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자 이서구(李瑞求) (1899~1981)
일제강점기, 정치가 없는 시절이었던 만큼 신문사에서 사회부의 역할은 컸습니다.
유광렬과 함께 창간 동아일보의 사회부 기자로 맹활약한 이 중에는 ‘홍도야 우지 마라’의 노랫말을 지은 이서구도 있었습니다.
고범 이서구(孤帆 李瑞求 · 1899~1981) 선생은 “머리 깎고 학교에 가는 것은 친일파나 하는 짓”이라는 완고한 조부 때문에 경기도 안양 산골에서 문학서적만 탐독하다 21살의 나이에 동아일보 창간 기자가 됐습니다.
“무엇이든지 글을 써보시오.”
한창 창간 준비에 바쁘던 화동의 동아일보사를 찾아갔을 때, 편집국장 이상협은 면접 자리에서 이렇게 주문했습니다.
이서구는 즉석에서 ‘서울 스케치’라는 수필을 써서 내놓았습니다. 그는 그 해 1월 매일신보 신춘문예 공모 단편소설 부문에서 ‘고독에 우는 모녀’로 2등을 한 글쟁이였습니다.
기다리노라니 요행히 합격통지가 날아왔습니다.
“그 기쁨, 그 감격은 아무나 잡고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서구, ‘언론비화 50편’, 123쪽)
당시 사회부장은 이상협이 편집국장과 겸직을 하고 있었고 기자로는 경험 있는 석송 김형원, 종석 유광렬, 운정 김정진 등 선배들이요 신출내기 기자는 이서구 한 사람뿐. 어쨌든 기자 노릇은 하게 되었으나 어떻게 기사 재료를 구할지,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부장 영감(令監)의 지시대로 움직일 작정’이었는데 이상협이 그를 불렀습니다.
“이서구 씨”
“네-”
“지금 곧 인력거를 타고 가 총독부 의원장(醫院長)을 만나보고 태형과 인체와의 관계를 물어보고 오시오.”
창간호가 나올 즈음, 마침 태형이 없어져 볼기 맞는 일이 없게 되었으니 의학자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나 듣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일생에 그날 그때같이 답답하고 아득할 때는 없었다.’ (이서구, 별건곤 1928년 2월호, 67쪽)
신입 기자의 첫 취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인력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완성한 기사는 다행히 무사통과됐습니다.
육체보다는 정신
몸을 앗김보다 명예를 위하라
방하 총독부 의원장의 말
4월 초하룻날부터 태형이 폐지되니 기쁜 일이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만일 태형이 없어졌다고 일반 우민(愚民)들이 마음 놓고 범죄하기를 어렵지 않게 여길진대 도리어 폐지하는 것이 불가 할지도 모르겠으며, 설혹 태형이 폐지된다 하더라도 구류가 대신 있으니, 볼기 맞기도 아프겠지만 어두운 구류간에서 구린내를 맡고 지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태형은 우매한 민족에게만 한하여 쓰는 벌이라고 말들은 하나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매를 때리는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름이 없다. 서양 사람이라고 자식을 때리지 않는 것은 아니니, 부모 되어 자식은 때리면서 정부 되어 인민을 때리는 것을 그르니 옳으니 하는 것은 어리석다.
태형 폐지는 비록 민지(民智)의 발달과 문화의 진보를 따라서 정부에서 마땅히 단행할 바나 만일 일반 인민들이 그 뜻을 모르고 범죄를 더 자주 하거나 형벌을 가벼이 여기는 폐해가 생기게 되면 어느 편으로 보든지 섭섭한 일이니 아무쪼록 일반 인민들이 문화적 자각을 속히 하여 육체보다는 정신에, 몸의 아픔 보다는 명예의 손상을 더욱 부끄럽게 여기어 태형을 폐지한 당국의 주지를 본받기를 바란다.
어느 날은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화재가 나서 뛰어갔으나 일본인 순사가 두루마기에 옹구바지를 입은 그를 ‘네가 무슨 기자냐.’는 눈치로 접근도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그는 다짜고짜 경찰서장실로 찾아가 따졌습니다.
