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가정(新家庭) 창간 때 저작 겸 발행인은 양원모(영업국장), 인쇄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소는 신동아사였습니다. 국판에 한권 20전. 인쇄소는 나중에 주식회사 창문사로 옮겼지만 발행인의 변동은 없었습니다. 신가정 창간은 기존 여성잡지계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역시 개벽사가 발간하던 20년대의 대표적 여성잡지 ‘부인’과 이를 개제했던 ‘신여성’도 동아일보의 ‘신가정’이 창간된 후에는 종간하고 말았다. 개벽사의 ‘부인’은 1922년 6월에 창간되었다가 23년 10월호부터 ‘신여성’으로 개제했었는데 ‘신가정’ 창간 이듬해인 34년 4월호가 마지막호가 되고 말았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민족의 공기 신동아 반세기’, 신동아 1984년 9월호, 476쪽)
“창간호 최초의 인쇄부수는 7천부였다(양원모 증언). 다음호부터 하락하고 정간될 때까지 끝내 인쇄부수를 5천부선에서 상회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문환 동아일보 여성동아부 차장,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2쪽)
신가정 1933년 11월호 신가정 1934년 4월호 신가정 1936년 1월호
(표지 ‘여인’-이상범) (표지 ‘개나리’-이상범) (표지 ‘신춘’-정현웅)
신가정이 창간되자 각계의 축하가 답지하고 특히 여성계의 지도자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습니다. 신가정 창간호에 실린 창간 축사는 ‘새 힘을 주라’ (금화여학교장 김미리사), ‘실제적 교육을’ (이화전문교장 아펜설라), ‘가정의 지도자’ (농촌사업가 황에스터), ‘광명이 되라’ (숙명여고 교장 이정숙), ‘실제문제해결’ (이화전문학감 김활란), ‘바른 길로 인도’ (배화여고 교장 헬리부이) 등입니다.
신가정은 여성계몽지였습니다. 창간호엔 사진화보, 논설, 시사단평, 경제해설, 일반기사, 한국사, 좌담회, 여성동정, 여성단체 근황, 살림기사, 문예, 만화, 음악상식, 육아, 생활수기, 가정오락 등 다양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봉건적인 인습에 속박된 여성 특히 가정부인의 지적 반려로서 출발한 신가정지는 누가 보나 여성계몽지임을 인정케 된다. 매호마다 요리 재봉 등 생활에 관한 상식기사는 빠짐없이 실려있고, 특집 같은 것은 한 문제를 다루는데 전체의 3분의 1 내지 반 정도의 경우가 많이 눈에 띈다. 한 예로 1933년 2월호에 직업여성 특집을 게재하였는데 총 212페이지 중 115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최영식, ‘여성동아의 전신 신가정지 연혁’,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복간호, 457쪽)
시대를 앞서 살았던 화가 나혜석은 신가정 창간호에 구미여행 때 베를린에서 맞았던 정월 풍속을 소개하는 글 ‘베를린의 그 새벽’을 발표한데 이어 5월호에는 ‘파리의 어머니 날’을 기고합니다.
나중에 신가정의 기자가 되는 황신덕(黃信德) 선생은 1933년 4월호에 ‘조선부인운동은 어떻게 지나왔나’를 기고합니다. 기고문은 3.1 기미 만세운동으로 여성운동에 대한 자각이 싹텄으나 아직까지 여성운동은 봉건사상에 대한 비판에 머무르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요약인데, 본문에 ‘37행 생략’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조선의 부인운동은 역사가 짧을 뿐 아니라 활동무대가 자유롭지 못한 탓으로 직접 목표를 향하여 활을 던지지 못하고 간접적인 먼 길로 방황하고 있다. 부인 참정권 문제, 남녀교육균등, 직업의 자유, 법률상의 평등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고작 봉건사상에 대한 반항이나 문맹퇴치에 겨우 머무르고 있다. 여성운동은 10여년 전 자각을 촉진시킨 기미운동으로 비롯하였다. 1924년 전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가 창설되었다. 언론집회의 제한을 받는 환경이라 정치적 색채를 띠지 못하고 종교라는 간판 밑에 계몽운동에 힘썼다. 엄밀한 뜻에서 부인운동단체는 아니나 많은 공헌이 있었다. 주요인물은 유각경 차사백 김영순 김활란 홍애시덕 등이다. 같은 해 1924년 사회주의적 단체로서 박원희 정종명 주세죽 허정숙 등이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했다.
