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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 즉 3국 외무장관 회의 결과는 1945년 12월 28일 낮 12시(서울시간) 미국 워싱턴, 영국 런던, 소련 모스크바에서 발표됐다. 1

정식 발표가 있기 전 당시 해외에 특파원을 두고 있지 않던 국내 언론들이 외신기사를 전재하는 것은 당연했다.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는 워싱턴(華盛頓, 화성돈)발 기사였고, 합동통신의 기사(合同至急報)를 전재한 것이었다. 이 기사를 처음으로 보도한 것은 미국의 통신사인 AP와 UP로, 당시 기사 원문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UP의 후신인 UPI 측에 문의한 결과 미국 현지 신문도 당시 UP 기사를 전재해 국내 언론과 같은 내용을 보도한 것으로 확인됐다.(동아일보 사내소식지 동우 63호, 2005년 2월 3일자)

미국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는 1945년 12월 26일자 7면에 UP기사를 전재한 ‘May Grant Korea Freedom’이라는 기사에서 “미국의 번스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 통치안을 반대하고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1945년 12월 26일자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

 

이 통신 기사가 동아일보에도 1945년 12월 27일자 석간(26일 오후 배포)에 실렸으므로 25일 서비스됐다는 것이 드러난다.

중국 상해에서 발행되는 신보(申報)는 이 통신기사를 1945년 12월 28일자에 실었다. 2

미군 기관지인 성조지 태평양판(일본 도쿄에서 발행)은 1945년 12월 27일자 1면에 AP, UP 기사를 종합한 기사를 싣고 문제의 UP 기사와 취재기자 랄프 하인젠(Ralph Heinzen)이름을 보도했다.

 

1945년 12월 27일자 성조지 태평양판

랄프 하인젠

 

당시 신탁통치를 반대한 것은 좌우익을 가릴 것이 없었다. 또한 이승만 박사나 김구 주석이나 마찬가지였다.

1945년 12월 26일 이 통신기사가 국내에 전해졌을 때 이승만 박사는 오후 8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에서 이 기사를 인용했다. 통신의 기사를 직접 인용했는지, 동아일보의 기사를 인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신탁제와 우리의 결심, 이 박사의 방송요지’

26일 야(夜) 이승만(李承晩)의 방송 요지는 다음과 같다. “워싱턴에서 오는 통신에 의하면 아직도 조선의 신탁통치안을 주창하는 사람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은 이 안을 거부하고 완전독립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트루만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연합국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은 다 조선독립을 찬동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적의 교묘한 선전으로 우리 한민족은 외국세력이 강요하는 것에는 무엇이나 복종하는 민족이라는 선입관념을 타민족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는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명예를 대단히 손상하는 정책을 시행하자는 사람들이 있다합니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줏대 없는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죽음을 결의하고 투쟁하려 합니다. 진주만사건 이후 과거 4년간 왜적의 선전에 영향을 받고 또한 공산주의에 공명하는 워싱턴 일부 인사는 우리 임시정부에 대한 공식승인을 방해하며 우리 광복군이 공공한 지위에서 필수물자의 공급을 받아가며 참전함을 막는데 동분서주하여 우리 독립달성을 방해하여 왔었던 것입니다. 즉 한인은 국내에 분열이 있는 고(故)로 어느 당파가 한민족을 대표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표면적 구실이었습니다.” (1945년 12월 28일자 동아일보) 3

 

이날부터 다음날(27일)까지 국내는 이 기사로 들끓었다. 4

‘전쟁 목적(目的)에 위반, 조소앙 임정 외무부장 담(談)’

‘희생적 혈투각오, 조완구 재정부장 담’

‘전 생명 걸고 배격, 한국민주당 궐기’

‘단호 반대, 인민당 현우현 씨 담’

‘국제 신의에 배치, 국민당 대소(對蘇)결의’

‘아직 말할 수 없다, 공산당 정태식 씨 담’

‘약소민족 침략행동, 한민당 총무 김병로 씨’

‘정식 발표 전엔 판단키 어럽다, 백남운 씨 담’

