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정이 새롭고 광명하고 정돈되고 기름지다고 하면 그것은 그 개인, 그 가정만의 행복이 아니라 그대로 조선 사회, 조선 민족의 행복입니다”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신동아’ 자매지 ‘신가정’ 의 창간사에서 가정의 중요함과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1933년 1월 창간호
1933년 1월, 창간호 표지는 계유년과 조선의 여명을 알리는 닭과 함께 모자(母子)가 그려져 있습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의 작품입니다
초대 편집장 노산 이은상 선생은 창간호 편집여묵에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출발이 있어지이다. 여러분의 가정에 새로운 행복이 있어지이다. 이것이 곧 새 조선의 출생입니다. 본지는 오직 그것만을 위하여 났고, 또 그것밖에 다른 아무 소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하기 전에는 본지의 생명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억압 속에서나마 새로운 광명을 찾아보려했고, 또 그것을 민족 전체의 행복이라는 점에 집약시켜 보려했던 것이다.…(중략)…가정이 바로 서면 남성들의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들에게 민족정신을 전도하는 것으로써 ‘새조선’운동의 첩경을 삼았던 것이다.” (이은상, ‘나의 신가정 편집장 시절’,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복간호, 459~460쪽)
“여성지 발간계획이 결정되자 그 기획 편집의 총책임은 당시 30세의 노산 이은상이 맡게 됐다. 노산은 약관 20세 무렵부터 명산 답파의 기행과 손대는 이 드물었던 국학 연구에 이미 그의 재필을 전국에 떨치고 있었으며 동아의 기고가로서 동아일보는 그의 득의의 무대처럼 되어 있었다. 한편 그를 가리켜 총독부의 일인 관리는 ‘단군 갓을 쓰고 세종대왕 두루마기를 입고 이순신 신을 신고 다니는 놈’으로 아주 기휘(忌諱)하던 인물이었다.…(중략)…제호는 ‘신가정’으로 정했다. 이 제호는 고하 송진우, 설의식, 주요섭, 이은상 네 사람이 상의하여 명명했다고 한다.”(이문환 여성동아부차장,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0쪽)
‘여성들에게 민족정신을 전도’하려다보니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국내외 여성들의 활동과 독립운동가의 아내 얘기가 많은 지면을 차지했습니다. 이에 따라 총독부의 원고압수와 게재금지, 삭제가 많았습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의 부인과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의 부인 기사가 1934년 1월호에 나란히 실렸습니다.
신가정 1934년 1월호 100~102쪽, ‘부군은 지하에 고적한 새해맞이-김상옥 부인 정광명 여사 방문기’
“그건 없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기는 하지마는 그이가 일평생 우리를 위해서만 매어있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아서 단념하고 있었으니까요.…(삭제)…”
“태용이에게 대한 희망은 없으신가요!”
“어찌 없을 수가 있나요. 많기야 합니다마는 내다보지도 않고 바랄 수만이야 있습니까. 오직 비는 것은, 제가 아무개의 자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제 아버지 얼굴에 부끄러운 일이나 않았으면 합니다.”
어디까지나 ××가의 부인으로서의 씩씩한 대답이다. 가신님을 이야기하시면서도 오히려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어느 한 곳에 구긴 곳이 없다.
‘이 남편에, 이 부인이 있다!’
기자는 제법 짙어진 황혼을 뚫고 나오면서 다시 한번 부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신가정 1934년 1월호 102쪽(오른쪽) ‘김상옥 부인 정광명 여사 방문기’ 일부와 103쪽 ‘신채호 부인 박자혜 여사 방문기’ 일부
신가정 1934년 1월호 102~104쪽, ‘부군은 옥중에 신산한 새해맞이-신채호 부인 박자혜 여사 방문기’
“그러면 최후로 신 선생님의 편지를 받으신 것은 얼마나 됩니까?”
“꼭 3년 됩니다. 항상 편지를 하신대야 잘 있고, 몸 건강하오, 이식이니까, 자세한 것은 물론 모릅니다마는.”
“그러면 지금은 어디 계십니까?”
