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동아일보는 1946년 봄 3·8선 이북의 실정을 취재하기 위해 북으로 기자를 보냈다. 기자는 걸어서 3·8선을 넘고 중국에서 귀국하는 피난민을 가장해 평양에 잠입했다. 위험을 무릅쓴 이 르포는 4월 6일자부터 ‘3·8선 이북 답파기(踏破記)-평안반’이란 제목으로 7회 연재됐다.
‘KK생’이라는 이니셜의 이 기자는 3월 15일 밤 11시 훨씬 지나 중국 상해에서 귀국하는 피난민 20여명의 무리에 끼어 황해도 청단군을 출발했다. 서너 시간 밤길을 걸어 해주에서 남천으로 뻗은 신작로에서 3·8선을 넘는다. 해주서 사리원 가는 경편열차는 3·8선을 넘어온 승객으로 붐볐다. 보안서원의 경비가 심했다. ‘3월 1일의 평양학생동맹 휴학사건과 김일성장군 암살계획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함과 또는 토지계획문제로 말미암아 대지주의 책동방지를 하기 위하여 수사와 경계가 그렇게 엄한 것이라 한다. 실로 역마다 경계는 어마어마하였다.’ (1946년 4월 6일자 2면) 1
동아일보 1946년 4월 6일자 2면 삼팔선 이북답파기【1】
신원역을 지나 사리원역에 도착. ‘굴러가는 미곡차 신원역에만 쌓인 줄 알았더니 사리원역에서는 창고에 산적된 쌀가마니를 일꾼들이 화물차에 분주히 싣고 있었다. 역 구내에는 한말두말씩 쌀을 메고 쌀을 진 사람 사람 사람의 물결이 범람한다.’(1946년 4월 7일자 2면) 2
역명 간판은 붉은 색의 소련글자로 돼 있었다. 역 매점에서 1원을 내고 ‘자유황해신문’ 14일자와 15일자를 샀다. 김무정 장군이 토지개혁실시 관계로 지방순회차 해주에 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기자는 사리원 여관에서 일박한다.
기자는 평양역에 내려 거리마다 붙어있는 붉은 깃발, 붉은 포스터, 스탈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대자보에 놀란다. 소련군인 뿐 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 앞을 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고 강을 오르내리던 검은 석탄 배 네댓 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앉은 채 동민(冬眠)을 계속하고 있다.
기자는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가까운 곳에서 난 총소리를 듣는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부리나케 닫아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겠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려 질식해 죽겠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 (1946년 4월 8일자 2면) 3
기자는 친구와 함께 선교리 정류소를 지나 전구리로 향한다. 전구리 평양보안서 앞에 있는 냉면집에 들어갔다. 평양보안서 지하실에는 3월 1일 김일성 장군을 암살하려다가 붙잡혀 갇혀있다고 한다. 평양의 민심은 김 장군의 옆을 떠난 지 오랬다고 한다. 김 장군이 해방 후 평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평양운동장에 나타났을 때 군중은 열광하였으나 신의주학생 학살사건에 출마(出馬·어떤 일에 나섬)하여 신통치 못한 수완에 차차 민심은 하나씩 둘씩 떠났다 한다. 그와 반대로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씨에 대한 인망은 반탁문제가 일어난 다음부터 높아가고 있다 한다. ‘한때는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가 지금은 어느 선교사 집에 갇혀있다는 등 여러 가지 풍설이 도나 그의 거처는 좀처럼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라디오에 스위치를 켰다. 서울방송이 들어온다. 바로 가톨릭시간이었다. 삼팔 이북에서 서울의 방송을 듣고 있으니 감개무량하다. 이북동포가 라디오를 아끼는 심정이 넉넉히 짐작되었다.’ (1946년 4월 9일자 2면) 4
