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일제하 ‘신동아’도 검열과 게재금지, 삭제에 시달렸습니다.


  “신동아의 원고 검열은 우리말에 능한 니시무라라는 일인이 맡고 있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였다. 그래서 마누라의 바가지가 다음날엔 아무 죄 없는 신동아에 수많은 자국을 남겨도 어쩔 수 없는 억울한 시대였다.” (고형곤, ‘신동아의 초창기’, 동아일보 1964년 8월 22일자 5면)


  “신동아가 창간과 동시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일제하에서 마치 정부와도 같은 존재였던 동아일보에서 발행하는 잡지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형곤 당시 신동아 기자, ‘민족의 잡지, 일제하의 신동아’, 신동아 1991년 11월호, 629쪽)


  신동아 여기저기에는 삭제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신동아 1933년 12월호 160쪽




 김상용 시인이 신동아 1933년 12월호에 쓴 ‘단상일속(斷想一束)’은 첫 편부터 삭제됐습니다.


 같은 호 ‘옥중(獄中)에서 해를 보내는 이들’ (170~173쪽)의 기사도 군데군데 삭제됐습니다.


 -장기(長崎)감옥 (김익상)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당시 전변(田邊)변호사는…(삭제)…조선 민족에 덕화로써 대하여 은택을 베풂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던 바 무기의 형을 받았다.”


 -태전(太田)감옥 (안창호)

“12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산하(山下) 재판장으로부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역(役)을 언도받고 익일 면회 간 신 변호사를 향하여…(삭제)…공소권을 포기하고 복역하고 있던  바 지난 4월말경에 태전(太田은 대전의 옛지명-인용자 주)형무소로 이감되어 남은 형기를 기다리고 있다한다.







 독자작품모집 제2회에 당선된 박영준의 장편소설 ‘1년’은 1934년 3월호부터 12월호까지  신동아에 연재됐는데 첫 회 뒷부분이 삭제됐습니다.




신동아 1934년 3월호 221쪽  박영준의 ‘1년’




  신동아는 다양한 기사를 실었지만 매달 특집을 정해 깊이를 보완했습니다. 1934년 3월호는 스포츠 특집이었습니다. ‘보건체육의 민중화’ (김보영) ‘나의 보건법’ ‘현대조선스포츠사’(이길용) ‘조선체육단체순례’ ‘각 학교 운동부 진용’ ‘운동란(欄)기자 열전’ ‘체육문제좌담회’ ‘여자와 체육’(김영애) ‘스포츠맨 좌담회’ ‘각 학교 응원단 풍기문제’ 등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동아 1934년 3월호 권두언

억센 조선, 굳건한 민족

민족적 보건체육의 보급을 촉진하는 원동력을 얻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 조선 체육단체의 통일을 갈망하는 바이다. 전조선을 돌아보아 거의 동리마다 체육을 장려함으로 목적을 삼은 체육단체들이 임의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유감된 일로는 그들 단체가 아직도 모두 분산되어 있어서 아무런 통일, 아무런 연결도 서로 없는 일이다. 국제적 선수까지 낸 사회에서 한 개의 통일된 체육단체조차 없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신동아는 이번 스포츠 특집을 발행함에 제하여 조선체육단체 통일안을 제안하는 바이니 삼천리에 널린 각 체육단체로부터의 공명이 있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끝으로 이천삼백만 민중 앞에 삼가 올리고자 하는 말은 체육계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생활 전반에 있어서 오직 스포츠맨십 정신을 굳게 파악하고 스포츠맨십으로써 생활의 지표를 삼기를 바라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스포츠맨십을 잃지 않아야 그 장래가 촉망되는 것이다. 억세게, 굳세게, 쾌활하게, 남보다 나으려고, 이기려고, 그러나 스포츠맨답게, …이러한 건실한 생활을 목표로 다같이 돌진하기를 절망하는 바이다.




신동아 1934년 3월호 화보

사진으로 보는 조선 스포츠 발달사-이길용 씨 소장




 조선 최초의 야구 동경원정-1912년에 중앙기독교청년회팀이 동경에 원정하였는바 그 연대를 기념 삼아 유니폼 저고리에 ‘1912년’을 부쳤다.







