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 송진우가 국민대회준비회 구성을 통해 우익세력 결집에 나서는 동안 인촌 김성수는 뒤에서 돕고 있었다. 국민대회준비회 김준연 부위원장은 동아일보 복간 다음날 ‘국민대회의 발단’이란 기고문에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오다가 8월 30일에 와서야 미군이 9월 7일에 경성에 들어온단 말을 듣고 급속히 이 계획을 진행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 다음은 송진우 사후 20년 뒤 출간된 전기 2의 일부.
이번에는 고하(송진우) 스스로가 나서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유림의 대표적 지도자 김창숙을 그의 여사로 방문하여 고문으로 추대하고, 병원에 입원 중인 좌파의 홍명희와 공산주의자 김철수 등도 찾아 협력을 요청했다.(이때 홍명희와 김철수는 거절했다)
송진우는 국민대회의 주지로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명백히 표시하자는 것을 내세웠다. 온건 좌파까지 아우르는 조직으로 만들려는 송진우의 계획은 당장 차질을 빚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민족진영의 구심점이 될 단체가 탄생됐다.
1945년 9월 7일 광화문 동아일보사 3층 강당에서 열린 결성식 3에서 참석자들은 “강토는 잃었다 하더라도 3천만중의 심두(心頭)에 응집된 국혼(國魂)의 표상은 경술 국변 이래로 망명지사의 기백(氣魄)과 함께 해외에 엄존하였던 바이니…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대표는 기미독립 이후로 구현된 대한임시정부가 최고요 또 유일의 존재일 것”이라며 “파당과 색별(色別)을 초월하여서 이를 환영하고 이를 지지하고 이에 귀일함이 현하의 내외정세에 타당한 대의명분”이라고 천명했다. 4 송진우는 위원장을, 김성수는 상임위원을 맡았다.
사실 당시 서울시내에 뿌려진 전단 5으로 보면 김성수가 같은 취지로 송진우보다 먼저 움직인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전단은 “조병옥, 김성수 등 유지는 종로 청년회관에서 임시정부와 및 연합군을 환영하는 환영준비회를 조직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이인이 중심이 된 ‘중경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6였다. 전단에 김성수는 허헌 이인과 함께 부위원장에 올라있다. 송진우는 위원으로 돼 있다. 10월 20일 열린 연합군 환영회에서 이인은 개회사, 조병옥은 환영사를 맡았다.
이 단체는 미군정이 중경 임시정부를 정부자격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입국시킨다는 방침을 정하자 ‘임시정부영수환국 전국환영회’로 이름을 바꾼다. 7 여기서 김성수는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여운형 조만식 홍명희 안재홍 정인보 송진우 허헌 방응모 이극로와 함께 영접부 위원이 된다. 8 12월 1일 열린 임시정부봉영회에서 이인은 봉영문을 낭독했다. 이어 중경 임시정부 영수들이 모두 입국한 뒤 연합국에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개최된 대한국민 총회에 김성수는 40여 발기인 중 한명으로 참여했다. 9
역시 김성수가 자신의 소임으로 삼은 것은 교육활동이었다. 김성수는 미군정에서 9월 29일자로 학무국 교육위원으로 위촉됐다. 10 새 나라에서 교육문제처럼 중대하고 시급한 것이 없다는 것이 김성수의 생각이었다. 11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고등교육위원이었다. 12
학무국에는 보성전문(보전) 교수를 지낸 오천석이 있었다. 13 오천석 14은 15년 전 미국 뉴욕 유학 중 김성수가 해외문물을 시찰하러 들렀을 때 대학들을 안내해 준 인연으로 보전 교수가 됐다. 15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초등 6년, 중학 3년, 고교 3년, 대학 4년으로 한 6334학제는 이 조선교육심의회 16에서 결정됐다. 오천석이 “일제 때처럼 중등과정을 5년으로 묶는다면 시골에서는 부담이 크고 도중 탈락이 많다. 중학 3년에서 끝낼 학생에게도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성수가 “새로운 교육제도가 필요하다”고 찬성하면서 논의를 종합한 결과였다. 17
김성수의 꿈은 뭐니뭐니해도 보전을 발전시켜 대학으로 만드는데 있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자 ‘소식란’ 18에는 보전의 인사(人事)를 전하면서 ‘다음 봄에 대학으로 승격할 계획 중’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당하기 며칠 전이었다.
