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송아 주요한(頌兒 朱耀翰)
일제강점기 수많은 문사(文士), 지사(志士)들의 집결지이자 활동무대가 동아일보였습니다. 출사(出仕)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뜻있고 재주 있는 이들이 뜻을 펼칠 곳으로 동아일보에 모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특히 문인이 많았습니다.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지은 송아 주요한(頌兒 朱耀翰) 역시 192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를 거쳐 학예부장과 편집국장을 지냈고, 논설위원으로도 활약했습니다.
김동인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기도 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비범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를 ‘기계같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기계의 능률적 의미와 기계의 무서운 이지적(理智的) 방면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한다. 기계는 옛날 사람이 10일에 하던 일을 1시간이면 다 한다. 요한 씨가 하는 일이 그렇다. 씨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책상에 산 같이 쌓인 것을 대할 때에 씨는 조금도 생각하기 위하여 머뭇거리는 일이 없고 얼른얼른 처리해 버린다. 씨의 두뇌는 그만치 명석하고 훈련되고 그의 신경과 근육도 쉴새없이 움직이는 기계와 같이 훈련된 모양이다. 씨는 무슨 일을 보면 곧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동시에 곧 실행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다. 씨의 재주, 해박한 지식, 그뿐 아니라 그 다방면의 지식이 다 웬만한 전문가에 지지 않을만큼 상당한히 깊은 것이다. 요한은 또한 시인이다. 창작력이 풍부하고 그뿐 아니라 어떤 곤란한 경우에라도 기책 묘안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이종수, ‘진보적 사상가 주요한 씨’, ‘삼천리’ 1932년 8월호, 14~15쪽)
1926년 4월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는 4월 23일자에 ‘논쟁과 질매(叱罵)’라는 문단시평(文壇時評)을 실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내용은 당시 문단의 마구잡이 비평을 비판하는 글로 ‘욕설과 비평은 다르다’는 지적이었습니다.
1926년 4월 23일자 3면
논쟁과 질매(叱罵)
타기만만(惰氣滿滿)하던 문단이 신년에 입(入)하면서 ‘계급문예’의 문제와 그에 상사(相似)한 제재로서 일장의 풍파를 연출하야 그 와중에 흡입된 자가 인수(人數)로나 출판물 수로나 불소(不少)한 수에 이르렀다. 이것은 물론 환영할만한 현상이다. 발달은 오직 활동에서 생기나니 정치가 그러하고 사상이 그러하고 과학이 그러하고 문예도 역시 그러하다.
일편(一便)의 논거만 항상 듣는 공중은 정당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경주자(競走者)가 없는 선수는 기록을 돌파하는 결기를 발휘하지 못한다. 실로 우리 문단에 필요한 것은 논사(論辭)이오 경쟁적 창작욕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논쟁을 환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논거(一論據)의 권위와 효력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정확한 것, 감정적이 아니오 이성적인 것, 대변(對便)이 인격을 존중하고 그의 논리에 경청하여 필요할 때는 자편(自便)의 패배를 승인함도 무방하다는 아량을 보일 때에 가장 힘있는 것이다.
논쟁에 제출된 사실과 인(引)이 부정확하거나 호상모순될 때는 물론 그 논쟁의 가치는 영(零)이어니와 가사(假思)정확한 예증과 합리적 입론(立論)을 가지고라도 그 태도에 감정적 편견적 인신공격적 분자가 섞일 때에는 때로 그 논리 전부의 건전을 의심케 되며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제3자로 하여금 불쾌를 감(感)케하여 그 논변의 권위를 타락시킨다.