기자는 H씨를 방문한다. H씨는 기자에게 소련이 처음과 달리 친일파 척결에 미온적이고 일본사람들까지 쫓아 보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고 말한다. ‘ “정책이야 정책”. 이 말에는 50이 넘은 사람답지 않은 정열이 있었다. “정책이라니요”라고 반문이라기보다 H씨의 말 계속을 재촉하였다. “그렇지 정책이지 저 사람들에게는 조선 사람이든지 일본 놈이든지 민족적으로 구별치 않을 껄 민족보다 주의(主義)가 선행(先行)이지. 그러니까 구태여 일본 놈을 제나라로 보내고 안 보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붉게 동화(同化)만 되면 그만이니까.”’ (1946년 4월 11일자 2면) 5
기자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신의주. 기자는 압록강 철교에서 상념에 젖는다. 만주에서 나오는 동포는 신의주 대안의 안동(安東)에 모여 있다고 한다. 지척에 조국을 바라보면서도 이곳도 막혀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하루에 백여 명씩 압록강을 몰래 넘어 들어온다고 했다. ‘그 피난민 중 한사람은 봉천(奉天)에서 안동(安東)까지 18일간이나 걸려서 나왔다는데 나올 때 고생은 말하지 않고 다만 중국인한테 조선 사람들이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대략 다음과 같이 분개하면서 말하였다.…그 사람은 끝으로 조선이 해방되었다든 8·15의 기쁨은 참으로 희미한 것이었으나 이번 피난을 나오면서 절실히 내나라 내 땅 내피를 깨달았다고 고백하였다.’ (1946년 4월 12일자 2면) 6
기자는 신의주에서 K군을 찾아간다. K군은 건국세금을 걷고 있는데 일반의 이해가 없어 어려움이 크다고 호소한다. 기자는 저녁 먹고 K군과 신영(新映)극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얘기를 나눈다. ‘모든 정당은 해방이란 출발점을 떠났지. 그렇지만 독립이란 목적지는 우리가 생각하든 것보다 좀 먼 거리에 떨어져 있으니 곡절이 있겠지.…자네가 넘어온 삼팔선보다 더 어려운 삼팔선이 이 나라의 남북정치계에 가로 놓여 있으니 그 돌파가 어지간하겠나. 소위 과도기-지금 삼팔선으로 향하는 도중이니 다 넘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만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합치는 노력을 하여야지’ (1946년 4월 13일자 2면) 7
Notes:
- 삼팔선이북답파기【1】, 동아일보 1946년 4월 6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구사일생의 ‘월경푸념’ 철야의 자위대、삼엄한 경비
알고 십흐나 알길이 없고 드를래야 드를 수 없는 3·8이북의 소식을 독자에게 전하고저 본사에서 3·8 이북에 특파한 본사 기자는 온갓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북조선을 답파하고 이제 돌아왓스므로 이 답파기를『평안도편』부터 여기에 실리기로 한다직행거(直行車) 잇것만!
폭악스러운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이 된 후 어언 8삭에야 처음으로 남북조선의 우편물이 개성에서 교환되든 3월 15일 기자는 국경 아닌 국경의 3·8선 장벽을 넘으려고 황해도 청단골에 도착하였다
이날 개성역에는 평양으로부터 우편물을 실은 직행열차가 드러왓다. 이 얼마나 모순된 현실이냐 3·8선을 넘으려면 밤길을 거러야 한다. 기에 밤들기를 기다렷다가 열한시가 헐신 지나서야 청단을 나섯다 마침 우차세대에 짐을 실고 방금 주막 압흘 지나는 20여명이나 되는 일행이 있어서 기자도 그 속에 한목 끼웟다 동행중에서 흔이 강도가 만히 난다는 말에 반장을 내고 그 반장의 명령으로 도중에서 일행을 세위 놋고 모조리 몸검사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약간 안심들하고 가슴 설레이는 3·8선으로 3·8선으로 향하였다 것다가는 다시 인원수를 헤여보고 일행중 행여 뒷떠러진 사람이라도 있으면 기다렷다가 인원수를 맞추어 가지고 또 떠나고 바스럭 소리만나도 머뭇거리고 이리하면서 서너시간 동안이나 걸엇슬까 말까 할 무렵에 해주에서 남천으로 가는 장사의 신작로가 눈압헤 가로질린 것이 달밤이라 뚜렷이 보힌다『오!』말로만 듯던 경게선 국경 아닌 국경선 3천만동포가 울부지저도 들은 척도 안는 3·8선 눈에 보히고 손에 잡이는 것도 가튼 3·8선이것만. 등에서는 진땀이 흘른다 이제는 이 선도 무사히 넘으리라고 안도의 기쁨을 안고 그 신작로를 넘어섯다.
게 서잇거라!
