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 폐간 당시 본사 감사였던 현상윤(玄相允) 고대 초대 총장과 취체역(예전 주식회사의 이사를 이르던 말) 김용무(金用茂) 김동섭(金東燮 · 납북 당시 취체역 총무국장) 선생이 6·25때 백관수 전 사장처럼 납북됐다.
일장기말소 사진을 신동아에 게재, 강제퇴직 당했던 최승만(崔承萬) 잡지부장의 부인으로 폐간 당시 학예부 기자였던 박승호(朴承浩 · 본명 朴忠愛) 여사도 일장기말소사건의 주역인 이길용 선생, 백운선 당시 사진부 기자와 마찬가지로 납북됐다.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운동에 관계했던 나는 숨어서 변성명(變姓名)을 하고 살아야 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학자금이 없었다. 장덕준 씨가 그것을 알고 요시노(吉野 · 법학교수, 신진 사상가)에게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요시노 교수는 장덕준 장덕수 형제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의 어떤 실업가가 장학금을 맡겼다고 생각하고 학비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그게 인촌 선생인 줄 알았으나 그때는 몰라 거절했다. 그러다 받기로 했는데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내 애인이 문제였다. 내 애인(朴承浩)은 당시 박현숙 씨와 감리교회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요시노 교수에게 그 뜻을 비쳤더니 얼마 안 되어 고국에서 장덕수 이름으로 백 원이 우편으로 부쳐져 왔다. 그 때 돈 백 원이면 거금이었다. 우리 내외는 1934년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함께 봉직하게 되었다.” <최승만(崔承萬),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356~357쪽>
딸 넷을 둔 최승만 선생은 6·25전쟁으로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세 딸은 공산주의자였던 남편을 따라 월북하고 부인은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납북됐다. 최 선생과 장모만 서울에 남았는데 넷째 딸이 평양까지 갔다가 10월 하순 국군과 함께 돌아왔다고 한다.
“하루는 셋째 사위가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아버님이 이 나라에서 사시려면 미국방송을 들으면 아니 됩니다…(중략)…‘이 놈아, 내가 지금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아느냐. 지금이라도 나를 붙들어가서 하루빨리 죽여 다오.’…(중략)…그래도 장인이라는 관계로 말미암음인지 붙들고 가자는 말은 없었다.” (최승만, ‘나의 회고록’, 390쪽)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1924.4~1925.5)을 지낸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 1888∼1968) 선생과 사돈간인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 1893~1950.?)선생도 납북됐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벽초 홍명희 선생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논설반 기자(1924.5~ 퇴사일자 불명)를 역임했고 1936년 1월부터 1936년 8월 27일까지 283회에 걸쳐 ‘오천년간의 조선의 얼’을 본지에 연재하기도 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도 위당 선생이 작사했다.
“두 분이 절친해 벽초 선생의 둘째 아들(홍기무)과 우리 누이의 혼사가 이뤄졌다. 벽초 선생이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갈 때 매형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후 매형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6·25가 나자 매형이 형무소에서 나와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와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 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정인보 선생 아들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이 고개를 넘던 때가 10월 23일에서 25일 사이 – 산간에는 어둠이 내릴 무렵 곁에서 업혀가던 최린과 정인보가 부득이 여기서 떨어지게 되었다. 절벽을 끼고 도는 길이라 한사람씩 간신히 지나가야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최린이 가고 얼마 떨어져서 정인보 고원훈이 뒤따랐다. 최린은 얼마 가지 않아서 등 뒤에서 정인보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절벽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뒤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어느 정도 안전한 곳까지 이르러 뒤돌아보았을 때 이미 정인보는 물론 고원훈도 안보였다. 이처럼 희생자를 많이 내면서 적유산 준령을 완전히 넘었을 때는 일행 100여 명 중 6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 최린과 현상윤은 ‘인보와 원훈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당 간부와 인민군들을 붙들고 통곡하였다.”<‘죽음의 歲月 – 拉北人士 北韓生活記’ (11) 동아일보 1962년 4월 10일자 석간 3면>
위당 선생의 후손들은 이를 근거로 10월 23일에서 25일 사이인 ‘10월 24일’을 기일로 잡고 제사를 올린다.
