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잔류요인 일행이 귀국한 뒤 다음날 김구 주석의 숙소에서 열린 회의는 ‘동경(憧憬)턴 고국서 역사적 국무회의’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소개됐다. “조선의 장래를 축복하는 듯 눈이 온 뒤 맑은 날씨였다.”
오전 11시가 지나서 역사적인 국무회의가 개최되엿는데 이 회의에서 가르칠 조선의 방향을 듯고저 대기하고 잇는 기자들은 벽에 걸린 시계만 치여다보며 초조하게 대기하고 잇다.
기사는 1945년 12월 4일자 1였다.
김성수 2 김준연 고희동 등 동아일보 사람들이 주축이 돼 1945년 12월 9일 대한국민 총회가 발족 3했다. “임시정부가 환국하였으니 즉시 독립을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연합국에 요청한다”는 취지였다.
김준연 발기인 4은 동아일보에 “조선의 독립이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 중국 영국에 의해 인정됐다”고 썼다.
카이로 선언에 있어서『적당한 시기』에 독립이 승인된다는 기한이 붙어있기는 하지마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8월 15일에 발포된 이래 벌써 5개월을 지나서 미소 양국의 무력에 의하여 우리 국내에 있는 일본군의 세력이 그 무장해제를 완전히 당하였고 또 중국 중경에 있던 우리 임시정부가 주석 김구 각하 이하의 당당한 진용을 세워 이미 환국하였으니 때는 바야흐로 독립승인하기에 적당한 시기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1945년 12월 12일자)
특히 포츠담 선언에서 소련도 그에 대해 찬성했으니 미중소영 4개국의 독립 승인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국민 총회에서『본총회는 대한전국민의 이름으로써 대한민족의 즉시 독립을 연합 4개국에 요청함』이라고 결의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12월 12일자)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식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송진우 5및 홍명희 6의 환영사와 김구 주석 7 및 이승만 박사 8의 답사를 실었다. 송진우의 환영사는 1면 사설 대신이었다. 1920년대 홍명희 다음의 동아일보 주필이 송진우였다. 홍명희의 환영사는 환영대회 회장 권동진의 글을 대신 읽은 것이다.
삼천만 민족의 총의로 조국애에 타오르는 의열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우리 임시정부의 개선을 환영하는 민족적 성전이 19일 오전 11시에 서울그라운드에서 개최되었다.…순식간에 장내는 15만의 군중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으며…일동의 애국가합창 이화여전의 환영가 합창이 끝난 후 홍명희 씨의 환영사가 있었고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와 김구 주석의 열렬한 답사 및 이승만 박사의 답사가 있은 후 천지를 진감(震憾)하는 만세삼창으로 환영회는 폐회되었다. (1945년 12월 20일자)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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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4일자 1면 동아일보
憧憬턴故國서歷史的國務會議主席金九閣下統裁下國務委員初會合李承?博士 先着으로登廳〃國政議論은안햇다國會直後 趙外交部長談休會코軍政府訪問金副主席政府를代表空陸遠程 風雪을무릅쓰고昨夕漢陽에安着한 臨時政府殘留要人一行은 韓美호털에서 一夜를安息하고白髮老齡임에도 不拘하고愛國情勢에넘치어 疲勞도모르는듯 朝鮮의將來를祝福하는듯이 雪後에快晴된十二月三日 이날上午十一時|京橋□政府主席宿所의門前에는一朔을넘겨 多端한國內의情勢를살펴가며統一하려努力하여온李承晩博士의登廳을비듯하야長男을帶同한議政院院長洪震老先生、趙素?、柳東說、申翼熙、柳林諸先生一行은前後하야登廳하엿다上午十一時가지나서歷史的인國務會議가 開催되엿는데이會議에서가르칠朝鮮의方向을듯고저待期하고잇는記者들은壁에걸린時計만치여다보며焦燥하게待機하고잇다午後二時가나서 會議는一旦끗나게되여 二時半에趙?景外務部長이 政府을代表하야 다음과갓튼 談話를發表하엿다 내가海外에서잇을때에 外國新聞記者와問答에잇서서 遺憾되는바가 두가지잇섯다朝鮮國家를爲하야 先生과問答할時期가 어느때에올것인가 하는境遇다 또하나는 朝鮮國內에서 國民全體가 大韓臨은政府를支持하는가의 如何를무를때이다國內情勢가 多端한 此際重要한 자리에 잇는文化界의 諸氏가 우리一行을 盛大히歡迎하여주고今日또 如斯히 차저주니亡命生活三十年來 第一愉快히 生覺하는바이다 午前에 國務會議가開催되엿으나 金九主席以下 先着한一行이 지난 十日間國內情勢와지나온 四十年間 國內의 歷史를읽엇는데 昨日드러온 우리一行은 아즉 國內歷史를 읽지못하고 方今 첫페지를여러노앗슬뿐이다함으로記者諸氏가 궁금이알고 듯고저하는政治的問題에對해서는 言及치못하겟다 이點에잇서서는우리가 全部讀破한後 드러주기바란다 그리고여러분은民衆을代表하야 正確하고 眞摯하게 情勢를把握하야 報道하여주면우리도合理的으로合法的으로 意見을採集하는것보다도 그대로붓잡아서實行하여나가겟다記者團과의會談을 끗마친趙素?