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신탁통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의 구상이었다. 이 같은 구상은 해방된 지 2개월 만에 남한의 신문을 통해 전해졌다 1. 한민족의 의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 구상에 반대하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물론이다 2. 다시 2개월 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4대국의 신탁통치 방안이 합의됐다.
합의발표 전 추측기사(‘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만으로도 남한 전체가 시끄러웠다 3. 조간인 다른 신문과 달리 석간으로 이 외신을 가장 먼저 보도하게 된 동아일보가 ‘27일자’(26일 오후 배포)에 크게 취급한 것은 당연했다. 동아일보는 27일 오후 배포하는 ‘28일자’에 각계각층의 움직임을 담았다 4. 한국민주당이 발표한 “소련의 한국신탁통치안을 절대로 배격한다”는 결의문도 소개했다.
한국민주당에서는 27일 오후 3시 동당 회의실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막부 삼국외상회의서 소련이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하였다는 설에 대하야 절대배격한다는 좌(左)의 결의를 하였다.
조선의 독립은 카이로 선언과 포쓰담 선언에 의하야 국제적으로 약속된 바로 동아평화의 절대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제 막부의 삼국 외상회의에서 거연(遽然)히 조선신탁안이 제의되는 것은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발전을 조해(阻害)하며 동아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본당은 생명을 걸고 이 제안을 배격하는 동시에 독립관철에 매진하기를 결의함
부대결의(附帶決議)
일、우(右)결의를 미소당국에 통고할 것
일、신탁통치의 반대와 완전독립촉성될 위하야 각 당파와 제휴하야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
대한민국 27년 12월 27일 한국민주당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자 1면,‘전 생명 걸고 배격, 한국 민주당 궐기’)
한민당의 김준연은 20년 뒤에 동아일보에 기고한 ‘막부(莫府,모스크바)협정과 고하(송진우)’란 글에서 ‘28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이 결의문을 언급했으나 결의문은 합의발표된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추측기사에 대한 것이었다. 5김준연은 “이 결의문은 1945년 12월 28일의 동아일보 지상에 게재되어 분명히 우리 앞에 증거로 남아있는 것이다。그런데 여기 대하여 혹 이설(異說)이 전해지는 것을 들을 수 있으나 이것은 순전히 오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것”이라고 잘못 해명했다. 1940년대 석간은 날짜를 하루 앞당겨 발행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1960년대에는 이 관행이 사라져 김준연조차 착각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라는 삼상회의 결정은 서울시간으로 28일 낮 12시 발표됐으나 27일 밤부터 AP와 UP 등 외신들은 이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AP와 계약한 합동통신은 심야 구수회의를 통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유보란 있을 수 없다. 28일 1경에 보도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UP와 계약한 조선통신은 좌익정당들이 압력으로 ‘27일 발’ 신탁통치결정 보도를 유보했다. 조선인민공화국 기관지 조선인민보의 사장 홍증식은 ‘중대한 기사를 임의로 보도한 것은 잘못’이라며 합동통신에 항의하기도 했다. 좌익정당들이 이 외신을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판단해 소련에 대한 한민족의 감정이 나빠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6
금요일인 28일 오후 제작 배포된 ‘29일자’ 동아일보의 외신기사는 6건이었다. 1면 톱의 외신출처는 ‘27일 AP’였다. 조선통신이 전하는 UP 뉴스는 ‘28일’부터 ‘가능’했다. 7 8 9
신탁통치제 과연 실시,외전이 전하는 막사과 회담내용, 4국 통치위원회, 금후 5개년 계속
(막사과 27일 AP 합동) 27일로써 종결을 본 3국 외상회의에서 다음의 결정을 보았다고 관측되고 있다.
일、소련、미국、영국 급 중국에 의한 일본관리제의 실시 4개국 이사회는 전회 일치제를 채용하는 최종결정권을 이사회가 잡든지 맥아더 대장에게 그 이상의 권한이 부여되는지는 불명이다.
