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첫 삼일절을 맞는 민족대표 33인, 48인의 감회는 남달랐다.
동아일보는 33인 중 일제말까지 변절하지 않은 권동진과 오세창의 회고담을 첫 삼일절에 실었다. 1
만세운동 당시 54세였으나 해방 후 82세가 된 오세창은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서 왜정을 항거한 민족적 양심은 그 누구의 지도도 아니오 그 누구의 선동도 아니다”며 “견디다 못하여 삼천만 겨레가 한결같이 가슴 깊이 사무쳐 있든『독립』이란 2자를 실천하고자 폭발된 삼천만 민중의 진리였든 것이다.”고 회고했다.
85세의 권동진은 “왜적의 총검 앞에 굴복치 않은 우리 민족의 정의감은 오늘날 이 땅에 서기를 비친 것이니 이러한 민족적 용맹심으로서 건국노선에 매진한다면 반드시 서광이 비칠 것을 자신하는 바이다.”며 건국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만세운동 당시 48인의 1인으로 투옥됐던 김도태는 첫 삼일절 즈음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일이 실패에 돌아가매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으로서는 공연한 일을 일으켜 희생자를 많이 냈구나 하는 후회와 그들의 영(靈)에 대하여 더욱 미안한 생각이 가끔 일어났다”고 썼다. 2 그러나 김도태는 이어진 글에서 동경유학생 송계백→현상윤→송진우, 최린→손병희로 이어지는 삼일운동의 발단에 대해 설명했다. 3 김도태는 “우리민족의 반항운동과 독립운동이 여러번 좌절을 당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세계 사람의 머리 속에 우리의 부르짖음은 사라지지 않았다”며 “아직 그들의 머리 속에 우리의 소리가 남아 있고, 그 소리의 계속으로 연합군과 같이 싸운 결과로 카이로 포츠담 양 회담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이 약속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삼일운동에 뿌린 씨를 인제 그 열매를 거두게 되는 셈”이라고 결론지었다. 4
김도태는 다음해에도 동아일보에 비슷한 주제로 기고했다. 5 그는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의 세 종교단체가 주로 이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그들이 평상에 품었든 종교적 사상만으로 무슨 일에든지 일치될만한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며 “다만 민족을 살리려는 본능의 발동에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참고 서로 용납하게 된 것이니 이 본능의 힘이야말로 위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날 도리가 있을까하는 것을 의식하게 되였나니 이것이 즉 민족적 의식”이라며 삼일만세운동을 민족의식이 폭발한 것으로 보았다. 6
역시 48인 중 한명인 현상윤은 그 다음해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에 있어서 비록 독립의 실현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 효과에 있어서는 1910년의 소위 합병을 힘 있게 부인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향하여 강경하게 주장하는 국민의 의사표시가 되었던 까닭”이라며 “만일 이때에 우리들에게 이 운동이 없었더라면 비록 금번에 일본의 패전이 있다할지라도 카이로선언이나 포츠담회의에서 조선독립이 결코 용이하게 약속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고 그 의미를 강조했다. 7
건국 후 처음 맞은 삼일절에 동아일보는 김도태 현상윤과 함께 33인 중 한명인 이명룡과 48인 중 한명인 함태영을 불러 좌담회를 마련했다. 8 이명룡은 “이승훈 양전백 양씨와 나와는 다같이 백오인 사건에 관계되어 한차례씩 죽었다 살아나온 목숨이므로 우리는 그때 죽었든 셈 잡고 다시 나라 위해서 일하자고 맹서했다”고 털어놓았고 함태영은 “그때에는 피차간에 얼마나 비밀을 지켜왔었는지 33인 중에 든 분들이 서로 알지를 못하고 있다가 거사전일인 2월 28일 저녁에 손병희 씨 댁에서 모여서 비로소 서로 인사교환을 하였다”고 회고했다.
삼일운동의 경비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김도태는 “제일 처음 이승훈 씨의 관서(關西)방면 공작비로 김성수가 이천원인지 삼천원인지를 내놓았다”고 했고, 현상윤은“그 다음에는 동경에서 온 송계백 씨의 요구로 정노식 씨가 삼천원을 주선하여 주어보냈다”고 했다.“본 운동의 경비는 전부를 천도교에서 부담하였다”는 것이 김도태의 증언이다.
현상윤은 1950년 잡지 신천지(新天地) 3월호 삼일절 특집호에 2년 전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을 정리해 실으면서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을 ‘사다리’의 최종 계단이라 하면 1919년 3월 1일의 운동은 확실히 그 제1계단이 되는 것이니 8.15의 해방을 결과라면 이 3.1운동은 그 원인이 아닐 수 없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9
Notes:
- 권동진·오세창 양 선생 담, 기미년 회고, 단결로 독립완수에, 동아일보 1946년 3월 1일자 1면.
33인중 생존하신 27년 동안 왜적의 끈임 없는 압정(壓政) 밋헤서도 꾸준히 민족의 운명과 장래를 위하야 마음 속 깁히 독립조선을 사모하든 33인 중 변절치 않코 지금까지 생존하신 권동진 오세창 량선생에게 뜻김흔 삼일운동의 회고담과 삼천만의 진로를 무러보자
◇ 오세창 씨 담
나는 하야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일이 없다 왜 지금 것 입을 담을고 있었느냐하면 아직까지 우리가 그 당시 목적하든 독립국가 완성시기가 닥처 오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도리켜 생각할 때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야 죽엄으로서 왜정을 항거한 민족적 량심은 그 누구의 지도도 아니오 그 누구의 선동도 아니다 견디다 못하야 삼천만 겨레가한결가치 가슴 깁히 사모처있든『독립』이란 2자를 실천하고저 폭발된 삼천만 민중의 진리였든 것이다
그때 우리 33인은 각계를 대표하는 사람이였는데 각자의 편의와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야 완전히 합심하얏다 이 합심으로 말미암아 만세고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순간까지 왜정은 몰랏으니 우리의『단결』이 그 얼마나 굿세였으며 기밀누설에 주의하얏든가 알 수 있지 않는가 오늘날 우리가 건국이란 성서스런 대사업을 추진하매 나는『민족단결』이란 4자를 놉히 주장하야 마지 않는 바이다◇권동진 씨 담
어언간 30년이 갓가우나 얼마 전의 일과 같이 늙은 이 사람의 기회(記懷)도 생생히 불타오르며 해방된 삼천리강산을 보매 우리 33인이 이르킨 독립선언 삼일운동의 목적한 바가 그다지 허무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 생존한 삼일동지가 모였을 때마다 어떠케 우리와 태도를 결정할 것인가를 열의하지 아니할 수 업슬만큼 바야흐로 정국은 혼돈 착종 한가운데 우리 삼천만 민중이 염원하는 완전독립국가완성을 위하야 늙은 이 사람이 다할 직책은 무엇인가 스시로 문책할 수 밧게 없다 회고컨대 왜적의 총검 압헤 굴복치 않한 우리 민족의 정의감은 오늘날 이 땅에 서기를 빗친 것이니 이러한 민족적 용맹심으로서 건국로선에 매진한다면 반다시 서광이 빗칠 것을 자신하는 바이다. - 김도태, 삼일운동의 사적의의, 동아일보 1946년 2월 28일자 1면.
