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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석학 기자 최남선(崔南善)

Posted by 신이 On 5월 - 31 - 2016

 촉탁기자 최남선(崔南善)(1890~1957)

   조선의 3대 천재 중 제일 늦게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이 1925년 8월 1일 동아일보의 촉탁기자가 됩니다.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던 홍명희가 동아일보를 떠난 뒤 4개월 후, 그의 나이 35세. 홍명희가 떠나고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가 주필로 복귀했을 때입니다.  

   “육당을 안지는 또한 오래다. 동경으로, 중앙학교로, 광문회로, 그 뒤 군(君)은 ‘동명(東明)’잡지를 하다가 실패하였고, 시대일보를 하다가 실패하였다. 남들이 나무랄 때 나는 ‘선비가 사업을 하다가 섣불리 실패하기는 일수니, 이제는 사업에서 손때고, 서양 유학가라. 그래서 글을 우리 신문에 써주면 사빈(社賓)으로 생활비는 지불하마’ 하였다.” (송진우, 교우록<交友錄>, 삼천리 1935년 6월호, 55쪽)

                                          일정시대 퇴사직원록                                                                                                          

  

  ‘3·1 독립선언서’를 쓴 육당은 동아일보 창간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1인으로 복역 중이었습니다. 

  “1920년 봄 박모(薄暮·땅거미)의 남대문 앞길에서 장덕준(張德俊)과 진학문(秦學文)이 얘기를 나누며 경성 역 쪽으로 걷고 있었다. 

  ‘이상협이 편집국장을 하려는데, 역시 내 아우(장덕수)가 적임자가 아닐까’

  ‘설산은 인격이나 지식이야 손색이 없지만 신문에 경험이 없어 안 돼. 육당 최남선이 나오면 그에게 맡기세’

   민족 지성의 집결체임을 자부하고 나선 ‘동아’는 창간 준비와 함께 편집국 간부진을 짤 때부터 3·1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인사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최남선 현상윤 등의 인사들이 풀려나오면 이들에게 쉽사리 자리를 마련해 주어 함께 일 할 수 있도록 이상협이 사회, 정리, 장덕준이 조사, 통계 그리고 진학문이 정경, 학예부장을 각각 겸임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편집국장 적임자에 대한 의견이 이같이 엇갈리자 주간제를 두고 장덕수가 주간, 신문 경험이 있던 이상협이 편집국장이 되었다.” (진학문, ‘반세기 쌓인 일화, 민족의 표현기관’,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 22면) 

   창간 당시 복역 중이 아니었더라면 창간 멤버가 됐을 최남선이 1925년 8월 1일 촉탁기자로 뒤늦게 합류했지만 그에 관한 동정은 동아일보를 통해 끊임없이 전해졌습니다.

   공판 전, 서대문감옥으로 찾아가 육당이 ‘불교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자조론(自助論) 하권을 지어 탈고했다’는 근황을 전합니다. 육당이 일본책에서 중역한 ‘자조론’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무엘 스마일즈가 쓴 책으로, 자본주의 근대와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9월 공판이 시작되기 전 초대 편집국장 하몽 이상협(何夢 李相協)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당의 원고를 싣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하몽생(何夢生)’의 기고문에는 “독립선언서를 지은 까닭으로 작년 삼월부터 옥중에 매인 몸”인 육당과 자신이 가정잡지를 발간하려고 육당이 쓴 글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진학문은 2회에 걸쳐 기고한 ‘옥중에 계신 육당 형님께 보(報)하나이다 – 경성을 떠남에 임(臨)하여’ (1920년 8월 2~3일 1면)에서 1919년 2월 하순 얘기를 하며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3·1운동과 민족대표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합니다.

   재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으로 이감된 뒤에도 육당의 동정은 동아일보에 계속해서 보도됩니다. 특히 3·1운동 2주년인 1921년 3월 1일자 3면에는 어머니 강씨가 면회를 왔다 돌아간 직후 쓴 글이, ‘눈물을 자아내는 최남선의 편지’란 제목으로 소개됩니다.

   ‘입춘 추위의 찬 바람 머리에 안녕히 돌아가셨는지 돌쳐서시는 옷자락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떡꾹 아침이 아직도 세 밤을 격한 이 상서를 하감하옵실 때에는 도리어 몇 날을 지났사올지, 묵은 세배로 올리는 상서가 새해 문안도 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소자의 세월이올시다.’

  ‘(조카딸) 한경의 일은 참혹하기 이를 길 없습니다. 어제 밤 꿈에 울고 보채는 한경이를 제가 얼싸안고 달래서 이런저런 이야기함을 꾸었삽더니, 뜻밖에 말씀을 듣사오니 애연하기 지업삽내다.’

  ‘높은 담 너머로 떡 치는 소리 들리는 음력 십이월 이십팔일 낮.’

   이들 육당의 형제들은 창간기자 유광렬이 잡지 삼천리 ‘유명인사 3형제 행진곡’(1932년 3월호 53~54쪽)에 “황금정에서 문화기관 신문관을 경영하기에 그 재산 대부분을 기울였고 아우 최남선 씨의 문화사업을 후원”(최창선 씨) “신문관 창설 이래 10여년을 조선 신문화 개척에 힘쓴 공로자” “조선 사학계에 일두지를 드러냈고 대부분이 자습독학의 대성”(최남선 씨) “중앙학교의 교원으로 조도전대학을 제1번으로 졸업하고 조선에 돌아온 뒤 중앙교장을 역임하고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최두선 씨)라고 소개할 정도로 명사였고 동생 최두선 씨는 해방 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육당이 출옥 후 자신이 창간한 시사주간지 ‘동명(東明)’의 간행사를 실은 곳도 동아일보 1922년 8월 24일 1면 광고란입니다.  육당은 이 글에서 3·1운동의 성과인 민족 자각을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인의 과제라고 말합니다.

   시사주보(時事週報) 동명(東明)

  현하(現下)의 조선인은 오직 한 가지 직무가 허여(許與)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최근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발견된 ‘민족’을 ‘일심일치(一心一致)’로 ‘완성’하는 일이외다. 일체의 보무(步武·위엄있게 걷는 걸음걸이)가 오직 이로부터 출발되어야 할 것과 일체의 희망이 도무지 이로써 실현될 것을 확신하는 오인(吾人)은 풍조야 여하(如何)하든지, 추향(趨向·대세에 끌려 따라감)이야 여하하든지, ‘민족완성’을 위하여 아직 동안 일체의 기회를 운용하며 일체의 정력을 집주(集注)하지 아니치 못합니다. 이로써 자려(自勵·스스로 힘씀)하고 이로써 근타(勤他)하여 무한한 생명 전개의 제 1보, 이상 실현의 제 1선 삼아 발견된 민족을 완성하려 하는 자외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귀중한 ‘발견’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참담한 도정을 지냈습니까. 어떻게 거대한 희생을 바쳤습니까…(후략)

  ‘동명’ 동인 대표 최남선 근백(謹白)

   1923년 5월 11일자 3면 창간 1000호 기념 ‘현대인물투표 대환영의 신시험(新試驗), 재미있는 인물 투표의 시작’이란 제하의 기사가 투표결과가 삭제된 채 나갑니다. 