일、원자력관리문제에 관해서는 일월 개최의 국제연합 총회에서 토의될 제안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일、조선에 미、소、영、중의 4개국의 신탁통치위원회가 설치된다. 동(同)위원회에는 5년 후에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관측 하에 5년이라는 연한을 부한다. 미、소 양국은 남북조선행정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야 양 지구 군정 당국의 회의를 개최한다.
미 국무장관 담
(막사과 27일 발 AP 합동) 삼국 외상회의는 27일 상오 3시 종료『반즈』미 국무장관은 백림、파리 경유 공로(空路)로 귀국함에 당하야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회의는 비상히 건설적이었다. 단지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3국 대표간에 우의적관계가 성립하야 금후에 발생할 제 문제를 동일한 정신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한점이 특히 건설적이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소(美蘇) 2주간 이내에 회담
(화성돈 28일 UP발 조선통신) 4개국에 의한 최고 5개년 조선신탁통치협정에 관한 삼국외상의 제의에 대하야 작일 외교계에서는 이는 결과에 있어서 통일된 경제적 안정을 기초로 하는 피국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앞으로 2주간 이내에 소미회담에서 조선의 긴급한 문제를 토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막사과 콤뮤니케에 대하여 이로써 38도 경계선으로 인하여 양성된 경제적 기타 제 장해를 제거하게 될 것을 동(同)방면에서는 기대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28일 제작 배포) 1면
토요일인 29일 조선일보 조간 10 과 자유신문 조간 11 도 마찬가지였다. ‘AP 합동통신’은 27일부터 출처로 나와있으나 ‘UP 조선통신’은 28일부터 출처로 나와있다. 조선통신이 27일 발 UP통신의 신탁통치결정 기사를 국내 신문사에 서비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일부 학자들은 동아일보가 29일자 신문에서 모스크바 결정을 보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임시정부 구성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 12하지만 분명히 1면 기사에서 ‘위원회 설치안 내용’이란 제목으로“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선 내의 산업、교통、농업、문화의 발전에 대한 필요한 대책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한다”며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위원회 설치안 내용
(화성돈 28일 UP발 조선통신) 작야(昨夜) 삼국외상회담에 관한 보도에 의하면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선 내의 산업、교통、농업、문화의 발전에 대한 필요한 대책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갓다
일、조선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하고 그에 적당한 준비공작을 하기 위하야 남부조선의 미군사령관 대표와 북부조선의 소군 사령관 대표로써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이、모든 제안을 작성하는데 있어서는 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적 각 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동위원회의 결정은 미소 양국 정부의 최후결정에 압서 소미영중 정부에 제출하여 검토를 바들 것이다
삼、또한 공동위원회는 조선임시정부와 조선내의 민주주의정당의 참가하에 신탁통치 원조방침을 강구하고 조선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적 자치정권의 발전과 조선의 국가적 독립을 조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하여 미소영중국정부에 제출하여 최고 오개년간의 사개국의 조선신탁통치에 관한 최후 결정을 짓는데 자(資)할 것이다
사、조선주둔군사령관 대표는 압흐로 2주간 이내에 회합하여 남북조선 공통의 긴급한 문제와 행정경제방면의 항구적 조절방침을 강구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1면
자유신문 1945년 12월 29일자 1면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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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신문 1945년 10월 25일자 1면, 신탁통치설을 삼천만 총의로 거부, 하지중장 급거 도일(渡日)에 주목
우리는 또다시 불쾌한 외전으로 조선의 신탁통치설을 듣고 있다. 확실한 정보가 없음으로 그 진부를 판정키 어려우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신ΟΟ이 신탁통치의 내용과 형식이 여하할 것을 알 수 없거니와 자주독립의 그 시기 역시 확정되지 않은 금일에 처하여 이러한 신탁통치설을 듣게 됨은 38도 문제 이상의 심각한 암영을 삼천만 동포에게 던지는 것이다.(중략) 하지 중장은 돌연 24일 조 공로로 일본동경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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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신문 1945년 10월 27일자 1면, 신탁관리 절대반대, 각당 망라하여 운동개시
미국무성극동부장 브인센트씨는 20일 미국외교협회석상에서 조선에 관하여는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하여 그간 조선민중이 독립한 통치를 행할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할 것을 제창한다고 천명하였는데 이 신탁관리제는 우리 3천만 민중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일임으로 한국민주당에서는 25일 아침 긴급간부회를 개최하고 ‘이 신탁관리제’는 조선인을 모욕하는 것이니 어디까지든지 절대 자주독립을 주장한다고 결의하고 그 결의안을 가지고 정보부장 박찬희 선전부장 함상훈 양씨가 휴대하고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인민공화국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각정당 대표를 방문하는 등 전 정당을 망라하여 반대운동을 일으키려고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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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일,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類型)-이승만과 김구(84) 신탁통치반대투쟁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550쪽
그것은 오보였다. 신탁통치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미국대통령이 식민지제국에 대한 전후처리 방안으로 주장해 온 것이었다.