“한복을 입었다고 멸시하는 것이냐. 한복은 우리가 입어온 우리 옷인데 어째서 무시하는가. 그 저의가 불쾌하다.”
몸집도 컸지만 목소리도 커서 경찰서가 들썩들썩했습니다. 이서구는 결국 경찰서장의 정식사과를 받아냈습니다. 그날 오후 문제의 그 일본인 순사가 신문사를 찾아와 편집국 직원들이 다 보는 가운데서 머리 숙여 백배 사죄했습니다. 이 소문이 안양 고향에까지 퍼져 덕분에 숙부가 일부러 상경, 양복을 한 벌 맞춰주었다고 합니다.(‘언론비화 50편-원로 기자들의 직필수기’, 한국신문연구소, 1978년, 124~125쪽)
이서구는 사회부 기자 생활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기자 중에서도 사회부 기자는 항상 시중을 방랑하며 거리를 탐방해야 하는 형편이고 보니 오전 중에는 담당 출입처를 순회하지만 오후 마감이 되면 종로 거리로 나서서 암행어사나 된 것 같이 한 번 더 경찰서를 기웃해야 한다. 당시 경찰은 고등계(高等係)가 주가 되어 상해, 간도 방면에서 잠입한, 놈들이 일컫는바 불령선인(不逞鮮人-당시 일본인들은 독립투사를 이렇게 불렀다)을 잡아다가 온갖 악형(惡刑)을 다하는 데, 오전 중 신문기자들이 기웃거릴 때는 무사태평한 듯 위장하다가 오후부터 고문을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또 한 번 아니 갈 수 없었다. 그때 고등계 주임은 미와(三輪)라는 경부(警部)로 겉으로는 순해 보이나 잔혹하기가 독사와 같은 자. 독립투사를 잡아들이고 고문을 하는 데는 악명 높은 자였다. 신문이 주로 일인(日人)의 잘못을 꼬집고 상해임시정부에서 하는 일이라면 음으로 양으로 두둔을 하는 형편이니 일인들은 동아일보를 마치 독립신문같이 눈독을 들이는 판국에서 기자 노릇하기도 힘이 들었다. 어느 경찰서이든지 동아일보 기자가 기웃거리면 서류를 감추고 고문을 숨기느라고 신경을 썼다. 그들이 그렇게 나오니 이쪽에서도 대책을 세워 오전 중에는 타사와 같이 취재를 하는 체하고 오후가 되면 또 한번 기웃거리게 되니 독립투사를 취조하던 형사들은 거의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미움을 받는다고 그만 둘 수는 없는 일. 무던히 참고 지내는 동안 두둑해진 것은 배짱 뿐. 그 덕분에 나는 지금도 여간한 일에는 그리 놀라지 않는다.” (위 책, 126~127쪽)
이서구 선생은 초창기 동아일보에 관해 많은 기록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여기에 ‘그때 그 시절’이라 함은, 동아일보 창간 때부터 약 2년 동안을 말함이다. 그때 동아일보는 몹시도 가난했었다. 위로는 양기택 유근 노인이시며 장덕수 김명식 이상협 등등 간부로부터 급사에 이르기까지 점심은 의례히 호떡 한 조각이나 설렁탕이었다. 그 대금조차 밀려서 창피한 꼴을 가끔 보는 형편이었다. 나는 그 때는 많이 먹을 때이라 점심을 가끔 2인분을 먹었다. 그럴 때마다 하몽은 1인분 추가 대금을 물어 주었었다. 그때의 그 따뜻한 정이란 내 일생에 처음 겸 마지막 일게다. 지금에 매일신보의 최고 간부가 된, 하몽이 100원어치 요리를 사준대도 그때의 그 기쁨, 그 감격은 나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매일 사설 원고는 늦어도 한 시나 두 시까지는 공장으로 나가야 일면이 먼저 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논설반이 진을 벌이고 있는 남쪽 방에서는 아직도 쌈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이 쌈이 끝나지 못하면 사설의 집필이 되지 않는 줄을 잘 아는 편집국원들은 징고소(徵苦笑)를 띄고 논설반 제공(諸公)의 둘러앉은 곳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의 논객으로는 장덕준 장덕수 김명식 세 분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아침에 모이면 무슨 문제든지 걸어 놓고 피차에 의견 교환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의사가 일치되지 않은 때는 쌍방이 일보도 물러나지 않고 격론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어느 때인가 정열가의 장덕준 씨는 걸상을 때려 부셨을 때도 있었다. 