불행히 아(我)문단상의 논쟁가 중의 일부에는 상기한 약점을 가진 이가 있다. 그들의 글을 보면 논리가 이분 질매(二分叱罵)가 팔분쯤 되는 때가 많다. 이것이 가장 졸(拙)한 쟁투법(爭鬪法)인 줄을 모를 리도 없을 터인데 지적투쟁에 있어서 냉정한 전투가 승리를 한다. 하필 지적(智的)뿐이랴. 포화로 상대하는 전선에서도 운동경기에서도 혹은 불과 팔씨름에서도 냉정한 두뇌가 저용(猪勇)을 이긴다. 에브라함 링컨의 변론의 최대 강점은 그가 적의 논거의 대부분을 시인하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작작한 여유가 있자 논적(論敵)의 인격을 존중하며 그 논리에 경청하려는 아량이 있자 질매나 중상은 논쟁이 아닌고로.(요한)
‘시인’이었던 그는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도 여러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1925년 12월 1일자 3면
강남의 가을
보슬보슬 아츰비가
개왓장을 물드리며
전선줄에 가마귀는
검은깃을 떨고있네
오동이 뼈안남엇스니
가을인가 하노라
가을하는 푸른끝에
울며가는 저기럭아
강남이 예라커늘
네어디를 차저간다
강남도 겨울이 드니
바다건너 가노라
1925년 12월 11일자 3면
시조(時調)
고요한 밤이러라
소리없는 밤이러라
고혼꿈은 장옷쓰고
님의자리 갈때러라
풀잎이 눈물머금고
긴 한밤을 새더라
님의 눈동자에
비치인 ‘크로스워드’
가로바도 세로바도
풀지못할 님의 ‘퍼즐’
풀다가 죽는한이라도
풀어볼가 하노라
1930년 4월 6일자 1면
십년사(十年詞)
십년을 자랐나니
무엇믿고 자랐는다
이천만 부형의
품속에서 자랐노라
앞으로 몇십년 두고두고
은혜갚아 보오리
수재들만 다닌다는 일본의 동경제일고보에 다니던 주요한은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춘원 이광수와 함께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중국 호강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인촌 김성수로부터 입사하라는 편지를 받고 동아일보에 들어왔습니다.
“1925년 여름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왔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화동에 있는 신문사를 구경하였고 두 달동안 양사골(지금의 종로6가) 최남선 씨 누님 댁에 유숙하면서 임시로 학예부 기자 노릇을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다시 남경으로 가서 동명학원 영어교사로 있었는데 이듬해 봄인가, 인촌 선생이 친필로 입사 권고의 편지를 보내왔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라고 하면 ‘무관의 제왕’일 뿐아니라 ‘지사(志士)의 영예’이던 시절인지라 부랴부랴 짐을 싸서 본국으로 돌아왔다. 춘원이 살던 집을 월세로 얻어 보금자리를 장만하고 4월 1일부터 화동 신문사로 출근하였다.”(주요한, ‘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4년 2월호, 11쪽)
당시 동아일보 학예부장 허영숙은 남편인 춘원을 통해 주요한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보고 간부회의에서 고집을 부려 끝내 자기 부원으로 끌어갔다고 합니다. 덕분에 사회부 기자의 기회를 놓친 주요한은 외근기자 못해본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고 합니다.
그가 신문사에 들어와 우선 놀란 것은 거의 하루 걸러 기사가 검열에 걸려 ‘삭제’ ‘압수’ 처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정간’은 ‘삭제’ ‘압수’가 쌓이고 쌓인 후에 큰 문제기사가 실렸을 때 당하는 일이었는데, 주요한이 관계되어 신문이 정간된 것이 두 번입니다.
1926년에는 3.1절 7주년을 맞아 국제농민회 본부에서 보내온 축전을 주요한이 번역,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정간처분을 받았습니다.
1926년 3월 5일자 2면
국제농민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본사를 통하여 전하는 글월
노서아에 있는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들에게 전하여 달라고 다음과 같은 글월이 재작 3일 본사에 도착되었다.
오늘 귀 국민의 제7회의 슬픈 기념일을 당하여 국제농민회 본부는 세계 40개국의 조직된 농민단체를 대표하여 가장 깊은 동지로의 동정을 농업국민인 조선동포에게 드리노라. 이 위대한 날에 기념은 영원히 조선의 농민에게 그들의 역사적인 국민적 의무를 일깨울 것을 믿으며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을지어다. 현재 재감(在監)한 여러 동지와 분투하는 여러 동지에게 형제적인 사랑의 문안을 드리노라.
