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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건립

Posted by 신이 On 2월 - 28 - 2014

동아일보가 3·1 독립운동의 현장마다 그 발자취를 기념비에 새기기로 결정한 것은 1965년 창간 45주년때였다.

 

동아일보는 1965년 4월 1일자 1면 사고를 통해 3·1 유적보존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기미 3·1 운동은 우리 민족정기를 민중의 토대위에 꽃피게 한 장엄한 역사의 한「페이지」였읍니다。 본사에서는 전국적으로 3·1 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3·1정신을 영원히 우리 민중의 가슴 속에 새겨두고자 합니다。 이 운동은 남녀노소、전국의 모든 애국동포의 협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운동은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 역전에 3·1 운동기념비가 건립됨으로써 첫 결실을 맺었다.  광복 26주년 기념일인 이날 제막식을 가짐으로써 그 뜻을 깊게 했다. 

동아일보는 기념비 건립을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유적지 조사를 벌였다. 1 2

조사결과를 토대로 1970~1980년대 하나하나 기념비가 건립됐다.

 

첫 번째 기념비가 세워진 이리 역전은 1919년 4월 4일 정오 수천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가려 한 현장이다. 당시 일군(日軍)의 발포로 88명이 그 자리에서 사살당하고 5명이 체포돼 총살됐다. 이 기념비는 높이 5m로 민중의 절규를 상징하는 철조각을 했다. 비 전면에는 ‘3.1운동 기념비’라고 명기하고 당시의 의거내용을 상세히 적었다. 비문은 이희승이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그리고 조각은 김영중이 맡았다. 총 공비는 130만원으로 동아일보사에서 50만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지방 유지들의 협찬으로 충당됐다.

 

두 번째 기념비는 충북 영동에 세워졌다. 영동에서는 1919년 3월 4일에 읍내 아랫장터에서 봉기하여 1명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2명이 옥사했다. 비는 가로 2m 88㎝, 세로 1m 94㎝의 화강암 반석 위에 높이 2m 54㎝의 탑신을 올렸다. 조각과 비문은 이리에 세워진 비와 마찬가지로 조각 김영중, 글 이희승,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읍내 중앙동 로터리 옆 40여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이 비의 건립비는 150만원이 소요되었는데 동아일보사와 영동군 유지가 반씩 부담했다.

 

세 번째 기념비는 강원도 횡성군에 세워졌다. 횡성은 1919년 3월 27일 강원도에서는 가장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진 곳으로 4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1명이 옥사하였다. 횡성면 읍하리 공원에 세워진 이 비는 250만원이 소요되었는데 현지 협찬회와 동아일보사가 반씩 부담하였고 조각과 비문 그리고 글씨는 이리 때와 같았다.

 

네 번째 비는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중·고교 교정에 세워졌다. 이 비의 이름을 ‘3.1운동 책원비(策源碑)’라 하였는데, 그 연유는 이곳 학교숙직실에서 김성수 교주·송진우 교장·현상윤 학감이 숙식을 같이하면서 3.1운동 거사를 도모하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동아일보사와 중앙중·고교가 공동으로 150만원을 들여 세운 이 비의 비문은 이희승이 짓고 김영중이 조각을 맡았는데 글씨는 김응현이 썼다. 이 비와는 별도로 중앙중·고교에서 200만원을 들여 옛날의 숙직실을 복원해  ‘3.1운동기념관’으로 개관했다.

 

다섯 번째의 기념비는 전북 남원에 건립됐다. 남원은 이리와 더불어 전북지방에서는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 5명이 일군(日軍)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공사비 300만원은 현지 유지와 동아일보사가 반반씩 부담하였고, 비 바로 옆에 김영중이 여신상을 조각했다.

 

여섯 번째의 기념비는 강원도 양양에 세워졌다. 당시 연 7일간의 시위로 12명이 일군에 살해되었고 80여명이 투옥되었다.

 

일곱 번째의 기념비는 전남 강진에 설립됐다. 강진의 3.1운동은 시인 김영랑이 서울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구두창에 숨겨와 그 해 3월 4일 거사하려 했으나 일경(日警)의 적발로 좌절되었다가 꼭 한 달 뒤에 4,0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벌여 200여명이 일경에 끌려갔으며 갖은 악형 끝에 옥사한 이도 있었다.

 

여덟 번째의 기념비는 전북 임실에 세워졌다.