 상투에 탕건 쓴 고대축구단-31년 전(1903년) 동소문 외 삼산평에서 촬영한 ‘대한축구단’





 


 고 이상재 노인의 시구식-대정 15년(1926년) 여름 경성운동장에서(심판은 이원용 씨)




  신언준 상해특파원은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을 만나 회견하고 친필 서신 사진을 1934년 4월호에 실었습니다.


신동아 1934년 4월호 151쪽  신언준의 중국의 대문호 노신 방문기




 노신 선생 친필




   1934년 5월호는 언론계 특집이었습니다. 이달 권두언의 앞부분도 삭제됐습니다.


  신동아 1934년 5월호 권두언 조선 언론계의 임무

 

 


때는 조선 저널리스트의 크게 용맹을 요하는 시기에 이르렀다고 보여진다. 과연 현대 저널리스트 중에는 간혹 사회의 목탁으로서의 중책을 망각하고서 민중의 지도자답지 못한 언행을 나타내는 자 있는 것은 실로 우려할만한 일이다. 조선의 언론계는 다른 데와도 달라 민중의 여론을 환기하며 지도하는 중임이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할 때 그 업에 당한 자 한 번 더 옷깃을 정제하고 심사(深思)할 필요가 있는 줄 안다. 이제 14년 전 동아일보가 조선 민중의 최초 언론기관으로 출세할 때 선명해 놓은 주지의 일부분을 여기서 되풀이하여 다시 한번 자성하는 동시에 조선 이천만 민중 앞에 새로운 약속으로 내어 놓으려하는 바이니 이는 확호불변(確乎不變)하는 동아일보의 주지요 또한 신동아의 주지다.


  “신문 잡지 제작과 관련한 고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 중의 하나가 3.1운동시 33인 중 한사람이었던 중앙보육학교장 박희도의 스캔들 사건이었다. 나이 많은 교장 선생과 여학생 간의 사이에서 피어난 스캔들은 곧 시중에 소문이 퍼졌고, 신문마다 대서특필하는 사태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특히 이 사건을 크게 다룬 석간 ‘중외일보’는 부수가 급신장하고 있었다. 이때 고하는 ‘동아일보’와 ‘신동아’의 편집방침과 관련, 이 사건에 관해 단 한 줄의 기사도 써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는 사실 여부를 떠나 33인 중의 한사람이 스캔들에 휘말렸다는 사건 자체가 3.1운동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나라에 불리한 것으로서 일제가 원하는 바인 만큼 기사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사장의 월권행위일 수도 있겠으나,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는 ‘뜻’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고형곤 당시 신동아 기자, ‘민족의 잡지, 일제하의 신동아’, 신동아 1991년 11월호, 629~630쪽)


  송진우 사장의 엄명으로 박희도 스캔들은 동아일보에 간략하게 났을 뿐 신동아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는 ‘뜻’을 분명히 지켰습니다.


‘사회에 대하야 미안합니다’ ‘차(車)여사 교장대리로 교무는 별무지장(別無支障)’ (1934년 3월 24일자 2면)

‘작금(昨今) 항간에 훤전(喧傳)되던 박희도사건 진상 여차(如此)’ ‘각사에 보낸 고백서 내용’ (1934년 3월 28일자 2면)




  1934년 7월호 특집은 조선의 산수(山水)였습니다.


신동아 1934년 7월호 권두언

이 강산 이 민족

그러나 현대의 조선인은 산천순례 또는 산천 연구의 열과 성이 끊기어 저절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무잡(蕪雜) 속에 그냥 버리매 회명(晦冥)한 채 그 발천(發闡)할 기약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이렇게도 이에 대한 용의가 없고 관심이 끊긴 것은 그 결과를 적은대로 멈추지 아니하고 자가의 정신과 현실 그 생활의 전체에 영향을 파급한 것임을 본다. 스스로 불충불의(不忠不義)하고 불친부실(不親不實)함이 이에서 더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조선 본래의 문화를 정돈 수립한 연후에라야 정명한 인식을 얻어 그 나아갈 길을 찾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 경염(庚炎)을 당하여 학창과 기타 업무를 잠깐 버리고 휴양하는 때에 친히 이 산악을 답파하고 이 강하를 섭진(涉盡)함으로써 조선 문화의 근기(根基)와 색태(色態)를 체인(體認)하기를 희원하는 본의에서 우리는 조선 산수 특집호를 간행케 된 것이다. 이것이 잡지인 만큼 그 전모를 설진(說盡)키 어려움은 무론이나 간단한 소개 중에서도 소득이 있을진댄 그로써 행을 삼고자 한다.