3월 1일 ‘돔밥르롭, 보스네씨엔스키’
이어 1930년에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을 맞아 미국의 ‘네이션’지 주필 빌라스 씨가 보내온 ‘조선의 현상 하에 귀지의 사명은 중하다’라는 축시가 실렸는데 이 역시 주요한이 번역한 것으로, 이 글이 제3차 정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930년 4월 16일자 1면
외국 명사의 축사
본보 창간 10주년 기념
조선의 현상밑에 귀보(貴報)의 사명 중대
미국 급진적 주간지 ‘네순’ 주필 빌라즈 씨
동아일보 10주년 기념을 당하여 축하의 의를 표하는 것을 광영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네순’ 잡지를 대표하여 충심으로 축하의 의를 표합니다.
‘네순’ 주간이 1865년 창간 이래로 주장해 온 것은 소수 민족층의 자유, 각 인민의 생활양식의 자유, 여하한 곳으로부터 발생함을 물론하고 군국주의에 대한 항의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므로 귀지가 대표하는 사업에 대하여 우리가 절대의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두말할 일이 아닐 듯합니다.(중략)
조선의 현상 밑에서 귀 동아일보의 사명이 비상히 중대한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귀보가 곤란한 경우에 처해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이 곧 귀보로 하여금 꿋꿋하고, 비이기적이며, 공정하고, 결백하고, 사명을 위하여는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결심이 있게 하는 소이입니다. 만일 귀지가 이러한 정책으로 일관한다 하면 조선민족 및 그의 사명을 위하여 가장 힘있게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격언을 한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1831년에 나의 조부되시는 윌리암 로이든 가리슨 씨가 ‘리버레더’라는 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이 신문이 흑노해방에 다대한 공헌이 있는 것은 역사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 신문 창간호에 그는 이와 같은 말을 사용했습니다. ‘지성을 다한다…(중략)…일촌이라도 퇴각치 않는다…그리하여 초지(初志)를 관철한다’고. 그의 투쟁은 귀지의 투쟁보다도 더욱 참담했습니다. 그는 빈곤했었고 교육이 없었고 또 지지하는 공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절망적인 것 같은 사명은 32년의 분투로써 성공해서 그는 친안(親眼)으로 그 성공을 보았습니다.
끝으로 귀보의 전도를 충심으로 축합니다. 앞으로 오는 10년에도 과거의 10년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사명을 위하여, 국제적 진정한 화평을 위하여, 전세계에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하여 분투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번역한 기사로 인해 신문이 정간돼 기자들과 종업원들이 실직상태가 되자 주요한은 죄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우울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정간을 당하면 월급은 반액밖에 못받게 되어 당장 생활에 지장이 있는 사원들도 많았지만 불평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번역을 한 나로서는 사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주요한 문집 ‘새벽Ⅰ’, 주요한기념사업회, 1982년, 51쪽)
동아일보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1927년 1월 5일자 간디의 메시지와 1929년 4월 2일자 타고르의 시 역시 주요한이 번역해 신문에 실은 것입니다.
1927년 1월 5일자 2면
‘조선(朝鮮)이 조선(朝鮮)의 것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를 통하여 조선민족에게
인도 간디 씨의 메세지
사랑하는 친구여
주신 편지는 받았나이다. 내가 보낼 유일한 부탁은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26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에서
엠 케 간디
1929년 4월 2일자 2면
‘빗나든 亞細亞 燈燭 켜지는 날에 東方의 빗’
◇동아일보 지상(紙上)을 통하여◇
타옹(翁)이 조선에 부탁
이번 가나다(加奈陀) 려행중 잠간 동경에 들린 인도시성(印度詩聖) ‘타고아’ 옹은 지난달 27일에 마츰 10년 전부터 일본에 망명중인 인도혁명가 ‘보-스’씨의 숙소를 왕방한 기자와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옹은 합장의 례로 흔연히 기자를 마저주어 한번 조선에 오지안켓느냐 하는 기자의 물음에 대하야
네 고마운 말슴입니다. 그러나 내일이면 횡빈(橫濱)을 떠날터인데요…돌아오는 길이라도 와 달라고요? 미국으로부터 오는 길도 아마 일본에 못들를 터이니 따라서 조선에도 갈수 없겠습니다. 내일 떠나기 전에 다시 만납시다.
