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의 모스크바 3상회의 보도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는 주장은 신문제작과 관련한 학자들의 무지에서 비롯됐다.
뉴욕타임스 리차드 존스톤의 기사 1처럼 1945년 12월 미군정과 한국정치지도자들의 눈과 귀는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에 쏠려있었다. 동아일보는 12월 10일자 2에 회의개최 사실을 처음 알렸다. 미 군정청의 국제통신이 외신제휴사인 AP 3로부터 받은 런던 발(發) 기사였다.
동아일보는 다음날자 ‘횡설수설’ 칼럼 4에 삼상회의 개최가 소련의 초청으로 이뤄진 점을 지적했고, 같은 지면에 미국 상원의원 월리암 랑거(William Langer)의 주장 5을 실었다. 랑거 의원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이 소련의 그림자에 가려 난관에 빠져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좌익성향의 조선통신 6이 외신제휴사인 UP로부터 받은 워싱턴 발 기사였다. 당시 조선통신의 편집부장 우승규는 “조선통신에는 좌익기자들이 들끓었으나 오직 외신부만은 안그랬다”며 “우익의 영어통 최원렬에 이어 김규식 박사의 아들 김진동이 근무했다”고 회고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내용은 외신을 통해서도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 회의의 진행을 12월 23일자 1면 머리기사 7로 다뤘으나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이것도 좌익성향의 공립통신 8이 단파 라디오를 통해 수신한 모스크바 발 외신이었다.
1945년 12월 23일자 1면. 스탈린의 사진이 번즈 장관의 위에 있다.
이 상황에서 22일 오후 전해진 ‘소련의 청진 및 원산에 대한 권리요구’라는 외신은 한국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동아일보는 23일(24일자) 이 기사를 게재한 뒤 24일(25일자) 9부터 설의식 주간의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이란 시리즈를 내보냈다. 10 11 12 블라디보스토크 항뿐인 소련은 겨울철 결빙으로 반신불수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부동항 확보는 제정시대부터의 숙제이며, 따라서 청진 및 원산에 대한 권리요구를 풍설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약소민족의 자립을 위한 노력의 격려자임을 자부해온 우방이었던 소련이 세계 2차 대전을 계기로 침략까지는 아니라하더라도 자가(自家)세력의 확충을 강행하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우려했다. 분명한 반소(反蘇)메시지를 담고있었다. 13
군정청은 24일 국제통신이 한국인의 기관인 합동통신으로 독립한다고 발표했다. 뉴욕타임스 14는 군정청의 검열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AP기사를 직접 받아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라고 보도했고, 동아일보 15는 군정청의 관리를 받은 지 3개월 만에 신문의 자유를 찾았다고 전했다.
Notes:
- 뉴욕타임스 1945년 12월 23일자 13면, 한국인들 모스크바 결정을 기다림. 김구가 힘을 얻고 있지만 최종적인 사태 전개는 삼상회의에 달렸음.(KOREANS WAITING MOSCOW DECISION; Kim Koo Gaining Strength but Final Developments Depend on Meeting of Ministers)
By RICHARD J.H. JOHNSON By Wireless to THE NEW YORK TIMES. – Article
SEOUL, Korea, Dec. 21 (De layed)–The eyes and ears of Korean political leaders as well as American military authorities here are turned in the direction of Moscow. So political activities in Korea’s capital this week have been in a state of virtual suspension.
Out of the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now in progress in the Soviet capital there is expected at least a clarification of the country that is now divided….
- 1945년 12월 10일자 1면, 오국 외상회의, 십오일 막부서 개최
(윤돈 7일발 AP 국제) 영외무성 대변인은 내 15일 막사과에서 오개국 외상회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엿다. 우회의에서는 원자력관리문제 일본관리문제 등을 토의할 예정이다.