“우리 부인기자들도 지금과는 달랐어요. 요리 강습이다, 수영 강습이다, 계몽이다 해서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민족운동을 했지요.” (황신덕, ‘좌담, 46년 전 초창기의 언론계 그맘때 지사(志士)기자의 회고’, 1966년 3월 3일 오후 6시, 조선일보 회의실, ‘주요한 문집-새벽Ⅰ’, 요한기념사업회, 1982년, 841쪽)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일제의 검열을 묘하게 통과시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라도 한 가지라도 더 써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지략을 모으기도 했었다. 글로써 다 못쓰는 것은 말로써라도 보태고자, 이런 모임, 저런 모임 등을 만들어서, 강당에서도 모이고 산과 들에 가서도 모이고….” (이은상, ‘나의 신가정 편집장 시절’,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복간호, 460쪽)
신가정 1933년 9월호 60~68쪽에 실린 ‘여자체육문제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은 여성들도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신가정 1933년 9월호 60~61쪽
1933년 7월 15일 오후 5시반
본사 제1응접실에서
이은상 (본사측)=오늘은 여자체육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저 각 여학교에서 체육을 담임하고 계신 여러분을 오시라고 했습니다.
이길용 (동아일보 운동기자)=맨처음 여자정구대회를 열던 제1회(1923년 6월)에 공주 영명학교에서 나왔었습니다. 이화학교에 숙소를 정하고 있었는데 이화는 시내면서도 참가를 안했는데 영명에서는 시골인데도 =왔다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정구역사에는 한 에피소드가 되겠지요.
김신실 (이화전문 체조교수)=YWCA에서 시작하는 중이고 직업부인협회 직업여성구락부에서 회를 끝내고는 게임을 많이 시켜 장려하더군요.
서명학 (이화여고 체조교유)=이화전문에서는 그 안에 있는 졸업생과 가까이 일하는 졸업생들을 모아서 가끔 재학생과 시합을 시키는데 시간 맞추기와 모으기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예요.
박봉애 (중앙보육 체조교사)=그런데 지난봄에 조선직업부인협회에서 가정부인운동회를 장춘단에서 열었었는데 퍽 감탄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적고 운동차례도 안나올까봐 퍽 걱정을 했었는데 실상 사람도 많이 왔을뿐 아니라 호출부원들이 나오라면 50명 정원에 100명씩 나오고 마치고 나도 연달아 뛰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운동하려는 욕망들이 평소부터 퍽 많은 모양이든데요?
1933년 10월 1일에는 신가정 주최로 안양에서 제1회 밤줍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위원은 회장 송진우, 위원장 양원모, 시상 설의식, 유희 및 경기위원 이길용 박봉애 방정순 홍희, 의료위원 길정희, 설비위원 김철중 국태일 조종헌 주요섭 최영수 고형곤 박범서, 접대위원 김자혜로 발표됐습니다.
동아일보 1933년 9월 26일자 조간 6면
“10월 1일! 10월 첫 공일인 이날을 맞이하여 안양 노적봉 밑 밤나무 무성한 잔디밭에 열린 신가정 주최 부인습률대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천지가 떠나갈 듯한 웃음과 박수소리에 재미있는 경기 10여 종목을 마치고는 밤줍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노적봉 밤나무 알에 유쾌히 즐기는 부인들’, 동아일보 1933년 10월 4일자 조간 6면)
동아일보 1933년 10월 4일자 조간 6면
“습률대회를 앞둔 하루 전날 아침. ‘습률대회고 뭐고 대실패인걸. 청원인이 겨우 스물밖에 안돼.’ Y 국장의 말. 공연히 애만 쓴 것도 분하지만 가정에 얽매인 그들이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하루의 쉬임, 단 하루가 허락되지 않는 그들. 오후에 퇴사하면서 서무계를 들렀을 때 깜짝 놀랐다. 한 나절 사이에 청원인이 백오십명으로 부쩍 늘은 것이다. 밤사이에 2백명은 훨씬 늘리라.
10월 1일 새벽 네시반, 혹 날이 궂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별의 떼.