미군정초기 조선교육심의회 시절을 회고하는 오천석의 칼럼 동아일보 1976년 3월 25일자
<인 물 정 보>
송진우 (宋鎭禹): 1890~1945, (전)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 (金性洙): 1891~1955, 동아일보·고려대·경성방직 설립자
김준연 (金俊淵): 1895~1971, 동아일보 주필, 제1·3·4·5·6대 국회의원
김창숙 (金昌淑) : 1879~1962, 독립운동가, (전) 성균관대학장
오천석 (吳天錫): 1901~1987, 미국 군정청 문교부 차장 부장(전) 문교부 장관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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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국민대회준비회부위원장, 국민대회의 발단, 동아일보 1945년 12월 2일자 4면
그리고 일방에는 송씨를 중심으로 하야 국민대회를 준비하게 되엇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오다가 8월 30일에 와서야 미군이 9월 7일에 경성에 들어온단 말을 듯고 급속히 이 계획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국민대회의 주지는 중경(重慶)에 잇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명백히 표시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야 9월 7일에 지방유지의 다수 참석하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결의하고 전국적 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기 위하야 준비회를 설립하고 그를 준비하며 집행위원을 선거하야 당면의 제 문제를 처리케 한 것이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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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 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 출판국, 1965년, 313~314쪽
고하는 곧 국민대회 발기인 선정에 분망했다. 국민대회 준비회 구성은 여기에 모일 수있는 민족진영뿐만 아니라, 진보적 진영의 대표적 인물도 총망라하기로 했다. 우선 3·1운동 이후 꾸준히 고난을 참고 지조를 지켜온 권동진, 오세창, 두 분을 준비회 고문으로 추대하여 승낙을 얻고는 여러 지방에 흩어져 있는 지도층 인사를 서울로 불러 들이기로 했다. 평양의 조만식에게는 안동원을 파견키로 하고, 대구의 서상일에게는 서상국을 파견하고, 충남 논산에 소개하고 있는 정인보에게는 김상만을 보냈다. 이번에는 고하 스스로가 나서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유림의 대표적 지도자 김창숙을 그의 여사로 방문하여 고문으로 추대하고, 병원에 입원 중인 좌파의 홍명희와 공산주의자 김철수 등도 찾아 협력을 요청했다.(이때 홍명희와 김철수는 거절했다)
국내의 준비위원이 구성된 뒤, 고하는 해외에서 아직 환국하지 못하고 있는 선배나 동지 중 이승만, 김구, 이시영, 김규식 등 대표적 지도자들이 귀국하는대로 교섭하여 찬동을 얻는 방침까지도 세웠다.
이러한 고하의 구상과 실천방법에 일부 민족주의 진영의 몇몇은 의견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의심을 품는 태도를 취하는 인사도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고하는 점차적인 포섭 방침을 세우고 연합군이 서울에 진주한 다음날인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심했다.국민대회준비회는 임원 선출 결과, 위원장에 고하, 부위원장에 서상일(발기인총회때의 의장), 고문에 권동진 · 오세창 · 김창숙, 각부서 책임자에 김준연 · 장택상 · 김동원 · 윤치영 · 안동원 · 송필만 · 최윤동 · 이정래 · 이순탁 · 고재욱 · 설의식 · 강병순 등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고하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가 망라되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국민대회가 소집될 때까지의 실행 책임자로는 고하를 비롯하여 서상일 · 김준연 · 장택상 · 윤치영 · 김창숙 · 최윤동 · 백상규(이때 몽양의「건준」에서 전향하여「국민대회」에 참가) 등을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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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대한민국사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목 우익진영, 임시정부 지지를 표명하며 국민대회준비회 개최
게재지명 매일신보
게재일자 1945년 09월 08일
날짜 1945년 09월 07일(略) 15일 이래 경성에 모여든 전국 각지의 각층 각계 유지 3백여 명은 7일 오후 세시부터 광화문통 전 동아일보사 강당에 집합하고 3천만의 총의를 한데 모을 국민대회를 소집할 준비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준비회는 金俊淵으로부터 국민대회에 관한 취지를 설명하는 개회사가 있었고 의장에 대구로부터 올라온 徐相日을 추대하였다. 宋鎭禹로부터 준비회 개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가 있고 곧 결의 사항으로 들어가1) 在外 大韓民國臨時政府 지지에 관한 건을 상정하여 전원 총기립으로 찬동의 결의를 표명하고
2) 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에 관한 건을 상정 협의한 결과 宋鎭禹 張澤相 尹致暎 金昌淑 崔潤東 白象圭 6씨를 선출하여 일임하기로 되었다.
