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 최초의 의학전문기자 허영숙(許英肅, 1895~1975)
1925년 12월 동아일보 학예부장, 1927년 3월 퇴사
1928년 이광수와 허영숙, 아들 봉근
1920년대 화동 동아일보 시절, 춘원 이광수가 몸이 불편해 출근을 못하고 있을 때 당시 송진우 사장이 학예부에 있던 허영숙을 불렀습니다.
“춘원 좀 어떻습니까?”
“웬일인지 어제 오늘 열이 더해요.”
“엉? 그거! 저 저 허영숙씨를 춘원한테서 격리를 시켜야해. 격리!”
순간 편집국은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사장이 농으로 던진 말이지만, 그만큼 춘원과 허영숙의 로맨스는 동아일보 사내에서 뿐아니라 경성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두사람의 만남과 열애는 당시 경성을 뒤흔든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서울의 부잣집 딸이었던 허영숙은 당시 양반집안의 규수들만 다닐 수 있었던 귀족여학교(진명소학교, 경기여중)를 거쳐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일명 우시고메 여의전)에 입학, 1918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의사시험에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합격했습니다. 공부에만 열중하며 의사가 되기를 꿈꾸던 허영숙은 학교 부속병원으로 실습을 나가있던 어느날 각혈로 병원을 찾아온 조선 청년을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고, 그가 바로 춘원 이광수였습니다. 그때 나이 춘원은 스물여섯, 허영숙은 갓 스무 살이었습니다.
허영숙은 1920년 5월 서울 서대문에 조선 최초의 산부인과 병원 ‘영혜의원’을 개업해 의사로서 크게 명성을 얻었습니다. 남편의 주치의이자, 후견인 역할까지 했던 허영숙은 동아일보 학예부장 춘원이 병으로 눕게 되자 대신 원고정리를 해줄 요량으로 신문사에 나갔다 신문기자가 됐습니다. 1925년 12월에는 남편으로 부터 동아일보 학예부장 자리를 이어받는 진기록을 세웠고 신문 사상 첫 여성 부장으로 기록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동아일보 학예부장이었던 남편 춘원이 병으로 눕게 되자 정리할 원고가 많은데 도저히 다른 사람이 정리할 수 없는 것이라, 며칠 정리할 셈치고 나갔다가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그때 손이 모자라 주요한씨를 모셔왔죠.”(‘퇴역 여기자들의 방담’, ‘여성전진 70년’, 조선일보사, 1991년, 372~373쪽)
1970년 4월 1일자 22면
여사가 만든 가정란
‘남편 뒷바라지 때문에 잘돼 나가는 병원을 희생하고 여자가 신문기자로 들어갈게 뭐냐!’ 여의사 허영숙(許英肅)이 동아일보의 두 번째 부인기자로 입사하자 친구들이 말했다. 허영숙은 1925년 남편인 촉탁 이광수와 함께 약 1년반 동안 동아에 근무하며 학예부장을 지냈다. 육아 가정위주 의학상식 등 당시 동아의 가정란 기사가 호평을 받았던 것은 그녀의 부인과 의사로서 지식과 경험 때문이었다. 사내 간부들과 동료들도 기뻐했었다. 허영숙은 또 여성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을 펴 젊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1920년 5월 1일자 4면
개업광고
영혜의원(英惠醫院)
여의(女醫) 허영숙
허영숙은 화류병, 즉 성병에 걸린 사람은 국가가 법으로 정해 혼인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해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깜짝 놀랄 주장이었습니다.
1920년 5월 10일자 3면
화류병자(花柳病者)의 혼인을 금할 일
여의사 허영숙 기고
(전략) 우리 사회의 금일까지 행하여온 여러가지 폐해도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제거될 일이 아니올시다. 그러나 그중에도 지금 당장 개량하기에 일시가 급하게 생각되고 가장 두렵게 아는 바는 화류병자의 결혼이올시다. 1인의 죄로 인하여 청백무구한 남의 자녀를 버리게 하며 그 해독이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실로 전율치 아니치 못할 사실이올시다. 결혼은 개인과 개인, 일가와 일가의 문제라 하나 동시에 국가의 성쇠를 의미한 큰일이올시다. 그러한 고로 화류병자 혼인에 대하여는 법률의 힘으로 일정한 제재를 주기를 요구합니다.…(중략)…화류병에 대하여도 반드시 보고할 법칙을 의사에게 내리어 이것을 보고치 아니하는 때에는 엄혹한 처벌을 할 것이올시다. 그래서 한번 화류병의 보고를 받은 자에게는 상당한 연한내에는 결혼치못할 제재를 줄 것이올시다. 생각건대 화류병에 대하여 법률이 제재를 한다는 그 사실만하여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올시다.(하략)
같은 달 26일 허영숙의 의견을 비판하는 기고문이 실렸습니다.
