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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초대 정치경제부장 진학문(秦學文)-하

Posted by 신이 On 5월 - 20 - 2016

초대 정치경제부장 진학문(秦學文)(1894-1974)-하

 

 진학문도 「동아일보」의 다른 창간 주창자들과 같이 논설반원이자 정치경제부장(정경부장),학예부장(현재의 문화부장)을 겸임했다. 다음은 창간 43년 뒤 진학문의 회고.

 

“동아가 창간되던 해에는 마침 기미만세 사건의 바로 그 이듬해여서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옥중에 있었고 특히 그중에는 앞으로 언론계에서 대활약이 기대되는 많은 인재가 있었다.

 

  명실 공히 한민족의 대변기관과 민족 지성의 집결체임을 자임하고 나선 「동아일보」는 이들 옥중 인사들을 받아들인다는 예견 하에 그들의 자리를 쉽게 마련해 주기 위해 한 사람에게 한 부를 맡기지 않고 2부 이상씩을 맡겨 장래 옥중 인사들이 풀려나올 경우 그들에게 한 부씩을 덜어 맡기기로 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우리가 함께 일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인사들은 육당 최남선 선생을 비롯, 고하 송진우, 현상윤 등 제씨였다고 생각된다.”(1963,11쪽)

 

 진학문은 50년 뒤 편집국장 적임자에 대해 장덕준과 나눴던 이야기를 술회하면서 장덕준은  장덕수를 꼽았으나 그가 신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주간제를 두고 장덕수가 주간, 신문 경험이 있던 이상협이 편집국장이 되었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70.4.1.).

 

 진학문의 월급이 100원이었던 것으로 보아‘국장급’부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간 장덕수가 120원을 받았고 편집국장 이상협과 영업국장 이운의 월급이 100원, 부장은 80원, 기자는 60원이었다(「동아일보」1960.4.1.)

 

 진학문의 출입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총독부였기 때문에 같이 출입했던 장덕수와 접촉이 많았다. 젊은 총독부 관리들이 나와서 동아일보 측에 연회를 베풀고 같이 술 먹자고 해서 상층부에서는 그렇게 심하게는 굴지 않았으나 하층부 관리들은 장덕수가 술 먹고 가서 국장이나 과장보고 ‘기미’‘키사마(貴樣)’하므로 거북해했다고 한다(「동아일보」1960.4.1). 

 

“내가 겸해 맡았던 정경부와 학예부만 하더라도 전 지면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일을 고작5·6명의 인원으로 해냈다. 염상섭씨가 정치면을 맡아 많은 일을 했고 경제관계는 한기악·김동철 씨, 학예면은 김정진·신길구 양씨가 맡았는데 나는 데스크를 보며 총독부 출입기자노릇까지 하는 형편이었다.”(「동아일보」 1965.4.1.)

 

 정경부장으로서 진학문은 한 달에 연회비를 월급보다 많은 125원을 지출했다고 기억했다(「동아일보」 1930.4.1.) 유흥 섞인 연회비가 아니라 다른 의미에 쓰지 않으면 안 될 연회비였다는 것이다. 다음은 진학문 정경부장의 동정 기사.

 

 本社政治經濟部長秦學文氏同經理部長韓重銓氏國民新聞社副社長阿部充家氏及李丙羲氏一行은地方巡遊路次去十六日平南線岐陽驛에서下車하야江西古蹟을觀覽하고同日午後三時列車來南하야朝日旅에서暫時休後張本社支局長의案內로港內各所를視察하고午後八時에는道參事林祐敦氏外當地十數實業家諸氏主催의訪花亭晩餐會에臨하야主人側에서地方紹介에關한談話가有하얏고一行은朝日旅에서一泊後十七日午後平壤으로向하얏더라(鎭南浦)(「동아일보」 1920.5.21.)

 

 창간 후 진학문의 「동아일보」 재직기간은 3개월.「동아일보」 사원록에는 6월말 퇴사한 것으로 나온다. 일본 정치인을 만나 일제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것을 일본 경찰이 엿들었던 것이다(진학문,1973,201쪽).