이 충격적인 뉴스는 12월 27일자 도하신문에 일제히 크게 보도되었다.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면 제호 옆에 “신탁통치설을 배격함”이라는 내리닫이 사설과 함께 4단 머리기사로,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자유신문(自由新聞)』, 『신조선보(新朝鮮報)』 등은 1면 머리기사로, 『서울신문』과 『중앙신문(中央新聞)』 등은 1면 중간 톱이나 2단 박스기사로 다루었다. 부산에서 발행되는 『민주중보(民主衆報)』도 같은 기사를 3단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전국 중요도시의 신문들이 대부분 이 합동통신 기사를 크게 다루었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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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소련의 조선신탁관리주장에 대해 각계에서 반대견해 피력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5년 12월 28일
날짜 1945년 12월 27일
趙임정외무부장 談
조선문제에 있어서 國際公管 신탁관리 탁치 운운은 지금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라 해외에 있을 때에 누차 목도하여 싸워 온 문제다. 이유는 조선을 일국의 독점에서 구출키 위하며 40년간 일본의 압정하에 있었던 민족이므로 자주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조선의 대외관계를 말함이요 후자는 대내관계를 말함이다. 이것은 조선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오인한 일부의 착각이다. 그러므로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국제간에 如斯한 탁치 운운설이 있을 때마다 정당한 우리의 주장을 성명하여 왔었고 미주에 있는 우리 교포도 임시정부에 호응하여 미주내 교포의 총의로 반대성명을 하였었다. 우리가 60년간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온 민족인 것과 극동에 있어 한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승인치 않으면 극동의 평화를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주지하는 바 사실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선언에서 또 포츠담회담에서 약소민족국가를 자주적으로 주권을 가질 수 있도록 독립국가로서 보장하여 주지 않으면 세계평화가 유지될 수 없음을 고창하게 되었었고 동시에 조선독립도 당당히 선언되었었다. 지나간 1차대전에 윌슨대통령의 약소민족해방 제창으로 연출된 유혈극도 피압박민족을 해방키 위함이요 금번 2차대전 역시 세계평화를 교란하는 팟쇼 타도를 위한 정의의 干戈이었다. 세계적 정세와 한민족이 가진 바 역사를 무시하고 또 다시 탁치문제를 재연시킨다면 이는 2차대전 목적에 위반됨은 물론이요 한민족의 총의에 위반되는 바이다. 연합국 헌장에 의하여 보더라도 우리 한민족에게는 탁치를 적용시킬 법적 근거가 없다. 만일 일본에게 한 동안 점령당했음을 이유라고 한다면 독일에 점령되었던 구주 약소 각국을 신탁관리하여야 할 것인가? 임시정부로서는 주장자의 여하를 불구하고 旣定한 바에 의하여 의연히 투쟁하여 나가겠다. 전문컨대 桑港회담에서 식민지를 많이 소유한 영국이 자국의 불리를 염려하여 조선의 탁치를 발언하였을 때에 강렬히 조선독립을 주장한 우방 소련에서 탁치를 주장하였다 하니 의아하는 바이며 意外之事다. 余는 약소민족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여 온 소련을 위하여 이 보도가 虛報가 되고 풍설로 사라져서 前功의 可惜치 않기를 바란다.趙琬九 재무부장 談
국제정세에 정확한 파악이 없고 한민족을 알지 못하는 일부의 착각이다.
