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24일에야 이승만은 자유당과의 절연선언을 하고,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부통령 당선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미봉책으로는 사태수습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3.15부정선거를 재선거토록하고, 부정선거를 지휘한 최고 책임자를 처단하며, 마산사태와 4.19사태 때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하는 한편, 고문 경관들을 색출해 처단하라는 주문을 했다.” (김영호, 한국 언론의 사회사 上, 지식산업사, 2004)
동아일보는 1960년 4월 25일자 ‘자유당의 지연전술’ 제하의 사설에서 이승만의 책임을 추궁했다.
제1·2차 마산사건과 4.19학생 데모사건의 형태로 폭발된, 현 집권세력에 대한 전 국민의 일대 반항은 국내외에 비상한 정치적 선풍을 일으켰고, 여사한 선풍에 압박감을 느끼고 당황하기 시작한 집권층에서는 뒤늦게나마 그 어떠한 정치적 배려와 구급연명책을 강구하여 난국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모양 같다. 작금 이대통령이 구 관료 변모 허모 씨 등을 경무대로 초치하여 그들의 ‘직언’을 청취했다든가 이기붕 의장과 협의하고 동 씨의 부통령 당선을 자진사퇴할 것을 ‘고려’하기로 했다든가 하는 등 사(事)와, ‘현 사태의 수습과 정국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보수 세력의 합동으로써 정당을 개편하고 내각책임제를 기조로 한 정치제도로 개혁’해 보겠다는 담화를 이기붕 씨 자신이 발표하는가 하면, 이대통령은 또한 자유당 총재를 사퇴하고 모든 정당관계를 떠나 ‘대통령 직에만 전념’하기로 했다고 보도되고 있는 등 사(事)는 모두 현 집권층의 초조한 구급연명책의 일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첫째로, 전기의 구 관료 변, 허씨의 소위 ‘직언’에 의하면 과거 12년간의 비정(秕政)과 3.15 부정선거의 총책임을 이기붕 씨에게만 전부 뒤집어씌우고 ‘이 박사는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국민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른 10여년의 정치가 이 박사 1인에 의한 독재정치였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며, 또 3.15부정선거로 말하면 동 박사가 직접 지휘하거나 명령한 일은 없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선거의 부정을 몰랐다거나 또는 알고도 제지하지 못했다는 데 대한 책임은 면할 길이 없다고 보지 아니 할 수 없다. 대통령 책임정치 하에서 대통령이 실정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처럼 위험한 사상은 없고 그러한 방식으로 이끌고자 하는 시국수습책처럼 국민을 이중으로 우롱하는 술책은 다시없다고 하겠다.
둘째로, 이기붕 씨의 부통령 당선만을 사퇴케 함으로써 국민의 울분을 풀어보자고 하는 방식의 정국안정 내지 시국수습책도 우리로서는 수긍키 어렵다함은 본란이 이미 강조한 바이다. 그러나 이 씨만의 ‘당선’사퇴는 3.15선거를 합법시 하려는 데 첫째로 그 기만성이 있고, 지난번의 선거가 동 시, 동 장소에서 동일한 기관과 동일한 수법에 의한 불법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을 은폐코자 하는 데에 그 둘째의 기만성을 엿볼 수가 있다.
셋째로, 이기붕 씨의 이름으로 발표된 보수합당과 책임내각제 개헌 구상에 관해서는 오늘 아침 본란에서 그것이 그릇된 생각이라 함을 지적하였다. 전날의 마산사건에 있어서나 이번 4.19학생 데모사건에 있어서나 민중 또는 학생들이 보수정당의 합동이나 책임내각제로의 개헌 등을 절규한 일은 없었다. 이 시기에 그러한 얼토당토 않는 엉뚱한 문제를 내거는 일 자체가 다분히 정략적이다. 정략적이라 함은 그러한 문제를 내 걸므로써 첫째로는 국민의 관심을 그 방향으로 쏠리게 하여 폭발된 민심을 식히고 둘째로는 유일한 야당인 민주당을 분열케 하려는 고등술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기붕 씨 ‘영도’ 하에서 보수정당이 합쳐질 것이라고 생각되지 아니하며, 이 의장의 통재 하에 책임내각제 개헌안이 통과될 리도 없고 이 대통령에 의하여 진정한 책임내각정치가 실시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일반국민에게는 그러한 이 씨의‘희망’ 담화가 오직 한 개의 웃음걸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현 집권세력에 대항할 만한 반대세력의 성장을 한사코 억압해 온 현 집권층이 보수합당을 희망한다는 것은 일당 독재의 단꿈에서 아직도 깨지 못하고 있다는 증좌이요, 어제까지도 대통령중심제의 헌법제도를 고수해 온 정치세력이 오늘 갑자기 책임내각제를 동경하는 듯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책임내각제의 간판을 걸고 여전한 대통령 정치를 계속해 보겠다는 저의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인가?
넷째로, 이 박사가 자유당의 당적을 떠나는 것은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당적 이탈이 민심 수습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이 박사가 자유당 총재의 지위와 자격으로 독재를 해왔고 이 때문에 국민의 인기를 상실했다는 말인지, 또는 동 박사가 대통령으로서는 훌륭했지만 자유당 총재로서는 그렇지가 못했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또 만일에 이 박사를 ‘욕되게 한 것’은 자유당이지 역대의 국무위원들이 아니었다 하는 사고의 과정이 동 박사의 당적 이탈을 권고하게 된 동기라고 한다면 이처럼 또 사태를 직시하지 못한 처사는 없다. 우리들 국민은 역대의 국무위원들이 져야 할 책임 또는 자유당이 져야 할 책임과 이 대통령이 져야 할 실정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별개의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 박사는 그 자신의 책임을 자유당이나 과거 및 현재의 국무위원들에게 전가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박사와 이 의장 및 자유당 간부가 진심으로 시국을 수습하고 국민의 여론에 보답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긴급조치를 즉각 취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중앙선거위원회로 하여금 3.15 정·부통령선거를 취소하고 재선거를 공고케 하는 일, 둘은 3.15부정선거를 지휘한 고위책임자들을 체포 처단케 하는 일, 셋은 마산사건과 4.19 사건의 관련자를 석방함과 동시에 고문경관을 색출하여 철저히 처벌하는 일이다.
“야당 의원들은 25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권고안을 국회에 상정시켰다. 다음날 이승만은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기붕 일가는 집단으로 자살하고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거소를 옮겼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의 12년 집권은 4월 26일로 막을 내리게 되었고, 신문과 학생이 민주혁명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김영호, 한국 언론의 사회사 上, 지식산업사, 2004)
동아일보 사사는 “이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한국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지난 10여 년간 민중의 선봉에 서서 민중과 더불어 반독재투쟁의 전열에서 싸워온 본사 사원 일동은 감회를 누를 길이 없었다. 경찰이 쏜 총탄이 본사 사옥에까지 날아든 4월 19일 이후 26일 이승만이 하야할 때까지 사원 대다수는 사내에서 침식을 하며 계엄하의 삼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정의로운 신문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국이 가장 험악했던 4월 19일과 25일에는 사장 최두선도 노구를 무릅쓰고 상무 김상만과 함께 철야 사원들과 행동을 같이했다.”고 기록했다..(사사 2권,1978년, 316~317쪽)
“이 무렵 사기(社旗)를 단 본사 차량은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박수로 환호하는 ‘반독재투쟁’의 상징이었다. 이기붕의 집을 습격한 시민들은 집안에서 현금 2000만원을 발견하자 곧바로 본사를 찾아 맡겼다. 모두가 본보를 아끼고 믿는 대중적 신뢰의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