 

아홉 번째의 기념비는 강원도 홍천에 세워졌다. 홍천의 3.1운동은 1919년 4월 1일부터 11일까지 홍천읍과 면소재지에서 6,000여명이 참가, 시위를 벌여 10명이 살해되고 100여명이 투옥됐다.

 

열 번째 기념비는 전남 영암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공동으로 추진돼 세워졌다. 1919년 4월9일과 10일 이틀 동안 조극환 김영언 김진용 등 수천 명의 영암 군민들은 읍내 시장 거리 등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로 조극환 의사를 비롯해 24명이 일경에 체포돼 혹심한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비는 높이 4.8미터의 화강암 탑신에 비문은 이희승이 짓고 글씨는 김상필이, 조각은 김영중이 맡았다.

 

열한번째 기념비는 경북 안동에 세워졌다. 안동지방의 만세의거는 1919년 3월17일 예안면을 시작으로 3월18일 안동읍, 3월21일 임동 임하 길안 일직 임북면, 3월23일 다시 안동읍에서 계속해서 극렬하게 벌어졌다. 의거 현장에서 30여 명이 순국하고 주동인물인 조수인 강태극 김완진 김영옥 이중희 유동기 등이 체포돼 최고 7년까지의 형을 받아 그중 일부는 옥사했다. 비는 높이 6미터의 오석(烏石) 탑신으로 김영중이 설계시공과 조각을 맡았고 비문은 이희승이, 글씨는 여원구가 썼다.

 

열두번째 기념비는 충남 서천에 건립됐다. 기념비 설립은 서천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공동으로 추진한 것으로 6.5미터의 화강암 탑신 위에 2.5미터 크기의 만세 부르는 모습의 입상으로 이루어졌다. 비문은 소설가 박경수가 짓고 글씨는 김기승이 썼으며 설계와 조각은 김수현이 맡았다. 서천지방의 항일의거는 1919년 3월29일 마산면 신장리를 비롯해 종천면 서천면 등에서 송기면 유성열 의사의 선봉으로 2000여 명의 군민들이 참가했다. 당시 신장리 장날의 시위사건은 처음에는 단순한 독립만세운동으로 시작됐다가 주동자가 체포 구속되자 시위자들이 구속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 파괴하고 이에 일경이 무차별 발포로 맞서 격렬한 양상으로 번져 갔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위 참가자들이 부상했고, 주동자들인 송기면 유성열 이근호 임학규 김인두 송여직 박재엽 정일창 고시상 양재흥 이승달 나상준 이동홍 의사들이 1년에서 5년까지의 형을 받고 복역했다.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에 건립된 3·1운동기념비를 1971년 8월 15일 당시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 이춘성 전북지사 등이 제막하고 있다. 

 

 

 

Notes:

  1. 3.1 운동 기념비 건립, 동아일보사사 4권(1970~1980년), 1990년, 289~291쪽

    본사는 1965년 4월 1일 창간 45주년 기념일을 맞아 기념사업의 하나로 3.1운동유적보존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기념비 건립을 위한 유적지의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와 합동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그 첫 결실이 전북 이리에서 1971년 8월 15일 광복 26주년 기념일에 3.1운동기념비 제막식을 가짐으로써 이루어졌다.

    첫 기념비가 세워진 이리에서는 1919년 4월 4일 정오 수천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가려 하자 일군(日軍)의 발포로 88명이 그 자리에서 사살 당하고 5명이 체포되어 총살 당했다. 이리시 역전광장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높이 5m로 민중의 절규를 상징하는 철조각을 했다. 비 전면에는 ‘3.1운동 기념비’라고 명기하고 당시의 의거내용을 상세히 적었으며, 후면에는 본보 창간 45주년 기념사업으로 이 비를 세운다고 했다. 비문은 이희승(李熙昇)이 짓고 글씨는 서희환(徐喜煥)이, 그리고 조각은 김영중이 맡았다. 총 공비는 130만원으로 본사에서 50만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그 지방 유지들의 협찬으로 충당되었다. 제막식에는 본사 사장과 그 지방 도지사가 참석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두 번째 기념비는 1972년 3월 4일 충북 영동에 세워졌다. 영동에서는 1919년 바로 이날 3월 4일에 읍내 아랫장터에서 봉기하여 1명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2명이 옥사했다. 비는 가로 2m 88㎝, 세로 1m 94㎝의 화강암 반석 위에 높이 2m 54㎝의 탑신을 올렸다. 조각과 비문은 이리시에 세워진 비와 마찬가지로 조각 김영중, 글 이희승, 글시는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특히 이날 당시 의거에 참가했던 생존자 손석구(孫錫球)옹에게 본사 김상만사장이 기념패를 증정하였고, 제막식이 끝난 뒤 기념마라톤대회를 열어 그날의 뜻을 되새겼다. 읍내 중앙동 로터리 옆 40여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이 비의 건립공비는 150만원이 소요되었는데 본사와 영동군 유지가 반씩 부담했다.