신동아 1934년 9월호 1쪽 권두언

조선 전 반도를 휩쓸다시피한 공전의 대홍수는 그 비절참절한 파괴로써 우리 전 민족을 크게 울리었다. 목전 재민(災民)들의 참경도 참경이려니와 원래가 가난한 우리 살림에 있어서 금방으로 우리 앞을 습래할 대수난이 또한 몸서리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낙망하거나 패퇴해서는 안된다. 한 개의 수난은 우리에게 한개의 시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를 해치려는 검은 세력의 잔인이 혹하면 할수록 동족애의 발로는 더한층 아름답고 단결의 자각은 더한층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나간 여름에 실증으로 목도한 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난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보여주는 한 산 교훈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2대 잡지부장은 최승만(崔承萬)입니다. 그는 재(在) 일본 동경 조선 YMCA 총무를 지냈습니다.


  “동경 YMCA 건축 기금 모집하는 데 많이 도와주신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에게 귀국인사를 하러 갔던 일이 있었다. 나는 취직 부탁을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를 위하여 사회사업 방면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 있으니 좀 기다려 달라고 한 일이 있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곧 만나 달라는 기별이 왔다. 먼저 말했던 일은 뒤로 밀고 우선 ‘신동아’의 일을 맡아 보아달라는 것이었다. 사령은 잡지부장으로 하겠으며 집사람은 신문 학예부 기자로 채용하겠으니 특히 가정에 관한 글을 담당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의 취직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일시에 두 사람이 청한 일도 없는데 먼저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동경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박찬희, 현진건, 설의식, 양원모, 고영환, 홍익범 씨 등이 있어서 그리 스스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봉급은 100원이라 동경에서 180원 받던 나로서는 별안간 줄어드는 것 같아서 좀 박봉이 아닌가도 생각되었으나 이것은 크게 후대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신문사 초창시대부터 일하시는 노인 김철중 씨도 서무부장으로서 100원밖에 아니 되니까 처음 입사해서 100원이라면 특별대우라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송 사장의 후의를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그 후로는 일체 보수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최승만, ‘나의 회고록’, 인하대출판부,1985년, 285쪽)


  “1934년 8월 송 사장의 벼락사령으로 신동아의 잡지부장으로 일하게 되었었다. 동경에서 ‘학지광(學之光)’ ‘현대(現代)’등을 내고 국내 잡지에도 기고했던 것이 인연이었다. 당시의 동아 기자는 모두가 지사였다. 필자가 한정되어 모자라는 원고 때문에 밤을 새웠고 필운생(弼雲生) 인왕산인(仁旺山人) 극웅(極熊) 등 펜 네임도 여럿 이용할 밖에 없었다. 오락을 맡아 번역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계몽지라 역시 딱딱하다는 평을 면치 못했던 것 같다. 양원모씨가 영업 일체를 맡고 있었는데 광고도 약 화장품 책으로 제한했던 것 같다.” (최승만, ‘신동아의 초창기’, 동아일보 1964년 8월 22일자 5면)


  극웅 최승만 선생은 신동아 1934년 10월호부터 권두언을 도맡아 썼습니다.


  “총독부 검열관의 심한 제재를 당해본 사람이 아니고는 잘 모를 것이다. 조금이라도 배일(排日)적 문구가 있다면 가차 없이 삭제다. 일본인을 일본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상할 것이 없겠건만 이것을 반드시 일본내지인(日本內地人)이라고 써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온사상을 가졌다고 통과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얼마나 그 사람들의 배일(排日)사상을 경계하고 억눌렀던 것을 짐작할 것이다. 삭제는 항다반(恒茶飯)의 일로 늘 있는 것이요 압수도 종종 당하게 되는 일이다. 정간 폐간까지 당한 동아일보의 과거를 생각하면 얼마나 총독부의 혹독한 탄압을 당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조금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요 자기네 식민지 정책에 순응하는 글이라야 좋다고 하는 판국이었으나 글자 하나 쓰고 글귀 하나 만드는 데도 적지 않은 신경을 쓰게 되어 언제나 전전긍긍의 태세로 지나게 되니 그야말로 살얼음 딛는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최승만, ‘나의 회고록’, 286~287쪽)


  신동아 1934년 11월호의 특집은 위인(偉人)입니다. 화보에 ‘간디’ ‘마사릭’ ‘무솔리니’, ‘케말파샤’ ‘히틀러’ ‘루스벨트’ ‘맥도날드’ ‘스탈린’이 실린 것으로 보아 삭제된 기사는 간디와 스탈린에 대한 것입니다.




