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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창간기자 김정진(金井鎭)

Posted by 신이 On 5월 - 31 - 2016

  창간기자 김정진(金井鎭)(1886~1936) 

  1920년대 조선에서 ‘씨암탉’보다 귀한 희곡작가였던 운정 김정진(雲汀 金井鎭 · 1886~1936)은 창간 당시 가장 나이가 많은 기자(34세)였습니다. 염상섭, 한기악, 유광렬, 이서구, 김형원 등 20대 초반의 젊은 기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김정진은 그래서 ‘중노인’으로 통했습니다. 설립자 인촌(29세), 주간 장덕수(26세), 편집국장 이상협(27세)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그는 누구 못지않은 열혈 사회부 기자였습니다.

   “일반 민중의 신망이 두터우니만치 매일같이 조선 민족의 외치는 소리가 산같이 들어와 쌓여서 소화하기에 곤란하였고 외근기자들은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근심하는 지사의 기풍으로 한 정론가(政論家)로써 자처도 하고 다른 방면의 사람들도 그리 인정한 까닭에 가는 곳마다 정론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외근을 나가기는 교육 문제를 가지고 당시 전수학교(專修學校) 교장 오손자(吾孫子)씨를 방문하여 동화교육(同化敎育)에 대한 것을 3시간 이상이나 격론한 것이외다.” (김정진, ‘창간호 박든 그때 세월도 빠르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자 부록 5면)

   김정진 기자가 경성법전(法專)의 전신인 경성전수학교장을 만나  ‘3시간 이상 격론’을 벌이고 돌아와 쓴 첫 기사는 창간호 6면에 실린 200자 원고지 3장 분량의 ‘교육 보급이 급선무’라는 아비코가쓰(吾孫子勝) 학교장의 얘기였습니다.

   조선에 건너온 지 6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간 교육 방면에 다소간 발달이 있지 않은 바는 아니나 물질적 방면과 비교하면 미온적 보조로 몹시 더디게 진행하여 특히 괄목할만한 발달은 나타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즈음 상황이 변하여 사상 방면과 교육 문제에 관한 촉진운동이 자못 맹렬하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낳은 일련의 풍조가 조선에도 다소간 새로 유입된 결과인 것 같다. 이에 대한 이해론(利害論)은 다른 날에 이야기하고 나의 견지(見地), 즉 교육 당사자로서 보면 몹시 더딘 보조로 진행된 교육계의 운동이 오늘의 신풍조에 따라 그 보조를 재빨리 하고 있음은 실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늘 귀보(貴報) 창간도 역시 교육계 신운동을 의미하는 듯하여 실로 만강(滿腔)의 치하(致賀)를 드린다. 귀보는 특히 교육 방면에 대하여 다대한 지도를 아끼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과 조선의 문제 또는 조선 자체의 실력으로 논할지라도 요컨대 아는 것, 즉 지식이 아니면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조선의 현상과 일본의 문명 정도를 대조하면 각 방면에서 차이가 너무 심하다. 조선의 발달 정도가 일본과 동일한 지위에 이르기 전에 어떤 문제든 해결키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특파로 가서 기발한 재료를 수집한 것은 전남 고흥에서 경관이 제(祭)지내던 보천교도 두 명을 총살한 사건이었다.” (‘창간호 박든 그때 세월도 빠르다’ 중 김정진의 회고)

   김정진 기자가 전남 고흥에서 보낸 첫 기사는 동아일보 1922년 8월 24일자 사회면(3면)의 1/3 을 차지했고 9월 1일자까지 잇따라 추적 보도,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1922년 8월 16일 강증산(姜甑山)의 명일(命日 · 기일) 기도회를 감시하던 일경이 기도장으로 들어가려다 이를 막는 신도에게 육혈포를 쏘아 한명이 사망하고 한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현지에 ‘특파’된 김정진기자는 ‘경무국에서 발표한 바는 위와 같으나 나(특파원)의 조사한 바는 다음과 같다.’ 며 기도회 참석 신도 및 목격 주민, 출동 경관의 진술을 대비해가며 연일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습니다.

