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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31 : 고하와 인촌(5)-누가 그림자인가?

Posted by 신이 On 10월 - 12 - 2012

 

 16, 17세 때 만나 평생을 함께 한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를 두고 형영상반(形影相伴)이었다는 표현이 있다. 고재욱 전 동아일보 사장이 형체와 그림자가 함께 가는 것과 같았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1

 

 김성수의 측근 유진오는 “겉으로 보기에는 풍모나 뱃심이나 활동에 있어서나 고하가 형격 같았지마는 내용으로는 인촌이 형격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고 회상했다. 2

 

 송진우가 “인촌은 돈으로 사장을 했지. 나는 내 몸뚱이로 사장을 했단 말이야”라며 자신이 필화사건으로 투옥된 사실을 자랑하면 김성수는 “여북 미련해야 몸뚱이로 사장을 한담”이라고 맞받아쳤다. 사실 일제시기 내내 김성수는 3.1운동이나 독립운동지원에 매진했는데도 투옥되지 않았다. 일선(一線)에 나서지 않고 비밀엄수에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의 동아일보 노송령분국 기자로 일했던 박학보는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 19일 쓴 글에서 “전통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왜놈을 누구보다 미워하면서도 감옥은 가지 않으려는 이 영리! 이것이 근대 자본가계급의 진보적 분자의 ‘타잎’이 아닐 수 없다”며 “그 대표자를 찾는다면 김씨를 들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3

 이 같은 성향은 일찍부터 나타났다. 일본유학시절 대한제국 학무국장이 동경에 왔을 때였다. 함께 유학했던 장택상의 증언. 4

 

 “대한제국 시절 동경에서 유학할 때 우리나라에서 의병이 을사보호조약에 항의해 각도에서 봉기했다. 유성준이라는 사람이 본국정부 학부 학무국장으로 일본에 시찰 와서 유학생들 모아놓고 ‘국내에서는 지금 폭도가 봉기해서 정부에서 지금 강력 탄압중이다’고 연설했다. 그때 내 뒷줄에 앉아있던 인촌이 내 옆구리를 콱 찌르며 ‘이 자식아, 저걸 듣고 가만 있어’ 그러는 것이다. 나도 지금 의병을 폭도라고 하는 것에 화가 나서 있던 차에 인촌이 그러기에 벌떡 일어나 ‘여보, 지금 의병을 폭도라고 하는데, 학무국장이라는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며 당장 내려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15살 먹은 어린아이가 인촌의 선동을 받아 그런 욕을 한 것이다.” (동아방송 정계야화 창랑 장택상 편, 제8회 인촌 김성수 선생, 1965년 2월18일 방송)

 

 김성수는 대학졸업 후 첫 사업인 중앙학교에 이어 동아일보를 송진우에게 맡길 만큼 그를 평생 신뢰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주요한은 “때로는 사장실에서 송진우 씨와 싸우는 소리도 들렸는데 대개는 돈 때문인 것 같았다”며 “‘내가 바지저고린 줄 아나’하는 송진우 씨의 언성이 들려온 일도 있다”고 전했다. 5 김성수는 이에 대해 “고하는 총독이나 상대하지 나 같은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다”고 반격하곤 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변영로는 “풍모로나 성격으로나 고하 선생과는 아무리보아도 서로 맞지를 않아 보일뿐 아니라 어느 때는 두 분 교의에 대하여 염려할 정도였다” 6고 회고했고 동아일보 사장 직무대리를 지낸 양원모는 “두 분은 가끔 대충돌을 일으켜서 그때마다 옆에서는 이제 영영 절교가 되는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마는 그 이튿날이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열심히 숙의를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7고 털어놓았다.

 

 1924년 동아일보에서 이상협 편집국장을 따라 많은 간부와 기자가 퇴사할 때 8 김성수 취체역(이사)이 송진우 사장에게 “덕이 없다”고 공박했다고 한다. 9 김성수는 좌익적인 사상이나 의견을 가진 사람을 꺼리거나 미워하지 않았고 그들도 김성수를 따랐다. 10

 

 홍명희는 1924년 이승훈이 동아일보 사장이 되면서 주필 겸 편집국장에 임명됐다. 홍명희가 퇴직한 뒤 동아일보와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은 홍명희의 성격과 김성수 주위에 있는 일부인사의 모략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11

 

 1921년 주식회사 동아일보 창립 주주총회에서 감사로 선출된 허헌은 1924년 사태 당시 사원들의 퇴사를 번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2 허헌은 김성수를 가깝게 생각했으나 송진우와는 사이가 나빴다. 불과 20일 동안이지만 동아일보사장 직무대리로 있었던 허헌이 동아일보와 사이가 벌어진 것도 송진우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1924년부터 취체역을 맡은 허헌은 1930년 10월 26일 임기가 만료돼 동아일보를 떠났다. 13 이때는 허헌이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사건으로 구속돼 복역 중이었다. 14 김성수도 마침 1929년 12월 3일 서울을 떠나 세계일주여행 중이었다. 허헌은 ‘송진우가 앞장서 자신의 사표를 받아냈고 조모라는 친구가 생활이 곤궁해 송진우에게 취직을 부탁하자 겨우 수위로 채용했다’며 가슴깊이 유감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15

 

 김성수와 송진우는 번갈아가며 동아일보사장을 지냈다. 기사로 말썽이 난다든가 하면 사장이 사표를 내고 바뀐 것이다. 김성수는 편집에는 간섭을 하지 않았지만 경비 절감에는 신경을 썼다.
 