신동아 1934년 11월호 목차




<현대 위걸(偉傑) 특집>

위대한 사람 (2쪽)

위인의 말 (3쪽)

…(삭제)…

루스벨트 대통령 (9쪽)

토마스 마사릭 박사 (14쪽)

불굴불요(不屈不撓)의 맥도날드 (20쪽)

정권획득까지의 무솔리니 (26쪽)

히틀러 (32쪽)

토이기의 대은인 우스타파 케말 파샤 (37쪽)

…(삭제)…

 


 신동아 1934년 12월호는 극동문제입니다. 12월호 2~8쪽, 20~24쪽, 25~34쪽의 기사는 삭제돼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신동아 1934년 12월호 목차




 <극동문제>

…(삭제)…(2쪽)

중국 정세의 발전 (9쪽)

미국의 극동정략과 최근 대만(對滿) 태도 (17쪽)

…(삭제)…(20쪽)

…(삭제)…(25쪽)

만주 이민문제 (35쪽)

미국의 은(銀)국 유령과 중국의 디플레이션 공황 (108쪽)

간도 분규의 사적 회고 (38쪽)




 신동아 1934년 12월호 2쪽




  최승만 선생은 일본 동경 관립 외국어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고형곤 선생의 표현대로 “마누라의 바가지가 다음날엔 아무 죄 없는 신동아에 수많은 자국을 남겨” 놓곤 하던 총독부 검열관 니시무라도 같은 학교를 나왔습니다.


  “아예 원고는 두벌을 만들어 하나는 인쇄소에, 하나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제출해야했다. 검열은 순순히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열흘이건 스무날이건 마냥 묵혀두고 애를 먹인 다음 원고 압수니 게제금지니 삭제를 자행했다. 그러다 보면 책은 연판이 깎인 부분, 먹칠한 자국이 수두룩하게 되었다. 동아일보가 폐간되던 1940년까지 20년 동안 총독부의 관리로 있던 니시무라(西村眞太郞)라는 일인이 검열관이었다. 이자는 동경관립 외국어학교 조선어과를 나와서 우리말을 잘하고 술좌석에서는 우리가락 흉내도 곧잘 냈다. 최승만과 니시무라와는 외국어학교 동창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동창이란 반가운 법인데 만나자마자 초면인 최승만에게 덮어놓고 ‘자네는 빨갱이군“하더라니 그 위인됨을 알 수 있다. 최승만은 노어과 출신이었다.” (이문환, ‘옛 신가정 새 여성동아’, 여성동아 1972년 11월호, 338쪽)


  니시무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습니다.


  “그때 편집국장은 하몽 이상협 선생- 이 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국장 자리에 도사리고 앉아서 신문 하나 옳게 만들기에 정력을 기울인 분이다. 까딱 잘못 걸리면 압수 정간을 맞는 판이라서 편집국장의 임무는 중대하였다. 그때 신문 검열은 총독부 경무국에서 했다. ‘니시무라(西村)’라는 자가 검열관인데 한국말 잘한다구 뽐내던 자이다. 어느 날인가 ‘휴지통’에 모조리 깡그리 라는 말이 실렸다. 물론 하몽 선생이 쓴 글이다. 이날 전화가 왔다. ‘니시무라’이다. 하몽 선생을 찾는 것이다. 또 무슨 트집을 잡나 했더니 ‘니시무라’가 허허 웃으며 하는 말이 “내 십여년 조선말을 다루어 왔으나 모조리 깡그리 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들었소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좀 압시다.”  항상 거드림 피던 ‘니시무라’도 하는 수 없이 하몽 선생에게 고개를 숙이고 만 것이다. ‘니시무라’를 아니꼽게 보신 하몽 선생인지라 그는 언제나 ‘휴지통’을 집필할 때마다 궁벽하고 까다로운 말을 골라서 턱없이 잘난척하는 ‘니시무라’의 기를 꺽던 일이 생각한다.” (이서구 창간기자, ‘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3년 8월호, 12쪽)


