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는 5월에 실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1960년 2월 3일 자유당은 선거일을 3월 15일로 앞당겨 공고하고 5일에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입후보 등록까지 마쳤다. 5일은 미 워싱턴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중인 조병옥이 위종양 수술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민주당은 7일 조병옥, 장면의 입후보등록을 마쳤으나 15일 조병옥이 급서했다.
선거는 또다시 장면과 이기붕의 부통령 쟁탈전이 됐다.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주당 유세장에는 80만 시민 중 20만이 운집했다. 야당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경북도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토록 지시, 평일처럼 수업을 받도록 했다.
동아일보의 사사(社史)는 “동아일보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현장사진들을 게재하고 이를 규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사사 2권,1978년, 283쪽).
“이에 고교생 1000여명은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들어갔다가 경찰과 충돌, 10여명이 부상하고 100여명이 연행되었다. 이는 자유당정권에 대한 최초의 집단적 항의로 자유당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최초의 시위였다.”
동아일보 1960년 2월 29일자 3면. 대구에서 이만섭 특파원이 보낸 기사들이다.
동아일보 1960년 3월 1일자 조간 3면 사진.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제하의 대구학생 데모 기사를 사진과 함께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