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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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가 조선어에서 일본어로 바뀐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창간 초부터 한글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창간 열흘만인 1920년 4월 11일자 1면 사설은 일본어를 조선의 공식 교육 용어로 강제하려는 일제의 음모를 규탄했습니다. 




1920년 4월 11일자 1면 사설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을 폐지하라(상)


우리 조선인은 병합 이래 10여 성상을 일대 악몽 속에서 살아왔다. 일제군인의 횡포와 압박은 생각만 해도 온몸을 전율치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한다고 하여 조선인에게 주는 폐해와 고통에 대하여는 조선인으로서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조선인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조선인의 독특한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8회째 회갑이 음력 9월 28일인데 조선문화 창조의 잊지못할 기념일이라 하여 몇몇 유지들이 국일관에 모여 조선어를 천대하는 그릇된 사상을 타파할 필요와 일반의 문맹퇴치의 의미로 농촌에까지 조선어강습을 보급할 것과 학교의 조선어교수 시간을 증가할 운동을 개시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조선어장려협의’, 1926년 10월 31일자 5면)


  “조선인구의 팔할은 농민이라 한다. 그런데 이 농민의 태반 아니 거의 전수가 문맹이라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글 모르는 것처럼 현대생활에 불구적인 것이 다시 없을 터이다. 뜻있는 이는 마땅히 농촌으로 돌아가 이 잠잠한 가운데 가장 진실하고 착건한 일을 많이 하여야 할 것이다. 과연이다. 이는 나의 사론 창견이 아니라 세상의 선각은 다 이를 보았더라. 그리하여 농촌으로 돌아가라는 부르짖음이 여기저기에 높아짐을 본다.” (최현배 문학사, ‘조선민족갱생의 도 53회’, 1926년 10월 31일자 3면)


 동아일보는 특히 한글을 보급하고 문맹을 타파하려는 한글강습회에 큰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동아일보 동래지국이 직접 열려던 강습회가 불허되자 1면 사설로 항의했습니다.


 “불허이유는 ‘강습소의 교재는 총독부가 지정한 교과서 이외는 교수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강습소의 어학교재가 총독부가 지정한 범위를 벗어나서는 아니된다는 행정상 이유가 어디 있는가. 조선어를 박멸하려는 방침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조선인을 전멸시키는 일 이상으로 곤란한 일이 분명하다.”  (‘조선어강습을 불허-일군수의 행동인가, 도의 방침인가’, 1927년 8월 5일자 1면 사설)




 1927년 10월 27일자 1면 사설




한글운동의 의의와 사명(1)


 정음 반포 481주년 기념식에서 토의된 한글운동에 대한 내용들은  ‘정치적 의의’ ‘민중교양, 문맹타파의 기구’ ‘조선문화의 일부분’으로 관찰된다. 이같이 한글운동은 과거의 학구적 토론에서 뛰어나와 민중화하고 실제화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한 동아일보는 창간 8주년인 1928년 4월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문맹타파운동에 나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50원의 현상금을 걸고 ‘문맹퇴치가’를 모집했습니다.




1928년 3월 16일자 2면 사고(社告)




본사창립 8주년 기념 문맹타파의 봉화

4월 1일을 기회삼아 전조선각지에 거행


 고상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은 그만 두더라도 쉬운 글자나마 알아보아야 되겠습니다. 조선문으로 편지 한 장 쓰지 못하고 심지어 상회의 간판과 정거장 이름 하나 몰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기막힌 노릇입니까. 이와 같이 가여운 동포가 우리 조선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어찌하면 우리는 하루 빨리 이 무식의 지옥에서 벗어날까. 어찌하면 이 글장님의 눈을 한시바삐 띄어볼까. 이에 본사에서는 창립 팔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사월 일일을 기회삼아 글장님 없애는 운동을 일으키고저 합니다. 경성 본사를 비롯하여 전 조선 삼백여곳 지분국을 총동원하여 방방곡곡에 문맹타파의 횃불을 높이 들까 합니다.


 같은 날 본문의 3분의 1 가량이 삭제된 사설입니다. 