해외에 있을 때에 얄타비밀회담에서 滿洲, 蒙古, 朝鮮을 소련에 맡겨서 탁치한다는 보도가 있었었는데 당시 미주에 있던 李承晩박사가 桑港회담에서 오직 민족의 주권을 찾기 위하여 한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반세기동안 투쟁이 그치지 않었던 사실등을 말하고 열국에 강렬한 공격을 하여 駐美中國大使館에서 사실이 없다는 성명을 한 일이 있었다. 여하한 국가에서 여하한 말을 하더라도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3천만 우리민족 전체중 누가 신탁관리를 원하는 자 있으며 此에 누가 희생적 혈투를 아끼겠는가. 절대로 만부당한 말이다. 단연코 실현되지 못할 정의에 벗어난 일이며 간과치 못할 바라고 생각한다.韓國民主黨 궐기
韓國民主黨에서는 27일 오후 3시 동당 회의실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소련이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하였다는 설에 대하여 절대 배격한다는 左의 결의를 하였다.
조선의 독립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약속된 바로 동아평화의 절대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제 모스크바의 3국 외상회의에서 엄연히 조선신탁안이 제의되는 것은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 발전을 저해하며 동아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본당은 생명을 걸고 이 제안을 배격하는 동시에 독립관철에 매진하기를 결의함
부대결의
一. 右 결의를 미소당국에 통고할 것
一. 신탁통치의 반대와 완전독립촉성을 위하여 각당파와 제휴하여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
大韓民國 27년 12월 27일
韓國民主黨
人民黨 玄又玄 談
아직 확실한 보도가 없으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정확한 정보가 있는대로 당으로서 태도를 결정하겠다. 그러나 소련으로서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단호히 이에 반대하지 않으면 안된다.國民黨 대소결의:
목하 모스크바에서 개최중인 3상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여 미소간 의견대립함을 전한다. 즉 미국은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에 즉시 독립을 허여할 것과 국민투표로서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주장하는데 소련은 남북 양지역을 일괄한 일국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 운운 카이로선언 이래 국제공약이 炳乎하여 변할 수 없는 바이어늘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은 불가해의 태도로서 국제신의에도 배치되는 바이다. 신탁통치의 기타 피예속의 형태로서 우리에게 임하는데 대하여는 어떠한 국가임을 묻지 않고 우리는 3천만의 총력을 모아 최후까지 반대할 것이다.
共産黨 鄭泰植 談
아직 확실한 정보가 없으니 지금 발표할 수 없다. 정식발표가 있은 후에 당으로서 태도를 표명하겠다.
白南雲 談
외상회의 종료후에 정식으로 발표가 있기 전에는 아직 무어라도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 조선민족이 자주독립국가로 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중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정식발표가 있은 후에 엄정한 비판과 강렬한 민족적 요구로서 당당히 자주독립을 주장해야 한다.
