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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에서 영화감독까지 다재다능했던 석영 안석주(夕影 安碩柱).


  “석영 안석주씨가 소설이나 시, 영화각본까지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지 말고 만화방면으로 전력을 하얏스면 그의 특재(特才)를 더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사의 사정이나 씨의 환경이 그럿케 허(許)치 안는데야 엇지하랴.” (관상자, ‘경성 명인물-스면록<錄>’, 별건곤 1930년 11월호, 108쪽)


  석영 안석주는 동아일보에 정식으로 입사하기 전 나도향(羅稻香)의  ‘환희(幻戱)’(1922년 11월~1923년 3월, 117회) 의 그림을 그려 한국 신문소설 삽화계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신진문단에 일홈이 잇는 라도향(羅稻香)씨의 창작소설 환희(幻戱)를 련재하게 되엿스며 따라서 안석주(安碩柱)씨의 삽화(揷畵)를 내게 되엿슴니다.”(소설예고 장편소설 ‘환희(幻戱)’ 사고, 1922년 11월 19일자 4면)






1922년 11월 22일자 4면 환희








휘문고보 재학시절 교사 고희동으로부터 그림을 배운 석영은 함께 잡지 ‘백조’의 동인이었던 나도향의 소설 삽화로 신문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20년대 초기의 신문 연재소설은 주로 필자난 때문에 기자가 집필해야 하는 신소설 또는 번안소설로 오히려 매신(매일신보-인용자 주)의 17년대 이전으로 후퇴한다. 동아일보는 창간호의 우보 민태원작 ‘부평초’ 이후 ‘코난 도일’ 의 탐정소설을 번역한 천리구 김동성의 ‘엘렌의 공’ ‘붉은 실’ 우보의 인기 번안작 ‘무쇠탈’ 등으로 2년을 끌었고…(중략)…이러한 퇴조현상이 극복되기는 동아일보가 22년 11월 도향 나빈(稻香 羅彬)의 ‘환희’를 연재하면서부터. ‘백조’ 동인으로 참가,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를 발표한 약관 21세의 도향에게 장편을 청탁한 것은 ‘동아’로서 대단한 모험이었다. 비록 감상적(感傷的)이며 미숙한 구성을 보이는 습작수준이었지만 그러나 석영 안석주(夕影 安碩柱)의 삽화로 117회를 계속한 ‘환희’는 춘원 이후 처음 보는 장편이었으며 도향으로 하여금 ‘천재소년’으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이로부터 ‘동아’는 과도기적인 기자작가(記者作家)의 신소설 시대를 완전히 탈피한다.” (‘문단반세기-신문연재소설’, 동아일보 1973년 5월 19일자 5면)


 “‘백조’의 노작 홍사용(露雀 洪思容)은 배우 박제행(朴齊行)의 누이동생이 자살하는 동기가 되었지만 친구인 화가 석영 안석주(夕影 安碩柱)를 울려놓기도 했다. 석영의 애인이었던 기생 고엽(高葉)이 노작에게 반하여 변심해버리자 그는 노작을 붙들고 ‘자네가 우정을 저버리고 여자를 가로 챌 줄은 몰랐다’고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문단반세기-신여성과 기생’, 1973년 5월 25일자 5면)





 


 남자가 여자의 옷을 벗기려는 장면을 그린 석영의 ‘환희’ 삽화는 국내 최초의 ‘정사 장면 신문 삽화’로 꼽힙니다.




“안석주 김복진 량씨의 발긔로 신진화가 안석주(安碩柱) 김복진(金復鎭) 량씨의 주간으로 시내 뎡동(貞洞) 정칙강습원(正則講習院)에서 토월미술연구회를 조직하고…”(‘토월미술연구회(土月美術硏究會)’, 1923년 8월 6일자 3면)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 등 1919년 이전에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서양화가들에 의해 이 땅에 서양화가 이식되었고 그것은 제2기, 즉 1919년 이후부터 차차 한국적 풍토에 적응하더니 마침내 본격적인 결실에 이르게 되었다.…(중략)…1923년 8월 6일에는 토월미술연구회가 안석주 김복진의 발의로 정동 정칙강습원에서 창설되었는데 과목은 서양화 조각 미학 등이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李慶成>, 한국근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75년, 99~100쪽)


 석영이 동아일보에 입사해 처음으로 삽화를 그린 것은 춘원 이광수의 ‘재생(再生)’(1924년 11월~1925년 9월, 218회).


