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가 발표된 28일 저녁 경교장 회의는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계속됐어요. 큰일 났다고, 선전포고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이런 기세로 나갔어요. 장시간 얘기했는데 결론을 못얻었고 이튿날 29일엔 오후 3시엔가 시작해 오후 6시까지 얘기했어요.” (김준연 전 동아일보 주필, ‘고하 암살’, 동아방송 정계야화, 1965년 8월 21일 방송)
1945년 12월 28~29일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경교장 회의 1에 고하 송진우와 함께 참석했던 김준연은 30일 오전 6시 반경 사위집에서 송진우의 암살소식을 들었다.
고하 송진우가 암살당한 원서동 집 별채.
“내가 배탈이 나는 바람에 온돌방이 있는 사위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해서 고하와 헤어졌어요. 오전 6시 반경 사위가 방에 들어오더니 ‘놀라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에 송 선생이 돌아가셨습니다’ 해요. 왜 돌아가셨을까요? 지금까지는 얘기 안했는데요. 동아일보 응접실 있죠, 사장실과 공장사이에. 거기서 내 외당숙인 한남수씨가 ‘이번에 고하는 임정 가까운 측에서 한 걸세. 미구에 우남(이승만 박사)도 해댈 작정이네’라고 해요.…고하는 임정을 절대 받들었는데 거기서 오해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되지요.”
고하 송진우 측에서는 믿으려하지 않았으나 암살 직후부터 임시정부 세력이 암살의 배후로 지목됐다. 2 역시 28~29일 경교장 회의에 참석한 고 강원룡 목사는 “해방정국에 충격을 준 그의 암살 사건은 고하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소문을 임정 쪽에서 퍼뜨리던 차에 일어난 것”이라며 “분명히 경교장 회의에서 그가 한 발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3 실제로 당시 동아일보에 접수된 투고 중에는 “한국민주당이 탁치청원을 했으므로 송진우 씨가 암살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4
한현우를 비롯한 암살범들은 다음해 4월 9일 범행 만 100일 만에 체포됐다. 5 그러나 그 배후를 둘러싸고 아직까지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6
“자주독립국가 건설, 비록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그 길로 매진하고 있을 때 네 사람의 정치지도자가 희생됩니다. 작은 힘이라도 서로 모아야만 했을 그 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암살이라는 방법이 서슴없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암살범 한현우에 따르면 송진우는 찬탁을 주장했고, 그래서 암살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송진우가 찬탁을 주장했다는 분명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는 단지 하루빨리 자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른바 ‘훈정론’ 입니다. 그는 또한 신탁통치에는 반대하지만, 그 방법에서 미군정과의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같은 그의 정치노선이 당시의 반탁 분위기에서는 찬탁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가 고원정 해설, KBS 다큐멘터리극장 ‘정치암살의 희생자들-제1부 고하 송진우’, 1994년 2월 6일 방송) 7
그가 세상을 떠난 1945년 12월에 쓴 것으로 보이는 잡지 ‘신천지’의 인물평에서 임병철은 고하 송진우를 ‘열(熱)의 신문인’ ‘뱃심의 정객’이라고 표현했다. 8 임병철은 동아일보 폐간 직전 사회부장을 지냈고 1946년 4월 편집국장에 오른다. 그는 1946년 1월 15일자로 발간된 이 잡지에서 “송진우의 용진하는 담력이 우리 정계에 거보를 내어 디딜 것”이라고 기대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고하 송진우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9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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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하 기자,「반탁」과「찬탁」의 회오리 ⑤ 남북의 대화 <56> 고하 송진우의 암살, 동아일보 1972년 2월 17일자 4면
사실 반탁방법을 둘러싸고 송진우는 미군정을 배격하고 임정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임정요인들과는 의견을 달리했다。당시 경교장에서 임정일을 봤던 장준하(張俊河)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28일 밤 각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경교장에서 반탁운동방법을 논의했읍니다。대표중에는 흥분해서 미군정을 엎어버리고 임정이 독립을 선포、통치권을 행사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읍니다。모두들 울분과 분노로 흥분할 뿐 반탁방법에 관해서는 차근 차근하게 말하는 분이 없었읍니다。
12시쯤 송진우 선생이 김준연 장택상 씨를 대동하고 경교장 회의실에 들어오셨읍니다。특유의 만또를 입고 단장을 짚으면서 회의장에 들어온 송진우 선생은 흥분한 대표들에게『내가 지금「하지」를 만나고 오는길인데 신탁통치라는 것이 여러분이 흥분해서 생각하는것만큼 그렇게 우려할만한 것이 아니다。반탁을 하되 미군정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보자』고 말하자 여기저기서『집어치우라』고 하면서 세찬반발이 일기도 했읍니다|。