    세 번째 기념비는 1972년 8월 15일 광복기념일에 강원도 횡성군에 세워졌다. 횡성은 1919년 3월 27일 강원도에서는 가장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진 곳으로 4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1명이 옥사하였다. 횡성면 읍하리 공원에 세워진 이 비는 250만원이 소요되었는데 현지 협찬회와 본사가 반씩 부담하였고 조각과 비문 그리고 글씨는 이리 때와 같았다.

    네 번째 비는 서울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중앙중·고교 교정에 세워졌다. 1973년 6월 1일 이 학교 개교 65주년을 맞아 제막된 이 비의 이름을 ‘3.1운동 책원비(策源碑)’라 하였는데, 그 연유는 이곳 학교숙직실에서 김성수 교주·송진우 교장·현상윤 학감이 숙식을 같이하면서 3.1운동 거사를 도모하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본사와 중앙중·고교가 공동으로 150만원을 들여 세운 이 비의 비문은 이희승이 짓고 김영중이 조각을 맡았는데 글씨는 김응현(金膺顯)이 썼다. 이 비와는 별도로 중앙중·고교에서 200만원을 들여 옛날의 숙직실을 복원, 건립, ‘3.1운동기념관’으로 개관했다.

    다섯 번째의 기념비는 전북 남원에서 1974년 3월 1일 제막식을 가졌다. 남원은 이리와 더불어 전북지방에서는 가장 격렬한 시위가 55년전 바로 이날 벌어져 5명이 일군(日軍)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공비 300만원은 현지 유지와 본사가 반반씩 부담하였고, 비 바로 옆에 김영중이 여신상을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여섯 번째의 기념비는 1974년 10월 3일 강원도 양양에 세워졌다. 당시 연 7일간의 시위로 12명이 일군에 살해되었고 80여명이 투옥되었다. 이날 제막식에서 김상만 본사 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양양에서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거사로 이 유서 깊은 곳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은 전국민의 자랑이며 3.1독립정신을 영원히 민족의 가슴속에 새겨 간직하려는 우리의 뜻은 길이 빛날 것’이라고 밝혔다.

    일곱 번째의 기념비는 전남 강진에 1976년 5월 9일에 세워졌다. 강진의 3.1운동은 시인 김영랑(金永郞)이 서울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구두창에 숨겨와 그 해 3월 4일 거사하려 했으나 일경(日警)의 적발로 좌절되었다가 꼭 한 달 뒤에 4,0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벌여 200여명이 일경에 끌려갔으며 갖은 악형 끝에 옥사한 이도 있었다.

    여덟 번째의 기념비는 1978년 3월 29일 전북 임실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당초 3월 1일에 제막식을 가지려 했으나 폭설로 연기되었던 것이다.

    아홉 번째의 기념비는 1979년 10월 3일 개천절을 기해 강원도 홍천에 세워졌다. 홍천의 3.1운동은 1919년 4월 1일부터 11일까지 홍천읍과 면소재지에서 6,000여명이 참가, 시위를 벌여 10명이 살해되고 100여명이 투옥되었다.

  2. 3.1 운동 기념비 건립, 동아일보사사 4권(1980~1990년), 1996년, 412~414쪽

    일제의 질곡 속에서 독립을 얻기 위해 전 민족이 일거에 일어섰던 3.1독립운동의 발자취를 각 지방별로 기념비에 새겨 나가는 본사의 3.1운동유적보존운동은 80년대에 들어서도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신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강압으로 암울했던 시기인 만큼 이 운동은 국민들의 각별한 관심과 성원으로 그 뜻과 보람이 한결 돋보였다.
    전북의 ‘이리 3.1기념비’건립(71년 8월 15일)을 시작으로 충북의 영동(72년 3월4일), 강원의 횡성(72년 8월 15일), 서울의 중앙고 교정(73년 6월6일), 전북의 남원(74년 3월1일), 강원의 양양(74년 10월3일), 전남의 강진(76년 5월9일), 전북의 임실(78년 3월29일), 강원의 홍천(79년 10월3일)에 이어 열 번째로 전남 영암군의 영암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84년 4월이었다.

