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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주당의 건의로 미군정이 1945년 10월 도입한 군정장관 고문회의에서 몽양 여운형과 인촌 김성수는 맞닥뜨린다. 미군정은 좌우익의 대표인 여운형과 송진우를 다같이 미군정에 협력하게 하자는 계획이었다.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된 11명중 조만식(정치애국가)과 함께 송진우(정치가) 여운형(정치가)이 나란히 들어가 있다. 1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성수(교육가)를 비롯해 그 ‘나머지’는 전용순(실업가) 김동원(실업가) 이용설(의사) 오영수(은행가) 송진우(정치가) 김용무(변호사) 강병순(변호사) 윤기익(광업가)이었다.

 

  평양에 있는 조만식을 제외하고 10명이 참가한 4일 첫 회의에서 여운형은 “그 ‘나머지’는 서울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평판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2 ‘나머지’ 사람들 중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이 있었다. 조만식의 측근 김동원과 송진우의 측근 강병순이 그들이었다. 이용설의 경우 ‘평판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해 9월 6일 수립한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으로 발표될 정도로 사회주의자들도 인정하는 명망 있는 민족주의자이자 의사였다. 우익일색인 것은 분명했다. 김성수 송진우 뿐만 아니라 김동원과 김용무가 한민당 발기인이었고 전용순과 강병순이 국민대회준비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용설이 8월 25일 우익을 대거 참여시키려는 건국준비위원회 2차 집행부에서 후생부장으로 ‘발표’된 것을 보면 이때 우익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미군정과 여운형의 관계는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민공화국 부인 성명으로 파국을 맞았다. 김성수는 이와 관련해 “고문관이 된 우리로서는 그동안 1차 회담이 있었고 그때 미가(米價)라든지 기타 다른 문제에 관해서 회담을 했을 뿐 이번 문제는 전연 발언되지 않았음으로 그 시비를 말할 수 없다”고 답변을 피했으나 3 여운형은 나흘 후인 14일 군정장관 고문직을 사퇴했다. 4

 

  12일 인공의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여운형의 사퇴와 연합군 환영대회가 논의됐다. 5 특히 이 자리에서 ‘민족반역자(주로 친일파)의 죄악’ 폭로가 결의됐다. 성명서는 14일 발표됐다. 박헌영의 낙인찍기 전술이었다. 6 이번에는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바뀌었다. 7 특히 “일본제국주의 강탈전을 동양민족해방을 위한 성전(聖戰)이라 하여 조선청년을 전장으로 채찍질하여 몰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죄악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Notes:

  1.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10월 5일, 군정청, 군정장관고문관 11명 임명.

    군정청에서는 5일부로 각계 명망있는 조선인지도자를 군정장관의 고문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번에 기용된 고문은 다음의 11氏이다. 金性洙(敎育家) 全用淳(實業家) 金東元(實業家) 李用卨(醫師) 吳泳秀(銀行家) 宋鎭禹(政治家) 金用茂(辯護士) 姜柄順(辯護士) 尹基益(鑛業家) 呂運亨(政治家) 曺晩植(政治愛國家) 前記 11氏 中 曺晩植은 당일 불참하였는데 상경하는대로 任官될 터이며 무기명투표에 의하여 金性洙가 위원장에 決定되었다.[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2.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한울,1995,149쪽.

