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3.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상

Posted by 신이 On 5월 - 3 - 2016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 (1892-1920)-상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기자인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립 주창자였다. 장덕준이 「동아일보」에서 활약했던 기간은 창립준비기간을 제외하면 8개월에 불과하지만 한국인  최초의 종군기자이자 순직기자라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장덕준이 신문 발간에 나선 때는 일본에 머물 때였다. 황해도 재령 태생으로 1914년 「평양일일신문」의 조선문판 주간으로 있던 장덕준은 1915년 일본 유학을 떠났으나 폐결핵에 걸려 요양하던 중 3․ 1 운동을 맞았다. 장덕준과 함께 유학했던 김준연(1895-1971)의 30년 후 회고에 따르면 장덕준이 1919년 여름방학 직전 자신을 찾아와 신문 발간의 필요성과 그 계획을 역설했다는 것이다(「동아일보」, 1950.4.1). 같은 유학생 최승만(1897-1984)도 장덕준이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이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같은 신진사상가 및 혁명가와 교류했으며 귀국해서‘황서신문’을 발간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1976, 510쪽).

 

 장덕준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낸 이상협과 연락하면서, 신문허가를 위해 총독비서관 모리야 히데오(守屋榮夫) 앞으로 도쿄제국대학 교수 요시노 사쿠조가 써준 소개장을 갖고 귀국했다(「동아일보」,1950.4.1.;1960.4.1). 장덕준이 일본 유력인사들의 힘을 빌리는 것에 대해 유학생들 간에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에 대한 반항력이 극도에 달한 때인 고로 동경에 있는 우리유학생들 중에는 장 씨가 일본인과 교섭하려고 하는 태도에까지도 불만을 느끼지마는 장 씨는 자기소신에 매진해서 경성에 돌아간 즉시 총독부 측과 교섭하여 동아일보의 발행을 보게 되었든 것이다.”(「동아일보」, 1950.4.1.)

 

 장덕준이 자금모집에 관해 믿은 사람은 이상협과 마찬가지로 김성수였다. 김성수는 1914년 7월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귀국했으므로 일본에서 장덕준을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장덕준의 동생 장덕수가 김성수의 대학 후배로 학비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는 서울 전동여관에 머물던 장덕준을 찾아갔다가 바로 그날 저녁 자신의 집에 모여 신문 발간 논의를 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통보’받기도 했다(A기자, 1935, 20~24쪽).    

 

 이같이 1919년 7월경부터 유근 김성수 장두현 장덕준 이상협을 중심으로 민간신문 설립이 본격화하고 10월초 제호 ‘동아일보’로 신문발행허가가 신청됐다(「동아일보」, 1922.4.1). 장덕준은 이를 전후해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직접 고향인 황해도로 주금(株金) 모집에 나섰다.

 

 장덕준은 창간 후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직했다. 동생 장덕수가 논설주간이었고, 함께 신문 발간을 추진한 이상협이 편집국장이었다. 논설반에는 장덕준과 이상협 외에도 진학문과 김명식, 박일병이 있었다.
 

 장덕준의 폐결핵은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창간 다음 달 한글학자 권덕규가 쓴 ‘가명인두상(假明人頭上)의 일봉(一棒)’이라는 글이 전국 유림의 분노를 사서 박영효 사장이 사죄의 글을 실으라고 했을 때 “장덕준은 원래 폣병이 깊은데다가 흥분하여 간부회를 하는 자리에서 책상을 치면서 분개하여 피를 토한 일이 있었다.”(유광렬, 1969, 227~231쪽)는 것이다. 장덕준은 그해 봄 병세가 악화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유광렬, 1931,14-15쪽).

 창간기자 유광렬은 장덕준에 대해 “성질이 감격하기 쉽고 인정이 많았다.”(1932, 52-54쪽))고 했고, 같은 논설반원이었던 김명식은 “사내에서 어떠한 문제로 사장과의 간에 의견이 조화되지 못한 때 장덕준은 책상을 치면서 사장에게 말 전하는 사람을 나무라고 또 어느 선배에 대한 간곡한 정서를 솔직하게 토하는 것을 보고 모두 미칠 듯한 사랑을 주었다.”(1938, 68-71쪽)고 회고했다. 논설반원들끼리 논쟁이 고조되면 장덕준은 “걸상을 때려 부셨을 때도 있었다”(이서구,1939,103-105쪽)고 하며, “그따위 소리를 하고도 나라를 위한다는 놈이라 할 수 있느냐”고 험한 말을 내뱉으며 책상을 집어던지기도 했다(「경향신문」 1967.4.5.).

 

<참고문헌>
 김명식(1938), ‘추송의 영’, 「삼천리」,제10권 제11호, 68-71쪽.
 유광렬(1931), ‘동대문정거장의 장덕준 군’,「삼천리」,제3권 제12호,14-15쪽.
 ———(1932),‘유명인사 삼형제 행진곡’,「삼천리」,제 4권 제3호, 52-54쪽.
 ———(1969),「기자반세기」, 서문당, 227~231쪽.
 이서구(1939), ‘초창기의 동아일보사’,「삼천리」,제11권 제1호,103-105쪽.
 최승만(1976), ‘나의 장덕준, 덕수, 덕진 관’, 「한국의 명가」, 김덕형 편, 일지사.
 A기자(1935), ‘김성수 씨의 반생(半生)과 분투생활기’, 「신인문학」, 1935년 8월호, 20~24쪽.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