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
1950년 6월 27일 늦은 시각 발행한 동아일보 호외의 제목은 불분명하다. 이 호외가 현재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인상(趙寅相) 취재부장은 적의 포탄이 산발적으로 날아오기 시작할 때 기자들이 이같은 제목의 호외를 뿌렸다고 회고했다.
“이때에 남아있던 취재부 일동은 텅빈 공장으로 뛰어갔다. 몇장의 원고지를 들고 생전처음 각기 활자를 줍는 것이다. 기자가 문선을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신문 역사에 있어서 또다른 전례가 있었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엉망진창으로 주워뽑은 활자로 공무국의 유일한 사수자(死守者)인 이언진 공무국장이 손수 판을 짰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
이미 적의 포탄이 서울 장안에 날아오기 시작한 이 무렵, 피에 물든 6.25의 마지막 ‘동아’호외가 취재부원의 손으로 거리에 뿌려질 때는 저녁 6시경….” (동아일보 1965년 4월 15일자 6면) 1
그러나 이날 오후 취재부 기자 김준철(金俊喆)이 국방부 보도과에 들렀다가 과장 책상 위에서 ‘맥아더사령부의 작전지구 한국에 설치’라는 메모를 확인하고 호외로 냈다는 얘기가 있다.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3면) 2
27일 밤에 마지막으로 낸 서울신문의 호외의 제목이 ‘맥아더 사령부 전방지휘소 한국설치’였던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제목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제목이 어찌됐던 이 호외를 뿌렸던 최흥조(崔興朝)는 “기적을 믿지않는 서울시민들이 우리가 가두에 뿌리는 호외를 집어보지않는 무서운 사실을 목격했다”고 회상했다. 꼭 1년후다.
“우리들은 차츰 가까워오는 적군의 야수성이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부서버릴 셈으로 손수 최후의 호외를 집필 문선 식자 인쇄하여 가두에 뿌렸다. 어둠이 깃드는 그 전날밤 10시 기적을 믿지않는 서울시민들이 우리가 가두에 뿌리는 호외를 집어보지않는 무서운 사실을 목격한 나는 나 이외에 믿고 의지할 데가 없는 처자가 나만을 믿기 때문에 잠들어 말없을 내 집이그리워 이제 마각(馬脚)이 드러난 사기수와도 같이 당황해하는 건물들이 보기싫어 달음질치듯 내집이 있는 원효로로 갔다.” (동아일보 1951년 6월 25일자 2면)
최흥조 기자는 이날부터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되었던 수도 서울을 되찾은 9·28까지 3개월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1951년 6월 25일자부터 28일자까지 3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공산당의 철쇄’가 그것이다.
“『만세 만세 만세』마포나루터로 가는 길거리를 뚫린 규문을 방싯열고 내다보는 휘언한 길에는 폭음을 지르며 거대(?)한 전차가 내다르고 집집이 적기를 꼬즌 처마미를 피노(疲勞)한 병정과 순경이 삼삼오오 동화의세계를 동경하는말업은 소년처럼 한강을 차자가고 잇다…(중략)… 나는 가장의 위엄을 일치안흘려고 천연스럽게 웃으며 안해에게 내가 시켜 그가 정성끗 수집해둔 동아일보지『국제스파이 사건진상』『대한정치공작 대사건』올 비롯한 여러잡지게재글 전부를 내가 가지고잇던 신분증명서들과 함께 아궁이에 너허 불지로도록 하엿다.” (상) 4