李克魯 談
신탁이란 말부터 나는 불유쾌하다. 어린애나 불구자나 정신이상자가 자기생활을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신탁관리를 한다는 말이다. 어떠한 나라를 물론하고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나라는 우리 3천만 민족이 유일한 적으로 취급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혈투할 각오를 해야 한다. ↩ -
김준연 씨 회고, ‘막부(莫府)협정과 고하’, 동아일보 1965년 4월 13일자 6면
「모스크바」3상회의에 의하여 결정된 이른바「막부협정」(莫府協定)은 한국을 5년간 미·영·소·중의 4개국신탁통치에 부하자는 것이었다。이 소식이 1945년 12월 27일에 서울에 전해오자、전국민은 극도로 흥분하게 되었다。 완전독립만이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기 때문에。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겸했던 고하 송진우 선생을 수석총무로 하는 한국민주당에서는 27일에 즉각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이에 대하여『절대 배격한다』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독립은「카이로」선언과「포츠담」선언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약속된 바로 동아평화의 절대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제 막부(莫府)의 3국 외상회의에서 거연(遽然)히 조선신탁안이 제의되는 것은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 발전을 저해하며 동아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본당은 생명을 걸고 이 제안을 배격하는 동시에 독립관철에 매진하기를 결의함。
부대결의(附帶決議)
일、우(右)결의를 미·소당국에 통고할 것。
일、신탁통치의 반대와 완전독립촉성을 위하여 각당파와 제휴하여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 』이 결의문은 1945년 12월 28일의 동아일보 지상에 게재되어 분명히 우리 앞에 증거로 남아있는 것이다。그런데 여기 대하여 혹 이설(異說)이 전해지는 것을 들을 수 있으나 이것은 순전히 오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당시 형편에 있어서 한국민주당의 결의는 순전히 수석총무 고하 선생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지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12월 28일에 고하 선생과 함께 서울 서대문밖 죽첨정의 경교장 김구 주석댁에 가서 신탁통치문제를 토의하는 석상에 참여하였었다。그때에 회중(會衆)은 흥분한 나머지『미·영·소 3개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행하자』는 의논까지 나올 정도였었다。
28일에는 밤을 새워가면서 회의를 거듭하였었다。필자는 회의를 마치고 털털이 자동차를 고하 선생과 같이 타고 오다가 차가 경성중학교(지금 서울고교)앞에 와서 고장이 나서 그것을 수리하느라고 장시간 설한풍속에서 혜매지 아니할 수 없었던 일이 기억된다。
29일에도 오후 네시경에 고하선생과 함께 이 경교장에 가서 다음다음날인 31일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시위운동을 행할 것을 작정하고 여섯시경에 파해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필자는 29일 새벽 바람에 촉한(觸寒)이 되어서 복통이 났기 때문에 고하선생 댁으로 동행하지 못하고 서소문안의 셋째사위 집에서 내렸다。
30일 이른 아침이 되었다。현관 바로 옆에서 자던 사위 김홍섭 군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두어마디 문답을 하더니 내방으로 들어와서 먼저『놀라지 마십시오』하여놓고、『오늘 아침 여섯시 15분에 고하 선생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여서 돌아가셨읍니다』는 흉보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때에 공산당에서는 쉴새없이 인촌 김성수 선생과 고하 송진우 선생을 비난 공격하는 벽보를 붙였던 것이다。고하 선생 암살 후에도『신탁통치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그리되었다』는 벽보가 대구역엔가 서울역엔가에 붙었더라는 말을 들었다。그러나 이것은 천만부당한 비난이라는 것을 필자는 단언하는 바이다。
필자는 당시의 일을 현 국회부의장인 나용균 씨와도 이야기하였는데 나 부의장은 당시 한국민주당의 사무국장으로서 총무회담에도 참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그때의 당에서의 토의광경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그때 씨는 필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총무회담시에는 총무와 사무국장이었던 나만이 참여하였었는데 수석총무인 고하가 신탁통치를 적극적으로 배격하였다。그래서 당의 그와 같은 결의가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의 기억으로도 그러하였고 지금 동아일보 지면상에 나타난 결의문도 그것을 확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당시에 전 국민이 결속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거족적 운동을 전개한 것은 우리투쟁사상의 일대장관이었던 것이다。
국민의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투쟁이 그와 같이 격렬하였었기 때문에 1947년 8월 10일에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측 수석대표인「브라운」소장이『한국민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그 민의에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발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 합동통신 30년, 합동통신사, 1975년, 11~12쪽
좌우익 신문 통신의 보도경쟁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신탁통치안 보도로 불붙었다. 12월 27일밤 야근을 하던 외신국장 백남진은 통신부 차장 최한식이 던져준 워싱턴 발 AP통신 카피를 들여다보다가 놀라운 뉴스를 발견했다. 이 기사가 바로 신탁안 보도였다.
남상일 전홍진 원경수 백남진 등은 구수회의를 열고 이 기사를 보도할 것인가 보류할 것인가를 검토했다. 이때 좌경 조선통신은 UP의 탁치보도를 좌익정당의 압력으로 유보키로 결정한 직후였다.