1928년 3월 17일자 1면 사설




문맹퇴치의 운동


 모음 10자, 자음 14자를 합쳐 24자의 간명한 과학적인 문자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9할이 문맹으로 있음은 일대 민족적 치욕이므로 거족적으로 문맹퇴치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1928년 3월 25일자부터 28일자까지 연일 사회면 머리기사로 글장님 없애기 운동의 행사계획을 소개했습니다.




1928년 3월 25일자 2면




(포스터) 문맹퇴치-ㄱ ㄴ부터 배우자


 “‘ㄱ ㄴ부터 배우자’고 외치고 나서는 횃불 든 사람 뒤에 수많은 ‘글장님’들이 감기었던 눈을 뜨고 기쁘게 따르는 형상을 그린 것인데, 훨훨 타오르는 횃불은 글장님의 눈을 뜬 뒤의 광명을 표현한 것이며 군중 있는 쪽이 어두컴컴한 것은 무식지옥의 암흑을 표시한 것.” (‘삼천리근역에 고양할 포스터’, 1928년 3월 25일자 2면)




1928년 3월 26일자 2면




문맹퇴치 선전일 순서

지상엔 소년행렬 공중엔 비기고상




1928년 3월 27일자 2면




우리글 원본


  “한편으로 본사에서는 세계에 독특한 ‘우리글’의 원본을 만들어 사월일일부 본보에 끼어서 만천하 애독자 제씨에게 배부하기로 되었으니 구할 이상에 달한다는 조선의 글장님들은 이 한 장의 원본만 배우면 지금까지 감기었든 눈을 뜨고 광명한 세상에 남과 같은 살림을 하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의 음파 따라 올라올 선전성(聲)’, 1928년 3월 27일자 2면)


  “시내 북촌일대의 조선인 인력거조합에서는 일천대에 가까운 인력거에 이틀동안 전부 ‘문맹퇴치’의 기를 꽂기로 하였으며 영락정에 있는 서울윤(輪)업회에서는 회원 약 백명이 자전거에 ‘문맹퇴치’기를 달고 선전행렬에 같이 열을 짓기로 되었으며…(하략)” (‘자전차 장사진 전차에도 선전판’, 1928년 3월 28일자 2면) 




 그러나 일제 총독부 경무국은 운동 시작 직전인 1928년 3월 29일 돌연 금지명령을 내렸습니다. ‘문맹퇴치’라는 표어가 러시아로부터 나왔으며 포스터에 그려넣은 붉은 근육의 노동자가 공산주의적 색채를 풍긴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또한 옥외의 소년 집회나 가두행렬은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어 이 운동을 일체 금지한다는 통지를 발송하고 ‘우리글 원본’도 압수했습니다.




1928년 3월 29일자 1면 사설




 동아일보는 1928년 3월 29일 1면 사설을 삭제당한 채 이 사업에 협조한 각계유지와 애독자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했습니다. 이날 2면 기사를 통해 당국의 처사를 맹렬히 규탄했으나 이마저 압수당합니다. ‘만반 준비가 완성된 금일 문맹퇴치 선전 돌연금지’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펴낸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 1’ (LG상남언론재단, 1998년, 506~509쪽)에 그대로 실려있습니다.




1928년 3월 29일자 1면 사고




 1928년 3월 29일자 2면




만반 준비가 완성된 금일 문맹퇴치 선전 돌연금지 


  ‘글장님 없애기 운동’의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본보 창간 8주년 기념사업으로 전조선적 문맹타파운동을 하고자 사회각방면의 성원을 얻어 제반 준비를 하던 중 본사는 물로 각지분국의 운동까지 당국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중지하게 되었는데 전남 장성본지국에서는 악대자동차행진, 선전기 게양, 비라살포 등 옥외운동은 전부 금지당하고 1일 옥내의 강연회 및 음악회만은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즉시로 문자보급을 목적하는 장성교육보급회를 조직하기로 하여 발기회원이 60여인이나 되었다더라.” (‘기념강연회 즉석에서 교육보급회 조직’, 1928년 4월 7일자 4면)


   이 같은 동아일보의 의지는 3년 뒤 ‘브나로드 운동’으로 계승돼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브나로드 운동은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층이 농민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을 상대로 벌인 계몽운동으로 러시아어로 ‘농민 속으로’ 라는 뜻입니다. 브나로드 운동은 한글강습 외에도 위생강연, 학술강연 등 광범위한 계몽운동이었으나 주축은 문맹타파였습니다.