이에 관련하여「고하 선생 전기편찬위」가 엮은「고하 송진우 선생전」은 요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탁통치안이 전해진후 국내는 물끓듯 소연하기만 했다。 8·15 해방의 기쁨도 사라지기 전에 한민족의 정치적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한편 지도자 암살설이 시정(市井)에 떠돌았다。
12월 중순께부터 원동 고하집 주변에서는 이상한 공기가 감돌았다。미군정에서도 이 기미를 알아채고 미군헌병을 파견할것을 제의해왔다。고하는 거절했다。12월 28일 밤 고하는 낭산 김준연을 대동하고 경교장의 임정을 찾아 신탁통치문제를 의제로 일련의 회의를 가졌다。고하와 임정은 신탁통치반대에는 이론이 없었으나 반탁방법에는 서로 상당한 의견차이가 있었다。
임정은 반탁방법으로 즉시 미군정을 부인하고 민족독립을 산포하는 동시에 정권을 인수하자고 하는 반면、고하는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부르짖게 하고、미군정과는 충돌을 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고하는 미국은 여론의 나라이니만큼 국민운동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족히 신탁통치안이 취소될 수 있고 한국독립을 열렬히 지지하는 중국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만일에 군정을 부인하고 임정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하면 반드시 큰 혼란이 일어날뿐더러 결국은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취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그리고 고하는 만일 임정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면 우선 미군정과 충돌해야하고 미군정과의 충돌은 미국 및 민주주의 제국과의 충돌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면 고하는 찬탁파요。 』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하게 하자는 것이요。 반탁으로 국민을 지나치게 흥분시킨다면 뒷수습이 곤란할 것이니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서 시국을 수습해야하지않겠소。』
『무슨소리요。 반탁뒤에 오는 모든 사태는 우리가 맡지。』
고하와 임정간에는 격론이 벌어졌다。깊은 밤중의 회의는 이론(異論)의 조정을 못보고 29일 새벽 4시에 산회하고 말았다。 고하는 두어시간쯤 눈을 붙이고 일어나 찾아온 몇손님을 차례로 맞았다。
『박헌영군에게 이번만은 제발 영웅적 태도를 취해 달라고 전해주시오。내가 그러더라고。 』
고하는 아침상을 받으면서 공산당측에 연락이 닿는 측근에게 말하기도했다。고하는 상을 물린뒤 곧 한민당사로 발길을 옮기고 오후엔 또 임정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저녁 7시경 원세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하와 임정간에 의견이 달라졌다는데 사실이요。 』
『글쎄 임정에서는 모두 짚신감발을하고 걸어다니면서라도 반탁을 한다합니다。 반탁이 문제가 아니라 군정과 충돌을 일으켜놓고 임정이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나도 알수가없소。』
고하는 밤 10시께 취침했다。
『안으로 문을 걸까요?』
『문은 왜 거느냐 내버려 두어。 』
조카 영수(英洙)는 정국이 흐려지고 이상한 풍문이 돌 뿐만아니라 집주위가 어수선하기에 문단속을 제의했었는데 고하는 응하지 않았다。 고하집 관습으로는 문을 안으로 잠그지 않는 것이 버릇이다。
이튿날 새벽 돌연 고하의 침실 밀창문 여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렸다。새벽의 고요한 공기를 찢어댔다。뜰 아랫방에 기거하던 영수와 호위경관이 황급히 고하의 침실에 뛰어갔을 때에는 이미 흉한의 총탄에 쓰러져있었다。
담장을 넘어온 흉한은 도합 6명으로 연속 13발을 쏘았다。 그중 6발이 명중했다。 고하는 56세를 일기로 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 자객의 흉탄에 넘어진 것이다。
손세일씨(동아일보논설위원, 주동경(駐東京))는 그의「이승만과 김구」에 당시 이승만의 비서였던 윤치영 윤석오 양씨와의 면담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송진우의 죽음은 이승만에게 크나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그가 가장 의지했던 정치세력의 주축을 잃은 그는 손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엉엉 울었다。 이날의 그의 울음은 이성을 잃은 어린애의 그것과 같았다。
고하 송진우 암살은 정계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그의 죽음으로 한민당 송진우와 국민당 안재홍 인민당 여운형 및 온건파인 장안파 공산당 이영 최익한을 중심으로 진행돼오던 좌우통합운동과 임시정부의 정통을 이을 국민대회(국회)개최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고 박헌영까지를 포함한 반탁운동을 전개하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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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고하송진우선생 2주년 기를 맞이하여, 1947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
고하선생!놀래지 마십시오!선생이 우해(遇害)하신 이틀 뒤에 나는 한국민주당 이층에서 모씨에게서『이번일은 임정 가까운 측에서 한 것인데 미구(未久)에 이 박사도 해 댈 작정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삽나이다. 그러나 나는 기연(其然)、기연、기기연호、하고 모략인 줄 알었던 것이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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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체험(1), 한길사, 2003년.
