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하
장덕준은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 11월 만주 간도에서 종군기자로서 취재하다가 행방불명된 뒤 사망 처리됨으로써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기자가 됐다. 「동아일보」는 정간 중이었으나“비록 가서 역시 학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동포가 대량학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보도기관으로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며 간도를 향해 떠났다(유광렬, 1969,276쪽).
장덕준이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장덕준은 간도의 현장에 도착해“빨간 피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동아일보」 1925.8.29.).
장덕준이 간도에 간 것은 ‘훈춘(琿春)사건’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만주에서 독립군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일본은 만주에 대규모 군사를 파견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마적단을 이용해 9월과 10월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10월 상순에 기림(磯林)·목촌(木村)·동지대(東支隊) 및 보병 제28여단의 대 병력을 혼춘(琿春)·연길(延吉)·왕청(汪淸)·화룡(和龍) 등 각 현에 침입시켜 독립운동단체 및 간부들의 소재지를 습격하고 두만강연안 지역의 무산(茂山)·온성(穩城)·회령(會寧)·종성(鍾城)·경원(慶源)·경흥(慶興) 등 각지의 경찰서 및 헌병 경찰대들까지 동원해 대규모 전투 및 살인을 자행했다. 독립유공자편찬위원회는 “일본군이 혼춘사건을 구실로 삼아 간도 지방에 침입한 후 우리 거주 동포들에 대한 잔인무도한 만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973, 398쪽).
장덕준은 두만강에 접한 함경북도 회령을 거쳐 간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그의 최후와 관련해“10월 16일에는 함경북도 지방을 시찰하다가 회령에 이르러 일본이 간도에 출병함을 당면하였다. 본사에 통지하고 회령수비대장과 교섭해 종군기자가 돼 간도로 향하였는데 11월 6일에 무사히 간도에 도착했다는 전보가 있었고 10일에 ‘장덕준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와타나베(渡邊) 회령수비대장의 전보가 도착했다.”(1930.4.3.)고 밝혔기 때문이다. 장덕준이 실종된 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殉職者)로서 추도식을 거행하는 자리였다.
「동아일보」는 1921년 속간 이튿날인 2월 22일자 1면에 ‘추송 장덕준형을 사(思)하노라’는 사설(사진)을‘동인(同人)’의 이름으로 게재하면서 그의 실종을 공식화했다. 논설반원 김명식이 집필한 이 사설 말미에“추송 장덕준형은 본사의 특파원으로 작년 10월경에 간도 방면의 험악한 형세를 조사키 위하여 출장하였다가 행방이 불명하여 탐지할 도가 두절되다”고 밝혔다.
고향에 함께 갈 정도로 친했던 유광렬은 장덕준이 입버릇처럼 “사는 동안 감격에 싸이어 살면 고만이여요. 인생에게 영원이 잇슴니까. 사는 동안 조선 사람을 위하야 힘껏 일하다가 죽지요”(1931,13-14쪽)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를 살다 죽어도 정의를 위하여 살고 정의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1969, 274-275쪽)고 말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장덕준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과 증언이 남아있다.
“장암동 지방에 있는 일본군 토벌상황을 시찰하기로 하고, 11월 1일 용정촌에 도착해 조선인이 운영하는 삼성여관에 투숙하면서 각지를 둘러보고, 조선인 거류민회에 여러 차례 나가 강연 등을 했다. 11월 6일 장덕준은 용정촌 파견 헌병대장 와타나베 대위를 방문해 토벌상황의 시찰과 훈춘방면에 이르기까지 보호편의의 제공을 부탁하여 와타나베 헌병대장이 이를 승낙했다. 이날 헌병일행의 마차를 타고 6일 오후 6시 용정촌을 출발해 밤 10시경 국자가에 도착했다…8일 밤 국자가 우시장여인숙 관동여관에 투숙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장덕준으로 사료되는 조선인이 1명 나갔다는데 과연 장덕준인지 여부를 판정할 자료가 불충분하다.”(나남헌병대장 스즈키 타케오미(鈴木武臣)이 4월 13일 조선헌병대사령관 마에다 노보루(前田昇)에게 보고한 조사결과, 외무성, 1921, 「불령단 관계 잡건」,379-382쪽; 최상원 등,2012,159쪽에서 재인용)
“그가 차(此)에 대하야 참아 견대지 못하고 적의 군대에 드러가 적의 상관을 보고 그러한 불인도(不人道)의 사(事)를 행(行)한 것을 힐책(詰責)한즉 적측(敵側)에서는 그런 일이 업노라 말하면서 그러면 한번 함게 가서 보자 하고 후기(後期)를 약(約)하는 개(改)로 씨는 무심히 도라와 취침하엿더니 야반에 지(至)하야 적의 군병이 와서 상관이 부르니 함게 가자 함으로 씨는 십분 의아하야 야심(夜深)함을 핑게하고 청종(聽從)치 아니하엿스나 적은 마(馬)까지 가지고 재삼 와서 강청하는 고로 부득이 따라간바 일차 따라 나아간 후로는 일절 종적이 업서지고 말엿는대 적은 씨을 혐기(嫌忌)하야 당야에 씨를 유출하여다가 암살한 사가 확실무의하더라.”(「독립신문」 1921.10.28.)
