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거사 직전의 이봉창(왼쪽), 윤봉길 의사의 모습입니다. 두 의사의 선서 사진을 상해의 외국 언론사에 돌린 사람은 당시 동아일보 상해특파원 신언준(申彦俊)이었습니다. 신 특파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체포 소식도 국내에 처음 알렸습니다.
“아버님(신언준 특파원)은 오산학교에서 공부하고 상해로 가서 중국의 중앙일보(영자지) 논설위원과 세계신문의 아주부장을 하다 독립운동가들의 추천으로 동아일보 특파원이 됐다. 상해 임정에 특파원을 둔 것은 동아일보 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상해·남경 특파원으로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일하셨다. 동아일보가 상해 임정에 특파원을 보냈다고 하면 난리를 칠 테니까 상해 남경 통신원으로 두었다가 특파원으로 임명했다. 김구 선생을 도왔다. 일본의 비밀자료를 찾아보니 ‘이봉창 의사 폭탄선서식 사진을 찍어서 돌린 자가 동아일보 신언준이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아버님은 홍군(모택동 군대)과 장개석 군대의 양쪽을 균형 있게 글을 쓴 사람이다. 만보산사건 때도 동아일보는 신 특파원을 보내 중국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이 사건이 한·중간 이간질을 노린 측면 있으니 말려들지 말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아버님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이 생활하다시피 했다. 임정 사무실, 도산 선생과 아버님의 거처가 거의 붙어 있었다고 한다. 고려대 도서관장 때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중인 ‘국외의 용의 조선인 명부’를 입수해 보니 ‘신언준 동아일보 특파원, 중국 군관학교 간부 훈련단 관계 용의자’로 돼있었다.” (신일철 전 고려대 교수, 2004년 8월 18일 면담)
신 교수가 말하는 ‘일본의 비밀자료’ 는 이 의사 의거 두 달여 뒤인 1932년 3월 12일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가 본국 외무성에 보고한 수사경과보고서입니다.
“이봉창의 사진이 한자지(漢字紙) ‘신보(申報)’와 영자지 ‘차이나 프레스’에 게재된 사건에 관해 조사해 본 결과 동아일보 상해특파원인 신언준이 이의 사진을 복사했다는 정보가 있는데다 신보 등의 내부에 절친한 친구들은 갖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필시 신(申)이 두 신문에 사진을 보낸 것으로 사료됨” (동아일보 1994년 12월 15일자 5면)
동아일보 상해특파원 신언준은 상해임시정부 요원과도 같았습니다.
그의 활약상이 돋보인 것은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전 해 발생한 1931년 7월의 만보산 사건 때였습니다.
만보산사건은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일어난 마찰에 만주 진출을 노리던 일제가 의도적으로 과잉 개입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사건으로 이 사건이 국내에 전해지자 민족 감정이 폭발, 평양의 94명을 비롯 중국인 사망자가 100명, 부상자 수백을 헤아렸고 조선인은 사망자 1명에 부상자 약간이었다고 발표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동아일보 1931년 7월 17일자).
사건이 발생하자 신언준 상해특파원은 ‘만보산 문제와 중국측 방침’이라는 전문을 본사에 보내 “만보산사건에 대하여 남경 국민정부 외교부가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국제연맹에 호소하여 정당한 해결을 도모하려고 한다”고 전한데 이어 임정 측의 입장도 국내 조선인들은 은인자중하여 보복적 행동과 같은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 일제의 간계에 부화뇌동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1931년 7월 6일자 2면
일본 정부에 항의
국제연맹에 호소【◇상해에서 특파원 신언준 발전】
만보산 문제와 중국측 방침
〔남경 본사 특파원 발전〕만보산사건에 대하여 남경 정부 외교부는 동북측의 상세한 보고를 기다리어 일본 정부에 항의를 제출할 터이라 한다. 중국 신문지의 여론은 일본인이 조선사람들을 이용하여 만주에 세력을 부식한다고 배일열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동북외교협회는 4일 선언을 발하여 국제련맹에 호소하야 정당한 해결을 도모하리라 한다.
在內의 동포는 은인자중하라
◇ 상해동포단체의 의견
〔남경 특전〕상해 재주 조선인의 각 단체의 의견은 이번 만보산 사건에 대하여 조선 내지의 동포들은 은인자중하야 보복적 행동과 같은 일은 될수있는대로 피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라 한다.
‘상해동포단체’는 상해임시정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총독부 당국의 검열을 피해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만보산사건의 본질을 파악한 신언준 특파원은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 정부와 언론계에 그 진상을 알렸습니다. 신 특파원은 남경 국민정부의 외교부장 왕정연(王正延)을 방문하여 일제의 한중 민족 이간 책동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임을 설득하고 중국 정부가 이주 한인들의 보호에 나서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왕 외교부장은 “중국과 조선 양 민족은 원래부터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으므로 서로 오해를 풀고 친선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며 “재만 한교(韓僑)는 특별히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신 특파원은 친분있는 중국 언론계 인사들과 기자들을 초청하여 만보산사건의 내막을 폭로함으로써 중국의 반한(反韓) 여론을 항일(抗日)로 바꿔 놓았습니다.