“동리인심을 일치안헛스니 설마 동리서 나를 인민재판에 부치지는 안흘것이라고 은근히 자신을 가젓스나 형편을 살피려나갓다가 뜰어오는 안해는 누구가 붙들렷고 누구는 총살당햇다는 말뿐이다 29일부터 농립(農笠)을 폭 눌러쓰고 형진운동화를 줄줄끌며 죄업는 사람이라는 표정을 하면서 생존의 가능성을 위한 형세탐색의 방황이 시작되엇다…(중략)…유엔의 비행기가 서울상공에 나타나는 도수가 빈번해짐에 따라 고난을 격그면서 내가 살수잇슬것가튼 자신이 튼튼해젓다 우리들 동아일보 동인들은 거의 연락을 이루엇다 한장소를 정하여 매일 정보를 논핫고 사우들의 소식을 종합하엿다 지금은 놈들에게 납치되어 생사를 몰으게된 장인갑 편집국장도 그장소에 나왓다 정균철 업무국장과 백운선 사진부장이 체포되어 악형을 밧고잇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완전히 무력무능한 우리들은 아무것도 할수업섯다.” (중) 5
“정규의 서원인 내무분주서주임이란 놈은 치안대원보다는 관대하여 비위에 맛도록 주서대엇더니 장차 거주할 형명(泂名)과 최동일이라는 성명과 가족원수를 요감시인 명부에 적어노코 석방하는 것이다 숨을 장소래야 송림(松林)과 논뚝박게업는 손바닥처럼 반드름한 70호미만의 강변부락에서 공산당의 철의 감시하의 수난의 생활이 시작되엇다 평양이 고향이 나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가장하엿스나 오다가다 한두마디 사투리가 나올적엔 불안햇다 방을 구하지 못하는동안 나루집 오양깐에 멍석을 깔고 잣다…(중략)…올치 이놈들이 이제 할일이란 학살뿐이렷다 나는 동민들에게 10리발루산리로 치료를 바드러간다고 말하고 논뚝을발아 뒤산 골작이를 헤처 어부정 서방의집 방공호에 피신햇다 전표의 하로밤이 지낫다.『만세 만세 만세』어데선가 만세소리가 들려들온다 설마 인민군놈들이야 아니려니 햇스나 철쇄 90일 억눌릴대로 억눌린 나는 방공호속에서 더욱 몸을 움추렷다
『아버지 나오세요 태극기를 달앗서요』일곱살난 큰아들이 나르찻는다 9월18일 아, 공산당의 철쇄는 끈허젓다 ” (하) 6
Notes:
- 조인상(6·25 당시 취재부장·현 대한손해재보험공사 근무) 회고, 동아일보 1965년 4월 15일자 6면, ‘동아 45년의 증언’ 중 ‘6.25와 동아일보’.
중과부적-적에게 몰리는 국군이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이미 27일 새벽에는 의정부를 거쳐 적의 선봉이 미아리 저쪽에까지 다다라 왔다는 것이다. 외국기관을 담당하던 정인영 씨(현재 현대건설 부사장)는 이날 아침 ‘벌써 재경 외국기관원들은 서울 철수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이쯤 사태가 급박하고 보니 아침 호외를 내고 난 뒤에 당시의 최두선 사장은 전 사원을 모아놓고 “우리는 적에게 몰려 일단 해산한다”고 선언하고 신문사가 갖고 있는 은행예금을 모조리 찾아서 상하 없이 균등하게 전사원에게 피난비조로 나워주었다. 이날 정오때 쯤 이미 서울 거리복판엔 북쪽에서 밀려온 농민들이 농우를 끌고 피난 보따리를 이어안고 몰려들고 있었다. 동쪽과 북쪽에서는 대포소리가 은은히 울려왔다. 서울 장안은 온통 피난민의 아우성 소리로 들끓고 있었다. 오후 4시쯤 외근기자는 모두 편집국에 되돌아왔다. 더 이상 취재활동을 못할만큼 전황은 절망적이었고 처참 가열하다는 것이다.
이때에 남아있던 취재부 일동은 텅빈 공장으로 뛰어갔다. 몇장의 원고지를 들고 생전처음 각기 활자를 줍는 것이다. 기자가 문선을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신문 역사에 있어서 또다른 전례가 있었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엉망진창으로 주워뽑은 활자로 공무국의 유일한 사수자(死守者)인 이언진 공무국장이 손수 판을 짰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
이미 적의 포탄이 서울 장안에 날아오기 시작한 이 무렵, 피에 물든 6.25의 마지막 ‘동아’호외가 취재부원의 손으로 거리에 뿌려질 때는 저녁 6시경….
슬프고도 가슴 아픈 이별의 술잔이 무교동 ‘실비옥(實費屋)’이란 깍두기집에서 나누어졌다. 이때에 권오철 씨는 무엇에 근거를 두고 예감한 것인지 “석달후에 다시 만나자”고 눈물을 흘리면서 최친 그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3면, ‘반세기 쌓인 일화(逸話)’ 중 ‘기자가 문선(文選)한 6·25때 호외’.
