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경 워싱톤 이승만 박사 저택 정원에 모인 구미외교부 요인들. 둘째 줄 오른편에서 세째가 이 박사이고 네째가 프란체스카 여사, 그 다음이 임병직이다.
동아일보 초대 워싱턴특파원은 임병직(林炳稷·1893~1976)이었다.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2대 외무부장관과 초대유엔대사를 지냈다.
세계 2차대전 후 워싱턴은 세계뉴스의 중심지였다. 미국은 전후처리문제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각국 언론사는 미국의 수도에 특파원을 두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복간 후 3개월이 지난 1946년 2월 워싱턴 콜럼비안 빌딩 415호에 지국을 설치하고 임병직을 특파원으로 임명했다. 1 그는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구미위원부를 맡고 있었다. 2 동아일보 특파원이 미국의 수도에서 취재 활동을 한 것은 해방 후 우리 언론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성돈주재 본사 특별통신원 임병직 발】한국 광복의 역사적 기념일을 당하여 재 미주 한인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본사를 통하여 삼천만동포에게 전달하여 달라는 부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비분에 넘치는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일인(日人)에 대한 한인의 영웅적 반항의 기념일 독립선언을 공포한 이 기념일은 환희와 행복의 날이 되는 대신 또 한 개의 슬픈 표석이 되고 있다… (1946년 3월 3일자 1면) 3
【화성돈주재 본사 특별통신원 임병직 3일발 무전】하지 장군이 노서아 통신원의 남조선파견을 거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미주 언론계는 이를 지지하고 있다. 미주 각 신문은 전국적으로 매일같이 적절한 사설을 게재하고 있다… (1946년 3월 5일자 1면) 4
특히 전후처리방침을 담았다는 얄타비밀협정은 한민족의 관심사였다. 임병직 특파원은 스탠포드 크리스챤 과학지를 인용해 얄타비밀협정에 소련의 한반도 점령이 들어있다고 보도했다. 5 임병직은 끝까지 얄타비밀협정에 비판적이었다. 임병직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 1967년 동아방송과의 대담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될 때 소련이 개입됐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큰 불행이었다”고 회상했다.
【화성돈주재 본사 특별통신원 임병직 발】그런데 소위 얄타협정은 수화상혼(水火相混)의 환상적 평화를 출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왜 조선은 실패할 운명에 있고 또 한 개의 세계대전을 초래하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경험의 시험장으로 만들려 하는가? (1946년 3월 3일자 1면)
〔화성돈주재 본사특파원 림병직 발 무전〕최근 스탠포드 크리스챤 과학지에 의하면, 얄타협정의 가장 중요한 비밀은 아직도 그대로 백악관 공문서철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소련은 조선 전체를 요구, 미국은 북조선만 주기로…이것이 미국무성이 항상 38도선 문제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소이(所以)다. (1946년 3월 13일 1면)
“그 뒤 1945년 얄타회담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주 신병이 중해서 자기가 신임하는 부하에게 모든 문제를 맡겨 버렸어요. 문제를 맡은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해리 햅킨스와 알제히스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알제히스는 소련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죠.…한국문제가 토의될 때 소련이 개입됐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큰 불행이죠.”
(정계야화 임병직 편(22), 카이로 선언의 배경, 루즈벨트의 한국관, 얄타회담의 진상, 동아방송 1967년 1월 12일 방송)
동아일보 워싱턴 지국은 6월에는 미국 주요 도시에 안내장을 띄워 취재의 편의를 구했다.
동아일보 1946년 6월 24일자 2면. 본사 워싱턴 지국개설 인사장의 일부라는 사진설명이 있다.
그러나 임병직 특파원의 활동은 같은 해 10월 임 특파원이 민주의원의 재미 대표가 되면서 끝났다. 6 7 다음달인 11월 뉴욕에서 유엔총회가 열렸을 때 동아일보는 임영신을 특파원으로 참석시켜 활동하도록 했다. 8
Notes:
- 본사해외특파에 선편, 세계『뉴-스』의 집산처, 화성돈(華盛頓)에 본사 지국특설, 기대되는 림병직 특파원의 보도활동, 동아일보 1946년 6월 24일자 2면.