1931년 7월 7일자 2면
조선 농민과는 무관
문제는 商租權
장학량씨 훈전내용 【상해에서 특파원 신언준 발전】
만보산 분규의 귀결
〔상해특파원 발전〕북평(北平)에서 온 전보에 의하면 만보산사건에 관하야 장학량(張學良)은 장작상(張作相)에 대하여 사건을 확대케하지 말도록 훈전을 발하고 이번 사건은 다못 조선 농민 사이의 분규가 아니요 실은 동지 상조권에 관한 문제이므로 일본의 요구를 절대로 거절할 터이라 한다. 그리고 지방적 해결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중앙에 이관하여 교섭할 터이라 한다.
1931년 7월 15일자 2면
양 민족은 原無惡感
한교(韓僑)는 특별보호
본사특파원, 王외교부장과 회담
오해는 풀고 상호 친선에
〔상해특파원 13일 전보〕나(특파원 신언준)는 13일 외교부 출장소에서 왕(王) 외교부장을 회견하고 이번 사건에 대하여 그 내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바 왕씨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중국 조선 양 민족은 원래부터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이번 사건은 (中略) 우리 양 민족은 서로 오해를 풀고 친선관계를 유지해야만 되겠다. 그리하여 재만한교(조선인)에게는 특별한 보호를 하도록 하겠다.』
신언준은 상해특파원으로 활약하며 중국의 참된 모습을 조선의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신 특파원은 1931년부터 5년 동안 ‘동광(東光)’과 ‘신동아’ 등 잡지에 ‘수난 당하는 중국’ ‘중일 충돌은 장차 어떻게 발전될 것인가’ ‘수난기에 처해있는 중국의 전모’ ‘홍군의 형세와 그 분포’ ‘만주 문제와 중국의 대일정책’ ‘장개석의 파시스트 운동’ 등 10여 편의 의견 기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에 대한 야만적인 침략을 비판했습니다.
신언준 상해특파원은 신동아 1934년 5월호(119~121쪽) ‘특파기자 생활잡기(特派記者 生活雜記)’ 에서 ‘조선에도 신문이 있느냐’ 고 묻는 나라 없는 기자의 비애와 당시 특파원들의 생활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국제적 대도시 상해는 전 동양 내지 세계의 한 신경중추이외다. 루터-(英), 허바스(佛) 유낫이렏 ·뉴스 ·에펜시(米), 타스(露), 전통연합(일본) 등 전 세계 30개의 대통신사가 이곳에 모두 동양 총지사를 두었고 각국 신문사 특파원 및 통신원은 국민정부 외교부 정보국에 등록한 것만 해도 174명. 그중에는 통신원 1인이 수삼(數三)의 신문사를 대표한 자가 많습니다. 이 각국 신문기자들은 각 해당국의 정보기관과 연락을 가진 일종의 정치스파이이니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외교관 이상으로 풍족하외다. 자용자동차가 있고 부하 기자를 두고 혹은 국민정부기관의 중요인물을 매수하여 여러가지 정보를 얻습니다. 그들의 기사 한 줄 전보 한 장은 국제 외교를 좌우합니다. 최근의 일례를 들면 타스사 기자가 영국의 신○침략을 선전한 것과 영국 뉴욕타임스 기자가 불국(佛國)의 운남(雲南) 침략을 폭로한 것은 모두 국제 외교계에 중대 힌트를 준 것이외다.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약소 민족의 신문사 특파기자로 인도 3명, 인도차이나 1명, 필리핀 3명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이상의 각 대국의 반(半) 외교관적 기자와는 다르고 중국의 사정, 열국의 동양에 재(在)한 쟁탈전 등을 각기 자국에 보도하는 것이외다. 그 외에 그들의 중요임무는 자국의 정치 사회상 모든 진상을 국제적으로 소개하는 것이외다. 그런 사업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자국민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우리로서도 긴절( 緊切)한 필요를 느낍니다. 필자는 왕왕 외국인에게 명함을 주면 동아일보가 어데 신문이냐고 묻습니다. 조선 신문이라면 조선에도 신문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는 유야무야한 것을 국내의 동포는 아지 못할 것이외다. 각국 대신문사는 통신국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그 통신국에는 국장격으로 특파원 1명 외에 본사에서 파견한 조수격의 기자 및 당지에서 고빙한 기자가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통신국이나 런던타임스, 데일리 텔레그라프, 대조(大朝, 오사카아사히신문), 대매(大每, 오사카마이니찌신문), 호치(報知) 등 제사의 통신국의 조직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통신국은 특파원 하에 보통 4, 5명의 기자가 배속되어 있습니다. 이런 대신문사 특파원의 봉급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뉴욕타임스 특파원의 말을 들으면 매월 봉급 400불, 교통비 100불, 사교비 200불 약 700불을 받는다 합니다. 대조(大朝), 대매(大每)의 특파원도 봉급과 사교비를 합하여 매월 500원의 급료를 받습니다. 그 외에 본사에서 자동차, 통신국의 일절 비용을 담당합니다. 그들은 두 방면으로 딴 수입이 또 있습니다.