3) 당면의 제문제에 관한 건과 국민대회 소집에 대한 준비는 전국 각지 각층을 총망라한 백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하여 일임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3천만 민중의 총의와 총역량을 집결할 국민대회소집과 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는 착착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委員長:宋鎭禹
副委員長:徐相日 元世勳
常任委員(無順):金性洙 金俊淵 金炳魯 金智煥 金東元 金秉奎 金勝文 李仁 白寬洙 張澤相 尹致暎 安東源 林正燁 姜炳順 韓南洙 宋必滿 朱基鎔 高羲東 梁源模 白南敎 李順鐸 金良瑕 李慶熙 崔允東 徐相國 高在旭 高光表 曹正煥 姜仁澤 張德秀 張龍瑞 姜樂遠 金時中 趙軫九 閔重植 李熙晟 林炳哲 吳基水 李容漢 李昇泰 梁會英 陳奉燮 沈川 金東煥 郭福山 蔡廷根 羅承圭 金晋燮 金□根 李允植 金三奎 -
자료대한민국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목 국민대회준비회 취지서
게재지명 한국일보
게재일자 1955년 08월 20일
날짜 1945년 09월 07일천하의 公道와 인류의 정의는 마침내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회를 약속하였으니 망국의 한을 품은채 인종과 굴욕의 악몽에 시달리던 우리에게 광명의 새 날을 위하여 진군하라는 巨鍾은 드디어 울렸다. 필경 울리고야 말았다. 懊悶과 怨淚로 점철된 과거를 회고할 때 혹은 철창에서 혹은 역외에서 동지의 의혈은 얼마나 흘렸으며 선배의 고투는 얼마나 쌓였던가? 우리에게 이 날이 있음은 진실로 苦節 36年 동안 누적한 희생의 소산이며 전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싸우던 우방의 후의로 인함이니 우리는 이 날을 위하여 이 날을 同慶치 못할 우리 在天의 英靈을 추도치 않을 수 없으며 연합제국의 의거에 대하여 滿腔의 사의를 표명치 않을 수 없다.
鬱寂하고 壓縮되었던 潛力이 순간에 폭발되고 一時에 反撥하는지라 충천하는 의기 저절로 常道와 正軌를 벗어나게 됨은 이 또한 자연이니 勢固當然타 할 것이나 그러나 광복의 대업은 요원하고도 錯綜한지라 그러므로 더욱이 先後 緩急의 질서는 절대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며 대의명분의 기치는 선명하여야 할 것이다.
강토는 잃었다 하더라도 3千萬衆의 心頭에 凝集된 國魂의 표상은 庚戌國變 이래로 망명지사의 氣魄과 함께 해외에 엄존하였던 바이니 오늘날 일본의 정권이 퇴각되는 이 순간에 있어서 이에 代立될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대표는 기미독립 이후로 구현된 大韓臨時政府가 최고요 또 유일의 존재일 것이다. 派黨과 色別을 초월하여서 이를 환영하고 이를 지지하고 이에 歸一함이 현하의 내외정세에 타당한 대의명분이니 舊政의 잔재가 상존한 昨今에 있어서 우리 전국민의 당면한 관심사는 우선국민의 총의로서 우리 在重慶 大韓臨時政府의 지지를 선서할 것.
국민의 총의로서 연합 각국에 謝意를 표명할 것.
국민의 총의로서 民政收拾의 방도를 강구할 것.등이다. 政體 政黨의 시비론도 이후의 일이며 政綱政策의 可否論도 이후의 일이니 이리하여야 비로소 우리 大業의 巨步는 정정당당할 것이다.
이에 僭越하나마 同憂의 責을 자부하는 발기인 일동은 연합군의 正式來駐와 日軍의 무장해제를 당하여 국민총의의 所存을 성명할 필요를 느끼며 아울러 總意集結의 방법으로서 국민대회의 發會를 준비하는 바이니 현하의 실정은 만사가 임시적 편법이라 명실이 상부할 최선의 방법이 있을 수 없거니와 우리의 의도와 우리의 염원은 차선 삼선일지라도 철두철미 대의명분의 지표를 고수하고 이를 구명코자 함에 있다.
만천하의 동포여. 국가재건의 제1보를 위하여 국민총의의 기치하에 3천만 민중의 心魂을 凝結하라. 그리하여 현재와 미래 영겁에 우리의 행복과 번영을 기하라.
檀紀4278年 9月 7日 -
자료대한민국사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목 임정 및 연합군환영준비회 조직
게재지명 전단
게재일자 1945년 09월 04일
날짜 1945년 09월 04일(略) 趙炳玉, 金性洙 등 유지는 종로 청년회관에서 임시정부와 및 연합군을 환영하는 환영준비회를 조직하고 환영절차 등 환영에 대한 일체의 준비를 급히 하고 있다. 위원장은 다음과 같으며 동회에서 일반위원의 긴밀한 연락을 바라고 있다.(略)
臨時政府 及 聯合軍歡迎準備會, 同會의 취지를 전단으로 발표하다.