평소 조선통신의 전체주의적 뉴스통제관에 반대해온 합동제작진은 민족의 장래를 또한번 외세에 의하여 좌우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중대뉴스를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유보란 있을 수 없다. 28일 1경에 보도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합동이 신탁안을 보도하자 정계 언론계 할 것 없이 반대의견으로 들끓었다. 미군정 당국은 당황하여 하지 중장 휘하 24군단의 보도부장을 합동으로 보내 AP통신의 원문을 요구했고, 공산당기관지 조선인민보의 사장 홍증식(洪增植)은 ‘중대 기사를 임의로 보도한 것은 잘못’이라고 엉뚱한 항의를 해왔다.
합동의 보도이후 매사에 대립하던 좌우익이 이 탁치안 만은 똑같이 반대하고 나섰을 때 취재부장 원경수는 한국통신사상 처음인 논설기사(당시는 ‘계도기사’라고 불렀다)를 썼다.
“신탁통치안에 대하여 좌익도 우익도 모두 반대하니 이제부터는 좌도 없고 우도 없지 않은가. 따라서 신탁의 새 굴레를 벗기 위해서는 사상을 초월하여 단결, 닥쳐올 어려움을 극복해야한다.”
그날부터 며칠동안 좌우 양쪽의 항의와 비난이 합동경영진을 괴롭혔다. ‘좌도 없고 우도 없다’는 말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조선인민보의 홍 사장은 합동을 찾아와 책상을 치며 따졌다. 원경수는 이 논설을 내보낸 뒤 얼마 안 있다가 합동을 떠났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1면, 위원회 설치안 내용
(화성돈 28일 UP발 조선통신) 작야(昨夜) 삼국외상회담에 관한 보도에 의하면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선 내의 산업、교통、농업、문화의 발전에 대한 필요한 대책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갓다
일、조선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하고 그에 적당한 준비공작을 하기 위하야 남부조선의 미군사령관 대표와 북부조선의 소군 사령관 대표로써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이、모든 제안을 작성하는데 있어서는 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적 각 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동위원회의 결정은 미소 양국 정부의 최후결정에 압서 소미영중 정부에 제출하여 검토를 바들 것이다
삼、또한 공동위원회는 조선임시정부와 조선내의 민주주의정당의 참가하에 신탁통치 원조방침을 강구하고 조선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적 자치정권의 발전과 조선의 국가적 독립을 조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하여 미소영중국정부에 제출하여 최고 오개년간의 사개국의 조선신탁통치에 관한 최후 결정을 짓는데 자(資)할 것이다
사、조선주둔군사령관 대표는 압흐로 2주간 이내에 회합하여 남북조선 공통의 긴급한 문제와 행정경제방면의 항구적 조절방침을 강구할 것이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1면, 미소위원회
(합동통신별보) 28일 하오 4시반 멜보른 방송은 다음과 갓치 방송하였다
막사과 삼국외상회의의 결의에 관한 사항이 28일 화성돈, 막사과 급 윤단에서 발표되엿다、회의는 우선 중화민국의 찬성을 어더 일본관리위원회와 현재의 극동자문위원에 대신하는 극동위원회를 신설하기로 결정하였다、이 극동위원회에서는 소련、미국、영국、중화민국、불란서、화란、가내타、호주、인도 급 비률빈의 대표자를 포함한 것이다、회의는 또 다음의 항목도 결의하였다、
일、국제동맹에 대하야 원자『에넬기』문제에 대하야 토의하기 위하야 특별위원회의 설립을 제안 할 것
이、조선에 민주주의 정부수립의 제일보로서 미소 양국간에 위원회를 설립할 것
삼、중화민국의 내정에 간섭않할 것 또 중앙정부에서 민주주의적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지 않으면 않될 것
- 1945년 12월 29일자 2면, 외상회의 협정전문
(화성돈 28일 발 AP 합동) 막사과 삼국외상 회의 협정문이 28일 삼국 수도에서 동시에 발표되였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갓다.