용산역. 차가 떠나려면 아직 시간반 더 있어야 되는데 희긋희긋 부인에들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삽시간에 역은 2백여명의 부인네들로 꽉 차고 앞섶에 붙인 노랗고 빨갛고 파란 휘장이 기분을 돋궈준다. 내 상상과는 달리 구가정부인들이 90퍼센트는 훨씬 넘는다. 마음대로 놀러 다닐 수 있는 신여성들보다 얼마나 더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중략)
계속해서 보배찾기 종치는 경기 추첨경주 수건쓰기 경주 릴레이. ‘아이구 이게 늘그막에 웬일이오?’하면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도 달음박질을 했다. 얌전만 피우던 부인네들이 아무것도 돌아볼 여유없이 손뼉을 치고 소리지르면서 응원했다. 상탄 것을 펼쳐보며 야단들이었다. 냄비 주걱 비누 수건 주전자 모두 살림살이 기구인 까닭에 유난히 기쁜 모양이다.
(중략)
그 얌전만 피우던 부인네들이 아무것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손벽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응원하는 것을 보면 어쩐지 가슴이 탁 터지는 소리를 지르면서 응원하는 것을 보면 저렇게 자유롭고 저렇게 구속없는 중에서도 열광적이기를 바랬다.” (K생, ‘본사 주최 제1회 습률대회기’, 신가정 1933년 11월호, 107~112쪽)
신가정 1933년 11월호 107쪽
“제2회 습률대회는 이듬해 가을 다시 안양에서, 다음해 제3회는 의정부에서 베풀어졌다. 습률대회 때의 한 진경(珍景)이 화제로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부인들이 밤나무를 타고 올라간 것을 수행했던 한 사진기자가 밑에서 올려다보고 스냅을 찍은 사건이다. 이것을 목격한 당시의 서무부장 김철중이 몽둥이로 그 기자를 두들겨 팼다. 부인들에게 점잖지 못한 짓을 함부로 했다는 것이다.” (이문환,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7쪽)
1933년 한해 여성계를 되돌아보는 조선여성계 좌담회 ‘회고와 비평’ 기사는 신가정 송년호인 12월호 14~25쪽에 실렸습니다. 참석자는 가정부인 황신덕 씨, 여의(女醫) 장문경 씨, 여류문인 최정희 씨, 배화사감 김선 씨, 여재봉사 김영애 임정혁 씨, 정신교원 홍희 씨, 소비조합 김니수 씨, 이화여전 교수 박경호 씨, 동아일보 학예부장 서항석 씨, 화가 이상범 씨 등이 모여 반성과 발전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신가정 측에서는 주요섭, 최영수, 이은상이 참석했습니다.
1934년 한해 여성계를 여는 신가정 신년호 1월호는 연두사를 통해 여성지도단체의 조직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어느 사회를 물론하고 그 민족 내지 그 사회가 문화향상을 기도함에 있어서 여성의 힘이 얼마나 큰 기여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이 누언(累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구미 각국 그네들의 전적(戰跡)을 살피건댄, 벌써 오래전부터 여성으로서의 아니 인간으로서의 모든 이권을 획득키 위하여 싸워왔다. 그러면 조선에는 그만한 전적이 없었던가? 외래의 신사조가 이 땅에 흘러들어오자 조선의 여성들도 이에 보조를 맞추어 팔을 걷고 깃발을 들고 나섰다. 여성운동에 있어서 과거의 근우회 같은 조직은 실로 주목할 값이 있는 것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여성운동의 표현단체라고 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이 특수지역이라는 이롭지 못한 조건이 있기는 하지마는 전혀 객관적 정세로만 빙자할 수도 없을 것이다.…(중략)…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몇 백회가 생기고 몇 천 단체의 조직을 본다더라도 여성운동은 조그마한 진전도 보지 못할 것이오, 또한 따라서 조선민족에게 주는 것이 적을 것임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 머리에 조선의 지식여성을 향하여 지도적 정신을 가지고 구체적 실질적으로 나아가는 여성지도단체가 탄생되기를 촉진하는 것이다.” (‘새해 첫머리에 드리는 말씀-여성지도단체의 조직’, 신가정 1934년 1월호, 10~11쪽)