1920년 5월 26일자 4면
기서(寄書)
허영숙 여사께
여사의 ‘화류병자의 혼인금지론’을 읽고서
유진희(兪鎭熙)
여사여 동아일보 제38호에서 여사의 ‘화류병자의 혼인금지론’을 흥미있게 읽었소이다.…(중략)…법률의 제재를 빌어 결혼조건을 개선해요? 이것이 여사의 소위 ‘우리의 이상’인가요? 여사는 과연 이같이 현상과 타협하며 긍정하면서 개선을 말씀하려 하십니까. 여사의 이상이 다만 이에 그친다 하면 나는 여사에게서 여자해방의 기대는 아주 단념하려 합니다. 인생에게서 최대한 사실인 양성(兩性)관계 어디까지든지 자연스러워야 하고 어디까든지 합리적이어야 할 남녀문제를 현대에서 가장 부자연하고 불합리한 법률의 제재로 개선을 도모하다함은 해방을 주창하시는 소론(所論)과는 모순이라함보다도 아주 무리한 말씀이외다.…(중략)…여사여 과연 병적현상에 대하여 치료의 필요를 느끼시거든 오직 취할 방책은 전 사회적 매독에 대한 근본적 수술이외에 아무것도 없소이다. 너무 환경과 타협하고 현상과 상의하는 고식적 수단을 가지고는 아무 개선에 광명도 오지 아니합니다.(하략)
‘신여성’답게 허영숙은 식민지 조선 사회의 인습을 타파하고 여성의 권익향상과 사회참여를 독려하는 주장을 계속적으로 펼쳤습니다.
1922년 1월 2일자 3면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남자가 여자로〓여자가 남자로
여자와 같이 정조를 엄수하며
여자에게도 사람의 대우를 하겠다
여의사 허영숙 여사 담(談)
1925년 8월 28일자 3면
민족발전에 필요한
어린아이 기르는법
(1) 왜 이것을 쓰나
허영숙
오늘날 세계 각국이 가장 주의하고 힘쓰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민족개량이다. 어찌하면 각각 제민족을 지금보다 힘있는 민족을 만들까 어찌하면 가장 잘살 능력을 가진 민족을 만들까 함이다. 이것을 구주대전 전까지는 군비확장과 영토획득 경제적 발전에서 구하려 하였지마는 구주대전 전후로 각국은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데 착목하게 되었으니 곧 그 민족을 구성하는 분자인 각 사람 남자와 여자를 지금보다 힘있게 만들자 함이다. 각개의 남자와 여자가 힘있는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구성된 민족 또는 국민은 힘있는 민족 또는 국민이 될 것이라 함이다. 이것은 가장 보기쉬운 진리인듯 하면서도 각국이 가장 늦게야 깨달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각국은 교육의 혁신과 보급에 대하여 전에 못보던 큰 힘을 쓰게 되었으니….
유교적 관습이 강하던 당시 ‘여성과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그의 주장은 파격적이었습니다.
1926년 1월 1일자 부록 3면
부인문제의 일면(一面)
남자 할 일, 여자 할 일
춘계 허영숙(春溪 許英肅)
지금까지 남자는 여자에 대하여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왔다. 그것이 생긴 내력을 여기서 말할 여유가 없거니와 전세계를 통하여 ‘남자는 여자보다 높다’하는 생각은 수천년을 두고 계속하여 내려왔다.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 하여 절대로 인류의 평등을 가르치는 예수교에서조차 여자는 남자보다 낮은 것이라 하였고 초목금수까지도 자비의 눈, 평등의 눈으로 보기를 가르치는 불교에서도 여자는 건지기 어려운 무슨 요물같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 조선을 오래 지배하는 유교에서는 부부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 즉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같이 여기리만큼 계급적이었었다. 그때문에 아직 조선에서는 ‘여자는 남자보다 낮다’하는 생각을 남자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가지고 있다.…(중략)…남자나 여자나 지아비나 아내나 딸이나 누이나 오래비나 누구를 불문하고 사람으로 곧 평등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왜?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하략)
허영숙은 1927년까지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있으며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려 의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1926년 3월 1~6일까지 6회에 걸쳐 연재한 ‘가정위생’ 등이 대표적으로, ‘어린아이 울 때 어머니 주의’부터 ‘아이를 못낳는 부인과 남편’ ‘해산과 위험’ 등. 허영숙은 한국 언론 최초의 의학전문기자였습니다.