『서라!』날카로운 명령이 끗나기도 전에 솔밧 속에서 뒤처나온 세 사람의 손에는 각각『피스톱』과『장총』과 곤봉이 번뜩였다. 저들이 강도일까?혹은 보안서원일까?분별키 어려웟다. 우리반장이 압흐로 나가서『우리는 상해에서 도라오는 피난민인데 고향으로 도라가는 길입니다라고 공손히 말하니까『그러면 피난민증명서 가지고 있이까?』라고 황해도 사투리로 반문한다. 좀 까다러이 보히는 듯하다 전재민증명서 가진 사람마는 조사를 쉽사리 맞추고 동과식혀 주었다
그러나 증명서 못 가진 사람은 일열로 서서 그곳에서 한참이나 마을 어느 집 마당 압까지 끌리워갓다 이 국경 아닌 국경에는 미소량군이 대치하야 각각 직히고 잇는 것은 물논이다. 이외에도 38 이북에는 보안서원도 직히고 또 만흔 청년자위대원들이 밤을 새워 가며 월경자를 검문하는 것이였다 전구 약품 고무신을 가저가든 상인 세 명만 남기고 우리는 해방되였다 그러나 기자가 그러케 쉽사리 빠저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일생처음인 시험문제를 치루고 나서니 어디선지 첫닭 우는 소리가 꿈속같이 들려온다
산천은 괴괴한데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만이 더욱더 발거름을 재촉하는 듯하였다 논길로 밧길로 날이 밝을 무렵에야 학현이란 곳에 도착하였다 황해선의 일 한촌이든 학현은 38선 덕분에 갑작이 번성하여진 모양이다 역두에는 어제 밤 38선을 넘어온 여객이 구름떼 갓다 이러케 엄엄한 경게선을 넘어가고 오는 소위 월경객이 하루에 수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역에 모인 사람들은 어제밤 고생푸념을 늘어논다월경자는 수천명
지난밤도 강도사건이 세 번 식이나 있었다드니 소련군한테 한 70명이 붓잠혀 해주형무소로 넘어가게 되였다는 등 또 한패는 잽힐 번하다 도망첫다는 등 모다 구사일생의 뭄서리 나는 경혐담이였다 어느 패에서는『국경도 이런 국경은 없을 게야』『우리 땅을 우리가 맘대로 못것구』『그러기에 빨리 우리정부가 드러서야 해』라는 비분과 실망이 얼키고 설켜서 함케 터저 나왓다.
해주서 사리원 가는 경편열차에는 38을 넘어온 승객으로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처럼 드러찻다. 이 차 속에서도 이동보안서원이 탓다. 특히 그날은 학생들과 상인배들을 심히 조사하였다. 역마다 장총을 멘 경비대원과 청년자위대원들이 서너명식 나와서 경비하고 있엇다.
기자는『왜 저러케 경게가 심함니까』하고 북도사투리로 여페안즌 손님에게 무르니『내가 아나요 괸히 웃쭐하느라고 그리지요』하고서는 기자가 뭇지도 아니한 말을『저새끼들 꼴보기 실혀서 원.』하고 입맛을 쩍쩍 다신다. 소위 3월 1일의 평양학생동맹휴학사건과 김일성장군 암살게획 사건의 실마리를 찻기 위함과 또는 토지게획문제로 말미아마 대지주의 책동방지를 하기 위하야 수사와 경게가 그러케 엄한 것이라 한다 실로 역마다 경게는 어마어마 하였다. -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2】, 동아일보 1946년 4월 7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완연(宛然)!“소련제”의 풍정, 춘경기 앞둔 농가와 토지개혁
팔삭동안의 변모
아슬아슬한 삼팔선을 넘고 보니 이국(異國)아닌 이국의 땅을 듸더보는 듯 풍정조차 삼팔 이남과 유달리 달라 감회는 더욱 기퍼진다. 팔삭 만에 이 땅의 풍정이 이러케도 달러젓는가 달끗마다『씨이까』라는 황해도 사투리도 귀의 익지 않은데다가 이 땅 백성들의 입에서『다와이』(달라는 뜻)『넷트』(없다)『카레스키』(조선사람)『로-스키』(소련사람)등 연발되는 그 뚝뚝한 한마듸 한마듸가 더욱 귀에 젓는다.
