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발발 당시 동아일보 종군기자는 김진섭 기자였다. 1949년 10월 4일 태릉 육사에서 10여 일간 훈련받은 20여명의 군 출입기자에게 국방장관 명의 ‘종군기자 수료증’이 주어졌다. ‘종군기자’라는 공식 명칭이 부여된 것이다. 이들은 여천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에 잠입한 반란군 잔당과 무장간첩들이 태백산, 소백산 등지에서 준동할 때 진압작전에 종군했다. 1 김진섭 기자는 1949년 9월부터 군경합동으로 본격적인 공비소탕전이 전개된 지리산에 투입됐다. 2
정확히는 1949년 12월 25일부터 전개된 내한(耐寒)연습을 겸한 일대공격전을 다뤘다. 이 공격전을 총괄하는 지휘관은 김백일 대령이었다. 3
“송요찬 연대장도 지리산토벌에 참가했다. 기자들 8명과 함께 갔더니 부관이 ‘오늘밤 작전이 있어 주무십니다’고 했다.” (김진섭·2013년 6월 19일 인터뷰)
기사 송고는 군의 통신시설이 이용됐다. 모든 기사는 군의 검열을 맡아야했고 기사 말미에 ‘현지 군검필’을 명기했다.
【지리산전투 ○○지구에서 김진섭 특파원 29일발】단말마의 폭도를 전멸시키는 한편 대규모의 내한(耐寒)을 겸한 지리산일대에 걸친 일대공격전은 드디어 지난 25일 이른 아침부터 일제히 전개되었다.…그러나 용맹한 국군장병들은 어떠한 희생이 있어도 최후의 폭도 한사람까지라도 이를 포착하여 격멸시키고자 지방으로부터 들어오는 유일한 길인 백운산과 덕우산 양봉의 길과 지리산내 12 고을을 포위하고 완전히 폭도들의 보급 루트를 차단하고 내부로는 잔여부대를 투입시켜 유격전을 감행하는 동시에 공중으로는 공군과 호응하고 입체전을 취하여 폭도들의 종식도 시간문제에 이르고 있는 현상이라 한다.…다만 지리산내에 잠재하고 있는 폭도들은 이중업와 이현상 양인이 지휘하고 있는 약 180명에 가까운 폭도가 있을 뿐이고 이들은 모다 불충분한 장비와 뜻하지 않은 극한과 굶주림으로 생의 길을 타개하려고 애쓰고 있는 모양이나 부근 부락에 있는 수지를 비롯한 7개 면민들의 일절 출입제한 또는 군용 자동차의 왕래를 금하고 있어 문자 그대로 폭도들의 완전소탕은 경각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현지 군검필).(동아일보 1949년 12월 31일자 2면, 공륙호응한 입체전, 지리산지구소탕전 개시)
김현수 보도과장은 현지에서 종군기자들에게 그때그때 브리핑을 했다. 김 보도과장은 1950년 1월 1일 현지에서 “지리산주변 연연 7백리 장선에 배치되어 완전포위태세를 갖춘 연습부대는 노고단 반야봉 세석 등 지리산맥 연봉을 비롯하여 표고 1915m의 상봉을 무대삼아 종횡무진의 대활동을 하고 있으며 극치연습의 특수성의 비추어 육군참모부장 정일권 준장 의무감 윤치왕 대령 병참감 백선진 중령 육사연구반 김웅수 중령의 통신반들 관계 참모의 참가를 보고 다각적인 연구와 적절한 대책아래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4
김진섭 기자는 동아일보 1950년 1월 4일자와 6일자에 종군기를 실었다. 김현수 보도과장은 비무장한 종군기자들의 신변을 걱정했다고 한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자동차의 속도를 방해한다. 정오 가까워 일시 적의 근거지로 되었던 인월리를 통하여 산내를 거처 대정리에 도달하자 앞을 가로막는 산맥과 3,4척이나 되는 눈으로 말미암아 트럭을 버리고 도보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고원지역에 가까울수록 기온은 점점 내려 추위는 전신을 칼로 베이는 것 같다.”