일、서언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3월 1일에 일어난 사건인 까닭으로 삼일운동이라 칭하나니 과거 40년동안 우리 민족은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 미테서 가진 학대 온갓 모욕을 당해 온 것은 더 말할 것도 업거니와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에 대한 반항운동을 계속해 왓다。혹은 개인으로、혹은 단체로 잠행운동 행해 온 것이다。그러나 전 민족적으로 남여로유(男女老幼)를 물론하고 총역량을 기우려 일으킨 운동은 삼일운동이 제일 큰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사천년의 긴 역사를 가젓다고 자랑은 하지만은 이와가치 전 민족이 회심 합력 일치단결하야 일어난 것이 또한 전무후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운동의 방법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만세를 고창하는 소극적 행사에 불과하엿치만는 그 소리는 일본의 조야에는 물론이요 미국대통령 윌손 씨와 파리강화회의의 석상에 안젓든 세계 각국의 대표자의 귀를 울렷고 따라서 세계 각 국민에게 알려젓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일본의 압박을 바들 수없고 따로 독립국가를 건설할 결심이라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생명과 재산의 손해는 막대하엿다 일이 실패에 돌아가매 이 사건을 니르킨 사람으로서는 공연한 일을 이르켜 희생자를 만히 내엿고나 하는 후회와 그들의 령(靈)에 대하야 더욱 미안한 생각이 각금 일어낫다
그 후 26회나 3월 1일을 마지하엿스나 사방에 감시하는 눈이 만하 감히 말한되 못하고 묵묵히 이날을 보냇었다 인제 해방 후 첫번 이날을 맛게 됨애 더욱 감개무량하다할 뿐이며 따라서 그때 일의 대략을 적어보려 한다이、삼일운동 전의 정세
우리 민족은 서에 중국의 한족、서북의 몽고、만주족과 이웃하고 동에 일본 민족과 이웃하였음으로 항상 그들의 세력 소장(消長)에 영향을 바다 어떤 때에는 한족에게 어떤 때는 몽고、만주、일본족에게 부댓겨 왓다 그러나 그런 옛일을 여기에서 추고(追考)하려고 히지 안치마는 다만 우리의 4000년 력사는 다른 민족과 싸우고 반항하여 온 것이다 인제 최근세의 일만 간단히 조사하건대、서력 1905년에 일로(日露)전쟁이 끗나고 미국의 포츠마우드(PORSTMOUTH)에 강화회의가 열니었다 회의에는 미국대통령 루스별트 씨가 의장이 되어 일로(日露) 량대표를 모아 조약을 정한 것이다 그 조약 기운데는『한국의 종주권을 일본에 허여한다』는 것이 결정되였다 우리가 과거 40년 동안이나 일본의 제국주의 미테서 곤난을 당한 것이 이 조약에 의하야 된 것이다、다시 말하면 미로(美露) 량국이 우리를 암흑의 굴로 집어 너흔 것이다
일본은 일로(日露)전쟁에 배상은 밧지 못하였스나 한국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부여됨애 침략적 야욕이 불일 듯하야 그 조약이 성립된 지 맷칠 아니되어 이등박문이 경성에 와서 한국의 당국자들과 5조약을 체결하야 한국의 독립권을 박탈하야 일본의 보호국을 맨들고 이등이 통감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게 되였다
우리 민족의 분노와 반항은 이때부터 시작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 씨의 인퇴(引退)와 민영환、박성환 량씨의 자결은 소극적 반항이었고 최익현、민긍호 량씨의 의병거기는 적극적 반항었다 그 중에도 세계의 이목을 놀내게 한 것은 해아(海牙) 평화회의에 깃든 리준 씨의 자?이며 영국 공사로 갓든 이한응 씨의 자결 등의 소극적임과 옥콜랜드 역두에서 전명운 씨의 스티분손 사격사건과 합이빈 역전에서 안중근 씨의 이등박문 저격사건은 적극적 활동이었다 (게속) - 김도태, 삼일운동의 사적 의의, 동아일보 1946년 3월 5일자 1면.
각계지도자가 일체 (중)
동경유학생중심으로 모사
그 외에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의 배일고취 안창호、리승훈、리동휘 제씨의 애국사상교육은 청년에게 상당한 뿌리를 심어노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국운은 점점 기우러저 거금 37년전 8월 29일에 드듸여 일한 합병조약이 성립되고야 말었다
이에 지명의 애국지사들은 국내에서 일인의 압박 견달 수 없어 혹은 미주로、혹은 노령으로 만주로 상해로 유랑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그러고 일본인의 세력은 더욱 증대되어 정치상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더욱 발전하고본즉 우리 민족의 생활은 더욱 궁핍함에 이르럿다。삼 삼일 운동의 발기
서력 1914년 6월 28일 사라이에보라는 적은 도시에서 오쓰트리아 황태자 퍼되낸드 전하 부부가 셀르비아 청년에게 저격되어 훙사(薨死)한지 만 1개월 안에 구라파 천지에는 큰 전쟁이 버러젓다 이것이 구주대전 혹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전쟁이 5년이나 계속하는 동안에 로서아에 내란이 일어나 제정이 몰락되고 뒤이어 깨렌스키 정권이 좃겨나고 공산주의 국가가 출현되였다
독일에는 식량난이 극도에 달하야 도저히 전쟁를 계속할 수 없게됨에 역시 내란이 발생하야수습할 수 업게 되어 미국대통령 윌손 씨의 제안으로 위선 휴전조약이 성립되였다(1918년 11월 11일)
이때 윌손 씨의 장래 평화회의 개최에 의하야 14개 조문를 발표하엿는데 그 중에 민족자결이라는 조문이 끼여 있다 그것은 장래 세계의 영구 평화를 유지하려면 합할 수도 있고 서로의사가 맛지 않으면 분리 독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세태는 강한 민족이 약소민족을 강제로 통일해가는 형편이니 그 약소민족이 항상 반항운동을 일으키면 언제든지 세계의 영구 평화는 희망할 수 없을 터인즉 이 세계를 개조할 평화회의에서 당연히 약소민족의 자결을 결정할 것이라는 의미였다이 조문이 신문에 발표되자 우리 동포된 자 누구나 관심치 않은 이 한사람도 없었을 것이나 그러나 어떠케하면 이 조문에 □하 우리의 행동을 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는 망연히 대답할 줄을 □낫다
이때 일본 동경에 유학하는 학생이 약 4000명 그들 중에서 그 전부터 학우회를 조직하야 유학생의 친선을 도모하는 한편 학지광이라는 잡지도 발행하엿다。그 학우회의 결의로 우리는 일본민족과 합해 살 수는 없으니 분리 독립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행복이요 장래 세계평화의 근원이 되리라는 뜻을 세계에 선포하야 장래 평화회의의 채택을 밧기로 정하엿다 그 뜻을 본국의 부로에게 알니는 동시에 응원을 구하기로 하야 당시 조도전 대학 고등사범부에 재학 중인 송계백 씨에게 일임하엿다 그해 12월에 송씨는 동경서 작성한 선언서를 모자 속에 너허 가지고 서울에 들어와 자기의 동창이요 선배인 현상윤 씨를 차짓다 씨는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원이엿다 그리고 동경 학우회 간부이엿든 정로식 씨를 차젓다 현 씨는 자기가 봉직하고 있든 중앙학교장 송진우 씨에게 이 뜻을 전한 즉 모다 쌍수 들어 찬성하고 서울서도 명망이 노즌 이를 차저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야 박영효 씨에게 청한 즉 선언서에 포츠마우드 조약을 부인할 것이라는 의견을 진술할 뿐이요 자기는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이엿다 그 외 몃삼담에게도 모다 거절을 당하고 말었다
이에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장이든 최린 씨에게 이 뜻을 전한 죽 최씨 역시 대찬이었다 최씨는 자기가 승신하는 천도교주 손병희 씨에게 상달하였다 손 씨는 당초에 내가 오늘날까지은인자중한 것은 이러한 기회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어찌 생명을 앗길 것이냐 빨리 모든 계획을 세워 거행키로 하되 비용은 우리 천도교에서 충당할 터이니 시각을 지체치 말라는 명령이 나렷다。 - 김도태, 삼일운동의 사적 의의, 동아일보 1946년 3월 15일자 1면.