  “그 익년 29년 조선일보에서 ‘아는 것이 힘 배워야 한다’는 ‘문맹타파운동’의 ‘슬로간’을 내어걸고 하기휴가를 이용, 학생을 동원하여 민중계몽운동의 선수를 썼다. 결국 자의 아닌 타의로 기선을 빼앗겼지마는 이에 자극되고, 주위의 정세가 완화되자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은 조선일보의 부진을 상대적으로 이용한 결과, 물리적인 효과를 거두는 계기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다음에 ‘브나로드 운동’ 의 조직과 그 활동 상황을 적어보기로 하겠다. 동아일보사 주최 ‘브나로드 운동’은 ‘학생계몽대’와 ‘학생강연대’, 그리고 ‘학생기자대’의 세 분야로 나누어 조직했다. 학생계몽대 요원은 남녀 중학교 4, 5년 급에서 확보하고 1주일 이상의 ‘조선문 강습’과 ‘숫자 강습’을 담당케 하였다. 학생강연대 요원은 남녀 전문학교학생에 한하여 ‘위생 강연’과 학술 강연을 담당케 하였다. 그리고 학생기자대 요원은 남녀 중학교 4, 5년급과 남녀 전문학교학생에 한하여 ‘기행일기’와 ‘척서(滌署)풍경’과 ‘고향통신’ 및 ‘생활체험’의 기사를 투고케 하였다. 이밖에 계몽별동대를 두어, 요원은 그 지방의 사회유지에서 확보하고 학생계몽대의 요원과 같은 분야를 담당케 하였다.” (전영경, ‘브나로드 운동에 대하여’, 동우 1964년 8월호, 뒷표지 안쪽) 


  제1회 ‘학생 하기 브나로드 운동’은 1931년 7월 16일 1면에 첫 사고(社告)를 통해 그 계획이 알려졌고 ‘봉공적(奉公的) 정신을 함양하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이 운동의 당위성이 천명됐습니다.




 1931년 7월 16일자 1면




 “독자의 고향에는 조선문자를 모르고 산술 숫자도 모르는 이가 얼마쯤 있는가. 그리고 제군의 고향사람들은 얼마나 비위생적 비보건적 상태에 있는가. 아마도 한 고을에 7할의 인민은 문맹의 상태에 있고, 9할 이상은 비위생적 비보건적 상태에 있을 것이다. 제군은 고지서를 볼 줄 몰라 면이원(面吏員)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농민을 보았을 것이고, 제군은 농사짓다 몸이 상하여 의료기관을 찾아갈 경제적 여유가 없고 부득이 항간에 전하는 소위 초약(草藥)으로써 요치(療治)를 하다가 필경엔 불구자가 되고 가산을 탕패(蕩敗)하는 예를 보아왔을 것이다. 만인의 복리를 위하여 자기 일개의 이해와 고락을 희생하자.” (‘봉공적 정신을 함양하라’, 1931년 7월 16일자 1면 사설)


 “학생계몽대의 교재는 이윤재 편 ‘한글공부’와 백남규 편 ‘일용계수법’이었다.” (정진석, ‘문자보급운동교재’, LG상남언론재단, 1999년, 25쪽)




                                             한글공부




     일용계수법


 “교재는 첫 해에 30만부 둘째 셋째 넷째 해엔 각각 60만부, 총 210만부를 발행 배부하였다. 기사와 현지 ‘르포’도 역시 수시로 투고토록 하여, 이 기간에 발표하므로 사기앙양의 최선을 다하였다. 경비는 각 지방의 종교단체, 수양단체, 문화단체, 기타 사회유지의 재정적인 뒷받침과 정신적인 도움에 의하여 성공하였고, 또한 계몽요원의 자담으로 좋은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동원된 자 중에서 실적이 우수한 학생에게는 학자 보조금의 시상이 있었던 것이다.” (전영경, ‘브나로드운동에 대하여’, 동우 1964년 8월호, 뒷표지 안쪽)