송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세찬 반발이 일었다. 좌익계 사람들은 물론 임시정부 사람들도 “봐라, 역시 한민당이 신탁통치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병주고 약주고 하는 것 아닌가”하며 그를 비난했고 “매국노” “망할 놈의 영감”하는 공격과 야유가 빗발쳤다. 나도 고하의 발언을 듣고 “뭐 저런 사람이 있는가?”하고 흥분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역시 반탁의 입장이었으나 다만 그 방법에서 견해 차이를 드러냈을 뿐이었다.…해방정국에 충격을 준 그의 암살 사건은 고하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소문을 임정 쪽에서 퍼뜨리던 차에 일어난 것음로, 분명히 경교장 회의에서 그가 한 발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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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좀 먹는 맹랑한 풍설, 1946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그러치 안허도 정국과 민심이 혼돈상태에 빠저 잇는 작금、지방에는 가진 모략과 가지가지 유언비어가 떠도는 모양이다. 하루에도 수십건식 각 지방으로부터 본사에 도달되는 투서 중에서 몃가지 례를 드려다 보면 가령 “제 1례”와 “제 2례”와 가치 소작료를 운운하야 우매 순박한 농민들에게 선동적인 언동을 펴트리는 모략분자가 상당히 횡행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잇다. 또한 “제 8례”의 김구 주석과 이승만 박사는 연만해서 무능하다는 등 “제5례”의 송진우 선생이 탁치를 청원을 햇다는 등、듯는 이로 하여금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풍설이 만흔 모양이다. 이 모다가 일소에 부칠 성질의 것인지라、그 진부를 잘 판단하며 오직 자주독립에 매진함이 잇슬 뿐인데 참고삼아 여기에 그 몃가지 지방에서 도는 풍설을 옴겨보기로 하자.(중략)
◇그 5례 한국민주당이 탁치청원을 햇스므로 송진우씨가 암살되였다. ↩ -
신문에 보도된 고하 암살범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고 송진우 선생 암살범, 경찰부에서 수(遂) 한원률외 4명 범행을 자백, 1946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배후관계를 엄조(嚴調) 한현우 등 범행을 참회, 1946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다수 무기를 압수, 범위는 점차 확대, 1946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
-고하 선생 암살 범인의 소행?, 1946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장(張)경찰부장에 한국민주당이 감사, 1946년 4월 20일자 동아일보
-송진우 선생 암살경위, 1946년 4월 24일자 동아일보
-송진우 선생 암살범 송국(送局), 1946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
-송진우 선생 암살범 김(金)검사가 취조 개시, 1946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범행을 참회하는 범인, 고하 선생 암살범 일당기소, 1946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
-고하 선생 암살공범 김(金) 수(遂) 체포, 1946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
-고하 선생 암살범 7월 2일에 공판, 1946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
-전백(全栢)씨 소환, 1946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증인 전백 씨는 발병으로 결석, 1946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독립 후에 미국 파견, 1946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주범 한현우에 사형, 1946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고하 선생 암살범, 1946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
-고하 선생 암살범, 1946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한현우에 검사 상고, 1946년 8월 6일자 동아일보
-드러날 한현우와 범죄관계, 전백 드듸어 공판(27일), 1946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
-주목되는 전백 공판, 오늘 살인 방조죄로 개정, 1946년 9월 3일자 동아일보
-요인 암살에 찬의를 표시, 권총을 한(韓)에게 제공, 범행 전후에 십만원을 지불, 전백 일회공판, 1946년 9월 4일자 동아일보
-전백에 징역 7년 구형, 1946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
-송진우 선생 암살범 내(來) 12일 복심공판, 1946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
-한현우 공판, 21일 사실 심리, 1947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
-사형을 구형, 송진우 선생 암살범, 1947년 2월 4일자 동아일보
-송진우 선생 암살사건, 재심에 나타난 새 단서, 1947년 2월 5일자 동아일보
-한현우에 징역 15년 언도, 1947년 2월 15일자 동아일보