이같이 시비를 가리다가 겨우 결론을 얻게 되면 비로소 그 중에 한사람이 곧 집필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었다. 즉시 큰 쌈이 날 뜻 원수나 지을 뜻 싶다가도 결론만 얻으면 순간에 논설반에는 다시 춘풍이 떠온다. 나는 이만큼 감격된 장면을 그 후 별로 보지 못했다. 종일 겨우 빵 한쪽에 허기를 끄면서도 입을 열면 불을 토하는 논객들의 높은 기개는 나의 일생에 큰 감명이 되였든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보도만을 우리의 직분으로 알지 않았었다. 월급은 못 받아도 배는 주려도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쩌랴 하는 자부심이 우리의 전부를 지배했든 것이다. 한강 유역의 치수 공사가 지금같이 완비하지 못했든 때라 뚝섬 동막 영등포 일대는 해마다 수재에 우는 사람이 수천 수만에 달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네에게 옷을 주고 밥을 주고 집을 주려고 애를 썼었다. 뚝섬까지 밥을 지어 구루마에 싣고 우리가 끌고 나가서 피난민 합숙소로 다니며 밥을 손수 퍼 돌렸었다. 어느 때인가 점심도 굶은 장덕수 씨와 나는 영등포 이재민에게 백미 10석을 분배하기 위하야 기차를 탔었다. 황토에 물든 한강의 밀리는 물결 위에는 함지박이 떠다니고 집섬이 떠다니고 초가지붕에 박 넝쿨이 언친 채 닭이 올라앉은 채 떠내려갔었다. 3등차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은 설산(장덕수)은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가 넘게 긴 수염 꽉 다문 입, 감은 눈두덩 속에서 좌우로 돌고 있는 동자(瞳子). 나는 그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존경함 즉한 감동을 느꼈었다. 내 배를 골아가며 남의 배를 걱정을 하러 다니는 우리의 걸음 거리에는 밥으로도 도우지 못할 딴 활기가 솟는 것 같았었다. (‘그때 그 시절의 회상’, 삼천리 제11권, 1939년 1월 1일, 103~105쪽)
‘우리는 월급을 못 타두, 점심을 굶어두, 찔끔찔끔 울어가며 신문을 만들었어!’
지금은 세종로 일각에 일대 신문왕국을 과시하고 있지만 그때는 화동 막바지 기와집을 얻어서 허술한 대문에 대문보다 더 큰 동아일보사라는 간판을 달고 지냈다. 우리들 편집국원들은 양철지붕을 덮은 판잣집 속에서 기사를 썼다. 어느 무덥던 여름날 고하 송진우 선생이 ‘이거 뜨거워서 살겠느냐.’ 영업국장 이운 씨 부르라 하시더니 양철지붕 위에 쌀가마니를 덮으라고 이르시던 일이 생각난다.
요사이 신문사는 너무 기업화했는지 계급이 뚜렷하고 상하가 분명하여 사회부 기자쯤 사장 만나는 일은 좀체 없는 상 싶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박영효 김성수 송진우 씨 등 역대 사장님은 (박영효 씨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어쩐지 젊은 기자들을 대견해하시고 기특히 보시고 언제든지 거두어 먹이려구 하셨다.
‘야! 고범(孤帆)아 떡 볶기 안 먹으려느냐? 윤빠-에 기별해라’
석양 때가 되면 마감이 끝난 편집국에 모두들 서성거리구 있으려면 송 사장님이 사장실에서 건너오신다.
‘오신다 오셔…’
기다렸다는 듯이 긴장해진다.