 “작자와 소설의 내용은 소개할 것도 업시 얼마나 자미 잇슬 것은 독자여러분의 상상에 맷기거니와 화계에 일홈이 잇는 안석주(安碩柱)씨의 그림은 금상첨화로 흥미를 도을 것임니다.” (소설예고 ‘재생(再生)’ 사고, 1924년 11월 8일자 2면)






1924년 11월 9일자 3면 장백산인(長白山人) 작, 안석주(安碩柱) 화, 재생






 동아일보는 춘원의 신병으로 이 소설이 1925년 3월 12일자 120회로 중단되자 신춘문예 입선소설에 이어 원명 ‘경이(驚異)의 재생’을 번안한 김동인(金東仁)의 ‘유랑인의 노래’(1925년 5월~1925년 6월, 36회)를 싣습니다.


 “번안 김동인(金東仁) 삽화 안석주, 련재하여 오든 소설 ‘재생’은 필자의 신병 때문에 엇절 수 업시 중지되야 그동안 신춘문예 입선된 소설을 게재하여 오면서…”(소설예고 ‘유랑인의 노래’사고, 1925년 5월 8일자 2면)






1925년 5월 11일자 4면, 유랑인의 노래






소설 ‘재생’(121회)이 다시 동아일보 지면에 나타난 것은 1925년 7월 1일자입니다. 삽화의 작가는 ‘C.K.S’라는 이니셜을 쓰는 단곡(丹谷)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찌감치 대가들의 작품에 삽화를 그린 석영은 춘원 이광수와 김동인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성격이나 버릇까지도 얼마간 알 수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나의 졸한 삽화를 이용해 주신 분은 춘원과 벽초와 횡보 독견 팔봉 파인 심훈 시어딈(김동인의 필명-인용자 주) 채만식 민촌 등 제씨니 삽화의 장면을 찻느라고 똑똑이는 못 닑엇스나 이상 몃 분의 소설을 자미를 붓처 읽어 보앗다. 그래서 이분들의 성격 (건방진 말슴이오나)이나 제씨의 벽성까지도 얼마간 알 수 잇고 글씨라든지도 알엇지만 제씨의 사회관 인생관 녀성관 내지 기호까지도 대개 짐작이 나선다.” (안석주, ‘신문소설과 삽화가’, 삼천리 1934년 8월호, 156쪽)


 석영은 연재만화도 그렸습니다.


 “만화작가로는 당대를 대표할만한 작품을 남겼으나 사상가로서의 안석주는 그리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석주는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미술교사를 했고 1924년 일본으로 단기 유학, 이듬해 귀국해 동아일보에 입사, 학예부장까지 지냈다. 이때 그는 삽화는 물론 4칸짜리 연재만화 ‘허풍선이…’를 연재, 인기만화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만화평론가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프레스빌, 1996년, 220쪽)






 1925년 1월 23일자 부록 2면, 허풍선이 모험기담




 “동아일보 허풍선이 모험기담 (1925.1.23-4.13)

 조선일보의 ‘멍텅구리’의 인기에 영향을 받아, 안석주가 밭 전(田)자 4칸에 주인공 허풍선이 세계일주를 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구성하였다.” (신문박물관 홈페이지)






1925년 3월 4일자 부록 2면, 허풍선이 모험기담(15회)






 1925년 3월 13일자 부록 2면, 허풍선이 모험기담(19회)




“주인공이 종로경찰서 순사들을 혼내주는 장면을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우회적으로나마 식민지 권력을 비판하며 독자들의 대리만족을 꾀한 것으로 해석가능하다.”(신명직,‘안석영의 만문만화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2001년, 10~11쪽)