‘신탁 주장국은 우리의 유일 적(敵), 이극로 씨 담’

 

27일 오후 8시 시작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 5에서 이 기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김구 주석은 다음날인 28일, 3국 외무장관 회의 결과가 발표된 뒤 6 오후 7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조선에 5개년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중대 보도에 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28일 하오 7시경 교동숙사(橋洞宿舍)에서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이하 정부요인이 참집하야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신탁통치제에 관한 임시정부의 태도와 이에 대처하는 방침에 관하야 신중 토의를 하였다. 그리고 이 토의 결정된 방침과 태도는 29일 정식발표할 터이라 한다.” (국무위원회 긴급개최,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

 

한편 미국의 보스턴 데일리 글로브지는 1945년 12월 26일 프레드릭 쿠(Frederick Kuh) 런던특파원 발로 미국, 소련, 영국 등 3국 외무장관이 5년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합의했다는 내용 등을 27일자 1면과 2면에 특종 보도했다. 프레드릭 쿠 역시 UP기자였다. 이번에는 정확한 기사였다.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보스턴 데일리 글로브

프레드릭 쿠

그 후 계속된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반대 보도와 관련해 김학준 단국대 이사장은 “한민당과 동아일보가 주축이 돼 반대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분단으로 갔다는 주장은 소련의 문서나 다른 문서들을 보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은 말 그대로 소련 의도가 반영된 것에 불과합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보면 모든 것을 미국과 소련이 결정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 아닙니까. 즉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통해 비토권을 확보한 겁니다. 모든 것을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결정하게 돼 있었으므로 누구도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가 2차례나 열리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 우리는 신탁통치라고 얘기하지만 러시아어로는 후견이라고 돼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용어문제도 합의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에 영어로는 ‘Trusteeship’ 신탁통치, 러시아어로는 ‘오뾰까’, 후견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핵심적인 용어에도 합의하지 못한 문서가 어떻게 제대로 운영될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비판한 동아일보는 정당했고 그 결정문을 따를 수 없다며 반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촌도 정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를 따랐다면 분단을 피할 수 있었다는,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주장은 철저히 반박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 탄생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 2011년 9월 20일) 7

Notes:

  1. 천관우, 자료로 본 대한민국건국사, 지식산업사, 2007년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소련 모스크바에 모인 번스 미국 국무장관, 베반 영국 외상, 몰로토프 소련외상은 12월 27일 위와 같은 한국 문제 결정을 채택하고 28일 저녁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에서 이를 발표하였으니, 그 주요내용은 미 영 중 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로써 한국 독립의 준비계단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는 그에 앞서 10월 20일 빈센트 미국 국무성 극동국장이 미국 외교협회에서 시사한 바 있어 국내에서도 반대의 기세를 올리던 터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전해지자 국내는 물 끓듯이 소란해지고, 여기에 거족적인 반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신탁통치란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있던 위임통치(mandate) 방식을 계승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엔헌장에 규정된 미개발지역에 대한 통치형태로서, 실제로는 탕가니카, 카메룬, 토코랜드, 루안다, 우룬디, 뉴기니아, 사모아, 나우르, 소마리란드, 일본이 위임통치하던 태평양제도 등 아프리카 및 태평양의 미개지역에 시행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38선에 의한 미소 분할의 현상에 입각한 아주 소극적인 해결책으로서, 새로이 설정된 유엔헌장 조항을 적용하여 한 것인지는 모르나 한국민으로서 그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또 한국독립의 구체적 방안으로 이 통치안이 나왔다는 것은 해방 한국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뒤에 모스크바 결정 지지노선으로 표변한 좌익은 이 트러스티십을 ‘후견’, ‘후원’ 등의 역어(譯語)라 하여 극력 신탁통치가 아님을 변해(辨解)하였다. 미 군정도 격노한 민중을 무마하기 위하여 ‘원조’, ‘고문’의 뜻의 오용(誤用)이라고 한 적도 있었으나, 유엔헌장 관계조항에도 명시되어 있다시피, 트러스티십이 종전의 위임통치를 계승한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보도가 있은 28일 오후 8시 임정은 각계 대표자와 회합을 갖고 다음날 29일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 즉각 전국적인 반탁운동으로 들어간 것은 뒤에 말할 바와 같다.

