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산 이인은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기 직전까지 인촌 김성수와 항일민족운동을 함께 했다. 조선어학회사건 자체는 일제가 조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인은 이 사건이 물산장려회, 발명학회, 과학지식보급회,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조선어학회 활동과 피압박민족 대회 대표파견이 한데 묶여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1 다만 이 사건으로 투옥된 사람이 조선어학회 관계자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어학회사건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2
물산장려운동은 대한제국시기 국채보상운동과 일맥상통하는 경제적 항일 민족운동이었다. 김성수가 1915년부터 조선물산장려계 3를 시작으로 주로 동아일보를 통해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다면 이인은 물산장려회에 들어가 1934년 회장까지 지냈다. 4 조선어학회사건의 주역 이극로는 장려회의 이사였다. 조선물산장려계에서 활동한 김두봉은 주시경의 제자로 1919년 상해에서 이극로와 함께 조선어연구에 힘썼다.
1934년 7월 5일 과학지식보급회의 창립은 그해 4월 19일 열린 제1회 ‘과학데이’ 행사가 계기가 됐다. 발명학회에 관여하고 있던 이인은 물론 김성수도 ‘과학데이’ 행사 실행회에 참여했다. 5 행사도중 과학의 중요성을 일반인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과학지식보급회 창립이 논의됐고 이인과 김성수, 이극로는 발기인이 됐다. 보급회에서 김성수는 고문, 이인은 부회장, 이극로는 연구위원을 맡는다. 6 ‘과학데이’의 옥외행사가 1937년부터 금지됐고 과학지식보급회는 1940년 해체됐다.
이인과 김성수는 1938년 12월 3일 고문에, 이극로는 이사에 선임 7됐다. 이중 김성수는 2009년 정부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고, 김성수의 과학지식보급회 고문 선임은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취소 소송 1심에서 친일반민족행위의 증거로 제시됐다. 어이없는 일이다.
조선어학회와 직접 관련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은 이극로가 제안해 1935년 3월 15일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이극로는 일반인들에게 관혼상제 비용을 절약해 조선어출판물 보급에 찬조하도록 중개하자는 취지를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김성수가 관장에 선출되고 이인은 감사를 맡는다. 사무소는 화동 129번지 조선어학회 건물을 썼다. 1938년 1월 첫 사업으로 김윤경의 「조선문자 급(及) 어학사」가 출판됐다. 이인의 부모 회갑기념이었다. 김성수는 관장으로서 이 책에 ‘출판기’ 8를 실었다. 창립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은상은 창립취지서 9를 집필했다. 이은상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됐는데 이 취지서 때문이었다. 10
김성수 명의의 ‘출판기’는 조선어학회에서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11 ‘출판기’는 1937년 3월 3일자로 작성됐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일장기말소 사건으로 정간 중이었고 동아일보 간부들은 복간 때까지 글이나 말을 발표하지 않았다. 12
◇과학지식보급회광경
과학지식 보급회(科學智識普及會)주최의 과학발명회의는 22일 오후 5시부터 시내 백합원에서 열리엇는데 동 8시에 원만히 페회하엿다고한다
Notes:
- 이인, ‘항일투쟁회고’, 경향신문 1962년 8월 2일자 2면.
필자가 1942년 11월 조선민족을 붙들기 위한 조선어와 한글보존을 위한 조선어대사전간행과 백이의(白耳義)「브라셀」에서 개최되는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비밀히 김법린씨를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에 참가케 했던 것과 그 외 필자개인관계로 일인이 지적했던 혁명투사양성기관인 조선양사관과 조선의 문화증진을 위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초대관장 인촌 김성수 2대가 필자) 과학을 보급여행(普及勵行)하는 조선과학보급회, 발명학회, 조선물산장려회의 각 대표 책임을 필자가 당하고 있던 것 전부는 그 궁극의 목적이 조선독립의 준비공작이었다. 이극로가 일본이 대동아전쟁에 앞서는 것은 조선을 먼저 해방하는 것이 동남아민족의 신뢰감 획득방법이니 조선을 일본이 자진 해방케 하는 운동을 전개하는데 관한 말을 필자에게 제의한 것 등 죄목으로 함흥경찰과 감옥에 4년간 구금되었을 때 일이다.
- 이인, 나의 제헌국회의원시절 전후, 신동아 1977년 7월호, 145쪽.
이와 같이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세계약소민족대표자대회, 물산장려운동, 과학운동, 발명운동, 조선어학회사건이 한데 묶여진 것이 바로 이 사건이었는데 다만 한글학회 관계자가 많고 관련자가 거의 조선어학회 회원이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사건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국가보훈처)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8권:문화투쟁사, 독립유공자 사업기금 운용위원회, 1976,346쪽. 조선물산장려계(각주:경북경무부의 ≪고등경찰요사≫pp.260∼264.)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고보 출신으로 1년제) 학생들이 조선물산장려계를 조직하고 경제적 자립 사상을 비롯한 민족혼 고취를 목표로 그들은 전해 일본에 갔던 수학여행기를 가장한 동유기(東遊記) 90부를 발행하여 보급하는 외, 회원간의 토론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발각되어 피검되었다. 그들은 휘문의숙의 남형유·최남선 등의 찬동을 얻어 지도받기도 했는데 관련자 130여 명 중에는 김성수·박중화·유근·김두봉·안재홍 등이 포함되어 있다. ↩ - ‘조선물산장려 성(聲)’, 동아일보 1934년 2월 28일자 조간 2면.
조선의복문제에 대한 간담회를 동회 회장 이인 씨 사회로 개회하야 남녀학교 교복에 조선 수목을 사용하자는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실행점을 토의하고 이후는 더욱 값싸고 질긴 조선 물산장려와 선전에 노력할 것을 고조하엿다 한다.