 1925년 4월 24일자 부록 2면, 허풍선이






 “1925년 1월, 밭 전(田)자 형식으로 그림을 4칸으로 나눈 안석주의 ‘허풍선이 모험기담’이 대표적인 비시사성 만화작품이다. 이 만화는 주인공 허풍선이 세계각국을 떠돌며 여행중 실수한 부분을 만화로 구성, 발표한 것으로 1925년 4월 13일자 연재를 끝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만화는 ‘허풍선이’란 제목으로 바뀌어 1925년 4월 24일부터 동아일보 지면에 새로 연재돼었다. 허풍선이는 그해 5월 23일까지 41회 연재되다 그쳤다.” (만화평론가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프레스빌, 1996년, 191쪽)






 1925년 8월 17일자 3면, 엉터리




“동아일보 엉터리 (1925.8.17-11.6) 

석영 안석주가 주인공 엉터리의 성장기별로 ‘첫인사’ ‘소년시대’ ‘교원생활’ ‘고생사리’란 소제목을 붙여 구성하였다. 석영 안석주(1901-1950)는 신문만화작가뿐 아니라 한국최초의 신문소설 삽화작가로서 또 ‘심청전’의 영화감독, 연극인, ‘카프’에서 활동한 문학평론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한 작사가 등으로 일제시대 한국 대중문화계의 선구자로 평가 받고 있다.“ (신문박물관 홈페이지) 




  석영은 동아일보를 떠난 뒤에도 연재소설 삽화를 그렸습니다. 석영 또한 장편소설 ‘황원행(荒原行)’ 연작에 합류했습니다.






 1929년 5월 31일자 3면, 소설 예고 사고 ‘황원행’




 “‘황원행’에 금상첨화가 될 것은 조선화단에 신진 긔예한 화백들이 책임을 가지고 번갈아 삽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석영 안석주 씨-재조잇는 필치와 새로운 감각이 조선화단에 늘 새로운 자극을 줄 뿐 아니라 삽화에 치밀한 관찰과 대담한 생략은 보는 사람으로 아니 놀라게 할 수 업다.”




  당시 다섯 중진 작가와 다섯 화백이 동원된 이 소설연작에 석영은 팔봉 김기진과 함께 26~50회(1929년 7월 4일~7월 28일)분을 맡습니다.






1929년 7월 4일 3면,  황원행(荒原行)  김팔봉 필,  안석영 화






  석영의 활동은 동아일보와 잡지 등에 소개됐습니다.




“작 6일 시내 서화협회에서는 관수동 대관원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간사의 개선을 하였다는데 간사장 및 상무간사의 선거는 간사회에 일임하얏다더라. 김돈희, 안종원, 고희동, 오세창, 이도영, 이한복,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 장석표, 변관식, 안석주, 김진우, 최우석.” (‘서화협회 임총, 간사를 개선’, 1929년 11월 8일자 2면)


“일가(一家)를 이루엇다고 할 처지가 되나요. 웬…그러고 별로히 이러타고 말슴 할 거리도 엄슴니다 만은 지금 와서 모든 예술과 한가지로 회화예술도 대중화를 하여가는 터이니까 일반 미술-가령 전람회-보담도 만화나 삽화가튼 것이 압흐로 만히 발전이 될 줄로 생각함니다. 


그것은 맛치 소설이나 희곡 가튼 것이 토-키 영화에게 자리를 밀니는 것 가티 되겟지요. 그래서 엇던 신문 가튼데서는 사설 대신에 만화를 넛는 일도 잇스니까요. 어데 노동자라든지 또는 일에 밧분 사람이 긴 사설을 다 보고 잇슬 틈이 일상 잇서야지요.

나도 명색이 삽화와 만화를 전문으로 한다고는 하지만은 모든 정세가 그 방면으로만 정진하도록 허락지를 안니함니다.

가령 신문 만화나 삽화가튼 것이라도 하로에 멧장씩 그려 내게 되니까 전 정력이 다 들어가기도 어렵고 그저 열등한 것만 다량으로 생산하는 셈이지요.