“여순(旅順) 감옥에 계십니다. 그것도 전옥(典獄)에게 왕복엽서를 보내어 겨우 알았습니다.”
(중략)
“암만하여도 신 선생은 저를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요.”
“오해라니오?”
“그렇쟎고야 3년 동안이나 서신을 끊을 리가 있나요.”
“그러면, 신 선생이 오해하실만한 무슨 조건이 있었습니까?”
“그야 별로 오해 당할만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마는, 3년 전입니다. 옥중에서 ‘국조보감’이라는 책과 또 무슨 서양역사책을 사 보내라고 하셨는데, 값을 알고 보니 50여원이나 된다고해서 안재홍 씨에게 부탁했더니 안재홍 씨도 그 약속을 이행치 못했어요. 그랬더니 그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중략)
기자는, 김상옥 씨 부인을 방문했을 때 느낀 그 감회를 여기서도 느꼈다. 처음 방문 명령을 받았을 때는 울고 불면 어쩌나 하는 것이 실상은 큰 염려가 되었었다. 그것은 기자가 남달리 정에 여린 만큼, 따라 울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커다란 불행을 떠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꿋꿋하시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니, 아홉시. 너무 일찍 왔었구나하는 후회가 시계를 보니 다시 난다.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두범 군이 쫓아 나오면서 인사를 한다.
신채호 선생의 근황은 바로 전월호 신동아에 실렸고, 이에 앞서 박자혜 여사에 대한 삶은 신동아와 신가정이 창간되기 전 동아일보에 실려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대련(大連)감옥의 신채호-소화 5년 7월 19일에 대련재판소에서 10년의 언도를 받고 이역의 철창에서 날을 보내면서 그의 아내 박씨에게 ‘내 걱정은 말고 부디 수범이 형제 데리고 잘 지내며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하는 편지가 왔다한다.” (‘옥중(獄中)에서 해를 보내는 이들’, 신동아 1933년 12월호, 173쪽)
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 5면
냉돌(冷突)에 기장(飢腸)쥐고 모슬(母膝)에 양아(兩兒) 제읍(啼泣)- 신채호 부인방문기
이역 철창리에 풍운아 남편 두고 어린 두 아이 기르는 신채호 부인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홀로 어린 아이 형제를 거느리고 저주된 운명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애처로운 젊은 부인이 있다.…(중략)…이 집이 조선 사람으로는 거개 다 아는 풍운아 신채호 가정이다.…(중략)…삼순구식도 그에게는 계속 할 힘이 없어지어 그의 할 바를 몰라 옥중에 있는 가장에게 하소연한 바가 있었는지 “내 걱정은 마시고 부디 수범이 형제 데리고 잘 지내며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라는 편지를 띄워 본 박여사는 한층 더 수운(愁雲)에 잠기어 복받치는 설음을 억제할 길이 없이 지내는 중이라 한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13일 7면
만리이역에서 결혼, 풍우에 날리는 애소(愛巢)- 신채호 부인방문기(2)
‘신채호 가정에 유지의 동정금’ (동아일보 1928년 12월 18일 2면)
‘신채호 가정에 답지하는 동정’ (동아일보 1928년 12월 19일 2면)
‘천주교부인회, 신채호 가정 동정’ (동아일보 1929년 1월 11일 2면)
신가정 1934년 4월호는 배화여학교 제 1회 졸업생이었던 안원정(安元貞) 여사의 고단한 삶도 오롯이 담았습니다.