피로써 결실된 독립 (하)
씨는 27년 전에 뿌려젓다
선언서는 6만매를 보성사(천도교회에서 경영하든 인쇄소)에서 백여 가지고 3월 1일 가튼 시각에 대구、평양、사리원、선천、함흥 등지에서 낭독케 하기 위하야 각 학교 남녀 학생대에탁송키로 하였다、그때 학생대표로 연전의 김원벽 보전의 강기덕 량씨였다、그들의 지도로녀학생들을 안잠자기로 가장하고 바구니 속에 선언서 멧 장식 너어 가지고 각 지방에 무난히 그 전날까지 배부된 것이다
처음 계획은 3월 1일에 파고다공원에 학생도 전부 모이게 하고 그곳서 선언서를 랑독하고만세를 고창키로 한 것인데 그러면 도리여 다수의 희생자가 날듯하다하야 급히 방침을 변갱였다
마침내 3월 1일은 오고야 말었고 예상과 가치 각 지방서 사람도 만히 왓다 길가에는 치여설 수가 없도록 사람이 몰녀둘었다
오후 1시가 되자 각 학교 학생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였고 33인(그 중 현순、김병조、유여대 씨는 미참)은 태화관(현재 종로보안서)이라는 료리집에 모여 김완규 씨의 선언서 랑독과 한용운 씨 선창으로 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고 일변(一邊)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우리가 이곳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고 통고하였다 경무총감부에서는 곳 자동차를 달녀와 여러 사람을 태워 가지고 가게 되였는데 도중에서 파고다 공원압을 지나게 되였다 그 일행을 본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만세를 고창하였다 공원에 모였든 군중들도 여기에 가담하야 종로로 나와 만세를 불으며 서쪽으로 몰려가다가 광화문통에서 대한문 압흐로 태평통오로 진고개로 황금정으로 나오나 해는 임이 저물고 목이 쉬고 기운이 진하야 그만 흣허지고 말었다
이것은 서울서 이러난 일의 대개이나 그날 대구 사리원 평양 함흥、선천 등지 외에는 모다 그 다음에 날마다 고을마다 장거리마다 꼭가튼 방법로 운동을 이르켯다 운동이 발기되는 각 지방에 일본인이 강압을 가한 손해는 막대하였다 위선 수원 엇던 곳에서는 만세를 불으자 일본 군인이 와서 자기네가 할 말이 있으니 기독교 례배당에 모이라 함애 그 동리의 남녀로약(男女老弱)이 모여들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고 뛰여나오는 사람은 총으로 쏘아 한사람도 살어난 사람이 없었다. 그다음 수원의 삼귀 황해도의 수안 평남의 강서 평북 정주 등지의 참상이 제일 심하였다 삼、33인 관계자총합 48인의 처단。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외에 그 사건에 관계된 사람도 모다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야 일본재판소의 처단을 밧게 되였다 처음에는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영도웅장이라는 자가 사건을 담임하야 사건의 자초지종을 조사하였는데 그 기록이 원고지로 14만매에 달하는 대기록이었다사、결론
윌손 씨의 리상논은 실현이 못되고 민족자결주의는 □주의 전쟁터가 되었든 곳에한해서 실시하기로 되야 우리의 운동은 그만 실패에 돌아가고 만 것이다 우리민족의 반항운동과 독립운동이 여러번 좌절을 당하엿으나 그럴 때마다 세계 사람의 머리 속에 우리의 부르지짐은 살어지지 안있다 더구나 삼일운동은 윌슨 씨의 주창한 바에 의하였든 것이니만치 또한 우리 민족전체의 애원이엇든 것인만치 그들의 일부에서도 미안하게 생각하였든 것이다 그 길로 우리 민족이 대표회의를 열어 림시정부를 상해에 세웟고 그 정부의 이름으로 금번 제2차 세계대전에도 일본에 대해서 전쟁을 선언하였든 것이다
아직 그들의 머리 속에 우리의 소리가 남어 있고、그 소리의 계속으로 연합군과 가치 싸운 결과로 카이로、포스담 량 회담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이 약속된 것이다、다시 말하면 삼일운동에 뿌린 씨를 인제 그 열매를 거두게 되는 세임다、
이와가치 피로 돌드린 운동의 힘으로 약속된 우리의 독립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골육상쟁만하고 있는 것을 과연 한심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우리는 주의 사상 여하를 불구하고 독립국가로서 어느 나라의 령토나 련방의 한아도 불허 할 것이다(끗) - 김도태(金道泰), 삼일운동의 민족적 의의, 동아일보 1947년 3월 1일자 1면.
