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직후 한강을 넘어 남하한 종군기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1 동아일보 김진섭 기자도 서울에 남아 적 치하에서 사선을 넘어야했다. 김진섭 기자는 공병들이 한강교 폭파장치를 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창신동 집으로 돌아왔다. 2
“공군에서 나를 데려오라고 한 모양이에요. 여의도 106부대에 가는데 공병들이 한강다리 폭파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적이 오면 폭파해야한다고. 나는 집에 가야겠다며 군에서 제공한 차량을 이용해 창신동 집으로 왔습니다.”(김진섭·2013년 6월 25일 인터뷰)
서울신문 종군기자 한규호는 사살됐다. 한규호 기자는 6·25 직후 김진섭 기자와 함께 개성방면으로 취재를 나갔고 서울신문도 호외를 발행했다. 김진섭 기자는 한규호 기자의 사진이 호외에 실렸기 때문에 사살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한 기자는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18명 중 유일하게 한국인 종군기자로 기록됐다. 3
“한규호 기자는 종군기자 교육 1기 수료생으로 아내가 방송국 아나운서였어요. 당주동에 살았는데 6·25 발발 며칠 후 사살됐습니다. 서울신문 호외에 한규호 사진이 나왔는데 그걸 본 스파이들이 끌고 가다 사살한 것이지요.” (김진섭·2013년 6월 25일 인터뷰)
김진섭 기자는 당시 “대한민국 끝났구나하는 생각과 죽을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동아일보 기자인데다 국방부 출입기자였기 때문이다.
“창신동 집안에서 숨어 지냈어요. 동네사람들이 잘 숨겨주었지요. 어느 날 아침에 라디오를 들으니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거예요. 국군 제17연대가 있는 서빙고쪽으로 갔지요. 백인엽이 지휘하는 17연대가 서울탈환에 공이 컸습니다. 서빙고로 들어와 뚝섬에 있다가 중부전선에 투입됐지요.” (김진섭·2013년 6월 인터뷰)
동아일보 1985년 6월 11일자 5면 사진. 1950년 8월 수도사단사령부에서 미군측과 방어작전을 협의하고 있는 정일권 장군(오른쪽). 가운데는 팔을 부상한 수도사단 임시사단장 백인엽 대령이다.
김진섭 기자는 동아일보가 1950년 10월 복간된 후 다시 종군기자로 나섰다. 다른 나라 종군기자들은 미 제1기갑 사단의 종군을 권했지만, 동아일보 김진섭 기자는 서울신문 김우용, 경향신문 이혜복 기자와 함께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택했다. 4
미 제1군단에 예비부대로 배속된 국군 제1사단은 10월 11일 38선상의 고랑포까지 도달했다. 5 평양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국군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당부에 따라 국군 제1사단 장병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으로 전진했다. 6 김진섭 기자는 14일 오전 10시 발로 시변리 전선에서 기사를 보내고 있다. 7
【시변리 전선에서 14일 10시 발 김진섭 발】38지구에 있어 적의 최후거점으로 남아있던 고랑포를 손쉽게 차지한 제5816부대 백(白)준장 위하 각 부대 장병들은 우익진에 있어 철원으로부터 이천방면으로 진로를 개척하여 북으로 돌진하는 아군 제2군단과 좌익으로는 김천 한 모퉁이에 분산 집격된 적의 소수부대의 최후의 일격을 주고자 우회작전 중에 있는 미군 제1기갑 연대에 호응하여 지난 11일 공격명령은 내렸다. 한걸음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야음을 이용한 적은 구화리 일대를 부감(俯瞰)하는 355고지 717고지를 기화로 약간의 저항을 하여 왔으나 공군부대와 후방포대에서 발사되는 포병들의 원호 밑에 박(朴)소령이 지휘하는 탱크부대는 서서히 행동을 개시한다.…어디서인가 장병들의 몰려오는 소리에 앞을 보니 우리 장병들이 손에 쌀과 부식 물자를 들고 오는 것이다. 그들은 굶주린 이곳 주민들을 위하여 1일 3식을 2식으로 제한하고 약간의 식량을 세궁민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고 말하여 준다. 성급한 장병들은 앞을 다투며 전진하면서도 주민의 일을 돕는가하면 장병의 온정에 주민은 다정히 흠뻑 넘쳐흐르는 정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끊임없는 포총성이 원뢰(遠雷)와 같이 공기를 진동시키는 그 가운데 서민과 우리 장병 그리고 유엔군들이 모두 섞여있는 그 정경 고통 욕망 애정 모든 것을 있고 나아가 우리 개인이 가진 일절을 기울여 우리 참다운 민족을 만드는 헌신의 가을이었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17일자 2면, 파죽지세로 진격, 평양 입성도 불원, 종군수기, 국군장병 삼식을 이식으로, 굶주린 주민을 구호) 8
Notes:
-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회장, 625남침과 종군보도, 관훈저널 2003년 여름호, 32쪽.