臨時政府 及 聯合軍歡迎準備會 취지우리가 기다리고 바라던 날은 왔다. 굴욕과 압박에서 해방의 첫 걸음을 걷게 된 우리의 감격과 환희는 표현할 말이 없다.
이제 멀지 않아 우리 임시정부와 연합군은 민족해방의 귀한 선물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날을 맞기 위하여 30有餘 星霜을 갖은 고난을 겪으며 악전고투하다가 마침내 큰 뜻을 이루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우리의 선배들을 충심으로 환영하고 성의껏 위로하는 것은 우리의 순정의 발로이며 在內同胞로서의 떳떳한 의무이다.
연합군은 막대한 희생으로 얻은 승리의 기쁨과 혜택을 홀로 취하지 않고 우리에게도 노나 주려는 민족해방의 은인이다. 우리가 이들에게 충심으로 감사하고 마음껏 환영하는 것은 人情이며 예의며 도리이다.
우리는 정치적 견해와 외교적 관계를 초월해서 다 같이 우선 마음껏 환영하고 위로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乙酉 8月 日
京城鍾路中央基督敎靑年會館內
(半島호텔에서 25日 移來함)
臨時政府 及 聯合軍歡迎準備會
委員長:權東鎭
副委員長:金性洙 許憲 李仁
委員:權東鎭 元世勳 李克魯 李活(明倫町) 任永信 吳世昌 金良洙 洪命憙 黃信德 裵正國 趙炳玉 鄭喜燦 許憲 丁七星 高炳南 李仁 韓基駿 具滋玉 尹潽善 林誠鎬 金若水 宋鎭禹 兪億兼 金觀植 李義植 朴瓚熙 白寬洙 金武森 李甲秀 元益燮 李源赫 金俊淵 林有揀 安東源 兪珏卿 趙憲泳 卞熙瑢 尹吉鉉 梁源模 白象圭 玄相允 崔奎東 金山 高秉幹 金鳴善 金度演 咸尙勳 金性洙 金明信 金炳魯
實行委員
事務長:趙炳玉
事務次長:具滋玉 趙憲泳
總務部:李源赫 咸尙勳 金若水 朴瓚熙 金良洙 玄相允 金山
接待部:張子一 白象圭 金俊淵 尹潽善 崔珽宇 崔允東 李陽春 金一煥 李漢相 李泓 高永煥
會計部:尹潽善 尹吉鉉 李乙漢 趙孝源 趙圭英
設備部:林誠鎬 李秉斗 李東烈 金秉龍 李載勳 張守憲 金翊煥 柳基元 張錫天 權五典 宋雲 李昇浩 金鳳奎 金昌善 朴世煥 李應河 丁七星 洪燦 姜遂昌 李熙春 裵正國 李光 金科益 文啓玉 金員恒 朴慶浩 咸和鎭 禹甲麟 玄濟明 尹昌錫
宣傳部:咸尙勳 金武森 黃信德 徐容吉 河祥鏞 李錫圭 鄭雲永 張連松 李鍾模 趙億濟 朴明煥 李相敦 李載明 李東培 李炳逸 安夕影 錢鎭漢 朴基采 曺亨珍
情報部:朴儀陽 卞熙瑢 林有棟 趙俊泳 李東濟 金用茂 李源喆 申泰翊 高炳南 金佑枰 鄭秀文
警護部:姜秉遠 金武森 徐相天 李景錫 卞天壽 鄭仁朝 曺東煥 吳鳳煥 鄭寅昌 權寧萬 孫基葉 沈相福 曺順同 方榮斗 李仁德
交運部:鄭喜燦 吳弼泳 白昌燮 姜應龍 朴濟道(傳單) -
송남헌, 해방 3년사 1 1945~1948, 까치, 1985년,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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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대한민국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목 임시정부영수환국전국환영회가 결성
게재지명 중앙신문
게재일자 1945년 11월 10일
날짜 1945년 11월 09일임시정부의 여러분이 고국의 땅을 밟게 된 이때에 우리 3천만 동포가 다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 분들을 기꺼히 맞이하자고 일전에 유지 제씨가 회합하여 의논한 결과 臨時政府領袖還國全國歡迎會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전조선 각계 각층을 망라하여 모든 당파심과 사심을 떠나서 돌아오는 여러분을 전국적으로 환영하게 되었다.
환영방법에 대하여는 임시정부를 공식으로 맞아 들이느냐 혹은 이승만 귀국할 때와 같이 비공식으로 하느냐 하는 근본문제에 대하여 군정당국과 절충 중임으로 국제적으로는 결정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가 환국하는 날을 기하여 전국이 가가호호에 국기를 게양함은 물론이요 일반시민은 연도에 열을 지어 환영하고 서울시내 요처에 화려한 환영장식을 하는 외에 특히 우리 조선사람이 조종하는 비행기로 도중까지 출영하여 축하비행을 하는 등 다채한 환영 프로그램의 편성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자세한 환영내용에 대하여는 서울 종로1정목 34번지 동 환영회사무소로 문의하기 바라며 환영회 위원은 다음과 같다.
