그런데 경안은 언제나 어디서나 원칙론을 내세우며, 고집스럽게 연극의 정도만을 주장하니 영악스러운 요즈음의 젊은이들이 그 그늘 아래 머물러 있으려고 하겠는가 말이다.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고 뭔가 받아내기에만 혈안이 된 젊은이들이 경안의 그 예리하고 분명한 연극관이나 인생관을 탐탁하게 느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경안과 중학 동기 동창인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은 어떤 글에서 말했다. ‘경안 선생은 인생을 너무 등한하게 살았다’고… 정말 그렇다. 문벌, 학벌이 좋다보니까 남들처럼 작품 발표에 급급하고, 출판에 열을 올리려는 기색은 없었다. 일에 있어서도 그러했듯이 자기를 구현하거나 과시하려는 면에서는 너무도 대범하고 등한한 삶을 살아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나는 경안의 그와 같은 풍모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교훈으로 삼고 싶다. 그것은 이를테면 ‘선비기질’이다. 탐하지 않고, 서둘지 않고, 여유 있게 처신하려는 표일(飄逸)의 경지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며 더 앞서가려고 바둥거리는 세속의 탁류 속에서 초연하게 살다간 한 선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연극계에서도 그렇다. 연극을 무슨 장사치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잔재주로 천재를 자처하는 현실 속에서 끈질기게 연극의 정도가 무엇인가를 고집하다 간 경안은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선배의 한사람이 아닐까? 점심때면 반드시 반주를 곁들이던 경안의 걸음걸이는 결코 빠르거나 가볍지가 않았다. 버스나 택시를 타려고 허둥대지도 않았다. 언제고 타고 갈 차는 오게 마련이라고 내게 웃으며 말하던 그 은발 홍안의 경안 서항석이 그리워지는 초가을이다. .” (차범석, 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편-하, 사단법인 한국언론인회, 1992년, 172~178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