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11. 초대 사장 박영효(朴泳孝)

Posted by 신이 On 5월 - 23 - 2016

초대 사장 박영효(朴泳孝)(1861-1939)

 

「동아일보」 박영효 초대 사장은 꼭 두 달간(1920.4.1~6.1) 재직했다. ‘사원록’의 제일 첫 머리에 기록돼 있는 것으로 미뤄 ‘사번(社番) 1번’이다. 그가 신문과 인연을 맺기는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의 창간을 추진한 것이다.

 

 1920년 1월 16일, 서울 원동 138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창립사무소에서 발기인 총회를 열고 발기인 사장 주간 편집국 및 영업국 간부를 선출한 결과 △설립자 겸 발기인대표 김성수, △사장 박영효 △편집고문 양기탁 유근 △주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 △영업국장 이운 △공장장 최익진이 호선되었다(동아일보사,1964, 2쪽).

 

 귀족의 작을 가진 박영효를 사장으로 선임한 것은 발행 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최초에 창간 당시의 사장이 박영효 씨였습니다. 그분이 이왕가의 친척되는 분으로 그때 귀족의 작을 가졌던 사람이지만 옛날에 개화운동에 관계했고 민족정신도 있고 총독부에서 보기에도 호락호락하게 보지 못할 사람이 좋겠으므로 이 양반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해서 박영효씨를 사장으로 모셨어요.”(창간 당시 중앙학교장 최두선, 「동아일보」 1960.4.1.)

 

“창간 당초의 사장은 옛날의 개화당 지사로 고 김옥균 씨 동지였고 후에 조선귀족이었던 고 박영효(후작) 씨었으니, 이는 총독부 당국과의 조절을 원만히 하려던 수단이었으나…”(설의식, 「동아일보」 1950.4.2.)

 

 박영효가 두 달 만에 사장직을 그만 둔 것은 1920년 5월 4일자부터 6회에 걸쳐 연재한 ‘조선 부로(父老)에게 고함’과 5월 8, 9일의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棒)’으로 생긴 문제 때문이었다. 두 사설은 유교문화의 폐해를 지적한 내용인데 유림(儒林)에서 반발, 불매운동까지 벌이려 하자 박영효 사장은 사과문을 싣도록 했고 사원회의에서 거부되자 사장직을 사임했다. 그 와중에 양기탁 편집감독도 회사를 떠났다.

 

 “신문이 발행된 지 수월을 못 지나서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것은 치자(治者) 측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민중 측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권덕규 씨가 ‘가명인 두상 일봉’이라는 논문을 동아일보 지상에 게재하게 되어서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것은 조선 유생들이 중국의 명나라를 마치 자기 나라인 것 같이 숭앙하는 것을 공격한 것이었다. 유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리하여 사장 박영효 씨에게 사과문을 발표하기를 요청하였었다. 박 사장은 이 문제를 퍽 딱하게 생각하여서 그에 응종할 것을 신문 관계자들에게 권유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편집국에서는 그에 관하여 회의를 개최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사장은 입장이 거북하니 그에 응종하지 아니하면 자기는 사직하겠다고까지 주장하였던 모양이다. 이때에 장덕준 씨가 들어와서 ‘그것은 안될 말이요. 대감, 사직하겠으면 사직하십시오.’하고 강경히 들이댔다. 그래서 박사장은 사직하고 동아일보는 사과문을 내지 않고 말았던 것이다.”(김준연, 「동아일보」 1960.4.1.)

 

그는 창간 40주년 기념좌담에서 진학문 김동성 고희동 등 창간 동인들과 중앙학교 교장 최두선은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전하고 있다.

 

○최두선=권덕규라는 분이 내가 중앙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같이 있던 분으로써 한국역사와 한글을 가르치던 분인데 문장에 대해서 재주를 갖고 있어서 가끔 기고를 했는데 자기서명한 글씨로써 이런 것을 기고해서 동아일보에서 냈어요. ‘가명인 두상 일봉’이라는 제목으로 수회에 걸쳐서 특별한 것을 냈다는 말씀입니다.