‘고범(孤帆) 어서 문 열어드려…’
졸지에 내가 환영위원으로 추천된다. 고하 송진우 사장님은 나에게는 왼 일인지 퍽 너그러우시었다. 꾸지람을 들어도 싱글벙글 웃고 듣는데서 ‘그놈, 배짱이 됐다.’고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다급한 일이 생기면 사뭇 떼를 썼다. 처음에는 딱 잡아 떼시다가두 나중에 가서는 OK이시다. 그런 때마다 나는 시골집에 계신 아버지를 연상하고 ‘아버지보다 더 좋으신 분이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고하 송사장님을 문 열어 맞이하면 벌써 눈치를 채신다. 월급도 제대로 못 나가는데 마감 후 석양판에 촐촐해 하는 서글픈 얼굴을 지나쳐 보시지 않는다. 그래서 곧 윤빠-로 몰려가게 된다. 그때나 이때나 나와 종석 유광렬 군은 술을 못 마시는지라 언제나 술상 한 귀퉁이에서 윤 마담이 넌지시 갖다 주는 떡볶이로 배를 채우곤 했다. 윤빠-라 함은 화동 신문사 뒷골목에 사는 尹召史가 허가 없이 단골손님만 받는 내외술집이었다.
편집국장은 하몽 이상협 선생- 이 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국장자리에 도사리고 앉아서 신문하나 옳게 만들기에 정력을 기울인 분이다. 까딱 잘못 걸리면 압수 정간을 맞는 판이라서 편집국장의 임무는 중대하였다.
신문 검열은 총독부 경무국에서 했다. ‘니시무라(西村)’라는 자가 검열관인데 한국말 잘 한다구 뽐내던 자이다. 어느 날인가 ‘휴지통’에 모조리 깡그리라는 말이 실렸다. 물론 하몽 선생이 쓴 글이다. 이날 전화가 왔다. ‘니시무라’이다. 하몽선생을 찾는 것이다. 또 무슨 트집을 잡나 했더니 ‘니시무라’가 허허 웃으며 하는 말이 “내 십여 년 조선말을 다루어 왔으나 모조리 깡그리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들었소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좀 압시다.” 항상 거드림 피던 ‘니시무라’도 하는 수 없이 하몽 선생에게 고개를 숙이고 만 것이다. ‘니시무라’를 아니꼽게 보신 하몽 선생인지라 그는 언제나 ‘휴지통’을 집필할 때마다 궁벽하고 까다로운 말을 골라서 턱없이 잘난 척 하는 ‘니시무라’의 기를 꺾던 일이 생각한다. (‘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3년 8월호 12쪽)
“신문사는 화동(花洞) 138, 조선식 가옥에 유리창만 달고 사용했다. 게다가 편집국은 본채와 사랑방 사이에 송판으로 돌려 막고 양철을 덮은 날림 집이었는지라 한창 더울 때는 양철 지붕에서 불이 날 것 같아 가마 짝을 엎어놓고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서울에 숙소가 없는 나 같은 젊은 기자는 한여름을 편집국 넓은 책상을 침대삼아 곧잘 자진 숙직을 했다. 말이 좋지, 잘 곳이 없어서 등걸잠을 자는 형편이었다. 책상 위에서 잠을 자고 술국밥, 설렁탕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동지는 나 외에도 김동철, 김정진, 김형원 등 여러 동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도 인력거를 타고 안국동 네거리를 지나 종로거리로 내리 달릴 때
‘동아일보’ 기자다.’ ‘또, 무슨 중대 사건이 생겼을까.’
수군대는 시민의 소리가 귓결에 들려올 때 제법 사나인 체 으쓱해지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그렇듯 동포들의 성원과 기대 속에 자라났다.
그때 나는 사회부 외근기자였다. 유광렬, 김정진, 노자영 등 같은 또래가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창간 당시의 사회부장은 하몽 이상협 씨가 겸임을 했다. 횡보 염상섭, 순성 진학문 씨는 고급 간부로 직접 편집에는 나서지 않았고 우보 민태원 씨는 신문사에서 뒷돈을 대서 동경서 대학을 다니고 번역소설을 늘 보내왔다. 창간호를 내기 위해 외국의 명사들의 축사를 받게 되었는데 천리구 김동성 씨는 중국에 가서 그 곳 명사의 축사를 한아름 안고 왔으니 모두가 한민족의 고달픈 사정을 격려해주는 원고이다.
