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2월 2일 송진우 · 여운형에 이어 또 한분의 지도자를 잃었으니, 설산 장덕수선생이다. 일찌기 동아일보 주간으로서 창간사를 통해 민족 · 민주 · 문화를 내세워 동아일보의 진로를 밝혔고, 해방후에는 한민당 정치부장으로 건국에 여념이 없던 선생은 정적(政敵)이 보낸 자객의 총탄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동아의 지면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한반도의 운명이 급선회하고 있던 47년 12월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살해됐다.
십수 년 만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김성수가 세운 보성전문학교에 근무하다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을 맡고 있던 그는 송진우가 암살된 지 2년 만에 54세로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김성수는 후일 “송진우의 죽음이 민족해방의 대가였다면 장덕수의 죽음은 대한민국에 독립을 가져오기 위한 희생이었다.”고 술회했다.
송진우와 마찬가지로 결국 장덕수 암살의 배후도 완전히 규명하지 못했다. 앞서 7월19일에는 여운형도 배후가 불분명한 암살자에게 살해됐다.
장덕수의 죽음으로 이미 일제 시대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형 장덕준과 동생 장덕진(張德震) 등 3형제가 모두 민족운동과 관련해 희생하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장덕진은 임시정부의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던 1924년 8월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외국인 카지노를 습격, 판돈을 휩쓸어 나오던 중 사살됐다.” (동아일보 80년사,동아일보사,2000)
동아일보 1947년 12월 4일자 2면,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씨 괴한에 피살
수도청서 범인엄탐중
정게요인암살의 음모가 폭노되어 세간에 적지않은 불안의공기를 짜아내고있는대 2일 하오 7시경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53)씨는 시내 제기동(祭基洞) 149의4 자택에서 흉한두명에게 장총저격살해를 당하얏다
즉 2일 하오 6시50분 경장덕수(張德秀)씨가 저녁상을 막받고 있을지음 문간에서 녹크를 함으로 부인이 나가본즉 24、5세 되여보이는 정복을한 순경과 사복을한 사람 두사람이『본서에서 연락』을 왓다함으로 장씨가 현관으로 나가자 그찰라 순경복장을한 흉한은 가지고있던『카빙』미군총으로 두발을 발사하얏는데 그중한방이 장(張)씨의 하복부에 명중되여 그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었다 이급보를 접한 수도경찰청에서는 장택상(張澤相)총감의 일선지휘로 2천8백여명의 정사복경관대를 동원하야 시내일제히 비상경게를하고 범인을 엄사중 괴한이 입었든 경관복과 실탄등도 경찰에 압수되고 범인도 방금 지명수배중에 있다는데 범인체포는 시간문제이라한다
고장덕수씨 약력
1895년 1월 5일 황해도 재령읍 매화리에서 출생 1916년 3월 일본 조대정치학부를 졸업한후 192○년4월 동아일보 주간으로 취임하였다 1923년 이를 사임하고 도미(渡美)하야 뉴욕시 콜롬비아대학원 정치과에 입학 1936년 동대학으로부터 철학박사의 학위를 받고 1936년 12월 귀국하여 동아일보 부사장에 취임 194○년 다시 동직을 사임하고 보전교수에 취임1945년 8월 해방이되자 동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여 동당 외교부장 그리고 그후 동정치부장에 취임하야 금일에 이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4일자 2면,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씨 괴한에 피살
동아일보 1947년 12월 4일자 2면
정복경관이기에
안심하였소
부인박씨 담
그런데 동사건에 대하여 장씨의부인 박은헤(朴銀惠)씨는 다음과같이 말하다
『내가 그 경관을 대할때 약간 의심적인점도 있었으나 정복경관이기때문에 그래도 안심했든것이오 나히는 24、5세 되어보이고 검정체안경을 썻는데 미간이 두묵하고 민하게 생긴인상이었어요 항상 일부에서 주인을『죽인다 죽인다』하니까 언제죽어도 죽을사람이기는하나 그렇게말한마디도 못하게 죽을줄이야 누가알었어요 더 말하고 싶지도 않어요』(사진 박은혜씨)
두번이나왓소
하녀 은희 담
『국방색입은 사람은 그전에 우리집에 두번이나 왓섯서요 내가 지금보면은그사람을 알어보겟서요』
이승만박사 담