정거장『프랫트□』마다부터 있는 역명(驛名)간판에는 피보다 더 붉은 소련글씨의 역명이 눈에 유난히 드러낫고 그 무표정한 소련철도사령군의 길다란 외투자락은 금시라도 시베리아바람을 몰아오는 것만 같다. 간곳마다 소련군인들뿐 만아니라 소련사람들까지『해바라기』씨를 깐다. 기자는 26년 전 부모를 따라 로령(露領) 염포(鹽浦)에 가서 사는 동안 저녁마다 바다건너 고향의 산천을 그리며 해바라기씨를 까든 생각이 낫다. 야릇한 정취를 감춘『해바라기씨』누구를 찻어 이곳까지 흘려왓느냐고 뭇고시푼 충동을 금할 수 없다. 굴러가는 미곡차 신원(新院)역에만 싸힌 줄 알었드니 사리원(沙里院)역에서는 창고에 산적된 쌀가마니를 일꾼들이 화물차에 분주히 실고 있었다. 역 구내에는 한말두말씩 쌀을 메고 쌀을 진 사람 사람 사람의 물결이 범람한다.
그런가하면 한 노파가 어린에 업은 것처럼 쌀을 업고 한구석에서 왓다갓다하는 것이 또한 눈이 뜨인다. 여기도 쌀기근은 삼팔 이남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창고에 싸힌 쌀은 어떠케 처분되는 것인고 이곳사람들의 설명을 들어보니 어찌된 샘인지 동북(東北)으로 동북으로 쌀실은 차량이 굴러가고만 있다고 한다. 점심을 요기하러 음식점에 드러가니 보안서에서 엄금해서 밥은 없고 국수박게 하지 안는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쌀소리요 이러케 식량이 업서 살수 있겠느냐고 수군수군 한다 평양에서는 소두 한말에 2백원(3월20일경)한다느니 원산 함흥 쪽에서는 4백80원이라니 그런데 신의주에서는 1백 60원박게 안된다거니 그러므로 시골로 쌀을 구하러 단이게 된다는 등 그나마 자유로 갓다 먹게 해야지. 조선이 처음으로 한가지 통일된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식량기근일 것이다자유황해신문
역 매점에서 1원을 내고 신문 두 장을 삿다 자유황해신문(自由黃海新聞)의 14, 15 량일부이였는데 두 면의 소형신문이다 김무정 장군이 토지게혁령 실시에 관하야 지방순회차로 해주에 간 것을 머릿기사로 뽑고 정치사회 량면의 구별 없이 모다 토지개혁령(土地改革令)을 해설한 기사뿐이다. 이날 신문만 그러한지 몰으되 지면에는 민중의 여론이 조금도 반영되어 잇지안타.
그날은 사리원 려관에서 일박하였다 우리 방에는 평양 산다는 사람 두 명과 해주 산다는 농부 한분까지 모다 네명이 묵게되였다『쌀』이야기에서부터 화제는 이번 실시된 토지개혁령에로 을마갓다. -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 (3), 1946년 4월 8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비처럼 남국이 “그립다”, 컴은 거리에 총성이 은은
평양역에 나렷다 평양、여기가 북조선의 수도인가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찰구를 나서니 붉은 깃발 붉은 포스타 스타린 수상의 초상 토지개혁의 해설 등이 거리마다 부터있을뿐만아니라 소련부인과 소련어린이들까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였다. 기자는 여기가 제2의 적도(赤都)나 아닌가하고 조선의 지도를 펴보고 싶은 충동을 바덧다.