 김성수가 대학졸업 후 처음으로 일본을 다시 찾은 것은 1924년 11월 동아일보 사장 시절 송진우 고문과 경성방직 이강현 상무와 함께였다. 16 호텔에 화재가 나 피신하는 모습에서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17 이강현은 짐을 다 챙겨 나왔고 송진우는 구두 한 짝만 잃어버렸다. 빈손으로 나온 김성수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와야지. 우리는 그렇게 아니해! 우선 나와 놓고 보지”하자 송진우는 “일인즉 옳게 되었다”며 “손실은 김 사장이 제일 컸으니까”하고 맞붙는다. 김성수는 출장도중 일본의 발전에 하품을 하면서 “발전이 별 것이 아니다. ‘함’의 집적(集積)이다. 노력의 결정이다. 하자, 무엇이든지 하자 놀지 말고”하고 말했다 한다. 18

 


1924년 11월 동경에 간 송진우와 김성수(오른쪽)

 

 김성수는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세계일주여행을 한 뒤에도 “우리 민족의 노력이 다른 민족에 비하여 손색이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19 당시 재미작가 강용흘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김성수를 ‘깨어있고 분별 있는 관찰자(an alert and discriminating observer)’라고 표현했다. 20

 

김성수의 미국방문소식을  ‘A Distinguishing Korean Visits America’라는 제목으로 실은 한국유학생회보 1931년 10월(제 4권 3호) 7쪽.

 

 1945년 8월 해방의 소식을 김성수에게 전한 것도 송진우였다. 21 김성수는 일제의 최후 발악을 염려한 송진우의 권고로 서울을 피해 경기도 연천의 해동농장에서 해방을 맞았다. 22

 

 송진우의 측근 이상돈은 “고하(송진우)에 대한 정적도 많고 고하에 대한 질시와 중상모략도 심하였다. 거목일수록 강풍에 닿는 면이 많은 것과 같이 정치적 거인일수록 정적의 중상과 모해가 큰 것이다”고 회고했다. 23

 

 송진우는 뚜렷한 주관을 갖고 칠흑 같은 어둠의 해방정국을 헤쳐 나갔다.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는 좌익이 9월 급조한 조선인민공화국 무효화에 주력했다. 송진우는 민족통일전선결성 논의의 전제조건으로 인민공화국의 해체를 내걸었다. 24

 

 10월 독립운동가 양근환과 손기업의 주선으로 간담회가 열린 뒤 한민당의 백관수는 담화를 발표해 “양근환이 와서 여운형 허헌도 인민공화국을 조직 발표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만났더니 “인민공화국 인정문제에 대해서도 호상격론이 있어 결렬되었다”고 밝혔다. 25 손기업은 간담회 주선을 위해 허헌과 접촉할 때 11월 20일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 인공해체를 선언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26 허헌은 개회사를 통해 “여러분도 각각 자기지방에서 현지의 군정과 적극협력해 주기 바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인민공화국이 가까운 장래에 정권을 받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27

 

 양근환이 간담회 주선을 위해 송진우보다 먼저 접촉한 사람은 김성수였다. 양근환이 김성수를 찾아가 “인촌, 자네 오늘 내 말 안들으면 알지”하며 권총 한 자루를 보이자 김성수는 “하하. 내가 자네 손에 죽으면 그 이상 영광이 어디 있나”하고 받아넘기면서 송진우와 만날 수 있도록 했다. 28 또 손기업의 증언에 따르면 송진우가 간담회에서 “우리나라가 건국 초기이므로 앞으로 2년간 훈정기(訓政期)를 두어서 우수한 청년들을 해외에 보내 그곳 제도를 배워오도록 하자”고 제의했는데 ‘훈정기 운운’ 문제는 그가 암살될 때까지 정적들의 공격 자료가 됐다는 것이다. 29 

 

 송진우가 12월 30일 암살당한 뒤 김성수는 다음해 1월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한데 이어 한민당 수석총무에 선출됐다. 30

 

 “남이 추대해야지 그때까지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분입니다. 남이 다 추대하는데, 그리고 당신이 나라 일을 하겠다는데, 또 내가 나갔다가 암살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추대를 받으면 위험한 일이고 생명을 바치는 일이라도 하시오 하면 하시는 분입니다.”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 1976년 2월 18일 21주기 추모 강연 ‘인간 인촌 김성수’)
  
 

 

 

Notes:

  1. 고재욱, 고하 송진우선생전,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편, 동아일보 출판국, 1965, 3~4쪽 서(序).

    선생은 인촌 김성수 선생과 더불어 형영상반(形影相伴)하여 뜻을 조국의 광복에 두고 일신의 안위를 초개(草芥)같이 여기면서 암담한 속에서도 희망을 제시하고 인고에 처해서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이를 짐내(斟耐)하였다. 선생이 동아일보를 이끌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시종일관 항쟁하고 민중의 각성을 외친 것도 조국 광복을 위한 일념의 발로였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생애 55년은 일직선의 강직 그것이었다. 불의와의 타협을 몰랐고, 동요를 몰랐고, 더구나 굴종이란 선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어휘였다. 실로 선생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암흑기에 민중과 더불어 있으면서 낙망, 좌절이 일세를 휩쓰는 가운데서도 앞날을 똑바로 내다보고 군계일학 같이 특립(特立)하여 항시 조국 광복의 등불을 밝힌 선각자였다. 세태가 어지럽고 인심이 날로 각박하여 방향타를 잃은 일엽선을 방불케 하는 작금에 있어서는 더욱 선생의 풍모를 연상케 되고 그 적확한 선견과 청탁(淸濁)을 병탄(倂呑)하는 고사지풍(高士之風)이 아쉬울 뿐이다. 만약 선생이 지각없는 흉한(凶漢)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고 절세의 경륜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면 우리 역사의 진로도 달라졌고, 오늘의 현실도 행여 다르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2. 유진오, 인(仁)과 지(知)의 지도자, 1962년 2월 18일자 2면.