氏는 副主席○奎植氏와가치 軍政廳하찌將軍과 아놀드軍政長官을 訪問하야 還國하엿다는 人事를 하고도라온卽後 午後三時에 本格的인 國務會議는 續開되엿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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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동아일보 사장), ‘해방 3년의 역사적 공간과 인촌’,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년 추모집 인촌을 생각한다, 동아일보사, 2005년, 210~221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거대한 독립운동인 3·1운동의 결과 1919년 4월 13일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충칭(重慶)으로 옮기면서도 일관되게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실상 유일 정통의 망명정부였다. 이렇게 볼 때 인촌이 임정봉대론으로써 해방정국에 대처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인촌의 임정봉대론에 대조된 노선이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비상시국-비상방법론’이었다. 그는 8월 15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받아들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데 이어 이것을 기초로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수립을 선언했는데, 이 일련의 행동을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방법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써 정당화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른바 인공에 대해 평가하기로 한다. 우선 인공을 출범시킨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 정체가 불분명했다. 인민대표자를 뽑는 선거도 없었고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대회가 열리는지조차 대다수 인민대중은 잘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인민대표자 또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라는 이름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취약했다. 이렇게 볼 때 이 대회가 정부 수립과 같은 민족적 대사를 공식적으로 논의하고 선포할 권한이나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인공의 또 하나의 문제는 지도부 구성이 자의적이었다는 점이다. 중앙저부 주석에 이승만(李承晩), 내무부장에 김구(金九), 외무부장에 김규식(金奎植), 군사부장에 김원봉(金元鳳)을 선출했으나 당시 해외에 머물던 그들과 교감 없이 취해진 일방적 결정이었다. 북한에 있던 조만식(曺晩植)과도 협의 없이 그를 재무부장으로 발표했다. 심지어 서울에 있기에 협의가 가능한 김병로(金炳魯) 및 김성수와도 아무런 협의 없이 사법부장과 문교부장으로 발표했다.
인공은 자신의 위상을 올리기 위해 국내외 명망가들의 이름만 빌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했기에 인공이 일방적으로 각료 명단에 포함시킨 사람들 가운데 거의 모두가 참여를 거부했다.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부터가 인공을 외면했다. 1945년 10월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한 그는 박헌영(朴憲永)을 비롯한 인공 측 인사들이 찾아와 주석 취임을 간청했지만 깨끗이 거절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요인들의 반응은 더욱 냉담했으며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1945년 11월 망명지 중국에서 귀국한 그들은 임정이 존재하는 마당에 무슨 정부를 또 만들었느냐고 인공 측을 힐난했다. 그들은 집무실이자 거처인 경교장으로 여운형이 찾아왔을 때도 노골적으로 박대했다. 여운형을 몸수색까지 하면서 몰아내다시피 한 것이다.
