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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41 : 인촌과 몽양 (2)-건준 내부의 갈등

Posted by 신이 On 11월 - 27 - 2012

  일제시기 몽양 여운형과 인촌 김성수는 가까운 사이였다. 1 1939년 보성전문 법과과장이 된 뒤 김성수의 측근이 된 유진오는 “여운형 허헌이 ‘인촌, 인촌’하면서 왕래했다”고 회고했다. 2   김성수가 해방 후 정치를 송진우에게 맡기고 2선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송진우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려고 했다. 3 그러나 김성수 세력을 배제하려는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건준에 침투하고 있었다. 4 미군이 진주하기 전 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 해야했다. 건준의 전국인민대표자는 6일 인공을 수립하고 송진우 측의 김성수를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출했으나 송진우는 제외했다. 5 이것 때문에 말들이 많았다. 김성수는 되고 송진우는 안될 이유가 없었다. 6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주도한 14일 인공의 조각에서도 송진우는 발표에서 빠졌다. 7 ‘호남재벌의 대표인 김성수 세력의 대변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면서 김성수를 문교부장으로 발표했다.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하고 있는 정부적 대표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전술이었다. 

 

  김성수 세력이 16일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자 나흘 후인 20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 송진우와 김성수를 중심한 한국민주당은 지주와 자본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반동적 정당”이라고 규정했다. 8 조선공산당 재건파 박헌영의 낙인찍기 전술이었다. 9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로도 근무한 적이 있는 박헌영은 이론으로 무장한 공산주의 거물이었다.

 

  인공의 인정여부는 10월 정당통일운동의 걸림돌이었다. 독립운동가 양근환 10이 각 당 대표 간담회를 주선했을 때 김성수는 보성전문 졸업식이 있는데다 “정치는 고하(송진우)와 설산(장덕수)이 하고 있으니 그들이 가면 되지 않나”하고 빠졌다. 11 송진우는 여운형이 인공을 수립한 것을 사과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회담장에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3·1운동 때 민족대표였던 이갑성 12의 정당통일기성회도 4대당 당수 급 간담회를 주선했으나 송진우의 거부로 이루지 못했다. 13 여운형이 인공을 수립한 것을 무효화하지 않는 한 만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한편에서는 ‘조선 인민공화국 지지 동맹’이란 서명의 전단이 돌고 벽보가 나붙고 있었다.

 

 박헌영 동아일보 경력증명서
(출처 : www.krpia.co.kr )

 

 

 

Notes:

  1. 일민 김상만 전기, 동아일보사, 2003, 104~105쪽.

    태평양전쟁 말기 여운형은 인촌을 만나기 위해 해동(海東)농장을 찾았다.…인촌은 해동농장을 찾은 여운형을 반갑게 맞았는데, 여운형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서울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자네를 보러 온 것이 아니고 상만을 보기 위함일세.’ ‘내 친구가 온 게 아니라 내 아들 친구가 왔군.’ 인촌 역시 빙그레 웃으며 진객의 손을 잡았다. 송진우가 일민(김상만)을 친아들처럼 대했다면 여운형은 친구처럼 대했다. 여운형 특유의 호방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일민은 여운형에게 송진우와는 다른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일민 역시 송진우와는 다른 존경과 애정을 여운형에게 품고 있었다. 아버지뻘 되는 여운형과 함께 농장 부근 냇가에서 즐겁게 천렵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정치신념의 차이로 여운형이 인촌과 멀어지자 일민은 가슴을 태웠다. 아버지와 멀어진다는 것은 곧 자신과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촌과 송진우의 정치신념이 확고했듯이 여운형의 정치신념도 확고했다.

  2. 유진오, 지도자로서의 인촌, 동아일보 1965년 2월 16일자 5면.