 “이때까지 보고 들어온 바를 종합해보면 강습회를 연 곳이 합 142처 금지된 곳이 11처인데 1백42처에서 활동한 대원총수가 423인으로 수용한 총강습생이 9492인이란 다수에 달하였다. 금지를 당한 곳은 보고가 간단하여 그 진상을 포착하기 힘드나 하여튼 이 운동에 대하여 과도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소수지방 경찰관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인 듯싶다.” ( ‘금년 제1회 브나로드 운동 총결산’, 1931년 10월 21일자 3면)




 이광수 편집국장은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장편소설 ‘흙’을 연재했습니다. ‘흙’은 1932년 4월 12일자부터 다음해 7월 10일자까지 269회에 걸쳐 실렸습니다.




 1932년 5월 1일자 7면 연재소설 ‘흙’




“옳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하고 허숭은 생각하엿다.


“농민 속으로 가자.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몸만 가지고 가자. 가서 가장 가난한 농민이 먹는 것을 먹고, 가장 가장 가난한 농민이 입는 것을 입고, 그리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사는 집에서 살면서 가장 가난한 농민의 심부름을 하여주자. 편지도 대신 써주고, 주재소, 면소에도 대신 다녀주고, 그리면서 글도 가르치고 소비조합도 만들어주고 뒷간, 부엌 소제도 하여주고 이렇게 내 일생을 바치자.”


 1932년의 제 2회 브나로드 운동은 네 차례의 운동 중 가장 큰 성과를 올린 대회였습니다.


“작년의 제1년의 경험에 비추어 금년에는 한층 더 규모를 확장하여 문자나 숫자보급은 물론이오 그밖에 민중에게 필요한 문화보급의 제반운동을 하고저하여 대체의 근본 방침을 세웠습니다. 이리하여 편의상 우선 시내의 중등이상 각 남녀학교 교장을 또는 교장 대리 선생을  작 14일 오후에 본사로 초청하여 별항과 같은 토의를 행한 바 있었습니다.”  (‘전조선 학생이 봉화 들 본사 브나로드 운동’, 1932년 5월 16일자 7면)


 일제의 간섭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5월 17일자 1면 사설 ‘학교와 학생에 고함’은  후반부를 삭제당했습니다.




1932년 5월 17일자 1면 사설




1932년 6월 23일자 2면 사고




1932년 6월 24일자 1면 사설




브나로드-총동원에 참가하자


민족적 모든 생활의 원동력이 지식에 있다. 글 모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글 모르는 민족의 문제이며 문맹퇴치는 민족적 모든 사업의 기초이다.


 일제시기 광복군으로, 해방 후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활약한 장준하도 1932년부터 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장준하는 14살 되던 해인 1932년 봄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해 여름방학을 한 달쯤 앞둔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동아일보’의 제호와 마크가 새겨진 한 장의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브나로드 운동에 참가하라는 내용이었다. 참가 신청서가 따로 있어 거기에 학년 성명을 기재하고 계몽 희망지구를 기입하여 학생회에 내면 학생회에서 모아 신문사에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신문사에서 그 희망 지구에 교재를 보내주었다. 장준하는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마침내 방학이 다가와 평양 공회당에서 열린 3일 간의 강습을 마치고 계몽 희망 지구인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준하는 압록강 수풍댐 근방에 있는 평북 삭주군 외남면 청계동에서 기독교 목사 장석인(張錫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남겼다.” (정진석, ‘언론과 한국현대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년, 182쪽)