폭악스러운 일정(日政)밋헤 사로잡혀 전세게의 보도원(報道源)으로부터 오랫동안 멀리 격리되엇든 우리 조선의 이목은 이제 세게의 무대 우에 나설 수 잇게 되엇다 이리하야 우리 조선도 금후 세게 뉴-스망에 참가하야 온갓 국제뉴-스를 직접 바더들일 수 있는 길이 열일 터인데 이에 압서 현하 가장 긴급한 조선관게의 국제 뉴-스를 독자적인 우리 입장에서 한시각이라도 빠르게 취재 보도하고저 본사에서는 지난 2월 “세게뉴-스”의 집산처인 미국 수도 “워싱톤”에 본사지국을 특설하고 특파원으로 임명된 림병직(林炳稷)씨의 특전(特電)을 이래 본지에 게재하여 왓든 것이다 이는 오로지 조국 재건을 위하여 미성이나마 다하고저하는 본사가 막대한 경비의 희생을 각오하고 착수한 것으로 해방은 되었다고 하나 아직도 자주 독립이 요원하고 각국의 징정과 그 국제적 동향 하나하나가 우리의 주의와 관심을 끄으는 오늘의 판국에 있어서 본사 워싱톤 지국이 마튼 보도의 활동은 저윽히 기대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그리하야 이번 임 특파원은 지국사무소를 워싱톤 켈럼비안 삘딩 415호에 설치하고 전 미주 주요도시의 각층 각게 인사 관게 각 방면에 지국개설 인사장을 띠워 금후 본사의 취재 보도활동에 편의와 연락을 긴밀히 하여 주기를 간청하는 동시에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지국개설이래 임 특파원이 타전한 수차의 “특전”은 단연 삼천만의 이목을 새롭게 한 바 있었거니와 한동안 부득이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이 통신이 게속되지 못한 유감이 없지 않있는데 이후 하루빨리 본사 워싱톤 특전이 연속하여 게재되기를 득자 제현과 함께 고대하는 바이다 (사진은 본사 워싱톤 지국개설 인사장의 일부) -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2, 1945년 12월 28일, 임정구미위원부장 林炳稷, 신탁반대 성명서 발표.
[워싱턴28日發AP合同]미국주재 한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장 林炳稷大佐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조선신탁통치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번 전쟁에 연합국이 수백만의 희생을 낸 데는 중대한 이유가 있다. 그는 곧 자유를 위함이다. 그런데 신탁통치라는 것은 절대로 자유가 아니오 일민족을 엄중히 구속하고 노예화하는 것이다. 조선은 자주독립의 국가인데 일본에 침략을 당하여 40년간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상 4개국은 최근까지 일본의 적이었는데 역사와 문화가 찬연한 우리나라에 대하여 어찌 일본의 행동을 답습할 수가 있을 것이냐”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 시험대 우에 선 조선, 제3차 대전 유발의 요소를 포함, 동아일보 1946년 3월 3일자 1면.
주미본사 통신원 임병직 씨의 발신, 재미한인위원회성명서. (화성돈주재 본사 특별통신원 임병직 발) 한국 광복의 역사적 기념일을 당하야 재 미주 한인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본사를 통하야 삼천만동포에게 전달하야 달라는 부탁이 있엇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같이 비분에 넘치는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일인(日人)에 대한 한인의 영웅적 반항의 기념일 독립선언을 공포한 이 기념일은 환희와 행복의 날이 되는 대신 또 한 개의 슬픈 표석이 되고 있다。(조선은 아직 자유도 아니고 독립도 아니기 때문에) 조선은 반은 소련의 지배 하에 있고 또 반은 미군정 하에 점령된 것이다。(맛치 적□와같이 취급되고 있다) 이것은 민족의 유구하고 영광스런 역사 가운데、자유와 데모크라시의 확립을 위하야 싸웟든 전쟁에 의하야 입은 두 번제 재난이라 할 것이다。
조선은 이제 알타비밀협정의 한 개 희생으로서 전세계 압해 노여 있는 것이다。(미국대표는 상원에 있어서 이 이중취인(二重取引)을 시인하지 않었고、또 그런 취인을 하였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악마 같은 일인(日人)의 학정 하에 한인들은 미국과 소련을 미더왓든 것이다。 그런대 소위 얄타협정은 수화상혼(水火相混)의 환상적 평화를 출현식힌 것이다。그러나 웨 조선운、실패할 운명에 있고 또한 개의 세계대전을 초래하는대 필요한 모든요소를 포함하고 잇는 경험의 시험장으로 만들여 하는가?