委員長:金錫璜
迎接部:吳世昌 權東鎭 金昌淑 李鍾台 呂運亨 曺晩植 洪命熹 安在鴻 洪南杓 鄭寅普(以下略)
警護部:姜樂遠 李箕煥 李敏桓 崔昌漢 李燐煥 趙寬植 李容俊 梁点洙 金根燦 朴斗萬 金從會 柳鍾山 金貴賢 金一男 李鍾益(以下略)
交涉部:趙炳玉 李容卨 金麗植 金春基 河敬德 尹致暎 卞榮泰 李肯鍾 李東濟 李勳求(以下略)
庶務部:鄭安立 李敦化 白寬洙 明濟世 李奎甲 李甲成 徐世忠 金俊淵 趙寅燮 李重宰(以下略)
報道部:金濟榮 (新朝鮮) 李鳳九 (國際) 李貞淳 (自由) 吳決日 (中央) 金東成 (國際) 金舜泳 (中央) 愼鉉重 (朝鮮) 朴致祐 (解放)
財務部:元世勳 元翊燮 鄭仁果 權寧禹 鄭元和 朴斗秉 羅相謹 鄭東鎭 張晦根 趙善用(以下略)
連絡部:朴容羲 許政 李源赫 金雄權 張志暎 朴儀陽 洪起文 朱泰國 金武林 黃炳喚(以下略)
情報部:閔大鎬 金起田 李寬求 咸尙勳 李凉朝 李泰俊 尹行重 申南澈 孫公洙 金光洙(以下略) -
‘각계 인사 총망라, 임시정부 요인의 환영 준비 완료’, 자유신문 1945년 11월 9일자 1면
위원장: 김석황
영접부: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이종태 여운형 조만식 홍명희 안재홍 홍남표 정인보, 김홍량,송진우, 허헌, 방응모, 박승직, 최형호, 이영, 연병호, 이규채, 김병선, 김성수, 김항규, 김용준, 홍증식, 조동식, 이규봉, 조용국, 최익한, 이승복, 유석현, 백남운, 윤일중, 이극로, 임화, 이헌구, 김법린, 김병로, 윤일선, 최동, 장면, 김찬영, 전형필, 김준연, 김순흥, 심호섭, 이의식, 남상철, 허강, 김진우, 김도태
경호부: 강낙원 외 41명
교섭부: 조병옥 외 16명
서무부: 정안립 외 101명
보도부: 각 신문 급 통신사
재무부: 원세훈 외 26명
연락부: 박용희 외 66명
정보부: 민대호 외 34명 -
‘대한국민 총회발기, 급속한 독립을 우방에 주장’, 동아일보 1945년 12월 8일자 1면
독립촉성은 각층에서 고조되며 특히 38도계선 급(及) 경제문제 등 국내 정세는 최근 아연 긴장되어감에 감하야 권동진 오세창 씨 외 사십여 인사의 발기로 내 9일 오후 2시 시내 휘문중학 강당에서 대한국민총회를 개최하기로 되엿는데 취지서와 발기인은 다음과 갓다
◇취지서=국가민족의 융체(隆替)를·제회(際會)하야 오배(吾輩)는 책임의 중대함을 감(感)하는 바이다. 우리 삼천만 민족은 세계적 대국민이며 사천년 문화를 가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리하야 우방 제국의 원조와 순국선열의 공덕이 아(我) 대한민족의 해방적 결정체가 된 것이다. 이에 우리 국민은 특히 우방의 호의에 만강의 열의를 표한다. 반세기적 장구한 시일에 노예적 생활에 신음하던 우리 동포는 1일이 3추(秋)와 가치 정치적 자결과 국제적 독립을 희구 열망하는 바이나 이는 억제할 수 업는 민족적 주장이며、정의감의 발로이다 자에 오배(吾輩)는 우방 연합국에 대하야 급속히 국가적 독립을 주장하기 위하야 대회를 소집하는 바다.