 “평양에서 자전거 한 대를 기차에 싣고 정주 역에서 내린 건 새벽 4시, 거기서부터 이틀간을 자전거로 달리고 그나마 타지 못하는 10여리의 산길을 끌고 하여 겨우 고향에 이르니까 고향에는 아주 반가운 것과 반갑지 않은 것이 동시에 나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신문사에서 보내온 교재 꾸러미였고 하나는 경찰서에서 온 순사였다. 채 여장도 풀어놓기 전에 그 순사는 수첩을 꺼내어 들고, ‘다니는 학교는?’ ‘학년은?’ ‘성명은?’들로부터 시작하여 앞으로의 방학 동안 할 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소위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일제에 대해서 반감의 싹이 트게 된 것은 실로 이 때부터였으며 이때 나는 갑자기 어른이라도 된 것 같이 그들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이 굳어져 버렸다.” (장준하, ‘일시민이 읽은 30년간의 신문’, ‘민족과 자유와 언론’, 고재욱선생 화갑기념논총편찬위원회 편, 일조각, 1963년, 351쪽)


“금년의 성적을 보면 대원수 2724명, 강습지 592처, 강습생 4만1천여인이어서 실로 각각 4배 내지 5배의 증가를 시(示)하였다…(중략)…어떤 곳에서는 차일피일하여 인가기일을 천연(遷延)하고 어떤 곳에서는 금지 우(又)는 중지를 명하여 그 소기를 달치 못하게 하였으니 명년부터는 다시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제2회 브나로드 운동의 성과’, 1932년 10월 6일자 1면 사설)


 제3회가 되는 1933년부터는 ‘브나로드 운동’의 명칭을 ‘계몽운동’으로 바꾸고 문맹타파에 집중했습니다. 도쿄, 간도 등지에서도 참가신청이 이어졌고 특히 간도의 명신여학교에서는 40명이나 참가했습니다.




1933년 5월 9일자 석간 1면 사설




남녀학생에게 간고(懇告)




1933년 6월 25일자 2면 사고




 제4회는 1934년 6월 30일 1098명의 대원이 본사에서 간단한 식을 갖고 전국 271곳으로 나뉘어 출발했습니다.




1934년 6월 2일자 1면




1934년 7월 1일자 2면




본사주최 하기학생 계몽대 동원식




1934년 7월 6일자 1면




“출전: 1934년 7월 6일

계몽운동과 사상(思想)인도(引導)-다시 일언(一言)을 가하여 경기도의 반성을 촉(促)함-


1. 모든 지엽문제를 떠나서 고찰할 때 교육의 근본목적은 인격자의 양성에 있고 인격자의 최대 특징, 최대목표는 사회봉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생도들이 배우고 쓰고 연습하고 하는 온갖 행동은 결코 그 프로세스 자체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사회봉사를 위한 한 준비행동인 데 그 진(眞)가치가 있는 것이다…(중략)…혹은 변해(辨解)하기를 계몽대원 중에 간혹 불온분자가 침입할 염려가 있으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처치(處置)라 하나 이러한 이론은 ‘구데기 날까 무서워 장 못담겠다’는 이론과 꼭 같은 웃음거리에 불과한다. 세계에서도 몇째 안가는 완전한 경찰망을 가진 조선에서 지방지방을 따라 불온분자가 발견되는 즉시로 그 지방에 한하여 금지 혹은 해산을 명할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중략)…조선총독부가 가진 바 최후의 정치철학은 자력갱생에 있다. 자력갱생이란 말은 인민이 인민의 자력으로써 갱생할 길을 찾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계몽운동은 이 자력갱생운동의 가장 위대한 것의 하나이다. 이러한 활동을 한 지방청인 경기도에서 불허가한다는 것은 이는 총독부 근본방침과 모순되는 행동이다. 자력갱생은 어디까지나 자력갱생이요 결코 관력갱생(官力更生)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합법적인 계몽운동까지도 관력(官力)과 합작하는 것이 아니면 배격한다는 관력만능주의인 경기도의 방침은 그 모순당착의 극에 달한 것이다…(중략)…민의를 존중하는 참된 정치는 민간 측의 합법적 활동을 고취하고 지지함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번더 경기도 당국의 반성을 촉하는 바이다.” (‘일정하 동아일보 압수사설집’, 동아일보사, 1978년, 280쪽)