- 이진섭 코리아헤럴드 상임 편집위원, ‘조국해방과 군정하의 언론’, 한국의 언론 (한국의언론간행위원회), 문화공보부,1968년, 131쪽
통신사에서는 일제의 동맹통신 경성지사를 한인사원들이 접수하여 8월 16일부터 해방통신을 발행하였고, 이어 남정린이 연합통신을, 김용채가 조선통신을 창간 발행하였다. 그 후 해방통신은 공립통신으로 흡수되어 좌파통신의 소임을 다했고 동맹통신을 군정당국으로부터 정식 이양받은 김동성 남상일은 연합통신과 합동하여 합동통신으로 등록 AP통신과 계약하였다. 조선통신도 UP통신과 계약한 후 외신을 제공하였으나 일부 좌파사원들의 움직임으로 좌파통신의 아성이 되었다.
- 1945년 12월 11일자 1면, 횡설수설
▼신년벽두에 개최될 외상회의의 앞잡이로 우선、미영소 삼국 외상이 소도(蘇都)에서 회합。▼구아(歐亞)를 통하여 산적한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세계의 이목은 저절로 모스크바로 집중。 ▼소련이 초청한 점으로 보아서 5상 회의 전의 삼상회의 개최 필요는 미영보다도 소련이 통감하는 듯。(중략) ▼그러나 미영의 논조에 항상 원자탄 어귀가 섞이는 점이 미묘한 점、이 점이 미영의 강점이오 소련의 약점인지도 미지。
- 1945년 12월 11일자 1면, 조선독립보장 긴급, 미의원 국무성에 요구
(화성돈 7일 UP발 조선) 미국 상원의원 월리암 랑거 씨는 미국 국무성이 극동정책에 있어서 외교 술책만 농락하고 있다고 이를 비난하는 동시에 조선독립에 관한 연합국의 의향을 천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조선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은 소련의 영자(影子)에 가리워서 난관에 봉착하여 있다.
소련은 적당한 시기에 취할 행동의 자유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국무성은 해외의일체의 민주주의를 단념할 정도로 소련을 위무하기에 여념이 없는가? (중략) 소련은 극동평화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소련과 제휴하여 중국 조선 기타 동방제국 내에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 우승규, 나절로만필, 탐구당, 1978년, 212, 216, 220쪽
8.15의 좌우혼돈
장안은 해방된 환희로 온통 들끓었다。 만세소리가 기미년당시 이상으로 하늘과 땅은 흔들어댔다。 이때에 쥐구멍을 찾은 것은 부일했던 어중이 떠중이였으나、개중엔 그래도 반성할줄 모르고 복면을 쓴 채 쏟아져 나오는 애국단체들에 파고든 악질분자도 숱했다。
그것도 문제밖이다。 더구나 기막힌 것은 어제까지도 절친한 동지로만 알았던 사람들 가운데선 좌우익의 혼란한 틈을 타가지고 갑자기「좌향」태도로 홱 돌아선 그것이다。열 길의 물속은 알아도 한 길의 사람마음은 모른다더니 그럴 수들 있을까。
한 사람 한 친구의「사상꺼풀」은 날이 갈수록 벗겨져갔다。「건준」에 뛰어드는 사람、「근민당」에 이름이 나타나는 사람、그리고 무슨 무슨「인민위원회」에 얼굴들을 불쑥 내민 사람、그러다가「공산당」으로 제 본색을 활짝 드러낸 사람 등등 실로 천웅만상、누가「우」인지 누가「좌」인지 어리둥절할 도깨비판국이 아니던가。