(4행 삭제당했음)
그리고 또 중국외교부에서 자국의 외교상 유리한 선전을 하기위하여 금전을 제공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국의 대신문사 특파원들만이 독점하는 이권이고 약소민족 특파원들은 꿈도 못 꿀 것이외다. 약소민족 특파원들은 자기 손으로 통신사를 설립하고 자국의 소식을 각국 통신기관 및 신문사에 제공하여 국제적으로 선전하는 동시에 일방면으로 본사에서 주는 박봉을 보충하야 그 생활을 유지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이제로부터 필자의 기년간 그 일에 종사한 경력을 약술하려 합니다. 특수한 처지에 있는 조선 신문의 기자인 만큼 남이 존재와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어느 외교 정치기관이든지 조선 신문의 보도가 자국의 아무 필요와 영향이 없다는 견지에서 조선 신문기자의 지위를 인정치 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외다. 이런 관계로 뉴스 채집에든지 사교상에든지 지대한 곤란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의 처지를 동정하고 이해하는 방면에 있어서는 대국신문기자는 얻지 못할 뉴스를 얻게 되고 탄백한 의견 교환으로 사건의 진상을 포착하게 됩니다. 대국 신문기자가 정치스파이인 것을 아는 중국의 정치 외교기관 및 당부는 그들에게는 무슨 소식이든지 꺼리므로 그들이 뉴스를 얻는 유일한 수단은 중국 신문 자국 공사관 및 영사관의 정보와 어떤 필요한 기관의 인물을 매수하는 것이외다. 조선 신문기자를 알아주는 방면에서는 중국 기자와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편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기밀과 여러 가지 중요한 뉴스를 얻는데 있어서는 대국 기자를 능가할 수 있습니다. 과거 중국 주재 기자 생활 중 필자 자신이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얐다고 자신(自信)된 것은 만보산사건 및 조선 각지에 재(在)한 중국인 배척 사건 당시에 있어 중국 정부나 민간 여론이 조선을 극단 질시하야 재류(在留)동포는 비상한 공포 중에 싸이게 되얐습니다. 그 때 필자는 당시 외교부장 왕정연(王正延)씨를 누차 회견하야 그 양해를 구하고 중국 각 신문사 및 관민 유력자들을 역방(歷訪)하야 그들의 이해를 구하야 그들의 동 사건에 대한 견해를 전환케 한 것이외다. 왕 외교부장에게 진언한 것은 국민정부 정치회의에 제공된 자료가 되고 각 신문 역방 유세의 결과로 각 신문의 논조를 일변케 한 것이외다. 그 다음 만주사변, 상해사변 때에 중국 신문들은 ‘조선군’이 출동하였다는 정보를 조선인 군대가 출동하였다고 조선인을 극단 악언하는 몰상식한 문자가 공개적으로 선전되어 중국인의 감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각 신문사를 역방하여 그 정보를 수정한 것도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기자생할 중 두 번 감금을 당하였던 필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남경서 국민회의가 개최되어 계엄이 심할 때 어떤 동포 5, 6명이 적화혐의로 남경위사령부에 체포 감금된 일이 있는데 그때 필자는 그들의 석방 운동차 사령부를 방문하고 동 사건에 대하여 피체 제인의 무죄를 주장한 일이 있었는데 그날 밤 여관에서 취침하려 할 때에 헌병 5, 6명이 달려드러 신체 수색을 하고 헌병사령부로 끌려갔습니다. 사령부에 가서 약간 조사를 하고 곧 석방할 줄 믿었던 터인데 의외에 불문곡직하고 위술사령부 감옥으로 인도하여 도야지 우리 같은 암흑굴속으로 잡아넣고 철문을 닫아버립니다. 아무리 항의하되 무장헌병은 폭력으로써 감금하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남경서는 공산당 혐의만 있으면 포살하는 백색공포시기였고 위술사령부라 하면 염라왕의 지부로 인정하던 때외다. 그곳에 한번 붙들려 들어가면 다시 세상에 나와 보지 못한다고 하던 곳이외다. 그러므로 공포심을 가지게 되얐습니다. 법률이 없는 그곳에서 아무 방침도 없고 더욱 야중(夜中)에 혼자 있다가 그리되어 누구든지 알지도 못하여 밖에서 교섭해줄 이도 없었습니다. 