    인촌 선생은 공산주의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철저한 반대의견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렇다고 좌익적인 사상이나 의견을 가진 사람을 꺼리거나 미워하지는 않으셨으니, 여운형·허헌 기타의 좌익계 거물이「인촌, 인촌」하면서 선생과 가까이 왕래하던 것으로 이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3. 신호(申晧), 현정치노선 비판과 그 신방향, 연건출판부, 1949, 27쪽.

    국내 민족주의세력의 한 거종(巨宗)이라고 할 수 있는 송진우 씨의 건준에의 영입이 논의되어 여운형 권태석 조병옥 씨 등이 이 여 송 제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박헌영 씨와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강국 최용달 씨 등은 이를 반대하여 공적 회의를 두 번이나 유회시키고 세 번째만에 가서 표결을 한 결과 송씨를 맞아드리자는 이는 16인 맞아들이지말자는 이는 17인 한 표의 차로 여 송 제휴는 미성공되었으며 그 후부터 송씨의 건준에의 참가를 단념하고 해외 임정추대운동이 전개되게 되었다.

  4. 신호(申晧), 현정치노선 비판과 그 신방향, 연건출판부, 1949, 24쪽.

    이 조(조병옥-인용자 주)박사는 여운형 선생과 함께 건준시대 여운형 송진우 양 선생의 제휴를 위하여 고심하든 이다. 그 여 송 제휴가 소위 건준에 있어서의 ‘17대 16인 거수 사건“으로서 부결되자 조박사의 머릿속에는 좌경의 소아병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5. 신호(申晧), 현정치노선 비판과 그 신방향, 연건출판부, 1949, 25쪽.

    발표된 그 중앙회원 중 송진우씨는 들지 않았고 송진우씨의 계열인 김성수 김병로 씨는 들어있었다. 이것을 한 화제거리로 세론(世論)이  왈피왈차(曰彼曰此)하고 있는 중 송씨 중심의 일세력이 해외임정추대운동을 일으키자 인공은 지지 반대의 와중에 들게 되었다.

  6. 신호(申晧), 현정치노선 비판과 그 신방향, 연건출판부, 1949, 25쪽.

    그래서 인민공화국중앙위원회는 공화국으로서의 국무를 집행할 계제는 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에 전력이었던 것이다. ‘조선 인민공화국지지 동맹’이란 서명의 삐라가 돌고 벽보가 나붙던 일은 그날의 인공이 지지되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고 있었나의 표현인 것이었다.

  7. 신호(申晧), 현정치노선 비판과 그 신방향, 연건출판부, 1949, 30쪽.

    이 인선이 달리 된 것이 아니라 전게(前揭) 9월 8일 계동에서 열린 공산주의열성자대회에서 박헌영 씨 자신이 보고함과 같이 이 역시 박헌영 씨 중심의 선정에 의한 인선이라면 이 무슨 이론적 상위(相違)인고.

  8.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1945. 9. 20, (김남식 편, 『남로당연구자료집』 제1집,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5권, 역사비평사, 2004, 55쪽.

    그것은 조선의 지주와 대자본가들이 주장하는 로선이니 이것은 우리의 혁명적 노선과 대립되고 있다.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국가의 건설로써 그들 지주와 대자본가의 독재하에 그들의 이익을 옹호존중하는 정권수립의 기도이다. 이것은 해외에 있는 망명정부와 결탁하여 가지고 저 미국식의 데모크라씨적 사회제도건설을 최고이상으로 삼는다.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 송진우와 김성수를 중심한 한국민주당은 지주와 자본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반동적 정당이다.(출처 : www.krpia.co.kr )

  9. 남광규,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친일파와 토지문제에 대한 입장과 정치적 성격,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2집2호, 2011, 40쪽.

    공산당 재건파는 친일파 문제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제기할 때는 김성수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제기할 때는 송진우를 대표 인물로 설정하여 필요에 따라 친일파로 재단하였다. 즉 경제투쟁, 계급투쟁에서는 지주 계급인 김성수를 표적으로 하고 정치투쟁에서는 우파의 중심 지도자였던 정치인 송진우를 표적으로 하였다.