    세상이 다 알듯이 인촌(仁村)과 고하(古下)의 두 분은 친한 친구의 사이였을 뿐 아니라 둘도 없는 동지로서 일신동체(一身同體)가 되다시피 하여 일생을 보낸 분들인데 매사에 있어서 인촌은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대고하는 참모의 일을 맡아보셨다하면 고하는 밖에서 장병을 지휘하여 전투에 종사하는 사령관의 일을 맡아 보신 셈이다。따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풍모나 뱃심이나 활동에 있어서나 고하가 형격 같았지마는 내용으로는 인촌이 형격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고하는 호방하고 인촌은 해학을 좋아해서 주석같은 데서 두 분이 맞붙으면 상대를 사뭇 헐뜯는 것 같은 농담이 벌어지는 때도 흔히 있었다。이를테면『인촌은 돈으로 사장(동아일보사장)을 했지。 나는 내 몸뚱이로 사장을 했단 말이야』(고하가 필화사건으로 일정의 형무소 살이를 한 일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고하가 내던지면 『여북 미련해야 몸뚱이로 사장을 한담』하는 격이다。그러나 한번 인촌이 날카로움을 품은 음성으로 한마디 말을 던지면 고하는 입을 꾹 담을고 마는 것이었다。일정(日政)도 말기에 가까웠을 때의 일이다。어찌된 연유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없으나 어느 날 인촌을 뫼시고 길을 가다가 위당 정인보 선생을 만났다。 마침 점심때인데다가 그때는 술도 밥도 육류도 모두 주리고 있던 때라 인촌이「김천대회관」에 가서 점심을 사시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고하도 불러내지』하셨다。 동아일보가 폐간을 당하고 있을 때라 고하도 무척 울적하게 지내실 것을 생각하신 것일 것이다。그리고 김천대회관의 일실(一室)에서 인촌、고하、위당 세 분과 나와의 뜻하지 아니한 주연이 시작되었다。전쟁 말기의 분위기아래 일인(日人)경영 음식점에서 대낮에 벌어진 주연이라 이야기도 조용조용 진행되었다。 그러나 잔을 거듭함을 따라 고하의 음성은 높아갔다。 물론 시국담이었다。일경이 옆에 있으면 잡아가기라도 할 판이다。차차 걱정스러울 정도가 되었을 때 『인제 그만해!』 날카로운 인촌의 말소리가 떨어졌다。 고하는 말을 뚝 끊지고、약간 원망스런 눈으로 인촌을 바라보고、그리고는 씩 웃고 또 술잔을 들었다。

  3. 박학보(朴學甫), 김성수 론, 신세대 1946년 7월호 45쪽.

    전통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왜놈을 누구보다 미워하면서도 감옥은 가지 안으리는 이 영리! 이것이 근대 자본가계급의 진보적 분자의『타잎』이 아닐 수 업다. 그 대표자를 찾는다면 김씨를 들지 안을 수 업다.

  4. 1965년 2월18일 동아방송(DBS)에서 방송된 ‘정계야화’ 시리즈, 장택상을 상대로 동아일보 신동준 정치부장이 가진 대담인터뷰 요지를 녹음테이프에서 채록.

    그 때 그 유성준 씨가 본국 정부 학무국장으로 유학생 시찰을 왔단 말이야. 와서 인제 우리를 그 유학생 감독부에다가 전부 소집을 해서 한 400여명 됐습니다 학생이. 근데 우리도 갔단 말이야. 내가 인제 이렇게 후 열에 앉고, 인촌은 나보다 더 뒷줄에 앉고 이랬는데. 학무국장이 연설을 하는데 그 때 인제 우리나라에 의병이 한창 일어날 때 입니다. 을사 보호조약 관계로 의병이 각 도에 봉기하고 있는데 아 연설중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국내에서 지금 폭도가 봉기를 해서 정부가 지금 합력 탄압 중이라고 이런 말씀을 그 유성준 씨가 한단 말이에요. 유성준 씨가 지금 그 저 여기 유갑경 씨 있잖아요? 그 아버집니다. 지금 그 유갑경 여사라고 자유당 시대 때 하시던 그 참 좋으신 분이지. 그 인촌이 내 옆구리를 콕 찌르더니 이 자식아 지금 듣고 가만히 있어 이런단 말이야. 아 나도 지금 폭도란 말에 지금 잔뜩 지금 울분한 채로 인촌이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콱 찌르니까 벌떡 인나서 여보오 소위 학무국장이란 인간이 말이야 의병을 폭도라 하데. 저게 무슨 학무 국장이라고 저 자식 내려오라고 소리를 질러버렸지.

  5. 주요한 문집-새벽Ⅰ, 요한기념사업회, 1982, 53쪽.

    송진우 씨에게는 술 마실 때 두 가지 버릇이 있었다. 거나해지면 옆 사람 어깨를 무는 버릇이 있어 술자리에서는 모두들 옆자리를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하나는 바지 앞단추를 끄르는 버릇이다. 한번은 광고주인 유일한(柳一韓) 씨와 중국인 부인 호(胡)매리 여사를 명월관에 초대했는데 이 버릇이 나왔다. 유 씨 부인이 영어로 “야만스럽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나는 급히 김성수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촌이 달려와서 송진우 씨와 교대를 했다. 김성수 씨와 송진우 씨는 번갈아가며 사장을 몇 번 지냈다. 기사로 말썽이 난다든가 하면 사장이 사표를 내고 바뀐 것이다. 김 씨는 편집에는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비 절감에는 신경을 썼다. 한번은 스팀이 너무 더워 창문을 열어 놓고 있는데 인촌이 들어왔다. 그는 열린 창문을 가리키며 “아래서는 불을 때고 위에서는 창문을 열어놓고 있으니 돈이 나간다.”며 불을 줄이라고 했다. 때로는 사장실에서 송진우 씨와 싸우는 소리도 들렸는데 대개는 돈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바지저고린 줄 아나.”하는 송진우 씨의 언성이 들려온 일도 있다. 한창 싸울 때 보면 당장 원수라도 질 것 같은데 뒤가 없었다. 그들의 인간관계와 동지적 입장은 그만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6. 변영로, 아관인촌(我觀仁村), 동아일보 1955년 2월 24일자 4면.

    풍모로나 성격으로나 고하선생과는 아무리보아도 서로 맞지를 않아 보일뿐 아니라 어느 때는 두 분 교의에 대하여 위구(염려)를 느낄 정도이었으나 끝끝내 사생휴척(死生休戚, 삶과 죽음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한 데에서도 남모르는 어느 미덕이 있었음을 나는 느끼었다。하자를 짖궂이 잡자면 성급이랄가 기촉(氣促,숨결이 빠름)한 점인데 그러면서도 그의 관인성(寬忍性) 포용성은 거의 초인적인 것이었다。

  7. 양원모의 회고, ‘비화 미군정삼년-민족진영의 결집’, 동아일보 1974년 5월 2일자 5면.