피난길이 영등포쪽으로 뻗기 시작하던 1950년 6월 27일 오후 취재부 기자 김준철(金俊喆)은 최신 전황을 들을 겸해 국방부 보도과(현 증권거래소 자리)에 들렀다. 그러나 보도과에는 아무도 없고 흰 전보지 한 장이 과장 책상 위에 오두마니 얹혀 있었다. 뭘까. 슬쩍 실례해보니 ‘맥아더사령부의 작전지구 한국에 설치’라는 어마어마한 내용-. 후퇴무드에 잠겨있던 당시로서는 일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김준철은 곧 사(社)로 돌아와 남아있던 5, 6명의 동료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마침 미(美)B29기(機)가 사옥 위를 지나 북행하는 것을 보고 더욱 확신을 얻은 일동은 곧 호외를 내기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하지만 아뿔싸! 공장원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으니 어떻게 인쇄를 하겠는가. 그러나 구세주는 바로 등잔 밑에 있었다. 일동 중의 한 사람인 정인영 기자(현 현대건설 사장)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일본유학시절 문선으로 아르바이트한 경험이 있었다. 곧 이어 공무국장 이언진(李彦鎭)이 연락을 받고 뛰어나와 손수 조판(組版), 300장 가량의 호외를 찍어냈다. 시경(市警)에서 지프차를 빌어 시청앞→광화문→중앙청→안국동 코스로 호외를 뿌린 일동은 흥에 겨워 무교동 모 주점(酒店)에서 주안상을 짚었다.
- 임석기 (6·25 당시 서울신문 편집부 기자), 한국전쟁종군기자,한국언론자료간행회, 1987, 54쪽.
26일 정오까지 편집국 공기는 낙관적이었어요. 서부전선이 유리해서 해주에 국군이 돌입했고, 유엔총회가 개최되고 있다는 등 희망적인 뉴스가 많아서 수시로 호외를 냈습니다. 서울신문은 27일밤에 ‘맥아더 사령부 전방지휘소 한국설치’의 마지막 호외까지 도합 11번 호외를 냈어요.
- 최흥조(崔興朝), ‘공산당의 철쇄(상)-수난 90일의 기록’, 동아일보 1951년 6월 25일자 2면
버림을 당한 시민들과 함께 살아날수잇는길을 차즈면서 사(死)의 운명을 가치하기로 뱃장을 정한 우리들몃몃 동인들은『정의와 신념을 위하여 냉연한 멸시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안흔』직장인 동아일보사편집국을 일생의 직업으로 택한 신문기자의 비애를 한아름 그러안코 적이 포성이 유리창을 무례스러ㅂ게도 녹크하는 6월 27일 밤 10시까지 사수하느라고햇다
그것은 생명의 신화가 가두(街頭)의 요술쟁이의 손수건속에 잇는것과 갓다고 느껴지는 허무한 몃시간이엇다우리들은 차침 가까워오는 적군의 야수성이 들리는 것만 가튼 착각을 부벼버릴 셈으로 손수 최후의 호외를 집필 문선식자(文選植字) 인쇄하여 가두에 뿌렷다 어두ㅁ이 깃드는 그 전날밤 10시 기적을 밋지안는 서울시민들이 우리가 가두에 뿌리는 호외를 집어보지안는 무서운 사실을 목격한 나는 나 이외에 밋고 의지할데가 업는 처자가 나만을 밋기때문에 잠들어 말업슬 내집이그리워 이제 마각(馬脚)이 드러난 사기수와도 가치 당황해하는 건물들이 보기실허 다름질치듯 내집이잇는 원효로로 갓다 안해는 충혈한 동공을 진주처럼 균형잇는 눈물로 시츠며 장차 어리ㄴ것들을 데리고 고모부가 무슨 위원장으로 잇다든가하는 북황해도친정으로가면 먹고 살수잇으니 나더러 한강을 넘어 일본으로건 미국으로건 달아나라고 하는것이다