“밀림지역을 스칠 때마다 혹시나 폭도들과 맛나지나 안는가하여 간담이 서늘하여진다. 약 20여㎞를 눈에 빠지며 도보로 가는 도중 앞서 폭도를 지휘하든 김지회가 죽었다는 반설리 고개에 있는 파괴된 민가를 보았다. 추위는 더 심하고 방금폭도들의 근거지라는 1337고개가 보이니 이 이상 더 앞을 전진하고 싶지 않았다.”
“익 30일 새벽을 기하여 행동을 개시한 ○○유격대는 농무가 짙은 궁곡을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자 항공대는 이에 호응하여 폭도 주력이 있는 궁곡을 공격하니 지리멸렬된 적은 혼비백산하여 자체를 감추어 버렸다. 이 추격전에서 6명의 적을 사살하고 13명의 포로와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다는 22부대 1대대를 만나 적의 동정을 알고자 기자는 비 나리는 밤길을 이용하여 함양을 통하여 경호강 상류를 따라 산청으로 차를 달리었다. 밤 9시에 목적지에 이르니 함 부대장은 현지당책 하 동무(본명 최덕수)는 자살하였고 나머지 포로 13명(여자 2명 포함)은 수용중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50년 1월 4일자 2면, 영하 35도의 심산, 토벌전 최후단계에 돌입) 5
“지리산토벌을 종결짓고자 지리산 주봉 1915고지를 중심으로 잠복한 폭도들의 주력에 최후의 일격을 주려고 이른 아침부터 행동을 개시한 국군정예부대는 남부로 늘어져 있는 벽서령과 장기항에 일 부대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리산 준령으로부터 반야봉을 향하고 협격하여 남하시키는 한편 내부로는 다수의 유격부대를 분산 투입시켜 항공대와 통신대의 면밀한 연락을 취하여가며 적수사를 시작하였다.”
“약 3시간 반 걸려 목적지에 도달하였으나 이미 오늘의 전투는 끝나고 개가를 올린 병사들은 다수의 포로를 앞세우고 노고단 병영(노막)을 향하고 있었다. 기자는 불과 17세 가량 되어 보이는 나 어린병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리산작전에 참가한 후 1년이 넘으나 오늘의 전투는 대단치 않으며 덕우산에 있던 적이 이곳으로 온다는 정보를 듣고 아침 2시반경 출동하여 8시에야 겨우 폭도들의 발자취를 발견하고 그 뒤를 따른 결과 10시경 왕실령과 반야봉사이에서 가족아지트를 발견 포위급습한 결과 잠복폭도 수명과 격전하였으나 산도야지들의 방해로 도주하는 폭도 중 반야봉까지 올라가서 노파를 포함한 부녀 4명과 아이 5명을 포로로 하고 다수의 노획품을 갖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표고 1600m 지대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지리산일대 주변으로부터 U자형으로 협격하여오는 정면의 적과 일전을 하려는 이중대의 비장한 생활과 그들 장병들의 믿음직한 사기에 감복한 기자는 다행히도 적과 교전이 없음을 유감이 익 3일 미명을 기하여 다시 적을 추격하는 일대를 따라 서쪽정면에 나려다 보이는 여수바다를 뒤로 작일의 포로들과 같이 작전본부로 향하였다.” (동아일보 1950년 1월 6일자 2면, 반도주력을 포위압축, 완전소멸은 시간문제) 6
김진섭 기자는 2013년 6월 19일 인터뷰에서 “백선진 병참감은 나중에 재무부장관을 했다. 김현수 보도과장은 1950년 6·25가 발발하자마자 죽었다.”고 회고했다.
