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사건에서는 10대의 청년 학생들이 희생됐다.
동아일보는 경찰이 발표한 사망자 수를 믿지 않았다. 대한변호사협회 마산사건조사위원단에 찾아온 김효손(19)의 어머니를 이강현 기자가 만났다.
마산사건에 얽힌 비극 한토막, 후두부 깨져서 죽어
고모 집 간다고 나간 이대독자의 최후
빈한에 절손(?孫)마저 되다니
【마산에서 본사 이강현 특파원 19일 발】당지에서 활약중인「대한변호사협회마산사건조사위원단」에 19일 이사건의 피해자 중 가장 슬픈 역사를 지닌 한 가족이 찾아와『세상에 이런 꼴도 있읍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나가야합니까』라고 눈물로써 호소한 애화가 있다. 그들은 사건당일날 2대 독자인 아들을 잃은 가족이었다. 이미 죽은 김효득(19)군의 모친이었다. 김 군은 이미 시체가 되어 지난 17일 장사까지 치른 것으로 이 가족은 이 아이를 황천에 보냄으로써 절손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생계조차 막연하다는 것이다. 이 가문의 애처로운 사연은 이러하였다.
김군의 모친은 금년 40세된 중년부인이다.…
(시체 찾은 자모는이렇게말한다·동아일보 1960년 3월 20일자 석간 3면)
동아일보는 경찰에서 공표한 7명의 사상자 가족을 찾아 그들의 환경과 그들의 호소를 들어 보았다.
이름이나마 빛나게 했으면·동아일보 1960년 3월 24일자 석간 3면
〃짐승을 죽여도 이유있는 법인데 항의하는 모친에『저년도 수갑 채우라』고 그런 아이를『빨갱이』로 몰다니〃
마산사건에 희생된 일곱 유족들의 호소
【마산에서 본사 이강현 특파원 23일발】「삼·일오」의 공포가 지나간 뒤 일주일- 당지의 질서와 시민의 표정도 약간 안정되고 뿐만아니라 22일부터는 자유당 및 당지시청에서 사망자들에게 약간의조위금을 전달하기시작하여 그동안「빨갱이」또는 폭도로 몰려 떨고있던 이들의 유가족들의 분노도 약간 완화되기 시작한 것같다. 그동안은 혹시나「빨갱이」또는 폭도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고통을 당할까 두려워 입을 열지않았던 이들 유가족들의 입에서 비로소 그들의 억울한 호소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기자는 경찰에서 공표한 7명의 사상자가족을 찾아 그들의 환경과 그들의 호소를 들어보았다.…(이름이나마 빛나게 했으면·동아일보 1960년 3월 24일자 석간 3면)
그들은 거의가 극도로 빈한한 가정들이었으며 죽은 아이들은 거의 동네에서 또는 학교에서 칭송을 받아오던 수재 내지 총명한 청춘들이었다. 이 아이를 잃은 가족들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눈물로서만 날을 새우고 있었으며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기에 목이 잠겨 있었다. 유가족들의 말은 이러하였다.
▲ 김효득(19 )군의 모친 남금순(40) 여사 담(淡)
2대 독자로 정신병자된 애비 곁에서 그 애를 키우느라고 고생도 많이 하였으며 눈물도 많이 흘려 왔었다. 나는 그 애가 없으면 못살고 그 애는 내가 없으면 못살 애였다. 그 애는 나를 버리고 갈 애가 아니다. 이제 막 제 철이 들어 애미의 고생한 과거를 알 만큼 되니 제 복이 없었는지 내 복이 모자랐는지 그만 맞아 죽고 말았다. 남달리 귀중한 자식이기에 노상 호신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여 그 애는 총알이라도 비킬 재주가 있는 애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경찰이 고만 때려죽이고 말았다. 기왕에 돌아오지 못할 자식이라면 그 이름이나마 청사에 빛나도록 세상 사람이 높이 올려 주었으면 애미의 마음이 좀 편할 것 같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자유당에서 돈을 가지고 왔었다 한다. 내가 그때 정신을 잃어서 아무것도 몰라 그대로 보냈지만 정신만 있었으면 허윤수(민주당에서 자유당으로 옮긴 민의원)란 자가 온 줄만 알았다면 대갈통을 부수어 놓았지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불상사가 어째서 일어났단 말인가. 민주당에서도 조위금을 보내 주겠다는 말이 있는데 그 돈을 정결하게 싸서 자식의 영혼 앞에 바치기 위하여 절에 바치겠다. 전 마산 경찰은 나의 원수다.