  2. 석원화, 심민화, 패민강 편, 중국언론 신보(申報)에 그려진 한국근현대사(김승일 번역), 역사공간, 2011년

    신보(1872년 상해에서 창간된 근대 중국 신문) 1945년 12월 28일자, 미국과 소련 한국문제 상의

    합중사 워싱턴 25일 발 통신 정보가 빠른 사람이 전해 온 오늘의 소식: 한국의 독립계획에 관하여 모스크바 외교부장관회의에서 협의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소식통은 또 미국 국무경 베르나스가 모스크바로 갈 때 정부의견서를 가지고 갈 것인데, 소련이 제출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즉시 한국의 독립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까지는 세 강국이 다른 결론을 내렸다는 그런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입장은 카이로선언에 근거하여 한국에서 민중투표를 실행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으로, 민중투표를 통해 자율적으로 정부를 선택하는 형식을 취하자는 것이다. 관찰가들은 소련은 이미 미소 점령구를 합병하고 한 부서에서 신탁을 책임지고 민중투표를 진행하기 전에 일정한 기간동안 남방의 비옥한 토지에서의 생산물과 북방의 공업물자와 상호간 무역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북위 38도 선이 한국을 두 부분으로 갈라놓고 있고, 또 소련은 이것을 경계선으로 하여 계속 분단 상태로 둘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전민투표는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3. ‘신탁제와 우리의 결심, 이 박사의 방송요지’, 1945년 12월 28일자 2면 동아일보

    26일 야(夜) 이승만(李承晩)의 방송 요지는 다음과 같다. “워싱턴에서 오는 통신에 의하면 아직도 조선의 신탁통치안을 주창하는 사람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은 이 안을 거부하고 완전독립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트루만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연합국사령관 맥아더대장, 하지중장은 다 조선독립을 찬동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적의 교묘한 선전으로 우리 한민족은 외국세력이 강요하는 것에는 무엇이나 복종하는 민족이라는 선입관념을 타민족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는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명예를 대단히 손상하는 정책을 시행하자는 사람들이 있다합니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줏대 없는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죽음을 결의하고 투쟁하려 합니다. 진주만사건 이후 과거 4년간 왜적의 선전에 영향을 받고 또한 공산주의에 공명하는 워싱턴 일부 인사는 우리 임시정부에 대한 공식승인을 방해하며 우리 광복군이 공공한 지위에서 필수물자의 공급을 받아가며 참전함을 막는데 동분서주하여 우리 독립달성을 방해하여 왔었던 것입니다. 즉 한인은 국내에 분열이 있는 고(故)로 어느 당파가 한민족을 대표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표면적 구실이었습니다.(중략)

    그렇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탁관리안의 말살과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신문지를 통하여 누차 여론을 환기한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위기를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분열해 있다고 널리 선전된 구실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모든 정당을 최근 결성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로 통합하려고 만반의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통합이 성숙할 때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극단적 공산주의자만 없었다면 통합은 벌써 오래전에 성공하였을 것이다. 즉 그들이 합류하여 올 것을 고대하였기 때문에 통합은 여사(如斯)히 지연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전체를 위한 독립을 달성하려면 좌익 우익을 망라한 전부가 합동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언제나 믿어 왔다. 그러나 소수의 파괴분자가 있어서 만일 합동이 달성되면 그들의 음모가 실패하게 되는 까닭에 전력을 다하여 통일을 방해하였다.