신가정은 졸업시즌을 맞아 1934년 2월 2일에는 동아일보 옥상에서 여학생 졸업생 간친회를 열었습니다. 조선여성계를 이끌어 나갈 젊은 여성들의 졸업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자리였습니다. 간친회 내용은 신가정 3월호 14~27쪽에 자세히 실렸습니다. 이날 이화전문의 노천명은 “이화란 말만 들어도 생명이 약동한다. 이화학생은 씩씩할 뿐 아니라 문과는 여류작가, 음악과는 악단의 여류음악가, 가사과는 조선가정의 개선할 이를 내어보내는 본영”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동아일보 1934년 2월 3일자 조간 6면
여성계의 새 일꾼 맞이하며
전문정도 여교를 망라한 졸업생 대 간친회
작일 본보 누상(樓上)서 성대히 개최
잡지 신가정 주최로
조선여성계의 새 일꾼 1백30여 새 졸업생들의 간담을 풀어헤쳐놓은 감격에 찬 간친회는 눈비내리는 작일 오후 4시 반 본사 대강당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여성을 대표하는 김활란 선생의 인물론도 신가정에 실렸습니다. 오천석 선생이 쓴 이 인물론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금일 조선 여성계에서 살아있는 인물을 손꼽으라면 아마 누구나 김미리사, 조신성, 김활란 세 사람을 들 것이다. 김미리사를 성의인(誠의 人)이라고 하고 조신성을 열의인(熱의 人)이라고 하면 김활란은 어디까지든지 재의인(才의 人)이라고 할 것이다. 재는 그가 소유한 가장 중요한 무기다. 그의 말에서 그의 글에서 그의 행동에서 우리는 이 무기를 발견할 수 있다.” (신가정 1934년 5월호, 132쪽)
어린이특집호로 꾸민 신가정 1934년 5월호의 좌담회(113~123쪽) 주제는 ‘엄마’였습니다. 후일 본인은 동아일보 학예부기자, 남편(최승만)은 잡지부장이 되는 박승호 선생도 참석했습니다.
신가정 1934년 5월호 113쪽, 엄마 다화회(茶話會)
최이권 (연전교수 백낙준 씨 부인)
조영숙 (세전학감 윤일선 씨 부인)
임정혁 (의사 정윤용 씨 부인)
이준숙 (시인 노자영 씨 부인)
최명렬 (동아일보 기자 임병철 씨 부인)
정찬영 (약전교수 도봉섭 씨 부인)
박승호 (최승만 씨 부인)
임효정 (동아일보 기자 최용환 씨 부인)
주성은 (의사 정보라 씨 부인)
주요섭 (잡지부장)=바쁘신데 이렇게 와주십사고 한 것은 통지할 때도 간단히 말씀하였습니다마는 이번 신가정 5월호가 어린이특집호기에 엄마들만 모여서 귀여운 아기네 이야기를 해볼까 한 것입니다.
최이권 (연전교수 백낙준 씨 부인)=조선가정에서는 아들을 더 기다리는 것이 상정이예요. 우리 생각 같아서는 딸이나 아들이나 마찬가진데 왜 그럴까요. 아까도 말씀합디다마는 실상 귀엽기로 보면 계집아이가 더하죠. 재롱을 피우는 점에도 그렇고 집안을 화락케하는데도 그런데…. 심하면 입는 것 먹는 것까지 차별하는 집안이 있더군요. 이렇게 늘 남자는 집안의 왕이라는 관념을 길러놓으니까 이것이 커서 다음 우리 여성계에도 큰 영향이 돼요.
박승호 (최승만 씨 부인)=그것도 모두 아버지들이 나빠서 그래요. 다른 나라 아버지들은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도 가는데 못난 조선아버지들은 집에서는 귀애하면서도 데리고 나가라면 뺑소니를 쳐요.
그리고 유치원에서는 월사금이 비싸요. 동경서는 4원씩이나 주었는데 정말 그만한 효과가 나는가 의심돼요.
이준숙 (시인 노자영 씨 부인)=어쨋든 조선옷은 좀 개량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조선 어머니들의 옷에 대한 관념도 좀 고치고 새 옷을 해주고는 더럽힌다고 주장질을 하니 아이들이 새 옷 입는 날이면 징역살이예요. 그런 옷은 왜 해주긴 한답니까.
각 지방의 자연 역사 전설 여성들을 소개하는 ‘조선 중대 도시 이동편집’은 신가정 1934년 5월호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지역 소식은 그 지역에서 편집함으로써 현장감을 살리자는 취지였습니다.