외근기자는 약간의 외근 수당도 있어 일선기자는 다같이 65원을 받았다. 전차 패스, 기차 패스를 지니게 되고 인터뷰를 나갈 때는 인력거를 태워주는 맛에 월급이 밀려도 군소리 한 번을 못했다. 그저 마냥 살아가는 보람에 취한 폭이다. 신문의 정간이 잦아지면 신문 값 광고료는 못 받게 마련이라 입사한 지 두 달인가 석 달부터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월급은 못 받고 하숙비는 밀리고 보니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인력거만 타고 나서면 신바람이 났다.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겨우 마감이 끝나면 기진맥진이다.
‘고범, 배고프지…’
소리가 난다. 설산 장덕수 선생이 아니면 하몽 이상협 선생이다. 존경하는 선배에게 얻어먹던 설렁탕의 감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기자들은 그저 그런대로 살아갔으나 신문배달부들은 그렇지 않았다. 월급을 주지 않으면 신문을 들고 나가지를 않는다. 애써 찍어 논 신문이 해가 저물기까지 그냥 쌓여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어느 날인가 중대사건이 있어서 호외를 찍었다. 호외는 신속한 게 특색이요 생명이다. 이 날도 배달부들이 나가지를 않았다. 젊은 기자들은 울분했다.
‘자, 우리가 들고 나가자.’
누구인가 소리를 쳤다.
‘나가자’
소리가 뒤를 따랐다. 그래서 우리들은 제각기 호외 한 뭉치씩 들고 거리로 뛰어나갔다.
‘아니, 기자가 호외를 돌린다.’
시민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호외를 돌리는 기자들은 상쾌했다. 호외를 같이 돌리던 동인 중에 종석 유광렬 군이 아직도 신문인으로 활약을 하고 있음은 무한 부러운 일이다. 호외를 돌리고 돌아오니 편집국 어른들은 마치 개선장군이나 맞아들이듯이 문간까지 나와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그 때 우리는 모두들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이제는 마치 무슨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때의 동아일보는 그렇게 살았고… 키웠다.
지금도 동아일보 창간호를 내던 그 때의 감격은 아직도 내 가슴에 생생히 남아있다. 어쨌든 동아일보는 이천만의 표현기관이라는 자부와 패기를 가지고 어떠한 박해와 고난에도 굴치 않던 영광을 자랑하여 마땅하리라. (‘동아일보 창간과 나의 기자생활’, 신문평론 4호, 1964년 7월호, 60~61쪽)
“동아일보적 일이다. 당시 사회부장은 석송 김형원, 동료로는 유광렬, 김정진 두 친구가 있었다. 월봉 60원에 외근수당 5원, 도합 65원 짜리가 해만 지면 명월관, 국일관, 여흥관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밤을 밝히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이고 해만 저물면 누구인가 부른다. 어느 때는 고하 선생이나 설산 선생이 귀빈 접대를 할 때 지명도 있다. 방을 골라 정하고 기생을 알맞게 부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난봉기가 풍부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평소에는 ‘孤帆은 난봉꾼이야.’하고 은근히 침을 놓던 선배님네도 요정으로 손님을 청할 때에는 꼭 나에게 지령이 내린다. 덕분에 요정 출입은 잦았고 그러노라니 애인도 생기고, 눈물도 흘리고, 어려운 고비도 숱하게 넘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진정 철없이 뛰었으며 그러면서도 억세게 인복을 타서, 모든 동지들에게 버림을 받지 않은 것은 진정 고마운 일이다.
어느 해 겨울인가 날씨가 졸연 영하로 떨어졌건만 동복은 모조리 전당포 창고에 보관돼 있으니 외출도 못할 형편.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어느 인심 좋은 기생방에서 ‘하이네’를 읊조리노라니 사회부장 석송이 찾아왔다. 말하자면 상관이다.