 

“동아일보 생활도 단명으로 끝났다. 동아일보 시절에 하루는 설산(장덕수의 호-필자 주)이‘자넬 찾는 사람이 있으니 한번 만나보게’하면서 지금 회현동 입구에 있는 여관으로 가보래서 찾아갔다. 소위 당시의 일본 대의사 민정당 소속의 산도양일(山道洋一)이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재등의 정치형태와 그 반응을 살피러온 자였다. 그가 필기를 하고 나는 멋대로 일본을 욕했다. 그는 정치가니까 신의만은 지킬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뒤 어느 날 총독부 낭하에서 고등경찰국장이 잘 안다고 하기에 무슨 소린가 했더니 여관에서‘대단하셨다는 말 잘 들었소’라고 했다.‘어떻게 아느냐’니까‘그것도 모르고 이 짓 할 수 있겠느냐’면서 웃었다. 알고 보니 둘이 얘기하는 내용을 옆방에서 형사가 모조리 적어 바쳤던 것이다.”

 

 진학문은 퇴사 후 자신이 ‘형님’이라 부르는 최남선에게 ‘옥중에 계신 육당 형님에게 보(報)하나이다’란 공개편지를 띄우고 서울을 떠난다(「동아일보」 1920.8.2.~3). 편지를 쓴 시간은 1920년 7월 29일 오후 3시, 「동아일보」 퇴사와 관련해서는 “형님, 내가 동아일보의 책무사임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오, 내가 나의 빈약한 그림자를 본 후, 어찌 내가 단지 자기의 분외(分外)의 명예와 지위에만 연연하여 그대로 동아일보에 머물러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막연한 내용이었다.

 

 진학문은 해방 후 창간 초기 「동아일보」 정치면과 관련해 “나라 없는 백성이 만드는 신문에 정치면이 화려할 수 없었지요. 총독부의 동향을 캐치해서 우리 민족에게 미칠 영향 같은 것을 아슬아슬하게 경고(?)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요”라고 술회했다(1963.4.6.). 그래서  글자 하나에도 고심이 컸으며 예컨대 ‘동경(東京)에 간다’는 뜻으로 ‘동상(東上)’ 또는‘상경(上京)’이란 말을 피해 ‘도일(渡日)’이라고 썼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도동(渡東)’으로 고치는 등 고충이 컸다고 한다.

 

 최남선에 대한 공개편지 10 여일 후 진학문은 도쿄로 떠났다. 모스크바로 가기 위해서였다.「동아일보」 소식란에는 ‘진학문 씨 10일 밤 동경으로 출발(渡東)’이라고 돼 있다(1920. 8. 11).

 

“조선 사람을 대표할만한 아무 기관도 없을 때에 이천만 민중의 절대한 응원으로 창간된 「동아일보」는 모든 방면으로 조선민족을 대표하게 되었었습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동아일보를 찾았고 조선 민족의 부르짖음도 동아일보가 대신하야 부르짖었습니다. 이와 같이 권위있는 기관인 까닭에 당국의 경계도 비상하여 화동(花洞)에 있는 본사나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판매부나를 물론하고 경관이 항상 파수를 보고 있었고 어떠한 때에는 사동에 있는 판매부 유리창을 깨뜨리고 신문을 압수하여가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가 단순한 기관이 아니었던 것은 내가 월급 100원을 받았는데 한 달에 연회비가 125원을 지출한 것으로도 알 것입니다. 이 125원은 결코 요사이의 유흥 섞인 연회비가 아니라 다른 의미에 쓰지 않으면 아니될 연회비였습니다. 지금도 그 기분이 지속되는 줄 압니다마는 당시의 사원들로 말하면 일심이체(一心異體)가 되어 제각기 자기 사업을 경영하는 이상의 열정으로 종사하였고 물질적 곤란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앞날에 무엇이 맺어질 것을 믿고 긴장한 가운데서 일들을 하였었습니다.”(진학문, 「동아일보」1930.4.1.)

 

 

“내가 동아일보에서 일했던 것이 지금부터 43년 전, 그것도 별로 오래지도 않은 기간이었지만, 지금도 그때 일들이 내 옛날이야기의 많은 몫을 차지한다…그러나 동아는 민족진영의 유일한 대변지라는 점에서 민족으로부터의 애호(愛護)와 신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고 그 영향력 또한 절대적이었다… 이것은 당시 동아의 사원들이 그의 직장을 단순한 생계의 방편으로 안 것이 아니고, 일종의 민족계몽운동 내지는 독립운동 전열에 나서고 있다는 자부와 정열을 가졌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진학문,1963,12쪽)

 

<참고문헌>

김을한(1971), 「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 일조각.
유광렬(1969),「기자반세기」, 서문당.
진학문(1963),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동우(東友)」 1963년 9월호, 11~12쪽.
 ——— (1973), 나의 문화적 교유기,「세대」, 제11권 통권118호 (1973년 5월) 196-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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