백악이라는 필명으로 그리고 결국은 알려지는 무기명으로 글올써서 생계하되 공산당을 증악하고 그 증악를 고취하는 글을 쓰ㄴ나에게 대한 인민재판예연에서 압해는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세ㅁ이다
『하늘이 문허저도 솟아나을 구멍이 잇다드라』춘향전의 이도영은 아니나 절망의 윤리가 그런법이다
시각을 악필요가업다 돗이톨려면 한참더잇서야할 그런무려ㅂ 절망의 혼수장태에 빠진내몸을 담은 목조가옥이 춤을추며 고막근처에서 락뢰성(落雷聲)이 일어낫다 한강철교폭파 이어서 고압선 작렬…나는 그러한 계획들을 미리 알고잇섯다『만세 만세 만세』마포나루터로 가는 길거리를 뚫린 규문을 방싯열고 내다보는 휘언한 길에는 폭음을 지르며 거대(?)한 전차가 내다르고 집집이 적기를 꼬즌 처마미를 피노(疲勞)한 병정과 순경이 삼삼오오 동화의세계를 동경하는말업은 소년처럼 한강을 차자가고 잇다
『망햇다 이제 완전히 망한것이다』하늘이 문허저도 솟아나올 구멍이 잇다고? 후천성 주류 중독에 걸린바보 그러치 너는 바보다 과연 너는처자를 사랑하는거냐?너는 이승만대통령의 뒤를 따라갈수 잇지안흐냐?너는 너의 과거에 사과인 권력잇는 여러친구들과 함께 일본으로가는 최종선에 탈수잇지안흐냐?네목숨만 살아잇다면 너는 다시 더절믄 안해를 어들수잇고 또 자식을 나을수 잇지안흐냐?담배와 술의 휴식이업는 감옥이다
『마후라』로 뺨 올싸ㄴ『카추샤』가 실련의 방황을 한 도형수(徒刑囚)들의 백설지옥서백리아(白雪地獄西伯利亞)다 아오지(阿吾地)탄광이냐 순안수리조합(順安水利組合)이냐? 아니다 총살이다『그러치인민재판이다』너는 사(死)의 운명의 방문을 현관에서 보기조케 사절해야한다 나는 가장의 위엄을 일치안흘려고 천연스럽게 웃으며 안해에게 내가 시켜 그가 정성끗 수집해둔 동아일보지『국제스파이 사건진상』『대한정치공작 대사건』올 비롯한 여러잡지게재글 전부를 내가 가지고잇던 신분증명서들과 함께 아궁이에 너허 불지로도록 하엿다. (계속) - 최흥조(崔興朝), ‘공산당의 철쇄(중)-수난90일의 기록’, 동아일보 1951년 6월 26일자 2면
앞집의 어중이도 붉은완장을 두르고 나섯고 뒤ㅅ집의 뜨증이도 총을메고 나섯고 우(右) 옆집의 건달과 좌(左)엽집의 바보도 나서서 인민을 위하여 인민에 의한 인민의 공포 기아정치가 시작되엇다 나는 가장람누한 옷에 혹물칠을해서 입는것으로 인민정치에 순응하기로햇다 저공을 날르는 B29공중요새에 향하여 딱콩□을 쏘는 무식한 병정놈들은 나ㅈ밤을 가리지안코 푸른하늘로 총탄을 발사햇다 옆집 할머니가 유탄에 쓰러젓고 건는 동리(洞里) 어린애도 마저죽엇다
동리인심을 일치안헛스니 설마 동리서 나를 인민재판에 부치지는 안흘것이라고 은근히 자신을 가젓스나 형편을 살피려나갓다가 뜰어오는 안해는 누구가 붙들렷고 누구는 총살당햇다는 말뿐이다 29일부터 농립(農笠)을 폭 눌러쓰고 형진운동화를 줄줄끌며 죄업는 사람이라는 표정을 하면서 생존의 가능성을 위한 형세탐색의 방황이 시작되엇다구물옷을 입은 털털이 병정들은 홍수처럼 북에서 서울로 흘러드러와 남으로 남으로 가는것만갓다
붉은병정들은 여기저기서 시민들을 모아노코 담배를 주면서 이북정치를 예찬하는 45분간의 좌담을 한다 어느놈이나 무식한 놈들이 꼭가튼말을 외운다 6월30일 한강을 사이는두고 전투는 격렬햇다 포탄이 날러오거나 폭탄이 떠러지거나 총탄이 흘러들어오면 내가죽던지 자식이 죽을것만갓다
저녀ㄱ에 나는 내가족과 떠러저사는 어머니를 뫼시고 효창□원으로 피난햇다 어머니는 김구씨 무더ㅁ옆으로 가야만 안전하다고 주장햇다 미군이 김구씨 무더ㅁ을 폭격할리 업다는것이 크리스챠ㄴ인그의 신념이다 수만의 피난민들이 김구씨 무덤주위에 자리를 깔고 공포에 사로잡혀잇다다음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를 차자오는 엽집처녀를 맛낫다
