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 (1892-1920)-중
장덕준이 「동아일보」에서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직한 것은 3․ 1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인사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했기 때문이다. “최남선 현상윤 등의 인사들이 풀려나오면 이들에게 쉽사리 자리를 마련해 주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이상협이 사회 정리, 장덕준이 조사 통신, 그리고 진학문이 정경 학예부장을 각각 겸임토록 했던 것이다”(진학문, 「동아일보」 1970.4.1.). 논설반원이자 편집국 부장들을 겸임한 이상협 장덕준 진학문은 모두 신문발간 경험이 있었고 「동아일보」 창립 주창자들이었다.
동생 장덕수와 같이 장덕준도 이론을 좋아했고 이론에 밝았다. 논설반의 중심은 이들 형제와 김명식이었다. 이들은“아츰에 모히면 무슨 문제든지 거러노코 피차에 의견교환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의사가 일치되지 안는 때는 쌍방이 일보도 물너나지 않코 격론이 시작되는 것이었다.”(이서구,1939,104쪽)고 한다. 김명식은 장덕준과 “때때로 둘이서 이론이 어우러지면 시간이 가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야 남은 이론은 흔히 사관(舍舘)에까지 도라와서 계속하는데 이런 줄을 아는 사우(社友)는 사관에까지 쫓아와서 논전에 참정하는 일도 있었다”(1938,70쪽)고 회고했다.
장덕준은 ‘추송(秋松)’이란 호를 가지고 1920년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란 논설을 썼다. 3․ 1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여론을 소개하고 이를 비평한 것이다. 장덕준은 이 논설에서 교토제국대학 법대교수 스에히로 시게오(末廣重雄)와 오가와 코우타로우(小川鄕太郞)의 주장을 중심으로 자치론과 일시동인론(一視同仁論)을 논의했다.
1911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 졸업이 정규 최종학력인 장덕준이 일본 잡지와 신문에 난 논문을 소개하면서 그 주장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유학시절 경험덕분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부간사로서 다이쇼데모크라시 운동의 이론가들을 초빙해 강연을 여는 등 일본의 사상가나 교수들과 교류가 있었다. 장덕준은 대학을 다니지는 못하고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에 다녔다(최상원 등,2012,149쪽).
그러나 장덕준의 기명 논설은 「동아일보」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김명식은 장덕준이 집필할만한 건강이 없었다(1934, 33쪽)고 했으나 조사부장으로 지방출장을 할 정도여서 와병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6월 5일자부터 6월 16일자까지 5차례에 걸쳐 황해도 재령 해주, 평안도 평양 진남포 강서 선천 의주 신의주 등지를 순회한 르포를 ‘삼민생(三民生)’ 취재로 싣는다. 기자가 이 서선(西鮮)지방을 돌아보니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조선인을 차별하고 학대하고 멸시하며 일본인 위주의 행정으로 일관하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사부장 장덕준이 6월 4일부터 5일간 해주에 머문다는 기사(「동아일보」1920.6.9.)로 미루어 ‘삼민생’이 장덕준일 가능성이 높다. 르포는 말미에 “이 여행에 많은 동정과 편의를 주신 지방 제우(諸友)께 깊이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가 1920년 여름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를 위해 중국으로 특파원을 파견하면서 영어나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장덕준을 선택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다음해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에 김동성이 ‘섭외사업을 담당하는 조사부장’(「경향신문」1959.4.8.)으로 참석한 것으로 미뤄 장덕준 역시 조사부장으로 해외취재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 장덕준이 한국 언론사상 첫 해외특파원이라는 주장(서정우 등,2006,583쪽; 최상원 등,2012,155-157쪽)도 있으나 김동성이 「동아일보」 창간 전인 1920년 3월 베이징에 파견돼 중국 명사들의 축사를 받으면서 그들을 인터뷰해 ‘연경만필’이란 시리즈를 게재했다는 점에서 그를 첫 해외특파원으로 꼽는 것이 타당하다.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외신으로 들어온 미국의원단의 동아시아방문을 주시했다(「동아일보」 1920.4.8.). 이와 관련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는 “한국 민족은 강화회의나 미국측이 한국 독립 문제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던 것을 생각하여 이미 그들에 대한 기대는 퇴색한 때였으나, 보탬이 되는 것이라면 작고 큰 일 혹은 쓰고 단 일을 고르거나 주저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상해와 국내의 지도자가 긴밀히 연락하며 외교 공세를 폈던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972,350쪽). 임시정부는 ‘미국의원시찰단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안창호(1878-1938)가 그 위원장을 맡아 6월 28일에는 환영 및 외교 예산 1만 1천 4백 원을 계산했다. 7월말에는 미의원단이 7월 5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홍콩 상하이 베이징을 거쳐 8월 중순에는 서울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동아일보」 1920.7.27.).