동아일보 1950년 1월 6일자 2면, 반도주력을 포위압축, 완전소멸은 시간문제
Notes:
-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회장, 6·25남침과 종군보도, 관훈저널 2003년 여름호,32쪽
훨씬 후에 알았지만 종군기자 중 한강을 넘어 남하한 기자는 박성환 최기덕 정성관 등 몇몇뿐 나를 포함한 거의 모두 적 치하에 묶여 사선을 넘어야했다. 6·25 첫날부터 서부전선 임진강쪽 전황보도에 골몰했던 서울신문 한규호 기자는 끝내 피신을 못하고 북한군에 잡혀 순직, 일산에 있는 ‘6·25 참전 종군기자 추념비’에 기록된 단 한 분의 한국인 종군기자로 기록되었다.
여기서 ‘종군기자’의 내력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정부수립 후 ‘종군기자’라는 공식 명칭이 부여된 것은 1949년 10월 4일 태릉 육사에서 10여 일간 훈련받은 20여명의 군 출입기자에게 국방장관 명의 ‘종군기자 수료증’이 주어진 후부터였다. 이어 1950년 2월 26일 제2기로 각사 기자 10여명이 역시 육사에서 12일간 훈련을 받고 종군기자 수료증을 받은 바 있다.
그 후 이들은 여천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에 잠입한 반란군 잔당, 그리고 남파된 무장간첩들이 태백산, 소백산 등지에서 준동할 때 진압작전에 종군했고, 6·25남침 이전 1949년부터 38선 전역에 걸쳐 산발적으로 일어난 북한군의 도발사건, 예컨대 개성 송악산 전투(1949년 5월초), 옹진전투(1949년 5월 21일), 은파산 전투(1949년 10월 4일) 등이 전개됐을 때 이들 종군기자들이 특파돼 전황보도에 나섰다. ↩
- 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87, 93쪽.
치안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1949년 9월부터 군경합동으로 본격적인 공비소탕전을 전개, 지리산의 눈쌓인 원시림 속에서 패주한 공비들을 수색 소탕하고 있는 국군.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는 반란의 주도자 김지회 홍순석 등을 사살하고 김의 처 조경순을 체포, 이 지구의 잔당을 거의 섬멸하고 1950년 1월 25일 해체되었다. ↩
- 동아일보 1949년 12월 31일자 2면, 정예부대집결, 국군초유의 작전
【지리산전투 ○○지구에서 김진섭 본사특파원 발】내한연습을 겸한 지리산일대에 출몰하는 폭도소탕전에 관하여 29일 김(김현수)보도과장은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북한괴뢰집단을 타도하고 실지회복의 중업을 쌍견에 걸머진 국군의 장래의 필연적으로 재래될 극한고원지대 작전에 대비하여 대규모의 동기 내한연습(耐寒練習)이 지난 25일부터 영하43도를 강하하는 지리산산맥 일대를 배경삼아 전개되었다. 이 획기적인 연습에 각지의 정예부대가 대거 집결하여 참가하였고 동 연습의 총통감은 역전의 용맹을 날리는 김(김백일)대령이다.
국군의 이러한 연습은 창설 이래 초유의 규모적인 것이며 국군은 이 연습을 통하여 현유의병기 피부 기타 제 장비의 활용과 보급방법의 가불을 과학적으로 분석 재검토하는 한편 공육(空陸)의 완전한 입체전을 거듭하고 동기작전에 대처한 확고한 기술과 필승의 태세를 완비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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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50년 1월 4일자 2면, 공륙의 입체포진, 참모진 대거 참가, 김 보도과장, 현지서 담화
【남원에서 김진섭 특파원 2일 발】현지에서 김현수 군보도과장은 이번 연습의 중간상황에 대하여 1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지리산지구 잔존공비소탕을 겸한 국군의 동기내한 연습은 지난 25일 상황개시 이래 항공대의 긴밀한 협력아래 공륙 일체의 근대입체전을 전개하였다. 희유의 폭설혹한을 극복하고 금21일에 이르러 최고조에 도달하였다.