‘이 사람아, 어쩌자고 이러고 있는 거여’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동복 잡힌 전당표 내놓게. 곧 찾아 줄께. 내일부터 출근해’
그때 언론계는 이만큼 관대했다. 그 혜택을 가장 많이 입은 자가 곧 나이다. 좀 구식 같지만 그때 언론계는 의리와 인정으로 얽히고, 주색에 대해서는 논외로 쳤으니 그래서 나라는 것이 명맥을 부지했는가보다.” (이서구, ‘의리와 인정과 멋과 익살의 시절’, 언론비화 50편 – 원로 기자들의 직필 수기, 한국신문연구소발행, 1978년, 132~133쪽)
“그 무렵 나는 권농동 막바지 종묘 뒷담 밑에 있는 청호부인이라는 할머니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하숙비를 제대로 못 냈음은 물론이다. ‘신문사에 취직이 됐으니 하숙비쯤은 아무 걱정 마세요’ 큰 소리는 쳐놓았지만 하숙비는 여전히 체납이다. 월급이 약간 나오기도 했지만 무직시절과는 달라서 돈 쓸 일이 부쩍 늘었다. 게다가 주머니는 텅텅 비었건만 해만지면 명월관, 장춘관이다. 선배님들이 술 사주지 말고 현금으로 주었으면 얼마나 요긴하게 쓰겠는가. 안타깝기 짝이 없으나 그것도 팔자다. 나는 늘 기분 좋게 잘 놀았다. 본디 나라는 사람은 타고난 성품이 인생을 편하게 살자는데 기울어져서 웬만한 고생이나 한두 끼 결식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쳐도 잠시 생각해봐서 열두 번 땅재주를 넘어도 당장 어쩔 수 없는 일이면 그 걱정은 내일로 미뤄두고 오늘이나마 심사를 편히 지내자는 것이 나의 좌우명이다. 아무리 애를 태우고 조바심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보면 발버둥을 치는 것은 그야말로 낭비요 도로일 뿐 얻는 것은 수면 부족과 신경 쇠약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무리 궁색하더라도 궁기는 늘 감추고 지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운이 좋아서 대 신문사에 적을 두고 인력거 위에서 거드럭거리는 판국에 천하를 굽어볼 패기조차 없으면 그것은 마지막이다. 권농동 할머니는 하숙비가 밀리자 쌀이 떨어졌다고 투덜대신다. 나는 하숙집에서 몸만 빠져나와 숙소를 옮겨 버렸다. 그게 바로 신문사 편집국이다. 널따란 책상을 침대로 대용하니 삼복더위에도 바람이 잘 통해 일등호텔이다. ‘고범、오늘 저녁부터 나도 사(社)에서 자겠어’ 선배에 대한 예절이 밝기로 유명한 경제부 김동철(金東轍)군이 들이닥치고 뒤를 이어 사회부의 김정진(金井鎭)군이 기어들었다. 이제는 외롭지 않다. 세 사람이 제각기 넓고 긴 자리에 누워서 천하대세를 논하면 배고픈 것쯤 문제가 아니다. ‘야, 이놈들아 그만 일어나!’ 구수한 노인의 인정어린 음성과 함께 지팡이로 책상을 땅땅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침잠이 미처 깨지 않은 삼총사는 깜짝 놀라 일어난다. ‘아니 누가 꼭두새벽부터 야단이야!’ 볼멘소리를 하고보니 유근 선생이 아닌가. 애국지사요 편집 감독이신 대 선배시다. 모두들 벌떡 일어나 경의를 표한다. ‘너희들 춥겠다. 내 술국밥 사줄께 같이 가자’ 술국이 그렇게 좋은 줄은 미처 몰랐다는 듯 게걸스럽게 먹는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지금도 화동 막바지 술국집터를 지날 때마다 옷깃을 여미며 유 선생의 명복을 빈다.” (이서구, 동아일보 1972년 12월 15일자 5면, 고범역정(孤帆歷程), 기자수첩 반세기 ⑩ ‘술국과 명월관’, 주머니 비어도 명월관 무상출입 – 가난해도 고고했던 지사(志士) 유근(柳瑾)씨)
이서구는 1921년 8월 퇴사했다가 1923년 5월 재입사했습니다. 그가 재입사하던 해 여름, 큰 해일이 나서 온통 물바다가 되는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서구는 창간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현장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진남포, 용강, 정주, 용암포, 용천 등지에서 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수해상황과 수해구제 활동을 발 빠르게 보도했습니다.