   투표결과는 삭제 당했지만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가 만든 압수 삭제 기사 모음집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 동아일보 편, 108쪽에 따르면 육당이 이승만, 최린, 안창호에 이어 4위를 차지했습니다. 

   “제1회 투표 결과 3표 이상 득표자는 다음과 같았다. 이승만(49), 최린(25), 안창호(22), 최남선(18), 서재필(17), 이춘재(12), 이상재(10), 이동휘(7), 여운형(6), 강일성(6), 이승훈(4), 김원봉(4), 윤상은(4), 신흥우(4), 김좌진(3)”

   ‘학계의 중진 육당 최남선 씨 – 낙산  일람각에서 독서, 영시로 소일, 시대일보로 죽을 쑨 육당’

  “조선에 외래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조선은 야매한 민족이 아니었으니 반듯이 무슨 종교가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약10년 전부터 그것을 연구하였는데 그것은 즉 ‘밝’이라는 ‘교’라고 합니다. 이 ‘밝’이라는 뜻은 광명이라는 뜻인데 광명의 대표가 즉 태양이라고 합니다…(중략)…시대일보가 그렇게 된 후로부터는 조선의 영산인 금강산…(중략)…약 한달 전에 돌아왔는데…(중략)…불서(佛書)도 많이 공부하는데 낙산 중복에 앉아있는 일람각에서 솔나무 소리로 벗을 삼으면서 몇 만권인지 아지 못할 썩어가다 시피하는 책 천지 속에서 만수향을 피워놓고 글을 왱왱 외고 있습니다.”

   ‘기미년운동과 조선의 사십팔인, 최근 소식의 편편(片片)’ 

  “육당 최남선 선생은 아직도 서른일곱이시라는 젊은 몸으로 일전에도 한번 소개한 바와 같이 동대문 안 양사골 낙산 밑에 계신데 산같이 쌓여있는 수 천 권 고금서적을 병풍으로 치시고 독서로 일과를 삼으시는데 선생은 항상 인과의 논리를 주장하시어 실력 있는 조선을 만들어야 된다고 여기에다 힘을 다하십니다. 그간 시대일보도 뜻과 같이 못되고 일시 세상에 좋지 못한 소문만 없지 않았지만은 조선을 위하여 애를 태우시는 정성은 해가 갈수록 더 깊어간답니다. 일람각에서 독서만 하시다가도 무엇이 부족한 듯이 책 구럭을 들고 도서관을 찾아가시는 것을 보면 어떻게 선생이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1925년 8월 1일 동아일보의 촉탁기자가 된 육당 최남선은 사설, 칼럼, 역사기획물, 기행문 등을 신문에 쏟아냅니다.

 

육당이 처음 쓴 1면 사설은 8월 4일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 50주기를 맞아 쓴 ‘동화와 문화’. 육당은 ‘동화의 교육적 효과와 문화적 가치를 고려할 때 조선에서도 프랑스의 페로, 독일의 하우프, 영국의 와일드, 덴마크의 안데르센이 나와야한다’고 했습니다.

 

1925년 8월 12일자 1면 사설 ‘동화와 문화’

 

 

 

사설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글은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육당의 글로 ‘인증’했습니다. 이 연구소는 6년여의 작업 끝에 육당 전집을 내놓으면서 ‘선생의 작품이라는 심증’이 뚜렷한 것을 제외하고 서명이 없는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고려대학교의 부설연구기관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이러한 뜻에서 때마침 1967년 10월 10일, 육당 최남선의 10주기에 영윤(令胤) 최한웅 박사로부터 선생의 애장본 2만2천여 책을 기증받은 것을 계제로 하여, 학계의 관계 인사로 육당전집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그 편찬사업에 착수하였던 것이다.…(중략)…선생의 그 방대한 업적이 폭넓은 연대에 걸쳐서 신문 잡지 혹은 단행본 등 수많은 간행물에 흩어져 수록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을 남김없이 수집 정리하여 전 16권에 달하는 전집으로 편집하기까지 실로 만 6년 유여(有餘), 그동안 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본 편찬위원회는 기술적으로도 실로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중략)…무서명(無署名)의 글은 전집에 수록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선생의 작품이라는 심증이 뚜렷한 것은 열외로 하였다.” (김준엽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장·육당전집편찬위원회위원장>, ‘간행사’, 육당 최남선 전집 1권, 현암사, 1973, 7~10쪽)

 

이즈음 육당이 동아일보에 쓴 사설은

 

– ‘비미(秘謎)의 일환멸(一幻滅)’(역사, 1925년 8월 15일자 1면)

 

– ‘비스마르크를 회(懷)함’(전기, 1925년 8월 26일자 1면)

 

– ‘가을이 왔다 새 세계의 전개를 보자’(수필, 1925년 9월 7일자 1면)

 

– ‘자기망각증(自己忘却症)’(교양, 1925년 9월 8일자 1면)

 

– ‘화중련(火中蓮)’(문화, 1925년 9월 26일자 1면)

 

– ‘고산자(古山子)를 회(懷)함’(2회, 전기, 1925년 10월 8일자~10월 9일자 1면)

 

– ‘유산(遊山)의 철’(2회, 교양, 1925년 10월 17일자~10월 18일자 1면)

 

– ‘아사인수(我史人修)의 애(哀)’(2회, 역사론, 1925년 10월 21일자~10월 22일자 1면)

 

– ‘참지 못할 일가(一呵)’(5회, 종교 사상, 1925년 10월 25일자~10월 31일자 1면)

 

– ‘곡백암(哭白庵) 박부자(朴夫子)’(전기, 1925년 11월 5일자 1면)

 

– ‘개천절’(종교 사상. 1925년 11월 18일자 1면)

 

등으로 그의 박학강기(博學剛氣)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특히 ‘개천절’을 통해서는 음력 10월 초사흗날을 맞아 개천절을 기념하자고 역설했습니다. 지금은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하고 있지만 언제나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말고 간직하자고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1925년 11월18일 1면 사설 ‘개천절’

 

‘시월상달’ 은 우리 조상이 5천년, 아니 1만 년 전 부터 일 년에 한 번씩 조선심(朝鮮心)을 깨끗이 하고 가다듬고 반성하는 성스러운 날로 기념하는, 단군 성조가 조선을 이 땅에 세운 기원절이다.…(중략)…각인(各人)의 생명은 짧다. 그렇지만 각 조선인(各 朝鮮人)의 사명은 길다.…(중략)…조선인 우리가 ‘동방의 빛’의 사도이기는 아득한 옛 날 옛 적에서나 4천3백년 전쯤으로 끊어 말하는 단군의 개천 기원 당시에서나 해모수 때에나 을지문덕 때에나 화랑 때에나 동학(東學) 속에서나 똑같고 털끝만큼 다를 리 없는 것이다.