 

 취지는 뭣이냐 하면 한국 사람이 유학을 수입해 가지고 그만 중국을 숭상하는 사대사상이 흘러서 이것이 민족정신에 큰 해를 끼쳤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중국 것은 훌륭한 것이고 뭐든지 중국 것은 좋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한국 사람이 가짜 명나라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유학 가운데 이런 폐풍이 있고 생각에도 그런 것이 있고 일상생활에 영향을 받는 사대사상을 제거해야 되겠다고 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김동성=예를 들기를 일본학자가 제자한테 말하기를 공자님이 군대를 가지고 일본을 침범할 때는 공자님의 머리를 베어야한다 이렇게 썼는데 유림에서 공자님 목을 베다니 이런 죽일 놈이 있느냐?

○최두선=말하자면‘중국에 대한 것을 너무 숭상한다는 것’을 때린 것이에요. 우리나라의 비석을 보세요. 연월일(年月日)에 숭정기원(崇禎紀元) 몇 년 이렇게 쓰는데 이것이 명나라 연호인데 연호까지 중국 것을 썼으니 말이지요.

○고희동=그렇지요.

○최두선=그래서 그것을 유림에서 성토문이 나오고 직접 와서 공격을 하고 야단이 났지요.

○고희동=그래서 신문사에서 여러 사람이 가서 석명을 하고 얘기를 했는데 그 일행에 나도 들었는데.

○사회=유림 측에서 신문 보는 것을 ‘뽀이코ㅌ’을 했나요?

○김동성=성토문을 냈지요.

○최두선=총독부에도 가서 호소를 했고 그러나 우리에게 처치는 못했어요. 오히려 총독부에서는 동아일보가 자꾸 융성해가니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타격을 받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겠지요.

○고희동=그것으로 해서 발행 상에 간섭을 받은 일은 없었고 다만 유립계에서 몹시 탄핵을했어요.

○김동성=사리대로 탄핵을 하면 모르지만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을 한다 즉 공자님 목을 벤다는 소리를 했다는 것뿐인데.

○최두선=얼마 지난 뒤 다소간 잠잠해졌지만 이 사건이 사내에 일 변동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최초에 창간 당시의 사장이 박영효 씨였습니다.

그 분이 이왕가의 친척 되는 분으로 그때 귀족의 작을 가졌던 사람이지만 옛날에 개화운동에 관계했고 민족정신도 있고 총독부에서 보기에도 호락호락하게 보지 못할 사람이 좋겠으므로 이 양반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박영효 씨를 사장으로 모셨어요. 아시다시피 김성수 씨가 뭣을 하든지 자기가 사장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득이해서 할 사람이 없으면 나오지만 자기가 스스로 사장이라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 박영효 씨가 사장을 했는데 그 기사 때문에 유림계에서 떠들고 박영효 씨한테 가서 항의를 하고 즉 ‘신문에서 유교를 때리니 이런 법이 있소? 여러 백년 동안 숭상해 온 유교가 이런 모욕을 당하니 이럴 수 있소?’이렇게 항의를 하니 박영효 씨는 ‘내가 사장이기 까닭에 이런 문제를 나한테 가지고와서 시끄럽게 하니 그만두겠소’이렇게 되어서 사장을 내놓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김성수 씨 자신이 잠시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문제가 사회적으로는 별문제가 안 생겼지만 사내적으로 사장경질을 가져온 것이에요.

 

○진학문=양기탁 씨도 그때 그만두었지요.(「동아일보」 1960.4.1.)

 

 

 그는 창간 10주년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동아일보」 1930.4.1.)

 

“창립 당시로 말하면 조선 안에서 조선말로써 발행하는 신문은 매일신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때에 동아일보가 창간되니 전 조선의 인기가 자연히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라 모든 것이 곤란하여 사장석에 앉은 나로서도 동아일보의 운명이 며칠 동안이나 갈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동아일보가 벌써 창립 10주년을 맞게 되고, 동시에 기초가 공고하여진 것을 볼 때 나 개인으로서는 물론이요 전 조선 사람들이 기뻐서 경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10년간의 모든 간난을 돌파하고 오늘을 맞게 된 것은 특히 김성수 씨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김을한(1971), 「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 일조각.
동아일보사(1964),「동우(東友)」 1964년 9월호, 2쪽.
—————(1974),「동아일보사사」, 동아일보사.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