1、서언(緖言)
삼일운동은 우리나라、우리민족의 역사상에 전에 없든 거족적 운동이다、 노동자나、신사나 어른이나 어린 사람이나 남자나、여자나 애국자나、매국노나、친일파나、부자나、가난한 사람이나 귀족이나 평민이나 중이나 예수쟁이、천주학쟁이、동학쟁이 할 것 없이 우리민족의 피를 받은 사람 치고는 이 운동에 참가하지안흔 이가 없었다、이것은 순연(純然)히 우리 민족도 살어야하겟다는 단일한 사상에서 나온 것이니 사람이 사는 것도 본능이요、자기민족을 살리려는 것도 본능인즉 우리 조선을 살리려 하는 것은 우리 조선사람의 본능이다、이 본능이 발동하는 자리에 막고 반대할 사람이 어듸있으랴、5조약이라는 보호조약을 맺을 때에 김윤식이가 불가불가즉불가부(不可不可卽不可不)、가(可)라고 쓰든 사람으로서도 이때에는 일본조야(日本朝野)에 글을 보내 우리 민족이 따로 떨어져야하겟다는 이유를 설명하였고 전한(前韓) 의친왕(義親王)으로 일본의 공작을 받은 이강도 상해로 도망하야 상해임시정부에 참가하려다가 중도에서 붓잡혀왓고、경관으로 이름을 날리든 황옥이도 이 운동에 맹렬히 활약한 것은 모다 민족적 본능에서 울어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이고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의 세 종교단체가 주로 이운동을 이르켯다는 것은 그들이 평상에 품었든 종교적 사상만으로 무슨 일에든지 일치될만한 아무러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기독교는 양(洋)고자들이 믿는것을 믿는다고 조롱을 하고 천도교는 위종교니 협잡군들만 모인 곳이니하고 비웃든 불교도、불교는 출세간적、독선적이라 숭보든 그들이 이러케 합심이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민족을 살리려는 본능의 발동에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참고 서로 용납하게 된 것이니 이 본능의 힘이야말로 위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2、민족운동의 유래
여기에는 보통 일반의 민족운동의 유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조선민족운동을 발휘케한 유래를 간단히 말하려한다
우리 민족은 서쪽에 수만흔 한족이 살고 동쪽에흘 우리보다 강한 일본족이 살기 때문에 서쪽 한족의 세력이 강하게되면 그에게 굴복하게되고 동의 왜족이 강하게되면 그곳에도 머리를 숙이지 안흘 수 없는 운명을 가지게 된 것이니 그것은 우리 민족의 수가 적고 또는 국토도 좁기때문에 중과부적이 되야 수천년을 두고 지나오는 동안에 파란곡절이 만헛든 것이다 다른 민족에게 모욕을 당하고 강압을 당할 때마다 이를 악물고 참어가면서도 언제나 이 경우를 버서나 우리도 남과 같이 자유로운 생활을하여 볼가하는 결심을 가지게 되었든 것이다 고려때에 몽고사람에게 학대를 받게되였으나 민족적 정신은 오히려 왕성하였든 것이다
예를들면 몽고병이 침입할 때에는 사람을 죽이며 물건을 빼앗으며 부녀자을 납치하는 등 가진 악행을 하게되므로 그를 피하기 위하야 배를 준비하였다가 그들이 오면 가족을 실고 해도(海島)중으로 피해가게 되였나니 몽고사람들은 대륙에서만 사는 까닭에 물에 대한 지식이 없어 치여다보기만하다가 갈 뿐이었다 그래서 고려 고종때에 수도를 강화에 39년동안이나 옴겼는 것이다 그때 서북양도에 있는 지방관들이 몽고에 귀순하야 그곧이 90여년 동안이나 몽고의 직할 영토로 될뿐더러 기철이와 같은 자는 그누이가 원나라 황후로 되여 그 세력으로 본국의 왕실을 우습게 보며 인민을 즘승처럼 녁이게 되므로 국민의 원망이 비할 데 없었든 것이나 공민왕이 역시 민족적 본능으로 그를 참아볼 수 없어 기철을 숙이고 영토를 도로 차즌 것이다 그 후 일제에게 8년동안이나 시달려 인□이 끈어지게 되였으나 이순신、권률、곽재우 같은 의인들의 민족을 살리려는 열성으로 다시 회복을 시켯든 것이며、그 다음 청의 태종이 십만□으로 침입하야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산을 에워싸고 삼전도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을 맺은 후 300년 동안이나 가진 압박을 하여왓으나 민족적 정신은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우(右)에 말한 것은 옛날 우리 동양에서 이웃나라의 왕실과 종속관계를 맺어가지고 자기다라의 평이와 명예를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대개 강대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연합식히든 한 방법이었으며 그것을 행할 때에 혹 물자도 빼았고 부녀자도 납치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 일본이 우리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서양문화를 수입하게 되쟈 당시 서양사람들이 쓰든 제국주의사상을 그대로 가져오게 되였는데 경제적으로 자작자급하기 위하야 위선 영토를 담장해야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면 무력이 필요하므로 군대를 양성해야 할 것이니 전국민에게 군국주의 정신적 교육을 강행하였다。그 힘으로 위선 일청(日淸)、일로(日露) 량전兩戰)에 승리를 얻고 그 여력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빼았고 경제적으로 착취를 감행하야 우리 민족은 눈뜬 장님이요 입있는 벙어리가 되야 모든 생활자본을 일허버린 거지가 되고 말었다。(계속) - 김도태, 삼일운동의 민족적 의의(하), 동아일보 1947년 3월 2일자 1면.
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엇더케 하면 다시 살어날 도리가 있을가하는 것을 의식하게 되였나니 이것이 즉 민족적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 의식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은 대개 외국에 가서 세계의 대세를 살피고 제국주의라는 것을 리해한 이들이었다。한말에 큰집이 장차 무너지려고 할 때에 혹은 신문으로 혹은 교육으로 일본의 야심을 경고하고 한편으로 우리 민족도 정신을 차리고 용감하게 싸워나가자는 민족적 의식을 고취하였다、당시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이 있었는데 장지연、박은식、량기탁、신채호 등이 그 방면에 중진이었고、교육계로는 서울의 배재학당、보성중학、평양에 대성학교、정주에 오산학교 등이 설립되였는데 안창호、리승훈、리동휘 등이 교단에서 학회에서 민족의식을 열렬히 주장하였든 것이다、그러나 한국의 운명은 그만 종막을 짓고 말었다、그때에는 들어내서 우지는 못하고 잠행적으로 지하운동으로 방향을 변하게 되였다。
동경은 일본의 수도라 하지마는 우리 국내보다 그곳은 도리여 연구의 자유、언론、집회의 자유가 있었다、그곳 각 학교에 유학하는 이가 차츰 들어 사오천에 달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거장이 만헛다、학생들을 통일 식히는 학우회라는 것이 있고、그 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지광이라는 월간 잡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신익희、정로식、김상덕、장덕수、현상윤 최승만、백남훈、리태영 등 쟁쟁한 명사가 만헛든 것이다3、민족의식의 폭발
1918년 즉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 격렬해 갈 때 2월에 러시아 혁명이 이러나 꼐렌스키 정부가 성립되고 전쟁의 목적을 천명하라는 레닌 일파의 요구에 대하야 미국대통령 윌손 씨가 독일의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함이라 하야 세계의 이목을 놀내게 하였다 그러쟈 11월에 들어가 레닌 일파가 로병회의 세력으로 꼐렌스키 정권을 타도하고 공산정부를 수립하고 이여 독일에도 혁명이 이러나 카이젤 황제가 외국으로 망명을 가게 되였다 이때 뉴쓰를 볼 때마다 우리 약소민족은 중추신경이 흔들리게 되였다 감격과 흥분에 뛰는 심장을 억누를 수가 없게 되였다 11월 11일에 련합군 대 독일 측의 휴전조약이 성립되고 미국대통령 윌손의 장래 강화회의의 예비원칙으로 14개 조건을 발표하는 중에 민족자결이라는 조목이 끼여 있었다 이것을 읽쟈 우리도 일본의 심한 압박에 견딀 수가 없다 장래 세계평화를 보게 하려면 이 불공평한 현상을 타개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평화적 수단으로 세계에 우리 민족이 오늘날 당하고 있는 불합리를 성명하야 우리의 자주독립을 획득할 것이라는 의견이 일치하게 되였다
그래서 동경에서 2월 7일 서울에서 3월 1일에 선언을 발표하고 만세를 고창하자 전국 방방곡곡마다 이 운동을 니르켜 막대한 생명과 재산을 발성한 것이다 10년 동안이나 싸히고 싸혀뜬 울분한 기운이 일시에 폭발된 것이다
이것을 총괄해보면 언론계에서、교육기관에서 학생층으로서 잠행적으로 끈임없이 노력해오든 결집력으로 총과 칼、대포의 위력에도 불굴하고 불으지진 절대한 힘 즉 민족의식이라는 것이다 - 현상윤(玄相允), 3·1운동의 의의, 동아일보 1948년 2월 29일자 2면.
