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가 민간에서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을 세우자고 나선 것은 1922년 2월 3일자 1면 사설을 통해 민립(民立)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주창할 때부터입니다. 진정한 정치적 경제적 독립과 자유는 학문이 뒷받침돼야 이뤄질 수 있고, 특히 민립으로 해야 민주주의가 싹틀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어 조선청년회연합회가 제3회 총회에서 민립대학 설립을 주장했습니다.
1922년 2월 3일자 1면 사설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
부호의 일고를 촉함
학(學)의 독립은 민족의 영예와 실지 생활에 극중극대(極重極大)한 관계를 유(有)하나니 정치적 예속은 혹(或) 시대의 변천과 대세의 추이에 의하야 면할 수 있으며, 경제적 복종이 역(亦) 동일한 관계를 유하되, 정신적 예속 그 학(學)의 굴복에 지(至)하야는 단(單)히 일시적 굴복에 지(止)하지 아니하며 일시적 복종에 휴(休)하지 아니하고 영구히 기반(羈絆, 굴레)을 탈(脫)하기 난(難)하며, 단(單)히 형식적 표면적 속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핵심골체(核心骨體)에까지 구속을 당하나니…(중략)…이제 민중생활의 실제를 고찰하건대 비록 정치적 자유가 유하고 경제적 독립이 존(存)한다 할지라도 그 학에 존하여 독립을 득(得)치 못할 것 갓흐면 그 실을 일정일동(一靜一動)과 일진일퇴(一進一退)에 자유가 무(無)하고 권위가 무할 것이라…(중략)…연즉(然則) 대학교육에 대하여 특히 민립대학을 제창하는 소이(所以)는 무엇인가. 대계 관립대학과 민립대학에 존하여는 그 정신에 자연히 차이가 생하나니 관립에 존하야 관료주의가 발호하고, 민립에 존하야 민주주의가 발생하는 것은 일본의 실례가 역력히 증명하는 바며, 진리의 연구는 자유를 절대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라…(하략)
“개회중이던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총회는 6일로써 종료하였는데 해(該) 총회에서 결의한 바 집행위원회 제출의 건의안 급(及) 11년도 예산안의 요령은 하(下)와 여(如)하더라…(중략)…다, 민립대학을 속히 실현할 것” (‘청년연합총회 건의안과 예산’, 동아일보 1922년 4월 8일자 3면)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이 때가 처음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서장(序章)은 멀리는 1909년 국채보상운동에서 시작하여 가깝게는 1919년 3.1운동직후에서 시작된다. 국채보상운동은 1906년 이후 정부가 일본정부로부터 차관한 1300만원의 상환이 궁지에 빠지자, 1909년 대구와 동래에서 먼저 시작하여 전국에 파급, 이에 자극되어 서울서도 김성희(金成喜) 유문상(劉文相) 등의 발기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었다. 모금방법으로 금주단연운동에까지 번져 경향각지에서 현금과 귀금속이 답지하여 거금 600만원의 거액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10년의 한일합방으로 나라의 비운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전영경,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전말’, ‘동우’ 1964년 11월호 앞표지 뒷쪽)
“그리하여 국채보상금으로 모금된 상당액의 처리를 위해 윤치호, 유원표, 남궁억, 박은식, 노백린, 양기탁 등 지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논한 결과, 이 돈을 각자에게 다시 돌려줄 것이 아니라 민립대학의 건립기금으로 돌리기로 하고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여 ‘데라우찌(寺內)’ 총독에게 설립인가를 신청했으나 허가가 나지 않았던 일도 있다. 