하며 이튿날인 28일 오후 3시에 횡빈을 떠나는 ‘엠푸레스 오푸 에시야’호에 옹을 작별하러 간 기자에게 아래와 같은 간단한 의미의 멧세지를 써주며 동아일보를 통하야 조선민족에 전달하야 달라 하얏다.
朝鮮에 付託
일즉이 亞細亞의 黃金時期에
빗나든 燈燭의 하나인 朝鮮
그 등불 한번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비치되리라
1929.3.28 라빈드라낫 타고아
특히 타고르의 시는 그가 조선인에게 준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시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큽니다. 조용만 씨(전 고려대 명예교수)는 ‘경성야화’(도서출판창, 1992년)에서 “타고르의 넉줄의 시는 당시 우리 민족의 암담한 처지에 대한 하늘의 깨우침이라고 해서 우리들은 이 시를 읽고 몹시 흥분하였다”고 합니다.
1928년 10월 장제스(蔣介石)가 국민정부 수반에 취임하자 동아일보는 중국 사정에 밝은 주요한(당시 편집국장대리)을 난징에 특파하여 중국의 새 제도, 새 기운을 취재 보도케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장개석의 북벌군이 성공해서 남경에 국민정부가 수립된 까닭에 내게는 중국특파기자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현해탄을 넘어 일본 장기(長崎)에서 상해로 직행하는 코스를 택했다.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남경으로 직행하고, 다시 국민정부의 수뇌부라고 할만한 장개석, 호한민, 장계, 마옥상, 장지동, 엽초창 등과의 인터뷰를 연달아 전보로 보냈고 또 상해와 남경을 휩쓸고 있던 일본상품 배척운동 등을 서신으로 보도했는데 나중에 듣고보니 어느 정도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해서 나의 첫번이요 마지막인 외국 특파기자의 경험은 성공적이었다고 하겠다.”(주요한,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원, 1978년, 108쪽)
1928년 10월 16일자 1면
신흥 중국방문
기자 주요한 특파
동양문제의 초점이며 세계문제의 일대 난관이던 중국문제는 지금에야 완전히 해결되었다. 과거 신해혁명 이후 17년 간에 파란과 곡절이 부절(不絶)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겁운은 진(盡)하고 악몽은 소하였다. 이리하여 지난 10일을 기하여 국가의 근본법인 5권헌법이 발표된 시(時)에 명실상부한 국민정부가 성립되었다.…(중략)…이에 본사에서는 국민정부 정식성립의 벽두에 임하여 가장 중국 사정에 정통하고 지식이 풍윤한 본사 편집국장대리 주요한을 파견하여 중국을 방문케하는 동시에 현하 시설중에 있는 새 제도, 새 기운과 또는 그네들의 포부, 새 경륜을 본지 우에 소개 보도코저 한다. 우리는 만천하 독자와 함께 신흥중국의 지상(紙上) 전개를 고대하는 바이다.
1928년 11월 1일자 1면
중국 건설의 목표는
오직 삼민주의(三民主義)뿐
입법원장 호한민 씨와 회견
신흥(新興)에 급급한 남경시
본사특파원 주요한 발전(發電)
1928년 11월 8일자 1면
중국지(中國之) 혁명(1)
손중산(孫中山) 유저(遺著)
신중국의 현상과 장래는 본사 특파원 주요한이 제자(諸者)의 안전(眼前)에 전개되려니와 중국 혁명의 부(父)인 손중산이 자서(自敍)한 혁명 약사가 근저되었음을 기회로 이를 역출(譯出)하여 그 사상과 포부에 접코자 하는 바이다.(기자) (하략)
1928년 11월 16일자 1면
신(新) 중국 방문기(1) (1928년 12월 17일까지, 전 29회)
환태(換態)한 새 남경
옛을 아는 자 더욱 감개(感慨)
남경에서 주요한
10월 26일 신(新)수도에 도착
여장 풀새 없이 국혁일보 방문
조기(早起)와 낭망(狼忙)!
