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 여름, 큰 물난리가 나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구호반을 만들어 뚝섬과 이촌동에서 ‘따뜻한 밥과 더운 숭늉’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920년 7월 10일자 3면




오십년래(來)의 대 수해


  수해 소식이 전해지자 성원이 쏟아졌습니다. 팔보단, 소생단, 청심보명단, 비급환, 불망소체정, 영신환, 선일단 천일환 등의 약품과 구호성금이 동아일보에 답지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동아일보는 구호금품 모금 기사를 싣고 그 명단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성금 기부자의 명단을 지상에 소개하는 관행은 이 때 시작된 것입니다.




1920년 7월 10일자 3면




가련한 피해 형제에게


아사(我社)의 발기로 구제를 개시

동정하는 독지의 심절한 후의

이번 홍수는 실로 오십년 이래에 처음 당하는 큰 재앙으로 더욱이 경제의 공황으로 가뜩이나 근일에는 생활이 곤란하든 연강의 노동생활하는 동포들은 아무 인정 없이 밀어들어오는 사납고 검붉은 물결에게 집을 빼앗기며 먹이를 빼앗기고 천신과 만고를 다하여 간신히 보존한 알몸둥이조차 주체할 곳이 없어 배고파하는 부모와 빗물에 젖어서 추위에 떠는 처자를 이끌고 높은 언덕 수풀 사이에서 다만 파도 사이에 남실거리는 옛집의 실낱같은 자취와 물위에 떠도는 세간 쪽을 바라보며 애끊은 눈물로 옷깃을 적실 뿐이니 어찌 참혹치 안을 바리요. 그 중에도 뚝섬 일대와 용산 이촌동 일대의 참담한 수해는 실로 형언할 길이 없는지라 집이라는 집은 전부 물속에 잠기고 사람이라는 사람은 전부 비 뿌리는 언덕 위에서 울며 방황할 뿐이라. 이에 우리 동아일보사에서는 그네의 동정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참담한 비경에 떨어져 한데서 방황하는 가련한 동포에게 만일의 구조라도 표할 작정으로 작일 오후부터 구호반을 조직하여 열대는 이미 뚝섬으로 나아가 배고픈 동포와 추위에 떠는 동포에게 따뜻한 밥과 더운 숭늉을 제공코저 활동 중이며 이촌동에는 불행히 9일 오후까지도 교통이 열리지를 못한지라 금 오전 중에는 결단코 구호반이 출발하여 뚝섬과 같은 구호를 하고자 계획 중인데 본사의 이번 계획에 대하여 노동공제회에서는 구호반을 조직하여 본사원과 같이 분누하며 금전과 약품을 기부하신 분의 씨명은 아래와 같은데 본사는 만강의 충정으로써 독지제씨의 동포를 위하는 간절한 후의를 깊이 감사하노라.




수해구호에 대한 기부금 급(及) 약품

   천도교 총부 금 200원

   대창무역주식회사 금 150원

   영인창지물상 장영석(張永錫)씨 금 20원

   박영선(朴永善) 씨 금 5원

   화평당 약방 이응선(李應善)씨 팔보단 200포

                                                              소생단 200포

   제생당 약방 조한웅(趙漢雄)씨 청위구 200포

   제생당 약방 김제현(金濟鉉)씨 청심보명단 400포

                                                              비급환 100포

   모범매약상회 이옥인(李玉仁)씨 불망소체정 200포

                                                              청상보명단 200포

   조선매약주식회사 영신환 200포

                                       선일단 300포

   천일약방 조인섭(趙寅燮)씨 천일환 200포

                                                천일영신환 300포




  매일신보 1920년 7월 10일자 3면  




수해 이재동포에게, 쟁선(爭先)하여 기부하라 – 본사 주최 구조회에


“각 방면으로 유지 제씨의 구조 기부금을 모집하여 기(其) 모집된 구조금을 경기도지사의 노(勞)를 차(借)하여 이재한 동포에게 분배하겠사오니”




  각계의 성원으로 11일 새벽에는 ‘다섯 수레의 더운밥과 한 수레의 반찬’ 을 제공했습니다.