그 뒤, 3.1 운동직후인 1920년에 일제가 ‘사이또(齊藤)’총독을 시켜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쓰고 나오자 다시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협조를 요청했으나 ‘사이또’는 한일 양 민족이 합동하여 민립대학을 설립하자는 주장을 내세워 그만 허가신청을 철회하고 말았다…(중략)…당시 주동적으로 활동한 분은 유진태 씨였는데 그는 구한말에 군수를 지낸 바 있는 분으로 이때는 이미 노인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의기가 헌앙한 애국지사로서 원로의 대접을 받던 분이다.” (이인 전 법무부 장관, ‘식민교육에 맞선 민립대학운동’ , 신동아 1969년 10월호, 298쪽)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조선교육회를 모체로 하여 추진되었습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추진된 과정을 보면 1922년 2월 동아일보가 민립대학설립을 주창하고 1922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총회에서 민립대학설립을 주장하여 이것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교육회는 1920년 6월에 한규설, 이상재, 유진태 등 애국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조선교육회는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고학생학교를 운영하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애국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조선교육회 회원들에 의하여 민립대학 창설이 발기되고 1922년 11월에 이상재를 대표로 하여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결성되게 되었다.” (노영택 대구효성가톨릭대 사학과 교수, ‘한국사 51권’, 국사편찬위원회, 2001년, 36쪽)
1922년 11월 30일자 3면
민립대학을 건설코저 기성준비회를 새로이 조직
근래 일반의 교육열이 매우 높아감을 따라서 여러 가지의 학교가 모두 부족하여 교육을 받고저 하는 청년의 곤란이 진실로 비상하지마는 그 중에도 조선에는 한 개의 대학교도 설립치 못하여 대학교육을 받고저 하는 사람을 인도할 곳이 없을뿐 아니라 그 외에 여러 가지로 손실이 크고 많은 것은 누구든지 짐작하는 바로 일반에서는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든 바이지마는 대학을 세운다는 일은 극히 거창하여 여간 몇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바가 아니므로 금일까지 실지의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였든 것이라. 그러나 일이 거창하고 어려웁다고 시작을 아니하면 언제까지든지 조선사람의 대학이라는 것은 생겨볼 수가 없으므로 이번에 조선 전도의 다수한 유지를 망라하여 민중적(民衆的) 운동으로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의 힘을 합하여 민립대학(民立大學) 한 곳을 세워보고저 이상재 현상윤 최규동 이종훈 정대현 고원훈 한용운 이승훈 강매 허헌 장두현 송진우 장덕수 이상협 임경재 장응진 정로식 최린 홍성준 이갑성 백남규 설태희 김일선 박희도 오현옥 유성준 박승봉 이종준 이광종 김우현 신명균 이시완 이봉화 이현식 김정식 최순탁 강백순 강인택 명이항 고용환 강제모 유진태 남궁훈 한인봉 홍덕유 김병희 장도빈 (무순) 우에 기록한 제씨의 주창으로 수일 전에 민립대학기성준비회(民立大學期成準備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장차 각 부군에서 다수한 발기인의 참가를 구하여 경성에서 발기회(發起會)를 열고 실행방법을 결정할 터이며 수표정(水標町)사십 이번지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안에 사무소를 두고 방금 준비에 분망중이더라.
민립대학 기성준비회의 활동에도 동아일보는 1면 사설과 광고로 도왔습니다.
1922년 12월 16일자 1면 사설
민립대학의 기성(期成) 위원 파견에 대하야
우리의 체면, 조선인의 생명 보지(保持)가 이 대학 기성과 관계가 있다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니니, 보라, 이 민립대학은 첫째 민중의 힘으로써 하는 최고학부이며, 둘째 민중의 이상으로서 하는 최고결정이다. 바라건대 조선 민중을 구원하는 길이라. 1전을 가진 자는 1전을 던지고 일발을 가진 자는 일발을 뽑아 이 사업의 기성을 촉할 지어다. 조선민족이 비록 빈(貧)하고 약(弱)하다고 하나 실로 심(心)과 력(力)을 합하면 어찌 차업을 기성(期成)치 못하리오.