1926년 3월 1일자 3면
가정위생(1)
허영숙
어린아이 울때 어머니의 주의
1926년 3월 2일자 3면
가정위생(2)
허영숙
아이를 못낳는 부인과 남편
1926년 3월 4일자 3면
가정위생(4)
허영숙
해산과 위험
1927년 퇴사, 의사 본업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허영숙은 동아일보를 통해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계속적으로 펼친 여성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1931년 1월 1일자 3면
소비생활의 합리화
의복
각 방면으로 제씨의 소감
다듬이를 말 일
허영숙 씨 담(談)
조선사람의 옷모양에는 그다지 큰 단처(短處)가 있다고 생각한 바가 없을 뿐아니라 가량 있다잡더라도 빠른 시일로써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복제도의 결점을 정 말하려면 너무 일률적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즉 개인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게 되어있지 않고 길고 짧고 넓고 좁고 할뿐이지 옷감 말려서 짓는 방식은 누구의 집에나 거의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큰 틀림이 없을 줄로 생각한다. 그리고 옷감을 다듬어서 짓는 것은 시간을 허비케 하는 동시에 옷을 상케하는 결과를 만드는 까닭에 나는 될 수 있는대로 다듬는 일을 없이 할일이라고 생각한다.(하략)
1939년 1월 3일자 2면
3대(三代) 여성이 본 문화반세기
사회적 진출도 이때의 일
사회봉사가 일반의 신념
질풍노도 겪은 2대(二代)
고민속에 헤엄치는 3대 여성의 모습
◇출석하신 분들(무순)
一代 김누세 최활란
二代 우봉운 유각경 박순천 허영숙 한소제
三代 임효정 장화순 김복진 모윤숙 김선
본사측 박승호 황신덕 기자
(전략)
허영숙 씨: 우리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대에는 훌륭한 분들이 나왔지요. 지금의 어린이들도 판단력이 나오면 다 알겠지요.
(중략)
허영숙 씨: 저는 스스로 돌아볼때 내 자신이 사상도 철저하지 못했고 자랑할만한 일도 없었으니까 자식들이 나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또 그렇게 바라기도 하고요.
(중략)
박순천 씨: 현대여성은 일반적으로 교만해서 재미없습니다.
허영숙 씨: 그것도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제가 어진 어머니 노릇을 하느냐면 못합니다만요 어린애가 학교에 있을 때는 학교에 책임이 있지만 가정에 오면 가정의 주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중략)
허영숙 씨: 물론 그말도 옳지만 그래도 어린애는 어머니와 지내는 시간이 많으니까 어머니 책임이 크지요. 아버지는 힘듭니다.