주미상공회의소 이완순씨 축사-삼천만 조선동포여. 절대 자주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야 민족적 통일로 이 독립기념일을 축하합시다。□□한 조선만세! -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2, 1946년 3월 1일, 재미동포, 미국 각 도시에서 3·1행사 거행.
1919년 3월 1일 大韓의 獨立宣言書와 日本에 대한 無抵抗 抗戰을 축하하는 在美 韓人들은 31記念式을 지난 3월 1일 워싱턴 뉴욕, 보스턴, 시카고, 몬타나, 새크라멘토, 로디, 샌프란시스코, 디뉴바, 로스앤젤레스, 호놀룰루, 其他 하와이, 맥시코, 쿠바 等 韓人住在地에서 애국적 강령을 걸고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그 강령의 내용은 信託統治의 절대반대와 完全自主獨立의 戰取였다. 韓人들은 번즈國務長官의 연설에 용기를 얻은 것이었다. 政治評論의 권위자 킬브링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36년 히틀러의 라인랜드進駐와 같은 蘇聯의 强奪政策은 美蘇關係를 악화시켰기 때문에 美政府는 對蘇强硬策을 준비중이고 구태어 蘇聯의 滿洲朝鮮占領에 언급치 않는다. 러시아가 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一日이라도 빨리 撤退하여야 할 것이다.”
◊ 하지中將의 處事 美洲言論界 支持
하지將軍이 러시아通信員의 南朝鮮派遣을 거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美洲言論界는 이를 지지하고 있다. 美洲 各新聞은 전국적으로 매일같이 적절한 사설을 게재하고 있다.
◊ 普信閣앞 行事와 英雄的 鬪爭 讚揚
在美 韓人들은 3월 1일 종로 보신각 앞에서 李承晩과 하지將軍을 비롯하여 3천만 민중을 대표한 民主議院 諸氏에 의하여 거행된 祝賀式을 충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뉴욕타임즈 기타 각 大新聞은 3월 1일의 사설로 자유를 위한 韓人의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였다.[워싱턴主宰本社特別通信員 林炳稷 3日發 無電]
동아일보 1946년 03월 05일 - 폭로된 얄타비밀, 소련은 조선전체를 요구, 미국은 북조선만 주기로 밀약, 동아일보 1946년 3월 13일 1면.
얄타협정의 중요한 비밀은 백악관 공문서철 속에 보존 중
최근 스텐포-드 크리찬 과학지에 의하면『얄타』협정의 가장 중요한 비밀은 아직도 그대로 백악관 공문서철 속에 보존되여 잇다고 한다
소련은 조선전체를 요구 미국은 북조선만 주기로
조선에 관하야서는 1945년 2월 11일『얄타』에서 소련방이 조선전체를 요구한데 대하야 미국은 북조선만 주기로하엿다。 이것이 미국무성이 항상 삼팔탁선문제에 대하야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소이다
구라파와 극동의 재분배, 얄타비밀협정으로 취인
미국공중이 분배취인을 한 “얄타”비밀협정을 시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힛트러와 러버-쓰가 취인한『미윤핸』과같이『얄타』에서 구라파와 극동의 재분배가 되엿든 것이다。
만주와 조선 전 세계를 전화에 유입할 위험지대
십일야 가부리엘 히-터 씨는 만주와 조선은 전세계를 전화 중에 끄러넛는 가장 위험지대라고 말하엿고 드류 피야슨 씨는 십일 만주에 주둔하엿든 소련군대는 삼팔선을 향하야. 집중되고 잇다고 말하엿고 이 압도적 군대에 하-지 장군은 초조하고 잇다고 동씨는 미국대리공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곳 조선부녀자들은 이 로서아 캥그단의 피습대상이 되고 잇다고 하엿다
미국은 내(來) 4월 1일 신병모집 새 국무장관 마살 장군 취임?