1923년 1월 8일자 3면 광고
근고(謹告) 2천만 부로형제자매(父老兄弟姉妹)에게
각 신문에 누차 보도된 바와 여(如)히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하여 전국 각 단체에 공명되기를 구하였든 바 혹은 단체의 연합으로 혹은 개인의 합동으로 도처에서 대상(大贊)을 여(與)하심은 깊이 감사하는 바오나 단체조사의 불충분으로 혹 누락된 지방과 수신인의 부재로 반신된 지방에는 제(諸)군청으로 통첩을 발하고 발기인모집을 의뢰하였으나 아즉 소식이 전달되지 못한 지방이 간혹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신문지상으로 앙고(仰告)하오니 우(右) 각지(各地) 부로형제자매(父老兄弟姉妹)는 동심협력하시와 좌기(左記)와 여(如)히 발기인을 선발하여 주시옵소서. 1. 발기인은 1군에 2인이상 5인이내 선정하시되 그 자격과 방법은 귀군에 일임함(단 귀군 내 각 단체 협의선발 하심을 요함). 1. 당선된 발기인은 별지 승낙서에 주소,씨명,연령을 기입 날인하야 본회로 송부하시고 발기총회에는 반드시 출석하시옵소서. 1. 발기 총회 시 발기인의 경성 체류중 숙사료(宿舍料)는 본 준비회의 부담으로 함.
1923년 1월 14일자 1면 사설
민립대학에 대한 각지(各地)의 열성
1923년 2월 23일자 1면 사설
민립대학의 기성총회
“또한 동아일보는 발기인이 결정된 군은 그 발기인의 성명과 함께 일일이 이를 보도하여 마치 이 사업이 동아일보의 사업인 듯한 감마저 던져주고 있었다.”(이인, ‘식민교육에 맞선 민립대학운동’, 300쪽)
‘홍원(洪原)의 민립대학발기인’(1923년 1월 1일자 4면)
‘함경도인사의 열성’(1923년 1월 4일자 3면)
‘대전(大田)발기 인선대회’(1923년 1월 4일자 4면)
‘성천민(成川民) 대발기인’(1923년 1월 4일자 4면)
‘민립대학발기 인선-전남여수’(1923년 1월 5일자 4면)
‘도처(到處)에 대찬동-민립대학발기인’(1923년 1월 6일자 3면)
‘안성민(安城民) 대발기인’(1923년 1월 6일자 4면)
‘민대발기인(民大發起人)-발표명단’(1923년 1월 10일자 3면)
‘남원민(南原民) 대발기인’(1923년 1월 12일자 4면)
‘간도(間島)에서까지 찬동’(1923년 1월 13일자 3면)
‘민립대학에 대한 당진인사열성’(1923년 1월 27일자 3면)
‘여주(驪州)청년임시총회’(1923년 2월 4일자 4면)
‘민대발기인 또 네 곳에서 선발’(1923년 2월 11일자 3면)
‘민대발기인 또 새로 세 곳에서’(1923년 2월 28일자 3면)
‘민대발기인 또 네곳에서 선발’(1923년 3월 3일자 3면)
민대(民大)를 위하야 단연(斷煙)
군산부 낭화정에서 객주업을 하는 최봉국씨는 금반(今般) 민립대학이 발기됨에 대하야 씨는일평생을 단연(斷煙)하야 기금액을 민립대학에 기부하겠다고 단연히 실행중이라더라. (동아일보 1923년 2월 17일자 4면)
1923년 3월 29일 발기총회에 앞서 동아일보는 연이어 1면 사설을 통해 민립대학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특히 당일에는 세계 각국의 대학소개 기사에서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폴란드와 이집트에도 각각 하나씩의 대학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1923년 3월 28일자 1면 사설
민립대학발기총회
민중문화운동의 선구
1923년 3월 29일자 1면 사설
민립대학에 대한 오인의 이상
1923년 3월 29일자 3면
금일(今日) 민립대학발기총회
조선초(朝鮮初)의 민학운동(民學運動)
민립대학 발기총회는 금 29일 하오 1시부터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개최할 터인데 지방에서 참석하겠다는 승낙이 온 수효만 사백여명이오 경성내의 발기인까지 출석하면 실로 공전의 성황을 이루리라하며 준비회에서는 작일까지도 모든 준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며 준비회의 모씨는 말하되 “이번 대학사업은 실로 조선인 전체의 요구에서 나온 일이라 발기가 이와 같이 성대히 되는 것을 보면 실제 사업도 뜻대로 잘 될 줄로 믿습니다”하더라.
