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이스카우트를 만든 조철호(趙喆鎬, 1890∼1941) 선생
한국스카우트 연혁
1922.10.5. 조선소년군 경성 제1호대 발대(조철호 선생), 소년척후단 발대(정성채 선생)
1924.3. 소년척후단 조선 총연맹 결성(총재 이상재 선생) 전국적으로 78개 대 조직
조철호 선생
1913년 일본 육군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校)와 사관학교를 졸업, 용산병대(龍山兵隊)에 배속되었던 그는 독립군이 되기 위해 상해로 가다 신의주에서 체포돼 옥살이를 하고 오산학교 체육교사가 됐습니다.
오산학교 체육교사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교생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다 다시 옥고를 치루고 인촌 김성수 선생의 후의로 중앙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했습니다.
1922년 10월 5일 그는 중앙학교 구내에서 ‘조선소년군’을 창설했습니다.
동아일보는 1922년 10월 8일자 1면 사설에서 ‘조선소년군’에 큰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조선소년군의 조직, 강건한 정신 건장한 신체’
“라마(羅馬, 로마)의 흥(興)은 하(何)로써 흥하였으며 또 그 망(亡)은 하(何)로써 망하였는가. 금일의 일본은 하(何)로써 저와 같은 위대한 지위를 점령하게 되고 금일의 조선은 하(何)로써 이와 같은 가련(可憐)한 경우에 처하게 되었는가.…(중략)…중앙학교 교직에 재(在)하는 조철호 씨가 시(試)하여 조직한 조선소년군과 여(如)한 것은 확실히 그 가장 유력한 방법의 일(一)인 것을 각(覺)하노니…(후략)….”
동아일보 1922년 10월 8일자 1면 사설
‘조선소년군’을 만든 조철호 선생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소년군’, 청소년의 갈 바와 할 일을 역설했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1일자 6면
무용무기(無勇無氣), 먼저 용긔잇자(조철호 씨 담)
“남의 것을 빼앗자는 것이 아니라 몇 백년 동안이나 너른한 정신을 좀 차리고 뺏어가는 놈에게 큰 소리라도 하여 보는 용기를 기르자는 것이외다.”
1924 10월 6일자 4면
소년군(少年軍)에 관하여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빈약하고 곤란하다. 남의 나라의 급속한 발전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잠자는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일반 동포에게 절실히 바란다. 백년계(百年計)가 되는 사람 교육 문제 중 근본적인 소년군 문제에 이해와 원조를 바란다. 소년군은 훌륭한 사회 공인이 되는 것을 주안(主眼)으로 삼는다. 남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자는 것이다.”
1925년 1월 1일자 2면, 조선소년군((少年軍) 소년군대장 조철호
1925년 1월 28일자 1면, 소년군((少年軍)의 진의의(眞意義) 조철호 기고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조철호 선생은 중앙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가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학생들과 함께 검거됐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6월 15일자 5면, 중앙교 교사 조철호 씨 재검거
1926년 6월 19일자 1면, 6.10만세사건 속보, 중앙교(中央校) 19명 검사국에, 조철호 씨도
6.10만세사건으로 또다시 체포됐다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1927년 3월 5일 그는 북간도로 가 용정의 대성학교와 동흥중학교에서 후학들을 길렀습니다.
동아일보 1928년 9월 4일자 2면에는 “중국 길림 방면에 근거를 두고 널리 활동을 하여 오던 정의부(正義府) 혁명군의 제2대장 조철호는 조선 안과 연락을 취하고자 한 명의 부하를 대동하고 안동현으로 향하던 중 마적에 참살되었다더라”는 기사가 났으나 이는 곧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1928년 9월 6일자 2면은 참살된 사람은 ‘조철호’가 아니라 ‘장철호’ 라고 정정했습니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21일자 2면은 간도발 기사로 조철호 선생의 부인이 체포돼 취조를 받고 있는데 ‘필연코 조 씨의 어떤 운동’과 관련된 일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1928년 12월 21일자 2면
1929년 10월 30일자 7면에도 ‘조철호 검거, 회령( 會寧)에 호송, 석방하얏다가 다시 검거해, 모(某) 범안과 대질코저, 간도동흥중학(間島東興中學) 교원’이란 기사가 났습니다.
1931년 국내로 들어오다 일경에 붙잡힌 그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와 그 해 10월 동아일보사에 입사, 본격적인 보이스카우트 재건운동을 벌입니다.
1934년 5월 6일자 조간 6면, 어린이 운동의 역사, 1921년 부터 현재까지(상) 조철호
“용산병대(兵隊)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가하기 위해 군사기밀을 빼내어 상해 방면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신의주에 이르러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로 인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과거 사관학교 재학 당시 일본인 교관의 도움으로 악형은 면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그 뒤 오산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하였는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교생을 지도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다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는 김성수의 주선으로 중앙학교 체육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민족의 장래를 위해 청소년의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병식체조를 가르쳤다. 1922년에는 소년독립군의 배양에 뜻을 둔 조선소년군(지금의 대한소년단)을 창단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보이스카우트’의 효시로,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적 단결을 고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에는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 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뒤 북간도의 동흥중학교에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는데, 1931년 학교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때 김성수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온 뒤,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소년군의 총사령으로 취임하여 본격적인 보이스카우트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일제가 조선소년군을 일본 보이스카우트에 병합시키려 하자 대항하다가 결국 강제해산을 당하였으며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 후 1939년 보성전문학교에 체육 교수로 근무하였으나 그동안 여러 차례의 옥고로 인해 죽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에 유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유학중에 동기생인 지청천(池靑天)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맹약했다. 1917년 조선군 제20사단의 용산(龍山) 부대에 배속된 것을 기회로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피체되어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당할 뻔 했으나 일본인 고관의 비호로 죽음을 면하고 제대되었다. 퇴역 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학생들을 구 한국군 교련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오산학교의 체육교사로서 이승훈과 교장 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독립선언의 계획을 통고받고 2월 하순경부터 오산학교 중학부 학생들에게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이 기회에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해야 하므로 오산학교 생도는 시기의 도래를 기다리라”고 가르치고, 정주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3월 5일 만주로 망명했다가 봉천성(奉天省) 하마당역(下馬塘驛)에서 일제 헌병대에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서울 중앙학교(中央學校)의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구 한국군 교련방식에 의한 체육교련을 시키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1921년 5월 조선기독교 청년연합회(朝鮮基督敎靑年聯合會)의 창립에 서울지구 대표로 활약했다. 1922년 10월 5일에는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 Boy Scouts)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창설하여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면서 청소년들을 독립전쟁에 씩씩한 전사가 될 수 있는 민족간부로 육성하기 위하여 진력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에는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후원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동년 6월 26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