지리산주변 연연 7백리 장선에 배치되어 완전포위태세를 갗운 연습부대는『노고단』『반야봉』『세석』등 지리산맥 연봉을 비롯하여 표고 1915 메타의 상봉을 무대삼아 종횡무진의 대활동을 하고 있으며 극치연습의 특수성의 비추어 육군참모부장 정(정일권)준장 의무감 윤(윤치왕)대령 병참감 백(백선진)중령 육사연구반 김(김웅수)중령의 통신반들 관계 참모의 참가를 보고 다각적인 연구와 적절한 대책아래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이 연습은 지리산지구 잔존공비를 가상적으로 한 실전훈련인 점에 그 묘미가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0년 1월 4일자 2면, 총책임자 최덕만 사살, 일주일간에 혁혁한 전과
【남원에서 김진섭 본사특파원 발】지리산지구 잔존 공비 소탕을 겸한 내한연습개시이래 일주일을 맞는 총통감 김(김백일)부대장 총지휘하 여전히 항공대의 긴밀한 협력하 공륙일대의 근대 입체전을 개시 희유의 적설과 혹독한 기후를 극복하고 31일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도달하고 있다.
지리산주변 20여 키로나 되는 장선에 배치된 연습부대는 노고단(老姑壇) 반야봉(般若峰) 세석(細石)등 지리산맥 연봉을 비롯한 표고 1915 메터의 상봉을 무대 삼아 종횡무진의 대활동을 하고 있는 현상이다. 지난 29일에는 연습 참가한 제 211부대 제3대대 박(박종길)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는 지리산북부사면(北部斜面)-국골에서 공비 현지당 아지트를 급습 총책임자 최(최덕만-일명 하 동무)을 사살하는 등 이번 대연습에서는 처음 보는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동아일보 1950년 1월 4일자 2면, 지리산 반도본부 소멸
【산청○○지구 최전선에서 본사 특파원 김진섭 31일 발】최후의 발악으로 약탈을 계속하고 있는 폭도 1백 80명은 이(이현상)의 지휘로 덕우산 중령을 타고 지리산을 찾아들어와 1915고지를 비롯한 1.3716 ○○고지 주변에 있는 칠성골(七星谷) 국골 쑥받골 등 12골을 유일한 근거지로 삼고 부근 부락을 침입하고 식량을 약탈하여 겨우 연명하고 있는데 폭도에게 최후의 일격을 주고자 ○○○부대에서는 폭도의 주력을 완전히 포작 분쇄하고자 지리산 주변 약 2백여 키로에 달하는 곳을 정예부대로 하여금 외곽선으로부터 포위 압축하는 동시에 그 내부부선에도 유격부대를 투입하고 폭도들의 보급루트를 봉쇄하는 한편 항공대와 통신대도 출동하여 폭도수색에 노력중이며 발견즉시로 이를 섬멸하고 있다. 지리산중에는 10격년내 처음이라는 한파와 눈보라로 수은주는 영하 35에 도달하는 춘 날씨로 폭도들은 심산에서 추위와 기아를 면하고자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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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50년 1월 4일자 2면, 영하 35도의 심산, 토벌전 최후단계에 돌입
혹한으로 인한 동사자와 동상하는 폭도측은 물론 국군연습부대에 있어도 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부대에서는 이 같은 고원지대의 독특한 자연의 변화가 심한데서 내한훈련을 겸한 토벌전을 전개하고 있으며 지난 29일 미명을 기하여 폭도들의 정면공격을 가하려는 ○○대유(유근춘) 대위가 지휘하는 대대와 행동을 같이 취하려는 기자는 연구반으로 파견된 육사김(김웅수) 병참감 백(백선진) 중령일행과 같이 추럭을 모라 운봉(雲峰) 99고개를 넘어 1337고지 달궁골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자동차의 속도를 방해한다. 정오 가까워 일시 적의 근거지로 되었던 인월리(引月里)를 통하여 산내(山內)를 거처 대정리(大井里)에 도달하자 앞을 가로막는 산맥과 3,4척이나 되는 눈으로 말미아마 추럭을 버리고 도보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고원지역에 가까울수록 기온은 점점 나려 추위는 전신을 칼로 베이는 것 같다. 어디서인가 총성이 자주 들려 비무장한 우리들의 신변을 우려하는 김(김현수)보도과장은 호위병이 없는 것을 무한히 우려하는 모양이다.