    한인이라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 위급 존망한 오늘에 있어서 조국의 목적에 반역함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애국자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할 준비가 있어야 된다. 최후의 1인까지 죽음으로 싸워 독립방해를 각성케 하자. 만일 신탁관리가 실현된다면 독립방해자뿐만 아니라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우리들까지도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방해자들의 파괴목적달성을 공수방관(拱手傍觀)한다면 나중에는 아무리 싸워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반역자의 목적달성을 방해함은 우리 3천만의 의무이니 이 의무를 소홀히 하는 자는 노예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어찌하여 우리들 한민(韓民)의 피를 가진 자가 방관하고 말 것인가 요컨대 우리가 신탁관리를 거부하기로 결의한 이상 주저치 말고 중앙협의회 지부를 각 지방에 조직하고 조직이 완성되면 관계단체와의 연락도 직접 실현될 것이다. 통일과 독립에 조력하는 단체라면 어느 단체나 환영한다. 파괴를 목적하고 방해하는 단체는 그 어느 것을 물론하고 배척할 것이다.

    애국자라면 남녀를 물론하고 도시에서나 지방에서나 나라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서 나와서 독립을 촉성시키자.”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소련의 조선신탁관리주장에 대해 각계에서 반대견해 피력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5년 12월 28일
    날짜 1945년 12월 27일
     
     趙임정외무부장 談
    조선문제에 있어서 國際公管 신탁관리 탁치 운운은 지금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라 해외에 있을 때에 누차 목도하여 싸워 온 문제다. 이유는 조선을 일국의 독점에서 구출키 위하며 40년간 일본의 압정하에 있었던 민족이므로 자주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조선의 대외관계를 말함이요 후자는 대내관계를 말함이다. 이것은 조선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오인한 일부의 착각이다. 그러므로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국제간에 如斯한 탁치 운운설이 있을 때마다 정당한 우리의 주장을 성명하여 왔었고 미주에 있는 우리 교포도 임시정부에 호응하여 미주내 교포의 총의로 반대성명을 하였었다. 우리가 60년간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온 민족인 것과 극동에 있어 한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승인치 않으면 극동의 평화를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주지하는 바 사실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선언에서 또 포츠담회담에서 약소민족국가를 자주적으로 주권을 가질 수 있도록 독립국가로서 보장하여 주지 않으면 세계평화가 유지될 수 없음을 고창하게 되었었고 동시에 조선독립도 당당히 선언되었었다. 지나간 1차대전에 윌슨대통령의 약소민족해방 제창으로 연출된 유혈극도 피압박민족을 해방키 위함이요 금번 2차대전 역시 세계평화를 교란하는 팟쇼 타도를 위한 정의의 干戈이었다. 세계적 정세와 한민족이 가진 바 역사를 무시하고 또 다시 탁치문제를 재연시킨다면 이는 2차대전 목적에 위반됨은 물론이요 한민족의 총의에 위반되는 바이다. 연합국 헌장에 의하여 보더라도 우리 한민족에게는 탁치를 적용시킬 법적 근거가 없다. 만일 일본에게 한 동안 점령당했음을 이유라고 한다면 독일에 점령되었던 구주 약소 각국을 신탁관리하여야 할 것인가? 임시정부로서는 주장자의 여하를 불구하고 旣定한 바에 의하여 의연히 투쟁하여 나가겠다. 전문컨대 桑港회담에서 식민지를 많이 소유한 영국이 자국의 불리를 염려하여 조선의 탁치를 발언하였을 때에 강렬히 조선독립을 주장한 우방 소련에서 탁치를 주장하였다 하니 의아하는 바이며 意外之事다. 余는 약소민족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여 온 소련을 위하여 이 보도가 虛報가 되고 풍설로 사라져서 前功의 可惜치 않기를 바란다.

     趙琬九 재무부장 談
    국제정세에 정확한 파악이 없고 한민족을 알지 못하는 일부의 착각이다.
    해외에 있을 때에 얄타비밀회담에서 滿洲, 蒙古, 朝鮮을 소련에 맡겨서 탁치한다는 보도가 있었었는데 당시 미주에 있던 李承晩박사가 桑港회담에서 오직 민족의 주권을 찾기 위하여 한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반세기동안 투쟁이 그치지 않었던 사실등을 말하고 열국에 강렬한 공격을 하여 駐美中國大使館에서 사실이 없다는 성명을 한 일이 있었다. 여하한 국가에서 여하한 말을 하더라도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3천만 우리민족 전체중 누가 신탁관리를 원하는 자 있으며 此에 누가 희생적 혈투를 아끼겠는가. 절대로 만부당한 말이다. 단연코 실현되지 못할 정의에 벗어난 일이며 간과치 못할 바라고 생각한다.