인공은 이처럼 민족 내부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인공을 부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민공화국을 지향했다는 사실 때문에 인공을 인정할 것으로 보이던 소련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서울에 주재하던 소련 총영사관의 총영사 알렉산드르 폴리안스키(Alexandr Polianskii)는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 정부를 아무도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논평했다. 소련 총영사관의 도서실장 파니아 이사코프나 샤브시나(Fania Isaakovna Shabsina)는 “인공은 조선 혁명의 토대가 북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모스크바의 매체들도 인공을 무시하는 소련 정부의 시각을 반영해 인공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평양에 주둔한 소련점령군사령부의 시각은 훨씬 더 부정적이었다. 이 사령부에서 정치공작을 담당했던 그리고리 코노비치 메클레르(Grigori Konovich Mekler) 중령은 1945년 9월 하순에 인공의 각료들을 분석하면서 이승만을 ‘친미반소의 대표적 반동’으로, 김구를 ‘중국국민당의 앞잡이이자 반소적 인물’로 규정했다. 메클레르는 인공의 부주석과 총리로 각각 발표된 여운형과 허헌(許憲)에 대해서도 ‘일제의 총독부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친일분자’로 매도했다. 그는 이와 같은 분석을 토대로 인공을 ‘반소적 친미적 반동집단’이라 결론 내리고 그것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1945년 10월 13일 소련점령군의 감독 아래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 5도 열성자대회’가 북한에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북국’을 창설하기로 결의하면서 그 결정서에 인공을 부정하는 조항을 좋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에 따라 김일성(金日成)은 그해 11월 15일에 열린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의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인공을 몇몇 사람이 골방에 모여 만든 것이라고 혹평하면서 “우리는 이것을 정부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상에서 살핀 인공에 대한 민족 내부의 반응 및 미국과 소련의 시각을 종합할 때 인공은 처음부터 좌우와 남북을 아우르는 중앙정부가 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임정봉대론에 서서 인공 참여를 거부한 인촌의 결정이 정당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인촌이 임정봉대론을 폈다고 해서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정계의 일선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교육자요 언론인임을 자처하고 이 방면에서 건국사업의 일역을 맡고자 했다. 그래서 일제 말기에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격하된 보성전문학교를 고려대학교로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 사이인 1945년 12월 1일에는 일제가 1940년에 강제 폐간시킨 동아일보를 복간했다.