-대법관에게 항의, 송진우 씨 살해범 판결에 관하여, 1947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 ↩ -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고하 송진우의 생애와 활동’(1999년),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코리아콘텐츠랩, 2002년.
고하의 암살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김구의 임정세력이었다. 김구는 암살의 배후로 공공연히 지목되면서 큰 도덕적 타격을 받고 정치적 권위를 상실했다. 그전까지 우파 정치세력들에게 광범하게 받아들여졌던 임시정부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임정봉대 주장은 고하의 암살 이후 급속히 시들어 갔다. 당시 우파 내에서 가장 강력하고 폭넓은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던 한민당 계열 인사들은 암살의 배후로 임정이 지목되면서 종래의 임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임정과 대립해 갔다.
또한 고하가 죽으면서 그 동안 고하가 진행하던 임정 중심의 정계개편운동도 중단되게 된다. 전국적ㆍ전국민적 행사로 치름으로써 임정을 한국 내 모든 정치세력의 중심이자 장래 정부의 중심으로 내외에 선포하려던 1946년 1월 10일의 국민대회는 무산되었다. 이는 국내정치기반이 취약한 임정에게 있어 국내정치세력과 임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기회의 상실을 의미했다. 또한 고하가 죽자 임정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던 ‘애국금헌성회’도 유명무실해지게 된다. 정치세력이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정치자금문제라는 점에서 임정측도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애국금헌성회의 사실상의 활동정지는 임정 측과 한민당 계열 및 전국 각지의 자산가를 연결시키는 통로가 단절되었다는 점에서 임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김구측은 고하를 암살할 만한 이유가 별로 없었다. 아니 암살 때문에 엄청난 여러 가지 피해를 보고 말았다. 반탁운동의 방법에 대한 입장차이, 그것도 냉정히 생각하면 고하의 입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안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암살을 감행한다는 것은 김구측을 정치세력으로 인정한다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누가 고하를 암살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한현우 등 암살범들이 임정에 대해 절대적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임정과 고하가 격론을 벌였다는 소문이 돌자 일종의 개인적 의분, 더 나아가 임정측과 선을 대기 위한 정치적 욕심에서 고하를 암살했을 가능성이다. 입신양명을 노리던 정치투기꾼들이 판치던 해방 직후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임정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은 암살범들과 임정계열간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다는 점이다. 평상시 아무런 정치적 연관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암살을 한다고 해서 입신양명이 가능할 수 있을까? 세계의 암살 역사를 살펴보아도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막연한 대가를 바라고 암살이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준에서든지 연관관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이런 연관관계가 있었다면 아마 당시의 상황에서 밝혀졌을 것이다. 쿠데타로 인식될 정도의 김구의 행동에 극도의 혐오감을 보였던 당시 미군정과 하지가 이를 가만히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고하의 암살범들이 여운형의 암살범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고하의 암살범인 한현우가 한국전쟁 직후 석방되자, 부산거리에 있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의 회사에서 자주 목격되었다는 미국측의 정보보고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현우가 재판과정과 1975년 『세대』제에서 밝힌 암살의 가장 큰 동기 중 하나인 김구와 임정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과 지지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더 나아가 고하의 암살과 여운형의 암살, 김구의 암살은 무관하지 않은 일정한 연결관계를 갖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한편 고하는 암살범들이 개인적인 욕심에 따라 암살대상으로 정하기에는 그가 갖는 정치적 위치와 정치적 파워가 너무 컸다. 고하는 국내 민족주의세력의 사실상의 지도자이며 강력한 구심력이었다. 그가 국내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3ㆍ1 운동이래 가히 독보적이었다. 민족주의 우파세력뿐만 아니라 안재홍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민족주의 좌파세력의 주요인물 대부분이 고하와 연결되어 있었고 고하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일종의 정치적 음모가 개재되어 고하가 암살되었을 가능성이다. 어느 누가 반탁운동의 방법을 놓고 고하와 임정측간에 격론이 벌어지자 이를 기회로 고하의 암살을 교사하고 그 책임을 임정측에 뒤집어씌우려 했다고 보는 가정이다.