우리가 삼일운동에서 이즐 수 없는 기억과 감격한 느낌을 가지는 것은 당시 우리 민족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한마음 한뜻으로 일치단결하였던 일이다 지금 인도같은 나라에서는 종교가 다른 이유로하여 같은 민족이 나라를 달리하여 서로 다투고 서로 싸호지마는 삼일운동 당시의 우리들은 세계가 다아는것과 같이 교리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천도교、기독교、불교의 도교들이 중심이 되어가지고 운동을 일으켯스니、그때의 우리국민이 얼마나 조국의 광복에 정성스러웟던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의 조선민족은 안중에 오직 조국의 독립이 있고 종교나 사상은 제2의적이었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그들이 종교적 감정과 어떤 전통의 풍아니나 사상을 망각하였던 것은 않으다 이것은 오직□□의 회□을 위하여는 모든것을 희생하고 참어 대동을 취하고 소□ 것이다 즉 각지에서 행하여진 모의와 계화 이 한가지도 관헌의게 비밀이 탄로되지 아니한 것이다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 국권회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전 민족이 남녀노소와 직업의 여하를 막론하고 종교와 사상과 직업을 초월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일치단결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서로돕고 서로 격려하면서 화기애애하게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까닭으로하여 수삭 혹 반년에 긍하여 내외 독립선언서를 발포하기 수일 전의 일만을 가지고 볼지라도、인쇄한 선언서를 수천장 혹 수백장식 국내 각지로 분송하고、서울에는 시내의 전문이나 중등 이상의 남여 각학교 대표자 수천명을 불러놓고 수십장식의 선언서를 분급하고 3월1일에 행할 시위운동에 관한 로순(路順)과 부서를 작정하며、또 당해 대표자들을 각기 자기 학교에 돌아가 각반 대표들의게 동일한 지시를 행하였스니、그 얼마나 계획이 소루하며 개방적이었던가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도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 무사하게 경과히였다。 이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당시의 동포가 얼마나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정성스러웻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소위 해방이 되었다고하는 금일에 독립의 서광을 보는 오늘에 대업 완성의 일보전인 오늘에 민족은 분열이 되고 사상의 혼란이 극도에 달하여 서로 구□같이 보고있으니 이것이 실로 통□할일이 아니냐 만일 그때와같이 국민이 단결였으면 독립은 벌써 완성이 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오늘 삼일절을 당하여 당시의 운동에 표현된 정신을 다시 발휘하여 조국의 독립 완성을 위하여 전민족이 한마음 한뜻으로 정성스럽게 일치단결하지 아니하면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또한가지 생각할 것은 삼일운동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삼일운동을 외면으로보아 실패에 돌아가고 말은 것같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아니하다 왜 그러냐하면 당시에 있어서 비특 독립의 실현은 보지못하였어도 그 효과에 있어서는 1910년의 소위 합병을 힘있게 부인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향하여 강경하게 주장하는 국민의 의사표시가 되었던 까닭이다 만일 이때에 우리들에게 이 운동이 없었더면 비록 금번에 일본의 패전이 있다할지라도 카이로선언이나 포쓰담회의에서 조선독립이 결코 용이하게 약속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을 사다리의 최종계단이라하면 이 1919년 3월 1일의 운동은 확실히 그 제1계단이 되는것이니 8·15해방을 한 결과라고 보면 이 삼일운동은 그 원인이 되지않을 수 없다 - 왕년의 투사들 회고담,사모친 독립의 비원, 죽엄으로 정의의 항거, 기억도 생생 31년전 장거(壯擧), 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3면.
경술국치이래 사십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해내 해외를 통하여 연면부절히 게속되어 금일의 독립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독립운동중에서도 가장 거족적이며 조직적으로 된 것이 즉 기미(己未)독립운동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과거의 피어린 독립운동자를 도리켜볼 때에 우리의 가슴에는 새삼스러운 조국애의 불길이 타오르는 동시에 과거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린 순국선렬과 생존해 계신 독립운동 제선배들에게 감사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기미독립선언을 천하에 선포한지도 벌서 삼십일년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이라는 취후의 성과를 걷운 우리로서 이세 그 삼십주년 기념일을 맞이함에 있어 본사에서는 기미운동 당시 일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국권의 광복과 민족의 갱생만을위하여 운동의 선봉이 되어 활약하다가 왜경(倭瓊)의 손에 붓잡혀 가즌 악형을 당한 후 석방되어 금일까지 생존하여 계시면서 지끔도 국기를 위하여 분투노력하시는 여러분을 찾아 지상좌담회를 개최하여 그 계획의 전모라든가 통쾌한 이야기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 일화 등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바이다
현상윤 씨
기미운동의 직접 도화선이 된 것은 물론『윌손』이 주창한 14개조의 강화조항 그중의 민족자결의 원측이지요 이소식을 들고 우리 국내 국외에서는 독립운동의 숙덕공톤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 숙덕공론에다가 불을그어댄 것은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문이었읍니다 그때 나와 송진우 씨는 먼저 최린 씨와 의론하고 최남선 씨를 끌어넣으려 하였읍니다 최남선 씨는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동경유학생중의 한 분 송계백 씨가 모자속에 감추어 가지고 나온 독립선언서(이것은 삼팔비단에다가 정성것 써서 만든 것으로 한번보면 마음을 움지길 수 있도록 잘 만들었었읍니다)를 보고 마음을 결정하고 우리 국내의 독립선언은 자기가 짓겟다고 하였읍니다 그리고 이것을보고 손병희씨 등 천도교의 장로들도 마음을 작정하였읍니다리명용 씨
나는 그 당시 서울서 계획이 진행중인 것은 모르고 노회(老會)에 참가하느라고 선천(宣川)을 갔다가 거기서 리승훈 양전백 씨등과같이 상해(上海)서 나왔다는 시천려(時千濾)씨를 맛났었는데 그 시천 씨의 말을 뭇고 마음을 작정하였었읍니다。그때 우리가 서로 얘기하기는 이승훈 양전백 양씨와 나와는 다같이 백오인 사건에 관계되어 한차례씩 죽었다 살아나온 목슴이므로 우리는 그때 죽었든셈 잡고 다시 나라 위해서 일하자고 맹서하고 즉시 리승훈 씨를 서울로 올려 보냇었읍니다。함태영 씨