인촌은 이렇게 교육과 언론에 정력을 쏟으면서 고하가 정계 일선에서 활약하도록 적극 도왔다. 인촌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1당 독재주의와 영토 팽창주의, 그리고 남한을 휩쓰는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건강한 보수우익세력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고하와 더불어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고 한민당과 미 군정청의 제휴를 성립시키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해서 건강한 보수우익세력의 육성이 인촌의 궁극적 정치목표일 수는 없었다. 이 시점에 그가 설정한 당면과제는 임정의 조속한 환국 실현과 임정 중심의 독립정부 수립이었다. 그래서 그는 임정환국환영회, 국민대회준비회, 환국지사후원회 등의 조직을 적극 후원했고 특히 이승만이 국내의 다양한 정치세력을 결집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키는 일을 힘껏 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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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0일자 2면 동아일보
獨立促成을決議聯合國애要請大韓國民總會서採擇『포쓰담』宣言을 承認하는 日本의 無條件降伏以後벌서 四個月을마지한우리三千萬民族은 果然인재自主獨立을 完成할수잇슬가『카이로』宣言에依하면『適當한時期』에自主獨立國家를 承認한다고하엿스니 우리는 하로라도 速히 獨立國家로서의 國際承認을 三千萬民族의 總意로써 聯合諸國에要請하는同時에 日本帝國主義의□政과戰禍에呻吟하고잇스며 混 亂麻狀態에잇는朝鮮國內의 經濟狀態에 對하야 復興救濟委員會(언라)의援助를 要求하자는趣旨下에 昨九日午後二時부터 市內□文中學講堂에서 大韓國民總會는 高□東司令下에 開催되엿는바議長選擧에들어 金性□氏議長에 被任金俊淵氏經過報?가잇슨다음 別項과갓흔 決議案을可決하고 字句修正은 修正委員會에 一任하기로하고 同日總會는圓□裡에同日午後三時半修了하엿다(寫眞은總會場)決 議 案一、本總會는大韓全國民의이름으로써 大韓民族의卽時獨立을 聯合四個國에要請함一、北緯三十八度界線은戰爭이終熄되고 日本軍의武裝解除가完了된 今日에잇어서 그必要가全然업게된것이다 그럼에도不拘하고 그것이存續되여잇스므로 人的 物的 交流를妨害하야 우리民族의統一을破壞하고經濟生活을 不可能케하므로 本總會는 大韓全國民의이름으로써 그卽時撤廢를 聯合四個國에要請함一、우리大韓은 部分的으로 戰場化하엿을뿐이지마는 三十六年동안 帝國主義日本의 搾取를當하엿고 中日戰亂□ 美日戰爭의 發生後에는 그것이極度에達하야 物質의强制的供出이 無所不至하야 民衆生活의 窮乏이 極端에이르럿엇다그런데다가 八月十五日降伏以後에 日本政權은四十五億圓이나되는 巨額의紙幣를 一時에濫發하야通貨의總額을 八十億圓에達하게하야(平時通貨發行高二億圓假量)우리經濟界를 混亂케하고 重要物資를 投水或燒却하며重要建物을 爆發放火하는 等의 謀略을敢行하야 最後의發惡을 行하엿다 그러므로經濟生活의逼迫은 말할수업는 形便이다 이라한 實情下에 잇스므로本總會는 大韓全國民의이름으로써 美國政府에對하야 우리大韓에 □國際復興局(언라)의活動을積極的으로 하게하고 더욱이 石油 自動車、機械類、衣類、醫療品等의物資로써 積極的으로 經濟的援助를 하여주기를要請함決議案□一、本總會는 大韓全國民의이름으로써 大韓民族의解放에 ?大의 □援助를 行하여준 美、中、蘇、英□□國에 對하야□心으로 感謝의 意를表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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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12일자 1면 동아일보
大韓國民總會의意義 總會發起人 金 俊 淵一우리大韓獨立은 카이로宣言에依하야 美中英三國에依하야 認定된바이다 中國將介石主席의發議에 依하야 美國大統領루스벨트氏와 英國首相처칠氏가同意한것이엇다 傳하는바에依하면 宋美齡女史의通譯을 그意思가 蔣主席으로부터 美英兩國代表에게傳達됨에 美國大統領은卽時承諾하고 英國首領은沈默良久에 承諾하엿다고한다二英國首相이 承諾하기를躊躇한것을 理解하기어럽지아니한것이니 그는大韓問題를 解決함으로因하야그影響이 印度에波及될것을 念慮한것이엇다 印度의解放은 不可避의 事實이라하겟지마는 英國自體로보아서는 큰問題라고하지안흘수업는것이다 英首相처칠氏는 自身이 大英帝國의淸算者가 될생각은업다고말하엿다 이와가치自己는 大英帝國의保全維持에 努力하엿던것이다三그러나 英國式의 殖民政策은 벌서維持될수업는것이니 英國首相이면서도우리獨立을 認定하지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엇다는點에잇서서 今次世界大戰의 特徵이 看取되는것이다 人類를 解放의 큰길로 引導하게된 偉大한힘은 히틀러의 巨大한 組織力과 日本軍閥의 狂信的世界?