남북이 갈린지 일년도 못되어 평양의 자태는 너무나 엄청나게 소련식으로 변하고 말앗다 검으침침하고 기름끼 하나 돌지안는 평양 쓸쓸한 거리 정포를 벌리고 안저 잇는 상인들의 얼골에는 회색비치 지텃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발거름은 무거웟고 얼굴은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면 소련군완장과 군모를 파는 조고마한 점포가 눈에 띠인다 장총을 질머진 채 두 소련군이 그 가개 아페서 완장을 골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새로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 아플지나 대동교(大同橋)쪽으로 발거름을 옴겻다 여기도 보안서원이 오고가는 시민을 감시하고 있다3월도 중순이 훨신 넘었건만 날세는 그대로 추웟다.『북쪽손님이 오시드니만 날세까지 돌변 햇는 걸』하고 슬쩍 우서버리는 담화가 기자의 귀청을 울렷다 기후까지 소련식이냐 하고 기자는 혼자 우섯다. 강물도 흐렷다 모란봉 을밀대도 바람 속에 맴도는 것 같앗다 이 강을 오르나리든 검은 석탄배 네댓척이 강 건너 사장에 올라안진 채 동민(冬眠)을 게속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이라도 가보자고 하니 친구가 반색을 하며 말린다。바로 그때였다 아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낫다 방안에 안잣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비처 돌앗다 잠깐 침묵이 게속되였다. 부억에서 설거질하든 친구의 부인도 놀랫는지 한참동안 그릇소리가 나지 안앗다『헛방 같은데.』하고 등무의 입에서 판결이 나린 다음에야 안심들하였다.등무는『이러케 마음을 조리고서야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하고 허두를 내노코 자기 집도 삼팔이남으로 이사가겠다는 것이였다。
이곳에서는 여섯시 반만 되면 상점문은 불이나케 다다버리고 시민은 일곱시가 되면 거리에 나다니기를 꺼린다고 한다. 친구의 부인은『살아야사는 것 같어야지요』하고『이웃집 순자네도 며칠 전에 서울로 이사갓다고』기자 보고 들으라는 것보다 자기 남편의 의견을 슬적 떠보는 것이였다. 친구는 비단 자기네뿐 만아니라 적어도 평양사람의 대부분이 떠날 수 있으면 삼팔 이남으로 가겟다는 사람들뿐이라고 들려주었다 부인은『벌서 간 사람은 얼만데요』라고 이 사□울 증명한다.
평양의 민심은 말할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불안에 눌리워 질식해 죽겟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의 전부였다。기자는 이 불안의 원인이 어데있는가를 물었드니『기자자격이 없구만 그래 육감으로 알지 못해 이제 총소리도 들엇겟지』라고 말문을 내노코는 보안 행정이 너머나 탄압적이라는 것을 비롯하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십오륙세의 소년들을 모아 무□소년단을 조직하야 밤이면 이집저집에 보내여 탐정을 시켜온다고 한다。그 말을 듯고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쪽 끼첫다。(게속) -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4】,1946년 4월 9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지하실 속에서 “애국가”, 민중의 지도자는 어디 갓나?, 전기관(全機關)은 인위(人委)서 운영
선교리(船橋里)환차정류소 채 못가서 제7인민병원(人民病院)이라는 간판이 눈에 띠웟다 제7이 있으니 제1도 있겟고 혹은 제10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가치가든 친구는『이북에 약품이 적어서 통제하는 뜻으로 제7호니 멧호니 부친 줄 아나 그런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사회제도를 만들기 위한 준비공작이야 이제 탁아소(托兒所)만 되면 볼장은 다본걸 멀 그래』기자는 친구의 해설이 억측이기를 바랫다. 그러나 행정기관은 물론 초등교육기관에도 인민학교라고 간판을 내건 것을 보면 삼팔이북의 정치의 지향이 어되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민! 이 두 글자가 삼팔이북에 류행되기는 8·15도 훨신 지난 10월 중순경이라 한다 작년 10월 10일부터인가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5도 임시정치위원회(그때는 인민이라는 글자는 석겨 있지 아니하였다) 이후부터 인민이라는 두 글자는 세도하기 시작하였다한다『모-든 것을 인민의 손에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밋테 나날이 달라가는 평양의 자태를 발견할 수 있다 한다뿌리 박는 불근 군대
해방직후 민중은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만 해제식혀 주고는 곳 갈 줄 알었다. 그랫드니 처자를 다려오고 양옥식으로 된 변변한 집을 물색하고 어떤 장교는 도서를 만여권식이나 가저올라고 게획하는 것 등을 보고 실망하였다.