  10. ‘독립전선의 통일염원, 당파를 초월한 감격의 열론(熱論) 전개, 획기적 각 정당 수뇌회동’, 자유신문 1945년 10월 6일자 2면.

    10월 5일 오전 10시경 동대문의 모처에서 민족통일과 신정권 수립을 위하야 정계 거두 10여명이 개인의 자격으로 한자리에 모이어 약 6시간에 걸친 역사적 대회합이 전개되었다. 이 모임은 일즉 민원식을 암살한 사건의 주인공인 양근환 씨의 사회로 열리었는데 여기에 회동한 사람은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조동우 허헌 김병로 장덕수 백관수 최근우 최용달 씨 등 정계의 거두들이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하여 민족통일전선결성의 제1차 회합이 정열과 감격 속에서 토의된 것이다.

  11. 박갑동,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화-내가 아는 박헌영 65 (중앙일보 1973년 5월 12일) 혁신탐정사 팀. ;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8권, 역사비평사, 2004.;=조선공산당 측에서는 각 당 대표 간담회를 주선한 독립운동가 양근환에게 송진우와 김성수의 참여를 요구했다. 친일파  민원식을 암살한 양근환은 당시 독립운동가 손기업과 함께 혁신탐정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성수보다 세살 적었으나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회의 당일인 10월 5일 양근환이 김성수를 찾아가 “인촌, 자네 오늘 내 말 안들으면 알지”하며 권총 한 자루를 보이자 김성수는 “하하. 내가 자네 손에 죽으면 그 이상 영광이 어디 있나”하고 받아넘기면서 송진우와 만날 수 있도록 했다.

  12. 이갑성(李甲成·85·전 국회의원·광복회 회장)씨의 말, 동아일보 1971년 12월 9일자 4면.

    군정 이 되니까 왜 그리 많은 정당이 생기는지 한심한 상태였읍니다。그때가 언젠지 모르나하지 중장을 만나 등록된 정당이 몇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74개라고 대답합디다。나는 당초 한민당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정부가 선후에라야 정당이 있는 법이지 독립도 정부도 아직 안섰는데 정당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싶어, 난립한 정당을 통일하기위해 정당통일기성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일치된 힘을 대내외에 보이고 싶은 욕심에서였지요. 그런데 각 정당의 의견이 각각 달라 이를 묶기가 힘들었어요. 공산당하고는 주의사상이 달라서 내심 그들을 제외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 무렵 권태석(건준 무경부장(武警部長)·월북 행방불명))이가 사람을 보내 자기와 함께『안재홍 이규갑씨 등과 모여 정당통일 운동을 하면 어떠냐』는 거예요。그때 권태석은 이미 붉다고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에 남이 보면 나까지도 빨갛다고 할까봐 당장 거절했습니다。“사상전(思想戰)은 독립후에 하자”는 내 말이 박헌영이 한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나를 좋아한 듯 했으며 한번은 33인대표로 공산당에 들어오면 잘 대접해드리겠다고 제의해 온 일까지 있었습니다. 박헌영을 만나 “너무 과격해도 안되니 머리를 수그릴 줄도 알아야한다”고 충고하면 청종(聽從)한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박은 결코 주소나 연락장소를 가르쳐 주는 법이 없고 반드시 2중 3중의 사람을 거쳐 만날 수 있도록 해두고 있었어요. 정당통일기성회 후에 정당합동통일위원회가 각 당 대표 3인씩으로 조직됐는데 이것은 꽤 효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13.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10월 19일, 송진우, 임정과 대립되는 중요정당과의 당수회합 불필요성 언명. 여씨의 그 의사를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직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밖에 없으니 그에 대립되는 여하한 단체 개인과도 회담할 필요성을 가지지 않는다. 오늘이라도 그들이 실제에 있어서 인민공화국을 해산하며 그를 수립한 일을 사죄한다면 얼마든지 만나겠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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