     韓國民主黨 궐기
    韓國民主黨에서는 27일 오후 3시 동당 회의실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소련이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하였다는 설에 대하여 절대 배격한다는 左의 결의를 하였다.
    조선의 독립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약속된 바로 동아평화의 절대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제 모스크바의 3국 외상회의에서 엄연히 조선신탁안이 제의되는 것은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 발전을 저해하며 동아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본당은 생명을 걸고 이 제안을 배격하는 동시에 독립관철에 매진하기를 결의함
    부대결의
    一. 右 결의를 미소당국에 통고할 것
    一. 신탁통치의 반대와 완전독립촉성을 위하여 각당파와 제휴하여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
    大韓民國 27년 12월 27일
    韓國民主黨
     
     人民黨 玄又玄 談
    아직 확실한 보도가 없으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정확한 정보가 있는대로 당으로서 태도를 결정하겠다. 그러나 소련으로서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단호히 이에 반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國民黨 대소결의:
    목하 모스크바에서 개최중인 3상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여 미소간 의견대립함을 전한다. 즉 미국은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에 즉시 독립을 허여할 것과 국민투표로서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주장하는데 소련은 남북 양지역을 일괄한 일국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 운운 카이로선언 이래 국제공약이 炳乎하여 변할 수 없는 바이어늘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은 불가해의 태도로서 국제신의에도 배치되는 바이다. 신탁통치의 기타 피예속의 형태로서 우리에게 임하는데 대하여는 어떠한 국가임을 묻지 않고 우리는 3천만의 총력을 모아 최후까지 반대할 것이다.
     
     共産黨 鄭泰植 談
    아직 확실한 정보가 없으니 지금 발표할 수 없다. 정식발표가 있은 후에 당으로서 태도를 표명하겠다.
     
     白南雲 談
    외상회의 종료후에 정식으로 발표가 있기 전에는 아직 무어라도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 조선민족이 자주독립국가로 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중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정식발표가 있은 후에 엄정한 비판과 강렬한 민족적 요구로서 당당히 자주독립을 주장해야 한다.
     
     李克魯 談
    신탁이란 말부터 나는 불유쾌하다. 어린애나 불구자나 정신이상자가 자기생활을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신탁관리를 한다는 말이다. 어떠한 나라를 물론하고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나라는 우리 3천만 민족이 유일한 적으로 취급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혈투할 각오를 해야 한다. 

  5. ‘3천만동포에게 고함, 김구 주석 방송요지’, 1945년 12월 30일자 4면 동아일보

    대한민국 임시정부주석 김구는 엄 선전부장으로 하여금 27일 하오 8시부터 15분간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을 통하여 ‘3천만동포에게 告함’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방송하였다.

    3천만동포에게 고함

    “나의 친애하는 3천만  부로(父老)자매형제 여러분 내가 입국한지 벌써 1삭이 넘었습니다. 나는 서울에 있어서는 직접 간접으로 나의 의사를 표시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 계신 여러분에게 말씀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 방송은 전혀 지방에 계신 여러분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그 동안에 직접 간접으로 여러분의 과분한 애호와 환영을 받았고 아울러 허다한 가르침도 입었습니다. 시간의 제한과 체력의 쇠약으로 인하여 여러분을 방문하고 일일이 사의를 표하지 못함은 지극히 죄송한 바이지만 어찌 감격의 눈물이야 금할 길이 있겠습니까.