   ‘고흥총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여하(如何)한가’ (8월 24일자)

  ‘경관의 부상도 의문’ (8월 25일자)

  ‘총살된 5대 독자’ (8월 26일자)

  ‘사건은 극히 중대’ (8월 28일)

  ‘광주에도 여론 비등’ (8월 29일자)

  ‘고흥 총살사건이 일어난 현장’ (8월 30일자)

  ‘총살당한 박병채의 가정’ (8월 31일자)

  ‘주목할 검사의 태도’ (9월 1일자)

   “자식을 살려주시오. 무고히 총살당한 원수를 갚아주시오. 오대 째 독자 대신에 장승이라도 깎아 세워주시오 하고 가슴에 맺힌 원한을 부르짖는 광경은 아귀 같은 자들의 눈에도 눈물이 날듯하다…(중략)…박병채의 가족은 육십세나 되는 노모와 삼십육세된 그의 처가 있을 뿐이요 자식도 없으며 생활은 독자인 박병채가 유지하여 왔는데 지금 목숨이 붙어있는 두 과부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은즉 경찰에서는 무죄한 백성의 한 가족을 참살한 셈이니 이 원한을 어느 곳에 호소하면 좋으냐고 울부짖는 정경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노자로 쓰고 남은 돈 중에서 약간의 부의(賻儀)를 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목을 노아 울며 마을 밖까지 나와 일행을 보내는 그 가족의 모양은 황혼에 싸이어 더욱 비참하였다.” (8월 26일자 3면)

   그러나 일제는 ‘정당방위였다’는 수사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9월 5일 경성 종로청년회관에서 ‘인권옹호연설대회’가 열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을 알리고 5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김정진 기자는 그 해 9월 24일 발간된 ‘동명’ 제4호에 쓴 ‘5대 독자를 참살당한 비애 – 무저항자에게 정당방위란 말부터 골계(滑稽 · 웃기는 이야기)’ 라는 글에서 사건 취재 경위와 참상을 다시 한번 전하며 “나는 실지를 답사하고 심각한 비애를 느낀 동시에 현세에서 표방하는 소위 선악이라 함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얼마나 명확한 구별을 확립하여 있는지 새로운 의문을 기(起)케 한다.” 고 암울했던 시대 상황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신문기자실이 있는 곳은 총독부뿐이오 다른 관청이나 회사에는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동아일보 기자들이 매일 사무 보는 곳에 가서 기염을 토하는 바람에 체신국, 경성우편국, 경성부청 등의 순서로 만들어 놓기 시작된 것입니다.” (‘창간호 박든 그때 세월도 빠르다’ 중 김정진의 회고)

   “그(김정진)와 필자(유광렬)는 동아일보 창간호를 낼 때에 함께 사회부 기자로 일하였었다. 그에게 특색이 있다면 일본말을 일본사람보다도 더 잘하는 것이었다. 오래 일본에 유학하였으므로 일어에 능할 수는 있으나 그것도 지나치게 잘하는 것이다. 내내 그를 일본인인줄 알았던 경성부 관리들은 ‘동아일보 같은 민족주의 신문에도 일본인 기자가 있다.’고 수근대기도 했다. 그의 이름 또한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인 이름과 비슷하여 일본 관리들이 그를 ‘가나이(金井)상’이라고 불렀다가 그에게 호되게 호령을 들은 일도 있었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 김정진 선생’, 기자협회보, 1969년 4월 11일자)

   일본 유학 중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김정진은 동아일보에 있으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0년 6월 7일자부터 6월 15일자까지 8회 연재한 ‘4인의 심리’는 파리강화회의를 다룬 것으로 그의 첫 희곡 작품이었습니다.

   파리강화회의의 전말을 대화체로 구성한 이 작품은 그가 기자가 아니었다면 다루지 않았을 소재였습니다.