십일 막부에서 월허윈챌 씨는 말하기를 미국은 금년 4월1일 대규모의 신병을 모집할 것이고 마-살 씨는 불원간에 번즈 씨의 후임으로 신 국무장관이 될 것이다 미국에 잇는 수백만회원의 요구에 의하야 세계민권조례협회는 최근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뉴-욕시협의원 웨리 씨. 국회의원 오클스키 씨、천주교도이고 퇴역 해군중좌인 에드워드 막그푸레 씨 등이 중요한 연사인데 웨리 씨는 로서아에는 현역군인이 천오백 만 명이라고 말하였다。연사들은 모다 노서아의 지나친 행동과 미국의 위무정책을 공격하였다。이 대회에는、파란(波蘭)、분란(芬蘭)、홍아이(洪牙利)、희납(希臘)、토이기(土耳其)、중국、조선 등 각국 대표가 참가하였엇는데
조선대표 신 제임스 박사가 자주독립정부수립을 역설
조선대표 신 제임스 박사는 동회 석상에서 다음과 가치 말하엿다 미 국무성은 어떠한 권위와 표준으로 조선은 자주정부수립의 준비가 되지 안엇다고 말하는가? 일즉 1776년 당신들의 선조들이 자주정부수립의 준비가 되엿다고 한 영국인은 한사람도 없엇을 것이다。로서아군대가 조선에 드러온데 대하야 미국은 책임을 저야할 것이다。조선은 그들을 엇더케하라는 말인가。조선은 오즉 조선인의 것이다라고 열렬히 주장하엿다
화성돈 주재 본사특파원 림병직 발 무전 - 민의 재미대표에 임병직씨 승인, 경향신문 1946년 10월 6일자 2면.
민주의원에서는 일전「워싱톤」에 주재하고 있는 임병직 씨를 동원(同院) 재미대표로 決定결정하고 미국무성 당국과 교섭중이든 바 최근 미국무성에서 동씨를 재미민주의원 정식대표로 인정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한다. - 림병직 주미특사, 37년 만에 작일환국, 동아일보 1949년 1월 26일 1면.
과거 삼십칠년 간 미국에 망명하여 생애를 바처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해방 후에는 민주의원의 주미특사로 임명되여 리 박사의 최고 막료의 한사람으로 또한 일찍부터 본사특파원으로 활약해오던 림병직씨는 이제 조국의 독립과 더부러 25일 하오 5시경 김포공항에 금의환국하게 되었다 (사진 림씨)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2, 1946년 10월 28일, 임병직, 번즈국무장관에 보낸 서한 공개.
[워싱턴28일 UP發 朝鮮] 韓僑委員會 林炳稷은 조선의 유혈을 모면하기 위하여 즉시 모종의 고답적 대책을 강구할 것을 요구하는 10월 26일부 번즈國務長官宛 서한을 공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하여 조선주둔 미소 양국당국이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라는 말로 인하여 대립상태에 빠져 있으며 조선의 독립을 부여하라는 카이로선언을 실시할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즉 조선의 유혈과 화난을 모면하기 위하여 즉시 신규의 고답적 조치가 강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의 이름으로 본 서한을 귀하에 상정하여 현재 조선민족의 평화와 안전과 독립에 큰 지장을 주고 있는 양국 당국간의 停頓狀態를 극복하고 미국무성과 소련외무성간에 즉시 행동을 취하기를 懇願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조선민족의 의사표시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엄존하고 있다는 것을 知悉하고 있읍니다. 然이나 트루만 대통령 영도하의 미국정부 외교정책은 조선인의 소리를 듣게 하고 그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불행을 인식하고 이어서 그들을 匡救할 것을 期待하는 바입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10월 29일 - 본사 특파원 임영신 여사, 뉴욕UN 총회에 참석, 동아일보 1946년 11월 2일자 1면.
방금 뉴욕에서 개최 중인 UN총회는 각국대표들이 모여 전 세계의 중대문제를 조상(爼上)에 올려놓고 열의하는 무대이니만치 세계의 이목은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본사에서는 이 총회에서 일어나는 중대한 문제를 직접 보도하고저 동아일보사 특파원 임영신 여사를 UN총회에 참석케 하였다. 동(同) 여사는 총회가 폐회되는 때까지 동회(同會)에 출석하여 상정되는 모든 중대문제와 특히 동양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수시로 참신한 뉴-스를 제공키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