 1932년부터 1934년까지 3년 동안 여름방학만 되면 이 운동에 참여했던 장준하는 개학이 되어 다시 학교에 오자 신문사 평양지사에서 계몽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위로를 해주며 보고를 받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때부터 나는 신문을 높이 보게 되었으며 인연깊은 나의 지도자적인 대상으로, 아니 당시 우리 온 겨레를 지도하고 있는 존재로 아주 믿어 버리게 되었다. 실로 이 무렵 나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는 비극의 날이었으며 칠흑장막과 같은 절망의 나라였었다. 이 때의 모든 청년들은 거개가 이와 같은 비극과 절망 속에서 자포자기해 버리거나 아니면 겨우 일제에 붙어 호구책으로 입신출세의 길을 노리거나 하는 것뿐 다른 아무런 희망과 장래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동아’와 ‘조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신문만이 캄캄한 우리 조국을 비쳐주던 유일한 등불이었으며 희망이었다. 최소한 그때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장준하, ‘일시민이 읽은 30년간의 신문’, ‘민족과 자유와 언론’, 고재욱선생 화갑기념논총편찬위원회 편, 일조각, 1963년, 365쪽)


 1935년 이후 이 운동이 중단된 것은 일제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1935년 6월 8일자 석간 1면 사고




학생하기계몽운동 부득이한 사정으로 중지


이래로 매년 회를 거듭하기 전후 사차, 동원된 대원이 근 육천이오 계몽된 인원이 근 십만에 달하여 이 사업의 전도는 촉망되는 바 절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금년은 가일층 노력하려고 진용을 정제하였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우리의 고충은 과거의 업적에 담은 채, 유감이나마 이 사업을 중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창해일속의 효과라도 얻으면 행이라고 시작한 것이 우리의 계몽운동. 이리하여 전후 사차에, 직접으론 십만의 문맹을 구하였고 간접으론 야학과 강습의 족출을 유치, 써, 일속의 파종도 심상치 않았음에 다소의 긍지와 유쾌도 없지가 않거니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 일은 중지코 보니, 그러고 보니 한쪼각 적막감도 부득불불무. 오(悟) 기왕지불간(旣往之不諫), 지래자지가추(知來者之可追), 과거사를 운운키보다는 앞으로 앞으로. 목표는 단순하니 가르되 ‘문맹일소(文盲一掃)’.” (1935년 6월 9일자 석간 1면 횡설수설)


 동아일보 문자보급운동의 성과

(정진석, ‘문자보급운동교재’, LG상남언론재단, 1999년, 32쪽)


 이 문맹타파운동은 한글보급을 통한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은 민중 사이에 깊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수강생 연총수 98,598명의 문맹자가 광명을 찾았으며 더구나 이 운동에 참가한 계몽대원 연총인원 5,751명의 젊은이들을 은연중 민족운동의 대열속에 조직화하는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최승만, ‘3대 민족지의 언론투쟁’, 신동아 1969년 10월호, 323쪽)


 “민족독자의 힘에 의한 사회교화운동의 추진자를 스스로 자임하는 동아일보는 사의 중요한 사업으로서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전위적 역할을 다한 것은 1932년부터 매년 하기휴가의 학생을 동원하여 행한 ‘학생하기계몽운동’이다. ‘1천3백만의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주자’라는 슬로간이 내걸려 1932년부터 1935년까지의 4년간에 약 6천 명의 남녀 대학생으로 계몽대원이 약 10만 이상의 문맹을 퇴치하였다고 한다.” (김규환, ‘일제의 대한 언론 선전정책’, 이우출판사, 1978년, 298쪽)


 “오직 일제 총독부만이 당황하여 일제 권력으로 1935년부터의 문자보급운동과 브나로드운동(농촌계몽운동)의 신문사들 주관을 금지하여 탄압하였다. 그러나 1935년 이 때에는 이미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민중 사이에 깊이 정착되어버려 이제는 한국 민중은 새 맞춤법(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어학회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및 애국적 학생들의 브나로드운동(농촌계몽운동), 문자보급운동의 대승리였다.” (신용하, ‘1930년대 문자보급운동과 브나로드 운동’, 한국학보 120호, 일지사, 2005년, 127쪽) 





  문자보급운동 교재 ‘신철자편람’은 ‘한글공부’ ‘일용계수법’과 함께 2011년 12월 문화재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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