발기인(무순) 권동진、오세창、최규동、김성수、이극로、고희동、방응모、정인보、고창일、장도빈、김법린、구자옥、김준연、신 알베트、변영태、송필만、장면、박충식、이헌구、이병규、김도태、김활란、유억겸、조동식、서봉훈、정구충、심호섭、이순탁、홍순필、강세형、나승규、백남운、조윤제、이종태、최남、최두선、이갑수、안재홍, 김관식、김상필、이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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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김성수전, 인촌기념회, 1976년, 479쪽
인촌이 미군정에 관계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고 9월29일자로, 그는 유억겸 현상윤 백낙준 최현배 조동식 김활란 등과 함께 미군정 학무국 교육위원을 위촉받은바 있었다. 그는 교육위원이 되는 것은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으나 군정장관의 고문이 되어 달라는 교섭을 받았을 때에는 처음에 이를 고사하였다. 정치의 와중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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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씨 담, 희생적 정신을 가진 우수교육자 대망(待望),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자 1면
내가 무슨 학무국 일을 본다고 하는 일이 아니라 교육문제처럼 중대하고 시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교육 중에도 초등교육이 제일 급한 문제며 왜 그러냐하면 순진한 아희들의 자라나는 싹을 일본교육이 그만 모조리 분질러 버린 모양이 되었다. 아희들이 제 나라 말로 제 이름조차 모를 지경이니 이러한 비극이 세계에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교원이 부족하여 큰 걱정으로 지낸다. 내가 귀보를 통하여 절실히 바라는 바는 부디 희생적인 정신을 가진 초등학교 선생들이 하루바삐 나와서 건국 당초에 이 거룩한 일에 종사하여 주기 바란다. 그리고 중등 전문 대학 등의 학교제도는 당분간 그 전 방침을 눌러쓸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이 점에 대하여 특히 국민의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우선 공부를 시키는 것이 선결문제임으로 차차로 고칠 작정이다. 제도라든가 하는 형식문제는 제2로 밀고 우선 배우는 사람의 머리에 우리나라의 정신을 집어넣어주는 것이 교육을 통하여 가장 긴절한 문제라고 하겠다. 또 일본인 교원 뒷자리에 우리나라 사람을 가지고 전부를 채우려니까 여간 사람이 부족한 것이 아닌데 이에따라 사립학교 교원들이 모두 공립학교로 가는 경향이 있어서 사립학교에 큰 공황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하여 즉 공사립학교라는 관념을 떠나서 어디서든지 충실한 교육만 되면 좋을 줄 안다. 다음에 전문학교에 있어서 조선학생은 법문학계에 많이 치우치는 경향이 많은데 앞으로는 해방된 나라를 위하여 과학 기술 방면에서도 많이 학업을 막거서 건국사업에 이바지함을 바라마지않는 바이다. 앞으로 교육문제에 대하여 특별위원회 같은 것을 열어서 구체적으로 모든 문제를 연구에 나아가겠거니와 우선 배우는 사람 가르키는 사람이 종래보다도 한층 더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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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대한민국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목 조선교육심의회, 9개 전문분과위원회 결정, 신교육의 근본방침 심의
게재지명 중앙신문
게재일자 1945년 11월 16일
날짜 1945년 11월 14일군정청에서는 朝鮮敎育審議會를 조직하였는데 그 제1회위원회가 14일 오후 2시부터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리었었다. 이날 학무국장 락카드 대위의 인사말이 있은 다음 협의로 들어가 아홉분과 위원회를 두고 각분과회에는 전문적 지도자가 있어 금후에 새로운 조선교육건설에 힘쓰기로 되었는데 그 분과회와 위원은 다음과 같다.
敎育理念委員:安在鴻 鄭寅普 河敬德 金活蘭 白樂濬 키퍼大尉 洪鼎植
敎育制度委員:金俊淵 金元圭 李勳求 李寅基 兪億兼 에렛少佐 吳天錫
敎育行政委員:崔斗善 崔奎東 玄相允 李卯묵 白南薰 그랜드大尉 司空桓
初等敎育委員:李活盛 李揆百 李康元 李克魯 파라大尉 李承寄 鄭錫鳳
中等敎育委員:趙東植 高鳳京 宋鎭夏 徐元出 비스코中尉 李興鍾
職業敎育委員:張勉 趙伯顯 鄭文基 李奎載 朴璋烈 로즈大尉 李敬善
高等敎育委員:趙炳玉 白南雲 兪鎭午 尹日善 크로프스少佐 金性洙 朴鍾鴻
師範敎育委員:張德秀 張利旭 金愛麻 愼驥範 孫貞圭 파리大尉 許鉉
敎科書委員:趙鎭滿 趙潤濟 金性達 皮千得 黃信德 월취中尉 崔鉉培 -
오천석, 그때 그 일들 70, 동아일보 1976년 3월 25일자 5면
1945년 해방과 함께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주한 미군은 그해 9월 10일부터 군정기관을 조직하기 시작했다。바로 그 다음날 우리가 창간한지 얼마 안되는「코리아 타임스」신문사에서 논설을 쓰고 있는데 미군담당자가 나를 좀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나는 중앙청 2층 서쪽에「민간보도 및 교육과」라고 써 붙인 사무실을 찾아갔다。 40세가량 됨직한 미육군대위가 자기는 교육책임자로 선정된「E L 라카아드」라고 소개하면서 나의 학력과 교육경험을 물었다。