신흥국의 구호
장씨(張氏) 선봉으로
아편 절멸 운동
1928년 12월 20일자 1면
신중국의 해부(1) (1928년 12월 31일까지, 전 8회)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유훈(遺訓)
국민당과 국민정부
남경방문을 마치고
주요한
창생기에 있는 신중국의 독창적 정치조직과 급격히 장생하는 중국 사회의 구성을 극히 간명 또는 극히 평이하게 해설하기를 시험한 것이 이 글이다.(하략)
◇사진=본보 창간호에 기(奇)한 손중산(孫中山, 쑨원) 필적
1928년 12월 25일자 1면
신중국의 해부(4)
인류 이상의 집성, 민족주의에서 세계대동에
남경방문을 마치고
주요한(朱耀翰)
(전략)
손문의 삼민주의는 구미로 망명하여 다닐 때에 구미의 각종 정치적 운동을 관찰한 결과 그 조류를 삼대별하여 민족적 독립운동과 정치적 민주주의운동과 경제적 해방운동의 삼자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집성하여 민족, 민권(즉 데모크라씨), 민생(즉 쏘시알리즘)의 삼민주의로 통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분 부분은 결코 손문의 독창이 아니요 오직 삼자를 연환(連環)하여 하나를 만든 데 그의 독창이 표현된다. 그의 민족주의는 중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국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동시에 세계상의 각 민족의 평등을 성립케 하여 세계대동주의에까지 나아가자는 것이니 이것이 단순한 국가주의와 다른 점이다. 즉 ‘민족주의는 세계주의의 실행이요 세계주의는 민족주의의 이상이다.’(중략) 이와 같이 전인류의 유산인 최고 이상을 전부를 망라하여 집성한 데 손문의 위대가 있는 것이다.
1931년 만보산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시 논설위원으로 있던 주요한은 선동적으로 기사를 다루었던 다른 신문들과 달리 동아일보에 ‘냉정한 태도를 취하라’는 사설을 써서 일제의 한중 이간책을 은연중에 폭로하며 사태의 수습에 앞장섰습니다.
1931년 7월 5일자 1면
냉정한 태도를 취하라
만보산 사건에 대하여
만보산 충돌사건을 단순하게 중국인의 조선 농민 압박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생각이 깊지 못한 처사다. 좀더 냉정 침착하게 사태의 진상을 포착하고 그 이면에 잠재한 갖가지 미묘한 관계를 해석한 뒤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하물며 이 사건을 곡해하고 무고한 중국 재류민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의 일이랴.
백보를 양보하여 일의 비(非)가 중국측에 있다 하더라도 조선에 있는 중국인에게 보복적 폭행을 가하는 것은 민족적 금도(襟度, 남을 용납할만한 도량)의 결여를 폭로하는 것인 동시에 일방으로 사태를 더욱 분규케 하고 자타의 손실을 확대하는 것 뿐이다. 재외의 동포가 위난에 있다는 보도를 듣고 이를 염려하고 그들을 위하여 돕고자 하는 생각이 있음은 동포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나 그 방도를 잘못하고 그 목표를 어그러뜨린다 하면 본래의 목적을 달치 못할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아니하랴. 작금간에 인천과 경성 등 각지에서 생긴 불상사는 실로 통탄할 일이다. 동포 제위의 냉정하고 현명한 태도를 재촉코자 한다.(하략)
“논설위원으로 있는 동안 특기할 사건은 만보산사건이다. 이것은 만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일본 지주들과 중국인 지주들의 싸움인데 표면으로는 일본인의 소작인으로 있던 한국 농민과 중국 지주의 소작인인 중국 농민과의 충돌로 나타나서 우리 농민들이 중국 농민들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게재되어 퍼져나가자 국내에서 보복행동으로 중국인 점포 습격, 방화, 살인에까지 번져나게 되었다. 한글 신문들이 재만 동포의 권익문제라는 각도에서 크게 보도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보복 행동을 선도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의 진전을 살펴보면서 처음에는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데 의심을 품게 되었으나 여러 날 사태의 진전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일본경찰이 폭력행동 제지에 무관심한 것을 발견하고 이것이 계획적으로 한·중 두 민족의 이간정책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즉시 송사장에게 나의 견해를 설명하고 감정적인 기사 경향과 폭동 중지를 권고하는 사설 게재를 진언했다.