    1947년 7월 암살직전 여운형은 미국에서 건너온 조선사정소개회의 김용중에게 자신의 마지막 유고가 된 편지를 썼다. 미국과 자신간의 불행했던 관계를 회고한 여운형의 편지는 몽양의 암살 후 김용중이 발행하고 있던 주간신문 ‘보이스 오브 코리아’에 게재되었다. 하지와의 첫만남에 대해 몽양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회고했다.(중략) 내가 자리를 뜨려하자 하지장군은 나에게 군정청 고문회의의 고문이 되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 “기꺼이 수락하겠다”고 대답하였소. 나는 옆방으로 인도이었소. 방에는 나를 포함해 열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9명의 조선인 중에서 단지 한국민주당의 총무였던 김성수와 같은 당의 총무였던 송진우만이 조선인에게 알려진 인물이었소. 그 나머지는 서울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평판이 나쁜 사람들이었소. 서로 인사가 오간 후 고문회의의 의장을 선출하기 위한 투표가 시작되었소. 나는 확실히 윤기익에게 투표했소이다. 개표를 시작하자 김성수가 아홉표를 얻었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표를 던졌음이 드러났소. 이 뒤에 경기도지사를 선출하기 위한 투표가 다시 있었소. 다시 표결은 9대 1이었소. 나머지 사람들은 완고한 진영을 구축했고 내 견해는 완전히 묵살되었소. 그래서 나는 사임했소.(The Victim of Military Occupation, The Voice of Korea,1947.9.16.)

  3.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의 발표에 대한 각계지도자 담화발표.

    군정청고문 김성수 담, “신문에 게재된 군정장관의 발표문을 채 읽지 못했음으로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고문관이 된 우리로서는 그동안 1차회담이 있었고 그때 미가라든지 기타 다른 문제에 관해서 회담을 했을 뿐 이번 문제는 전연 발언되지 않았음으로 그 시비를 말할 수 없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4. ‘여씨 고문 사임, 현정세하 그 임(任) 아니라고’, 자유신문 1945년 10월 15일자 1면.

    여운형씨는 14일 군정장관 아놀드씨에게 대하여 현정세하에 있어서 그 임(任)이 아니라는 이유로 군정청 고문관 사임의 사표를 제출하였다.

  5. ‘성명서 발표와 민족반역자 죄악 폭로결의, 중앙인민위원회’, 자유신문 1945년 10월 14일자 1면.

    조선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12일 정오부터 개최 허헌씨 이하 위원 다수 출석하여 3천만 민중에게 대한 성명서 발표건을 전원 일치로 가결하고 다음 1. 민족반역자(주로 친일파)의 죄악폭로 1. 민족통일전선결성의 촉진 1. 국제적 외교진용의 강화 등을 결의한 다음 지난 10일 정청으로부터 발표된 아놀드 군정장관의 성명서에 대한 일반민중의 여론을 보고 여운형 씨 군정청 고문사임 문제 협의에 이어서 서울시민대회개최에 관하여 김광수씨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끝으로 경남인민위원회 문교부장 오재일 씨의 도 인민위원회 결성 중간 보고를 마치고 오후 4시 30분 폐회되었다. 그리고 민중에 대한 성명은 14일쯤 발표되리라고 한다.

  6. 박달환, 인물월단(人物月旦), 1946. 1. 20, 『인민』 1946. 3(『한국현대사자료총서』 8);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8권, 역사비평사, 2004.

    만약에 그렇게 약체(弱體)일 것 같으면 애당초 친일파니 민족반역자니 사이비 애국자니 망명 정객이니 하는 슬로건은 박헌영씨가 지어낸 것이다. 박씨는 대담하게 이런 조어를 지어내 투쟁 대상을 여지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조어가 그들에게 거의 낙인과 같이 되어 다시는 박헌영씨와 싸울 기력을 잃게 되는 것을 왕왕 보게 된다. (출처 : www.krpia.co.kr )

  7. 남광규, 해방 초기 중간파 약화와 좌.우대결의 격화(1945.8-1946.2)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02, 67쪽.

    앞서 장안파와의 공산당 주도권 경쟁에서 박헌영이 내건 슬로건이 ‘청류/탁류’였다면 우파와의 경쟁에서 박헌영 측이 내건 슬로건은‘친일파·민족반역자’였다. 박헌영은 아직 우파가 정치적 실체로 표면화되기 전에 이미 우파를 다음과 같이 ‘친일파, 민족반역자,’ ‘사이비 애국자,’ ‘망명 정객’으로 규정한 슬로건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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