 

 

 

육당은 벽초 홍명희가 시작한 동아일보의 인기칼럼 ‘학창산화(學窓散話)’의 필자로도 활약합니다. 8월 14일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육당(六堂)’이란 필명으로 나간 뒤 무기명으로 ‘백색(白色)’(8월 29일~10월 1일, 22회) ‘추석’(10월 2일~11월 1일, 17회) ‘중양’(重陽, 10월 27일) ‘상달’(11월 21~24일, 2회) ‘되무덤이(고인돌이란 뜻)에서’(12월 6~31일,13회) 등을 썼습니다.

 

 

 

다음해인 1926년 병인년은 동아일보는 물론 조선 사회에서 ‘육당의 해’로 불릴만한 한 해였습니다. 일 년 내내 계속된 육당의 ‘단군론(檀君論)’과 ‘백두산근참(白頭山覲參)’ 연재는 육당을 단군 연구의 1인자이자 당대의 역사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듭니다. 또 이들 연재로 동아일보는 민족지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합니다.

 

 

 

먼저 신년호에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육당의 특집기사가 실립니다. ‘조선 사상 세계적 사실(事實)’이란 제목의 이 3회 연재물에서 육당은 ‘조선 역사상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세 가지 조선 민족의 역사적 보배’로 ‘고려 선종 3년에 간행한 팔만대장경, 조선 세종조 28년에 훈민정음을 완성한 것, 고종 3년에 조선이 세계와 처음으로 접촉의 문을 열게 된 병인양요(丙寅洋擾)의 발발’을 들고 있습니다.

 

1926년 1월 1일자 기(其) 4-2면

 

 

바로 옆 ‘호랑이-조선 역사 급(及) 민속 지상의 호(虎), 건국 초두(初頭)이래 구원(久遠) 조선의 표상’이란 기사도 호랑이의 해를 맞아 쓴 육당의 글입니다. ‘중국의 용처럼, 인도의 코끼리처럼, 이집트의 사자처럼, 로마의 이리처럼, 조선에서의 신성한 동물은 첫째 호랑이라 할 것’이라고 시작되는 이 글은 모두 7회 연재됩니다.

 

동아일보가 총독부 산하 조선교육협회 월간 일본어 기관지 ‘문교(文敎)의 조선’ 2월호에 실린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 오다 쇼고(小田省吾) 교수의 논문 ‘소위 단군 전설에 대하여’를 반박한 것도 육당을 통해서 입니다.

 

오다 교수의 글은 제목부터 ‘소위’ 라 하여 단군 전설을 비하하고 부인하는 내용으로 민족감정상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육당은 2월 11일과 12일 양일에 걸친 사설 ‘단군 부인(檀君 否認)의 망(妄)-문교의 조선의 광론(狂論)’에서 이 논문의 이면에는 단군을 조선의 역사에서 제거하려는 일제의 계획적인 조선정신말살음모가 숨어 있다고 통박했습니다.

 

1926년 2월 11일자 1면 사설 ‘단군 부인(檀君 否認)의 망(妄)-문교의 조선의 광론(狂論)

 

“조선의 역사로서 단군을 삭거(削去)하려 함은 일본 학자의 전통적 유견(謬見·잘못된 견해)일 뿐 아니라 또 일본 위정자들의 조선 정신을 잔학(殘虐)하는 그의 일 필요(一 必要) 수단을 삼는 바니 여기 대하여 곡학첨관(曲學諂官·학문을 곡해하여 관에 아첨함)의 추학구(醜學究·추한 학문 연구)가 학문의 탈을 씌운 비학문의 꼭두각시를 만들어 낸 것은 일(一), 이(二)에 그치지 않는다.”

 

이어 1926년 2월 17일자 1면에는 이 망언을 논박하기 위해 육당의 ‘단군사론’을 곧 연재할 것이라는 사고가 뒤따랐습니다.

 

1926년 2월 17일자 1면 사고

 

사고는 “단군이 우리 조선 민족의 혈육의 조(祖), 정신의 조(祖), 문화의 조(祖)로 우리 민족의 숭앙의 표적이요, 조선 역사의 근원이요, 중심 문제임은 물론이어니와 육당 최남선 씨의 심혈을 뿌린 연구의 결과로 단군 문제는 일본 역사, 중국 역사, 일반 동양 제 민족의 역사 문제의 관건인 것이 분명히 되었다. 육당의 단군 연구로 하야 조선사, 일본사 및 동양사는 근본적으로 개조되리라고 한다.”면서 “최 육당이 ‘이 글을 쓴 뒤에 붓대를 내어 던져도 좋다’는 결의를 보였다.”고 전합니다. 육당은 옥중에서 착안했던 ‘밝’과 ‘당굴’을 토대로 3월 3일부터 7월 15일까지 무려 77회에 걸쳐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연원연구(부제)’를 설파합니다.

 

 

 

1926년 3월 3일자 1면 단군론 (1)

 

조선이 동아(東亞) 최고(最古)의 일국(一國)으로 단군이 그 인문적 시원(始源)이라 함은 조선인이 오래전부터 전신(傳信)하는 바이다. 유문(遺文·남겨진 문헌)이 간략하야 그 상(詳)을 얻기 어려우나 조선 민족의 연원과 문물의 내력을 오직 여기에서 징고(徵考)할 밖에 없을진대 독일(獨一)한 유주(遺珠·잃어버린 구슬)이기에 더욱 그 보배로움을 볼지니…(중략)…더욱 조선은 동아에 있어서 중국 이외에 수천년 통관(通貫)한 국토와 문물의 유일한 보유자요, 겸하야 그 인문지리적 위치가 민족 및 문화 유동의 간선(幹線)에 당(當)하야 사방의 풍우(風雨)가 대개 흔적을 여기 머물렀으니 단군이 어찌 조선사만의 문제며 조선이 어찌 동앙사만의 문제랴.…(후략)

 

 

 

단군론 (1) 단군론 (11)

 

 

 

 

 

1926년 4월 29일자 1면 단군론 (11)

 