송 사장은 첫째로 동포애라든지 민족감정에 입각하여 반대 논설을 싣기를 주저했고 둘째는 잘못되면 신문사가 폭도들에게 습격 파괴될 것을 염려하여 좀처럼 승낙하지를 않았다. 그러나 장시간 토의한 끝에 신문의 운명을 걸고라도 일본측의 이간정책에 말려들지 않아야 할 것으로 결론짓고 국민들의 이성회복을 호소하는 사설을 이틀 연달아 게재했다. 그렇다고 이 사건이 일본측의 이간정책이라는 뜻을 노골적으로 표시할 수는 없었고 순전히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폭동을 자제할 것을 호소했던 것이다.
다행히 경향 각지의 지도층 인사들의 동아 사설의 참뜻을 알아내고 앞장서서 자숙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다. 뒤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만주지방에서는 중국 관리측과 일반 시민들이 한국 안에서 중국인에 대한 박해가 격심하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만주에 있는 한국인에 대해서 보복행동을 취할 형세에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우리 교포 지도자들이 동아일보 사설을 증거로 삼아 중국 당국자와 교섭한 결과로 참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한다. 또 일부에서 염려했던 동아일보 사옥 습격도 일어나지 않았었다.”(주요한,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원, 1978년, 116~118쪽)
주요한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시절, 광주학생사건 직후의 민중대회 발기인에 서명해 곤혹을 치렀습니다. 자유당 말기인 1959년에는 2월 4일자 경향신문 칼럼난 여적(餘滴)에 “선거가 다수의 뜻을 공정히 반영하지 아니한다면 위력 혁명도 가능하다”는 논지의 글을 써 또 한 번 곤혹을 치루고 경향신문은 발행정지됐다 4.19 후 복간됩니다. 그는 문학, 언론, 정관계에 두루 몸담았지만 언제나 언론에 향수를 가진, 그리고 신문을 사랑하고 신문에 기여한, 남다른 ‘언론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주요한의 동생 주요섭(朱耀燮)도 1931년 10월 입사해 ‘신동아’에 근무하다 잡지부장을 지냈습니다.
“29년에 들어서면서 편집국장 대리라는 직책을 맡았고, 얼마 후 국장으로 발령되었다. 당시는 이미 광화문 네거리 신축 사옥으로 이사한 뒤요, 편집국은 서북쪽 큰 방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큰 길에 면하였기 때문에 전차 소리가 요란하여 전화를 받는데 지장이 많았다. 기자들이 전화기를 들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소음을 조금이라도 피하려는 광경도 있었다. 편집을 끝내고 서대문 쪽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노라면 때마침 마포 족에서 불어오는 서풍에 모랜가 먼진가 날려 입안이 버적거리는 것이었다. 초창기의 일간신문은 이틀이 멀다 하고 발매금지, 압수처분을 당했고, 그때마다 배달원들이 뜰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만일 여러 날을 지나고 압수를 아니 당하면 편집이 무능하다고 욕을 먹게 된다. 11월 달에 들어서면서 서울에서 권동진, 한용운, 조병옥, 홍모 등이 주동이 되어 광주학생사건에 관한 민중대회를 열자는 계획이 있어 김 모 씨를 통해 나도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교섭해 왔다. 나는 이를 승낙하고 편집국장 사표를 써서 사장에게 전달한 후 모이라는 장소(안국동 네거리)로 갔으나 계획은 이미 경찰에 탄로되어 주동하는 분들이 검거된 후였다. 나는 직접 모의에 참여한 일이 없다고 해서 기소유예로 출감했다. 즉시 신문사에서 나를 복직시켜 주었으나, 국장 자리는 관청 관계로 어렵다 해서 논설위원이 되었다. 동아일보 재직 중에 일어난 중대 사건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면, 앞서 말한 광주학생사건 밖에도, ML당(공산당) 사건, 양명단사건(망우리 고개에서 우편차를 습격하여 송금되던 현금을 탈취한 독립당사건), 김상옥사건, 나석주 식산은행 습격사건… 등 항일운동에 관련된 큰 기사들이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대체로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한동안 게재 금지가 되는 수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신문은 1면에 특호활자로 ‘모모사건 게재금지’라는 제목만을 게재해서 독자들에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렸다. 