고하는 자기 주관이 분명하고 고집에 셌기 때문에 논쟁이 벌어질 경우 격하게 자신의 주장을 토로했고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당일 임정측과의 논쟁도 상당히 격렬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어떤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고하의 암살을 둘러싼 의문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어떠한 정치적 음모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하수인에 불과한 고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이 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 -
KBS 다큐멘터리극장 ‘정치암살의 희생자들-제1부 고하 송진우’, 1994년 2월 6일 방송
해설(고원정, 작가): 안녕하십니까. 고원정입니다.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오늘부터 4회에 걸쳐서 한국 현대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정국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역사적 현실의 뿌리가 바로 거기에 있고, 아직 미해결로 남겨진 민족의 과제를 풀어나갈 지혜 또한 바로 그 해방공간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주독립국가 건설, 비록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그 길로 매진하고 있을 때 네 사람의 정치지도자가 희생됩니다. 작은 힘이라도 서로 모아야만 했을 그 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암살이라는 방법이 서슴없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희생자들의 당시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해볼 때 그 암살 행위는 우리 역사 그 자체에 대한 테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한민당 수석총무 고하 송진우.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 몽양 여운형, 한민당 정치부장 설산 장덕수, 그리고 백범 김구가 그 희생자들입니다. 다큐멘터리극장은 이 네 사람이 왜, 무슨 이유로 희생되어야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가면서 해방공간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고하 송진우 편입니다.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둔 해방 직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중략)
마지막 멘트: 어떤 이유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무조건적인 반탁운동은 송진우 암살사건 이후에 점차적으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됩니다. 임정을 주축으로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펼쳤던 상황이 조선공산당 측의 갑작스런 태도 돌변으로 양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로소 신탁통치 문제는 좌우익의 분열과 대립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반탁의 회오리 속에서 쓰러진 고하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에 따르면 송진우는 찬탁을 주장했고, 그래서 암살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송진우가 찬탁을 주장했다는 분명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는 단지 하루빨리 자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른바 ‘훈정론’ 입니다. 그는 또한 신탁통치에는 반대하지만, 그 방법에서 미군정과의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같은 그의 정치노선이 당시의 반탁 분위기에서는 찬탁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송진우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문제해결방식은 무모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앞뒤를 가리지 않던 명분론자, 이상주의자들에게는 대세를 따르지 않는 송진우는 어떤 방법으로든 제거해야할 대상이었고, 그것이 곧 애국행위라는 극단적인 흑백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정치테러의 첫 번째 희생자인 고하 송진우. 그의 죽음의 원인은 소영웅주의자의 도발적인 테러라기보다는 해방정국의 분열과 대립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타협과 협력은 사라지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해방정국의 분열된 재단 위에 고하는 쓰러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정치풍토 또한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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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철, ‘고하 송진우’, 신천지 1946년 2월 창간호.
고하 송진우 씨를 논하려면 이 두 가지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름날, 엷은 두루마기 밑으로 고하 선생의 옥색 조끼 그리고 옥색대님을 볼 수 있다.
어린 정몽주의 안은 붉고, 밖은 파란 저고리를 연상케 하는데 그 옥색 조끼도 속의 정열과 겉의 평화를 뜻함인가. 즐겨 입으신다.