일본인이 조선의 권력을 잡으매 무엇보담 먼저 애쓴 것이 어떻게 하면 조선심(朝鮮心)을 억제하고 전멸(剪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중략)… 이렇게 함에는 군인과 관리의 머리와 손만으로는 만만히 되지 않을 줄 깨달음에 자기네의 형편에 합당한 몇몇의 학자를 데려다가는 ‘어용(御用)’을 사명(使命)하려고 하였다.…(중략)…그래서 생겨난 것이 ‘반도사편찬회(半島史編纂會)’란 것이다.…(후략)

 

이 연재물이 끝나기 전, 동아일보와 육당은 또 다른 기획물을 준비합니다.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민족의 신화가 얽혀 있는 백두산을 참근(參覲)하기로 한 것입니다. 동아일보는 6월 22일 ‘백두산 참근대 파송’이란 제목의 사고로 육당과 박한영(朴漢永) 두 사람이 7월 중순에 등정함을 알립니다. 육당은 이어 22일부터 24일까지 쓴 사설 ‘백두산의 신비’에서 백두산의 신비한 실체를 발견해온 조선인의 총명을 내세우면서 ‘백두산은 분명히 인간에 있는 천국의 분토(分土)요, 여기에 생긴 신시(神市)는 민족의 연원이고, 이곳에 탄육(誕育)된 단군은 국권의 남상(濫觴)이요, 진토(震土)에 있는 일체의 민족 문물은 총(總)히 이 대원(大原)으로부터 분파만연(分派蔓延)된 소류세조(小流細條)라고 믿어온’ 우리 선조의 사상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잡지백년 1’(현암사, 2004)을 엮고 쓴 최덕교 씨는 “‘근참(覲參)’이란 위대한 인물이나 존경하는 이를 찾아뵙는다는 뜻이니, 이 경우 백두산을 오르는 그의 정신 자세를 헤아리게 한다.”고 평했습니다.

 

 

 

“행정(行程)은 겨우 3주간이었습니다. 이 동안에 장백의 일만 척 정상을 극하며 압록의 이천리 유역을 내리는 것이매, 관찰의 주도(周到)와 고험(考驗)의 심밀(深密)을 기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또 맥진(驀進·좌우를 돌볼 겨를이 없이 매우 기운차게 나아감)과 노처(露處)로 군대하고 행동을 한 가지 하매 연사탁문(練思琢文)은 본디 생심(生心)도 할 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마는, 백두산 있어 온 뒤로 아직 문적(文籍)다운 것이 하나도 없고, 또 변변치 아니한 문자라도 백두산 의식을 환성(喚醒)하는 일 자극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까하여 혹 군마(軍馬)의 티끌을 뒤집어쓰고 혹 노영(露營)의 겨를을 훔쳐서 행중(行中)의 실력(實歷)과 도상(途上)의 만감(漫感)을 약간 기록하여, 우편 닿는 대로 ‘동아일보’로 보내었습니다.” (최남선, ‘백두산 근참기 권두에’, 육당 최남선 전집 6권, 15쪽)

 

1926년 7월 28일자 1면

 

 

백두산근참 (1) -광명은 동방(東方)에서

 

순일(旬日)에 걸친 음우가 겨우 거치고 오래 피신하였든 태양이 다시 위용을 내놓건마는 찌는듯한 무더위가 오히려…(중략)…한양 5백년의 찌든 산하와 궁예 천년의 묵은 자최의 감흥은 벌써 더위의 아가리로 쏙 들어가 버리고…(중략)…겨우 명상의 길목을 얻어서 비로소 이것저것을 다 잊어 버리는 기회를 얻었다. 백두산을 가다니? 손바닥만한 조선 반도가 도모지 백두산 하나가 하늘을 뚫고 우뚝 솟는 통에 생겨난 주름살이오, 터진 금인 것들이어늘 이제 따로 간다는 백두산이 어디란 말인가…(후략)

 

 

 

이날(7월 28일)부터 다음해 1월 23일까지 모두 89회에 걸쳐 동아일보 1면을 장식한 ‘백두산 근참기’는 ‘심춘순례’와 함께 민족 사상을 연면히 엮은 육당의 대표적 기행문으로 꼽힙니다. 지리산 일대의 백제 지역을 답사한 ‘심춘순례’는 조용만 선생의 착각(육당 최남선, 삼중당, 1964, 232쪽)과 육당 최남선 전집의 착오(6권 389쪽)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것으로 일부 알려져 있지만 육당이 동아일보에 들어오기 바로 전, 시대일보에 실렸습니다.

 

 

 

육당이 이해 말 내놓은 근대 이후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동광사)엔 동아일보에 실었던 ‘속닙나는 잔디’(4월 29일자 3면) 같은 시조가 들어있습니다. 양주동은 ‘육당 최남선’(344~345쪽)에 기고한 ‘육당 선생과의 학연’이란 글에서 “‘백팔번뇌’는 그때 그가 ‘조선’이란 님에게 바친 뜨거운, 뿌리 깊은 ‘사랑’과 괴로움의 노래로써 엮어진 그의 대표적 시조집으로, 조그만 책자이나 시조 사상의 한 중흥기념탑이 될 만한 역작”이라며 “거기는 춘원 위당 벽초 등 당시 문단의 거벽들의 서(序) 발(跋)이 즐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으로 15,6년 전부터 육당과 지금 벽초인 그때 가인과 나와 삼인집(三人集)을 하나 내어보자고 여러 번 이야기가 되었었다.” (이광수의 발문-육당과 시조)

 

 

 

“육당과 나는 20년 전부터 사귄 친구다. 성격과 재질에는 차이가 없지 아니하지마는, 사상이 서로 통하고 취미가 서로 합하여 가로에 어깨 겯고 거닐며 세태를 같이 탄식도하고 서실(書室)에 배를 깔고 엎드려 서적을 같이 평론도 하였었다. 내가 남의 집에 가서 자기 시작한 것이 육당의 집에서 잔 것이며, 육당이 북촌 길에 발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 내 집에 온 것이었었다. 이와 같이 교분이 깊던 우리 두 사람이 세변(世變)을 겪은 뒤에 서로 흩어져서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였고 서로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차이는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러나 통하던 것이 막히지는 아니하였고 합하던 것이 떨어지지는 아니하였다. 지금이라도 육당의 일을 말하여 그 장단득실을 바르게 판단함에는 근년 육당의 주위에 모였다 헤졌다 하는 사람들보다 내가 나으리 라고 자신하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집안에서 곱게 자란 채로 적어도 깊이 세상에 물들기 전에 사귄 까닭이다.” (홍명희의 발문)

 

 

 

“나와 춘원과 홍모가 주로 ‘소년’에다 글을 쓴 셈이다.” (최남선, ‘한국 문단의 초창기를 말함’, 육당 최남선 전집 4권<역락, 2003>, 107쪽 ; 1955년 1월 ‘현대문학’ 창간호)

 

 

 

1928년에도 육당은 신년호부터 단군에 관한 글을 싣습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무진년 72갑주(甲週)를 맞아 단군 신전의 의의를 짚은 ‘조선 문화의 일체 종자(種子)인 단군 신전의 고의(古義)’가 2월 28일까지 39회 연재된데 이어 6월초 ‘조선유람가’가 10회 실리고 다시 8월 1일부터 ‘단군과 삼황오제(三皇五帝)’가 12월 16일까지 실리다 72회로 돌연 중단됩니다.