    나와 나의 동료는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친애하는 3천만 동포는 도리어 최고도의 열렬한 애국정서로써 우리를 환영하여 주시니 송구함을 느낍니다. 더욱 내가 38도 이북의 동포를 간절히 그리고 있는 것과 같이 그 곳의 동포들도 우리를 환영하는 마음은 더욱 불같으리라고 믿습니다. 임시정부는 과거 27년간에 있어 정의를 유호(維護)하며 평화를 애호하는 지나(支那)의 열렬한 동정을 받았습니다. 소비에트연방의 국부  레닌선생은 제일 먼저 이 정부와 손을 잡고 거액의 차곡을 주었습니다. 미국 국회에서도 두 번이나 이 정부승인문제를 토론하였습니다. 영국 국회에서도 동양(同樣)의 일이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필경 사실상의 승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일찍이 손중산(孫中山) 선생이 비상총통으로 재임시에 이 정부를 승인한 이래 국민정부는 사실상 이 정부를 승인하였을 뿐 아니라 특별히 본년 11월 4일에 장개석 장군은 중경에서 본 정부를 환영할 때에 이 정부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게 하기 위하여 끝까지 철저히 원조하겠다고 明言하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부터 최근까지 시종일관하게 이 정부를 부인하며 파괴하려 한 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곧 왜적과 및 그의 주구를 감작(甘作)하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이와 같이 안으로 독립과 자유를 열망하는 3천만 동포의 옹호를 받았으며 밖으로 정의와 평화를 신장하는 세계우방의 동정을 얻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연함이겠읍니까. 이것은 다 과거 5·60년래의 조국의 영화와 동포의 행복을 위하여 분투노력한 선열 선현의 은우(隱佑)이며 더구나 3·1 대독립운동 이래로 3천리 근역으로부터 멀리 자유흑수(自由黑水)와 중국대륙까지 대량적으로 물들인 무수한 선열들이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선열과 선현이 우리에게 끼쳐 준 독립과 자유의 싹은 3천만 각개의 방촌중(方寸中)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36년의 긴 세월을 야수와 같이 왜적의 유린 중에서도 조국의 산하가 의구한 것과 같이 아름다운 싹 만은 일추일각(一秋一刻)도 변함이 없이 자랐습니다. 만일 우리 동포들의 열렬한 애국심이 우리를 충심으로 도와 주는 동맹군의 노력과 배합이 되지 아니하였던들 우리는 금일과 같이 광명한 전도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분투 34년에 큰 성공을 세우지 못하고 초초히 귀국한 우리로서는 무슨 말로써 우리의 동포와 우리의 맹군에 대하여 위문과 사의를 표할런지 도리어 송구할 뿐입니다. 심중에 송구함을 느낄 때마다 나의 여생을 오직 조국의 통일과 또 그의 완전한 독립과 전 세계 인류의 평화의 달성을 위하여 바칠 결심이 더욱 강렬한 뿐입니다. 이것을 위하여는 백사(百死)라도 불사하겠습니다. 나는 이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선 좌(左)의 제 원칙만이라도 친애하는 3천만 자매형제께 제기하고 공동분투하기를 간망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접수하고 나와 나의 동료를 편달하며 독려하여 준다면 나의 광영은 이에서 더 지날 것이 없을 것입니다.

    1) 완전히 독립 자주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합시다. 우리는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또는 남북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自利的 입장을 버리고 오직 국가지상 민족지상 독립제일의 길로 매진합시다. 네 당 내 당도 국가가 있은 뒤에야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존재할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2)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합시다. 국민 각개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지 못하면 신민주국을 건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장합시다. 정치의 균등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보선제(普選制)를 실시하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그러나 모(某) 일부분 모(某) 일계급의 독재는 반대합니다. 경제의 균등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그러나 정권이 우리 정부로 옮겨 오는 때에 적산과 한인의 토지를 제한 외에는 실정을 참작하여 점진적으로 실행함이 타당하다고 인정합니다. 교육의 균등을 실시하기 위하여는 조속히 의무교육을 국비로써 실시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먼저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기 위하여 전력을 경주하여야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불소(不少)한 협잡정객과 또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겠습니다. 그것은 대의명분상으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그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사실이 다대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라도 죄악이 만만하여 용서할 수 없는 불량분자만은 엄징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입니다.

