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선거]<中> 선거 시기별 갈등 요인은?
《 총선에서는 공천으로 인한 갈등이 주목을 받고, 대선에서는 당내 갈등이 부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거 시기 이념이나 정책이 아니라 공천과 자리를 놓고 다투는 패거리 문화 때문이다. 동아일보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물결 21’(연구책임자 김흥규 교수)이 1947년 7월 21일부터 2012년 3월 26일까지 선거 시기 동아일보 기사에 나타난 단어들을 분석한 결과다. 대선 전 1년, 총선 전 6개월간(1990년대 이후는 대선 전 6개월, 총선 전 3개월간) 디지털화한 신문 기사 단어 3억 개를 데이터 마이닝 기법으로 분석했다. 》
○ 갈등이 없으면 기사가 없고 줄 세우기가 없으면 대권도 없다?
동아일보는 18대 총선(2008년) 한나라당 공천에서 친박계(친박근혜계)가 ‘공천 대학살’을 당한 뒤 “박근혜 전 대표가 폭발했다”고 전했다. 박 전 대표는 “약속과 신뢰가 지켜지기를 바랐지만 결국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당 지도부를 비난했다(2008년 3월 24일자).
공천 전 친박계 위주의 ‘살생부’가 나돌았다. 김무성 김기춘 이강두 이인기 김재원 한선교 등이 줄줄이 낙천의 고배를 들었다. 이들이 탈당해 만든 ‘친박연대’(33위)란 말이 떠올랐고, ‘공천’이란 말(45위·1524회)도 많이 등장했다.
올해 19대 총선에서는 친박계가 칼자루를 잡았다. 이번엔 친이계(친이명박계)가 칼날에 베여 피를 흘렸다. 안상수 진수희 이방호 안경률 신지호 진성호 등 친이계 대다수가 몰살됐다. 친이계의 이재오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감정적, 보복적 공천을 하지 말라”며 날을 세웠지만 그 칼날은 이미 무뎠다. ‘친이계’의 키워드 순위는 ‘친박’(69위)보다 높은 36위였다. ‘친박’보다 ‘친이계’가 도드라지게 신문에 등장했다는 의미다.
민주통합당의 계파 갈등도 신문의 주목을 받았다. 공천에서 한명숙과 문재인을 중심축으로 하는 노무현계가 약진했고,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호남 중심의 옛 민주계는 힘을 못 썼다.
통합진보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기호 전 판사의 비례대표 순번을 놓고 공동대표끼리 맞서기도 했다. 이정희 공동대표의 총선후보 사퇴는 경기동부파니 울산파니 하는 계파 문제를 확인시켰다. 각 당의 계파 갈등으로 ‘공천’은 19대 총선에서 키워드 순위 18위를 차지했고 2032회 신문에 등장했다.
○ 총선은 공천 줄서기
선거 시기 계파 갈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분석한 결과에서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반발로 출범한 민주당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계파를 나타내는 ‘신파’ ‘구파’란 단어가 4·19혁명 후 치러진 5대 총선(1960년)에서 처음 키워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는 신익희 조병옥이 이끄는 민국당을 주축으로 장면 정일형 등의 흥사단계, 현석호 김영삼 등의 원내자유당계, 조선민주당계 및 무소속구락부, 대한부인회의 박순천 등이 참여했다. 민주당은 창당대회에서 신파와 구파 간 막후 조정으로 최고위원 등 주요 당직을 철저히 5 대 5로 안배했다. 배분 과정에서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5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치열한 경쟁 끝에 신파 113명, 구파 108명의 공천을 확정했다. 양 파벌과 관계없는 후보는 6명뿐이었다. 공천이 발표되자 공천에 탈락한 사람들은 제각기 소속 계파의 이름으로 ‘신파 공천’ ‘구파 공천’을 내세워 입후보했다. 그야말로 ‘사천(私薦)’이었다. 신파 공천 지역 중 55곳에서 구파의 지원을 받은 후보가 입후보했고, 신파는 구파 공천 지역 26곳에 후보를 내세워 지원했다. 민주당 ‘구파’가 540회(23위), ‘신파’가 336회(34위) 신문에 등장했다.
총선이 끝난 뒤 당선자대회도 별도로 열었다(1960년 8월 6일자). 구파의 ‘아서원 대회’에는 95명, 신파의 ‘대명관 대회’에는 85명이 참석했다. 이러한 계파 경쟁으로 정권이 약화되고 결국 5·16군사정변을 맞게 된다.
유신 말 10대 총선(1978년)에서는 ‘공천’(3위)과 ‘계보’(85위)가 키워드로 떠올랐다. 주류인 이철승(38위)과 비주류인 김영삼의 공천 갈등이 극심했다. 아예 ‘파벌’이 선거와 관련해 주요 키워드로 등장했다.
김영삼(YS)과 김대중(DJ)의 계파도 1980년대부터 공천을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갈등한다. 당초 YS는 민주당 구파에서, DJ는 민주당 신파에서 출발했으나 그 후 각 거주지를 따라 상도동계, 동교동계로 불렸다. 양 계파는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구성했다. 12대 총선(1985년)에서 ‘민추협’(13위)은 이철승 김재광 이기택 등 비민추협 인사들과 함께 ‘신한민주당’(7위)을 창당한다. 이 과정에서 ‘신당’(14위) 입당을 위한 관제 야당의 탈당이 이어졌고, ‘탈당’은 선거와 관련해 주요 키워드로 떠올랐다. 공천은 철저하게 계파 안배 원칙에 따랐고, ‘계파’는 이 시기 선거 관련 주요 키워드로 등장했다.
○ 대선의 계파 관련어는 창당 분당 경선
YS와 DJ는 대권을 눈앞에 둔 결정적인 순간에 늘 대립했다. 6월 민주항쟁 직후 13대 대선(1987년) 때도 그랬다. 통일민주당의 양 계파는 대선 후보로 YS와 DJ 중에서 누구로 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다 ‘분당’(68위·315회)했다. 한 지붕 두 가족이던 ‘상도동계’(445회)와 ‘동교동계’(669회)는 민주세력의 ‘단일화’(13위·1415회) 요구를 외면했다.
5·16군사정변 후 치러진 5대 대선(1963년)에서는 ‘창당’(30위·320회)이란 단어가 연일 신문에 나왔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한 정치활동 규제에서 해금된 야당 인사들의 계파별 창당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16대 대선(2002년)부터는 ‘경선’이 주요 키워드로 떠올랐다. 여야 모두 당내에서 치열한 ‘경선’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계파 갈등을 나타내는 ‘반노(반노무현계·16대·96위)’와 ‘친노(친노무현계·17대·51위)’ 같은 단어가 대선 시기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계파는 자신이 몸담은 권력이 저물면 미래권력을 향해 우르르 몸을 옮긴다.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주류인 민정계의 다수가 YS 쪽으로 이동하자 ‘신민주계’란 단어가 떠올랐다. 박근혜가 대세론을 형성하자 당내 친이계의 움직임과 관련해 ‘월박(越朴·친박으로 넘어감)’ ‘주이야박(晝李夜朴·낮에는 친이, 밤에는 친박)’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정치는 파벌을 낳고 파벌은 정치를 배신한다는 말 그대로다.
4·11총선이 눈앞이다. 여야 정당의 계파 보스는 총선의 승패에 정치 생명을 건다. 마음속으로는 자기 정당 후보 중에서도 자기 계파 후보자의 당선을 더 간절하게 바랄 것이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영훈 기자 leejin97@donga.com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