 

 

 

1928년 1월 1일자 기(其) 2-3면

 

 

 

조선 문화의 일체 종자인 단군신전의 고의(1)

 

무진년(戊辰年)을 역사적으로 회고하면 그것이 단군 건국이라는 조선사 탄생이 대 사실로써 절대한 감격을 자아내게 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도 무진년(21주갑전·甲前)의 일이며 이 태조의 위화도 회군도 무진년(9주갑전·甲前)의 일입니다. 단군의 해라 할 무진년을 기념함에는 오직 순일한 마음으로 단군을 기념하며 단군 원리를 흠구하며 단군 실적을 정해(正解)하여 단군과 그 사실로부터 오는 우리의 전통 생명에 자윤(滋潤)과 새 흥분을 줌이 아무것보다 적절한 일일 것입니다.

 

 

 

동아일보에 실린 최남선 글

(전집은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육당 최남선 전집’, 현암사, 1973년을 말함)

 

번호

게재일

제목

글 성격

기명·무기명

전집

1

1925-08-12

童話와 文化

1면 사설

무기명

9권 303쪽

2

1925-08-14

四庫全書 학창산화

무기명

9권 602쪽

3

1925-08-15

秘謎의 一幻滅

1면 사설

무기명

9권 35쪽

4

1925-08-26

비스마르크를 懷함

1면 사설

무기명

10권 82쪽

5

1925-08-29~

 

1925-10-01

白色(22회)

학창산화

무기명

2권 445쪽

6

1925-09-07

가을이 왔다 새 世界의 展開를 보자

1면 사설

무기명

5권 435쪽

7

1925-09-08

自己忘却症

1면 사설

무기명

10권 216쪽

8

1925-09-26

火中蓮

1면 사설

무기명

9권 305쪽

9

1925-10-02~

 

1925-11-01

秋夕(17회)

학창산화

무기명

9권 546쪽

10

1925-10-08~

 

1925-10-09

古山子를 懷함(2회)

1면 사설

무기명

10권 84쪽

11

1925-10-17~

 

1925-10-18

遊山의 철(2회)

1면 사설

무기명

10권 218쪽

12

1925-10-21~

 

1925-10-22

我史人修의 哀(2회)

1면 사설

무기명

10권 482쪽

13

1925-10-25~

 

1925-10-31

참지 못할 一呵(5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175쪽

14

1925-10-27

重陽

학창산화

무기명

9권 559쪽

15

1925-11-05

哭白庵 朴夫子

1면 사설

무기명

10권 87쪽

16

1925-11-18

開天節

1면 사설

무기명

9권 200쪽

17

1925-11-21~

 

1925-11-24

상달(2회)

학창산화

무기명

9권 561쪽

18

1925-12-06~

 

1925-12-31

「되무덤이」에서(13회)

학창산화

무기명

9권 480쪽

19

1926-01-01~

 

1926-01-03

朝鮮史上 世界的 事實(3회)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최남선

2권 463쪽

20

1926-01-01~

 

1926-02-11

朝鮮歷史 及 民俗史上의 虎(7회)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육당한인

2권 471쪽

21

1926-01-23~

 

1926-01-24

久遠한 明星(2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182쪽

22

1926-02-06

朝鮮心·朝鮮語

1면 사설

무기명

9권 190쪽

23

1926-02-11~

 

1926-02-12

檀君 否認의 妄(2회)

1면 사설

무기명

2권 77쪽

24

1926-03-03~

 

1926-07-25

檀君論(77회)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최남선

2권 79쪽

25

1926-04-29

속닙나는 잔듸

시조(백팔번뇌)

육당

5권 462쪽

26

1926-06-10

純宗孝皇帝輓

시가

최남선

5권 475쪽

27

1926-06-10

숨어가는 銘旌

시가

최남선

5권 476쪽

28

1926-06-22~

 

1926-06-24

白頭山의 神秘(3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80쪽

29

1926-07-28~

 

1927-01-23

白頭山覲參記(89회)

기행문

최남선

6권 11쪽

30

1926-11-07

開天節

1면 사설

무기명

9권 197쪽

31

1926-12-02~

 

1926-12-04

古蹟保存의 要諦(3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491쪽

32

1926-12-09~

 

1926-12-12

壇君께의 表誠(3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192쪽

33

1927-01-01~

 

1927-02-04

토끼타령(27회)

신화·설화

최남선

5권 94쪽

34

1927-02-11

처음 보는 純朝鮮童話集

서평

육당학인

9권 617쪽

35

1927-03-24~

 

1927-03-25

朝鮮의 原始相(2회)

1면 사설

무기명

10권 227쪽

36

1927-03-29

朝鮮史學의 出發點

독서계

최남선

9권 37쪽

37

1927-04-07

月南先生輓

시가

최남선

 

38

1927-06-04

한번 새로워야할 조선의 오늘의 새여자

1인1화(話)

최남선

10권 234쪽

39

1927-10-29~

 

1927-10-30

開天節(2회)

논설-종교·사상

최남선

9권 198쪽

40

1927-11-11~

 

1927-11-12

朝鮮의 久遠相(2회)

논설-교양

최남선

10권 230쪽

41

1928-01-01~

 

1928-02-28

檀君神典의 古義(39회)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최남선

2권 190쪽

42

1928-06-01~

 

1928-06-10

朝鮮遊覽歌(10회)

장가(長歌)

최남선

5권 373쪽

43

1928-08-01~

 

1928-12-16

檀君과 三皇五帝(72회-중단)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최남선

2권 251쪽

44

1928-12-17~

 

1928-12-19

吳世昌氏 ‘槿域書畵徵’ (3회) 서평 최남선 9권 619쪽

45

1930-01-12

朝鮮歷史 通俗講話는 어떻게 쓴 것인가

역사-통사

최남선

1권 15쪽

46

1930-01-14~

 

1930-03-15

朝鮮歷史講話(51회)

역사-통사

최남선

1권 13쪽

 동아일보 1928년 12월 23일자 1면

최남선(崔南善) 명(命) 조선사편수회위원(朝鮮史編修會委員)