흰「양」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붉은「승냥이」구실하는 족속이 거리마다 너더분했다。 자칫하다간 자기도 모르게「적굴」에 끌려들어갈 위험천만한 때에 지난날 C일보시대 가장 믿었던 R가 나타났다。 자기가 어떤 유역동지와 통신사를 차리고 있으니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미리 짰다는 진용을 보니 사장은 만주국서 세관리로 있다가 일확천금해가지고 돌아왔다는 김승식(金丞植)、전무엔 그의 처남 되는 이중희(李重熙)、부사장엔 신문계서 업무계통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용채(金容采)、편집국장엔 R자신이 되겠으니 나더러 편집부장을 맡아달라고 꾀어댔다。통신이름은「조선통신」。
통신사 장소는 종로 2가의 현「장안빌딩」2층으로 김승식(金丞植) 그가 부호 하모(河某)로부터 중가에 샀던 만큼 그 당시의 사옥으로선 당당했다。
적색화한「조선통신」
편집국장 R는 C보 시대에 절친했던 동지。그래서 권에 못이겨 그의 밑에서 편집부장직을 달게 맡았다。 창간초기라 사원은 불과 수십명 중에 기자란 단 10수명 뿐。
워낙 돈 많은 사주가 경영하는 통신사라 입사지망자는 줄을 이었다。 어디서 누가 몰아오는지 매일 한명 두명 기자티임이 늘어갔다。 8·15전엔 뭣을 하던 인간들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중이 떠중이로 진용을 메워나갔다。
경영진에서 제일 신문관록이 오래다는 김용채(金容采)씨도 그때엔 바지저고리에 지나지 못했다。 밑의 사람이 소개하면 그저 무조건 채용했다。 김씨는 사람이 좋고 언론계에 오래 봉직했다곤 하나 업무면에만 밝았지 편집면엔 백지였다。
그러한 그이기에「인사권」의 자기권한을 아랫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뺏기고 그 통신을 나중엔「적색통신」으로 몰고 가지 아니치 못하게 했다。 『죽 쑤어 ×좋은 일 한격』이었다할까。
해방 뒤 최초로 나온 그 일간통신4호 때부터 내가 편집책임을 맡고 앉으니 기자들의 시선이 몽땅 내게로 쏠렸다。
첨삭과 활살을 자유자재로 하는 내 붓끝을 낱낱이 감시했다。그중에도 아찔할 일은 기자들이 취재해오는 기사는 거의가 좌익편향、우익관계의 것은 말살하다시피한 그들의 해괴한 개조다。손톱으로 튀겨버릴 정도의 지방군소「인민위원회」따위도 길다랗게 침소봉대、노골적으로 예찬해서 써왔다。 여기서부터 그들의 마각은 드러나기 시작。
나의 회의는 날로 깊어만 갔다。 도대체 이자(기자)들이 그 통신을 저희들의 적계선전의 도구로 만들려는 것이냐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붉은 냄새 풍기는 기사는 정당한 뉴우스 외엔 여지없이 깎아버렸다。 그럴 적마다 소위 기자란 자들의 불평이 빗발치듯 했다。그러나 내 신조는 거기에 풀이 꺾일 수 없었는데야 어쩔 것인가。
하루는 이런 일이 생겼다。당시 우익과 좌익이 얽혀 혼란법석을 치른 그해 10월 중순이었다。 C보시대의 동료기자였던 S는 아직 정계에 나서지 않고 시국의 움직임만 정관하고 있던 고하 송진우(宋鎭禹)선생의 인터뷰기사를 써왔다。 그때로선 기사비중이 컸다。
그 내용은 맨처음 우익진영의 앞으로의 할일、또는「임정」이 돌아오면 그들을 지지하겠는가、그리고 미군정과의 제휴여부 등이었다。 모처럼 처음 알려진 민족진영의 향배를 밝힌 것이기에 정성껏 크게 취급했다。
이와 때를 함께해서 내게로 넘어오는 시시껍적한 좌익들의 날뛰는 기사들은 각각 건성건성 다루었다。 안 그럴 수 없었던 것이 열이면 열가지 기사가 모두다 기자의 입장에서 불편부당하게 쓰는 게 아니라 미사여구로 분식、좌익들의 극렬한 어거지 언동들을 마치「영웅적인」듯이 최대의 찬사로 미화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왜 기사차별을 하느냐고 기자들의 항의가 들끓었다。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기자도」였더냐。기사의 경중도 모르는 그 주제들에 기자가 되다니。