    1965년 창간 45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사편찬위원회와 합동으로 추진해 온 3.1운동기념비 건립사업의 열번째 결실인 3.1운동기념비는 영암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공동으로 세운 것으로 제막식은 4월10일 오전 10시 영암공원에서 거행됐다.
    1919년 4월9일과 10일 이틀 동안 조극환(曺克煥) 김영언(金永彦) 김진용(金瑨鎔) 등 수천 명의 영암 군민들은 읍내 시장 거리 등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로 조극환 의사를 비롯해 24명이 일경에 체포돼 혹심한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유족과 지방유지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이날 제막식에서 김상기 동아일보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오늘의 이 비는 그 분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계승시키겠다는 다짐의 상징이며 그 다짐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민족의 자존과 민주의 신장은 기필코 이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비는 높이 4.8미터의 화강암 탑신에 비문은 이희승(李熙昇)이 짓고 글씨는 김상필(金相筆)이, 조각은 김영중(金泳仲)이 맡았다.

    열한번째 기념비는 1986년 3월1일 경북 안동에 세워졌다. 안동지방의 만세의거는 1919년 3월17일 예안면(禮安面)을 시작으로 3월18일 안동읍(安東邑), 3월21일 임동(臨東) 임하(臨河) 길안(吉安) 일직(一直) 임북면(臨北面), 3월23일 다시 안동읍에서 계속해서 극렬하게 벌어졌다. 의거 현장에서 30여 명이 순국하고 주동인물인 조수인(趙修仁) 강태극(姜太極) 김완진(金完鎭) 김영옥(金泳玉) 이중희(李重熙) 유동기(柳東耆) 등이 체포돼 최고 7년까지의 형을 받아 그중 일부는 옥사하는 참변을 당하기도 했다.

    안동시 상아동 안동댐 입구의 잔디공원에서 거행된 기념비 제막식에서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순국선열들의 피어린 독립항쟁을 통해 값지게 얻어진 이 민족의 자존과 독립은 앞으로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후손인 우리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책무’라고 말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당시 시위에 가담했던 이인홍(李仁洪) 권녕석(權寧奭)옹 등 생존 의사들도 참석해 그 뜻을 더욱 빛냈다. 안동 3.1운동기념비는 높이 6미터의 오석(烏石) 탑신으로 김영중이 설계시공과 조각을 맡았고 비문은 이희승이, 글씨는 여원구(呂元九)가 썼다.

    열두번째 기념비는 1987년 10월1일 충남 서천에 건립됐다.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서천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공동으로 추진한 것으로 6.5미터의 화강암 탑신 위에 2.5미터 크기의 만세 부르는 모습의 입상으로 이루어졌다. 비문은 소설가 박경수(朴敬洙)가 짓고 글씨는 김기승(金基昇)이 썼으며 설계와 조각은 김수현(金水鉉)이 맡았다.
    서천지방의 항일의거는 1919년 3월29일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를 비롯해 종천면 (鍾川面) 서천면(舒川面) 등에서 송기면(宋箕勉) 유성열(劉性烈) 의사의 선봉으로 2천여 명의 군민들이 참가했다. 당시 신장리 장날의 시위사건은 처음에는 단순한 독립만세운동으로 시작됐다가 주동자가 체포 구속되자 시위자들이 구속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 파괴하고 이에 일경이 무차별 발포로 맞서 격렬한 양상으로 번져 갔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위 참가자들이 부상했고, 주동자들인 송기면(宋箕勉) 유성열(劉性烈) 이근호(李根浩) 임학규(林學圭) 김인두(金仁斗) 송여직(宋如直) 박재엽(朴在曄) 정일창(鄭日彰) 고시상(高時相) 양재흥(梁在興) 이승달(李承達) 나상준(羅相俊) 이동홍(李東洪) 의사들이 1년에서 5년까지의 형을 받고 복역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유족들의 참석이 많아 그 뜻을 더욱 높였다. 송기면 의사의 장남 송제영(宋濟英) 씨와 정일창 의사의 차남인 정두남(鄭斗南) 씨는 ‘때 늦은 감은 있으나 이번에 기념비가 세워져 선인의 뜻을 기리고 아버지의 넋을 달랠 수 있게 돼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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