“본사에서는 이번부터 전에 못듣던 ‘지방이동편집’이란 것을 시작하였습니다. 본 호에 실린 바와 같이 제 1회는 대구에서 편집하였습니다.…(중략)…우리의 문화운동이 각각 제 곳으로부터 불일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가정, ‘지방이동편집이란 것’, 신가정 1934년 5월호, 208쪽)
신가정 1934년 5월호 208쪽 ‘지방이동편집이란 것’(오른쪽)과 209쪽 ‘대구여성좌담회’
신가정 1934년 5월호는 대구여성좌담회(209~215쪽), 6월호는 평양여성좌담회(174~183쪽)를 실었는데 대구좌담회에는 이은상 편집장이, 평양좌담회에는 주요섭 잡지부장이 참석했습니다.
신가정 1934년 6월호 160~161쪽
제2회 중대도시 이동편집 (평양편)
평양여성단체 일별-일기자
이래 한 5,6년간 조용하더니 1915년에 이르러서 황에스터 씨를 중심으로 송회(松會)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겉으로는 계몽운동을 표방하였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상을 고취하는 단체이었다. 불과 수삼년에 비밀을 의심하기 시작한 경찰당국의 ××이 심하…(삭제)…이에 1917년에 이…(삭제)…한편으로 비밀단체가 일어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여성해방과 여성의 활동을 목표로 하는 표면단체도 생기게 되었으니 김경숙씨의 대동부인상회를 본거로 상업적 부인단체가 조직되었고 또 평양에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조직된 것도 이때이었다.
신가정 1934년 6월호 174~175쪽
공창(公娼)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해보는 강연회도 신가정 주최로 열렸습니다.
동아일보 1934년 6월 22일자 조간 2면
공사창문제의 대강연은 금야!
신가정 주최의 여름의 큰 강연회
8시부터 공회당에서
신가정이 1934년 말 조선 최초의 ‘가정음악의 밤’을 연 것은 조선의 각 가정에 “새로운 행복”(이은상 편집장, 창간호의 편집여묵)을 선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곧 새 조선의 출생입니다. 본지는 오직 그것만을 위하여 났고, 또 그것밖에 다른 아무 소원도 없는 것입니다.”
조선에선 최초의 연주, 가정음악의 밤 -세계 각 민족의 가정음악곡으로 신가정 주최 악단의 권위 총망라 (동아일보 1934년 11월 1일자 조간 2면)
동아일보 1934년 11월 24일자 조간 2면
주최 신가정 명작 ‘가정곡’-‘홈 스윝 홈 변주환상곡’ 홍난파씨 제금(提琴)독주
동아일보 1934년 11월 25일자 조간 2면
신가정 1935년 2월호에 연예십결(104쪽)도 실렸지만 신가정의 주된 독자층은 주부였습니다. 신가정은 때때로 교양 강좌와 요리 강습도 열었습니다.
신가정 1935년 2월호 104쪽
동아일보 1935년 3월 21일자 석간 4면 사고
신가정 주최 춘기 여자상식 강좌
가정부인협회·신가정 주최 중국요리강습
화가 나혜석에 대한 소식은 신가정 1934년 10월호에 ‘평양의 한 소부(小婦)’란 이름의 독자투고가 실린데 이어 다음해 12월호에 화가 이마동의 ‘1935년 여성화단 총평’에 나옵니다.
“삼천리 잡지 (1934년) 8, 9월호에 나누어 실린 혜석의 ‘이혼고백장’은 글이 나가자마자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중략)…많은 여성들의 그와 같은 반응은 동아일보가 발행하던 여성잡지 ‘신가정’의 독자투고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다. ‘나혜석 씨에게’라는 제목의 공개서한 형식으로 된 이 글의 골자를 살펴보면-.
-그러한 고백장을 사회에 적나라하게 발표하는 당신의 태도에 반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보기 흉하게 무너지고 만 가정의 내막을 들춰보일 필요가 어디 있었는가.
-“나는 공(최린을 뜻함)을 사랑합니다” 등 당신의 말은 가정주부의 이름을 위하여 입에 담아 옮기기가 민망하다.” (정규웅, ‘나혜석 평전’, 중앙M&B, 2003년, 253쪽)
“…전날에 여류작가로 이름 있던 나혜석 여사의 개인전람회가 10월말에 조선관에서 다수한 작품을 진열하였다. 그러나 여사의 전날의 화려하던 꿈자취는 찾아볼 길 없었고, 오히려 그 작품을 대하지 않았던들 옛날의 기억이 남았었을 것을 하는 이상한 감을 느꼈다.” (이마동, ‘잘가거라 을해년아-을해 1년간 여성화단 회고’, 신가정 1935년 12월호, 28쪽)
이은상 편집장의 후임인 수주 변영로(卞榮魯)는 신가정 1936년 1월호 신년호 별지에 ‘신가정노래-즐거운 내 집 살림’을 직접 작사해 싣습니다. 작곡은 현제명(玄濟明) 선생이 맡았습니다.