이래선「조선통신」의 운영은 며칠 못가리라고 판단내린 나는 중대결심을 했다。 어떤 날 김용채 씨에게『이꼴(적색통신화)을 보고도 그냥 방관하고 있느냐』고 강경하게 들이댔다。 R보고도 그랬다。몇 번이고 말을 했건만 별 반응이 없다。 김씨는 큰일 났다고 개탄만 하는가하면 R는 빙글빙글만 할 따름。
사람만 좋고 결단성이 약한 김씨에겐 일도양단의 용기를 도통 기대할 수 없었다。더구나 R의 속심은 도통 알기가 힘들었다。 그도「좌」였던가 의심해봤지만、그럴 사람이 아닌데 어쩐 까닭인지 태도가 애매했다。
기사들이 하나하나 내게로 넘겨올 적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역심도 났다。 그보다는 기자들의 눈초리들이 어딘지 모르게 독살스러웠다。 마치 나를 당장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이 도끼눈으로 바라봤다。
기사를 내손에 쥐어준 때엔 으례 한마디씩、『이건「특종」이요』하고 한통에 짠 듯 이구동성。 당장에 휴지통으로 처넣을 과격분자들의 신변잡사까지에도 똑같은 말투였다。
그때 김승식 사장은 돈만 댔지 발언권은 전부 김용채 부사장에게 일임했다。 특히 편집면에선 노우터치였다。 그러고 보매 김사장은 깨진 시루에 물 담듯이 아까운 돈을 공산당의 푸락치들을 위해서 내버리는 셈이 됐다。
날마다 한두 사람씩 끌어들이는 기자들이 모여서 두어달 동안에 30명 가까이 됐다。
그 기자가 그 기자인 적색분면의 군상。오직 외신부만은 안그랬다。최원렬(崔垣烈)이란 우익의 영어통도 있고。그 뒤엔 김규식(金奎植)박사의 아드님인 김진동(金振東)군도 거기에 들어왔지만 좌경돼가는 통신 꼴을 보다 못해 몇 달 만에 퇴진하고 말았다。 그것도 내가 물러난 뒤의 이야기다。
이렇듯 날로 좌익냄새를 노골적으로 풍겨가는 통신。나는 그만두겠다고 여러 번 사의를 김용채 씨에게 표명했건만 그는『왜 또 그래』하고 끝까지 괘사부리는 소리로 들어 넘겼다。 그리고 그럴 땐 으례 술 공세로 내 말문을 막아 버리곤 했다。
여기서 내가「근적자홍」이 되지 않으려면 마지막으로 비상한 결의를 할 때는 왔다。그것이 그해 12월 하순 나와「안효성(安曉星)」이란 좌익기자 사이엔 대판싸움이 벌어진 것이다(이항 미완)。
폭력화한 좌익기자
붉은 안기자가 어느 날 하찮은 기사 한 토막을 내 편집데스크로 넘겼다。안은 그 인상됨됨이가 무척 거칠었다。얼굴이 거무튀튀하고 눈알이 불량하고 목소리가 모질고 어느 모로 보나 질이 좋지 않았고、또 평소에도 제가 쓴 기사를 천대한다고 말끝마다 핑계 잡아 불평을 털어놓던 우악스런 사나이。
그날 그가 써내놓은 기사도 여전히 시시껍적한 적색찬양이었다。반고의 가치도 없는 글을 읽고나선 그에게『이것도 기사냐』고 한마디 쏘아댔다。번번이 편집자를 우롱하는 그 버릇을 고쳐주잔 속심에서였다。
그 순간이다。안은 벼락같이 재떨이를 들어 내면상을 향하고 후려갈겼다。나와 그의 거리는 불과 2m안팎。까딱했더라면 정통으로 맞아 큰일 났을 것인데 요행 빗나가 큰 화를 면했다。 이런 경우를 천우신조라 해둘까。
일이 이쯤 되니 내 진퇴문제에 결말은 난 셈이다。 그러지 않아도 그들 좌익기자들의 틈바귀에선 일을 못해먹겠다고 그만둬 버리려던 차에 그 꼴을 당하니 더 있으려야 더 참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럴 줄 모르고 사려 없이 맨 처음 그 통신사에 관계했던 게 내 불찰이다。