그때 나는 서울에 있기는 하였으나 처음에는 그런 게획이 있는 줄도 모르고있었는데 해외에서들어온 서병호、려운홍 씨등을 맛나 국제정세를 뭇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었읍니다。현상윤 씨
처음에는 나와 송진우 씨와 최린 씨가 의론하여 위선 제일차로 박영효 리상재、윤치호 씨 등 삼 씨에게 교섭을 해보았읍니다만은 그 세분이 다 거절하였으므로 제이차로 한규설、윤용구 씨에게 교섭해 보았읍니다
그러나 또 역시 거절당하였으므로 나와 송진우 씨는 다시 의론하여 과거의 혁명사가 있는 천도교를 움지겨 보기로하고 최린 씨를 통하여 손병희、오세창、권동진 씨 등을 움지기기로 하였읍니다。 그러나 이분들 역시 일이 너무나중대하고 또는 일이 벌어진 담에는 천도교 전체의 존페문제가 될 염려가 있으므로 용이히 응낙하지를 않았읍니다。 이러는 사이에 리승훈씨가 상경하여 함태영 씨 댁에서 리갑성、박희도、오하영 오기선、함태영、현순、안세환、김세환、오상근등 기독교 대표를 모아놓고 의론한 결과 기독교 단독으로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이 뜻을 최남선씨에게 말하니 최남선 씨가 말하기를 이 일은 천도교에서도 추진중이니 합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기독교측 대표로 리승훈 씨와 함태영 씨가 최린 씨와 맛나서 합작하기로 결정하였든 것입니다。그 후 다시 불교대표 2명을 참가시키기로하여 결국 33인이 된 것입니다김도태 씨
제일 처음에는 리승훈 씨의 관서(關西)방면 공작비로 김성수가 이천원인지 삼천원인지를 내놓았읍니다。현상윤 씨
그 다음에는 동경에서 온 송계백 씨가 운동비와 독립선언 인쇄용 활자를 요구함으로 활자는 내가 주선하여 주고 운동비로는 정로식 씨가 삼천원을 주선하여 주어보냇읍니다 그 후에 정 씨에게 들으니까 땅을 팔아서 해주었다고하드군요김도태 씨
그리고 본 운동의 경비는 전부를 천도교에서 부담하였읍니다 본래 일 시작하기 전에 천도교에서 운동총경비로 이백만원을 내놓기로 작정하였었읍니다리명용 씨
우리가 출옥한 후에도 손병희 씨는 우리들의 사정을 보아 매인당 오십원 씩을 주어서 당장의 곤난을 면하게 하였읍니다함태영 씨
제일 처음에 리승훈 씨를 서울로 뫼서 을라오게 하는 연락책임은 김도태 씨가 맡아 오산까지 갔었는데 맛나지 못하였으므로 학교경영문제로 최남선 씨가 맛나기를 원하니 곧 상경하라고 전하여 즉시 상경하게 하였읍니다김도태 씨
삼、일 거사전에 여학생들이 독립선언서(인쇄물)를 각지에 배부하든 이야기를 좀 해드릴까요 그때 이화(梨花) 배화(培花) 정신(貞信)등 여학교학생들이 모다 안잠자기(가정부-인용자 주) 모양으로 변장을하고 콩나물바구니 밑에다가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가지고 평양、대구、함흥 등 각지 세포기관에 전달하여 일시에 궐기하도록 하였읍니다。그때는 종교、종파도 없고 남녀、노소도 없고 사상도 없고 귀천도 없는 완전한 거국일치의 운동이었읍니다。현상윤 씨
그리고 민족대표로 서명날인을 받기 위하여서는 리갑성、김세환、김필수、조형균 씨 등이 각도로 파견되었섰으며 안세환、림규 양씨는 독립선언서를 일본의회와 정부에 전달할 책임을 지고 일본까지 건너갔다가 선언서는 우편으로 부치고 잡혀서 돌아왔으며 한편 현순 씨는 상해로 건너가 있다가 선언서를 가지고 미국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하고 이월 이십삼 일에 떠났으며 김지환 씨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안동현까지 가서 상해에 가 있는 현순 씨에게 부치기로 하고 떠났다가 안동현 가서 중국우편으로 선언서를 부친 후 일경에게 붓잡혀 왔었읍니다。함태영 씨
그때에는 피차간에 얼마나 비밀을 지켜왓었는지 33인 중에 든 분들이 서로 알지를 못하고 있다가 거사전일인 2월 28일 저녁에 손병희씨 댁에서 모여서 비로서 서로 인사교환을 하였었으니깐요리명용 씨
그리고 그외의 일반 비밀연락은 대부분 천도교에서 맡아서 천도교부인들이『리레-』식으로 연락을 취하였으며 기독교 부인들과 여학생들도 많이 비밀연락으로 활동하였읍니다 그런데 특히 그때 일을 생각하여 신기하게 생각하는것은 전국 각 전문、중학교까지는 전부 세포조직이 되어 있었으며 또 각 학교내에서는 각반까지 조직이 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그러케 비밀이 보지되었는지 모르겟읍니다김도태 씨
글세요 지끔 생각하면 기미운동이라는 것이 완전한 모험이요 월상 부르지도 아니한 일이었읍니다 이런 전국적이고도 거족적 대과업이 끝까지 비밀이 누설되지 않고 완수되었다는 것은 우리민족이 얼마나 애국정신에 불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재료도 되는 것입니다현상윤 씨
내가 아슬아슬한 이 얘기를 하나 하지요 독립선언문과 기타 문안작성을 최남선 씨에게 일임한 우리들은 조바심이 나서 자꾸 최씨의 집을 찾아단겻습니다
그런데 최 씨가 그 선언문을 작성하는 것은 자기집에서 하지를 않고 지금 오장동(전총음정)근처에 있는 소택(小澤)이라는 일녀(日女)의 집에 가서 짓고 있었읍니다 그 소택이라는 일녀와 최남선 씨와는 당시 특별한 관계가 있든 것같읍니다 그래 우리가 가끔 그 집으로 최 씨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아루는 최씨를 찾아 선언문이 어떻게 되었나 좀 알아보러 갔드니 최씨는 없다고 하기에 그대로 돌아오려 하였읍니다 그랫드니 그 일녀가 하는 말이 현 선생계서 무엇 때문에 여기를 왔는지 나는 잘안다고 합니다。그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알기는 무얼 아느냐고하며 그져 최씨를 좀 맛나보러 왔다고하니까、그 일녀는 점점 웃으면서 선생은 무엇을 보러 오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면서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와서 보고 가라고 합니다 그래 나는 비밀이 탄로나 나지 아니하였나하는 의심이 나서 자꾸 시침이를 떼었읍니다 그래도 그 일녀는 자꾸 들어오라고 하기에 방에를 들어가니 그 일녀는 자기옷깃에서 독립건언문을 꺼내 보여주었읍니다 나는 순간에 얼골이 파랗게 질렸었읍니다 그래 떨리는 마음으로 그 선언문을 읽고 있노라니까 또 자기자식(본남편 일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그때는 벌서 나이 21세이면 중학교까지 졸업한 자)을 불르드니 그 옷깃에서는 일본정부에 보내는 글을 꺼내 보여주었읍니다
그 후 최 씨에게 따져 보았드니 자기집이나 조선사람에게 마껴두는 것보다는 일인에게 마껴두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 그랫다고 하드군요 말을 뭇고보니 그털 듯하기는 하였으나 외나무다리 건너가는 것보다도 아슬아슬하였읍니다 이런 것이 다 비밀이 탄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미운동은 참말 천우신조한 것이라고 봅니다함태영 씨
우리가 모두 잡힌 뒤에 하마트면 내란죄로 몰려서 속절없이 죽었거나 장기간 징역을 살었거나 할번 하였지요、그것은 그때 우리 사건을 맡은 예심관사가 영도라는 놈이었는데 이 놈이 우리들을 모두 수안(遂安)사건에다 연결시켜 내란죄로 돌려고 하였든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의회에서까지 말성이되고 하여 결국 보안법위반과 인쇄물취체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최고 3년 최하 1년의 징역밖에 안하였읍니다 그리고그 방조자는 무죄라하여 김도태 현상윤 송진우 림규 안세환 김지환등 10 여인은 무죄 판결을 받었읍니다리명용 씨
그러나 그 무죄판결은 모다 20개월씩이나 징역사리 한 후의 무죄관결이었읍니다현상윤 씨