또 배불은 사람들이 하듯이 넌쎈스 한 것만 그린다면이야 먹고 살 것이 여유가 잇다고 하면 못할 리도 업겟슴니다 만은 묵에가 잇고 심각한 풍자가 잇고 대중의 감정에 맛는다든가 그들의 흥미를 잇끌어야만 할 것이라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것은 한편으로 실혀하는 사람이 만허 신문의 처지로는 곤란한 점도 만코 또 검열도 통과가 잘 되지 아니하니까요.

또 소설을 쓰는 이만 하더래도 처음에는 소설을 가지고 와서 교정도 보고, 삽화도 보고 퍽 열심이지만 조곰만 웬만큼 되면 마감 10분전에 가지고 오는 이도 잇슴니다. 그 10분 동안에 삽화를 그리게 되니까 잘될 리가 잇서야지요. 엇잿거나 현재 삽화가나 만화가들이 신문이나 소설가에게 매여 지내는 형편임니다.

좀 더 연구도 하고 압흐로 신지경을 개척하여 나갈 겸해서 요전에 멧멧이 모여 상의까지도 한 일이 잇슴니다. 압흐로는 좀더 현상보담은 나어 질 것이고 신인들도 만히 나오게 되겟지요.” (만화 삽화가 안석주, 일가일언<一家一言>, 별건곤 1930년 9월호, 69쪽)


“학생시대에 몹시 동경하든 씨엿다. 더구나 ‘석영(夕影)’이라는 호가 그때의 나로서는 까닭 업시 너무나 조왓다.


씨는 다각적 재사(才士)이다. 그림도 그리고 ‘씨나리오’도 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발견할 수 업는 유모어적 내용을 취재하는 일이 만타. 나는 종종 씨를 일본의 촌산지의(村山知義)와 대조하게 되는 때가 만허진다.

씨를 말하자면 미남형이라고 할가. 대면해서 이약이 할 적의 어조는 체질에 맛지 안케 울엉차고도 부드러운 말세다. 엇던 덧 맛 나기 전의 씨와 맛난 후의 씨는 다름 업섯스니 인상이 좃치 못햇다고는 할 수 업지 안을가.” (여기자, ‘문인초인상(文人初印象)-안석주 씨’, 삼천리 1932년 2월호, 100쪽)


 당시 조선일보에 있던 석영이 잡지 ‘삼천리’의 ‘화가(畵家)가 미인(美人)을 말함’ 좌담회 에서 한 얘기. (삼천리 1936년 8월호, 116~126쪽)

 “그러치요. 무슨 일정한 표준이 서 잇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듼지 모르게 거트로 보아서도 그 얼골에나 몸 맵시에 인격이 잇서 부이고 늘 사물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지식이 풍부하고 이지력이 날카로운 여자라면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하겟지요. 그러한 고결한 미를 소유한 여자는 으레히 그 눈에나 얼골에나 어듼지 모르게 그런 미가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우리 삽화가들도 길을 가다가든지 혹은 어떤 경우에서 그러한 품성을 가진 듯한 미인을 발견할 때에는 두 세 번 보아 두엇다가 어떠한 여주인공을 그리랴 할 때에는 반듯이 화제로 삼게 되지요.”

“그야 끽다점이나 빠-갓흔데서도 간혹 발견하게 되고, 거리에서도 보게 되지만는 대체로 조선에서는 참말 미인이란 거리로 쏘단이지 안허서 그런지는 몰나도 내가 말한 그런 미인을 구할야면 아마도 교문 앞에 가 섯다가 책보를 끼고 삽분삽분 거러 나오는 제복의 처녀들 가운데서 차저 보아야 하지요.”

“그러치요. 각선미는 조선 녀자가 훨신 낫지요. 아마 동양 여자들로는 제일이라고 해도 조흘걸요. 다른 데 여자들은 보면 참 우습지요. 다섯 명이 길을 간다치면 네 명은 그 다리가 굵엇다 가느러젓다 한 것이 정이 뚝 떠러집데다.”