기후(其後)의 발기인(發起人)
25일까지 통지서가 도착한 발기인으로 아직 보도되지 못한 이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더라.
◇평북 운천군 윤성일 탁계위 이중진
◇함북 무산군 한덕현 김약흠
◇경성부 정창진 안호영 김성수 황윤덕 조남준 고준권 김미리사 신알배터 유각경 정민재 이오호 노재원 최병위 이승우 김병로 장명현 김계병 안일영
세계 각국의 대학교
이천오백명을 수용하는 곳이 세계 각국에 육십이처나 된다
관하라! 파란(波蘭) 애급(埃及) 등 국(國)을
동아일보는 총회 기사를 연일 사회면 주요기사로 소개했습니다.
1923년 3월 30일자 7면
개회된 민대총회
민대발기취지서(民大發起趣旨書)
오인(吾人)의 운명을 여하(如何)히 개척할가.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차등사(此等事)가 모도 다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잇스며 가장 힘잇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기 불능하도다.
하고(何故)오하면 알고야 동(動)할 것이요, 알고야 일 할 것이며 안 이후에야 정치나 외교도 가(可)히 써 행할 것이요, 안 이후에야 산업도 가히 써 발달케 할 것이라. 아지 못하고 엇지 사업의 작위와 성공을 기대하리요. 경언(更言)하면 정치나 외교도 교육을 대(待)하야서 비로소 그 효능을 진(盡)할 것이오 산업도 교육을 대하야서 비로소 그 작흥을 기(期)할 것이니 교육은 오인의 진로를 개척함에 재하야 유일한 방편이요 수단임이 명료하도다.
그런데 교육에도 계단과 종류가 유하야 민중의 보편적 지식은 차(此)를 보통교육으로써 능(能)히 수여(授與)할 수 잇스나 그러나 심수(深邃)한 지식과 온오(蘊奧)한 학리(學理)는 차(此)를 고등교육에 기(期)치 아니하면 불가(不可)할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업거니와 사회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유위의 인물을 양성하랴면 최고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
그 뿐만 아니라 대학은 인류의 진화에 실로 막대한 관계가 유하나니 문화의 발달과 생활의 향상은 대학을 대(待)하야 비로서 기도할 수 잇고 획득할 수 잇도다. 시관(試觀)하라. 저 구미의 문화와 구미인의 생활도 그 발달과 향상의 원동력은 전혀 대학에 계재(係在)하나니 희(噫)라. 저들의 광명과 저들의 운명은 진실로 십이삼(十二三) 세기 경에 파리(巴里)대학을 위시하야 이(伊) 영(英) 독(獨) 제국에 발연히 성립된 각처(各處)의 대학 설립으로부터 빗나고 개척되엿다 할 수 잇도다.
환언하면 문예부흥도 대학에서 발흥되고 종교개혁도 대학에서 생기고 영불(英佛)의 정치혁명도 대학에서 양출(釀出)하얏고 산업혁명도 대학에서 최촉(催促)하얏스며 교통도, 법률도, 의약도, 상공업도 모도다 대학에서 주출(鑄出)한 것이로다. 그럼으로 금(今)에 오인 조선인도 세계의 일우(一隅)에서 문화민족의 일원(一員)으로 타인과 견(肩)을 병(幷)하야 오인의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랴면 대학의 설립을 사(捨)하고는 경(更)히 타도(他道)가 무(無)하도다.