合主義에 依하여서도 磨滅되지안코 다시그偉力을 發揮하게된것이다 그러나 英國은 安心하고 印度의解放에 協力하여도 조흘것이니 獨立後에 美英間의 貿易額이훨신增加되엇다는것을 생각하여보면 印度人의 人心을 把握하여두면 英印間의關係도 그대지 念慮할것이 업슬것이라고 생각되는바이다四個人間에도 그러하지마는 國家間에도 亦是그러한것이니 暴惡急道한行動이 長久히 그勢力을 維持하기는 어려운것이다더구나交通及通信機關이今日과가치 發達되고 人智가 極度로發達된이때에根據업는 暴力이 오래維持될수는업슬것이니저日獨兩國이結局 秋風落葉과가치 崩壞된것은 當然한일이라하겟다 이世界의 大運을 타고나타난 우리朝鮮獨立은 三千萬民衆의가슴속으로부터 끌어오르는要求와 相應하야 現下世界의 一大事實化 하려고 하는것이다五카이로宣言에잇어서『適當한時期』에 獨立이承認된다는 期限이부터잇기는하지마는 日本의無條件降伏이 八月十五日에發布된以來 발서 五個月을지나서 美蘇兩國의武力에依하야 우리國內에잇는 日本軍의勢力이 그武裝解除를 完全히當하엿고또 中國重慶에잇던 우리臨時政府가 主席金九閣下以下의 堂堂한陣容을세외이미 還國하엿스니 때는바야흐로 獨立承認하기에適當한時期라고하지아니할수업는바이다 포쓰담宣言에잇어서 蘇聯도 그에對하야 ?同의意思를 表하엿스니 美中蘇英四個國은卽時 우리獨立을 正式承認하는것이 當然한줄로생각하는바이다 그러므로大韓國民總會에서『本總會는 大韓全國民의 이름으로써 大韓民族의 卽時獨立을 聯合四個國에 要請함』이라고 決議한것은참으로 適切한것이라고하지안흘수업다 우리三千萬同胞의一致한 이 부르지즘에 聯合友邦諸國은 速히 呼應할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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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0일자 1면 동아일보
臨時政府歡迎辭 宋 鎭 禹 오늘大韓民國臨時政府諸位를 마지하야 歡迎會를開催하게된것은 우리三千萬民衆의 無限한 感激으로녀기는바이며 또한 이자리에서 歡迎의辭를 올리는 本人의 無雙한 光榮으로 생각하는바입니다생각컨대庚戍以來 倭敵은이땅을蹂?하고 이百姓을苛壓한지라 政府諸位는義憤을품고 怨淚를먹음은채 海外로亡命한지 三十六個星霜 悲雨慘風中에도一意初一念을 구피지안코오직祖國의 光復을爲하야毅然히 血鬪勇戰하여왓읍니다 特히 一九一九年民族自決의 時潮에따라서三千里坊坊谷谷에 傍ο한獨立萬歲의소리에 呼應하야李承晩博士를 初代大統領으로 推戴한 大韓民國臨時政府의樹立은 世界에우리民族의 存在를宣揚하엿고 一九三二年四月二十八日上海事變이 終局을?할지음에 金九主席의 用意ο到한 指導下에서 義士尹奉吉先生의 痛擊은 倭將白川을 爲始하야 文武巨頭를 爆死或은 重傷케하므로써 우리民族의聲價를 天下에ο知시켯읍니다어찌그뿐이겠습니까 勇略無比한 義烈團의 活動을비롯하야 許多한革命的事實은 마디마디民族鬪爭의痛恨史이엿습니다 우리가이러한點을 默默히 想起할때에 金九主席 李承晩博士를爲始하야 政府諸位의 우리民族에게준 貢?이야말로 實로 ?大하다하지안흘수업는것이매 오늘三千萬民衆이政府諸位를마저 歡呼하는것은 決코然□□이아닌가 생각합니다그러나內外情勢를 環視하건대 우리나라에는 八月解放以來 獨立이約束만된채 疆土는斷?되고 思想은□□하야 容易히統一되고□□될 氣運이看取되지안흘뿐더러 聯合國의分割軍政은 國際的으로 微妙한動向을 示하야 完全한自主獨立의達ο에는 아직도前途가 遼遠한感이없지안나니 政府諸位를마지하야 歡迎하는이날에잇서서 이러한報?를하지안흘수없는 우리는眞實로遺憾스럽게 생각함니다그러나事態는 時急한解決을要하나니 그解決方法은오직한가지가 잇다고밋습니다 一九一九年以來 우리民族의政治力의 本流로서 信念해왓든 臨時政府가中核이되어서 모든亞流支派를求心力的으로 凝集하므로써 國內統一에 ?對의領導를 發揮하는同時에 우리의自主獨立의 能力을國外에宣示하야 急速히聯合國의 承認을要請하지아흐면 아니될것입니다이에우리는 政府諸位의政治的力量과 手腕에期待한바 크다하겟거니와 우리도政府諸位의 賢明한指導에 協力하므로써 國民으로서 擔負하여야할 責務에?對로 忠實할것을盟誓하는바입니다 蕪辭로써歡迎의辭를 대신함니다大韓民國二七年十二月十九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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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0일자 1면 동아일보