옆자리에 있던 R국장도 흥분、내편을 들어 안 기자를 힐책。 나는 내할 일을 끝내고 당장 중역실로 가서 사의를 선언했다。거기엔 목격한 R국장도 참석한 가운데 당일의 경과를 설명、그 따위로 통신을 적색 삐라화 시키려할진대 그만 문을 닫는 게 좋다고까지 극언했다。 그리고 나서 총총히 사를 하직했다。 이것이 그 사와 마지막 작별이다。
그날 밤이다。사의 중역들은 나를 위류시킨다고 어떤 일류요정에서 호화스런 연회를 열었다。그러나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나는 위스키 한 컵을 들이킨 뒤에 테이블을 두드리며 일장통곡。그러다가 중간에 그 자리를 빠져나와 다시는 그 사로 발길을 들여놓지 않았다。
나를 어찌 봤든지 편집부장자리에 앉혔던 R군에겐 우정상 미안하지만 내 신조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첫째는 불순사상과 타협할 수 없고、둘째는 언론도에 어긋나는 아전인수의 적색기자들과는 함께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 사장에겐 두 아우가 있다。전 함 부통영의 비서였던 명식 군과 그 다음이 현식 군。내가 그만두자 그 두 형제는 백방으로 나를 달래면서 자기들의 형님을 도와달라고 몇 번이고 간청했으나 근본적으로 숙청을 하기 전엔 나 혼자의 힘으론 뾰죽한 수가 없다고 끝끝내 고사했다。여기서 해방 후 재출발한 내 신문생활의 무형한 상처는 몹시도 쓰라리고 서글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편집국에 포진하고 있던 대부분의 기자들은 거지반이「사로당」계로 몽양의 앞잡이들이었다。 내게 폭행한 안 기자를 비롯、최×조 이×찬 조×구등이 그 족속、남로당계론 구성대출신의 황×인외 윤×현등이 대충 생각난다。
- 1945년 12월 23일자 1면, 막부 외상회의, 현재 미소 간 개재(介在)의 제 문제토의, 쓰·반 양씨 회담
(막부 21일 발 공립) 모스고의 외상회의는 아직 비밀에 부처 있는데 미 소 영 각 당국은 20일 오후 제 5일의 회담을 개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반즈 미 국무상은 이 회의 전후 야(夜) 스탈린 원수와 두 시간에 걸쳐 회견하였는데 현재 미소 간에 개재(介在)한 제 문제가 토의되었다고 당국자는 말하고 있다. (사진은 스탈린 원수와 반즈 미 국무장관)
- 우승규, 나절로만필, 탐구당, 1978년, 232쪽
L의 좌익가담 권유와 심지어 월북유혹을 단 일격에 물리쳐버린 내겐、또 하나의 붉은 마수가 널름거렸다。피호봉랑이었다 할까。
8·15뒤 좌경「조선통신」이 나온 뒤로부터 얼마 안되어 그와 유사한 통신이 또하나생겼다。처음엔 알쏭달쏭한 빛깔로 내놓더니 이 역시 차차 빨간 색채로 변모돼 갔다。 그러나「조선통신」처럼 아주 드러내놓고 적색선전을 하진 않았으되 어쨌든 두 통신이 막상막하였다。 그 이름은「공립통신」。
이 통신은 전 C보의 중역이며 총무국장이던 K모씨의 아우 K가 창간한 것。사의 위치는 명동에 있었다。 통신내용이랬자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고、외신은 초단파의 라디오를 들어 대충 흉내만 내며 일간통신의 구실을 억지로 해나갔다。
- 1945년 12월 25일자 1면,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 ①, 부동항 이권에 대한 풍설을 듣고, 본보 주간 설의식
중대한 불행을 초래하기 쉬운 이『풍설』이『정설』로 발전되기 전에 행(幸)여나 미연방지의 효를 얻어볼까 함이다.