그리고 손에는 언제나 종이 한 장을 들고 종이를 치마 주름잡듯 접는 것이 고하 선생의 유일한 오락이다.
그의 일생은 종이와 떠날 수 없다. 종이에 먹칠하는 것이 그의 일생 사업인 까닭에 언제나 종이를 놓을 수 없다. 그는 부하, 많은 기자들에게 언제나 입에 익어 저절로 나오는 부탁은 ‘들고 쓰라’는 것이다. 들고 쓰라는 뜻은 언제나 붓과 종이를 땅에 놓치 말고 그 좋은 생각들을 열로 써서 발표하라는 말씀이다.
그는 동경학생시대부터 학과보다 신문 읽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겨서 매양 신문을 읽고 연구를 하였다. 그의 머리 속에 자라던 병아리 신문은 마침내 동아일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어쩔 수 없는 그 가슴에서 뛰는 민족주의의 사상은 민족자결, 3·1운동의 큰 조류에 돛을 달고 화동시대의 동아일보 때부터 자라기 시작했다. 동아의 이십년 역사는 이 민족의 기록이오, 이 기록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수난기록이오, 눈물의 기록이오, 박해의 기록이라 하겠다.
용사라기보다 좋은 참모라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그는 하루에 2시간의 수면 밖에 취하지 않는다. 그 밖의 시간은 오로지 사색과 정담뿐이다. 그처럼 다른 취미를 가지지 않는 이도 흔치 않을 것이다. 단지 있다면 그가 숭배하는 손문전 같은 것을 읽는 것이리라.
고하 선생은 동아의 참모가 아니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우리 민족의 의존할 곳이 없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격으로 박해받는 민족이 울며 달려오는 곳이 동아이었다. 동아는 눈물을 씻어주는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 역이, 그 참모역이 고하 선생이었다. 여기에 한 예를 들면 오산중학교가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주 교장이 먼저 동아를 통하여 많은 부흥금이 모여들어 재전(災前)보다 더 훌륭한 교사를 지었다. 그 많은 수해, 한재, 몰려다니며 박해받던 남북만주의 이재동포구제의 손, 이순신 사당으로 이 백성에게 민족심을 넣어주고, 손 선수의 장거를 보도하여 민족 우월을 고취하여 철저한 민족주의의 본색을 여지없이 발휘하였다.
이 모든 일이 열의 신문인 고하선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라 하겠다. 당시에도 사회주의의 넘치는 파도는 커서 이 모든 사업도 동포 간에 적지 않은 반대가 그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고하선생의 뱃심은 능히 이를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그의 주장, 그의 사업 중에 계몽운동을 뺄 수 없다. ‘이 민족에게 문자를 가르쳐 계몽을 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하였다. 민도를 올리는데 가장 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를 혹 방문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면 때로는 동문서답을 한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딴 세계가 진전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넓은 아량과 심사와 분명한 판단은 누구나 탄복하리라.
혹 많은 질문을 품고 선생을 찾는 객이 나타날 때 선생은 열에 넘치는 주견과 주관을 고성으로 흐르는 폭포와 같이 퍼부으면 내객이 언권(言權)도 얻어 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퇴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선생의 독단이 여기에서 생긴다. 주장보다 조용히 경청하는 것이 더 좋은 때가 있다. 선생의 단점을 구태여 든다면 그 독단과 인재 용법의 편협이라 하겠다. 조용히 듣는 것, 친척보다 인재를 천하에 구하여 쓰는 법에 어둡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붓을 돌려 동경 정계에 선생이 나타날 때 이야기를 쓰려 한다.
일관(日官)을 찾을 때 흔히 뒷짐을 짚고 현관에 나타난다. 만일 오래 응접실에 기다리게 하면 그냥 나와 버리고, 주인이 속히 맞아주면 예의 ‘송진우데스’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1940년 동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삼 개월 제국호텔에 투숙하면서 귀족원의원 우좌미, 환산, 척무성 소기전중 등과 상의하였다. ‘너희들이 조선 민족에게 준 유일의 선물인 언론기관을 어느 때는 주고 지금은 빼앗고’ 이렇게 공작하여 마침내 대야 정무총감으로 하여금 귀족원 추밀회의 석상에서 ‘강제로 조선의 언론기관을 폐간시키지는 않겠다’고 언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독종 남 총독은 동경에서 이런 공작을 하고 돌아오는 고하 선생을 그냥 둘 리는 없다. 예상과 같이 유치장 신세를 끼치게 되었다. 바지춤을 잡고 그 더러운 감방 속에서 척 덮인 눈꺼풀 밑으로 구르는 눈초리, 그 모든 현실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 심중을 누가 알랴.