“그래요. 소설가가 작품을 써 가지고는 즉 삽화 그리는 사람한테 이 작품 가운데 나오는 인물들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대략이나마 이야기 해주웟스면 작품 전체의 통일점을 찻게되고 어떤 성격과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되니까 그림 그리기가 퍽으나 쉬울텐데. 어데 그런 점을 이해해 주는 작가가 멫 되나요. 내 보기에는 독견(최상덕-인용자 주)이 가장 삽화가에게 대한 이해성을 가진 분으로 알지요. 지금에도 삽화가에게 대해서 이해를 갓는 작가가 멫 안되는데 독견은 ‘승방비곡(僧房悲曲)’을 쓸 때부터도 퍽 삽화가에게 주인공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도 해 주고 해서 퍽 그리기가 쉬웟지요. 그 박게도 춘원의 작품도 퍽 쉬운 편이지요. 이 분은 원악 노대작가이니까 삽화가의 고심도 이해하는 편이고 또 소설이 한회 한회 삽화 그리기에 적당한 재료를 제공해 주는 듯 십드군요. 얼마전이 실니엿든 ‘그 여자의 일생’ 삽화는 나로서도 퍽 잘 된 편이라고 생각되여요. 

“그런데 동경 방면에서 신문 등에 실니는 소설을 보먼 매일매일 실니는 한 회분이 삽화 그리기에 적당한 재료를 맨들어 주드군요. 그 만치 신문 소설로서는 훨신 수준이 높어 젓다고 하겟지요. 조선쩌나리즘 우에서 소설을 쓰는 사람도 그만한 용의와 이해가 잇서야 삽화가에게 편리로울 줄 알어요.”

“시대물에 비하면야 현대물은 아주 쉬운 편이지요. 위선 재료를 구하기가 쉽고 또 그림 그리는 사람 자신이 일상 상식으로도 대강 알고 잇는 것들이니까 그러치 안흔 경우가 간혹 잇다 하드래도 다른 사람한데 얼마든지 이야기로 들을 수 잇스니까 시대물이야 그림을 그리다가도 모를 데가 잇스면 그 길로 달여 나가 알만한사 사람한테로 가서 뭇는 수박게 업스니까 여간 고통이 아니지요. 더구나 나는 시대물을 좀 그려 보앗는데 도모지 자신이 업서요. 그래서 금후 통 시대물에는 손을 안 대기로 하겟서요. 시대물을 그리는 사람은 시대물만 전문하는 사람이 따로 잇서야 하겟지요.”

“지금은 시대물 삽화의 개척 시대이니까 여간 큰 고통이 아니지요. 그러나 지금 시대물 삽화가들이 힘을 써서 일정한 어떤 표준을 세워서 형(型)이 잡히면 앞으로는 퍽 쉬워지겟지요.”

“또 작자가 삽화에 대한 실력을 알고 잇스면서도 잘 알여 안줄야 합데다.” 

“아무리 현대물이라고 하드래도 조선서야 아즉 모텔을 쓸 수가 잇나요. 제일 경제적으로 허치 안흐니까요. 그러나 각금 자기가 조와하는 성격을 가진 인물을 볼 때에는 늘 머리 속에 기억해 두엇다가 언제든지 모텔로 쓰는 셈이지요.”

“또 매일신보에 언젠가 실니 엿든 독견의 ‘청춘보(靑春譜)’도 순전한 모텔소설이드군요.”

“삽화가의 고통이야 참 헤일 수 업시 만치요. 위선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어떤 성격을 가젓스며 나이는 얼마나 되엿스며 어느 계급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는 아우트라인 만이라도 알엇스면 조켓는데 소설가는 더 펴놋코 한회 한회 써서 보내놋코는 作中에 나오는 인물에 대해서 삽화가에게 아무런 말도 업다가는 주인공의 얼골이 틀엿느니 무어니 무어니 해서 불만을 말해오지요. 그나 좀 시간의 여유나 잇서도 몰으겟는데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바로 印刷할 시간이 임박해서야 한 회분씩 써가지고 오고는 하니까 어데 그 소설를 충분히 읽어 볼 시간이나 잇나요. 그래노니 자연 글과 그림과는 서로 통일를 이저 버리게 되지요. 엇잿든 소설가는 삽화가의 고통을 좀 더 이해해 주워야 하겟서요.”