(중략)
허영숙 씨: 어린이교육에는 사회적이라든가 위생적이라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마는 이 점을 어머니들은 한번 반성해야지요. 희생정신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런 것도 어머니가 사회를 위해 일하는 걸 실제로 어린애에게 보여주어야 부모를 존경하게 되지 않습니까. 방을 쓸라고 큰소리 하는 것보다 실제로 어머니 자신이 비를 들고 나서면 어린애도 따르게 되니까요.(하략)
당시 여기자들의 활동과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담. 허영숙과 황신덕이 참석했으며, 허정숙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추계 최은희 문화사업회 편, ‘여성 전진 70년: 추계 최은희 전집 5’, 조선일보사, 1991년, 371~375쪽
제31장 퇴역 여기자들의 방담
제6회 신문의 날, 조선일보 주최
나오신 분들(가나다순)
김일순(金一順·소설가·전 경향신문 기자)
박경리(朴景利·소설가·전 서울신문 기자)
박기원(朴基媛·소설가·전 경향신문 기자)
손소희(孫素熙·소설가·전 선만일보 기자)
조경희(趙敬姬·새나라 편집국장·전 매일신보 기자)
최은희(崔恩喜·수필가·전 조선일보 기자)
허영숙(許英肅·여의사·전 동아일보 기자)
황신덕(黃信德·교육가·전 시대일보, 중외일보, 동아일보 기자)
사회 이일동(李一東·문화부장) 박현서(朴賢緖·문화부 차장) 윤석연(尹錫娟)
1924년 그러니까, 38년 전 처음으로 이 땅에 ‘여성 기자’라는 직업이 데뷔한 이래 수많은 여성이 자리를 빛내고 흘러갔다. 개인에 따라 뛰어난 재주를, 고운 얼굴 고운 맵시를, 또는 시대의 첨단을 걷는 그 움직임으로 이들은 화려한 화제를 던지며 사회를 헤엄쳐 갔던 것이다. 더욱이 흘러간 그들 여성 기자의 태반이 지금은 꽃피어 인기 여류 작가로 또는 교육자로 튼튼한 기반을 사회에 이룩해 놓은 이때 여섯 번째 맞은 ‘신문의 날’을 기념하여 그분들을 한자리에 모아 흘러간 이 얘기 저 얘기를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편집자)
사회=바쁘신데 이처럼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처럼 여러 선생님을 모시게 된 것은 4월 7일 ‘신문의 날’을 좀더 뜻 깊게 보내자는 뜻에서 과거 여기자 생활을 하신 분들과 여러 가지 기뻤던 일, 잊혀지지 않는 일들을 듣고자 해서입니다. 재미있는 말씀 많이 해주십시오. 먼저 38년 전 신문계에 나와 한국 최초의 여기자 생활을 하신 최은희 선생님부터 말씀해 주시죠.
최은희=나는 기자가 꼭 돼 보겠다고 신문사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여성이 천시받는 봉건사상을 깨뜨려 보자는 파이팅에서 였습니다. 즉 나보다 몇 년 후 역시 신문계에 나왔던 허영숙씨가 여기자가 되기 전 산부인과 의사로 개업을 하고 있었죠. 그 당시 이 아무개라는 큰 부잣집의 해산을 봐주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종무소식이고 청구서를 내도 돈을 주지 않는다는 말에 의분을 솟아서 내가 자청하고 나섰지요. 그래 그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질기게 지켜 앉아 기어이 받아 왔지요. 허영숙 씨 남편 춘원(春園)선생이 그 얘길 듣고 그 번죽과 딱장떼 같은 성격으로 능히 기자 노릇을 할 거라고 하여 조선일보에 발탁되어 기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사회=허 선생님은 우리나라 초대 여성 학예부장이 되었다는데 어떻게 기자 생활을 택하셨는지?
허영숙=동아일보 학예부장이었던 남편 춘원이 병으로 눕게 되자 정리할 원고가 많은데 도저히 다른 사람이 정리할 수 없는 것이라, 며칠 정리할 셈치고 나갔다가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그때 손이 모자라 주요한씨를 모셔왔죠. 그것뿐이니 기자 생활이라고 할 수 있어요.
최은희=왜요? 그때 방문 기사도 쓰셨지 않아요. 학예부장 생활도 3년이나 하시고…
사회=황 선생님은 지금은 교육자신데 어떻게 해서 기자 생활을 처음에 하시게 되었어요?
황신덕=희망해서 한 건 아닙니다. 그때 동경서 일본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영어가 부족한 듯 해서 동경 제국대학 영문과 청강생으로 수속해 놓고 잠깐 다니러 서울로 오는 길에 부산 어느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 말이 “신덕씨, 시대일보에 사고가 났더군요. 축하합니다.” 하지 않겠어요. 그래 깜짝 놀라 그게 무슨 소리냐고 공부 더 하려고 서울 다니러 왔다고 했더니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하느냐고 그만 했음 일을 하라고 야단이예요. 그래 무슨 굉장한 박사가 된 것도 아닌데 역시 조국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선의의 강요를 당한 셈이지요.
조경희=저는 1939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농촌계몽을 간다 어쩐다 하는데 글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글 쓸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 신문사엘 들어갔죠.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글쓰는 일과는 정반대예요. 어떻든 저는 처음부터 기자 생활을 희망해서 택한 셈이죠.
사회=손 선생님은 어떻게 선만일보에 들어가셨습니까?