두옥(斗屋)을 뉘웃으리/ 적은 채 우리 궁전/부신 듯 가난해도/ 맘 기뿐 내집살림/…
“우리에게 반듯이 있어야할 가정노래가 아직껏도 없었음을 늘 유감으로 생각하여 오던 차에 이번 우연히 변영로 선생의 시를 졸자가 읊어보다가 심금이 울리어 감히 그려놓은 것이 이것입니다.”(현제명, ‘작곡하고 나서’, 신가정 1936년 1월호, 8~9쪽)
1936년 병자년 한해를 전망해보는 ‘이동좌담회’에는 김활란 길정희 김옥례 이숙종이 나섰습니다.
신가정 1936년 1월호(12~17쪽), 각계전망 이동좌담기
교육계-김활란
여자로서 교육사업에 거금을 내놓으시는 분이 많은 모양인데 그것이 여학교를 위하여 내놓는 분은 없는 것 같아요. 여자교육의 필요를 먼저 느껴야할 사람은 조선여자 자신인줄 압니다. 다른 문화사업에 쓰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나 그 중에 여학교를 위하여서도 고마운 마음을 잡숫는 분이 있었으면 합니다.
의료계-길정희
여자의학전문학교도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조선부녀들은 신여성이고 구여성이고 간에 미신을 맹종하는데 그것이 의료계에 더욱 부녀보건에 끼치는 악영향이 큽니다.
운동계-김옥례
일반적으로의 스포츠에 대한 이해와 사회의 원조와 따라서 가정에서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조건이 다 유리한 외국여자들에게서 선수가 많이 나오는 것은 무리가 아니지요. 여자뿐 아니라 조선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에게나 지지 않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미술계-이숙종
학교 교육에 있어서도 미술방면에 좀더 노력할 여지가 있는 줄 알며 생활이라는 무서운 짐을 지게 되는 시간적 조건의 불리한 점도 있겠지요.
“특기할 것은 김메리 씨가 ‘새해노래’를 작곡 작사하여 주신 것과 현제명 씨가 신가정 노래를 작곡하여 주신 것과 우리의 당면문제인 주택개량에 관하여 박길용 씨와 이만학 씨가 각기 전문으로 연구하신 바를 적어 보내주신 것인 중 이 문제는 원체 절실한 문제이니만큼 이번 신년호에만이 아니고 적어도 이 병자년 1년을 통해 축호(逐號)하여 이 방면의 권위자와 깊은 관심을 가지신 이의 연구논문을 싣기로 하였습니다. 또 자랑삼아 말씀하올 것은 삼화예술의 최고수준을 보이는 정현웅 씨의 아룽다룽한 솜씨로 그림에 굶주린 가엾은 우리 아기들의 새해선물로 곱게 채색 올린 아동화보를 특별부록으로 내여 놓게 된 것입니다. 잡지가 허다하지만 우리 ‘신가정’처럼 깨끗하고 조졸하여 사회나 가정에 해독을 끼치지 않는 잡지는 드물 것을 끝으로 말하여 둡니다.” (변영로, 편집후기, 신가정 1936년 1월호, 198쪽)
변영로 편집장이 당면문제로 꼽은 주택문제 좌담회에는 변 편집장 외에 황신덕 기자와 학예부 박승호 기자, 잡지부의 최영수 기자가 참석했습니다.
신가정 1936년 1월호 60~61쪽, 주택문제 좌담회
출석자
연전 수물과(數物科) 강사 이만학 씨
건축가 박길용 씨
이전 가사과 교수 김몌비 씨
협성여신 교수 고봉경 씨
동덕여고 교유 송금선 씨
여자고보 교유 손정규 씨
신가정 1936년 1월호와 2월호는 당시 논객이었던 안재홍 선생과 여운형 선생이 여학생에게 보내는 글(96~98쪽)과 말(102~104쪽)을 실었습니다.