훨씬 후에 알았지만 종군기자 중 한강을 넘어 남하한 기자는 박성환 최기덕 정성관 등 몇몇뿐 나를 포함한 거의 모두 적 치하에 묶여 사선을 넘어야했다. 6·25 첫날부터 서부전선 임진강쪽 전황보도에 골몰했던 서울신문 한규호 기자는 끝내 피신을 못하고 북한군에 잡혀 순직, 일산에 있는 ‘6·25 참전 종군기자 추념비’에 기록된 단 한 분의 한국인 종군기자로 기록되었다. - 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87, 72쪽.
한강교 폭파장치는 27일 오후 3시 30분경 완료되었다. 그러나 육군본부가 시흥에서 서울로 복귀하면서 폭파는 일단 연기되었다.…결국 폭발연기명령은 전할 수가 없게 되어 한강교는 새벽 2시 30분 폭파되고 말았다. - 동아일보 1977년 4월 27일자 7면, 한국전 순직종군기자 추념비 제막, 순직기자 18명
▲한규호(한국·서울신문) ▲어니필러(미·성조지) ▲레이 리처즈(미·INS)▲ 윌슨 필더(미· 타임 라이프) ▲막시밀리앵 필로넹코(프·AFP)▲앨버트 힌튼(미· 저널 앤드 가이드) ▲스티븐 사이먼즈(영·픽처 트스트) ▲제임즈 서플(미· 시카고 선 타임즈) ▲윌리엄 무어(미·AP) ▲이언 모리슨(영·더 타임즈) ▲크리스토퍼 버클리(영·더 데일리 텔레그라프) ▲프랑크 애머리(미·INS) ▲차알스 로제 크랜스 2세(미·INS) ▲켄 이노우에(미·INS) ▲장 마리 드프르몽빌 (프·AFP) ▲윌리엄 그레이엄 (미· 뉴요크 저널 오브 코머스) ▲디렉 퍼시(영·로이터) ▲호르헤 데오도르 (필리핀·어커크 수석공보관) -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회장, 6·25남침과 종군보도, 관훈저널 2003년 여름호,33~34쪽
천행이랄까, 그날 정훈국에 나타난 1사단 정훈부장 안중식(安重植) 소령이 “평양으로 갑시다. 곧 떠나요” 할 때 김우용(金禹鎔·서울신문), 김진섭(金鎭燮·동아일보) 두 기자가 성큼 안소령 지프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나도 그 차에 뛰어올랐다. 그 차는 노획한 소련제 지프로, 안소령, 보좌관 노영서(盧永瑞) 소위, 세 기자와 정훈부 사병 2명 등 모두 7명이 탈 만큼 자리가 넓었다.
이날 하오 서울을 떠난 일행이 고랑포 나루에서 임진강을 건너 계속 달려 황해도 신계(新溪)에 닿은 것이 그날 초저녁. 사단본부가 이미 수안(遂安)으로 떠난 후였다. 그날 밤 이슥해서야 우리는 수안 사단 전방CP에 따라붙어 하룻밤을 보냈다.
국군 1사단이 이처럼 쾌속도의 진격을 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평양 진공작전을 맡은 미 제1군장 프랑크 밀번 소장은 당초 3갈래의 작전명령을 마련했었다. ‘10월 5일 ① 미 제1기병사단은 38선에 진출, 군단주력을 엄호하면서 김천(적의 주력 집결처) 공격을 준비할 것 ②미 제24사단은 서울 북방에 ③ 국군 1사단은 고랑포 부군에 집결, 평양쪽으로 진격에 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미 제1기병사단은 서울→사리원→평양 선으로 북진 중이었다.