내가「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교수 경력이 있다고 말하자 그는 자못 뜻밖이라는 듯이 쏘아보면서 몇 가지를 더 물었다。그런 뒤 그는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 같이 일할 것을 제의했다。나는 신문사 친구들과 상의해 보겠노라고 일단 나왔다가 친구들의 권유로 이튿날부터 그와 함께 일하기로 했다。이렇게 해서 나는 뜻밖에 한국인으로서는 미 군정청 교육관계 일에 관련을 맺게 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군정청이 어떻게 나를 찾았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미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하지」사령관에게 불려간 이묘묵 군(작고·주영공사)의 추천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그 다음날「라카아드」대위와 나는 한 책상에 마주앉아 군정문교(軍政文?)의 첫 일을 시작했다。
「라카아드」대위는 우선 교육계 지도자들을 폭넓게 만나보고 자문을 구했다。그는 김성수(작고·부통령) 백낙준(연세대명예총장) 김활란(작고·이대총장) 유억겸(연전학감) 현상윤(납북·고려대 총장) 최규동 씨(서울대 총장)등을 비롯하여 학교관계자들을 많이 만나보았다。뒤에 이들이 모체가 되어「한국교육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김성수 씨는 곧 군정교육담당관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그 후임에 백남훈 씨가 취임했고 정인보(납북·감찰위원장) 윤일선 씨(서울대 총장)도 추가되었다。이 위원회는 형식상 자문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의결기관의 역할을 했다。말하자면 처음부터 위원회의 주도권이 우리 한국인 손에 있어서 건국교육의 기틀을 우리 교육지도자들이 토의하고 결정했으며 미군은 도리어 손님의 자리에 있었다。
당시 기능이 정지된 총독부 학무국을 우리가 정식 접수한 것은「라카아드」대위와 내가 단둘이서 일을 시작한지 1주일쯤 지난 뒤였다。「라카아드」대위와 내가 지금 중앙청 서편별관 학무국장실에 들어서니 40여명의 일본인 직원들이 침묵 속에 정좌하고 있었다。
「라카아드」대위는 단도직입적으로『오늘로 미군정은 학무국을 접수한다。제군은 모든 기능을 정지하고 우리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기 바란다』라고 선포했다。 -
오천석, 그때 그 일들 79, 동아일보 1976년 4월 6일자 5면
인촌 김성수 선생을「뉴우요오크」에서 처음 뵌 것은 1931년경이었다。우연히 나는 그의「뉴우요오크」체재 중 안내역을 맡게 되었다。인촌 선생은 특히 미국의 여러 대학 구경을 희망하였다。그래서 나는「콜럼비아」대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으로 안내하였고 그는 돌아보는 대학의 규모와 제도、학생들에 관해 이것저것 소상히 알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로서는 인촌 선생의 뜻을 알 수없었으나 그는 이미 국내에서 민족자본에 의한 고등교육기관을 세우려는 원대한 포부를 간직한 채 우선 미국으로 건너와 여러 대학을 시찰하고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대학시찰을 마치고 저녁에는 유명한「그리니치 빌리지」에도 가서 포도주를 반주로 인촌 선생과 저녁식사도 같이 하였다。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귀국 후 그의 후의를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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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석, 그때 그 일들 79, 동아일보 1976년 4월 8일자 5면
졸업 후 약 반년간의 노동을 통하여 겨우 여비를 마련、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31년 제야였다。10년이 흘렀건만 아무 변화도 없는 조국강산의 모습은 나의 심경을 우울하게만 했다。고향에 돌아와 한달 남짓 무위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서울서 전보 한 장이 날아들었다。인촌 김성수 선생으로부터 상의할 일이 있으니 곧 상경하라는 기별이었다。올라와보니 인촌선생이 이번에 보성전문 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하는 것이었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뉴우요오크」를 방문했을 때 내가 안내역을 맡았던 일이 인연이 된 듯 싶었다。
인촌 선생은 보전을 인수한 뒤 교수진을 보강하기위해 이번에 새로 유진오 김모 씨 나 세 사람을 초빙하였다고 말했다。내가 보전으로 가자 그때 이종수씨(전 서울대 사대학장)는 어떤 잡지에 쓰기를『이번에 보전은 만석의 재산이 불었다。 오천석은 김성수씨 댁에서 나왔고 새로 오천석이 교수진에 참가하게 됐으니 만석아닌가』하고 유우머러스하게 풀이하기도 했다。