감금되어 있는 곳은 변소 이상으로 악취가 코를 찌르고 유명한 남경충은 총공격을 하여 들어붙습니다. 잠을 이룰수 없는 것은 물론, 기막히어 견딜수 없으므로 밤이 새도록 문을 두드리고 아우성치고 있었습니다. 최후수단으로 감수 뽀이에게 돈 5원을 주고 연필로 상해서 동행 입경한 외국기자 몇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전했습니다. 그 기자들은 외국기자를 무리 체포했다고 치외법권 철폐를 주장하는 그때가 때인만큼 모두 외교부사령부로 역방하여 사건의 진상을 묻게 되니 외교부는 부지(不知)중 공황을 일으키어 사령부에 전화하여 즉시 석방했습니다. 감금할 때에는 그렇게 모폭하던 감방 헌병대장도 일이 잘못되어 국제 문제까지 일으키게될 것을 알고는 그만 전거후공(前倨後恭)의 추태를 노출하면서 여러가지로 사죄를 하고, 나가서 좋게해달라고 천백번 부탁을 합니다. 그리하여 필자는 그런 일을 가지고 각국 신문의 기사거리를 만드는 것이 하등 이익의 필요가 없으므로 일소(一笑)로 부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은 북경서 왕조○ 풍옥상 제씨가 북경 정부를 수립했을 때인데 그때 북경 어느 여관에 유숙할 때에 헌병대에서 여관을 수사하다가 필자를 ‘장개석의 스파이’라고 힐난하고 헌병대본부로 불러 야단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안도산(安島山)이 있어 교섭해준 결과 무사했습니다. 또 한가지 평생에 잊히지않는 것은 상해사변이외다. 근대적 전쟁을 목도한 것은 물론 전쟁 중에 기자생활이 얼마나 어려울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일본 전신국은 일본 육군이 주둔하고 포탄이 ○○적중되던 터이고 더욱 남자로서는 일본군이 경비하고있는 전신국 구역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여러가지로 편리가 많고 남자 기자로서 못할 임무를 여자 기자는 할 수 있다는 체험을 얻었습니다. 휴전중 중국 기자들을 따라 강○전선 구경을 갔다가 목숨을 겨우 보전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소스름이 끼칩니다. 하오 2시경에 전쟁구역을 돌아 강○을 향했습니다. ○북시가로 들어간즉 옛날 번화하던 시가가 재와 흙이 쌓인 화산을 밟는것 같고 여기저기 길어있는 시체들은 이상한 악취를 방출합니다. 강○사령부에서 일동이 채정해(蔡廷楷) 장군을 면회하고 돌아오려할 때에 돌연 중포소리 일○! 천지가 아득아득하여 일행은 황급하야 전○속으로 잠복하였습니다. 포격을 이어 박격포 기관총 소창소리가 연발하며 1일간 휴전협정은 파열을 고하고 전투가 개시되었습니다. ○○같이 떨어지는 포탄우(雨) 속에 ○○지도를 따라 겨우 화선을 피해나왔습니다. 끝으로 중국 기자들의 생활을 소개하려합니다. 중국에는 매일 5천부 이상 팔리는 신문 수가 800여 사나 됩니다. 상해는 상업도시이지만 정치 외교의 중심지이므로 각사의 유력한 기자가 모두 상해에 주재합니다. 중국 기자의 월봉은 최하 50원 최고 300원이고 보통 대신문사의 정치 외교 뉴스를 담당하는 기자는 월봉 100원 이상이외다. 그들은 외지신문의 통신 혹은 원고로써 다른 수입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각 통신사를 경영하여 서로 뉴스를 교환합니다. 그러므로 기자의 보통 수입은 매월 평균 150원 이상이 보통이외다. 또 원고대(代)도 논문이든지 수필이든지 무엇이든지 매 1,000자 2원 이상 보통 3원은 받을 수 있고 소설이나 국제정치 논문같은 것은 4, 5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문필생활이 조선보다는 아직도 남이 숭앙하는 목표외다. 상해의 생활비가 동경보다는 훨씬 많이 들고 기자의 생활이 비랑(費浪)적이므로 150원의 수입이 아니고는 살수 없습니다. 기자단들이 경영하는 통신사는 통신뉴스 교환소인 동시에 뉴스 매매하는 일종 상점이외다. 누구든지 뉴스를 얻어가지고 통신에 가져다 팔면 매 천자 2원은 최저 정가외다. 이렇게 뉴스는 상품화되어 있습니다. 또 상해에 있는 외국신문 특파원이나 중국신문 특파원의 주요한 통신사무는 대개 장편의 시사논문을 기서(寄書)하는 것이 많고 일본신문의 특파원들만이 전보 통신을 겸행합니다. 외국신문은 전보 통신사에 일임하고 중요한 사건만을 특전으로 발(發)하고 장편의 논문으로 기서하는 일이 그들의 중요한 공작이외다.”