그런데 만근(挽近) 수삼년(數三年) 이래로 각지에 향학열이 울연(鬱然)히 발흥되야 학교의 설립과 교육의 시설이 파(頗)히 가관(可觀)할 것이 다(多)함은 아 실(實)로 오인의 고귀한 자각으로서 출래(出來)한 것이라. 일체(一體)로 서로 경하할 일이나 그러나 유감되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도 대학이 무(無)한 일이라. 물론 관립대학도 불원(不遠)에 개교될 터인즉 대학이 전무(全無)한 것은 아니나 그러나 반도문운(半島文運)의 장래는 결코 일개(一個)의 대학으로 만족할 바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잇도다. 그럼으로 오제는 자(玆)에 감(感)한 바 유(有)하야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向)하야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노니 자매형제는 내(來)하야 찬(贊)하며 진(進)하야 성(成)하라.
“발기 총회 제2일(30일)과 제3일(31일)에는 자금 모집과 각종 사업 계획을 의결하고 끝났는데, 첫날 발표된 ‘민립대학 발기 취지서’는 3.1 독립선언서에 비길만한 정도의 기념할 만한 내용의 글이다.” (박성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 ‘한국현대사’, 탐구당, 1982년, 191쪽)
1923년 4월 1일자 3면
회금보관(會金保管)이 일(一)문제
필경 지방회금은 각각 보관, 기타의 결의안은 원안대로
민대(民大)총회 제2일 속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창립총회의 의사진행에 대하여는 작일 본보에 그 일부를 소개한 바이어니와 계속하여 재작일 오후의 의사를 보도한건대 결의안 제 2호 제3항은 원안대로 가결하고 즉시 제3호의 심의에 들어가서 몇가지 의문구를 수정한 뒤에 대체로 원안대로 가결하고 제4호 1항도 별로 이의 없이 가결하였는데 2항 중에서 지방부에서 수집되는 회금은 매월 종(終)에 차(此)를 필히 중앙부(경성)로 송치(送致)라는데에 이르러 의론이 비등하여 장내는 한참 소란하였는데 이 원안을 반대하는 편의 의견은 “지방에서 모으는 돈은 사업을 착수할 때에 중앙부로 보내어도 늦지 않다는 일, 지방에 있는 거대한 돈을 자꾸 서울로 보내게 되면 그동안 지방의 금융계가 큰 타격을 받게 되는 일, 또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아닌 이상에 거대한 돈을 한곳에 오래동안 두게 되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기는 일 등 여러 가지 의견으로 지방대표들은 일체로 원안을 반대하여 과거의 모든 불상한 사실을 들어 경성에 보낼 수 없다”하여 갑론을박으로 한참동안 싸우다가 마침내 원안을 고치어 “지방에서 모으는 돈은 그 지방금융기관에 보관하되 달마다 그의 수를 중안부에 보고”하기로 가결하고 제 5호도 몇가지 질문이 있은 뒤에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결의안권부를 마치고 오후 5시반에 휴회하였더라.
집행위원까지 선정
작일오후에 모든 위원 선정
민립대학 발기총회 제3일은 작일도 오전 10시부터 시작하여 리상재씨의 사회로 회를 열고 의사를 진행하였는데 새 순서에 들어가기 전에 재작일 가결한 결의안에 새로 한 가지를 더 넣자하는 의견이 일부에서 일어나 즉시 가결되었는데 그것은 제7호 다대한 금원(金員)을 의손(義損)한 자, 기타 특별한 공로가 유(有)한 자에게는 집행위원의 결의에 의하여 표창함을 득함이라는 것이며 이에 순서를 따라 삼(三) 중앙집행위원, 사(四) 감사위원, 오(五) 회금보관위원 등의 선거문제에 들어가서 결국 각도 대표 중에서 두 사람씩, 만주 도령에 한 사람, 준비회에서 다섯 사람 모두 설흔 두사람의 전형위원을 선거하여 그들에게 일임하자 하고 즉시 전형위원을 선거한 뒤에 의장은 삼십분 동안 휴회를 선언하고 전형위원들은 따로 한곳에 모이어 각각 임원을 선거하고 2시 반에 다시 회의를 계속하여 먼저 전형위원으로부터 선거한 임원을 보고하였는데 그 성명은 아래와 같더라.