손소희=신경으로 농장 구경을 가는 길에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에게 수필 한 편을 써주었더니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신문사 일을 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신문사 일이 하고 싶어 들어갔죠.
사회=지금 생각하면 참 취직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같군요. 몇 명 뽑는 견습기자 시험에 몇 백 명이 응시하는 요즘이니 말입니다.
황신덕=지금도 신문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만, 사실 여성계몽을 글로 써서 널리 알릴 시급한 시대적 환경이었던 만큼 모두 우국지사 같은 동지애에 불타던 시절이었습니다.
사회=다른 나라도 그런 예가 많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여기자 하신 분 가운덴 문필가가 되어 성공하신 분이 태반이죠? 다음은 기자 생활 하시는 동안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황신덕=길게는 안했고 한 반년 동안 있다가 시대일보가 없어진 후 중외일보로 갔었죠. 그런데 다른 직업보다 기자 생활을 더 힘이 들더군요. 그 시절만 해도 우리나라 여성 중에 글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고 잘 써 주시도 않을 뿐더러 지상(紙上)에 이름이 나는 것을 싫어하는 분이 많이 애를 먹었습니다.
손소희=만선일보에는 교정부에 여자가 하나 번역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학예면 가정면을 매일 혼자 메꿔 나갔는데 일본 통신에 실린 것이 하오리 입는 법 따위의 맨 일본사람 위주의 기사뿐이나 독자들의 투고가 많이 그중에서 추려내곤 하였지요.
사회=최은희 선생님은 그 시절엔 생각도 못 할 유행의 첨단을 걸였다는데…
최은희=멋을 부린답시고 좀 해봤죠. 모시 적삼에 쥐 젖만하고 맺은 제물 헝겊 단추를 떼어버리고 지금의 브로치나 양장에 다는 장식 단추를 달고 다녔어요. 그런데 그것을 쫒아서 하는 사람이 없으니 유행이 될 까닭이 없지요. 그리고 남빛 악어피 구두에 보석을 박아신고 다녔어요. 그 시절엔 여기자가 특이한 존재였던 만큼 새 물건이 나오면 선전의 효과를 노려 신어봐라, 입어봐라, 하고 서비스하는 유혹도 많았습니다.
황신덕=여기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시면 큰일이죠. 수목에다 수박색 물을 들여서 치마 저고리를 해입고 다닌 나같은 사람도 있습니다.(일동 웃음) 그 옷 빛을 보고 남자들이 얼마나 짓궂게 질문을 했는지 모릅니다.(일동 웃음)
사회=남자 기자를 눌러 특종을 캐낸 일은 없습니까?
최은희=있죠. 1926년 ‘6월사건’ 때 입니다. 3.1운동이 있은 후라 일본 놈들의 신경의 날카로워져 있을 때죠. 그해 6월 6일 저녁인 듯 합니다. 조선·동아·매일·중외 네 신문사의 기자들과 조선극장에서 나와 종로1가 화신 아래 그전 종로경찰서 앞쯤 왔을 때 경찰차가 한대 서 잇는데 미와(三輸)라고 사상범 때려잡는데 유명한 고등계 형사가 타고 있지 않겠어요. 그래 언뜻 이상한 생각이 들어 시계를 고치러 시계포에 다녀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다른 기자들과 헤어진 후 전주(電柱)뒤에 숨어보니 미와가 어떤 사람들을 내려놓고 가버린단 말이예요. 본격적으로 기자의 사명의식이 발동하여 종로서로 슬쩍 들어가 보니, 천도교 관계의 차상찬·김기전·방정환·박달성 씨 등 몇몇 사람이 끌려 왔더군요. 그래 큰 일이 난 것을 알고 부랴부랴 편집국장에게로 연락하여 감쪽같이 취재를 해 가지고는 새벽 2시에 조선일보만 호외를 낸 일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본즉 6월사건 때문에 예비 검속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황신덕=제가 일하던 무렵은 3.1운동이 일어난 후 7, 8년이 경과한 1926년경으로 사회적 분위기는 겉으로 조용한 편이었죠. 결국 키워 가지고 붙들어 갔는데 어떻든 하는데 까지 해보자는 애국심과 동지애에 불타 합심해서 계몽운동에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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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by 그래프사이트 — 2018/07/11 @ 1: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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