내가 있는 동안 두 번 정간을 당했다. 1926년 제2차 정간은 3·1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글이 국제농민본부에서 온 것을 번역문과 함께 게재하였다고 당했는데, 그 전보를 내가 번역했기 때문에 무언가 책임감을 느꼈다. 그러나 감옥생활은 당시의 주필 송진우 씨와 발행인인 김철중 씨가 하게 되었다. 이런 무렵 동아가 간접적인 민족운동으로 추진한 사업들로는 (1)전국적인 문맹퇴치운동 (2)전국 수리조합 답사(이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농민 수탈에 의한 전쟁준비 음모를 폭로) (3)장진강 수전공사에 따른 토지 강제수용 반대 (4)충무공 유적 보전 (5)행주산성 권율 도원사 사당 중수, (6)단군성적(聖跡) 순례 등이 있었고 문화적 사업으로는 (1)전국 남녀학생 미술작품전시회 (2)빙상경기대회 (3)여자정구대회 (4)동아마라톤대회 (5)신춘현상문예모집 (6)하기 대학강좌 또는 하기 계몽운동 등이 있었고 신문지면은 8면으로 다시 조간 석간으로 발전되었다. 내가 선창한 사업으로는 조선어학회(현금의 한글학회)가 제정한 새 철자법을 처음으로 채택한 것과 지방판을 순 국문으로 편집한 것 등이다. 나의 이상으로는 점차적으로는 신문 전체를 한글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영업국의 반대로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32년 조선일보로 옮기게 된 사연은 이렇다. 광주학생사건으로 감옥에 갔던 조병옥 박사가 출옥한 후 신문을 경영하고자 해서 내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에 당시 경영난에 빠졌던 조선일보를 인계하게 되어 내가 편집 일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조만식 씨를 사장으로 모시고 방응모 씨를 영업국장으로 해서 시작했는데 방 씨의 재정 조달이 속히 되지 못해서 일시 중단되었다가 방 씨가 금광을 팔아서 아주 넘겨받게 되었다. 그 무렵의 자세한 이야기는 지면관계로 생략하거니와 결론적으로는 방 씨는 동향의 친구인 이광수를 편집총책임으로 모셔가는 한편 서울의 명사인 홍모(홍증식-인용자 주) 계통 사람들을 포섭했었다. 시골 사람으로서 서울에서 사업을 경영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홍모는 그 전부터 소위 화요회 계통 좌익인물이었고, 그와 같이 입사한 그의 아들과 몇몇 기자들도 그 조직에 속해 있어서, 이면으로는 방 씨를 이용해서 좌익의 근거를 잡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일파의 첫째 목표가 나를 밀어내자는 것이었다. 당시 편집차장으로 취임했던 김형원(석송) 씨가 내게 방 사장을 자주 만날 것을 권고했으나 나의 좁은 생각으로는 맡은 편집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나의 임무지, 자리다툼은 부질없는 일이라 했으나 결국은 모략에 걸려 물러나게 되었다. 책상머리에서 붓방아 찧는 기자생활이지마는 결국 너는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답하자면 역시 하나의 물거품 같은 ‘저널리스트’라고 자처할 수밖에 없는 듯도 하다. ‘저널리즘’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일까. 강은 영원하고 힘 있으나 그것을 구성하는 물방울들은 이름이 없다. 그러나 물이 없으면 강이 될 수도 없다. 물은 흘러 바다로 가나 강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여울과 폭포와 호수와 대하(大河)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물 위에 새긴 이름은 남을 까닭이 없다.”(‘언론비화 50편-원로기자들의 직필수기’, 한국신문연구원, 1978년, 107~120쪽 발췌)
“동아일보 관계 이래로 사의 간부들이 나에게 보여준 호의는 실제적으로 보통 이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학예부 기자로 개근 1년에 나는 남경 동명학원 영어교사로 꼭 와야 되겠다는 전화를 받고 부득이 다시 여장을 싸게 되었다. 사에서는 특히 남경 가서라도 기고할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 부탁에 대하여 일편의 극히 졸렬한 기행문을 보내었을 뿐이었으나 익춘(翌春)에 동명학원 일이 잘 안되어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 나를 사원으로 환영해 주었다. 그 뒤에 나는 또 월간 잡지 ‘동광(東光)’을 발간할 책임을 맡게 되었을 때 이 ‘부업’을 묵인해 주었다. 