  최승만 선생은 “동아일보가 민중의 신뢰를 받아, 동아일보 기자는 명함 한 장만 있으면 어디든 왔다갔다 할 수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 한번씩 신문과 잡지 편집자들이 모여서(주필과 조사부장 포함) 편집에 관한 일을 토의하게 되는데 다른 신문사보다 특수한 기사가 무엇이었으며 또 어디가 더 신속히 보도되었느냐가 주로 얘기되곤 하였다. ‘신동아’ 편집은 매삭 한번씩 편집국장, 각 부장 중에서도 경제부장 고재욱, 사회부장 현진건, 조사부장 이여성 씨가 참석하여 잡지에 대한 의견을 듣게 되었다. 설의식 편집국장과 이여성 조사부장의 발언이 늘 많은 참고가 되었었다. 그 때의 동아일보사는 조선총독부에서 특히 배일(排日)단체로 보았으며 애국동지들이 모인 곳이라고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민중들이 신뢰를 받았고 권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공정하게 기사를 취급해야 된다는 것이 사시(社是)가 되기 때문에 누구의 청탁을 받거나 돈을 받고서 글을 쓴다는 일은 전혀 없었고 들어본 일조차 없었던 것이다. 자동차도 그리 없었던 때이지마는 급한 일이 생겨서 타게 될 때에는 동아일보 기자라는 명함 한 장으로 어디나 돈이 없어도 왔다갔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승만, ‘나의 회고록’, 285~286쪽)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나던 몸이라 19년 만에 금년, 처음으로 조선서 가족들과 같이 안정된 가운데서 묵은 해를 보내게 되는 모양이다.…(중략)…요즘에는 신동아 신년호를 마치어 놓고 이월호 편집에 열중한지라 세모는 벌써 수 삭전에 지난 것 같은 감도 없지 않게 된다. 다못 며칠 전 밤에 아이들 데리고 화신을 가보고서 다소의 세모 기분을 맛보았으며 아래층 신문사 편집실에서 신년호를 편집하느라고 눈이 벌게서들 야단치는 것을 보고 얼마만큼 세모의 기분을 맛보게 되었다.” (최승만, ‘세모잡감(歲暮雜感)’, 동아일보 1934년 12월 30일자 4면)


  채만식의 대표작 ‘레디 메이드인생’은 신동아 1934년 5월호~7월호에 연재됐고 유진오(현민)의 대표작  ‘T 교수와 김 강사’는 신동아 1935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


  “우리는 현민의 ‘T 교수와 김 강사’(신동아 신년호)가 실재한 인물이냐 아니냐를 물을 필요가 없다. 그 소설이 보이는 사실의 진행, 인텔리 생활의 단면을 보면 그만이다. 그 생활의 묘사와 그 묘사를 통하여 보여진 작가의 인텔리 비판이 그러면 타당하냐 아니하냐가 문제이다. 현민은 이 점에 있어서 인텔리의 약점, 동요, 고식, 퇴영 등의 제 속성을 예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양산(凉山), ‘정찰기-현민의 최근작’, 동아일보 1935년 1월 8일자 석간 3면)


   1931년 4월 소년소설 ‘추억’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던 평양 숭실중학생 황순원은 신동아에 주로 시를 기고했습니다. 동경 유학생 시절에도 그의 기고는 계속됐습니다.


신동아 1936년 7월호


279쪽 시 절룸바리-모윤숙 


280쪽 시 가난한 꽃-유치환 


282쪽 시 7월의 추억-황순원







  다른 민간 신문사의 잡지 발행을 자극해 ‘신문잡지시대’를 열었던 신동아는 다양한 주제의 기사를 내면서 4년 2개월간 통권 59호를 발행했습니다.