    『두 분은 가끔 대충돌을 일으켜서 그때마다 옆에서는 이제 영영 절교가 되는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마는 그 이튿날 계동사랑에 가보면 언제 왔는지 고하선생이 인촌선생과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열심히 숙의를 하는 장면을 보게 되곤 했지요』

  8. 동아일보사사 1권,1975, 235쪽.

    이상협의 퇴진이 빚은 소용돌이는 두 차례에 걸쳐 많은 사원들이 그와 행동을 함께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1차로 5월에 신구범 전무를 비롯하여 홍증식 영업국장, 김동성 조사부장, 김형원 지방부장, 민태원 정치부장, 김양수 논설반장이, 2차로는 9월에 최익진 공장장을 비롯하여 최영목 정리부장, 유광렬 사회부장, 이서구 박팔양 서승효 노수현 산고방결(山塙芳潔)등이 이탈했다. 다수가 창간 동인으로 고락을 같이 하며 동아일보의 기초를 다지는 데 심혈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

  9. 함상훈, 인상 깊은 영도자-인촌 김성수 선생, 한성일보 1946년 5월 30일자 1면.

    포옹력이 많은 것도 보통인의 이상이다. 이 점도 고(故) 고하와는 소양(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고하는 편벽되고 재벌에 아유(阿諛)하며 부하에 심복이 적다하는 평이 있으나 인촌은 관용하고 겸양하여 능히 사람을 포옹하고 있다. 일시 동아일보에서 다수한 인재가 일시 퇴진할 당시 인촌이 고하더러 덕이 없다고 공박한 사실은 유명한 일이다. 한국민주당에 들어와서도 고하 생전 이상으로 당내가 조화되고 활동적으로 된 것은 씨의 겸양과 포옹력의 덕이다.

  10. 유진오, 지도자로서의 인촌, 동아일보 1965년 2월 16일자 5면.

    인촌 선생은 공산주의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철저한 반대의견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렇다고 좌익적인 사상이나 의견을 가진 사람을 꺼리거나 미워하지는 않으셨으니, 여운형·허헌 기타의 좌익계 거물이「인촌, 인촌」하면서 선생과 가까이 왕래하던 것으로 이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11. 박학보(朴學甫), 홍명희론, 신세대 1946년 3월호, 87쪽.

    만약에 씨로 하여금 저러한 학식과 저러한 장자풍을 가지고 모략을 그곳에 가미해 가지고 있다고 하면 오늘의 정계를 거의 좌우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 홍씨는 모략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분인 것이다. 어느 때 김성수씨 일파와도 교분이 좋았고 또 김씨와 악수하여 사업도 같이 할 뻔하였으나 드디어 김씨와 멀어지고 있는 것은 역시 홍씨는 모략을 쓰지 않고 도리어 김씨를 싸고도는 일부 인사가 모략을 쓰기 때문에 드디어 김씨와는 지금은 상당히 사이가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홍씨는 모략이 없는 것이다.

  12. 동아일보사사 1권,1975, 237쪽.

    5월 16일 중역회의에서는 사직서를 낸 사원들을 유임하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권유위원에 허헌을 뽑는 등 사원들의 퇴사를 만류하는 데 노력하기도 하였다. 본보는 5월 17일자‘독자제위에게 고하노라’의 사설에서 간부 교체에도 불구하고 본사의 주지와 정신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을 것임을 다짐했다.

  13. 동인(同人) 동아일보사’와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보 동우 1964년 9월호, 2쪽, 35쪽.

    ◇제 2기 ‘舊 株式會社 東亞日報社 시대’의 ▽제 3회(27년 10월 22일부터 30년 10월 26일까지)시엔 27년 10월 22일 하오 3시, 서울 광화통 139, 동아일보사 중역실에서 제 6기 정기주주총회를 열고, 임기 만료된 취체역 및 감사역을 개선한 결과, ▽취체역…(중략)…허헌(3선~30년 10월 26일 임기만료)…(중략)…의 6인과 ▽감사역 현상윤(재선~)…(중략)…의 3인이 선출되었다.…(중략)…▽제 4회(30년 10월 26일부터 33년 10월 27일까지)시엔 30년 10월 26일 하오 3시 30분, 서울 광화통 139, 동아일보사 중역실에서 제 9기 정기주주총회를 열고, 임기 만료된 취체역을 개선한 결과, ▽취체역…(중략)…김용무(30년 10월 26일~)의 7인이 선출되었다.

  14. 허근욱(허헌의 딸) 전화 인터뷰, 2009년 7월 10일.

    아버님께서 취체역으로 계셨는데 구속됐다고 한마디 의논도 없이 취체역에서 제외시킨 것에 대해 섭섭하다고 말씀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때부터 사이가 멀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방 후 한민당에도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15. 박갑동,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화-내가 아는 박헌영 64 (중앙일보 1973년 5월 11일)  左右合作 餘話.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8권, 역사비평사, 2004.

    여기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이미 앞서도 잠시 말한 좌우합작에 관한 부분을 내가 들은 대로 보충해야겠다. 그 이유는 거부인 昌信洞 白樂承집에서의 모임을 주선했던 梁槿煥과 절친한 사이었던 孫基業씨(69ㆍ西大門區 水色洞 205의 683)로부터 그 모임의 경위를 소상히 전해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孫씨는 日帝 때 中國 北京에서 한국혁명당총연맹의 간사장을 지내다 32년 關東軍사령부에 피검되어 10년간 옥살이를 한사람으로 45년 8월 16일 奉天에서 귀국해 梁槿煥과 함께 革新探偵社란 단체를 만들어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 또는 공산주의자 색출에 앞장선 일이 있다. 孫씨에 의하면 친일파 閔元植을 암살한 梁槿煥은 꽤나 작은 키에 얼굴은 검다못해 빨간 빛이 도는 정도의 가냘픈 몸집이나 성질이 어찌나 대쪽같은지 한번 작정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해내고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다. 당시 梁은 혁신탐정사의 본부로 鍾路區 壽松洞 44 일제 때 고등경찰로 악명 높았던 鍾路署 「미와」(三輪)경부의 집을 접수해 쓰고 있으며 자신이 社頭, 孫씨를 副社頭로 정하고 그 밑에 수십 명의 청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9월 중순 좀 지나 어느날 梁과 崔謹愚ㆍ孫씨 등 3명이 모인 자리에서 정당통일문제가 화제로 나왔다고 한다. 梁은 『36년간이나 박해를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서둘러 좌우 사람들의 흉금을 터 놓도록 하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梁槿煥이 許憲과 金性洙ㆍ宋鎭禹, 孫씨가 張德秀ㆍ安在鴻ㆍ金炳魯ㆍ崔謹愚가 呂運亨과 공산당측에 대한 연락을 맡기로 했다.(중략) 許憲이 정신을 차리고 『梁군, 이 사람아. 정말 놀랐네』하자 梁이 『그렇게 놀랄 걸 자네 왜 공산당하나』고 묻자 許는 벌떡 일어서며 『내가 왜 공산당이란 말인가. 내 딸년 許貞淑은 공산주의자이나 나는 아닐쎄』라며 얼굴을 붉히더라는 것이다. 許憲은 다시 앉아 자신이 공산당과 가깝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古下 宋鎭禹와 뜻이 맞지 않아서였지 공산당과의 주의주장이 같아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한다. 당시 許憲은 일행에게 자신이 東亞日報 감사역으로 있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자 古下가 앞장서 자신의 사표를 받아냈고 趙모라는 친구가 생활이 곤궁해 古下에게 취직부탁을 하자 겨우 수위로 채용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들고 가슴깊이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6. 소식, 동아일보 1924년 11월 13일자 1면.