唯一의 우리政府 洪命熹氏의歡迎辭 大韓民國臨時政府要人을 이자리에 마지하여 感激에 마지안는바잇습니다더욱이 領袖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이시게되였으니우리들의 기쁨은 이우에없읍니다 朝鮮은臨時政府要人이 가게시든 中國과聯合國의援助로 解放되였습니다그런데聯合國은 우리의平和와獨立을 約束하얏스니 엇지平民의 資格으로마져들이겟슴니까 이제우리三千萬同胞는 우리의唯一無二한 우리臨時政府를奉戴하고 一致團結하야祖國獨立에 奮鬪하기를盟誓하는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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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0일자 1면 동아일보
金九主席答辭親愛하는同胞諸君!나는오늘이盛大한歡迎을바들때에무엇보다도먼저우리臨時政府를代表해서오랫동안倭敵의統治下에서가진苦難을當하여온國內同胞兄弟에게가장親切한慰問을드립니다나와 밋臨時政府同人들이오늘이자리에서同胞들의이와갓치熱烈한歡迎을밧게될때에果然形言할수있는感激이잇고興奮이잇슴니다數十年間 海外 에서 流離顚沛하든 우리들로서그립든 祖國의땅을 밝게되고 사랑하는同胞들의품에안기게된것은 참으로無上한光榮이외다 여러분은 여러분도아시는바와같이 우리臨時政府는 三一大革命의民族的 大流血鬪爭中에서 ?出한唯一無二한政府이엿습니다 그야말로 全民族의總意로組織된政府이엿고 同時에倭敵의朝鮮統治에對한 唯一한敵對的存在이엿습니다 그렇므로 우리臨時政府는 過去二十七年間 一大革命의精神을繼承하야 全民族總團結의立場과 民主主義原則을一貫하게 固守하여왓습니다 다시말하면 우리臨時政府는決코 某一階級某一黨派의政府가아니라全民族 各階級 各黨派의共同한 利害立場에 立脚한民主團結의政府이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政府의唯一한目的은 오즉 全民族을總團結하야 日本帝國主義를 打倒하고 韓國에眞正한 民主共和國을 建立하자는데잇습니다 그러나우리들의 奮鬪한結果는?時完全 한獨立을 取□하지못하고 所謂相當時其期獨立을 保證한다는同盟國의一紙聲明書를 어더가지고入國하게되잇습니다이것은 實로 遺憾千萬인□□□□ 今日우리가 이盛大한歡迎을밧기에 너무도부끄러운點이외다사랑하는 同胞諸君!今次 反파시즘 世界大戰의勝利의 結果로 우리의國土와 人民은 解放되엇습니다 그러나 이解放은無數한 同盟國人民과戰士들의 寶貴한 피와 땀의代價로된것이며 또亡國以□數十年間우리獨立運動者들의 計算할수업는 流血犧牲의 代價로된것임을이저서는 아니됨니다 只今우리는 國土와人民이解放된 이基礎우에서 우리의 獨立主權을 創造하는것이 무엇보다도 緊急하고 重大한任務이외다우리가 이任務를 達성하면 오직三一大革命의民主團結精神을 繼續發揚해야합니다南鮮北鮮 의同胞가 團結해야하고 左派、右派가團結해야하고 男女老少다團結해야합이다 우리民族個?人이血管속에는 다가치 □君聖祖의聖血이 흐르□□읍이다 極少의 親日□ 民族叛徒를除한外에무릇韓國同胞는 마치한사람가치긋게團結해야합니다오직이러한團結이 있은後에야비로소 우리의獨立主權을 創造할수있고 所謂三十八度線을 물러처업샐수있고 親日派、民族叛徒를肅淸할수있읍니다 나는確信不疑합니다 悠久한文化歷史를가진 優秀한우리民族은 時期에있어서 반드시團結될것입니다 그러므로나와 밋 政府同人들은보다더 만흔自信과勇氣를가지고 全民族各階黨派의 鐵가튼團結을 完수하기爲하야 奮鬪하려합니다親愛하는同胞諸君|只今우리國土를 分區占領하고있는 美蘇兩國軍隊는 우리民族을 解放하여준 恩惠기푼 友軍입니다우리는반듯이 그들을잘協助하야 倭敵의殘勢力을徹底히 肅淸하는同時에그들이回國하는날까지 모든便利와需要를 잘提供하여야함니다 또 우리는美蘇中英法等同盟國과 다가튼 親密한關係를가진中美蘇三國의 密切한合作을爲하야 努力해야함니다우리는 오직이三國의 親密한合作基礎우에서만 우리의自由獨立을 迅速히가저올수있읍니다 나는確信합니다 우리民族內部가鐵가티團結될때에 同盟國은 다가티우리獨立主權을承認하여줄것이며 우리의新國家建設을 爲하야 積極援助할것입니다사랑하는同胞兄弟姉妹를이여 우리國家의 卽時完全한獨立을 차□때는正히이때입니다 우리同胞들은三一大革命의 全民族總團結總蹶起의 精神을다시한번 發揚해서 우리의獨立主權을 찻고 自主平等幸福의 新韓國을 建設합시다 이것으로서 나의答辭는 끗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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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0일자 1면 동아일보
李承晩博士答辭要旨大韓半島三千里江山에 한자나 한치땅도 우리의物件아닌것이없음니다 우리扶餘民族三千萬男女中에하나도 이땅에主人아닌사람이없다 지금박게서는 우리를 넘겨다보는 나라들도있고 안에는 이나라를팔아먹으려는 分子들이있어 우리民族의 運命은朝夕에 달였다 그러나 우리民衆이 한몸 한뜻으로한뭉치를 이루워 죽으나사나 同進同退만하면 他國政府들이 무슨작정을하던지 아모걱정이 없을것이다 臨時政府要人을 마지하여 더욱 一致團結하여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