강약이 부동이라 빼앗기고 넘어졌다. 그는 원동거사 두문불출이었다. 세상은 싸움으로 물을 들였다. 총 칼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 협력에 춤추게 하였다.
그때 서슬에 총독부와 군이 고하 선생을 그대로 둘 리 없다. 일선에서 외쳐 달리는 무서운 권이 빗발친다. 그의 생명을 누가 보증하랴.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내 입을 봉해 놓고 날더러 말하라면 내가 말할 수 있소?’ 이 한 말로 모든 것을 거절했다. 선견의 명이 있는 선생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작년 겨울 어느 밤 선생을 찾았더니 반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밤이 깊어 한시를 지나는데도 붙잡는다. 젊은이와 농담, 정담을 즐기는 선생.
‘이제 독립은 몇 달 안 남았어’ 하시던 그때 나는 ‘이 영감이’하고 지나쳐 들었다. 그 후 5, 6개월 뒤 해방의 날이 이 땅에 왔다.
팔월 십오일 후 어느 날 원동에서 정담으로 목이 쉰 고하 선생이 ‘그놈들이 정권을 준다고 내 손으로 받다니’ 이 말의 속뜻을 그때에는 잘 이해 못했다. 만일 고하 선생이 총독부로부터 그 바통을 받았다고 하면 고하 선생의 정계 출발은 낙제였을는지 모른다. ‘국민대회, 임시정부지지, 강력한 민주주의’ 이것이 고하 선생의 뜻이다. 비록 외견으로는 좋은 선생, 평범한 아버지 같으나 그의 끊고 맺은 듯한 정견, 용진하는 담력은 우리 정계에 거보를 내어 디딜 것으로 믿는다. ↩ - 와타나베 도요니치코(渡邊豊日子) 구술, 조선총독부 회고담, 조선근대사료연구, 우방(友邦)시리즈(재단법인 우방협회 편, 크레스출판), 2001년 2월 15일 발간.
조선통치에 대한 반성
지금에는 지나간 일이지만 종전 때의 정권수수가 이승만이 아니고 그 반대 측으로 넘겨졌더라면 이승만 시대와 같은 일한간의 불화는 없었을 것이 아닐까. 송진우 등도 “우리들은 독립하고 싶다. 그러나 독립했다고 해서 일본과 완전히 손을 끊고 동양에서 독립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역시 일본인과 손을 잡고 동양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해 공헌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었다고 듣고 있다. 오늘날 일한 사이가 어느 정도 좋아진 것은 이승만 정권 후의 예컨대 박 정권 등은, 박 씨 자신이 지난번 일한회담 때에 일본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처럼 일본의 교육을 받은 분이고 같은 독립을 하드라도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자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여운형이나 안재홍은 고사하고 이승만의 반대 측인 송진우 일파에게라도 정권을 넘길 수 있었더라면 일한 관계는 오늘날과 같이 악화되지 않았고 또한 총독정치에 대한 비판도 지금과 같은 정도는 아니지 아니었을까. 대만에서는 장개석이 일본 학교출신이고 일본을 상당히 이해하고 있어 이승만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 대만과 일본 사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이와 같이 일한 사이가 좋게 가지 않은 것이 이승만과 그 일파인 미국계통의 유학생에게 원인이 있다고 할 때 지금 역시 교육에 대해 일본이 조선에게 상당한 원조를 하는 것이야 말로 일한관계의 장래를 원활화 하는 측면에서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된다. 종전 때 미국정부는 일본을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약체화 하였으며 이승만의 배일정책과 어울려 미국도 일본의 총독정치가 악정이었다고 퍼뜨린 것이 그 후 일한간의 감정을 소원하게 한 큰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