    ▲이강현 씨(경성방적회사 상무)) 11일야 대판에 출장 ▲김성수 씨(본사 사장) 시찰차로 11일야 도동 ▲송진우 씨(본사 고문) 동상

  17. 대판대화(大阪大火), 대판호텔 젼소, 동아일보 1924년 11월 15일자 2면.

    본사사댱 이하 무사. 손해 삼십만원. 십삼일 오후 아홉시 이십분 대판시 북구 중지도(大阪市北區中之島) 대판『호텔』 긔관실에서 불이 이러나 건물 전부가 타고 열한시 이십분에 진화되엿다는데 이『호텔』에 투숙중이든 본사 사댱 김성수(金性洙)씨와 고문 송진우(宋鎭禹)씨와 경성방적회사 상무취톄역 리강현(李康賢) 삼씨는 무사치 피란하엿다하며 원인은『뽀이』가 긔관실에 불을 과히 집혀서 가마가 터진 까닭이라는데 손해는 약 삼십만원이라더라 (대판뎐)

  18. 박석윤(朴錫胤), 도영기행(渡英紀行) 제1신(第一信), 동아일보 1925년 1월 4일자 4면.

    여장(旅裝)을 차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마음의 여행이다. 집을 떠나고 벗과 이별하야 나그내가 되는 것처럼 마음도 언제이든지 한번은 습관을 떠나고 애착과 떠러저 호을로 쓸쓸한여인(旅人)이 될 터이지…사(死)…가족의 도움을 빌어서 여장(旅裝)을 정돈하면서도 생각나는 것은 어듸로 가는지 영원히 도라옴 업는『마음의 여행』이다. 동무들의 만세소리가 나의 귀를 떠나기 전에 차의 음직임이 눈이 부시는 전등불에서 시선을 끈을려 한다. 서로 모자를 머리우에 처든 한편 손에 들고 쌍끗 웃는 묵례와 묵례!이것이 무궁한 인간기록의 포장(包藏)이 아니고 무엇인가. 용산역까지 전송하야 주신 친척들도 다 내렷다. 생후 반년이 채 못 되는 나의 딸은 나의 얼굴이 설지 아니한 탓으로 얼리면 빙글빙글 웃는다 영희야? 딸꾹?처도 영등포에서 내렷다. 별리의 애수? 삼년의 세월이란 긴 듯 하야도 역시 일찰나가 안인가 서로 행복을 비는 동안에 다시 맛날 것이오 또다시 별리가 잇슬 것이다. 물론 하등의 별다른 흥분이 잇슬 까닭이 업다. 다만 어수선 산란한 과거 수 년 동안의 생활을 회고할 때에 그『노력하려는 라타(懶惰)』를 끈어 버리지 못한 것을 추억할 때에 자연히 머리가 수그러지고 비분의 이가 갈린다. 나는 잠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침대에 깁히 웅숭쿠리고 안진 채 움직이지 아니하엿다. 마침 이길용 군이 태전까지 동차가 되엇다. 우리나라 운동계의 장래가 어떠케나 될가 서로 마주 처다보고 장탄할 뿐이엇다 그동안 몹씨 주렷든 나의 눈은 두세 권의『조일(朝日)스포쓰』의 폐지 우에서 뛰노랏다. 부산항 부두의 해풍은 살을 찌르는 듯하엿다. 연락선에는 승객이 아조 적다. 만주와 조선에서 안주(安住)의 낙원을 발견한 일본인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빌으면 여름 개천에서 실가튼 버레가 꼬불꼬불하는 것가튼 생활을 떠나서 가시밧을 지나 광야에 나온 것가튼 조선 만주의생활이 더 경제적이오 더 자유스럽다고 입만은 호어(豪語)하는 자기면허의 해국 남아들이지마는 쥐를 잡어 팔고 파리를 삽어 파라서라도 가만히 들어누어서 먹을만한 돈만 손에 잡히면 연락선이 메어지게 되며 하관(下關)의 여관이 터지게 될 것이다. 일본인은 그와가치 심한 상향병자(想鄕病者)들이다. 그와가치 심한 현실지상주의자들이다. 요좀은 동포의 일본 도항자(渡航者)가 썩 적어젓다 한다 차라리 귀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한다 목전의 엇지할 도리가 업는 궁핍에게 내몰려서 본래 철에 마처서 입지도 아니한 그 옷 입은 채 그대로 모든 모욕을 다 참고 그보다 더 현실적인 기아를 피하야 게다가 무슨 수나 잇슬 줄 알고 이역에 건너갓다가 배부르고 등더웁기도 전에 무식과 학대와 모욕만이 그들의 가진 유일한 재산인 것을 발견한 때에는 만곡(萬斛)의 비루(悲淚)를 뿌리면서 다시 도라오게 될 것이다. 대저 우리는 무엇을 어떠케하면 배고푼 것이나免하고 헐벗지나 아니할가. 차는 대판(大阪)을 지낫다. 식당에서 송진우、김성수、이강현 3씨를 맛낫다 이것은 예기치 아니한 해후이엇다. 세 분이 화재 당하엿다는 것이 각 신문에 낫드라는 말을 하닛가 우스며 그때의 이야기들을 한다. 송씨는 구두『한짝』이른 것이 소실물(燒失物)의 전부이오 이씨에 이르러서는『이왕 구경 나가는 김에 타나아 니타나 다 챙겨가지고 나오리라하고 하나씩 또박또박 다 집어 넛는데 양말『한 짝』이 업서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상해』양말 한 짝이라도 업센 것이 매우 분하고 애석하신 모양『그러치만 아무리 기대려도 나와야지!나종에는 긔가 맥혀서 발을 동동 굴럿다면 고만이지 !마루가 이리 얼키고 저리 설켜서 출입구 차저 나오기가 어렵지 안소? 우리는 그러케 아니해! 우선 나와 노코보지!』김씨는 아마 혼겁에 빈손으로 뛰어나오신 모양 송씨의 말에 의하면 일인즉 올케 되엇다 한다. 손실은 김씨가 제일 컷스닛가 김씨는 학교졸업 귀국 후 이번이 초행이라 한다 일본인의 발전에는 하품을 하신 모양이다 발전이 별 것이 아니다『함』의 집적(集積)이다 노력의 결정이다 하자 무엇이든지 하자 놀지 말고. 동경에서의 수일은 꿈 가운대서 지낫다 예산문제로 뻑저근하게 떠드는 모양이다. 철도문제라나 무엇이라나 하는데 사천육백만원이 어쩌고 어쩌고 야단법석이다. 의무교육비 증가액은도저히 지출불가능이지마는 국방을 위하야는 양성(兩省)의 요구를 다 들어주기로 한다나 어쩐다나 여하간 빈구사자(濱口獅子)군이 뒷거름질 하다가 개천에 빠저서 허부덕거리는 모양이다. 일본사람들은 병대와 군함이 일본의 전부인 줄로 생각하는데 국민에게 무지의 모욕을 주고까지라도 군함대포를 만드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랴? 밤에 동경을 떠낫다 몃사람 친구의 따뜻한 전송이 나의 잠을 평안하게 하야 주엇다 나의 동생 석기와는 특별히 굿고구든 악수를 하엿다 제가 나의 평안을 비는 이상으로 나는 저의 평안을 기도하엿다 인생의 항로는 고난이라는 것을 깁히 깨다라다오 나의 동생아!(후략) 1924년 10월 23일 정오.