- ‘과학데이의 제정’, 경향신문 1973년 12월 5일자 5면.
“행사에 드는 경비는 각자가 5원씩 부담하기로 되었으나 아마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도움이 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목돈상 씨(변리사)는 회고하고 있다.
-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김용관’, 한겨레신문 1990년 8월 31일자 7면.
조만식 · 여운형 · 송진우 · 김성수 · 이상협이 이 보급회의 고문에 추대됐고, 주요한 · 조동식 · 이극로 등 조선의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이 대거 임원으로 참여했다. 김용관은 전무이사를 맡는다.
- ‘과학지식보급회 신역원 선거’, 동아일보 1938년 12월 5일자 석간 2면.
▲고문 중촌의일, 소산일덕, 김대우, 최린, 여운형, 방응모, 백관수, 오긍선, 한상룡, 박영철, 김성수, 이인, 민규식; ‘과학지식보급회 역원전부를 개선’, 매일신보 1938년 12월 6일자 조간 4면
- 조선문자와 어학사 (朝鮮文字及 語學史), 독립기념관 소장, 1쪽. 출판기.
본관은 허례에 낭비되는 경제력을 이용하여 문화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며 인간의 기념심을 선용하여 그 여천지 무궁하도록 사라지지 아니하는 새로운 기념 방식을 지도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이 취지로 출판물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던 중에 선각으로 이인 선생이 그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회갑 기념으로 제1호의 출판을 하게 되었다. 이 뜻 깊은 기념 도서 출판의 원고는 저자 김윤경 선생의 수십 년 전공과 과학적 노력으로 이루어진 값있는 원고라, 학술계에 한 거성으로 나타난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귀중한 원고가 본관의 제1호 기념 출판으로 된다는 것은 본관으로서 더욱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 첫걸음은 뭇사람의 모범이 되어서 누구나 길흉 대소사를 당할 때마다 종래 습관에 끌리어서 허례에 없어지는 돈이 있다면 그것으로 기념 도서를 출판하여 사적으로 영구성이 있는 기념을 하는 동시에 공적으로 문화생활에 협조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이 출판 성사에 대하여 감사함을 말지 아니하는 바이다.
1937년 3월 3일 조선기념도서출판관장 김성수 - 독립운동사 제8권 : 문화투쟁사[발행자: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발행일:1976/12/28, 편저자: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003~1004쪽. 기념도서출판관 창립 취지서.
반만년에 걸친 배달민족의 문화가 찬연히 발달하여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그 빛을 자랑해 온 우리의 옛 문화도 이제 다시금 밝혀 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요 또 대대로 누려갈 우리의 새문화도 이제 확실히 세워놓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래서 이 방면의 참된 양심과 협동적인 노력이 하나하나의 결실을 거둘 적에,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법유(法乳)요, 영천(靈泉)이요, 생명소(生命素)가 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우리 출판계의 경향이, 순수한 학술연구에 관한 서적 들은 구독자가 적기 때문에, 그것의 출판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실정 하에서, 일반 판매성이 희박한 유익한 도서출판을 위하여,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사람의 일생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길흉 간에 반드시 기념할만한 일들이 생기는 것으로서 혹은 결혼·회갑·개업 등 경축할 만한 일도 있고, 또 혹은 가족의 장례 등 슬픈 일로 기념해야 할 일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마다 많고 적고 간에, 경우 따라, 정세 따라, 물질적인 비용을 들이게 되는 것인데, 그러한 때에 그 비용을 절감하여, 자기 뜻에 맞는, 어떤 누구의 무슨 종류의 서적이든지를 한 책씩 간행하자는 것이니, 그것은 실로 그 일 자체를 영원히 기념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출판으로 말미암아 우리 문화를 질적으로 양적으로 좀더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우리는 이제 기념도서출판관을 창립하고, 이 방법의 출판을 위하여 중립적인 위치에서 정성껏 소개하는 책임을 다하려는 것이다.
과연 이 사업에 대한 민족적 지지로 말미암아 하나의 민풍(民風)이 서고, 그대로 우리 문화의 흐름을 이룬다면, 출판하는 이에게 있어서는 그 덕이 후손에게 미칠 것이요, 민족 전체를 위해서도 문화발전상 막대한 보람이 될 것을 믿는 것이다.
동포들이여 이 뜻에 공명(共鳴)하라. 모두 한 마음으로 협조함이 있기를 바란다.1935년 1월
기념도서출판관
창립 발기인 일동 - ‘내가 겪은 20세기-노산 이은상 씨’, 경향신문 1972년 10월 7일자 4면.
노산이 어학회사건으로 붙잡힌 직접 동기는 민족정신을 고취한 기념도서출판관의 취지문 때문이었다.
- 김선기 명지대학 명예교수, ‘국어운동, 한글학회의 발자취’, 나라사랑 제26호, 1977년 3월, 41쪽; 무돌 김선기 선생 글모이Ⅴ무돌 김선기 선생논문.산문집, 도서출판 한울, 2007 영인, 87쪽.
1937년 3월 3일에 인촌 선생의「출판기」를 이 자리를 빌어 적어 두려 한다. 이 출판기는 뒤에 없어졌기로 더욱 적어둘 의미가 있다고 본다.
- 객담실, 삼천리 제9권 제4호, 1937년 05월 01일 3~4쪽.
동아일보 간부 제씨 사이 한 가지 신사조약이 있다. 그것은 신문이 바로 잡히기 전에는 피차에 사회적으로 글이나 말을 발표하지 말자고 그래서 혹유(或有) 방객(訪客)하여도 정치담 사회담은 일체 피하고 한갓 화조풍월담으로 화제를 삼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