◇중앙부집행위원 30인
이상재 이승훈 조병한 김탁 고원훈 강인택 한용운 최린 한인봉 김한승 오달세 류인식 조만식 이춘세 유성준 고용환 송진우 정노식 김우현 백남진 유진태 이갑성 남궁훈 남홍윤 강백순 주익 홍성설 현상윤 김정식 허헌
◇감사위원 7인 이달원 임치정 염인혁 김윤환 김완진 이봉하 김교영
◇회금보관위원 7인 장두현 이하용 김일선 김병로 유양호 김성수 김윤수
1923년 4월 4일자 1면 사설
연내에 1천만원 계획
동아일보는 민립대학설립에 대한 선전과 모금운동 뿐 아니라 이승훈 조만식 안재홍 이갑성 등 민족지도자들의 지방순회 강연도 연일 보도했습니다.
일인일시(一人一匙)의 감식(減食)으로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동리 이정도 여사가 민립대학 기성운동을 위하여 적은 힘이나마 도웁겟다는 뜻으로 작년 4월 1일부터 시작하여 조석으로 밥 지을 때마다 식구수효대로 한사람에 대하여 쌀 한 숟가락씩을 떠 모은다 함은 당시 이미 본보에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동안 벌써 일년이 지난 이 때 이 여사의 정성으로 모은 쌀이 얼마나 되는지…(중략)…일년동안 모은 쌀이 대략 아홉 말이 되었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4월 16일자 2면)
1923년 4월 20일자 3면
민립대학강연회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선전 강연회는 18일 오후 7시반에 종로청년회관에서 열리었는데 정각 전에 아래위층에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다. 이상재 씨 사회로 회를 열고 먼저 유성준씨가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취지에 대하여’라는 문제로 도도 수천언의 열변을 토하고 그 다음 한용운 씨가 자조(自助)라는 문제로 말끝마다 사람의 폐간을 뚫을 듯한 말을 하여 일반청중에게 많은 감격을 주었다.
마침 미국유학길에 오른 장덕수 해외상주 특파원도 강연에 동참했습니다.
신한민보 1923년 5월 17일자 1면
동아일보 기자 장덕수 선생 환영회
5월 16일 오후 8시 반에 대한인 국민회 총회 주최로 샌프란시스코 한인 예배당안에서 장덕수 선생의 환영회를 열었다.“민립대학의 민족적 대운동의 그 동기가 어디서 나왔느냐하면 우리 민족이 민족적 각오로 배우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자각에서 발생되었다. 이 일본이 얼마 전까지도 우리에게 배우던 자로서 오늘 우리를 압박하는 그 능력은 곧 세계의 신문화를 우리 보다 먼저 배운데서 나왔은 즉 우리도 배워야 되겠다는 민족적 자각이 있다고 하셨다…(중략)…그러나 이 운동이 시작된 후에 차츰 진취되어 동북에서 절규하면 서남에서 향응하여 의심 없이 민립대학운동이 실제에 나타난 민족적 대운동임으로 일인들이 지금은 두려워하며 혹 이 속에 독립운동이 포함되지 않았는가도 의심합니다. 그러면 이 어찌 민족적 성과의 한 증거가 확실하지 않습니까.”