“12월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자 식자 간에 큰 물의를 일으키니 ‘동아일보’에서는 게재를 중단하였다.”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편, 육당 최남선 전집 2권, 현암사, 1973, 330쪽)

 

 

 

육당의 조선사편수회 참여와 관련해 조용만(趙容萬) 선생은 ‘육당 최남선’(삼중당, 1964, 348~351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당은 돌연히 1928년 10월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고, 그해 12월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이 돌연한 소식을 듣고 세상 사람들은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사람으로 총독부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다고 하여 당시에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총독부에서는 1922년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선 역사를 편찬할 계획을 세웠고, 다시 1925년에는 이것을 크게 확장해서 이름을 조선사편수회라고 고치고, 최고기관으로 위원회를 두어서 이 위원회에서 조선 역사의 편수 방침을 결정하고, 그 아래 수사관(修史官)이 있어서 그들이 이 방침을 실행하게 되었다. 고문으로는 일본의 역사학자로서 동경제국대학의 교수인 구로이다 핫도리 나이도가 이에 임명되었는데, 구로이다가 주장이 되어 이 사업을 실행하게 되었다. 위원에는 이왕직 차관인 시노다, 역사학자인 오다, 이마시니 등과, 한국 사람으로는 어윤적 이능화 이병소 윤영구 등이 참가하였다. 이리하여 십개년 계획으로 사업을 진행시키게 되었는데, 편집 방침은 신라 통일 이전으로부터 연대순인 편년제(編年制)로 편찬해 나가기로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 역사학자 사이에는 총독부에서 조선 역사를 편찬하는데, 조선 역사를 일본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비난이 떠돌았다. 이것을 막기 위하여 조선 사람 위원들이 활약하여야 할 터인데, 네 사람의 위원들은 이름만 늘어놓았지 강경하게 총독부 당국이나 일본사람 학자와 다툴 사람이 없었다. 이리해서 유력한 우리 측의 역사학자가 위원으로 들어가서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돌게 되었다. 더구나 단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서, 이 일이 더욱 시급하게 요청되었다. 일본 학자와 당당하게 이론으로 싸움을 할 사람은 육당 밖에 없고, 육당은 단군을 자신의 학문적 양심의 생명으로 주장하는 만큼 육당이 위원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으나, 독립운동의 거두인 그에게 그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육당의 심경은 복잡하였을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썼고, 총독부와 대항해서 열렬히 독립을 투쟁하는 터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된다는 것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되니, 처음부터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물론 죽어도 들어가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또 한편 적의 속에 들어가서 단군을 넣자고 주장하고, 일본 역사의 한 부분이 안 되도록 적극 투쟁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 아니라고 아주 젖혀 버릴 것만도 아니다. 이밖에 또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 속에서 육당은 퍽 오래 고민한 나머지 드디어 결심하고 1928년 10월에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육당의 명성은 너무나 컸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기대가 컸었으므로 육당의 이 돌연한 행동에 대해서 세상의 식자들 사이에는 크게 물의가 일어났고, 그를 통렬하게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점에 대해서 육당은 이 일이 있은 지 20년 후인 1949년에 반민법 때문에 문제가 일었을 때에, 육당 자신이 자열서(自列書)라는 것을 써서, 그때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공판정에서도 사생활에 대한 구구한 변명 같으므로 이 일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어쨌든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당시의 육당의 심경은 몹시 복잡하고 절박하고 침통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일에 대해서 육당의 가장 가까운 벗인 순성 진학문은 아래와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일인의 손에 왜곡개찬(歪曲改纂)되어 그의 정체를 잃게 된 우리 역사를 강인(强引)히 정통적으로 체계를 세워 진정한 우리 국사 연구의 길을 처음으로 우리들에게 열어준 것이 곧 육당이다. 그가 단군설을 굳세게 주장하여 굽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방법으로 그의 학설과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많은 탄압도 받았고 또 그로 인하여 뜻밖의 오해를 산 일도 있다. 그가 역사편수회위원이 된 것도 자기의 학설 – 단군론을 강경히 주장하여, 그의 반대 측인 관변의 단군말살론자를 논쟁 격파하려 하였음이언마는, 도리어 일시 세간의 오해를 받은 일도 있었으매, 당시 그의 심경이야 과연 어떠하였을 것인가’(현대문학 1960년 10월호).

 

육당은 이름만 걸어놓았지 날마다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위원으로서 1년에 한번 있는 위원회에 나가서 회장인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이하 총독부의 관리들과 일본의 유수한 학자 앞에서 당당히 역사 편수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특히 단군을 뺀 데 대해서 얼굴을 붉히고 대들기도 하였다. 위원회에서 조선 사람으로 발언한 사람은 오직 육당 하나밖에 없고, 다른 위원들은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1938년(소화 13년) 6월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발행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란 작은 책이 있는데, 그 제 4장, 제 3항에 ‘조선사편수회 위원회의 경과 및 그 중요 결의’라는 항목이 있어 그 위원회에서 위원들이 발언한 요지가 기록되어 있다.”

 

 

 

최남선, ‘자열서(自列書)’, 자유신문 1949년 3월 9일자

 

(전략)…나의 생활이 약간 사회적 교섭을 가지기는 12, 3세경의 문필 장난에 시(始)하지마는 그 때로부터 3·1운동을 지내고 신문 사업에 부침(浮沈)하기까지에는 이 논제에 관계될 사실이 없다. 문제는 세간의 이르는바 변절로부터 시(始)하며 변절의 상은 조선사편수위원(朝鮮史編修委員)의 수임(受任)에 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전환을 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學硏) 사업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녹(俸祿)과 및 그리로서 얻는 학구상 편익을 필요로 하였었다는 이 외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래 십수년간에 걸쳐 박물관 설비위원, 고적·보물·천연기념물 보존위원, 역사교과서 편정(編訂)위원 등을 수료하여 문화사업의 진행을 참관하여 왔는데 이 길이라고 반드시 평순(平順)하지 아니하여 역사교과서 위원 같은 것은 제1회 회합에서 의견 충돌이 되어 즉시 탈퇴도 하고 조선사편수 같은 것은 최후까지 참섭(參涉)하여 조선사 37권의 완성과 기다(幾多) 사료의 보존시설을 보기도 하였다. 이 조선사는 다만 고래의 자료를 수집 배차(排次)한 것이요 아무 창의와 학설이 개입하지 아니한 것인 만큼 그 내용에 금일 반민족행위 추구(追究)의 대상될 것은 일건 일행(一件一行)이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사 편수가 끝남에 그 임직자들이 이리저리 구처(區處)되는 중에 내게는 어느 틈 중추원 참의라는 직함이 돌아왔다. 그런지 1년여에 중추원 대문에도 투족(投足)한 일 없고 소위 만주국립건국대학 교수의 초빙을 받아서 감에 중추원 참의는 자연 해소되었다. 만주대학으로 갈 당초에는 인도에서는 간디, 러시아에서 트로츠키, 중국에서는 호적(胡適)을 민족 대표 교수로 데려온다 하는 가운데 나는 조선 민족의 대표로 가는 셈이었지마는 조선의 일본 관리는 민족 대표란 것이 싫다 하여 백방으로 이를 방해하고 일본의 관동군은 그럴수록 대표의 자격이 된다 하여 더욱 잡아 끌어가는 형편이었다. 저희들 사이의 이상파와 현실파의 갈등은 건국대학의 최초 정안(定案)을 귀허(歸虛)하게 하였지만 나는 그대로 유임(留任)하여서 조선 학생의 훈도와 만몽문화사(滿蒙文化史)의 강좌 기타를 담당하고?조강(祖疆)의 답사와 민족 투쟁의 실제를 구경하는 흥미를 가졌었다. 건국대학의 조선 학생을 어떻게 훈도하였는가는 당시의 건대 학생에게 알아봄이 공평한 길일 것이다.…(후략)