나는 처음부터 관계는 하였으나 송진우、함태영、김도태、최남선、안세환、임규、김지환、정로식、김세환 씨등과 같이 제2진으로 남아있다가 제2차 운동을 한 후에 잡혀가기로 되었않으므로 1일에는 선포식에 참예하지않고 뒷산에 올라가 구경을 하였읍니다 오정이 지나드니 탐끌공원에서부터 산세성이 일어나는데 순식간에 장안은 뒤집어놓은 것 같이 만세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시내는 전체가 문자그대로 홍진만장이 되었었읍니다 그리고 거리를 단겨보니 시가는 전부 철시(徹市)를 하였고 가가호호에서는 납세거절을 부르짖었으며 각 가정에서는 관공리들이 사표(辭表)를 시느라고 바뻣스며 학교、급장에서는 앞을 다루어『스트라의』을 일으켯습니다 때마침 인산(국장)구경을 하려고 올라온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으므로 그 군중이 호음하여 만세를 부르며 파도와 같은 행진을 하는데는 일경들도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서서 구경만을 할 따름이었읍니다 그리다가 오후 5시쯤 되어서부터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는지 잡기 시작을 하였읍니다함태영 씨
그날 평양에서도 안세환 조만식 김동원 정일만 윤원삼 곽권제 도인권 씨 등이 주동이 되어 서울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운동을 일으켯다고 하든군요현상윤 씨
그때 학생층에 대한 침투공작은 주익 씨가 맡아서 하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최초에는 게휙의 내용을 알리지 않고 비밀조직만을 추진시키고 있었는데 나중에 리갑성 박희도 양씨가 강기덕 김원벽 씨등 중요한 몇분에게 게휙을 말하였읍니다。 그리고 양 씨는 청년 학생층의 조직을 위하여 주익 씨를 도아서 활동하였읍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으로 학생대표 3인을 선출하였는데 그것이 즉 보전(普專)대표 최기덕 연전(延專)대표 김원룡 의전(義專)대표 공위건 등이었읍니다함태영 씨
앞의 세본도 33인 중에서는 빠졋다가 3월 5일에 서울역에서 일으킨 제2차 학생운동을 지휘하고 그날로 체포되었읍니다리명용 씨
강기덕 씨는 3월 1일 정오에 학생을 지휘하고 빠고다공원으로 와서 우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우리가 선포장소를 태화전(전 종로경찰서 자리)으로 숢기고 나오지 아니하므로 자기가 선포문을 읽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이로써 기미운동은 발발된 것입니다 그런 후 강 씨는 일시 옴을 세부란스병원에 숨기어 두고 비밀연락을 취하다가 3월 5일 사건에는 김원룡 씨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선두에서 학생들을 지휘하다가 행렬이 채 남대문까지도 오기 전에 일경에게 체포되었읍니다 본래 우리 33인이 의론하기는 1일 오후 2시까지 답골공원으로 모여서 2시 정각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읍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의론되기를 우리가 이번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것이 세상 마지막이 될 것이니 우리 피차 후세를 기약하고 마지막 연회(宴會)나 하고 함께 자수하여 들어가자고하여 그때 명월관지점이었던 태화관으로 모이기로하였읍니다。그래서 그날 33인 중의 29인(길선주 류여대 김병조 정춘수 씨 등은 사정에 의하여 불참)이 태화관에 모여서 거기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한룡운씨의 선창으로 만세를 삼창한 후 연회를 시작하였읍니다。연회를 시작할 때에 □□씨는 경무총감부로 전화를 걸어서 우리들이 다 여기 있으니 잡아가라고 기별해 주었읍니다。얼마후에 무장헌병들은 태화관을 둘러쌋읍니다。그러나 우리는 이미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니 우리가 연회를 끝마치도록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라고하여 한참동안이나 세워두고 처음 겸 마지막으로 독립의 축배를 들었읍니다。그 후에 잡혀가기로 하였는데 다시 최린 씨가 헌병들과 교섭하기를 만일에 우리들이 대로 도보로 대려간다면 흥분된 시민들이 무슨 불상사를 잃으킬른지도 알 수 없으니 일을 원만히 하기 위하여 우리 일동을 자동차로 데려가라고 하였읍니다。그랫드니 그들도 이 뜻을 양해하고 총감부로 전화를 하여 10여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데려갔읍니다。그래 우리가 지끔 필몽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가노라니까 연도의 시민들과 뒤를 따르는 학생들은 목이 터지라고 만세를 불러 주었으며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메인 목소리로 만세를 부르는 학생부인들도 있었읍니다。
김도태 씨
그때 우리 48인과 함께 장덕수씨도 잡혀와 있었는데 그가 잡힐때 이얘기가 재미있읍니다。 장덕수씨는 본래 상해에 있으면서 우리 국내와 일본 등지의 연락책임을 지고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는 일본말이 능난한 것을 기화로 일본이나 조선에서는 목촌구일(木村歐一)이라는 가명을쓰고 일인 행세를 하고 있었읍니다 때마침 장덕수 씨가 운동자금때문에 상해로부터 일본을 걸처 국내로 들어올 때에 부산 부두에 올라서자 마자 불심 검문을 당하였다고합니다 그래서 그는 거침없이 일인행세를 하면서 목촌구일(木村歐一)이라고 박은 명함을 내댓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장에『좃도고이』하드니『너는 대판(大阪)에서 살인강도를 하지 않았느냐』고 하드랍니다。 그래서 천만의 말이라고 부인하며『나는 동경사는 사람인데 대판은 지리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하니 말말라고하면서 대판으로부터 온 수사지령을보이며『아무날 대판 아무데서 아무게(모)를 살해한 후 돈얼마를 가지고 도망하지 않았느냐』고 하드랍니다
그런데 그 살인강도 범인의 이름이 목촌겸일(木村謙一)이어서 일본음(音)으로는 자기의 가명과 비슷하였다고 합니다。그래서 얼토당토않게 살인강도범의 죄명을 쓰게 되니까 할 수 없이『나는 조선사람이라』고 자백하였답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초는 각도가 달라지는 동시에 자기가 상해로부터 일본을걸쳐 국내로 독립운동자금을 주선하려오든 중이라는 것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합니다。그래서 장덕수 씨는 대판에서 그런 놈이 그런 일만 저질르지않았드라면 감쪽같이 국내로 들어와서 사명을 달성할 수 있었든 것이 별한 인연으로 같은 이름을 가진 왜놈이 그런 죄를 저질러 일은 탄로되고 체포까지 당하여 고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현상윤 씨
그때의 언론게라는 것은 별다른 것이 없었고 총독부기관지『매일신보』가 있었을 뿐인데 그 신문에서 어떻게 생각하였든지 각지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비교적 사실대로 보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망외의 도움이 되었읍니다。
그 외에는 얼마 후에 미국 동에서 기자가 특파되어 와서 우리들의 사실을 해외에 소개해 주었었읍니다。 - 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신천지(新天地), 1950년 3월호 46~55쪽.