4월 새 학기가 시작되어 송현동에 자리잡고 있는 보전을 가보니 우선 그 교사의 초라함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다 낡아빠진 조그만 목조건물 한 채에 창고 같은 벽돌집이 있고 거짓말 보태어 손바닥만한 마당하나가 있을 뿐이었다。이것이 우리 민족자본으로 경영해온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인가 생각하니 슬프기까지 했다。교수진은 일인(日人) 2명을 포함하여 새로 들어간 우리 셋을 합치면 겨우 10명 내외였고 학생수도 몇 백명 정도였다。그러나 이 초기의 실망은 곧 해소되었다。김성수 선생은 장차 세워질 대보전(大普專)의 꿈을 펴 보이면서 멀지 않아 안암동에 큰 부지를 매입하여 새 캠퍼스를 꾸미겠다는 구상을 밝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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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석, 그때 그 일들 72, 동아일보 1976년 3월 27일자 5면
이래서 우리는 곧 심의회 조직 작업에 착수했다。우리가 심의회구성의 뜻을 전하고 참가를 부탁하자 모두들 학무국의 이 같은 구상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적극참여하겠다고 쾌히 응낙、우리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심의회 참가인사는 김성수 안재홍 백낙준 김활란 김준연 최두선 이훈구 현상윤 이묘묵 하경덕 최규동 장면 장덕수 유진오 조진만 장이욱 윤일선 씨 등 1백여 명으로 대부분 일제하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46년 1월초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역사적인 제1회 교육심의회 전체회의가 열렸다。「라」대위 등 미군정당국은 참여인사들이 한국의 지도급 인사임을 보고 놀라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며 앞으로 적극 협력해 줄 것을 약속했다。당시 군정청엔 10여부가 있었지만 이같이 대규모의 심의회를 구성、장기적인 회의를 주최한 부는 없었다。심의회는 10개 분과로 나뉘어 건국교육의 이념 행정 제도 등을 심의하고 결정했다。1백여 회에 걸친 분과위원회와 20회의 전체회의는 문자 그대로 지도급인사의 중지를 모아 시종 진지하게 장차 한국교육이 지향해야할 기본방향을 정립하고 그 체제를 확립했다。각분과위원회 토의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의견을 교환한 곳은 교육이념을 다룬 제1분과위였는데 위원회를 지배한 사상은 장래교육이 반드시 민주주의에 그 기초를 두어야하겠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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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석 씨 회고, 비화 미군정삼년-험난한 여정…초기의 시련들, 동아일보 1982년 4월 22일자 3면
『「라카드」대위가 교육에 깊은 지식을 갖지 못했던 것이 약점이기는 했으나 도움이 돼주기도 했어요。한국인들의 건의를 이론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거든요。교육에 관한한 건의가 거의 통과됐어요。교육심의위원회 구성이 대표적인 성과예요。처음엔「라카드」가 반대했어요。「라카드」를 비롯한 미군정장교들은 치안이나 유지하면서 한국인들을 굶기지 않게 하다가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들뿐이었지요。그러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정책수립을 위한 교육심의위원회 구성을 주장했고 결국 성공했읍니다。그중에서도 초등6년 중학3년 고교3년 대학4년으로 한 6334학제의 결정이 가장 큰 결실이었읍니다』(오천석씨 회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6334학제의 결정이 있기까지에는 이런 사연이있었다。
미군의 진주소문이 들리기 시작하던 45년 8월말 어느 날 김성수 백악준 김활란 오천석 등 교육계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일이 있다。당시 이전(이화전문)교수였던 김활란이 알선한 서대문 로터리부근 개인집에서였다。미군이 진주한 후 교육정책의 대안을 마련하자는 뜻에서였는데 이 자리에서 오천석이 6334학제를 제의했다。 미국에서도「캘리포니아」주 등 선진 공업지역에서 운영하던 학제였다。『일제 때처럼 중등과정을 5년으로 묶는다면 시골에서는 부담이 크고 도중 탈락이 많습니다。중학 3년에서 끌낼 학생에게도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잠자코 있던 김성수가 논의를 종합했다。『그 제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능력에 맞는 새로운 교육제도가 필요합니다』결국 6334학제는 얼마 후에 군정청교육심의위원회의 안으로 결정됐고 군정청도 이 제도를 채택했다。 -
‘인사 소식란-보전’,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자 2면
▲교장 김성수(金性洙)▲부교장 김영주(金泳柱) ▲정법과장 유진오(兪鎭午) ▲ 경상과장 미정 ▲생도감 이종우(李鍾雨)
명춘(明春)에 문학과를 증설하고 대학으로 승격할 계획 중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