바로 그때 미 1군단사령부를 찾은 백선엽(白善燁) 제1사단장은 ‘평양 탈환작전에 국군 1사단을 꼭 참가시켜 달라’고 군단장을 설득했다. 그 이유로 백 사단장이 평양출신이라 그 지역 지리에 밝을 뿐 아니라 ‘적의 수도는 국군이 탈환해야 마땅하다’고 역설, 밀번 소장도 이를 양해하여 미 제24사단 작전구역에 1사단을 배정하게 된 것. - 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87, 318쪽.
미 제1군단에 예비부대로 배속된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후방지역의 북괴군 패잔병 소탕임무를 수행하면서 10월 11일 38선상의 고랑포까지 도달했다. 이때 평양점령을 어느 부대가 먼저 하느냐로 경쟁이 붙은 미 제1기갑사단은 벌써 3일전에 고랑포를 통과했었다.
평양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국군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분부와, 더구나 고향이 평양인 백선엽사단장은 누구보다도 자기 사단이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해야 된다는 결의에 차 있어서 국군 제1사단 장병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으로 전진했다. 하루 평균 25km의 진격속도로 줄기차게 돌진했다. - 동아일보 종군기자 김진섭 종군기,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편), 1987, 326쪽.
<고랑포 앞 임진강 도강작전>
1950년 10월 17일 중부전선 임진강변에서는 유엔군과 국군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적전도하를 목전에 두고 가교가 몇 개 설치되었다. 물론 적의 저항은 강하다. 고랑포 앞 지형은 구릉으로 가려져 자연요새의 구실을 다해 적의 잠복처로는 안성마춤이었다. 포연이 덮인 이곳에서 몇시간인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군데군데 적전도하를 감행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안일대에 교두보가 확보되어 저항하는 적을 제압해갔다.
압록강에서 90km이남의 북위 39도40분을 긋는 소위 맥아더라인이 유엔군의 작전범위로 그 한계는 정주로부터 군우리와 영변에서 함흥을 잇는 선이다.
각 부대의 소임은 이미 맡겨졌다. 우리 종군기자의 입장도 그러하다. 어느 부대를 택해야 좋을지? 취재경쟁에서 뒤질 수 없는 사명감 때문이다. 일본기자와 미국기자들은 미제1기갑사단의 종군을 권했지만, 우리는 그들과 헤어져 국군 제1사단을 택했다. 정훈부장 안중식 소령의 호의로 찝차편에 노영서 소위와 김우용(서울신문), 이혜복(자유신문) 기자등이 동승했다. 적지에서 적과 마주칠 경우에 대비, 나는 카빈소총을, 이 기자는 일식 99소총을, 김 기자는 M1을 지녔다. 유엔기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임진강안은 적의 시체로 가득하다. 숱한 사연을 안고 있는 임진강 나루터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민족자결 통일의 실마리를 찾고자 적도를 찾아 나섰던 김구 선생 일행을 뒤따르던 제2진의 인사들이 이 나루터에서 배가 전복되어 변을 당해 통일의 한이 맺힌 곳이기도 하다. - 동아일보 종군기자 김진섭 종군기,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편), 1987, 330쪽
<시변리 거쳐 북상>
시변리를 향하는 길가 양쪽은 적의 수류탄과 총기들로 즐비하다. 적지라는 관념에서인지 총성에 공포도 가시지 않아 마음 졸이며 국군을 따라 행군은 쉴 사이 없다. 오랫동안 전선에서 시달렸음에도 국군장병들은 실지회복의 대임에 피로한 기색도 없이 발걸음도 당당히, 개중에는 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행진의 길을 재촉한다. 정오쯤 마식령산맥을 우러러 581고지 밑에서 시변리 부락을 내려다보며 점심식사를 했다. - 1950년 10월 17일자 2면, 파죽지세로 진격, 평양 입성도 불원, 종군수기,국군장병 삼식을 이식으로, 굶주린 주민을 구호