『장덕수 동지는 미국에 있을때부터 친밀히 지냇다 국내에 와서도 친밀히 지냇는데 이러한 사실은 전국적으로 큰손실이다 우리는 위대한 애국자요 유력한 동지를 잃은것은 나개인이나 전국민으로서 매우 유감스러운일이 아닐수없다 그리고 정치요인 암살이 자조생긴다는것은 우리가 다같이 생각해야될점이 적지않다 그리고 장덕수동지부인과는 공부할때부터 친한관게가 있으므로 더구나 깊은 동정을 드린다』
진실한
애국투사
총장담감
장(張)총감은 장덕수(張德秀)씨 저격살해사건에 대하야 다음과같이 말한다
애국자 장덕수(張德秀)씨는 불행이도 흉탄에맞어 즉시 절명되었다 장덕수씨의 정치적 역량과 과거40여년간의 애국적기록은 여러분이 다 기억하실것이니 더말할것없지만 이애국자는결국 돈이없어 희생되었다 애국자들이 설한풍에 굼주리고 경비(經費)가없어 신변보호를 못한까닭에 흉한의 관역받이가됨을 우리는 깊이깊이 기억하여야 하겟다 바로 수일전에도 내가 장씨를 대하야 경비경관을 보내면 도로 돌리어보내니 무슨 이유인가 물은즉 우선순경들에게 먹일것없고 방(房)에 불때일것이없어 경관에게 미안하야 돌이여 보낸것이라고하며 거절하였다 나는 테로단에 대하야 좌우익을 막논하고 경찰은 총기립하야 소탕할 예정이다어제밤 9시경 하|지중장침실에 내가 방문하고 나의소신을 기탄없이 피로하였다 우리 애국동포는 경찰과 협력을 하기바라는바이다
한민당 부위원장
백남훈씨 담
하도 기가막혀서 무어라 할말조차 모르겟다 고인은 조국광복을 위하야 일생을 두고 싸워왓스며 유독히 해방후에는 혼란한 정게를 극복하여가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마침내 건국의 초석이 되고마렀다 목슴을 내걸고 독립운동을하는 동지인지라 이러한 일이 없으리라고는 생각지아니한바 아니나 아직 우리의 주권을 완전히 찾지모한 이마당에 있어서 이러한동지를 잃게된것은 우리땅의 손실일뿐만아니라 우리국가와 민족의 일대손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건국의초석이된 동지의뜻을 밧뜰어 최후의일인 최후의일각까지 조죽재건에 바칠것을 다시금 맹세하는바이다
조민당 담
『장덕수선생의 조난서거에 대하야는 참으로 말문이 막히며 억색한심정을 표현할길을 찾지못하겟다 우리는 민족적 큰인물울 잃었다 선생은 학식과 정치적 역량이 풍부하며 위대한 인격자이오 애국자이다 더욱 다사다난한 독립을 앞두고 선생을 잃은것은 국가적 큰손실이 아닐수없다
하로바삐 법치당국은 물론 민족이 총동원하야 암살 방화 파괴의소굴을 발분하야 애국자의 영을 위로하고 독립방해의 길을 막어야한다』
근민당 김성숙씨 담
『우리민족의 워대한정치가 장덕수선생이 흉탄에 거꾸러진것은 우리민족의 일대손실인 동시에 민족적치욕이다 이처럼 테로가 휭행한다면 나종에 누구가 남겟는가 테로행위는 독립을 천연시키는 결과밖에 맺지못할것이다』
민연(民聯) 이극로씨 담
『우리민족은 아까운인재 또하나 잃었다 이러한 민족상잔은 우리의 5천년의 광휘있는 역사를 더럽히는것으로 하로라도 속히 이런행위는 박멸치않으면 민족의위기는 더욱더 심각해질것이다』
적객이 살도(殺倒)
장덕수(張德秀)씨의 참변으로 3일 아츰부터 각게요인과 일반인사의 조객이 쇠도하고있다
고(故) 장씨단체장
6일 집행
고 장덕수씨의 장의는 각애국단체 연합장으로 6일 상오10시 한민당앞 광장에서 집행하기로 되었는데 장지는 망우리(忘憂里)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4일자 2면
경관복을 단서로
범인을 지명수배
장덕수(張德秀)씨 저격범인이 경관정복을 입었다 하는점이 사건의 큰의문이되어 방금 수도경찰청에서는 범인이 벗어버리고간 관복을놓고 범인을 추궁중인데 시내○○서에 무기대장을 조사하고 서장들이 출두하야 밀의를 거듭하고 있는바 범인이 입었든 관복의 출처와 무기의 소유가 시내모서라는것이 추측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범인은 체포되어야 그정체를 알것인데 들리는바에 의하면 범인은 지명사진수배까지 하였다는것으로 미루어 혹은 경찰파관게있는자가 아닌가도 추측된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4일자 2면
범인은 정복경관
평복수원은 숙면인(熟面人)
2일 하오 6시 50분 경고장덕수(張德秀)씨는 의사유홍종(劉洪鐘)씨외 4명의손을맞어 시내 동대문구 제기동(제기동149의4) 자택응접실에서 저녁을먹고있을때 일본군대 방한외투를 입은 정복경관일명과 평복한사람일명이 현관문을 두다리어 그집의 하녀인 은히(銀姬)(14)양이 나가서 내의를 물은즉 주인을 보겟다하야 안주인에 전하얏든 것이다 그리하야 안주인인 박은헤(朴恩惠)씨가 현관옆 대청유리창문을 열고『어듸서왓습니까!』하고 물은즉 상대편인 경관이『서(署)에서 왓서요!』하고 대답을하야『동대문서요?』하고 재차 다짐을 받을때 약간 어물어물한 기색이 있었으나 상대방이 정복경관이기 때문에 그래도 안심하고장씨에 전하였든것이다 그리하야 장씨가 현관에나가서 몃마디 주고받고 몰아설때 뒤편에서『카빙』장총을 두발 발사하야 마침내 장씨는 복부(腹部)중앙부를 관통당하야 현관마루에 넘어진것이다 그런데 뒤따라온 평복을입은 사람은 은히양에 말하며 이일이 있기전|인 5일전과 그전의 한번을 합하야 두번이나 차저온일이있어 잘아는 사람이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