“조선을 구해낼 이(者)는 조선 사람인 것이오 그 중에도 안방에서부터 부엌에서부터 새로운 광명스러운 조선을 해산하여 길러낼 분들은 여러분 여성들입니다. 나는 여성구족론 즉 모성구족론(母性救族論)을 부르짖습니다. 조선의 옛 도덕은 여성들에게 일부종사하는 맵고 뜨거운 정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조선은 그것의 대신으로 우리 여성들에게 조선이 다시 삶을 위하여서 일부종사나 마찬가지인 맵고도 무서운 문화개척의 ‘수절’의 생활을 하기들을 굳세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소임은 큽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로서가 아니고 맵고 깐깐한 실천으로서입니다.” (안재홍, ‘여성의 소임이 큽니다’, 신가정 1936년 1월호, 98쪽)
신가정 1936년 2월호 화보는 한국 최초의 민간박물관으로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 씨의 소장품으로 엮었습니다.
“김씨는 영조시대(150년 전)의 여류화가인데 강인환이란 분의 어머니다. 원래 훌륭한 화가이었으나 여자의 덕은 필한(筆翰)에 있지 않다하여 여간하여서는 화필을 잡지 않았다 한다. 이 두 폭 그림 포도도와 화훼도는 특히 그 애아(愛兒)인 상기 강인환에게 그려준 사랑의 선물로 얻기 귀한 진품인데 이번 전형필 씨의 후의로 우리 화보에 실리게 된 것이다.”(‘여류명화 2폭’, 신가정 1936년 2월호 화보)
동아일보 1936년 1월 10일자 5면, 서화 ‘병자(丙子)와 명화’
김씨(金氏)-강인환지모(姜寅煥之母) 필(筆) 영조시대여류화가
전형필 씨 소장
변영로 편집장이 ‘특필대서할 자랑스러운 기사’로 꼽은 ‘여성조선의 현상과 추이’ 논문은 이여성(李如星) 조사부장이 썼습니다. 신가정 1936년 3월호와 4월호에 실린 이 논문은 여성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뤘습니다. 당시 여성의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신매매계약서의 사진도 실었습니다.
“이번 3월호의 특필대서할 자랑스러운 기사는 이여성씨가 집필하신 ‘여성조선의 현상과 추이’이니 엄정한 숫자에 의거된 여성조선의 ‘파노라마’라고나 할까요? 하여간 독자 여러분의 일독은커녕 재독 삼독을 편집자는 요구합니다.” (변영로, 편집여적<餘滴>, 신가정 1936년 3월호, 208쪽)
신가정 1936년 3월호 143~163쪽, 여성조선의 현상과 추이(상)-이여성
조선여성의 인구구성, 교육정도, 교육현황, 직업상황
신가정 1936년 4월호 64~76쪽, 여성조선의 현상과 추이(하)-이여성
조선여자의 혼인문제, 법률적 지위, 인신매매문제
신가정 1936년 4월호 74쪽, 인신매매계약서 일종
신가정이 여성계몽지를 표방하다보니 너무 점잖다는 지적을 받았나봅니다. 변영로 편집장은 ‘깨끗하고 조졸하여 사회나 가정에 해독을 끼치지 않는 잡지’(신가정 1936년 1월호 198쪽), ‘사람 끄는 요술은 적은 채 수수하게 차린 순직해 보이는 여자’(6월호, 200쪽)라고 자부했습니다.
“‘너무 취미기사가 적다’, ‘너무 점잖다’, ‘왜 눈에 뜨일만한 재미있는 것을 아니 적어내나’ 등등은 모두 우리 신가정에 대한 흉이라면 흉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반대로 그러함을 큰 자랑으로 알고 동시에 큰 영예로 볼 이유와 긍지도 있다고 합니다. 총혜하신 독자들께서 모르실바 아니지만 자칫하면 남의 저급취미만을 북돋고 남의 야비한 호기심과 고상치 않은 본능을 건드리기 위하여 소위 취미라는 미명아래 함부로 떠드는 것입니다. 이곳에 유두분면(油頭粉面)한 요악한 여자 하나와 그만큼 사람 끄는 요술은 적은 채 수수하게 차린 순직해 보이는 여자 하나가 있다, 상상하시고 그들 중에 어느 것을 택하면 해가 있고 어느 것을 택하면 복이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신가정이 사람에 비긴다면 전자일까 후자일까? 짐작케 되실 줄 확신합니다.” (변영로, 편집여설<餘屑>,신가정 1936년 6월호, 200쪽)
변영로 황신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