이서구는 재입사 이듬해인 1924년 5월 다시 퇴사해 매일신보를 거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조선일보 동경특파원 신분으로 일본에 유학을 간 그는 동경 유학생 중심의 연극단체 ‘토월회’를 창립하고 그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그 후 매일신보 사회부장을 지내고 1929년부터는 태평레코드, 경성방송국, 동양극장 등에서 극작가로 활동했습니다. 그가 작사한 대중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가 ‘홍도야 우지마라’는 온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거둬주는 바람이 분다
광복 후 이서구는 방송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950년대까지 수많은 라디오 드라마 대본을 썼고 TV가 등장한 이후에는 ‘장희빈’, ‘강화도령’ 등 역사극을 많이 집필했습니다.
‘활동사진이 스크린에 비치기까지’(1회) 동양영화회사 이서구. 1929년 12월 4일~7일까지 4회 연재했습니다.
하몽 이상협과 함께 조선일보로 옮겨간 이서구와 동아일보에 남아 있던 동료 김동진(金東進) 기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
“언젠가 제동에서 미녀 자살미수사건이 났다. 첫째 필요한 것은 그의 사진이다. 주인공은 이미 병원으로 실려 가고 대문 앞 단간 방에는 의복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먼저 온 사람이 있으니 가슴이 덜컥. 김동진(金東進)군이 한걸음 먼저 와서 사진을 찾는 눈치다. 일이 이렇게 되면 전면대립이다. 사진을 누가 먼저 찾느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방으로 뛰어든 나는 김 군과 둘이서 사진을 찾게 되니 우정도 의리도 없다. 먼저 찾자는 것이 욕망의 전부다. 한참 뒤지다가 결국 사진은 발견되었으나 두 사람이 동시에 사진을 반씩 움켜쥐게 되니 일은 난처해졌다. 누구인가 한사람이 양보를 해야 하겠는데 마주잡고 놓지를 않으니 사진은 반쪽씩 나누어 갖는 외에는 도리가 없다. 기가 막혀서 슬쩍 사진을 보니 상반신은 내가 잡고 김 군은 하반신이다. 하늘이 도우신 듯 기뻤다.
‘김 군! 이대로 잡고 있다가는 사진은 반쪽이 날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내가 유리해. 내가 잡은 쪽에 얼굴이 있지 않나.’
김 군은 판단이 빨랐다.
‘그럼, 어떡하지…’
나는 김 군의 눈치를 살피며 타협안을 내놨다.
‘사진은 얼굴이 제일인데 내가 얼굴을 잡았으니 여기서 양보를 하지.”
김 군은 한참 있다가
‘그럼 신사협정이다. 자네가 먼저 가져다가 동판을 뜨고 곧장 내게 돌려주겠나… 그럼 내가 양보하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약속인들 못하겠는가. 나는 곧 수표동(水標洞) 사(社)로 달려가 사진을 내놓고 하몽 선생에게 김 군과의 언약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했다. 하몽은 백전노장이다. 그냥 잠자코 사진을 동판부로 보내더니 나를 부른다.
‘고범(孤帆), 이것 가지고 일찍 나가 한 잔 하시오.’
금일봉이다. 그래서 신문기자란 의리도 인정도 몰각해야한다는 비정을 실감했다. 나중에 들으니 역시 동아일보였다. 김 군의 전화는 꼭 한번 걸려오고 다시는 없었다는 것이다. (언론비화 50편 – 원로 기자들의 직필 수기, 한국신문연구소발행, 1978년, 127~128쪽)
그 김동진이 그 뒤 이서구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군(君)은 낙천가이다. 낙천가는 대개 두뇌가 둔하다. 그러나 군의 두뇌는 몹시 반비례할 만치 예민하여 홍군(紅裙·붉은 치마·미인 또는 예기<藝妓>)에 휘감기어 이삼일을 결근하는 때가 있을망정 일단 출근하면 맹호 같은 기세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군은 천재적 기자이다. 항상 태도가 유순하여 타인과 충돌하는 전례가 없을 만치 온후하건만 나는 군에게 대한 경계가 풀리지 않는다. ‘골탕을 먹이려고 하지 않나?’ 하는 의심이 스러지지를 않는다. 이것이 군을 대할 때마다 일어나는 불안이다.” (호외 193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