신가정 1934년 4월호 77~99쪽 ‘30년전 여학생, 배화여학교 제1회 졸업생-안원정 여사 방문기’
사직동 도장궁을 끼고 올라서 향촌동으로 넘어가는 길로 들어서자 높지막한 지대에 양철로 담을 한 집한 채가 있으니 그것이 안원정 씨의 댁이다. 한조각 기록한 주소를 펴들고 그 댁문 앞에 발을 멈춘 기자는 문 사이로 주인 안원정 씨를 찾았다.(중략)
“네 그렇습니다. 내가 18살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에 일곱사람이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중에는 혹 죽은 사람도 있고 또 어디가 있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지요. 그때야 지금과 달라서 망칙한 꼴도 많았지만 그래도 제 1회 졸업식이라고 하여서 굉장했었더랍니다.”(중략)
“그후 말씀드리자면 이루 어떻게 다 말씀하겠습니까! 하여간 그 후에 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4년동안 교편을 잡고 있다가 스물두살 때 김영학(金永鶴)이란 분과 결혼을 하였지요. 결혼하고도 3년 동안이나 교원생활을 계속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그 분이 4년 동안이나 감옥에 가 있게 되는 동안 교원 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1922년 10월에 해외특파선교사로서 북국 해삼위로 가게 되어 원산서 한 가족이 배를 탔습니다.…(중략)…혁명이후 급시로 공산제도가 실시되는 때인데다가 점점 탄압을 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교회당까지 빼앗으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가진 앙탈, 가진 힘을 다하여 싸워보았으나 드디어 약한 자의 힘이라 당하지 못하고 1924년 2월 7일에 예배당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중략)…그러다가 다시금 무서운 일이 닥쳐왔으니 그것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1930년 1월 2일 밤 밖에서는 솜덩이보다도 더 큰 눈덩이가 쏟아지는 이 밤에 경관들이 와서 무조건하고 주인을 포박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뜩했겠습니까! 수만리 이역에서 어린 것 늙은 어머니를 데리고 여덟 식구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그래도 오늘이야 오늘이야하고 나오실 날을 기다리었으나 다섯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음으로 어쩌는 수 없이 주인을 옥중에 남긴 채 일곱 식구가 고국에 돌아와 웅기에서 잠시 머물러 주인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면회 한번도 못하고 나와서 기다리는 일곱 식구 앞에 드디어 처음 소식이 한 장 떨어졌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 그러나 한편으로 그이를 대한 듯한 기쁜 마음에 뜯어보니 그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가슴이 뻐개어지는듯한 소식이었습니다. 드디어 10년 징역의 언도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중략)
“어떻게 합니까!…(중략)…그러자 작년 10월에 최후의 소식이 날아 왔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옥사가 아니라 해삼위에서도 수천리되는 북극지대에 귀양을 가서는 그곳에서 눈치는 일을 하고 있다가 눈에 파묻히어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최후의 한줄기 희망조차 끊어진 내 생활에서 무엇을 말씀하겠습니까. 오직 이국의 눈벌판에 파묻힌 그를 위하여 어린 것들이나 교양하는 것으로서 보답의 뜻을 삼고 오직 신앙생활에서 위안을 받으면서 살 뿐입니다.”(중략)
댁을 나오는 내 눈앞에 씨가 졸업하신 배화여학교가 역시 눈물어린 얼굴로 나타나는 것을 여러 번 바라보면서 지나쳤다.
“원고가 다 검열에 통과된 뒤에 인쇄에 넘어가면 괜찮았을 텐데 한편 검열이 끝난 부분은 먼저 인쇄에 넘기고, 나중 부분은 인쇄한 걸 검열에 돌리고 했기 때문에 그게 나중에 삭제되면 꺼멓게 동판 깎인 자리에 자죽이 남았죠.” (김자혜, ‘신가정 때의 여기자’,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복간호, 462쪽)
신가정 1934년 5월호 70~80쪽, ‘세계소년운동개관’-홍효민
신가정 1934년 5월호 81~85쪽, ‘조선소년군의 진용’-조철호
신가정 1934년 5월호 70~71쪽
신가정 1934년 5월호 80~81쪽
“검열은 순순히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열흘이건 스무날이건 마냥 묵혀두고 애를 먹인 다음 원고 압수니 게재금지니 삭제를 자행했다. 그러다보면 책은 연판이 깎인 부분, 먹칠 한 자국이 수두룩하게 되었다.…(중략)…‘국난시기를 당한 중국여성들의 맹활동’(신언준) ‘깐디즘을 존봉(尊奉)하는 인도부인의 활동’(홍효민) ‘그날의 ××××단 기념’(장선희)(33년 4월호)같은 원고는 압수되었고 ‘동서(東西) 10대 여성공천’(34년 6월호)은 모두 삭제되었다.” (이문환,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8쪽)
세계의 여성위인을 뽑는 ‘동서 10대 여성공천’ 기사에 앞서 1934년 1월호 신년호에는 조선역사에 남은 여성위인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가정 1934년 1월호 34~41쪽, ‘조선역사상 10대 여성공천’
신가정 1934년 1월호 34~35쪽
조선 반만년 역사상 과연 어떠한 여성들이 있었던가. 내 역사상에 뛰어난 여성인물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분명히 수치다.