▲ 김영호(19) 군의 부친 김위수(52) 씨 담
나는 하루에 요새는 1백50환 정도의 벌이 밖에 못해서 자식이 애비 처지를 염려하여 낮에는 구공탄 배달까지 하였으며 가난한 가정의 자식이래도 배워보겠다고 제 힘으로 야간학교까지 다녔던 것이다. 그 자식이 크게 되면 국회의원보다 더 잘될 자식인지 누가 알 것인가. 돈을 가지고 온 사람이 허윤수 의원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낯에다 침을 뱉고 말았을 것이다. 누가 달라고 했기에 무슨 염치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그 애가 써놓은 일기장을 보면 가슴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 짐승을 죽여도 이유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을 그렇게 때려죽이는 수가 어디 있겠는가. 사건이 발생한 날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죽은 사람은 죽어서 단념이나 하겠지만 그 총을 맞고 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 하나 하여 주지 않고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꼴인가. 하도 분해서 그 애 어미가 그 애가 죽은 남성동 파출소를 찾아가 어느 놈이 내 자식을 때려죽였느냐고 하니까 도리어 저년도 수갑을 채우라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것이다. 분해서 살 수가 없다. 어느 놈이 죽였는지 원수를 갚을 때가 있을게다. 다른 사람들은 화장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내 자식이 총에 맞아죽지 않고 맞아 죽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하여 매장을 했다. 이 사실을 밝혀 줄려면 열 번이라도 파내 보아도 좋다. 헐벗고 있는 민주당이 무슨 돈이 있어 조위금을 주겠다는지 감사하게 생각한다.
▲ 오성원(19) 군의 경우
네 살 때 부친을 잃고 그 후 모친은 개가했기 때문에 숙부인 오점조(45) 씨 집에서 열네 살 때까지 자랐으며 15세 때부터 혼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자립하고 있었다. 죽은 시체도 구두닦이 동료들이 돈을 모아 처량하게 매장하여 주었다. 이 소식을 안 오씨는 장례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군 몫으로 나온 조위금은 모두 오씨가 받게 되었다.
▲ 김삼운(17) 군의 모친 조재근(46) 여사 담
밤새 허둥지둥 헤매다가 비로소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달려가 보니 왼쪽 허리에서 바른쪽 허리로 총알이 뚫고 나갔다. 죽지는 않았는데 그날 저녁에 의사들이 치료만 하였더라면 살았을 것이다. 아비 없이 키우느라고 남모르는 눈물도 많이 흘렸었다. 누가 돈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으나 조금도 반가울 리가 없었다. 어디서 왔다고도 아니하고 돈만 놓고 간 뒤였는데 남들이 허윤수 씨라고 말하였다. 그때 내가 알았더라면 목덜미를 물었을 것이다. 내 방에 마침 허 씨가 자기 자신을 넣고서 찍은 달력을 보내 준 것을 붙여 놓은 것이 있는데 어떻게 분하든지 사진의 두 눈깔을 파내고 말았다. 어떤 놈이 내 자식을 죽였는지 간을 씹어도 한이 남겠다. 민주당에서 조위금을 가져온다니 그것은 기쁘다. 그분들이 앞으로 나의 억울함을 풀어 줄 것 같아서 그렇다.
▲ 김영준(20) 군의 모친 주경옥(53) 여사 담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큰 자식은 ‘여수반란사건’ 때 대위로 복무하고 있다가 폭도들 때문에 전사하였다. 그동안 큰 자식의 연금을 받아서 살아왔는데 죽은 영준이가 금년에 비로소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기에 이제는 좀 주름살이 피어질까 하였더니 그만 무기를 든 놈들이 쏘아 죽였다. 돈도 무엇도 아무것도 반갑지 않다.
▲ 김용실(18) 군의 부친 김기우 씨 담
그 애는 우리 식구 가운데서도 유달리 다른 애였다. 이번에 죽었을 때도 그 애가 도립병원에 있었는데 간호부들도 놀라더라고 들었다. 작년에 이 아이가 어떤 노인이 술에 취하여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업고서 제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까지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시켜 주었다는 것인데 그때에 이 사실을 간호부들도 역력히 기억하여 그 아이가 시체로 변한 것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착한 아이들을 이번엔 ‘빨갱이’로 몰려고 하였으니 억울하다. 자유당에서 보낸 돈을 도로 돌려보내고 싶지만─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다.─언제까지나 이 꼴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아이가 흘린 피는 헛되지 않을 것이라면 그 아이는 분명히 이 나라 정의를 위하여 희생되었다고 믿고 싶다. 이 나라의 보다 굳센 일군을 만들어 보려고 하였더니 그만 너무도 빨리 민주주의를 위하여 제물이 되고 만 것이다.
▲ 전의규(17) 군의 가정환경
전소조(61) 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빈한한 가정에서 작년에 겨우 당시 창신중학을 졸업한 후 현재 취직을 구하는 중에 있다가 이 꼴을 당하였다 한다. 온 가정이 통곡의 도가니가 되었으니 그 부친은 정신이상을 일으킨 사람 모양 그저 방문객을 멍하니 쳐다만 볼 뿐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