  “1935년 12월에서 1936년 9월까지의 신동아의 기사 622편을 대상으로, 기사의 주제와 기능 분석을 동시에 시도하였다. 주제분석은 잡지라는 특성을 고려하여 정치 경제 법률 사회 역사 인물 국제 종교 가정 과학 관습 풍속 교육 문예 역사 인물 지리 종합 기타로 나누었다.…(중략)…시 소설 수필 등의 문학 작품이나 문학 작법을 다룬 문예가 32.3%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특정 주제 분야에 속하지 않는 잡학적인 기사가 16.4%, 국제 관련 기사가 10.8%의 비율을 차지하였다. 국내의 시사 뉴스를 다루는 정치 경제 사회 법률 주제의 기사를 합하면 11%를 차지하였으며 과학 관습 풍속 역사 인물 지리주제 등의 기사도 다루어졌다.” (김봉희 이화여대 명예교수,‘일제시대의 출판문화’, ‘일제시기 근대적 일상과 식민지문화’, 이화여대출판부, 2008년, 228~229쪽)


  “이러한 망라주의 편집은 동아일보의 조직과 편집진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것으로서, 그 이전의 잡지가 개인의 성격이나 취미에 따라 내용의 좌우되고 주관성이 강조된 데 비해 신동아 출현으로 잡지가 민족의 공기라는 성격을 나타내게 되고, 민족의 대변지적인 구실을 담당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민족의 공기 신동아 반세기’, 신동아 1984년 9월호,477쪽)


  신동아는 1936년 8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정간 당해 더 이상 발행할 수 없게 됩니다. 신동아의 일장기 말소로 잡지부장 최승만과 사진반 송덕수가 구속돼 고초를 치렀습니다. 신동아의 경우 손 선수의 일장기가 아니라 남승룡 선수의 일장기를 지웠습니다.




 신동아 1936년 9월호 화보 4쪽




 세계 올림픽 대회장 정문과 우승한 손기정 남승룡 양군 


 “나는 그때 신동아 9월호 편집을 마치고 인쇄소에 넘긴 후 약간의 틈을 타서 서울중고등학교(그때는 일본인 경성중학) 근처에 있던 한경순 의학박사가 운영하는 지성의원에 입원하여 기생충, 특히 십이지장충을 없애고자 하였다…(중략)…이런 때에 신동아 심부름하는 아이가 와서 화보의 최후 교정을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9월호 교정을 완전히 마치고 4 페이지의 화보만 신동아 기자 최형종 이무영 두 분에게 부탁하고 입원하였던 것이다. 나는 머리가 훵하고 현기증도 나서 드러누워 있는 때라 최, 이 두 분이 잘 했으려니하고 ‘OK’라고 써서 보냈다” (최승만, ‘나의 회고록’, 303쪽)


  “이날 밤 늦게 잡지부장 최승만 씨(본사 간행잡지 신동아 책임자)가 붙들려왔는데 씨는 나의 감방으로 들어오더니 저성으로 사진과원 송덕수 씨도 잡히어 옆 감방 장용서 씨 있는 데로 들어갔다고 말하여 준다…(중략)…이 분들이 붙들려온 이유는 첫째로 최, 송 양씨는 ‘신동아’에 낸 손 선수의 사진에 일장기 ‘마아크’가 좀 선명치 않다는 것이고…” (이상범, ‘일장기말소사건 이십년전의 회고기’, 동아일보 1956년 8월 19일자 4면)


  “신동아 처분된 까닭은 마찬가지로 권두화보로 낸 남(南)사진의 일장기를 동양(同樣) 말소하야 비국민적(非國民的) 태도를 취한 데 있었다.” (‘중첩한 반도언론계의 불상사(不祥事), 동아일보정간 중앙일보휴간’, 삼천리 1936년 11월호, 28~29쪽)


  “당시 동지(同誌)의 편집 책임자 최승만 형과 동지 사진반 송덕수 씨까지 잡혀 들어오니 단 여섯 방 밖에 없는 경찰부 유치장은 대거 10명의 사우(社友)로서 난데없는 매의 합숙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길용,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울분의 충격, 소위 일장기말살사건’, ‘신문기자수첩’, 모던출판사,1948년, 매(梅) 5쪽)


  신동아의 남승룡 사진 역시 동아일보 1936년 8월 11일자 석간 1면 ‘세계 제패의 개가’에서 일장기를 보이지 않게 처리하고 실었던 사진입니다.


  “사내(社內)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실지 않을 속심이었던 것이다.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방이건 서울이건 경향 간에 신문지(新聞紙)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니,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니, 얼른 말하자면 지방면으로는 면소(面所)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짓고 실리기는 부지기수다.” (이길용,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울분의 충격, 소위 일장기말살사건’, 7쪽)




  동아일보 1936년 8월 11일자 석간 1면




 고형곤                                     최승만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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