장덕준이 베이징을 향해 떠난 것도 7월말이었다. 장덕준의 취재목적과 관련해 장택상은 45년 후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장덕준이 미의원단의 움직임을 보도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상세히 전달하도록 파견한 것이다.
“그 때 그 장덕준 씨를 동아일보에서 특파원으로 보내서 미국의원단에게 우리나라 그 형편이라든지 모든 것을 좀 하소연해볼까 그게 기미운동 직후니깐 아직까진 혹 희망이 없나. 이런 그저 참 일우지망이라도 우리가 다 가졌댔거든요. 그 때 인촌(발기인대표 김성수의 호)이 밤 10신가 쫒아 왔어요. 와서 장덕준이를 낼 봉천으로 보내야겠는데 나도 여비를 좀 줬는데. 너도 돈 좀 내라. 그래서 내 그 때 돈으로 500환은 냈지.” (동아방송, 정계야화-창랑 장택상 편, 제9회 인촌 김성수 선생, 1965.2.19.)
장덕준의 공식적인 출장목적은 중국의 정세 취재였다(「동아일보」 1930.4.3.). 장덕준은 7월 28일 만주에 있는 펑톈(奉天) 총영사관을 방문해 “북경 가는 사유를 말하고 장작림의 독군서를 방문하겠으니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동아일보」 1920.8.9.). 장덕준은 중국의 군벌들을 인터뷰하겠다고 계획했으나 이들과 사전에 접촉할 방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덕준은 8월 8일자부터 8월 10일자까지 ‘동란의 북경에서’라는 제목으로 중국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 시리즈와 별도로 8월 9일자에는 “직예파 총수 우페이푸(吳佩孚)를 방문해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8월 7일발’로 짧게 전하고 있다. 장덕준은 예고 없이 6일 우페이후를 찾아갔으나 출타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다음날 오전 7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페이푸와의 인터뷰 내용은 한참이 지난 8월 19일자에 첫 회가 나가고, 나머지는 또다시 일주일이 지난 26일자와 27일자에 ‘동란의 북경에서’란 제목으로 실렸다. 19일자 기사에서 ‘8월 7일 씀’, 27일자 기사에서 ‘8월 7일 정오 풍대에서’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미뤄 장덕준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기사를 작성했으나 신문에는 뒤늦게 게재된 것으로 보인다.
우페이푸와 맞서고 있는 봉천파 장쭤린(張作霖)과의 인터뷰는 8월 13일 오후 3시부터 진행됐다. 8월 20일자와 21일자에 따르면 장덕준은 12일 인터뷰를 위해 장쭤린의 숙소로 찾아갔으나 거절당하고 오사카마이니치 기자의 주선으로 다음날 일본신문기자단 15명과 공동 인터뷰를 했다. 20일자는 ‘8월 13일 석양에’, 21일자는 ‘8월 13일 밤에’ 기사를 작성했음에도 신문에는 뒤늦게 인터뷰내용이 게재된 것이다. 이 인터뷰 역시 ‘동란의 북경에서’란 제목으로 실렸다.