소련군 사령부에도 정치부니 문화부니 등 각부가 있고 한부에는 그 부에 전문적 기술을 가진 의원이 10명식 있어 중요한 문제는 이 전문가들이 상의 결정한다고 한다 저번 평양시내 18개소 중등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사건이 발생하자 소련군사령부의 명령으로써 3월 19일까지 등교하라는 것을 종용한 명령서가 신문에 발표되였었다. 또 2월 10일 조직된 북조선임시정치의원회도 소군사령부에서 맨들어낸 것이라 한다 삼팔 이북5도의 군정 아닌 군정은 손님 아닌 손님의 손으로 조리되어 간다한다반탁하는 조선민주당
박구리 어느 냉면점에 들어갓다. 바로 눈압에 보히는 것이 평양보안서이다. 저 건물 지하실에서는 수만은 학생들이 원통한 가슴을 부등켜 안고『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자주독립을 념원하고 있으리라 소위 3월 1일 김일성 장군을 암살하려다가 붓잡혔다고 한다 평양의 민심은 동장군의 엽흘 떠난 지 오랫다고 한다
김 장군이 해방 후 평양에 돌어와서 처음으로 평양운동장에 나타낫슬 때 군중은 열광하였다 이 나라 이 백성이 지도자를 찾는 마음은 간절하였다 그러나 소위 신의주 학생학살사건에 출마하야 신통치 못한 수완에 차차 민심은 하나씩 둘씩 떠낫다 한다 그와 반대로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 당수 조만식(曹晩植)씨에 대한 인망은 반탁문제가 이러난 다음부터 노파가고 있다한다 한때는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가 지금은 어느 선교사 집에 갓치웟다는 등 여러 가지 풍설이 도나 그의 거처는 좀처렴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라되오에 스윗지를 켯다 서울방송이 들어온다 바로 카토릭 시간이었다 삼팔 이북에서 서울의 방송을 듯고 있으니 감개무량하다. 이북동포가『라되오』를 아끼는 심정이 넉넉히 짐작되었다. - 국경 아닌 국경『삼팔선』이북답파기【5】, 동아일보 1946년 4월 11일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제 소굴 다시 찻는 일인(日人), 학교도 배급도 도루 주어 우대
초인종을 누르니 한참 만에 H씨가 몸소 나왓다. 덤석 기자의 두 손을 쥐고 한참만에야 노흐면서 응접실이 있건만 자기방으로 안내한다 단둘이다『그래 서울은 엇때 혼돈이지 여간 탄압이야』『퍽 수척하섯습니다』라고 말문을 돌렷다.『딴전을 피네 참 무얼 하나』『동아일보사에 있습니다』『응』 H씨의 얼골에는 긴장한 빗이 확 펴젓다. 팔자형으로 제처진 카-덴 사히로 상여(喪與)나가는 것이 보헛다. H씨와 기자는 시간가는 줄 몰으고 시국에 대한 화제에서 화제로 옮아갓다. 그중에는 아직도 기자의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안는 문제가 있다.다시 살어나는 일인(日人)
『8、15 이후 친일파 민족반역자 소탕하라는 간판이 굉장이 나붓터스나 그러나 그보다 먼저 소탕이 되었어야할 일인도 그냥 있지 않은가! 항간에는 왜놈은 두구두구 부□먹기 위하야 일본으로 안보낸다고 그리지만 그것은 저 사람들이 일반 민중의 심리를 무마하는데 지나지 않지 소련의 민주정책이란 그러케 간단한 것이 안일껄 내말이 미더지지 않거든 8·15직후보다 지금 일인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조아젓나 조사해보지 빼앗기웟든 집도 도로 찾는 일인도 만코 소학교도 내어 주어 공부도 하게 되고 이제 배급도 준다니 그만하면 우대지 머야 몰으는 사람들은 왜놈들은 꾀가 있어서 제 게집 딸들을 제공해서 소련사람들의 호이를 갓게되었다고 하지만 문제는 좀더 깁흔데 있을 껄 H씨는 원탁을 두 세번 뚜드리드니『정책이야 정책』이 말에는 50이 넘은 사람답지 안인 정열이 있었다『정책이라니요』라고 반문이라는 것보다 기자는 H씨의 말 게속을 재촉하였다。