 

 

 

만주건국대학의 제자인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증언(2006년 9월 21일)

 

“영변에서 농업학교를 다녔는데 3학년 때 조선어 독본이 없어졌다. ‘조선 사람이 조선어 독본도 못 배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조선총독부 지시이다. 조선어 독본은 꼭 교실에서만 배우는 게 아니다. 밖에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고 해 영변 책방에서 조선문학전집 열 몇 권짜리를 사 열심히 읽었다. 그러면서 민족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됐다. 왜 우리 조선 민족은 일본 사람에게 얽매여 살아야 하느냐. 왜 이렇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농업학교 가지고는 안 되겠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5학년 때 어느 제국대학을 가느냐 하고 있을 때 9월에 만주건국대학 입시요강이 붙었다. 5족(族) 혁파를 한다며 조선 민족 대표 교수로 육당 최남선이 있었다. 눈이 번쩍 띄었다. 3·1독립운동 선언문을 만든 육당 선생이 거기 있다면 그 곳으로 가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조선 학생 7명이 갔다. 육당 선생의 첫 마디가 ‘우리는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조선 사람이다. 내선일체 얘기하는데, 말도 안 된다.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이런 소리는 이 때 처음 들었다. 역사에 관해 환하고, 불교에 대해 환하고 말을 잘했다. 주말에는 5, 6명이 선생님 댁에 갔다. 민족, 불교, 역사에 관한 것 등 말씀 듣고 사모님이 점심해 주는 것 잘 먹고 했다. 그렇게 3년을 다니니까, 선생님에게 푹 빠졌다. 선생님에게 기미독립선언문 작성하고 인쇄했는데 왜 33인에 들어가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선생님은 ‘내가 왜 안 들어가려 했겠나.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것인데. 이름이 들어가려 하니까 노인들이 이름 넣지 말라, 젊은 사람은 이갑성 한 명만으로 족하고 다 붙잡혀 갈 테니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붙잡혀서 옥살이를 했다. 만주건국대학 본과에 올라갔을 때 학병문제가 나왔다. 육당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니 육당이 ‘나가라. 일본 천황과 군대를 위해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족을 위해 나가라. 조선은 힘이 부족해서 이렇게 되지 않았나. 우리가 왜 이 기회를 놓치냐. 전쟁 가면 생명 위험한 것 다 안다. 반드시 살아오는 사람이 동료의 시체를 넘어 이 민족을 위해 일하게 된다’고 했다. 이 말씀 듣고 만주건국대학생은 다 나갔다. 해방 후 이북에서 넘어오자마자 육당에게 인사갔다. 1년에 몇 번은 찾아뵀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인사학가 포섭공작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그리하여 최남선이 위협과 유혹에 견디지 못하여, 1928년 12월 20일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일본국 내각의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 최남선의 이 변절에, 사가(史家) 정인보 등은 최남선이 죽었다는 조문을 썼으며, 한편 ‘익살스러운 일부 사학가들은 종로 명월관에 모여들어, 굴건제복(屈巾祭服)의 차림으로써 제상을 벌여 놓고, 최남선이 죽었다고 방성대곡하면서, 최남선의 장례를 지냈다.’는 풍문이 조선인사회에 널리 떠돌았다.” (문정창, ‘일본군국조선강점 36년사-중권’, 백문당, 1966, 460쪽)

 

 

 

“조선사편수회는 총독 직할의 독립 관청으로서 식민사학의 총본산이었다. 여기에서는 『조선사(朝鮮史)』37권,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질,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2권 등을 편찬하였다. 이는 일제가 통치 목적상 유리한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채록하고 한국의 민족 등 본질적 문제와 불리한 것은 제외한 당시 이용될 수 있는 유일한 식민사학사료집이었다. 이와 함께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를 교수로 초빙하여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한국사 왜곡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두 식민지 통치기구는 한국사 왜곡의 양대 조직이었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양대 조직의 구성원, 즉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수사관·촉탁 및 경성제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역사연구 단체를 조직하여 식민사학의 체계를 수립, 정형화하고 조선총독부 권력의 후원으로 이를 일반에 보급시켜 나갔던 것이다.” (박걸순<朴杰淳> 충북대 사학과 교수, ‘1920년대의 민족주의사학’,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4권 국학운동, 독립기념관, 2009, 219쪽)

 

 

 

‘단군과 삼황오제(三皇五帝)’ 73회가 게재돼야할 동아일보 1928년 12월 17일자 3면에는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대한 육당의 서평과 함께 부인기자 최의순의 육당 인터뷰기사가 실렸습니다. 육당의 조선사편수회 참여가 논란이 되기 전에 인터뷰한 것입니다.