일、극동자문위원회를 폐지하고 11개국의 극동위원회를 설치하야 4개국일본관이 이사회를설치한다
이、미、영、소 삼국은 미、영 양국 군대가 그 임무와 책임이 완료하는대로 가급적 속히 중국으로부터 철퇴할 것이다.
삼、삼국외상은 중국이 통일된 민주주의적 국가로 되여 국내항쟁을 정지한다는 필요성에 관하야 동의되었다.
사、원자『에넬기』는 평화산업 이외에 이용되지 안흘 것을 보장하는 목적으로 원자력 관리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미영 양국의 나마니아(羅馬尼亞)『불가리아』양국을 승인하는 평화조약체결조건이 발표되였고 원자관리위원회의 설립에 관해서는 1월의 국제연합총회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각 성원국가와 이 이사회를 가(加)한 관리위원회를 창설할 결의가 제□되였다
오、극동위원회는 소、영、미、화、불、화란、가내타、호주、『뉴지랜드』인도、비률빈의 11개국으로 구성된다. 동(同)위원회 성원국가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맥아더』대장이 발한 지령을 검토한다. 또 위원회의 결정사항을『맥아더』대장에게 전달하는 것은 미국정부의 책임으로 되였다. 또 긴급을 요하는 경우는 미국은 잠정적 지령을 발할 수 있다.
륙、조선에 주재한 미소양국군사령관은 2주간이내에 회담을 개최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설립을 원조한다. 또 미영소화(美英蘇華)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설립케하야 조선의 장래 독립에 비할 터인바 신탁통치기간은 최고 5개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야 동국(同國)의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통치제에 관한 외상이사회의 제안은 검토키 위하야 미소영화 각국 정부에 회부된다
칠、미소영 삼국은 이태리 라마니아 발아이(勃牙利) 홍아리(洪牙利) □란으로 더부터 1946년 5월 1일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준비한다
- 조선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1면, 조선에 신탁제 실시. 삼국 외상회의서 결정
(막사과 27일 AP 합동) 27일로써 종결을 본 3국 외상회의에서 다음의 결정을 보았다고 관측되고 있다.
일、소련、미국、영국 급 중국에 의한 일본관리제의 실시 4개국 이사회는 전회 일치제를 채용하는 최종결정권을 이사회가 잡든지 맥아더 대장에게 그 이상의 권한이 부여되는지는 불명이다.
일、원자력관리문제에 관해서는 일월 개최의 국제연합 총회에서 토의될 제안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일、조선에 미、소、영、중의 4개국의 신탁통치위원회가 설치된다. 동(同)위원회에는 5년 후에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관측 하에 5년이라는 연한을 부한다. 미、소 양국은 남북조선행정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야 양 지구 군정 당국의 회의를 개최한다.
조선일보 1945년 12월 29일자 1면, 임시정부수립원조, 민주적 정당단체를 망라
(화성돈 28일 UP발 조선통신) 작야(昨夜) 삼국외상회담에 관한 보도에 의하면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선 내의 산업、교통、농업、문화의 발전에 대한 필요한 대책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갓다
일、조선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하고 그에 적당한 준비공작을 하기 위하야 남부조선의 미군사령관 대표와 북부조선의 소군 사령관 대표로써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이、모든 제안을 작성하는데 있어서는 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적 각 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동위원회의 결정은 미소 양국 정부의 최후결정에 압서 소미영중 정부에 제출하여 검토를 바들 것이다
삼、또한 공동위원회는 조선임시정부와 조선내의 민주주의정당의 참가하에 신탁통치 원조방침을 강구하고 조선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적 자치정권의 발전과 조선의 국가적 독립을 조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하여 미소영중국정부에 제출하여 최고 오개년간의 사개국의 조선신탁통치에 관한 최후 결정을 짓는데 자(資)할 것이다
사、조선주둔군사령관 대표는 압흐로 2주간 이내에 회합하여 남북조선 공통의 긴급한 문제와 행정경제방면의 항구적 조절방침을 강구할 것이다
- 자유신문 1945년 12월 29일자 1면, 미·소·중·영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 3국외상회의에서 결정으로 관측
(막사과 27일 AP 합동) 27일로써 종결을 본 3국 외상회의에서 다음의 결정을 보았다고 관측되고 있다.