『그러치 정책이지 저 사람들에게는 조선 사람이든지 일본놈이든지 민족적으로 구별치 않을껄 민족보다 주의(主義)가 선행(先行)이지。그러니까 구태여 일본놈을 제나라로 보내구 안보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붉케 동화(同化)만 되면 그만이니까』이 말을 들어서 그런지 거리를 지나도 민족반역자 친일파 소탕하라는 간판으로 새로히나 부른 것은 보히지 않었고 오-래된 것만히 마치 벌서 다 상연된 영화광고처럼부터 있었다。기자는 신의주로 가는 차중에서도 이 문제를 생각하였다. 봉천에도 안동현에도 조국이 그리워 하로라도 빨리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동포를 소군에서는 별로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는 것을 또 미루어 생각하니 H씨의 말에 거즛이 없다는 것을 알었다. - 삼팔선 이북답파기【6】, 동아일보 1946년 4월 12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말하라 “압녹강”이여! 도루 만주로 차저가는 사람들
소(蘇)·일(日) 세력의 소장선(消長線)
『여기가 국경이었는데!』압녹강(鴨綠江)을 바라보니 북위38도란 선이 차라리 여기가 되엇드라면 하는 □동을 금치 못하였다 압녹강을 가운데 두고 조수처럼 밀리워갓다 밀리워온 소일(蘇日)세력의 소장을 말없이 굽어보는 듯 철교는 이제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철교를 직히는 소련군과 보안서원 몃명이 다리턱에서 아물거릴뿐、그외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차저볼 수 없었다
작년 10월부터 12월까지 3삭동안에 소군은 과연 만주의 공장기게를 헐어서 이 다리를 거처 실어갓는지? 신의주 청년들 사이에는 저 다리를 없애 버려야지하고 파괴의 게획까지 세울 뻔하였다고한다『야룩강』아루강 너는 모든 비밀을 알고잇지 않을 것이냐 과거에는 일제세력이 만몽에 뻣치는 다리가 되고 이제는 또 무슨 다리가 될려는고?
기자는 만주에서 피난 나와 작년 11월초에 신의주를 떠낫다 그때는 기게 실은 차량이 신의주에서부터 평양까지의 각연선에 들어찻드니 지금은 하나도 보히지 안는다만주로 도라가는 동(同)
날이 어슬 어슬할 무렵이다『피난민구제소가 어디지오』라고 뭇기에 정거장쪽으로 가다가 철교쪽으로 가는 길이 있을 테니 그곳에 가서 누구더러 물어보라고 대답해주었다『할아버지는 어디로 가심니까』하고 물으니『만줄』차저 가는 길이요』라고 대답한다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다리고 조선에서는 살 수 없어 도로 만주를 차저간다는 것이였다 해방되었다고 고향에 와보니 도저히 살 도리를 찻지 못하야 압녹강을 넘으려는 그『개나리』보따리가 한없이 눈물겨웟다 이와 같이 도로 만주로 차저 가는 동포가 하로에도 수십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는보히것만?
이와 반대로 만주에서 나오는 동포는 신이주대안의 안동(安東)에 모혀있고 지척에 조국을 바라보면서도 이곳도 막혀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하로에 백여명식 압록강을 몰래 넘어 들어온다 그 피난민 중 한사람은 봉천(奉天)에서 안동(安東)까지 18일간이나 걸려서 나왓다는데 나올 때 고생은 말하지 않고 다만 중국인한테 조선사람들이 어떠한 대우를 밧고 있는지를 대략 다음과 같이 분게하면서 말하였다탁치지지(託治支持)를 참말 모욕
해방직후 중국 사람들은 조선도 이제는 독립되게 되었으니 한 독립국 사람으로서 대우하여 주더니 신탁통치문제가 이러나자 이것을 지지한다는 뉴-스가 중국인에게 알리어저서 그들의 테도는 아연 돌변하여 조선인에 대한 비웃는 모양은 노골적으로 표면화하여 젓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조선사람을 눈압페 놋코『꺼울리빵즈』(오랑케란 뜻)이라하니 우리는 이를 악물구라도 자주 독립해야하겟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두 눈에는 이상한 비치 떠돌앗다 그 사람은 끗트로 조선이 해방되었다든 8·15의 기뿔은 참으로 히미한 것이었으나 이번 피난을 나오면서 절실히 내나라 내 땅 내피를 께달았다고 고백하였다 (게속) - 삼팔선이북답파기【7】, 동아일보 1946년 4월 13일자 2면
평안반 본사특파원 KK생, 정치노선에도 삼팔선, 민중의 관심 속에 신민당은 어데로