밀림지역을 스칠 때마다 혹시나 폭도들과 맛나지나 안는가하여 간담이 서늘하여진다. 약 20여키로를 눈에 빠지며 도보로 가는 도중 앞서 폭도를 지휘하든 김(김지회)이 죽었다는 반설리 고개에 있는 파괴된 민가를 보았다. 추위는 더 심하고 방금폭도들의 근거지라는 1337고개가 보이니 이 이상 더 앞을 전진하고 싶지 않았다. 연구반 김(김웅수) 중령은 이 울창한 심산에서 육사후보생들이 이번 훈련에 참가 못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이다. 심산계곡인 이곳에도 1,2호의 민가가 눈에 띄우며 또한 폭도들의 강압적 강탈에 못이겨서인지 모다 소개를 당하여었다. 덕골로 들어가는 고개턱에서 수명의 유격대 장병들과 부닥첫다. 유 대장의 소재를 무르니 아직 5키로 앞지점에 있다하며 주이하여 가라고한다. 한시간 후 장사진으로 지어 행렬하는 유 대대장을 맛낫다. 그는 비무장한 우리를 보고 폭도들의 포로가 되고 싶은가하며 김 중령을 책한다.
기자는 다시 폭도가 간 곳을 수색하는 유격대를 따라 동북방을 향할 때 3대대 1중대장 김중위를 만났다. 그는 약 20분전 1337고지와 월리부락에서 완전무장한 폭도 1백 50명이 식사를 하려는 것을 추격하였으나 불과 1소대의 병력 중 다수의 동상자가 있어 엇지할 수 없었다고 격분하고 있다.
어느듯 황혼도 찾어 지리산전봉은 암영에 사라질 무렵 산기슲 민가에서 쉬기로 하였다. 익30일 새벽을 기하여 행동을 개시한 ○○유격대는 농무가 지튼 궁곡을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자 항공대는 이에 호응하여 폭도 주력이 있는 궁곡을 공격하니 지리멸렬된 적은 혼비백산하여 자체를 감추어 버렸다.
이 추격전에서 6명의 적을 사살하고 13명의 포로와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다는 22부대 1대대를 만나 적의 동정을 알고자 기자는 비 나리는 밤길을 이용하여 함양(咸陽)을 통하여 경호강(鏡湖江)상류를 따라 산청으로 차를 달리었다. 밤 9시에 목적지에 이르니 함 부대장은 현지당책 하 동무(본명 최덕수)는 자살하였고 나머지 포로 13명(여자 2명 포함)은 수용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전투로써 지리산 현지당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다만 병단뿐이 존재하여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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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50년 1월 6일자 2면, 반도주력을 포위압축, 완전소멸은 시간문제
(지리산지구 본사 특파원 김진섭 기)
부상전 종군
동기연습을 겸한 토벌작전을 시작한 후 9일째인 □일에는 총통감 김백일 대령 지휘 아래의 총병력여 연습마감인 오는 5일까지에는 악조건을 무 지리산토벌을 종결짓고자 지리산 주봉 1915고지를 중심으로 잠복한 폭도들의 주력에 최후의 일격을 주고려 일은 아침부터 행동을 개시한 국군정예부대는 남부로 느러져 있는 벽서령(碧西嶺)과 장기항(場基項)에 일부대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리산 준령으로부터 반야봉(般若峰)을 향하고 협격하여 남하시키는 한편 내부로는 다수의 유격부대를 분산 투입시켜 항공대와 통신대의 면밀한 연락을 취하여가며 적수사를 시작하였다.
