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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06 : 종군기자 김진섭(2)-6·25 발발

Posted by 신이 On 8월 - 6 - 2013

 김진섭 기자는 1950년 6월 26일 오전 회사에 돌아와 보니 자신이 보낸 기사가 인물사진과 함께 호외로 나와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호외는 그날 석간(6월 27일자) 1면에 그대로 다시 게재된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50년 6월 27일자 1면, 적 주력부대 붕괴, 공비 임진도강 수포화
【개성방면 ○○기지에서 본사 특파원 김진섭 26일 4시 발 지급보】재작 25일 아침 5시 55분을 기하여 개성전방 140 비둘기 고지로부터 원대리 일대를 통하여 개성에 침입하여 온적의 주력부대는 임진강 변봉동과 장단 그리고 고랑포 방면으로부터 진격하여 왔으나… 자정이 넘어서부터는 부근의 포성도 어느덧 잠잠하여졌다. 어둠을 타서 국군 ○○부대에서는 곧 행동을 개시하여 총공격을 취하였으며 완전섬멸은 시간문제라고 한다(군검필). (호외재록)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5개 방면 11개소에서 기습 공격했다. 이때 38선 전방에 배치된 국군병력은 11개 대대에 지나지 않았다. 북괴군의 남침준비포격이 38선 곳곳에서 일제히 개시된 새벽 4시, 국군일선부대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다(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87, 26쪽).

 

“6·25발발 사흘 전 문산의 구읍에 들렀습니다. 사단 지휘본부가 있었는데 소 떼가 하나 둘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아이와 이부자리를 싣고 피난한다는 거예요. 북쪽에서 전선에 군인들이 배치되고 있다며 싸움이 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은 더 많이 내려오고 사단장은 긴급요청에 나서고 사병들은 지뢰를 가져와 전선 쪽으로 매설을 시작했습니다.” (김진섭·2013년 6월 25일 인터뷰)

 

 정부와 군, 언론은 당시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그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다. 1 더구나 민심의 혼란을 막으려 당국발표 외의 군 관련기사 게재를 금지했다. 2 정훈국 보도과의 보도자료와 검열을 맡은 기사만 게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3 이 과정에서 국민들을 오도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27일자 각 일간지에 게재된 ‘국군, 해주시 돌입’ 기사가 대표적이다. 4

 

동아일보 1950년 6월 27일자 1면,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 해주시를 완전점령, 대한해협서 적함격침, 종합전과발표, 26일 오전8시 현재
과감 무쌍한 반격 전투 중에 있는 아국군의 활약은 혁혁한 무훈을 수립하고 있는데 26일 오전 8시까지의 그 전과는 다음과 같다. 【국방군 보도과 발표】

 
 이 기사는 태양신문 최기덕 기자의 말이 근거가 됐다.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이 옹진으로 취재를 다녀온 최 기자에게 전황을 물어 ‘백인엽 연대장의 사기는 해주로 진격한다고 할 정도’라고 대답했는데 김현수 대령이 종합전황 속에 ‘국군, 해주시 돌입’을 넣어서 발표한 것이다. 이 발표는 방송을 통해서 뉴스로 보도되고 각 신문에서도 크게 다루었으나 명백한 오보였다. 5 결과적으로는 이 보도는 국민을 실망시켰고, 군 발표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게 된다.

 

 

 

Notes:

  1. 김희종 시사통신사 사장, 종군기자시절 6·25취재여담, 신문과 방송,1976년 6월호, 43쪽.

    육군사관학교 종군기자 2기 훈련과정으로 3월 달에 들어가 훈련을 마치고 나와 6·25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6·25가 일어나니까 군당국은 일선전쟁수행에 신문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신문사별로 2~4명의 기자선발을 요청했습니다.…언론인의 한 사람으로 그때를 돌아보면 참 양심상 괴로운 것은 물론이고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보도는 정훈국 보도과의 보도사항만을 써야하고 그로 인해 통제된 보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 임학수 동아일보사 광고부국장, 종군기자시절 6·25취재여담, 신문과 방송,1976년 6월호, 46쪽.

    그때 생각이 그러한 정도였지요.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 씨가 와서 전방을 시찰하는 50년 6월 상순에도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 씨는 역시 만약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는다는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태 하에서 기자들이 사실을 어느 정도로 파악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하는 것도 이제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3.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회장, 6·25남침과 종군보도, 관훈저널 2003년 여름호,30~31쪽

    6·25남침 첫날 취재지시를 받은 나(당시 경향 사회부기자)는 김수종(사진부) 기자와 신문사 지프를 타고 동두천(1연대)으로 달렸다. 긴박한 상황을 모르는지, 국도 옆 논에서는 한가롭게 모내기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현지 도착 즉시 우선 전황이 어떤지 지휘장교와 면담했을 때 ‘염려 없다’며 사로잡은 공산군 포로와 노획무기를 보여주면서 겁에 질린 포로에게 ‘소련식 행진을 해보라!’고 명령하는 여유도 보여주었다.…그러나 현장에 갔을 때 다급하게 통신을 교화하던 통신병들의 목쉰 언성, 그리고 차츰 다가오는 듯한 은은한 포성이 마음에 걸렸다. 당시 정부도, 군도, 또 언론도 탱크를 앞세운 북한 공산군의 실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민심의 혼란을 막으려 당국발표 외의 군 관련기사 게재를 금지함으로써 현실이 은폐된 부분 또한 없지 않았다.

  4. 김희종 시사통신사 사장, 종군기자시절 6·25취재여담, 신문과 방송,1976년 6월호, 43쪽.

    육군사관학교 종군기자 2기 훈련과정으로 3월 달에 들어가 훈련을 마치고 나와 6·25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6·25가 일어나니까 군당국은 일선전쟁수행에 신문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신문사별로 2~4명의 기자선발을 요청했습니다.…언론인의 한 사람으로 그때를 돌아보면 참 양심상 괴로운 것은 물론이고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보도는 정훈국 보도과의 보도사항만을 써야하고 그로 인해 통제된 보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5. 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87, 28~29쪽.

    <옹진전투 취재>
    태양신문 종군기자 최기덕 씨는 6월 25일 옹진에서 북괴군 남침을 맞게 되어 국군 제17독립연대의 전투상황을 취재하고 돌아왔다.
    “6월 24일 옹진으로 종군 나갔다가 25일 그곳에서 북괴군 남침공격을 맞게 되었어요.…서울에 와서 25일 저녁에 국방부 정훈국에 들렀는데,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이 옹진쪽 전황이 어떠냐고 물어요. ‘육본에서는 후퇴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백인엽 연대장의 사기는 해주로 진격한다고 할 정도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잘못 와전되어 ‘국군, 해주시 돌입’이라고 널리 보도된 것을 알고 나중에 깜짝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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