“본사 특파로 간 장덕준씨는 국자가(局子街)에서도 얼마를 더 들어가서 있던 곳에 여관을 정하고 낯에는 종군기자로 군인들의 뒤를 따라 무가한 동포들이 피신하여 있는 벽촌 혹은 심산궁곡에서 동포들을 만나게 되였더랍니다. 그때 뉘의 말을 들으면 그는 이르는 곳마다 사람으로서는! 아니 동포로서는 차마 보지 못할 비극을 목도하게 되어 피 많은 그로서는 혈조에 뛰노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밤이면 그들과 목에 피가 마르도록 언쟁을 하였더랍니다. 그렇게 밤잠을 자지 못하여 가며 의분을 참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그는 어느 날 안개가 잦은 이른 아침에 낯모를 일본 사람 두세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는 영영 소식이 잦아지고 말았었답니다.”(「동아일보」1925.8.30)
“그의 형 장덕주씨가 다시 관북만리의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아우의 비껴간 길을 밟아 백설이 만건곤한 간도에 이르렀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 밑으로 잦았는지 모름의 세계에서 배회하는 아우의 생사존몰을 알 길이 없었더랍니다. 잔인한 창끝에 원혼이 누리에 차고 포연이 채 사라지지 않은 쓸쓸한 벌판을 헤매이며 찾다 못하여 눈물이 앞을 가리는 길을 돌이켜 돌아왔을 뿐이었답니다.”(「동아일보」1925.8.30)
“형 장덕주가 간도에서 탐문한 바에 따르면 회령에서 떠날 때 그곳 수비대장이 끝까지 거절하는 것을 기어이 떠났다하며 간도에 들어와서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본 뒤 모 여관에 묵고 있다가 군대가 토벌지대로 떠나는 날에 역시 군대마차를 타고 떠난다고 한다.”(「동아일보」1930.4.3.)
“장덕준은 용정 삼성여관에서 여장을 풀고 즉시 간도 일본영사관으로 찾아가서‘토벌’에 대한 진상을 물었다. 영사관측은“우리는 모르니 토벌사령부에 가서 알아보라”고 핑계하였다. 사령부는 장 기자의 물음에“우리는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바 없다. 우리와 같이 직접 토벌하는 실황을 보면 알 터이니 여관에서 기다려라”고 하였다. 장 기자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과연 이튿날 아침, 사령부에서 군마(軍馬)와 군복, 방한외투 그리고 방한화까지 보내면서“토벌을 떠나니 동행하자”고 권했다. 장 기자는 안심하고 일본군과 동행했다. 삼성여관에서는 몰래 행선지를 눈 여겨 보아 두었으나 그들이 결빙한 해란강(海蘭江)을 건너 모아산(帽兒山)쪽으로 가는 것만을 확인하였을 뿐이었다.‘토벌대’와 동행한 장 기자는 돌아올 시간이 되었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동아일보사의 서울본사에서는 수차 전보로 장기자의 안부를 물어 왔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마침내 장덕준 기자의 실제 장덕수(실형 장덕주의 착오-필자 주)가 직접 간도로 찾아와서 일본영사관에 문의하였던 바 그들은“토벌을 참관하고 바로 경성으로 돌아갔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장씨는 다시 토벌사령부로 가서 문의하였으나 거기서도 같은 대답이었다. 사태는 명백해졌다. 장 기자는 일군의 간교에 넘어간 것이었다. 일군에게 유인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된 것이다.”(홍상표 당시 북간도 국민회원, 1965, 316~317쪽)
“시골에 있는 큰 오빠(장덕주)를 불러 현지로 떠나보냈다. 큰 오빠는 약 2주일 후에 덕준 오빠가 여관에 두고 간 가방만 찾아들고 돌아왔다. 큰 오빠가 현지에서 들은 바로는 일본 경찰이 덕준 오빠가 묵고 있던 여관에 저녁 8시경에 찾아와서 동행을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잠을 잤으며 밤 12시경에 또 찾아와서 동행을 강요했으나 또 거절했는데 새벽 2시경 세 번째로 말을 끌고 찾아와서 기어이 동행을 강요하여 붙들려가다시피 끌려갔다는 것이다. 현지인들 말로는 아마 등에 나무판을 대어 묶고 돌을 달아 강물에 던져 죽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장덕준의 누이동생 장덕희, 1974년 5월 16일 인터뷰, 대한언론인회, 1992, 13쪽)
“20년 10월 어느 날 동아일보사 용정(龍井)지국장 김용찬(金用讚)씨가 연길의 조선인 민회로 전화를 해서 본사에서 장 기자가 토벌군(일본침략군) 종군기자로 왔는데 그 쪽으로 갈 터이니 연길분국을 맡고 있는 나에게 환영회를 가지도록 알려왔다…그래서 용정과 연길은 40리 길이라 도착할 시간을 맞추어 유지 몇 사람과 함께 포이압통강(江) 다리까지 나아가 밤 12시가 넘도록 장 기자의 도착을 기다렸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아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내 생각으로는 장 기자가 일본군에게 당한 것이 분명하며 피살된 곳이 통구의 토벌지역에서 우리 한인교포와 함께 살해되었으리라 짐작된다.”(손정룡 당시 「동아일보」 연길분국장,1974년 5월 10일 인터뷰, 대한언론인회, 1992, 11쪽)
<참고문헌>
대한언론인회(1992),「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편 하」, 대한언론인회, 199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1972-1977), 「독립운동사 제4-13권」,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유광렬(1931), 동대문정거장의 장덕준 군,「삼천리」,제3권 제12호,14-15쪽.
———(1932), 유명인사 삼형제 행진곡,「삼천리」,제 4권 제3호, 52-54쪽.
———(1969), 「기자반세기」, 서문당, 227~231쪽.
최상원 ․ 한혜경(2012), 일제강점기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3개국에 걸친 기자 장덕준의 언론활동에 대한 연구,「동북아문화연구」, 제30집, 145-164쪽.
홍상표(1965), 북문도, 「신동아」 1965년 4월호, 316~3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