일、소련、미국、영국 급 중국에 의한 일본관리제의 실시 4개국 이사회는 전회 일치제를 채용하는 최종결정권을 이사회가 잡든지 맥아더 대장에게 그 이상의 권한이 부여되는지는 불명이다.
일、원자력관리문제에 관해서는 일월 개최의 국제연합 총회에서 토의될 제안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일、조선에 미、소、영、중의 4개국의 신탁통치위원회가 설치된다. 동(同)위원회에는 5년 후에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관측 하에 5년이라는 연한을 부한다. 미、소 양국은 남북조선행정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야 양 지구 군정 당국의 회의를 개최한다.
(화성돈 28일 UP발 조선통신) 4개국에 의한 최고 5개년 조선신탁통치협정에 관한 삼국외상의 제의에 대하야 작일 외교계에서는 이는 결과에 있어서 통일된 경제적 안정을 기초로 하는 피국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앞으로 2주간 이내에 소미회담에서 조선의 긴급한 문제를 토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막사과 콤뮤니케에 대하여 이로써 38도 경계선으로 인하여 양성된 경제적 기타 제 장해를 제거하게 될 것을 동(同)방면에서는 기대하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29일자 1면, 민주적 정당, 단체 망라, 임시정부 수립을 종용
(화성돈 28일 UP발 조선통신) 작야(昨夜) 삼국외상회담에 관한 보도에 의하면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선 내의 산업、교통、농업、문화의 발전에 대한 필요한 대책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갓다
일、조선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하고 그에 적당한 준비공작을 하기 위하야 남부조선의 미군사령관 대표와 북부조선의 소군 사령관 대표로써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이、모든 제안을 작성하는데 있어서는 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적 각 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동위원회의 결정은 미소 양국 정부의 최후결정에 압서 소미영중 정부에 제출하여 검토를 바들 것이다
삼、또한 공동위원회는 조선임시정부와 조선내의 민주주의정당의 참가하에 신탁통치 원조방침을 강구하고 조선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적 자치정권의 발전과 조선의 국가적 독립을 조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하여 미소영중국정부에 제출하여 최고 오개년간의 사개국의 조선신탁통치에 관한 최후 결정을 짓는데 자(資)할 것이다
사、조선주둔군사령관 대표는 압흐로 2주간 이내에 회합하여 남북조선 공통의 긴급한 문제와 행정경제방면의 항구적 조절방침을 강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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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우익의 반탁 주장과 좌익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지지(2000),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코리아콘텐츠랩, 서울, 2002
반탁투쟁은 모스크바 결정이 국내에 정확히 알려지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도 오보에 의해서였다. 1945년 12월 24일 한민당 입장을 대변하는 『동아일보』에 소련이 청진과 원산에 특별이권을 요구한다는 반소적인 기사가 실렸다. 그 다음 날 『동아일보』는 전일의 보도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그것을 비난하는 반소 기사를 썼고, 또한 소련이 대일참전의 대가로 한반도를 차지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기사를 실었다. 26일에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창하고 있다고 시사했다. 특히 27일자 신문의 오보는 심각했다.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기사에서, 번즈James F. Byrnes 미 국무장관은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 받았다는데, 소련은 남북 전체에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한다고 보도했다. 신탁통치에 관한 정반대 내용을 담은 이 기사의 출처는 미국 모 통신사로만 되어 있었다. 28일에는 전일의 오보를 다시 확산시켰다. 『동아일보』는 「소련의 조선 신탁 주장과 각 방면의 반대봉화」라는 제목 아래 중경 임시정부 측, 한민당·국민당 등의 신탁 결사반대 의견을 실었다. 29일에는 모스크바 결정을 보도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임시정부 구성은 언급하지 않고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만 자극적으로 보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