1923년 6월 4일자 1면 사설
민립대학의 성패-민족적 능력의 시금석
‘창원청년임원회’ (1923년 6월 4일자 4면)
‘민대(民大) 지방부’ (1923년 6월 5일자 4면)
‘성천군(成川郡) 순회선전’ (1923년 6월 5일자 4면)
‘조만식씨 환영회’ (1923년 6월 5일자 4면)
‘민대 지방부 보은평산에 조직’ (1923년 6월 6일자 4면)
‘봉화청년정기총회’ (1923년 6월 6일자 4면)
‘민대지방부 대구에 조직’ (1923년 6월 26일자 4면)
1923년 11월 21일자에는 하와이 동포로부터 온 57원을 기탁해온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다음날에는 1면 사설로 국내동포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1923년 11월 21일자 3면
포와(하와이)동포로부터 민립대학 기성회에 의연금을 모아 보내었다
1923년 11월 22일자 1면 사설
포와동포의 민대 기성회 성적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은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심히 담박한 듯하면서도 심히 인색한 인민이다. 아마 극도의 빈궁이 우리를 이러한 악덕에 빠지게 한 것이려니와 우리는 금전욕을 희생하여서까지 지식욕을 만족할 만한 성의가 없다. (‘과거 일년간 민족적 제운동 비판’, 동아일보 1924년 1월 1일자 1면)
1924년 3월 29일자 1면 사설
거년(去年) 금일(今日)을 회고하고
민대(民大)기성회 발기 1주년
그러나 이 운동을 일으킨 당년부터의 일년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시일동안에 일천만원의 반분인 오백원이나 그 보다도 적은 삼분의 일 되는 삼백유여만원이나 또 훨씬 간략히 좁혀서 예정액의 십분의 일 되는 단 백만원이나마 우리의 힘을 모아 놓았는가. 아!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난연송구의 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한국민족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완강히 진전되어 성공전망이 보이자, 일제는 매우 당황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한 탄압과 회유공작을 가중시켰다. 일제는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에는 정치적 독립 의도와 불온사상이 있다고 규정하면서 경찰을 동원하여 탄압을 서둘렀으며, 설립기금 권고강연을 배일사상 고취라고 경찰을 동원하여 중단시키고, 설립기금 헌납자들을 각 지방경찰서에 호출하여 기금헌납의 동기 목적 연락 관계자들을 심문하는 등 온갖 협박과 방해공작을 자행하였다.” (신용하, ‘일제강점기 한국민족사 중편’, 서울대출판부, 2002년, 132쪽)
“일제시기에 조선에 하나밖에 없던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내노라는 수재들이고 그 대부분은 유산층의 자제들이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을 계몽시키고자 그런 대학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조선사람들이 자체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벌리니까 그것을 못하게 하고 그 대신 제국대학이란 이름을 붙여 식민지통치의 하수인들을 길러내는 대학을 하나 만들어낸 것입니다.” (‘김일성회고록 8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년, 356쪽)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는 불운이 뒤따랐습니다. 1923년 여름 수재가 발생한데 이어 동경 대진재까지 발생해 이들의 구호가 선결문제가 되었습니다.
1925년 9월 1일자 2면
독자와 기자-연연세세의 천재로 진행을 일시 중지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실패는 일제 총독부의 탄압이 최대원인이었지만, 거기에다가 1923년 여름의 수재와 9월 일본 관동지방의 대지진 등으로 경제공황이 몰아쳤고, 다시 1924년 남부지방의 한재가 겹쳐 농민들이 도탄에 빠지고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른 자연적인 재해도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불리한 조건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김호일, ‘한국독립운동사사전 총론편 상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년, 442쪽)
“그 후 민립대학은 총독부의 설립인가가 나오지 않아 경성제대예과의 발족과 함께 ‘보기 싫으니 그놈의 간판을 그만 떼어 버립시다’(이승훈) ‘간판이라도 그대로 두고 봅시다’(이상재)의 전설을 남기고, 국채보상운동에서부터 시작된 민립대학운동은 다시 고배를 마셨던 것이다.” (전영경,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전말’, 뒷표지 안쪽)
“그러나 그 대신에 예수교는 연희전문을, 김성수 선생은 보성전문을, 불교는 불교전문을, 유교는 명륜전문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해서 교육, 산업의 두 기둥 위에 우리 민족의 역량을 길러 일본세력을 내몰고 자주 국가를 세울 터전을 마련하려고 한 것입니다. ‘동아’는 이 두 운동을 한꺼번에 열심히 지원했어요. 민립대학에 기부하는 이들의 명단을 계속 싣곤 했어요.” (유광열 본사 창간당시 기자, ‘민족과 민주의 궤적 반세기-동아지령 13986호에 비친 격동의 현대사’, 동아일보 1967년 4월 1일자 9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염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실제 민립대학 설립은 당시 민족의 소망이자 인촌 김성수에게도 필생의 과제였습니다.