 

 

 

 

 

1928년 12월 17일자 3면

 

 

 

 

 

서재인(書齋人) 방문기 육당 최남선씨

 

반날을 서재에서만 (부인기자 최의순)

 

세계 문화를 연구하는 첫 걸음으로 우선 상고사(上古史)인 단군 중심의 원시 문화에 관한 결론을 맺으려고 주야 연구 중에 있는 육당 최남선 씨의 서재를 기자는 고이 두드렸습니다. 낙산 위 높이 올라앉은 듯한 서재는 옛 이야기에 나오는 세속을 멀리한 고적한 수양 터 혹은 정소한 초당과 같이 보일뿐이어서 별안간 은은한 기분에 에워싸이는 듯하였습니다.…(중략)…“요사이 내 생활을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만 별 신통한 것이 있겠습니까. 특히 좋아하는 책이란 없습니다. 항상 읽는 것이 역사에 관련되는 서적이며 그 외에 과학편의 것도 참고할만한 것은 늘 봅니다. 과연 날이 가고 새날이 올수록 연구하는 넓이가 좁아질 따름인 동시에 깊이만 깊어진다고 할는지요. 요사이 집필 중에 있는 것은 ‘삼황오제’입니다.”하며 씨는 묵묵히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어느 때 제일 많이 쓰시게 됩니까” “대개 아침입니다. 나는 새벽에 깨어 쓰기를 시작하여 오전 동안은 될수록 고대로 계속합니다마는 열시쯤만 되면 객들이 많이 방문함으로 자연히 중단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면 아침식사 같은 것은 어느 틈에 하십니까” 씨는 이 대답을 주기 전에 우선 웃음을 펴놓으며 “나의 아침밥은 항상 열두시 이후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두 때만 먹게 됩니다. 그리고 좀 부끄러운 소리지만 세수하는 것도 오정이 ‘뗑’쳐야 합니다. 나의 나쁜 버릇이라고 할지요”하고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며 “그러나 본시 게을러서 그렇다고는 못할 듯합니다. 그 대신 책과 붓하고 옆도 아니 보고 정신노동을 하니까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이후 육당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은 ‘조선역사강화(朝鮮歷史講話)’가 유일합니다. 1930년 1월 14일부터 3월 15일까지 51회에 걸쳐 연재되기 전 육당은 이 글을 게재하게 된 경위에 대해 직접 설명합니다.

 

 

 

1930년 1월 12일자 4면

 

 

 

 

 

조선역사통속강화는 어떻게 쓴 것인가 (최남선)

 

(전략)…이 소저(小著)는 작년 중에 단행본을 내자 한 것이러니, 아직껏 내지 못하고, 이제 동아일보의 간촉(懇囑)을 인(因)하여 우선 지상(紙上) 보급의 길을 한번 밟기로 한 것이며, 또 이것보다도 더 간단히 하여 학교의 교과에 적용하도록 한 별저(別著)도 불원에 부인(付印)하기를 준비하고 있다. (1월 10일 야<夜>, 일람각에서)

 

육당은 또 이 글에서 “조선인의 자주적 입장에서 민족 사회 문화를 인과적, 체계적으로 서술하고자 했다”며 “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일관적(一貫的)이고 연기적(緣起的)으로 쉽게 쓰려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조선역사강화’는 ‘육당 최남선 전집’ 첫 권 첫머리에 실릴 정도로 육당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한국통사에서도 획기적인 저술이라는 평 입니다. 이 연재물은 1931년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발간됐는데 당시에도 ‘조선문으로 쓰여진 대표적 통사’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조선역사’는 출간 당시 ‘조선 민족과 조선 문화의 발전과정을 과학적 방법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조선문으로 쓰여진 대표적 통사’로 평가되었을 뿐 아니라(신석호, ‘조선역사 서평’, 청구학총 5, 1931, 182~184쪽), 근래에도 ‘현채(玄采)의 ‘중등교과 동국사략’ 이래 한국사 저술의 소성’으로 사학사에서 획기적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이기백, ‘한국사 연구에서의 분류사 문제’, 한국사학의 방향 5, 81쪽). 즉, 계몽사학에서 근대사학으로 전이하는 분기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박걸순, ‘1920년대의 민족주의사학’, 268~269쪽)

 

 

 

‘조선역사’는 그럼에도 책 말미에 붙인 부록 ‘역사를 통하여서 본 조선인’이라는 논문이 해방 후 비판을 받습니다. “미지근하고 탑작지근하고 하품 나고 졸음까지 오는 기록의 연속이 조선 역사의 외형”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의 하나이고 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래도록 민족적 응집과 국가적 성립, 역사적 단락이 똑똑하지 못한 점” 등의 내용이 조선 역사와 조선인을 비하했다는 것입니다. 이 논문은 동아일보에는 실리지 않았는데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으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만주건국대학 교수 시절 육당은 만선일보(滿鮮日報)의 편집고문도 맡았습니다.

 

“당시 건국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있었던 육당 최남선 선생이 편집고문이었었다.…(중략)…새로 출발하는 신문인데다가 그나마도 만주에서의 우리말의 유일한 신문이라는 점에 서로 그런 말은 자질구레하게 하지 않으나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었다. 편집국의 분위기가 지극히 화목했고 협조적이었다. 그것은 간부급의 인품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든 나는 이 시기처럼 직장에서 맡은 일에 열중한 기억이 드물다. 그걸 것이 고문(최남선), 국장(염상섭), 부장(박팔양)이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분들이었고…(중략)…이 시기의 잊혀 지지 않는 것은 편집회의였다. 자주 있은 것은 아니었으나 육당 선생도 참석하는 이 회의는 편집회의라기보다 육당 선생의 강의시간 같은 느낌이 짙었다. 신문 제작에 대한 것을 대강 이야기한 뒤에 어떻게 화제가 번지면 육당께서 그 해박한 지식과 견해를 숨김없이 피력했다. 그것도 학문상의 딱딱한 것이 아니고 지나간 생생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가령 신문학 초창기의 숨은 일화 같은 것, ‘광수가 이렇게 주장하는 걸 나는…’ 이런 식의 화법이었었다.” (안수길, ‘육당의 강의시간 같은 편집회의’,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소, 1978, 368~369쪽)

 

 

 

“1957년 10월 10일 세상에서 이르기를 ‘말하는 사전’이라던 그는 일생의 염원이던 역사 사전을 마치지 못한 대로 깊이 잠들었다. 그와 필자는 50년의 교분이 있다. 일제가 한창 강성하고 이 나라가 암흑기에 있을 1917년경 그에게 ‘우리 전도가 어찌될 것인가, 절망인가’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그렇다고 일 아니할 수야 있나요. 일하여야지요’ 하였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그는 일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그의 좌우명은 ‘태양같이 빛나게, 냇물같이 꾸준히, 부지런히 부지런히, 게으름으로 평생의 적을 삼자’는 것이다. 그도 역시 불행한 세대에 나서 그의 이상인 ‘태양같이 빛남’에는 몇 번이나 구름이 덮여서 흐릴 때도 있었으나 냇물같이 꾸준히 일하였다. 그의 사업기념전시회에 늘어놓은 유적을 지난 10월 10일 그의 돌아간 날에 보니 연대별로 늘어놓은 것이 길고 긴 줄을 이루었다. 한 개인으로 이만한 문화 공헌을 하고도 만년에는 대체로 실의의 날을 보낸 것을 회고하면 형언할 수 없는 감상이 가슴을 덮는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17 – 최남선 선생’, 기자협회보 1967년 11월호, 4면)

 

 

 

1954년경 한국사를 강의하는 육당 최남선 (사진제공 노양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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