문일평 김원근 황의돈 양건식 현상윤 최규동 이능화 권상로 우호익 김진호 설태희 최현배 이승규 양세환 이희승 차상찬 김극배 김창제 채필근 김태준 이윤재 유광렬 등 당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추천을 받았습니다. 공천결과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득표 20)을 위시해서 허난설헌(19) 선덕여왕(17) 도미(都彌) 처(14) 논개(14) 평강공주(13) 왕건태조비 유씨(8) 황진(8)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萬明)부인(6) 가실(嘉實)의 처 설씨(6) 등이 여성 위인으로 뽑혔습니다.
신가정은 여성 위인 10인에 대해 1934년 1월호(42~59쪽)와 2월호(79~104쪽)에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의기(義妓) 논개에 대해서는 이은상 선생이 썼습니다.
“그러다가 논개는 왜장의 허리를 죽어라고 껴안고서 바위 밑 깊은 물속에 빠져 자기의 품은 뜻을 이루고야 마니 후세사람들이 그 바위이름을 의기암(義妓岩)이라 혹은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6줄 삭제)…1593년 6월 29일! 이날은 그가 남강에 몸을 던져 마지막 죽은 날이다. 그렇다.…(중략)…번거로운 그 절차를 적은 것은 너무 지루하기로 그 제전 때에 부르는 의기사(義妓詞) 시조 3수와 의암곡(義岩曲)만을 적어두기로 한다.” (신가정 1934년 2월호, 103쪽)
신가정 1934년 2월호 104쪽
세계 여성 위인 공천과 관련해서는 신가정 전호(前號)에 사고(社告)까지 냈습니다.
신가정 1934년 5월호 141쪽 특고
다음호에는 고명한 평안을 가진 여러 선생으로부터 투표 받은 세계 여류위인 20인을 발표하고 그 전기도 소개하겠습니다. 신가정 백
신가정 1934년 6월호 72~77쪽, ‘동서(東西) 10대 여성공천’-삭제
신가정 1934년 6월호 72~73쪽
신가정 1934년 5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강경애의 장편소설 ‘소금’은 마지막 부분이 삭제돼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신가정 1934년 5월호 224~230쪽, 장편소설 ‘소금’ 1회-강경애
“…순사는 그의 눈치를 채고 이것이 관념이 아닌 것을 곧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소리치며 그의 손을 잡아 낚아챘다. 별안간 그의 몸은 화끈 달며 어젯밤 산마루에서 무심히 아니(원문에서 13자 가량 삭제됨) 들었던 그들의 말(원문에서 이하 결말부분 220자 가량 삭제됨) 신가정 17~22호(1934.5~10)” (김경애, ‘소금’, ‘20세기 한국소설 7’, 창비, 2005년, 173쪽)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의 삶은 신채호 선생이 사망하면서 다시 한번 동아일보와 신가정에 소개됩니다.
‘단재 신채호 뇌일혈로 의식불명, 형무소장 전보로 가족 금일(今日) 향발’ (동아일보 1936년 2월 19일 2면)
‘위독하던 단재 신채호, 재작일 옥중에서 영면’ (동아일보 1936년 2월 23일 2면)
‘30년만에 고토(故土)에, 옥사한 신채호 유골’ (동아일보 1936년 2월 25일 2면)
‘소식-박자혜(朴慈惠)씨(고 신채호 씨 미망인) 인사차 본사내방’ (동아일보 1936년 3월 8일 1면)
신가정 1936년 5월호 52~53쪽
항애(亢哀)에 우는 사람들
“요새는 상주(喪主)”라고 찾는 이도 희소!