『아저씨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어제밤에 인민군 열아믄놈이 아저씨이름을 적은 수첩을 들고와서 동리를 발카ㄱ 뒤젓서요?』안해의 입술이 파라케떠ㄴ다 나는 등에업엇던 어린것을 내려노코 그자리서 안해에게몃마디 말을 하고는헤여젓다 나는 이친구 저친구를 차저가서 밥을 어더먹고 방공구뎅이에서 잠재워달라고 애걸햇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자수하도록 권하는 우정을 베풀지언정『반동분자』인 나에게 한그릇의 리죽과 한장의 가마니를 줄려고 하지안헛다유엔의 비행기가 서울상공에 나타나는 도수가 빈번해짐에 따라 고난을 격그면서 내가 살수잇슬것가튼 자신이 튼튼해젓다 우리들 동아일보 동인들은 거의 연락을 이루엇다 한장소를 정하여 매일 정보를 논핫고 사우들의 소식을 종합하엿다 지금은 놈들에게 납치되어 생사를 몰으게된 장인갑 편집국장도 그장소에 나왓다 정균철 업무국장과 백운선 사진부장이 체포되어 악형을 밧고잇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완전히 무력무능한 우리들은 아무것도 할수업섯다
7월 16일 비나리는아침 유엔공군편대는 용산조폐공장과 부근일체를 맹폭하엿다 그날 오후5시에 책임인쇄를 명한 20억의 조선은증권을 반출할 예정이엇다는 정확한 정보가 일본 송에 의한 국제정세와 전황과 함께 우리들의 장소에오면 알수잇엇다 안해는 새벽에 오류동 20리길을 젓메ㄱ이를 업고 걸어가서 참외나 호박을 사다가 팔기도하고 용산경찰서 아ㅂ에서 부치게 장사도햇다 그수입으로 보리쌀을 살수업는때에는 치마와 저고리를 팔앗다안해는 이리케해서 두되의쌀과 3천원의 현금을 동생을 시켜 내가잇는 장소로 보내어왓다 한강을넘어 달아나지안키로 작정할때 나는 내힘으로 서자를 부양하티라 생각햇스니 이제나의 존재는 안해의 부담을 가중하는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중학교사를 하던 동생은 하로아침 아무러치도 안흔듯이『어머니 안녕히 게십시요』라는 한마디의 인사를 남긴채 돌아오지 안헛다 어머니는 그날밤 동생이하는 수업시 의용군으로 붓들려나간 사실을 알엇다
8월 3일 돌아간 아버지의 1주기를 별빗아래서 어머니와 둘이서 치루고 나는 폭탄과 강제의용군을 피할려고『최동일』이라는 변명으로 처자를 데리고 8월 5일 새벽 마포에서 피난선을 타ㅅ다 UN공군기가 한강교와 용산철도공장을 맹폭하는 유쾌한 폭음과 흑연(黑煙)을 바라보면서 순풍에 돛을 단배는시체가 떠내려가는 한강을 흘러내려갓다 - 최흥조(崔興朝), ‘공산당의 철쇄(하)-수난90일의 기록’, 동아일보 1951년 6월 28일자 2면
수로 백리를 와서MI총을멘 붉은 치안대에게 부들린것은 그날 저녁 어둠이 스며들 무려ㅂ이엇다 불심검문에 응답하는 내용과 내얼고ㄹ생김이 어울리지 안으며 남대문시장에서 파지장사를 햇다는『동무』의짐이 지나처 호화로운 점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김포군 하성면 봉성리가 예정한 피난지엿고 붓들린 나루터가 거게서 5리가량 떠러진 전류정이엇길래 우는안해와 어린것을 나루집에 두고 치안대본부로 끌려가서 하로밤 신문당하고 다음날 면소재지 인 마곡리 내무서로 송치되엇다
정규의 서원인 내무분주서주임이란 놈은 치안대원보다는 관대하여 비위에 맛도록 주서대엇더니 장차 거주할 형명(泂名)과 최동일이라는 성명과 가족원수를 요감시인명부에 적어노코 석방하는것이다 숨을 장소래야 송림(松林)과 논뚝박게업는 손바닥처럼 반드름한 70호미만의 강변부락에서 공산당의 철의 감시하의 수난의 생활이 시작되엇다 평양이 고향이 나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가장하엿스나 오다가다 한두마디 사투리가 나올적엔 불안햇다 방을 구하지 못하는동안 나루집 오양깐에 멍석을 깔고 잣다