(전략)… 이같이 만전을 준비한 후 3월 1일이 오자 독립선언서에 서명날인한 민족대표자 33인 중에서 미참된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4씨를 제한 나머지 29씨는 예정대로 태화관에 회합하여 엄숙하게 독립선언서 선포식을 거행하고 한용운 씨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3창 하였다. 그리고 대표자 일동은 각각 식탁에 나아가 축배를 들었다.
일변 탑동공원에서는 예정한 오후 2시가 되자 경성시내의 남녀중등 이상의 각 학교학생 만여명은 각각 지정된 대표자의 명령에 의하여 엄숙한 얼굴과 강의(剛毅)한 태도로 누구나 아무말도 없이 구보(驅步)로 일제히 남북문으로 구름같이 집합하였다. 집합이 끝나자 김원벽 한위건 강기덕 제군은 높이 팔각정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3창한 후에 독립선언서를 산포하였다.
그것이 끝나자 학생들은 각각 예정한 계획과 부서(部署)에 의하여 즉시 시가로 뛰어나가 시위행렬을 하였다. 그리하여 일단(一團)은 대한문(大漢門) 앞에 일단은 경성우편국 앞에 일단은 남대문정거장에 일단은 의주(義州) 가도(街道)를 지나 불국(佛國)영사관 앞에 일단은 창덕궁 앞에 일단은 미국영사관 앞에 일단은 총독부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하고 연창하면서 시위행렬을 거행하니 때마침 고종의 인산을 구경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올라왔던 사람들과 상인 노동자들이 서로 호응하고 첨가되어 만세소리는 전시가가 떠나갈 듯이 요란(擾亂)하였고 행렬 때문에 일어난 홍진(紅塵)은 실로 천장만장(千丈萬丈)이었다.
그러나 이 때 일인헌병과 경관은 너무도 의외요 너무도 대규모며 또 너무도 조직적인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고 일시(一時)는 좌우에서 입만 벌리고 우두커니 서서 있었으니 이것은 대개 인산을 목전에 앞두고 일을 경경(輕輕)히 처리할 수 없다하여 총독부안에서 총독부측과 군사령부측의 연석 긴급회의가 있었고 또 그 회의에서 무슨 결정이 있어서 무슨 명령이 있기까지는 발포나 무슨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지시가 있었던 까닭이라 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우리의 계획은 이 틈을 타서 마음대로 유감(遺憾)없이 두어 시간동안 장안시가(長安市街)를 도(都)차제하고 있어서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날 오후에 손병희 씨 이하 민족대표들은 일본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잔류(殘留)간부와 학생 시민들은 일제히 철시(撤市) 납세거절 관공리(官公吏)의 사직(辭職)과 파업 맹휴(盟休) 등을 주요한 슬로간으로 하여 일본에 대한 비협력 또는 반항운동을 계속하였다.그리고 지방에서는 전국 각처에서 시위행렬과 반항운동이 봉기하여 수월(數月)에 걸쳐 그 저지할 바를 아지 못하였다. 원래 이 운동은 비폭력 비폭동을 표방한 것이나 군중의 격앙과 군대 급(及) 경관과의 충돌로 인하여 유혈의 참극과 다수의 사상을 내게 되니 곧 남양(南陽) 정주 수안(遂安) 성천(成川) 강서(江西) 등의 제사건이 그것이다.
이 때에 상해에는 대한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상해 만주 미주 소령 각지의 애국인사가 국내에 호응하여 혹은 무력으로 혹은 외교로 혹은 선전 급(及) 연락으로 수년에 긍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이 운동에서 특별히 느끼는 것은 남녀노소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종교와 사상과 직업을 초월하여 전 민족이 일심일체가 되어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투쟁한 일이다. 이 까닭으로 수삭(數朔) 혹은 반년에 긍하여 내외 각지에서 행하여진 모의와 계획이 한 가지도 관헌에게 비밀이 탄로(綻露)되지 아니한 것이다. 즉 이것은 동포가 얼마나 조국의 광복(匡復)을 갈망하며 염원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당시에 있어서 비록 독립의 실현은 보지 못하였다할지라도 그 효과에 있어서는 막대한 효과를 거둔 것이니 첫째 1910년의 소위 합병(合倂)을 힘 있게 부인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향하여 강경하게 주장하는 국민의 의사표시가 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운동발발이후에 세계 각국의 통신원들은 상해 북경 일본 등지로부터 속속 내조(來朝)하여 여러 가지 상황을 널리 세계에 보도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당초에 우리가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은 꼭 그때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리라고는 물론 믿지 아니하였었다. 이것은 우리가 당시의 파리강화회의가 우리의 문제까지를 토의하지 아니할 것을 십분 잘 아는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파리회의에 열석한 각국대표에게도 서한을 보내며 우리의 운동을 일으킨 것은 우리가 독립운동에도 계단이 있는 것을 안 때문이었다. 즉 3. 1운동이 당시에 있어서 곧 성공을 하지 못한다할지라도 그 운동이 확실히 조선독립에 대하여 중대한 계단이 되고 토대가 되는 것을 확신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을 ‘사다리’의 최종 계단이라 하면 1919년 3월 1일의 운동은 확실히 그 제1계단이 되는 것이니 8.15의 해방을 결과라면 이 3.1운동은 그 원인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