‘만보산사건’ 보도와 함께 신 특파원의 대표적 기사 중 하나가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과의 인터뷰입니다. 신 특파원은 평소 중국의 문호 노신을 존경했고 그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전역에 걸쳐 수배령이 떨어진 직후, 지하로 숨어버린 노신을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무렵 노신의 거처는 극비 보안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신 특파원은 노신의 비밀 거처를 알아내고 그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노신과의 서신 교환이 2차례 이어진 끝에 1933년 5월 22일 신 특파원은 마침내 노신을 만났습니다. 노신회견기는 신동아 1934년 4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신언준, 중국의 대문호 노신 방문기, 신동아 1934년 4월호, 150~152쪽
노신(魯迅) ― 중국이 낳은 ‘동양의 대문호!’ 그의 이름을 들은지 오래다. 그러나 면회해볼 기회는 없었다. 그의 글에서, 그의 소설에서 얻은 인상은 ‘냉혹한 사람’ 또는 ‘괴인물’인가 하였다. 마치 메스를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론 그 사람들은 모두가 환자) 마취약도 바르지 않고 그들의 환부를 해부하는 괴의생(怪醫生)같이 보였다. 그는 그렇게도 무정스럽고 괴돌하지만 그의 해부술은 예리하고 대담스럽고 이지에 밝은 것은 짐작하였다. 그의 해부는 냉혹 무정하지만 그의 메스의 예첨이 찌르는 곳은 아프면서도 통쾌를 느끼게 하느 것이라고 알았다. 이 괴인물에 늘 호기심을 가지고 한번 만나볼 소원을 품고 있던 필자는 주형(朱兄)의 부탁을 받아 5월 19일, 그를 중앙연구원으로 찾아갔다. 노신은 송경령, 채원배씨 등이 조직한 민권보장동맹의 위원으로 중앙연구원에 본부 사무국을 두고 이따금 그곳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채원배씨에게 그의 주소를 물으니 씨는 그에 대하여 국민정부에서 통집령이 내렸다고 하면서 그의 주소가 절대 비밀이라 한다. 그러나 필자를 믿고 채씨는 그 비밀주소를 알려준다. 그는 북사천로 ○○○호 어떤 일본 우인(友人)의 밀실을 빌어 망명생활을 하고있다 한다. 우선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그는 “숨어있어도 늘 횡화를 당할 위험이 있다”하면서 서면으로 할 말이나 요구할 것을 제시하라고 회신을 보냈다. 필자는 다시 비밀회견을 요청하여 겨우 그의 비밀주소에서 22일 면회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평소 한번 보려던 문호 노신을 만나보게 되었다.
청복폐리(靑服弊履)의 노농장속(老農裝束)
노신이 숨어 사는 집을 찾으니 주인되는 일본인 모씨 부부가 나와 안내한다. 노신 선생이 거처하는 이층으로 올라가니 하인같이 보이는 노인이 맞아준다. 그의 옷은 향촌 궁농들이 통상 입고 사는 청색 목면 바지저고리를 입고 헝겊으로 만든 신을 신었다. 순전한 향촌 노농인이다. 그 청의면의(靑衣棉衣)는 퇴색이 되었고 머리도 깎은 지가 오래되어서 그런지 습관이 그런지 귀밑을 덮게 자라고 먼지가 묻은 것 같고 산란하다. 수염도 깎지 않았다. 그는 몸 수식은 전혀 돌보지않는 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의 침상도 질소한 중국식이다. 덮는 이불과 장자(帳子)까지 모두 목면이다. 그가 쓰는 그릇까지도 중국 하층민의 생활 그대로이고 돈길 갈만한 값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생활은 전부가 프롤레타리아의 모형이다. 그는 입으로 붓으로만 무산계급을 부르짖지 않고 그의 몸, 그의 생활이 즉 무산계급과 같은 양식을 가지고 있다. 상해 각 서점에서 받는 저작권의 보수금만 해도 월 2천원이 되고 구미 각국에서 소설 역본에 대한 보수금이 월 3, 4천원은 된다는 중국 유일의 최고봉의 수입을 가진 작가로서 그의 일신 생활을 호화롭게 살기는 어렵지 않을 터인데 그의 생활은 향농의 생활이다. 그의 수입은 문화운동 단체에 전부 기부한다고 한다. 그의 거처하는 방은 침실, 객실 또는 연구실, 편집실, 음식짓는 주방까지도 겸용하는 모양이다. 침상 앞에 식탁이 놓이고 의자 7개가 둘러놓이고 그 다음에는 온 방안이 책으로 성을 둘렀다. 컴컴한 책성을 등지고 그는 나와 정면으로 대좌하였다. 조룩조룩 여윈 이마, 움푹 들어간 두 볼, 히끗히끗 반백이 남은 머리털은 파란중첩한 그의 반생을 그려놓았다. 그의 키는 5척도 못되는 적은 키다. 그의 수염은 한번 보고 곧 기억할만큼 중국 사람 중에는 보기 드문 다수(多鬚)자다. 그의 육체는 평범한 사람이다. 아무 특이한 무엇을 발견할 수 없다. 5척에 불과한 소구(小軀)가 대문호 노신이다!
나는 문사가 아니다
필자는 중국식 인사말로 그의 문재를 칭양하는 어조로 이야기를 붙였다. 그는 첫마디에 “나는 문재랄 것이 없다. 우연히 붓대를 들고 글을 써본 것이지 문사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문 선생은 어떻게 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까?