    3) 세계적 대가정을 건립합시다.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려면 단결한 세계의 대가정을 조속히 건립해야 합니다. 이 목적을 달하는 유일한 도경(途徑)은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에 평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피차간에 주관적 우월감으로써 타민족이나 타국가를 모시(侮視)하며 혹은 독자의 이익을 위하여 타방의 이익을 무시하면 아니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의 동맹국의 작전목표도 민주를 실현함에 있었습니다. 진정한 민주도 오직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간에 균등을 유지한다는 데서만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우리 조국을 해방하여 준 동맹국에 감사합니다. 현금에만 감사할 뿐 아니라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한 우방의 투자를 환영합니다. 각 방면에 있어서 기술적으로 원조하여 주는 것을 간망합니다. 또 우리 조국의 신건설을 위하여 우리에게 차관하여 주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로 우방 단독적이나 공동적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인은 마땅히 한인의 정부가 통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강고한 국방군을 건립합시다. 우리는 강고한 국방군을 요합니다. 우리 국가의 질서와 세계의 평화를 지지하기 위하여 강고한 국방군을 요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망국사와 또는 세계 제2차대전에서 우리에게 주는 바 큰 교훈이니 다언(多言)을 췌술(贅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6. 전민족이 투쟁하자-김구 임정주석 담,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
  7. 김학준 단국대 이사장, 인촌 김성수 선생 탄생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 2011년 9월 20일, 고려대 인촌기념관 대강당

    ‘인촌 김성수와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내용만 한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 또는 해방 3년의 공간에 대해 아직도 논란과 시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인촌과 동아일보에 대해 가해지는 공격들이 있습니다.

    그 공격의 핵심은 인촌과 동아일보가 분단체제 성립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사실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의 문서는 지금까지도 전부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이 공개돼 있고 특히 1950년대 이후 소련이 북한에 대해, 그리고 남한에 대해 어떤 구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꽤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면 해방공간에서 김일성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은 상당히 적은 양이 공개돼 있었는데 지금은 해방 3년 동안 김일성의 발언, 유엔서류, 저술 등이 꽤 많이 공개돼 있습니다. 따라서 해방 3년을 얘기할 때, 특히 당시 인촌이 걸었던 노선과 동아일보가 걸었던 노선에 대해서는 소련의 문서와 김일성의 문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있어야 객관적이고 공평한 분석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중략)

    두 번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당시 우리가 받아들였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랬다면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 제1항에 나와 있는 대로 이른바 조선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고 이것이 수립되었다면 남북분단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한민당과 동아일보가 주축이 돼 협정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결국 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도 소련의 문서나 다른 문서들을 보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에 미국을 대표해 참석했던 외무부장관이 제임스 번즈였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상당히 우습게 알았습니다. 트루먼을 경시해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 회담에 미국 대표단 실무진으로 참석했던 조지 케난이라는 유명한 국제정치학자가 쓴 회고록을 보면 제임스 번즈는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당시 회담에서 성과를 내려는 일념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소련의 전략에 말려들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동의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은 말 그대로 소련 의도가 반영된 것에 불과합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보면 모든 것을 미국과 소련이 결정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 아닙니까. 즉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통해 비토권을 확보한 겁니다. 모든 것을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결정하게 돼 있었으므로 누구도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가 2차례나 열리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 우리는 신탁통치라고 얘기하지만 러시아어로는 후견이라고 돼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용어문제도 합의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에 영어로는 ‘Trusteeship’ 신탁통치, 러시아어로는 ‘오뾰까’, 후견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핵심적인 용어에도 합의하지 못한 문서가 어떻게 제대로 운영될 수 있었겠습니까? 실제 제임스 번즈가 귀국했을 때 트루먼이 제임스 번즈를 불러 대통령이 신문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이게 말이 되느냐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비판한 동아일보는 정당했고 그 결정문을 따를 수 없다며 반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촌도 정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를 따랐다면 분단을 피할 수 있었다는,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주장은 철저히 반박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댓글 한 개 »

  1. 정리능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Comment by 그 — 2012/06/15 @ 4: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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