“지금 다수(多數)의 사람들은 반도(半島)에 권위 잇는 대학 하나가 출현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만슴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달(達)하여주는 큰 교육가와 사업가가 하로 급히 출현하기를 바라고 잇슴니다. 생각건대 선생은 10여년래로 중앙학교을 위시하야 보성전문학교 등 큰 학원을 여러개 붓드시고 수십만의 거재(巨財)를 투(投)하야 영재교육에 진력하시는 터이라 경진일보(更進一步)하야 다수한 사회인민이 기대하는 이 대학을 창설하시지 안으렴니까. 벌서 지난번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경영하자 다수한 세인은 그를 대학창설의 첫 계단이라고 보고서 압날을 기대하는 경향이 잇섯슴니다. 듯건대 대학이 창설되자면 100만원의 거재가 잇서야 하리라데 이만한 거금을 움지길 수 잇는 분으로는 선생도 유력한 그 중의 한분이 될 줄 암니다. 선생은 대학을 만드러 이 민족의 문화에 큰 광명을 던저 주시지 안으렴니까.
김성수(金性洙)씨 답: 나에게 그러케 과분한 기대를 가저주신다니 감사함니다. 2천만명이나 사는 큰 땅더리안에 관립대학이 겨우 한낫밧게 업다는 것은 전대(前代)의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잇는 우리니만치 더욱 붓그러운 일이외다. 전년(年前) 민립대학운동이 기(起)할때 얼마나 그의 실현을 기대하엿든가 함은 방방곡곡의 수만인사(數萬人士)의 열성을 통하야 넉넉히 짐작할 수 잇는 일로 그동안에 비록 세월이 흘너지낫스데 대학창설을 기대하는 생각에는 조곰도 변함이 업섯다고 생각함니다. 그런데 대학에 대하여는 나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여보지 못하엿슴니다. 그러나 단과 대학 하나 만들재도 건물 기지(基地)에 20만원, 도서관 30만원, 정부에 바치는 보증금 50만원 그리고 연년(年年) 유지비의 재원으로 100만원 그려니 적어도 200만원을 쥐고야 실현이 됨니다, 그 거액의 돈이 잇서지리까? 그러기에 지금 무에라고 책임잇는 답변은 하기 어럽슴니다만은. 나도 그의 출현을 열열히 희망하고 잇는 이 땅 사람 중의 한아인줄만 아려주십시오.” (‘김성수씨에게-민립대학를 만드서요, 일대의 최대사업으로’, 삼천리 1932년 10월호 8~9쪽)
“김성수 씨의 그때까지의 업적과 보전인수를 위하여 거재(巨財)를 새로 희사하였다는 사실도 그러려니와 무엇보다도 그 분이 민립대학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분하게 여겨서 독력(獨力)으로라도 민족의 알찬 고등교육기관을 만들어 보겠다는 뜻을 품고 그 일을 위하여 우선 구미(歐美)의 이름 있는 대학들을 1년 동안 시찰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우리들 청년에게도 그 분과 협력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었다.”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 ‘편편야화 31회’, 동아일보 1974년 4월 6일자 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