20리이상 되는길을 왕복하여 안해가 옷과박구어오는 보리쌀로 하로 두끼니의 죽 외에 먹는것이 업는 어린것들은 논뚝에서 뫼뚜기를 잡아먹엇스나 영양부족으로 여위ㄹ대로 여위어 마침내 발병햇다 지게와낫을 빌려 논뚝의풍을비어 말리거나 강변에 떠내려오는 목편을주어 밥을지엇다 8월9일 전류정에서 피난선이 유엔공군기의 기총소사(機銃掃射)의 밥이되어 승객 50여명중 12명이 즉사하고 20여명이 중상한일이 잇슨후로 유엔공군기는 연일1척의 쪽배도 노치지안코 강변을 기총소사햇다 인천에 가까운 한강남안을 피난지로 택할직에 인천상륙작전을 예기하고 하로라도빨리 공산당의 철쇄에서 해방될려고 할것이지만 기총소사를 당할적마다 어린것들이 아우성치면 술그머니 후회조차햇다
밤마다 김포비행장과 인천과 서울과 문산방면 하늘에 붉은신호부ㄹ이올라ㅅ다 마치 지상을 흘으는 별이양 신호탄이 하늘로 올으면 어데선가 내다르는 유엔공군기는 그지점에 폭탄의 세례를 주는것이다
새벽네시서 네시반 사히에 반드시 한나의 경폭격기가 봉성리뒤ㅅ산을 저공으로 돌아가는 사실에 주의하기 시작한나는 새벽의 비밀을 알엇다 푸로페ㄹ러소리가 멀리사라진다음 개뚝을 쏜살가치 지나가는 검은그림자를 본것이다
뒤ㅅ산에서 소나무구루에 무든『파라슈트』를 발견한후로 내무서와 치안대는 봉성리에잇는 피난민을 의심하기 시작하엿다
강제보국대동원 이날르 심해갓다 낫이면 무성한 논가운데 숨어서 새쪼ㅅ는 아동들과 해를보냇고 발이면 저녀ㄱ에 서울로 돌아갓다고 일러두고 집뒤수ㅂ속으로 은신하는 방법도 한두번이지 하는 수업시 9월이 된후로 전후7회 저녀ㄱ에 강제동원되어 20리길을 걸어 캄캄한밤중에 굉이나 삽으로 산허리에 산병호를 파고 새벽이면 집으로 돌아왓다 내가잇는 동리 뒤산도 요색지대로 지정되어 인민군 열아믄놈이 주재하게되자이미 한치(일촌(一寸))정도로 자란수염과 근시경을 벗은 정기일흔 눈으로 더욱 바보처럼며대며 무식하고 가난하고 병들엇스나 유순한 인간으로 보일려고 노력햇다인민군놈들은 동리는 발카ㄱ뒤저 위협발포를 하면서 12세이상의 남녀노소들 뒤ㅅ산으로 총동원시켯다 8월하순부터 인민군은 김포서 강화로가는 도로를따리 매일수천명이 북으로 이동햇다 가까워지는 포성과 치열해가는 폭격과 UN공군기들의 동향으로 인천상륙의 날이 임박해오는것을 추측한 나는 양의때처럼 쫓기며 무언의 항거를 여실히 표시하는 농민의 틈에 외어 산으로갓다
놈들은 이제 백서에 백의의 남녀노소를 산허리에 일렬로 세워노코 무지의 반항인 산병호를 파고 잇는것이다『그라밍』함재기(艦載機)들이 산붕오리를 스치듯 지나가며 손수건을 흔든다 농민들은 비행기를 처다본다 9월16일 캄캄한 새벽 천명에 달하는 인민군놈들이 봉성리를 거처 한강넘어로 패주(敗走)햇다다음 17일 하오 남로당면당부부위원장이란놈이 동리에와서 군경의 가족과 피난민의 명부를 만들어갓다 학살을 올치 이놈들이 이제 할일이란 학살뿐이렷다 나는 동민들에게 10리발루산리로 치료를 바드러간다고 말하고 논뚝을발아 뒤산 골작이를 헤처 어부정 서방의집 방공호에 피신햇다 전표의 하로밤이 지낫다
『만세 만세 만세』어데선가 만세소리가 들려들온다 설마 인민군놈들이야 아니려니 햇스나 철쇄 90일 억눌릴대로 억눌린 나는 방공호속에서 더욱 몸을 움추렷다
『아버지 나오세요 태극기를 달앗서요』일곱살난 큰아들이 나르찻는다 9월18일 아, 공산당의 철쇄는 끈허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