  19. 김성수씨 귀경담, 신음중의 구미 열강 해외동포의 활동, 동아일보 1931년 8월 14일자 2면.

    우리 민족의 노력이 다른 민족에 비하야 손색이 잇지 안흔가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자본주의 발달은 세게적으로 팽창하야 가는 중이니 조선도 결국은 자본주의화하고야 말 운명에 잇는 이상 우리의 힘 미치는 대로 우리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것이외다.

  20. July 26, 1931, Sunday (NYT) Article 8~9면.

    In Korea no magazine nor newspaper pays expenses. So they can support no authors, and accept only free contributions. The most famous newspaper of Korea, the Dong-a-Daily, or Oriental Daily News, is supported solely by one Korean millionaire for philanthropic reasons. The millionaire is Mr. Kim Sung-soo, Who recently passed through New York on a tour through Europe and America, an alert and discriminating observer. The story is told about him that when he wished first to contribute money to the intellectual welfare of Korea, his father, a conservative, objected. Kim refused all food for three days. At the end of that time, his father felt compelled to let the son express his duty as he saw it.
    One-third or one-fourth of the Dong-a-Daily is devoted to literature. Imagine if one-third of a New York paper were devoted every day to literature. Yet one finds that this freely contributed newspaper work has real merit. The sketches, the essays, the poems are never merely journalistic. People write for the joy or the inner necessity, not quantity. A few writers who are financially independent produce a good deal. One of these is the well-known historian with the pseudonym of Six-Grass-Roofs, author of the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He has both money and brains-excellent combination.

  21. 일민 김상만 전기, 동아일보사, 2003, 76쪽.

    해방을 맞다. 8월 11일 아침, 일민은 바쁘게 계동집으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인촌은 그런 아들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며칠 전 원파농장에서 상경한 일민으로부터 하향인사를 조금 전에 받았던 차였다.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어야할 아들이 다시 들어왔으니 인촌이 의아해한 것은 당연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다고 합니다.” 아들의 말에 인촌은 크게 놀랐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고하선생님께서 일본의 항복사실을 아버님께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민이 서울역으로 가기 전 하향 인사차 원서동 고하의 집에 들렀는데, 변호사 강병순이 와 있었다. 일민을 맞은 고하는 “강병순 변호사가 총독부 고위층에서 새어나온 기밀을 알아온 것인데, 일본이 금명간 항복할 것”이라면서 “믿어도 될 만한 정보니 이 소식을 빨리 인촌에게 전하라”고 했다. 일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인촌에게 다시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여름햇살 속에서 경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흘 후인 8월 15일 정오, 일민은 원파농장에서 천황의 항복방송을 들었다.

  22. 동아일보 1974년 5월 2일자 5면.

    8월 14일「이쿠타」(生田) 경기도지사와의 회담을 마치고 송진우는 김성수에게 이렇게 말했다。『오늘 내일이 고비가 될 것 같으니 자네는 연천에 내려가 있는 것이 좋겠어』일제의 단말마적인 발악을 걱정해서였다。『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김성수가 물었다。『나야 세상이 뒤바뀌는 것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연천역 앞에 있는 최남(崔楠)의 농장에서 해방을 맞은 김성수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정치는 고하와 동지들에게 맡기고 나는 학교를 하겠으니 당신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23. 이상돈 전 국회의원,  ‘광복(光復) 주역(主役)-8.15 전후 고하 송진우’, 신동아 1977년 8월호, 126쪽.