【시변리(市邊里) 전선에서 14일 10시 발 김진섭 발】삼팔지구에 있어 적의 최후거점으로 남아있던 고랑포를 손쉽게 차지한 제5816부대 백(白)준장 위하 각 부대 장병들은 우익진에 있어 철원으로부터 이천방면으로 진로를 개척하여 북으로 돌진하는 아군 제2군단과 좌익으로는 김천(金川) 한 모퉁이에 분산 집격된 적의 소수부대의 최후의 일격을 주고자 우회작전 중에 있는 미군 제일기갑 연대에 호웅하여 지난 십일일 공격명령은 나리었다. 한거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야음을 이용한 적은 구화리 일대를 부감(俯瞰)하는 355고지 717고지를 기화로 약간의 저항을 하여 왓스나 공군부대와 후방포대에서 발사되는 포병들의 원호 밑에 박(朴)소령이 지휘하는『땅크』부대는 서서히 행동을 개시한다. 뒤를 따르는 기자는 새로운 시대를 낫는 진통(陣痛)의 신음소리외도 같은 밤하늘을 진동시키는 류탄포의 작렬과 포총성에 공포증으로 마음 설래이며 행군을 게속한다 누차나 삼팔선상에 종군하여 이북땅만 멀거니바라보든 기차도 이제 마음놓고 힘있게 실지회복을 위하여 나선 은장병들 틈에 어째들 나란히 새로운 감격으로 한거름 한거름 더듬는 장구한 시일 전선에서 시달린 피로의 안색조차 찾아볼 수 없는 장병들의 안면에는 희망에 넘처서인지 노래까지 불으며 힘있게 싸운다. 새벽이 가까오자 전방적 진지는 물을 끼언진 것같이 조용하다 멀커니 단악승전을 올러가는 아군장병들의 일대가 보인다 잠시 후 다소의 소총성이 들리자 적진을 점령한 화회의 만세성과 아울러 괴뢰군의 일부를 사살하고 남어지 병원을 자재와 같이 포로로하였다고 한다. 이같이 하여 공격을 게시한지 □□ 수시간만에 이십여키로를 똘파하고 전위부대도 법서전진을 게속하여 삼팔선상에서 52키로나 떠러진 시변리에 육박하였다 익 십이일 아침에는 앞을 가로막는듯한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을 우러러 581고지엽흐로 ○○를 안하여 나러다보며 멀지않어 닥처올 ○○과 ○○일대를 머리에 그리며 재척하는 마음을 억제시키며 장병들과 같이 아침 야전식사를 맛보았다 틈틈이 끼인 유엔군 각국 파견부대 장병들도 싸움에 고달푼 모양인지 충혈된 눈을 부비며 간밤의 전투를 흥미있게 말한다 어떤 병사한 사람이 유엔군 호주국 파견병사와 같이 민가로 나러가는 뒤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기자는 수천년이나 묵은 페허된 류각같은 시변리 주변에 부서진 주민들의 가옥을 헤처 이 구석 저 구석 더듬어보았다 놈들이 호칭하는 노동자농민의 천국이라든 이곳도 오년간의 시달림에 말러 빠지고 또 말러 빠진 어린이와 노파들이 이구석 저구석에서 다처 생불(生佛)과 같이 이러서며 우리들을 마음것 환영한다 뜰에는 아직 생생한 오곡이 기름지게 느러저있것만 그들은 자기손으로 만들어진 이 오곡을 이미 되로 수확할 수도 없고 배부르게 먹이지도 안는것이다 앞서 이곳으로 나터오든 유엔군 파견병사 한 명이 자기가 취하려든 아침식사를 어린이들에게 나누어며 먹기를 권한다 그는 말러 빠진 이곳 주민들을 위로하며 앞이로는 오로지 자유와 행북이 있을 것이고 이같은 잔악한 비극은 또다시 없을 것이라 말하여 준다 어데서인가 장병들의 몰러오는 소리에 앞을보니 우리장뱡을 이 손에 쌀과 부식물자을 들고 오는 것이다 그들은 굶주린 이곳주민들을 위하여 일일 삼식을 이식으로 제한하고 약간의 식량을 세궁민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고 말하여 준다 성급한 장병들은 앞을 다이며 전진하면서도 주민의 일을 돕는가하면 장병의 두정에 주민은 다정미 홉벅 널저흐러는 정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겨운 광경이 없다 끊임없는 포총성이 원뢰(遠雷)과 같이 공기를 진동시키는 그 가운데 서민과 우리 장병 그리고 유엔군들이 모다 석어있는 그 정경 고통、욕망、애정、모든 것을 있고 나아가 우리 개인이 가진 일절을 기우러 우리 참다운 민족을 만드는 헌신의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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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믿고 올 겨울에도는 잼나게 즐겨요!
Comment by CLICK — 2017/07/19 @ 1:29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