박자혜 씨
단재 신채호 그분은 인격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더욱이 학문에 있어서 최근 조선의 제일인자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이 모 사건에 관련되어 7년의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 갇히어 영어의 몸이 된지 이미 6년, 앞으로 1년 6개월만 지나면 자유의 몸이 되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분의 출옥을 손꼽아 기다린 이 어찌 그의 가족뿐이었으며 그의 친지뿐이었겠습니까. 아 그러나 하늘이 그를 시기함인지 조선의 불행이 아직도 남았음인가 이 둘도 없을 존재가 뜻하지 아니한 뇌일혈로 지난 2월 22일 이 역의 철창 속에 시멘트 바닥 위에서 한 많은 세상을 버리고 말았으니 뜻있는 자 어느 누가 이를 슬퍼하지 않으리까마는 평생의 고락을 같이하려든 그 부인.
(중략)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이 기와집들 틈에 어깨도 펴지 못한 채 옹그리고 있는 어느 초가집 대문밖에 걸려 있었습니다. 중문 턱을 들어서서 안방을 향하고 박자혜 씨를 찾았더니 뜻밖에도 등 뒤 아래방문이 열리며 부인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예상은 하였거니와 부엌도 마루도 없는 아래채 한간 방에 너무도 쓸쓸하게 지내는 여사의 얼굴을 차마 마주 바라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중략)
여사-벌써 15,16년 전 일입니다. 숙명을 나와 총독부 병원 산파과에 배우다가 기미운동에 관련이 되어 해외로 나가 무엇을 해본다든 것이 결국 상해에서 그와 결혼을 하게 되었답니다.
여사-겨우 3년 동안 살림이라고 하다가 사정에 의지하여 나만 어린 것을 데리고 귀국하였지요. 이래 십여 년을 하루같이 쓸쓸하고 고달픈 생활을 합니다. 그의 생각을 짐작하니까 남과 같이 재미있는 살림을 다시 하리라고는 믿지 않았으나 그저 끔찍한 소식이나 없기를 주야로 축수하였더니…
여사-웬걸요. 전보를 받고 21일에 도착하니 맥박만은 붙어 있으나 의식을 벌써 없으셨는데 감옥규칙이라고 한 시간 모시고 있다가 여관에 와 있노라니 22일 오후 네시경에 절명하셨다고 소식이 나왔습니다. 최후의 눈도 내손으로 못 감기고 그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돌아가신 것이 철천지한이어요.
(중략)
“그래도 그가 살아 계실 때에는 소식이 오려니 기다리기도 하고 들여다보는 이도 있더니 인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산파직업도 요새는 상주라고 모두 다른 사람을 소개해달라니 앞으로 살아나갈 길이 아득합니다. 이 슬픈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는지요.”
하염없는 원한과 애통에 싸인 부인과 잠시 말동무라도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차마 떠나기 어려웠으나 사무에 총총한 몸이라 후일을 기약하고 뎅그렁거리는 산파간판을 뒤로 남긴 채 우울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종로로 나왔습니다.
“1919년 3월 10일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 및 간호원들을 동원하여 독립만세를 주도하고 국공립병원의 동료들을 포섭하여 태업을 주동하다가 피체 투옥된 일이 있으며 곧 중국으로 탈출하여 신채호와 결혼하고 남편의 광복운동을 적극지원하다가 1924년 귀국하여 독립지사들간의 연락, 정보, 편의제공 등을 하다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얻은 지병으로 49세를 일기로 사망한 공적이 있으므로 대통령표창에 해당하는 자로 사료됨.” (박자혜-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애족장, 1990년, 국가보훈처)
이은상 김자혜
“서울시가전의 용장 김상옥의사” 가 KBS TV제작국 요청으로
“1: 1000의 독립전쟁”으로 제목이 바뀌어 11월17일 순국선열의 날 행사전
오전 10시 방영됨을 알려 드리며. 제블로그에서 예고 동영상을 볼수 있으며
김상옥의사님이 하신 일을 한분이라도 더알려지게 널리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http://blog.naver.com/56dhyoon/220179253614
Comment by 윤덕호 — 2014/11/15 @ 1:41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