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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34 : 인촌과 애산 (3)

Posted by 신이 On 10월 - 19 - 2012

 

애산 이인은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경찰에 연행된 날도 새벽까지 인촌 김성수의 계동 집에서 함께 시국담을 나누었다. 1당시 김성수는 52세, 한살 위인 이인은 53세였다. 그날 김성수 보다 아홉 살 위인 최규동의 회갑을 축하하는 만찬이 있었다. 최규동 김성수 이인을 포함해 백관수 송진우 현상윤 고희동 심호섭 등 8~9명이 모였다. 2

 

  ‘당시 왜경의 사찰은 신경과민을 자아내서 거의 광란상태인지라 서로서로 조심조심해서 주배(酒杯)가 왕래하기 심경(深更)을 지내서 나는 집에 돌아와서 눈 한숨 붙이고 있는 참에 현관에서 규환성(叫喚聲)이 요란하다. 때는 새벽 4시경이 될까말까 한데 집 주위를 10여명의 경관이 매복하고는 두 사람의 경관이 함흥검사국 체포장을 제시하고는 당시 우수좌골(右手挫骨)도 완쾌되지 않은 필자를 체포하고 보행키를 강요했다.’ 3

 

  이인의 회고 4에 따르면 송진우는 1942년 가을 청진동 자신의 집에 들러 일제의 탄압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송진우는 동아일보 폐간 후 잔무처리를 위해 원서동 집에서 세종로까지 출근하던 중 어느 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이인 집에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군부가 직접 전쟁을 지휘하기위해 동조영기(東條英機)를 수상에 앉혔을 때였다. 송진우의 동저고리바람을 의아해하는 이인에게 송진우는 넌지시 한마디 했다. “동조(東條)니 동저고리야. 급하면 두루마기도 안입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뛰어나간다는 말 못들었나. 애산(이인)도 몸 조심하소.”

 

  송진우가 다녀간 지 불과 2~3일후 이번에는 이극로가 찾아왔고, 이극로는 10월 1일 최현배 이희승 이중화 장지영 한징 이윤재 정인승 김윤경 권승욱 이석린과 함께 검거됐다. 이인은 12월 23일 서승효 안재홍 김양수 장현식 정인섭 윤병호 이은상과 함께 연행 구금됐다.

 

  이극로와 함께 경기도 경찰부에 수감됐던 이석린 5은 그날 이극로에게서 “너무 염려하지 마라. 곧 정치적으로 해결될 것이다.”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석린은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풀려난 즉시 이극로의 집을 찾아갔다가 부인 이공순에게서 이극로의 희망과 달리 국민총력조선연맹 ‘총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총재는 당시 조선총독인 고이소(小磯)였고, 1943년 11월 한국인으로 가장 높은 지위인 사무국 총장에 임명된 것은 한상룡이었다. 

  이석린은 김성수가 무사했던 것은 총독부의 정치적 고려였다고 추측했다. 6 그러나 이석린과 함께 1943년 9월 18일 풀려난 즉시 김성수를 찾았던 김선기는 김성수에게서 총독부 보안과장에게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7

 

 

 동아일보 1935년 3월 16일자 조간 2면

 

독립기념관 소장
조선문자와 어학사(朝鮮文字及 語學史) 1쪽에 실린 출판기

 

 

 

Notes:

  1. 이인, ‘동조(東條)내각과 송진우 동지와 나’, 신천지(?);김봉기 서용길 공편, 애산여적:이인 선생 수상평론 제1집, 세문사, 1961,44쪽.

    계동 인촌댁에서 일전 그 사람들만이 모여서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비분강재를 내포한 우울한 심정을 방산하느라고 그럭저럭 심야를 지낸 오전 2시나 되어 귀가하였던 것이다.<해방직후 신천지에 투고 게재했던 내용>

  2.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최규동의 생년월일이 1882년 12월 30일(음력 11월 21일)로 돼 있다. 1942년 음력 11월 21일은 양력으로 12월 28일이다. 조선어학회사건 판결문과 한글학회 자료에는 이인이 12월 23일 검거된 것으로 나와 있다.

  3. 이인, ‘일제말엽의 나의 수난’, 코메트(공군순보) 1955년 10월호 ;김봉기 서용길 공편, 애산여적:이인 선생 수상평론 제1집, 세문사, 1961,134쪽.<코메트에 투고 게재했던 내용>

  4. 이인, ‘동조(東條)내각과 송진우 동지와 나’, 신천지(?);김봉기 서용길 공편, 애산여적:이인 선생 수상평론 제1집, 세문사, 1961,40~42쪽.

  5. 이석린, ‘화동 시절의 이런 일 저런 일’,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 21쪽.

  6. 이석린, ‘화동 시절의 이런 일 저런 일’,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 21쪽.

    왜냐하면, 이극로 박사를 고문하고 추궁하면 김성수 선생까지 확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인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동아일보사의 주인이오 정치적으로도 조선의 대표적 지도자인 그를 괄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 김선기 명지대학 명예교수, ‘인촌 김성수’, 신문평론, 한국신문연구소, 1976년 4월호, 83쪽.;‘국어운동, 한글학회의 발자취’, 나라사랑 제26호, 1977년 3월, 41쪽.; 무돌 김선기 선생 글모이Ⅴ무돌 김선기 선생논문.산문집, 도서출판 한울, 2007 영인,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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