    해외에서 돌아온 임정파에서까지도 고하를 질시하고 중상하는 것은 참으로 의외의 사태로, 임정 절대 지지를 위해서 분골쇄신하며 공산당과 투쟁한 고하로서는 정치무상과 냉혹한 현실을 개탄치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기야 해외파가 국내에 돌아와서 고하의 탁월한 식견과 그의 폭넓은 정략가로서의 역량과, 그리고 강대한 정치적 기반 등을 종합해볼 때 미구에 전개될 정권쟁취에 가장 무시 못 할 적수라고 보았을 것만은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하의 기개는 북악(北岳)과 한강수를 삼킬 큰 야망과 불타는 의욕을 갖추었다. 격동하는 정세를 예의 응시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정치적 기반을 정지(整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기의 영도 하에 있는 한국민주당의 지방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초대집권자로 공인된 이승만 측근에 고하 자기사람을 배치하고 미군정요직에 한국민주당 간부를 추천하는 등 빈틈없는 정치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판국에 고하에 대한 정적도 많고 고하에 대한 질시와 중상모략도 심하였다. 거목일수록 강풍에 닿는 면이 많은 것과 같이 정치적 거인일수록 정적의 중상과 모해가 큰 것이다. 고하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24.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10월 05일, 각 정당지도자들, 각 정당단체 단결과 신정권수립에 관해 간담.

    5日 오전부터 시내의 모처에서 각당수령들이 모여 무릎을 같이하고 간담을 하였다는 보도가 한 번 전하여지자 3천만 민중의 이에 기대하는 소리는 아연 높아 그 성과의 크기를 진심으로 염원하여 마지않은 터이다. 즉 이날 오전 10시부터 呂運亨 宋鎭禹 安在鴻 白寬洙 許憲 趙東祐 金炳魯 張德秀 崔容達 李鉉相 崔謹愚 金炯善 梁槿煥 제씨가 시내 昌信洞 某의 집에 모여 1) 각 정치단체의 대동단결에 관한 건 2) 초정당적 자주독립촉진기관의 설립에 관한 건 등 두 가지 의안을 중심으로 간담회가 열리었던 것이다. 회담은 梁槿煥의 사회아래 온화한 공기 속에 진행되어 오전 중을 보내고 일동 점심을 같이 한 후 오후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각 수령들의 가슴속에 끓는 조국애의 정열과 현하 우리가 당면한 오늘이란 이 순간을 생각하여 볼 때는 우국지성은 차츰차츰 막히었던 장벽을 무너뜨리고 풀기 어려웠던 매듭을 풀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제1안에 대하여는 의견이 거의 일치를 보아 새 조선건설의 굳센 맹약을 하고 제2안으로 들어가서는 논란이 장시간 계속되었으나 제1안을 근본적으로 승인하는 이상 앞으로 더욱 신중히 구체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오후 4시 반경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 날의 성과는 그 간담내용의 결과여하 그것보다도 이들 수령이 조선이 해방된 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회동하고 장시간에 걸쳐 기탄없는 의견과 포부를 토로하여 교환을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이 날의 전반적 공기로 보아 결국은 각 당의 총역량을 결집한 통일전선이 구성될 가망이 충분히 엿보였다는 것도 큰 수확으로서 인정되는 바이다. 이 날의 간담회에는 각당 수령이 모두 개인의 자격으로써 참석했지만 불원간에 다시금 각 단체대표의 자격으로써 중요한 회합을 재개할 것도 약속되었다. 그런데 이 날 朴憲永과 李英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신병으로 참석치 못하였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25.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10월 05일, 각 정당지도자들 간담회에 대한 한민당의 반박.

    6日 시내 모처에서 각당 수뇌들이 一堂에 회합하여 당면한 제문제에 대하여 평의한 사실에 대하여 韓國民主黨總務 白寬洙는 다음과 같은 담화로써 각당 대표가 모인 것도 아니고 의견이 접근된 것도 아니란 뜻을 언명하였다. “지난 5日 梁槿煥이 와서 呂運亨 許憲도 인민공화국을 조직발표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당면한 시국문제를 평론함이 어떠냐기에 본인들이 그것을 깨닫고 근신하고 있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여 재삼 거절하였으나 단 5분간이라도 만나 말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므로 梁氏와는 舊交가 있고 친하므로 갔더니 의외에 각당대표로 간 일이 없고 또 화제도 인민공화국 인정문제에 대해서도 호상격론이 있어 결렬되었으며 자못 중대한 시국문제에 한해서만 朝鮮共産黨, 國民黨, 韓國民主黨 등 가히 상대할 수 있는 정당끼리 대표를 보내어 상의하기로 되었습니다. 같이 각당대표가 모여 어떤 의견의 일치를 본 듯이 보도된 것은 불쾌합니다. 제위의 오해 말기를 바랍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26. 박갑동,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화-내가 아는 박헌영 65 (중앙일보 1973년 5월 12일) 혁신탐정사 팀.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8권, 역사비평사, 2004.