미국의원단 일행 150명 중 50명이 8월 14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미의원단은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으나 해산하고, 이중 50명이 10일 베이징으로 향했다. 8월 11일자 신문은 미의원단이 10일 베이징에 도착했다고 보도했으나 8월 12일자는 ‘상해특파원 10일 발’ 뉴스로 “미의원단이 북경을 향해 아침에 출발했다”고 전하고 있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들에게 한국문제에 대한 진정서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으나 상하이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장덕준은 미의원단을 취재할 때 이들을 만나러 상하이에서 온 안창호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 「대륙보」의 나다니엘 페퍼(1890-1964)는 15일 안창호에게 장덕준이 베이징에 온 사실을 전하고, 안창호는 16일 미하원 외교위원장 포터를 만날 때 여운형 황진남과 함께 장덕준을 데리고 갔다(안창호, 1921, 82-87쪽). 포터는 ‘자신의 방문이 공식이 아니고 사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국 일에 극히 찬조할 것이나 이것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답’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한국헌법과 일본인의 불법행위에 대한 자료를 요구해 한국 상황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와 관련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는 “국내와 상해를 연락하던 사람 중에 당시 동아일보사의 장덕준이 있었는데 그는 통신원을 가장하고 북경에 머무르면서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였고 또 북경에서 여운형·황진남과 함께 시찰단을 방문하여 영문으로 만든 ① ‘한국 헌법’ ② ‘한일관계’ ③ ‘일본인의 여러 불법 행위’의 책자를 제공하며 일본의 한국 통치 실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고 기록했다(1972,351쪽).
장덕준은 8월 18일 낮 12시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미의원단장 스몰을 인터뷰하고 ‘서울에 도착하게 되면 한국 사람의 환영회에도 출석하여 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8월 24일자 3면(사진)에 크게 보도했다. 1면에는 주간 장덕수가 쓴 ‘미국의원단을 환영하노라’는 논설을 싣고, 이 논설을 영문으로도 나란히 게재했다. 인터뷰 기사에따르면 스몰은 장덕준에게 “이번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부러 우리 일행을 만나기 위하여 이곳 북경까지 온 안창호 씨도 우리는 매우 반가히 만나보았습니다.”라고 전했다.
베이징~서울의 중간기착지인 펑톈(奉天)부터 미의원단 일행의 움직임은 김동성 특파원이 맡았다. 장택상의 회고는 계속된다(동아방송, 정계야화-창랑 장택상 편). “의원단을 만나면 같이 좀 봉천서 봉천호텔이라고 있으니 거기 유한다니 파티도 하고 해야 한다. 얼마 줬냐 하니까 자기 (인촌) 말로는 1,200원 줬다고 그래요. 그래서 1,200원하고 500원하면 1,700원 이니까. 그 때 큰 돈이거든. 그래서 이제 장덕준 씨가 떠났단 말이야.” 장덕준도 펑텐을 거쳐 베이징으로 갔으나 김동성도 펑텐으로 파견됐다. 의원단에게 파티를 열어줄 영어와 외교실력을 갖춘 기자는 190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17년 귀국한 김동성 밖에 없었다.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도 ‘미의원환영특파원’이란 이름으로 백대진을 파견했다. 미의원단은 23일 오전에 펑톈에 도착했다(「동아일보」 1920.8.25.: 「매일신보」1920.8.25.).
<참고문헌>
김명식(1934), 필화와 논전, 「삼천리」,제6권 제11호, 32-40쪽.
김명식(1938), 추송의 영, 「삼천리」,제10권 제11호, 68-7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1972-1977), 「독립운동사 제4-13권」,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서정우 등(2006), 「한국언론100년사 1-3」, 한국언론인연합회.
안창호(1921),「안창호일기(1920.7.6.-1921.3.2.)」, 독립기념관, 82-87쪽.
유광렬(1931), 동대문정거장의 장덕준 군,「삼천리」,제3권 제12호,14-15쪽.
———(1932), 유명인사 삼형제 행진곡,「삼천리」,제 4권 제3호, 52-54쪽.
———(1969), 「기자반세기」, 서문당, 227~231쪽.
최상원 ․ 한혜경(2012), 일제강점기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3개국에 걸친 기자 장덕준의 언론활동에 대한 연구,「동북아문화연구」, 제30집, 145-1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