답 나는 18세 때에 중국 해군을 건설하여 보려는 마음으로 남경 수사학당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때 영미 각국이 해군을 가지고 중국을 침략하는 것을 보고 나의 청춘의 피는 해군열이 났습니다. 그러나 반년후 퇴학하여 광무학당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때 생각은 해군보다 우선 광산 개굴이 국가의 긴급한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졸업후 나는 인종부터 개량하여 강종(强種)을 만들어놓아야 강국이 된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가서 의학을 배웠습니다. 그때 나는 또 일본 유신이 의학에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2년후 어떤 활동사진에서 중국인이 정탐 노릇하다 총살되는 광경을 보고 신문학을 제창하여 정신적으로 중국을 부활케 하여야 되리라는 생각으로 의학을 버리고 문예를 연구하면서 소설을 써보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문 그러면 선생은 문학이 위대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그렇습니다. 대중을 환성함에 가장 필요한 기술이외다.
문 선생의 글쓰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답 나는 사실주의자입니다. 보는 그대로 듣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뿐입니다.
문 남들이 선생을 인도주의자라 하니 그렇습니까?
답 그러나 나는 톨스토이나 간디 같은 인도주의자는 절대 반대합니다. 나는 전투를 주장합니다.
문 중국 문단의 대표적 프롤레타리아 작가는 누구인가요?
답 정령(丁玲) 여사가 유일한 프롤레타리아 작가지요. 나는 소자산 계급의 출신이므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작품을 쓰지 못합니다. 나는 다만 좌익편의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는 보기와 딴판인 건담한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하는 태도는 어린아이들과 자근자근 속삭이는 천진미가 있다. 아주 무사기(無邪氣)하다. 나는 그의 천진스러운 말솜씨에 도취되어 그가 말하는 것을 필기하는 것도 잊었다. 나의 기억에 남은 것은 ‘아Q정전’ 중에 아Q란 인물 이야기다. 그는 아Q란 인물은 자기가 살던 고향 노진(魯鎭)에 있는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인데 사실 아Q는 중국인의 보통 상(像)일 뿐더러 중국인만이 아니고 어느 민족 중에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상이라고 설명하였다. ‘아Q정전’이 영 · 프 · 독 · 러 · 이 5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 문단에 환영을 받을 때에 중국 문인들은 중국을 모욕한 작품이라고 노신을 국적(國敵)이라고까지 하였다. 사실주의자 노신의 충실한 붓대는 냉정 무사한 필치로 중국인의 진상을 그대로 폭로하였다. 나는 한참동안 그의 잡담을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중국의 정국, 지식계급, 세계○○(세계혁명) 등을 통쾌하게 설파하였다. 내 기억에 남은 그의 말은 중국 지식계급의 무력을 통매한 것이다. 특히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정론가, 문인 등을 한참동안 매도하고 “장개석이가 중국 혁명을 영도하지 못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산계급 문인의 의식은 무용(無用)의 몽환이 되었다”고 자산계급 문인의 몰락을 설파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발흥을 역설하여 좌익 문호의 본색을 발로하였다.
필자는 그의 인생관, 세계관을 물었다.
“나는 인생이 길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한보 또 한보 전진하면서 교량을 놓고 길을 닦는 것이 인생의 일인가 합니다.”
약소민족의 해방은?
약소민족의 해방은? 하고 물음에 “세계○○(혁명)이 완성될 때라야 비로소 약소 민족도 해방될 줄 압니다.”
이야기는 파시즘 소비에트 러시아로까지 미쳤다. 그는 필자에게 조선 정형(情形)을 물었다. 조선의 글로 된 서적이 적어지고 조선의 문예 내지 전반 문화가 ○○(일본)화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그것이 결코 비관할 것이 아니다. 일본 글이건 러시아 글이건 아무 관계 없다. “나는 차라리 중국에서는 중국문이 없어지고 영어든지 불어든지 중국문보다 나은 글이 보급되기를 바란다”고 국수주의를 일축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나는 고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나더러 조선 문단의 어느 분이든지 자기가 지금 준비중인 ‘중국문단’이라는 간행물에 조선 문예의 역사적 기술 및 현세를 소개하여달라고 특별 부탁을 하였다. 문단의 유지 인사는 특히 일고(一稿)를 만들어 조선 문단을 소개하게 하기를 바란다. 조선문으로나 혹은 외국문으로나 무슨 문자로든지 관계없다. 필자에게 보내주면 전할 수 있다. 또 그는 단편 문장을 <신동아>에 투고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의 파쇼 암살단의 좌익 문사 암살음모가 폭로된 이래 그는 모처로 망명하여 있다. 필자는 문예에 대하여 문외한이다. 문예를 모르는 필자로 문호의 문예를 평론할 수는 없다. 다만 방문기로 그를 소개할 뿐이다. 독자여 용서하라.