『독립동맹이 돌어와서 그래도 치안이 훨신 나아젓서』 이 지방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안디는 불과 불평과 원망만 들어오던 기자에게는 거특한 유언(遺言)처럼 마음속으로 외우고 또 외워보앗다『압녹강』을 건너온 독립동맹이니 이 겨레의 참상을 뼈에 삭였겟으며 당장 우리민족이 염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라고 민중은 그의 귀추를 주시하여 왓다. 독립동맹 산하에 있든 조선의용군이 작년 10월 초순에 처음으로 조국의 땅을 드디든 날 신의주 동중(東中)학교 운동장에서 일천여명의 의용군은 가슴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대장(隊長)이 단에 올라서서『우리의 무장을 해제시킨 것은 누구냐 신의주시민이 아니냐』라고 항일전에도 굴치않든 의용군이 당시 공산당소속인 특별보안대의 게교에 빠저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한 나머지 너무도 억울하야 신의주시민을 향하야 그러케 웨치고 다시 안동현으로 돌아갓었다 한다
『독립동맹만은 그래도 좀 달라』아직까지 민중은 큰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한다
신민주주의의 기빨을 내걸고 이제 정치로선에 들어선 신민당(新民黨)은 어데로 가나 하야 이 지방 사람들은 아슬아슬한 연기(演技)를 보히는 곡마사(曲馬師)를 처다보는 것 같은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다 한다힘드는 건국세금
K군을 차자 갓드니 각반을 끌르면서 건국세금을 수금하려 갓다가 이제 막 돌아오는 길이라 한다.
그는『오늘도 동냥 갓다 오네』『동냥이라니?』
『건국세금을 바드려 단이는데 일반이 어디 리해해야지 그래서 막 동냥하다십히 해서 수금하네』
말문을 내노코 나라를 세울 세금이니까 주이와 견해를 떠나 자기의 직책을 다하려한다고 말하였다『멱사가 알겟지 가장 나존 지위에서나마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건국의 첩경인줄 아네』라고 말하는 그의 심정이 한없이 거□하였다독립의 길 아직 멀다
저녁 먹고 K군과 기자는 신영(新映)극장 쪽으로 거러가는 동안『서울은 하나지만 서울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니까 모든 정당은 해방이란 출발점을 떠낫지 그러치만 독립이란 목적지는 우리가 생각하든 것보다 좀 먼거리에 떠러저 있으니 곡절이 있겟지 이북에서 이남으로 합치는 노력이 잇서야지 자.『삼팔선』을 넘으려면 학현으로도 가고 신막으로도 가고 등두천 혹은 양양 쪽으로도 가지 안나 자네가 넘어온 삼팔선보다 더 어려운 삼팔선이 이 나라의 남북정치게에 가로 노혀 있으니 그 돌파가 어지간 하겟나 소위 과도기-지금 삼팔선으로 향하는 도중이니 다 넘고 보아야 하지 안켓나 그러치만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합치는 노력을 하여야지 이제 서북조선을 주마식으 달리고 나서 눈을 감고 생각하매 아물 아물 이국의 풍경처렴 이국에서 고생하는 동족들이나 맛나고 온 것처럼 그 땅의 동족들의 오늘이 가엽시 애씨우는 맘을 억누르기 어렵다 내 맘뿐 아니라 이민족의 가슴을 어이는 삼팔선이여? (평남편 끝)
38선이북답파기를 잘 읽었습니다. 본인은 1946년 4월 중순 38선을 북에서 남으로 kk기자가 밟은 코스를 정반대로 넘어 왔습니다. 중국 흑룡강성의 한 농촌에서 출발하여 하얼빈,장춘,길림,통화,집안,만포진,강계,희천,평양,사리원,학현,청단,개성,서울,대구까지 기차,마차,달구지들을 이용하여57일만에 귀국 했습니다.중국에서는 국공내전의 경계선을 넘고 압록강을 나룻배로 밤에 건너고 38선은 햔밤중에 쏘련군,미군의 초소를 피해 달구지에 짐을 싣고 걸어서 심장이 터질듯한 긴장과 두려움속에 넘었습니다. 개성에서 미군 디디티의 소독세례를 받고 서울 장충단 안의 수용소에 일주일간 수용되었다가 기차편으로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kk기자님의 답파기는 나의 67년전의 일들을 다시 한번 떠 올리게하며 깊은 추억에 빠지게 합니다.
Comment by 이상태 — 2013/06/17 @ 7: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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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60 : 이북답파기(1)-평안반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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