    革新探偵社의 梁槿煥과 孫基業씨 일행이 좌우합작의 취지를 설명하자 許憲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나로서는 쌍수로 환영하오, 어서 모이도록 합시다. 내 다른 데 가지않고 이곳에서 기다릴 터이니 꼭 연락해주시오』라고 거듭 당부까지 했었다. 일행이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許憲이 『孫선생, 잠깐 봅시다』며 孫씨 한사람을 구석으로 끌고가 『11월 20일은 내가 죽는 날이요. 나는 그날 목이 달아나도 人共해체 선언을 하겠소』라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다. 孫씨로서는 11월 20일 人共의 대표자회의가 있다는 것도 큰 「뉴스」였으나 그날 許憲이 人共불법선언을 하리란 것도 적지않은 놀라움이었다고 한다. 孫씨는 11월 20일 대회장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許憲이 자기와의 약속대로 개회초에 그 같은 선언을 하는 바람에 李康國이 당황해 휴회를 선언했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27.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11월 22일,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 개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를 700여 대표자가 출석하여 20일을 제1일로 하여 22일까지 3일에 亘하여 서울시 慶雲町 천도교대강당에서 소집 개최하게 되었다. 대회 제1일은 오후1시부터 개회되었는데 정각 전부터 각지에서 참집한 대표들은 속속 회장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각 1시간 전부터 각도별로 대표들은 소정의 좌석에 입장 착석하였다.(略) 李康國 사회 하에 오후 2시에 개회되자 별항과 같이 중앙인민위원회 회장 許憲의 개회사가 있었는데 개회사 중에서 특히 군정에 대하여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조한 것은 주목을 끌었다. “우방 미국은 국가보다도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는 국가이다. 그들이 인적 물적의 다대한 損耗를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용전한 것은 오로지 인류가 갈망하는 평화와 諸 민족의 평등 자유 해방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군정도 정치하는 나라일을 우리는 잘 모르고 군정당국은 반드시 현하 우리 조선민중 대다수의 요망을 알고 가까운 장래의 우리 민중총의가 환영할 정권수립에 협력, 그 근본목적이 우리 조선 3천만의 행복을 세워주기 위해서임에 틀림없는 것이며 그들은 여론을 존중할 그에 의해서 민중의 의사를 쫓아서 해 줄 것이다. 여러분도 각각 자기지방에서 현지의 군정과 적극협력해 주기 바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인민공화국이 가까운 장래에 정권을 받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날 군정장관 아놀드소장은 오후 2시40분 단상에 특설한 귀빈석에 나타났다. 전 장내는 열렬한 박수로 군정장관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장관은 대략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전국 대표위원들에게 군정에 협조하기를 요망하고 그러함으로써 앞으로 수개월동안에 조선의 완전독립에의 큰 길이 열리게 되리라는 말을 하여 주의를 끌었다. 즉 군정은 특수한 어떤 정당이나 단체를 치우쳐 지지하지 않는다. 군정과 협력하여 조선건국에 노력하면 누구나 이를 환영한다. 군정청은 지금에 있어서 조선에 있는 유일한 정부인데 이것은 일본이 항복한 후 조선의 완전독립이 성립되기까지에 과도적 다리(橋)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앞으로 수개월간은 조선에 대하여 대단히 주의를 요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연합국은 모두 조선의 동향을 주목하고 있다. 조선은 완전독립하기 위하여 건전한 정치경제의 기초위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에는 외국의 세력을 바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만약 장래 수개월간에 혼돈 유혈들의 불상사가 生하게 되면 연합국은 기술 또는 물질적으로 원조하기를 즐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조선의 3천만 동포는 하루바삐 통일하여 그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하겠다. 그럼에도 시급히 군정에 협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에는 공장에선 생산을 농촌에서는 곡식을 내어놓고 국민들은 세금을 바치도록 힘쓰기 바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28. 박갑동,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화-내가 아는 박헌영 65 (중앙일보 1973년 5월 12일) 혁신탐정사 팀.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8권, 역사비평사, 2004.

    그 당시 許憲의 참석문제는 이럭저럭 해결됐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공산당측에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즉 회의 당일인 10월 5일 새벽 金性洙와 宋鎭禹 둘 중에 한 사람이 참석하지 않으면 회의를 「보이코트」하겠다고 연락해왔다. 그것도 회의예정시간 한 시간을 앞둔 8시에. 梁槿煥은 즉시 孫씨와 같이 桂洞의 仁村집을 찾았다. 마침 仁村은 아침밥상을 받고 있었는데 밥과 된장국ㆍ짠지 한접시뿐이어서 梁槿煥이 한동안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자리를 정하자 梁은 대뜸 『仁村, 자네 오늘 내 말 안들으면 알지-』하며 왼쪽 가슴 속에 품고있던 권총 한자루를 仁村의 무릎 앞에 놓았다. 『하하-내가 자네 손에 죽으면 그 이상 영광이 어디 있나―』 仁村이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넘기자 梁은 급히 찾아온 취지를 말했다. 그러자 仁村은 『정치는 古下와 雪山(張德秀)이 하고 있으니 그들이 가면 되지않나』며 자신은 그날 普專졸업식이 있어 참석할 수 없다고 밝혔다. 仁村의 주선으로 東亞日報社 2층에서 古下를 만났으나 그의 고집은 대단했다고 한다. 梁槿煥이 늘 갖고 다니는 가죽채찍을 휘두르며 회의 참석을 종용했으나 古下는 『공산당하고는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다』고 뜻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古下가 불참할 뜻을 고집하자 孫씨가 꾀를 냈다고 한다. 孫씨는 古下에 다가가 귀엣말로 『古下선생님, 지금 공산당이 人共 만든 것을 사과하겠다 합니다』하자 古下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孫씨는 이때다 싶어 거듭 『어서 결단을 내리십시오』하자 古下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5분 동안만 가 있겠어―』라고 해 孫씨는 『5분도 필요없습니다. 3분이면 족합니다』고 서둘렀다 한다.

  29. 박갑동,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화-내가 아는 박헌영 65 (중앙일보 1973년 5월 12일) 혁신탐정사 팀.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8권, 역사비평사, 2004.

    여기서 한가지 밝혀둬야 될 것은 첫날 하오 회의 때 古下는 『우리나라가 건국초기이므로 앞으로 2년간 訓政期를 두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古下의 「訓政期운운」문제는 그가 암살될 때까지 정적들의 공격자료가 됐었는데 孫基業씨 증언에 따르면 그날 하오 古下는 『우리나라가 건국 초기이므로 앞으로 2년간 訓政期를 두어서 우수한 청년들을 해외에 보내 그곳 제도를 배워오도록 하자』는 제의를 했다는 것이다. 孫씨에 따르면 공산당은 古下의 이말을 물고 늘어져 이튿날 和信백화점 건물에 꽤나 큰 비난 벽보를 붙이고 『古下가 우리의 자주독립을 부인했다』는 선전을 했다는 것이다.

  30. 함상훈, 인상 깊은 영도자-인촌 김성수 선생, 한성일보 1946년 5월 30일자 1면.

    씨가 성격에 불합(不合)한 것을 자인하면서 일부에 물의가 있음을 불구하고 출마한 것은 무슨 때문인가. 그것은 씨의 가장 신뢰하고 경애하는 친우 고(故) 고하 송진우 씨의 불의의 참변으로 당내가 동요되고 따라 민족진영에 일대 타격이 올 것을 생각하고 고 고하의 뜻을 잇고 당을 구제하겠다는 성의에서 추대를 받아 취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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