- 1945년 12월 26일자 1면,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2), 이권운운은 독립부인 부동항요구의 풍설 듣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 업시는 중국의 완전한 독립이 보장 못된다』고 한 장 주석의 선언은 세계대세를, 극동정세를 달관한 지언이엿스니 미국도 또한 동일한 대세관이엿고 영국도 그러하엿다。 이리하야 맞춤내『조선의 자주독립』을 약속한『카이로 선언』이 생기게 된 것이니 이것이 모다 역행을 불허하는 대세의 소사다。(중략)
세계적으로 거보를 움즉이고 잇는 소련이 이 세계대세에 대한 명찰이 없을 리 없다。 더구나 이미 극동의 화약고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조선의 지위, 조선을 중심으로 한 극동정세에 몰이해할 이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그 자체의 혁명이론으로 보아서、그 이상으로보아서、또는 그 세계정책의 통념으로 보아서 어느 나라보다도 솔선하야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협력자임을 자기(自期)한 나라이며、약소민족의 자립을 위한 노력의 격려자임을 자부해온 우방이다。
- 1945년 12월 27일자 1면,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3), 제정시(帝政時)와 방불한 정세, 부동항요구의 풍설 듣고
소위 소련의 부동항문제란 그 유래가 원래 깊다。 이는 제정시대부터의 숙제이니 태평양방면에 원도를 가젓든 제정 로서아의 동점주의는 동기 결빙으로 반신불수나 다름없는 해삼위 일항만으로도는 심히 무력하엿다。그리하야 제로(帝露)는 당시의 늙은 청국을 주물러서 만주로 진출하엿던 것이다。 여순、대련의 획득을 비롯하야 남만철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경영은 그야말로 순풍 괘범식으로 진보되매 이에 기세를 얻은 제로는 일보를 경진하야 태평양진로의 요충인 조선반도에 착안하고 동점정책의 결실을 이 땅에서 지으려 하였다。이리하야 이조 말기의 조선국정에 가지가지의 화제를 남기엇든 것은 거세、숙지하는 바어니와 조선반도로 조수같이 밀리는 이 제로의 세력은 일본의 대륙정책과 조화될 이치가 만무하야 필경은 일로(日露)가 상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 결과 전쟁은 일본의 승리에 돌아가서 제로의 만주경영은 그대로 일본에 상속하고 말았다。(중략) 이 동점주의의 최대 요건인 부동항 문제란 원래『로서아』국토 자체가 가진 최대의 결함인 만큼 그 정체와 정권이 제로거나 소련이거나를 부문하고『로서아』자체로서는 해결하지 아니치 못할 거의 숙명적인 과제였는 것이다.(중략)
그러나 이번 만주 진공을 기회로 체결된 중소조약을 일별하건대 여순의 군사기지、대련시의집권、만철(滿鐵)의 공동경영 등등 그 어느 것이나 제로시대(帝露時代)의 형태에 근사치 않음이 없다。(중략)
더구나 이번 대전을 계기로 소련의 대외정책을 음미해보건대、침략까지는 아니라하더라도『방식이 다른 자가세력(自家勢力)의 확충』을 강행하려는 의도가 보임을 숨길 수 없다. 구주방면은 잠간 논외로 하더라도 근동방면의『이란』토이기 문제 등은 일전(一戰)이 생길지도 모를만한 정세에 이른 것으로 보더라도 소련의 방식을 짐작하기에 어느 정도 가능타 할 것이다。 극동방면은 외몽고가 완전히 소련의 의욕대로 되었고、만주가 구태(舊態)로 근접된 위에 삼팔선이란 괴상한 장벽이 그대로 존속되어 잇는 이때에、원(元)、청(淸) 양항에 대한 이권요구 운운의 풍설은 단순한 풍설이라고 들어버리기에는 제로(帝露)의 과거 실적과 소련의 현하 실정이 너무도 심각한 바 있음을 느낀다。
- 1945년 12월 28일자 1면,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진설이면 피로써 항쟁
삼팔선의 일시적 분단도 오히려 자주 독립을 전제로 하는 모든 노력과 공작에 치명적 타격이며 은인의 한도에 막다른 모욕이어늘 영토와 주권을 직접으로 침해하는 그같은 거조(擧措)를 어떠케 용납할 것인가? (중략)
소련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얼간 망족(亡族)』이 잇다하면 그들은 작약(雀躍)하리라. 조국까지는 아니라하더라도 그와 방사(倣似)한 생각을 가짐으로서 자가(自家)의 존재를 보지(保持)하리라하는 도배가 잇다하면 그들은 묵인도 하리라。(중략)
그러나 정설(正說)인 경우에는 단연코 항쟁을 불사(不辭)할 뿐이다。
-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정치학),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 강연, 2011년 11월 16일 경희대 청운관 B117 강의실, 경희대 홈페이지
펜실베이니아대학 이정식 명예교수의 ‘2011 석학 초청 특강’ 두 번째 강의가 지난 11월 16일 서울캠퍼스 청운관 B117호 강의실에서 2시간 30분 동안 열렸다. ‘중국의 내전은 한국 분단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제목의 이날 강연은 80세의 노학자가 최근에 얻은 결론을 처음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중국의 내전이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는 주장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것”이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50년 동안 연구해온 자신도 이번 특강을 준비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만주에서 