대담의 마지막에서 노신은 ‘단편문장을 <신동아>에 투고하겠다’고 했으나 망명과 도피생활이 길어지면서 이 약속은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신 특파원은 안창호 선생이 체포당한 후에도 김구 선생을 도와 조선의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 간부훈련단에 입단시키는 교섭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발행, 고등경찰보 제4권 89쪽
‘군관학교 사건 진상’ 편 중 ‘의열단 및 군관학교 관계자 씨명’ 신언준(32세) –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미남리 상해 법계. 군관학교의 모집연락원으로 활동했다. (국회도서관 소장)
1938년 1월 21일자 2면
전 본사 특파원 신언준씨 별세
다년간 상해 남경 방면에서 본사 특파원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던 신언준(33)씨는 숙환으로 재작년에 조선에 돌아와 치료 중이던바 약석의 효(效)없어 20일 새벽 자택인 평남 평원군 숙천면 미남리 105번지에서 별세하였다. 씨는 대정 13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15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항주영문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오송국립정치대학과 동오대학 법률과를 마치었다. 그리고 지나신문 중앙일보 논설과원으로 봉직타가 2년 후에 상해 세계신문사 아주부장으로 취임하였다가 소화 4년(1929년)에 본사 남경특파원으로 취임하여 7년간 활동을 하였다.(사진은 고 신언준씨)
“그의 동아일보 특파원 생활은 약소국의 특파기자라는 불리한 처지임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중국 정계의 요인들, 안혜경(顔惠慶), 진우인(陳友仁), 왕총혜(王寵惠), 왕정정(王正廷)을 직접 인터뷰하거나, 1931년 5월의 국민회의나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주 중국 지도자 뉴란(牛蘭, Noulens) 재판을 직접 방청하여 현장감 있는 생생한 보도를 하였다…(중략)…신언준은 만주의 한국 교민 문제가 중국 측의 항일(抗日)적 국권(國權) 회수 운동과 일본의 만주 침략 사이에 맞물려 위험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어가는 상황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일방적인 반(反) 중국 행동 대신 중국과 한국의 민간 차원의 협의회를 결성하여 민간 차원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이요 가능성 있는 날카로운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중략)…신언준이 동아일보 특파원으로서 활동한 것은 1929년부터지만 이미 1926년부터 동아일보에 한국 문제 및 중국 문제에 관한 논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력적으로 중국 문제를 보도하고 논평한 것은 동아일보 특파기자가 된 다음부터 귀국 직전인 1935년까지의 6년 동안이다…(중략)…신언준은 중국공산당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반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분배보다 생산이 (중국이나 한국 같은 경제적 낙후 지역에서는) 더 시급한 문제이며 계급투쟁보다는 협동(협작)조합운동이 더 효과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공산당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국민당 · 공산당의 합작이 깨진 것도 오히려 코민테른의 일방적 지도를 받은 공산당 쪽에 책임이 더 많다고 보는 그는 민중운동을 강조하는 반공적 국민당 좌파(개조파)에 동정적이었다.” (‘신언준과 그의 중국 관계 논설에 대하여, 민두기 전 서울대 교수)
“은암 신언준(隱岩 申彦俊)은…(중략)…동아일보사 상해 및 남경 방면 특파원을 역임(29년), 소위 만보산사건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음모를 폭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터졌을 때 만주와 국내에서는 극에 달한 한중간 민족대립이 자칫 폭동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었다. 이에 은암은 만보산사건이 일제의 한중 두 민족을 이간질하기 위한 책략이었음을 연일 폭로…(중략)…사태를 가라앉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중략)…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특히 어문에 능통하던 은암은 오산학교 학생 때부터 한문이 뛰어나 때로는 선생을 대신하여 가르치기도 했으며 그 중에서도 중국 백화문(白話文)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이었다…(중략)…중국 연변에서 발행되는 ‘아리랑’(83. 9)지에 이정문(李政文)의 ‘노신(魯迅)과 조선사람’이란 제하의 논문이 실렸다. 이 글은 일본에서 발행되는 ‘삼천리’ 제45호에 그대로 번역, 전재됐으며 곧이어 ‘동방’(東方) 제41호(84. 8)에도 삼보(三寶政美 寶山大 교수)에 의해 ‘노신과 한국인 저널리스트와의 만남’이라는 연구논문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는데 이정문은 이 논문에서 ‘신언준은 상해에 체류하는 동안 채원배(蔡元培, 북경대 총장) 등 중국의 유력인사들과 두터운 우정을 맺은 진보적 언론인이었다. 그는 중국의 참된 모습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쓰고 있다. 또 중국 연변대 교수인 양소전(楊昭全 · 中朝관계사)은 ‘노신이 만난 한국의 지식인들’ 제하의 논문에서 ‘중국의 대문호 노신과 교류한 한국의 문인은 이우관, 김구경, 유수인, 이육사 그리고 신언준 등 다섯 사람이었다’…(중략)…망명 동포들에 대한 계몽사업과 특히 후배 육성(상해 인성학교 학감)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백범을 도와 우리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들여보내는 교섭 활동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 듯, 이 무렵 일본 경찰의 해외 거주 한국인 용의자 명부에는 김구 등과 함께 바로 그 대목이 기록돼있다. 이국땅에서 너무도 심신을 돌보지 않은 활동 탓이었으리라. 은암은 36년 들어 신병을 얻어 고향 숙천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해외생활 14년 만의 일이었다. 일경은 즉시 그를 1급 요시찰인물로 찍고 삼엄한 감시에 나선다. 그러나 투병생활 1년 남짓 만에 은암은 아무 보람도 없이 눈을 감고 말았다.” (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1992, 324~329쪽, 서영훈 흥사단공의회장, 전 KBS사장)