 

  장소와 시대

  시일 1919년 1월

  장소 프랑스 파리, 프랑스 외무부 외무대신실

  등장인물

  프랑스 수상 클레만소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이태리 수상 올란도

  미국 대통령 윌슨

  (막이 열리매 프랑스 수상 클레만소,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이태리 수상 올란도의 삼 수상이 테이블을 중앙으로 하고 정좌하여 상의하고 있다.)

  올란도(시계를 쳐다보며) 우리 미국 동관(同官)은 늦기도 하군.

  클레만소(냉정한 어조로) 그들의 느럭느럭하는 것은 버릇이니까. 그 정략에 대하여는 암만 그지마는 변개치 아니하겠지?

  로이드 조지 그가 늦게 오는 것은 다행이야. 없는 이 사이에…(중략)… 우리들의 태도를 미리 정하여 두는 것이 어떠하오.

  4대국 수뇌들의 거들먹거림과 술수를 희화적으로 그린 이 작품을 통해 김정진은 조선의 독립이 ‘열강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아직 요원하다는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작품 ‘4인의 심리’에 따르면 김정진은 조선의 해방이 세계 정세와 연관할 때 결코 용이치 않음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이나 민족사적 당위성에 의지함 없이 그 사실을 기자의 눈으로 냉연히 바라보고 있다.” (‘기적 불 때’, 윤진현 책임편집, 범우사, 2006년, 663쪽)

  이외에도 그는 틈틈이 연극비평을 신문과 잡지에 게재했으며 ‘연극의 기원과 희랍극의 고찰’ 같은 글을 통해 서양의 연극이론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엔 씨암탉 보다 귀한 희곡작가이다. 근래에는 시대일보에 꾹 박혀 있더니 또 근근래에는 자택에 꾹 박혀있다고 한다. 얼골이 적은데다가 큼직한 안경을 써서 ‘안경 뒤에서 다닌다’는 말이 있다. 또 키가 몹시 짝달막한데 사무용 가방은 트렁크만한 것을 들고 다닌다. 소위 문사들이 새파란 젊은 애송이가 만흔데 씨는 독특히 사십을 넘겼다. (춘해 방인근, ‘문사들의 이 모양 저 모양’, 조선문단 1925년 2월호, 105쪽)

  짤막한 글이지만 운정 김정진의 외모와 언론인으로서의 활동과 내성적인 성격, 그리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창작 활동을 시작한 이력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김정진은 구한말 대제학을 지낸 유정수(柳正秀)의 사위로, 명망 있는 집안의 자손이었습니다. 문중에서 촉망 받는 인재였던 김정진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열두 살 되던 1898년 사립 보흥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립 일본어학당 일본어과에 입학하여 1905년 수료하였습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는 동경수학원에서 공부하였고, 1908년 4월 일본 도쿄 사립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여 1909년까지 이곳에서 공부하다 동경 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하는 등 오랜 일본 유학생활로 ‘일본말을 일본사람보다도 더 잘한다.’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염상섭 오상순 변영로 김억 등이 참여한 ‘페허’ 동인지 발간의 실무를 맡아하기 위해 1923년 초 동아일보를 떠난 김정진은 최남선이 주도한 시대일보가 창간(1924년 3월 31일)되자 지방부장으로 들어가 후에 조사부장을 지냈습니다. 시대일보가 재정난으로 못나오게 되자 호치신문(報知新聞) 조선특파원 등을 거쳐 조선방송협회 제2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1936년 12월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4인의 심리’외 김정진은 ‘15분간’  ‘기적(汽笛)불 때’ ‘전변(轉變)’  ‘잔설(殘雪)’  ‘그 사람들’  ‘찬웃음’ ‘약수풍경(藥水風景)’  ‘꿈’ 등 11편의 단막 희곡과 ‘독와사(毒瓦斯)’ 등 13편의 소설 · 평론 · 수필 등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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