“그래요. 그런 경향이 만치요. 그러나 사실상 어떤 작품을 근본적으로 살닐야면 삽화의 효과란 대단히 근 것인데 그것을 사회에서나 소설가들은 그러케 잘 이해치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일본 내지에서는 훌륭한 미술가들이 모다 삽화계로 진출하는데 그것은 삽화 한 장에 2,30원을 주니까 위선 생활문제도 해결되고 즉접 돈을 써 가면서 모텔을 구해서 쓸 수도 잇지요. 조선의 삽화가도 좀 더 우대할 필요가 잇지요. 다른 기술보다 배우기에도 돈이 더 드는 것이 사실이지요. 조선의 화가는 술을 잘 먹는다고 하지마는 예술가의 우울과 비애를 어데다 풀 곳이 잇나요. 자연히 술이나 마시게 되지요.”

“이치로는 그림을 마음대로 빼여버리고 마음대로 짤너버릴테면 소설도 마음대로 뚝뚝 짤너버려야 하겟지요.(일동 일소<一笑>)”




 석영은 일장기말소사건 이후 1937년 동아일보에 재입사한 심산 노수현과 함께 동아일보 삽화진(揷畵陣)에 합류합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3일자 7면, 사고




 화단중진에 위탁 삽화진(揷畵陣)의 강화

“이번의 삽화는 이규히 작 ‘피안의 태양’은 심산 로수현(心汕 盧壽鉉)씨가 맡고 이무영 작‘명일의 포도’는 석영 안석주(夕影 安碩柱)씨가 맡고 전무길 작 ‘적멸’은 홍득순(洪得順)씨가 맡고…”


  종래 연재물 일체 중지-동아일보사 편집국

“본보 정간당시에 연재하던 소설 논문 등 계속독물(繼續讀物)은 모두 비록 독자여러분의 애독을 받던 것이엇으나 이래 9개월여에 독자의 기억에서 멀어지기 쉬엇을 것이므로 이제 아까운대로 일체 중지하고 금일부터 새로운 독물(讀物)을 일제히 시작하여…”




  이무영이 쓰고 석영이 그림을 그린 소설 ‘명일의 포도’(1937년 6월~1937년 12월)는 145회 연재됐습니다.






1937년 6월 3일자 조간 8면, 명일의 포도






 석영은 작사가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22일 오후 7시부터 시내 조선일보 누상에서 현 시단에 활약하고 있는 시인 제씨와 악단의 명성 등 10여명이 모이어 조선기사협회를 창립하였다는 바…선전부 간사-안기영 안석주 김동환.” (‘퇴폐 가요 버리고 진취적 놀애를-조선가요협회 창립’, 동아일보 1929년 2월 25일자 2면)


 그가 작사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 그의 장남 안병원이 곡을 붙여 이 노래는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안씨가 선친 석영 안석주(夕影 安碩柱, 1901~1950)씨로부터 처음 글을 받아 ‘우리의 소원’을 작곡한 것은 47년(당시 서울대 음대1년 재학)이었고 원래가사는 ‘통일’이 아니라 ‘독립’이었다고 밝혔다.

“당시는 군정시대여서 아직 ‘독립’이 안됐기 때문에 선친께서 ‘독립’을 염원하며 글을 지으셨던 것이지요. 그 후 1950년 교과서에 실리면서 문교부에서 ‘통일’로 했으면 좋겠다고 권해 바꾼 것입니다. 임수경양이 방북 때 불러 북한에서도 자주 부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씨는 “북한에서 1절 ‘통일’에 이어 2절에서는 ‘민주’, 3절에서는 ‘자주’로도 부르는 모양이나 본래는 1절밖에 없다”고 밝혔다.

안씨는 ‘우리의 소원’ 작곡경위에 대해 선친으로부터 글을 받은 후 한달 간 고민하던 중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한시간만에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해방직후 안씨는 ‘봉선화 동요회’를 창설, 해방된 조국의 어린이들에게 우리노래를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왕성하게 동요를 작곡했는데 그 결과 한때는 교과서에 15곡이나 수록됐었고 요즘도 7곡정도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우리의 소원 작곡 안병원(安丙元)씨’,동아일보 1990년 12월 7일자 9면)







 1920년대의 안석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한 안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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