그러나 북한의 여러 핵심부서 직을 역임하다 탈북한 신경완(申敬完)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압록강변의 겨울 : 납북 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이태호, 다섯수레, 1991년, 36~38쪽)은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
“둘째 부류는 ‘반동’으로 지목된 최린 정인보 백관수 명제세 김용무 백상규 등 저명인사들이었다.…(중략)…이 행렬에 속해 있던 저명한 국문학자 정인보도 몸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어 낙오됐다. 그는 부르튼 발이 얼어 터져 심한 고통을 참으면서 비상식량으로 연명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식량이 떨어졌다. 그는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 속에 1주일 이상 굶주린 끝에 쓰러져 아사와 동사 직전에 이르렀다. 인솔자를 따라 천신만고 끝에 11월 중순경 강계에 도착한 납북인사들은 그 동안에 일어났던 참상을 관계기관에 강력히 항의했다.
당국은 그때서야 부랴부랴 정인보 등을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관계자들이 정인보를 버렸던 지점을 뒤졌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인적이 미치지 않은 숲 속에서 숨졌을 것으로 믿고 돌아가려했다.
그 순간 나무 틈새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났다. 죽어가던 정인보는 이들에게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들은 그를 급히 초산 부근의 민가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이미 기력이 쇠잔한 정인보는 11월 하순에 눈을 감고 말았다.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대열의 인솔 책임자였던 내무성 정보국 간부 김상학과 정근호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 이들을 징역 15년에 처하는 것으로 문제를 마무리했다.”
또 6·25전쟁 당시 납북 및 월북한 인사 62명의 묘가 있는 평양시 용성구역 용궁1동 ‘재북 인사 묘역’ 정인보 선생의 묘비문에는 사망일이 9월 7일로 돼 있다.
“여기에는 지난날 미군정 민정장관을 했던 안재홍 선생,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백상규 선생,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했던 송호성 선생,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현상윤 선생을 비롯해서 남조선의 정계, 실업계, 사회계, 학계에서 명망 높았던 분들이 안치돼 있습니다.
국회 부의장이었던 김약수 선생을 비롯해서 초대 국회의원 16명과 2대 국회의원 18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습니다. 초대 국회의원이었던 조헌영 선생 같이 구십 다 되도록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인보 선생 같이 북행길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습니다.”
‘정인보 선생 – 1950년 9월 7일 서거’
“정인보 선생에 대해서는 잘 아실 테고….”
‘현상윤 선생 – 1950년 9월 15일 서거’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했고, 서흥 신막에서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김용무 선생 – 1951년 9월 12일 서거’
“전쟁시기 돌아가셨습니다. 2대 국회의원입니다.”
‘박승호 선생 – 1978년 11월 30일 서거’
“남편이 광복 전에 최승만이라고 동경조선인기독교청년회 총무까지 했다고 합니다. 1946∼48년 그때 대한부인회 회장을 했습니다.”
(이상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설명, 민족 21, 2004년 5월호)
정인보 선생 묘지를 이곳으로 이장하기 전, 신미리 특설묘역에 있을 때 홍명희 선생이 찾아오기도 했다고 김흥곤(조소앙 선생의 비서) 선생은 소개했다. (민족 21, 2002년 7월호)
“명당자리라고 무척 기뻐했지. 그 분은 비석과 상석을 쓰다듬으며 돌아가신 이와 끝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소.”
창간기자인 김형원(金炯元), 1920년대 중반 본사 기자로 활약했던 김억(金億), 김동환(金東煥) 선생도 납북됐다.
기자가 되기 전 벌써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형원은 “인민군 후퇴 시에 이북으로 납치돼 평양 부근에 국군이 북진할 때까지 수용되었다는 것까지는 당시 도주에 성공한 납치인사에게서 확인되었다.”고 장남 김석규 씨가 적십자사에 신고했다(1956년).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한 김 씨는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외교 루트를 통해 수소문해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 씨는 자신이 10여 년을 뛰어다녔는데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는 게 참 어렵구나’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하나의 꿈이 있다면 내 생존시 남북한 문제가 원만히 해결이 돼 아버지가 마지막 생존했던 곳으로 알려진 평북 철산 소재 수용소에 가서 아버님의 행적을 찾고, 혹시 뼈라도 묻혀 있다면 이를 갖다가 어머니 유언대로 합장을 해 드리고 싶어요.”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2006년 1월 14일 증언 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