그것은 뒤에 알고 보니 사규에도 어그러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뒤에는 ‘동광’을 본업으로 하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위탁이란 직함을 달아 주었다. 조선 신문계의 편집국장이란 것은 일종의 사설검열관에 불과하다. 매일 매일의 ‘게라’쇄와 ‘대장’을 상열(詳閱)하여 불온문자가 혼입되지 아니하였는가를 보는 것이 그의 최중요한 직무다. 그러므로 그의 최대의 특권은 때때로 도서과 사무관에게 톡톡히 꾸지람을 듣는 것이다. 이 검열사무는 쉬운 듯하면서도 실로 어려운 일이다. ‘국어’를 ‘일어’라고 한자 잘못 썼기 때문에 압수를 당하여 백여 원의 손해를 영업국에 끼친 일도 있고 ‘횡설수설’ 두 줄 잘못 쓰고 논설 기자가 징역을 산일도 있다. ‘백방(白放)’이라고 하는 것이 ‘자살(自殺)’이라고 되어서 당자에게 야도를 당한 일도 있고 ‘첩의 집’에서 잤다는 것이 ‘첩의 ○’에서 잤다고 되어서 투서를 받은 일도 있다. 기타 부지기수다.”(주요한 문집- ‘새벽 Ⅰ’, 요한기념사업회, 1982년)
“우리 신문학 사상 자유시의 개척자일 뿐 아니라 이광수, 계광순과 함께 관서(關西) 3천재의 한사람이다. 일본의 최고 명문교인 제1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한국 학생으로서는 첫 번째였다. 술은 거의 들지 않았지만 담배는 일생을 두고 줄담배였다. 부인은 남편에게 담배를 끊으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겠느냐며 오히려 담배를 권했다고 한다. 그만큼 남편의 건강에 관심을 가진 부인도 아마 드물 것이다. 거의 일생을 두고 아침마다 참기름과 석청 그리고 계란노른자를 꼭 들게 했으며 뒤에는 들깨까지 먹게 했다. 송아 자신은 또 매일 끼니 때 마다 꼭 우유 한 컵씩을 잊지 않고 마셨다. 그리고 점심을 들고 나서는 30분 정도 낮잠을 자곤 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맹장수술 한번만으로 체중 45킬로의 건강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원래가 속필이어서 2백자 12장의 사설을 30분이면 써내곤 했으며 외부 청탁받은 원고도 단숨에 탈고, 마감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상해에 머무는 동안 도산에 심취해서 춘원에 이어 두 번째로 흥사단에 입단했다. 지금은 더러 눈에 띄기도 하지만 꽤 오래전부터 그의 집 대문에는 내외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있었다.”(‘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1992년, 179~186쪽 발췌, 강영수 전 대한일보 전무 겸 주필)
참으로 귀한 자료 입니다.
주요한의 발자취를 이토록 상세하게 기록한 글은 많지 않습니다.
이번 Connor의 방한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것입니다.
Comment by 주동설 — 2016/01/30 @ 9: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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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95 : 동아일보에 모인 문사(文士), 지사(志士)들 (1)주요한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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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인 논설위원 주요한(朱耀翰)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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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일보 불로그에 실린 문인 논설 위원 주요한/동네 를 잘 읽어 보고 저희 아버님에 관한 젊은 시절의 동아 일보에서의 활동을 감명깊이 읽었읍니다. 그후에 미국에서 낳고 자라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반듯이 전해야되겠다고 사려되어서, 전 문을 영어로 번역 했읍니다.
원하시면 우송해서 CD 로 보내드리겠읍니다. 그리고 저의 연락처는
Mrs. Rahn C. Kim 8006 Snowpine Way McLean, Virginia 22102-2420
Maiden Name: Chu, Tong-Rahn
E mail address: rahnkim@verizon.net
신이 씨께 감사드립니다. 주동란 드림
Comment by Rahn Chu Kim — 2017/10/01 @ 3:44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