“중국 상해에서 상해청년동맹회, 상해한인청년학우회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상해6사단(六士團) 간부로 안창호 선생을 보좌하여 통역, 섭외 서무를 담당하였고, 1929년부터 동아일보 상해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임정 및 재(在) 중국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외에 보도함과 아울러 1931년 만보산사건 시 일본의 간계를 동아일보를 통하여 분쇄하고 국내외 여론을 전환시켰으며 김구 선생과 함께 한국청년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키는 교섭을 성사하는 등 상당한 공적이 인정되고 사실로 확인됨.”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 – 건국훈장 독립장)
“기자는 2003년 2월 상하이에 특파원으로 오면서 묘한 ‘자부심’을 안고 왔다. 상하이라는 중국의 핵심도시에 첫 부임하는 ‘초대특파원’이라는 딱지 말이다…(중락)…그런데 그런 생각을 이제는 접어야할 것 같다. 윤봉길 의사에 대한 얘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때문이다. 나라 잃은 자들이 이곳 상하이로 밀려들어온 1920년대 후반부터 상하이에서 특파원으로 활약한 분이 계셨다. 독자들께도 새삼스런 일이겠지만 신언준(申彦俊ㆍ1904~1938) 당시 동아일보 기자가 1929년부터 동아일보 중국 주재 특파원으로 활약했었다…(중락)…그러니까 필자에 앞서 벌써 74년 전에 이미 중국 땅에 특파원이 있었던 것이다…(중락)…신언준은 단순한 기자가 아니었다.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1931년에는 상해교민단(단장 여운형)이 경영하는 교민 자녀 수학 기관이던 인성(仁成) 학교의 학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훙커우의거사건에 신언준은 ‘협력자’로 참여하게 된다…(중락)… 동아일보 상해 특파원이라면 ‘나라 없는 나라’의 약소국 출신 기자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신언준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중국 정계의 요인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공산당과 국민당의 활동상을 현장감 있게 취재해 생생한 보도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한국에 동정적이었던 루쉰(魯迅)을 1933년 5월에 아마도 한국인 기자로는 최초로 상하이에 있는 그의 은신처에서 만나 약소민족 해방책이나 식민지, 반식민지 체제에서의 국수주의 문제들을 논의한 방문기를 1934년 5월 ‘신동아’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책에 대해 어떤 분이 평하기를 ‘혁명과 반동이 교차하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동식민지 중국의 한 시대에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들이대며 한국인의 눈으로 한 시대를 해석한다’고 했다. 아주 적확한 평가가 아닌가. 신언준은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전인 1926년부터 동아일보에 한국 문제나 중국 문제에 대한 논설을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중국 전문기자였다. 1929년부터 35년 귀국할 때까지 식민지 한국 독자들에게 생생한 중국 정보를 전달했고, 현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행동하는 기자’의 표상이었다. 그의 글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의미가 살아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기자도 이렇듯 역사의 중요한 재료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알고 나니 기자는 더욱 힘이 났다. 말하자면 ‘선배 상하이 특파원’이 이정도의 인물이라는 점이 부담스럽지만 자랑스러웠다. 자연스럽게도 ‘선배 명성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2005년 4월, 상하이에 들른 김준엽 선생께 이런 말씀을 드리자 ‘아! 그럼, 신언준을 제대로 배워야지’하며 격려해주셨다. 그날의 들뜬 마음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신언준을 얘기하면서 기자는 한가지를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신언준 현대 중국관계 논설선’ (문학과 지성사 2000년 11월 간)을 펴낸 고(故) 민두기 선생님 때문이다. 신언준의 글을 모은 이 책은 말하자면 민 선생의 유작이다. …(중락)…민 선생께서 유언으로 ‘바깥에 알리지 말고, 조용히 장사를 치르라’ 하셨단다…(중락)…뒤늦게 밝히는 일이지만 기자는 차 운전석 위에 민 선생 사진을 한동안 붙이고 다녔다. 평생의 스승인 민 선생, 그 사진을 보면서 ‘확인하지 못하는 글은 쓰지 말라’는 참된 역사학자의 자세를 되새기곤 했다. 그런 민 선생을 신언준 초대 상하이 특파원을 알게 되면서 새삼스레 상기하게 됐다. 역시 이 책도 민 선생이 쓰신 것 답게 그야말로 ‘고증의 절차’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그득하게 담기는 주(註)를 보면서 민 선생의 향취를 느꼈다…(중락)…신언준과 민두기, 두 분을 회고하면서 일제시대 나라 잃은 조선 백성에게 생생한 중국 정보를 전달한 것처럼, 그리고 이 땅에 중국사 연구라는 영역을 평생 개척한 것처럼, 이제 1천200여 년 만에 중국 땅에서 다시 활개를 피고 다니는 ‘장보고의 후예’들의 활약상을 제대로 전달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연합블로그, 이우탁)
일정시대 퇴사직원록
Didnt know the forum rules allowed such blrilniat posts.
Comment by Bobbi — 2011/05/28 @ 4:15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