혹한과 기아에 빠져 주력은 포위망의 압축으로 인하여 지리산을 탈출하고 왕실령을 타고 남하를 기도□기시□□였다. 시간의 여유 □□□는 ○○○부대 김(김기범)중대는 행동을 개시하였다. 기자는 산곡을 싼 운무와 십여척이나 쌓인 눈과 추위로 도저히 자유스러운 행동을취할 수가 없었다. 대밭 욱어진 대숩 속을 뚫고 행진할 때『폭도의 포로가 되면 총살형에 처하나 총탄을 절약하기 위하여 돌로 타살한다』는 어마어마한 대대장의 말이 문득 머리에떠올랏다.
그러나 만일 적이 지리산 준령을 피하여 형제산으로부터 섬진강을 건너 백운산으로 도피할 염려가 있어 서남방으로 우회 포위전을 전개하려는 일대를 따라 기자는 다시 하산하여 추럭으로 산동방면서 구례지구를 거쳐 화암사 위로 올라 노고단으로 전진하였다. 약 10키로를 도보로 전진하는 도중 수명의 척후병은 적이 식량 보급차 이곳 밀림지대에서 산도야지를 잡는 기색이 있으니 일시 전진을 중지하자고 한다.
약 삼십분후 오십메타 앞에서 집중사격의 총성이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공포를 느낀 일행은 다소 주저하였으나 곳 달려온 척후병은 웃음을 띠우며 수확은 다만 폭도가 아니고 숲속에서 산돼지가 쓰러졋다고 한다 더한층 긴장한 기자는 1507고지인 노고단을 향하여 밀람지대를 더듬기 시작하였다. 약 3시간 반 걸려 목적지에 도달하였으나 이미 오늘의 전투는 끝나고 개가를 올린 병사들은 다수의 포로를 앞세우고 노고단 병영(노막)을 향하고 있었다 기자는 불과 17세 가량되어 보이는 나 어린병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리산작전에 참가한 후 1년이 넘으나 오늘의 전투는 대단치 않으며 덕우산에 있던 적이 이곳으로 온다는 정보를 듯고 아침 2시반경 출동하여 8시에야 겨우 폭도들의 발자취를 발견하고 그 뒤를 따른 결과 10시경 왕실령과 반야봉사이에서 가족아지트를 발견 포위급습한 결과 잠복폭도 수명과 격전하였으나 산도야지들의 방해로 도주하는 폭도중 반야봉까지 올라가서 노파를 포함한 부녀 4명과 아이 5명을 포로로하고 다수의 노획품을 갖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노고단에 도착한 기자는 ○○부대 김(김기범)중대의 병사들과 하루밤을 노숙하기로 하였다. 밤늦게 적정을 수색하다가 돌아온 김중대장은 왕실령에 집결한 적의 주력은 다시 2대로 나누어 일대는 형제봉으로부터 섬진강을 건너 백운산으로 도피할 염려가 있고 일대는 개화(開化)에서 방금 격전중이라고 하였다. 최후의 적을 격멸시키려는 이날 밤의 치렬한 격전이 연상되는 이때 김중대장은 주변고지에 경비와 공격태세를 취할 것을 명령한 후 3월까지 완전히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는데 혹시 적은 궁한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격으로 적은 이곳을 공격할는지 모른다고 한다.
표고 1600메타 지대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지리산일대 주변으로부터 U자형으로 협격하여오는 정면의 적과 일전을 하려는 이중대의 비장한 생활과 그들 장병들의 미듬직한 사기에 감복한 기자는 다행히도 적과 교전이 없음을 유감히 익 3일 미명을 기하여 다시 적을 추격하는 일대를 따라 서쪽정면에 나려다 보이는 여수바다를 뒤로 작일의 포로들과 같이 작전본부로 향하였다. 도중 포로들의 생활면을 타진하니 3,4일전부터 먹을 것이 없어 귀순까지 하려고 하던 차이라한다.
남아있는 폭도들의 주력도 국군의 완전한 포위와 기아 추위로 수일 전에는 동사(凍死)자가 속출하여 그들의 운명도 풍전의 등화 같다고 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