전개됐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팔로군)의 내전이 한반도 분단에 끼친 영향을 역사적 근거와 개인적 체험을 통해 설명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반도의 국제적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에 대한 국내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으며, 좌익과 우익 모두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8.15 해방으로 독립을 기대했는데 신탁통치로 독립이 지연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은 서울운동장에서 신탁통치 반대 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다가 갑자기 신탁통치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이는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며, 조선공산당이 자주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이후 한국의 정세는 대규모 파업 등 충돌과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지만 이 같은 내적 요인이 한반도 분단을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것이 이정식 명예교수의 주장이다.
당시 만주에서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만주지역의 이권에 관심이 있던 스탈린은 중공군의 승산이 없다고 판단, 1945년 8월 20일 중국공산당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의 투쟁을 중단하고 협조해 연립정부에 참여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열린 런던회의에서 일본 통치 참여와 트리폴리 지역 할양 요구가 미국과 영국에 의해 거부되자 정책을 180도 수정, 10월 8일 중공군에게 30만 병력을 투입해 투쟁을 재개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만주에서의 중국 내전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고 이정식 명예교수는 말했다. 소련은 일본군(관동군)에게 접수한 무기 등 군수물자를 중공군에게 제공했으며, 미국은 국민당 군대를 훈련시키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만주 내전 초기에는 주더(朱德)가 이끄는 중공군(팔로군)이 우위를 점하는 듯했지만 미군의 지원을 받은 1946년 5월 국민당의 신1군과 신6군이 만주지역으로 진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이에 스탈린은 패퇴하고 있던 중공군을 위해 북한지역을 후방기지로 제공했다. 국민당 군대는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국경을 넘어올 수 없었으며, 중공군은 북한지역에서 휴식을 취하고 소련군의 군사훈련을 받으며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됐다. 당시 북한지역을 통해 중공군에게 보급된 군수물자는 1946년 2만 톤, 1947년 21만 톤, 1968년 50만 톤에 이르렀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스탈린은 당시 북한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고,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국제적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였지만 실제로 원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할 경우 한반도에 대한 지분이 4분의 1로 줄어들기 때문에 북한지역을 전부 장악하기를 바랐다는 분석이다. 그 근거로 이정식 명예교수는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소련 점령지(북한지역)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문을 발송한 사실을 들었다.
- 뉴욕타임스 1945년 12월 25일자, KOREAN NEWS AGENCY FORMED BY 9 PAPERS
SEOUL, Korea, Dec. 24 (AP)– Press freedom made significant progress in the American-occupied section of Korea today with independent operation of the new Korean news agency, Hapdong-kp. The last two letters, KP, were added for English-speaking purposes, signifying Korea Pacific Press.
- 1945년 12월 25일자 1면, 양사 합동통신으로 발족
지난 24일 군정청발표에 의면 12월 22일에 군정당국에서 처음으로 국제통신을 조선인의 기관으로 인정하였다. 종내 동맹 통신기관이 군정청으로 접수된 후 연합사(聯合社)와의 합동안이 군정관위원회에 제출되여 동위원회들은 합동에 관하야 숙의한 결과 아놀드 소장에게 유리한 보고를 한 후 동(同)소장으로부터 정식허가가 되였다. 군정청관리를 밧은지 단 3개월만에 오래 고대하든 이상 즉 신문의 자유가 조선에 보증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