“동아일보사 구호반이 나와서 더운밥을 그저 준다는 복음은 어느덧 입에서 입을 거치어서 온 뚝도가 거의 알게 되었다.”




1920년 7월 11일자 3면  


온반(溫飯)에 방타하는 감격의 누(淚)


사회의 동정을 재(齎)하야 독도의 이재 형제에게

다셧 수레의 밥과 한 수레의 반찬을 준비하야

긔한에 우는 뚝셤 형뎨 이쳔삼백인을구호

9일 밤부터 밤을 새워가며 구호사업에 종사하던 본사 뚝도구호반은 다시 11일 새벽부터는 왕십리에 이르러 다섯 수레의 더운 밥과 한 수레의 반찬을 준비하여 가지고 즉시 진퍼리 앞에서 거루를 나눠 타고 뚝섬에 이르러 마중을 나온 면리원과 경찰관과 한가지 같은 뚝도중에도 제일 피해를 많이 당한 동(東)뚝도를 중심으로 구호반을 다시 세대로 분하여 수레에 밥과 반찬을 나워 싣고 골목골목이 돌아다니면서 배 주린 동포들에게 밥과 반찬을 나눠줄 새 “동아일보사 구호반”이 나와서 더운밥을 그저 준다는 복음은 어느덧 입에서 입을 거치어서 온 뚝도가 거의 알게 되었다…(후략)




1920년 7월 11일자 3면   




이재동포에 대한 동정인사에게


각 방면의 동정에 본사는 감사

이에 대한 본사의 뜻을 발포함

오십년만에 처음되는 큰 수해를 당하야 한강 연안에 거주하는 수만의 동포는 생활의 근거를 전혀 일코 몸슬 주림과 때아닌 추위를 물결속에 부르지지는 참흑한 광경을 차마 안저서 볼 수가 업서 우리 동아일보사가 이비들의 기한을 구호하고저 구호반을 조직하야 그중에도 수해가 제일 참혹하고 관청의 구제도 완전히 미치지 못한 뚝섬과 이촌동의 두곳에


◇먼저 시급한 구호를 행하기로 결정하고 뚝섬에는 9일 오전부터 활동을 개시하야 별항에 보도한 바와 같이 구호를 행하얏고 이촌등에는 홍수로 교통이 두절되얏다가 10일에야 물이 차차 감하고 피란민도 차차 도라오게 되얏슴으로 10일부터 구호반이 활동을 시작하얏는대 구호반에 대하야 수해를 당한 형제에게 동정을 하시는 사회의 유지인사로부터 금전과 물품으로 다수한 액수를 본사에 부처 이 구호를 행케하심은 본사에서 특히 피폐한 동포와 함께 고마웁게 동정하시는 은혜가 금전과 물품을 합하야 10일까지


◇임의 일천오백원에 달하야 뚝섬에서도 여러분의 간절하신 성의로 다행히 정성스러운 구호를 행하게 되얏고 이촌동에도 역시 그와 가치 열성으로 구제할터인바 원래 사회 각 방면의 이와 같이 심후한 동정의 기부에 대하야는 당초에 본사에서 보통 기부금을 모집함과 같이 면면이 권유할 뜻으로 행한 일도 아니오 순전히 유지제씨의 불쌍한 형제에게 동정하시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일이요 이 뒤에도 여기 대하는 별로 동정을 청하지 아니하겟고 다만 유지인사의 자발적으로


◇금전물품간 본사에 보내시는 인사에게 대하야는 본사에서는 고마운 뜻을 몸바다 지성으로 가장 효험이 만토록 구호를 행할 뿐이기 특히 이 뜻을 공표하야 이미 기부하신 인사에게 감사한 뜻을 포하고 사희인사의게 고하나이다.


수해구호에 대한 기부금 급 물품

(10일 도달한 것)

금전

동양물산회사 금 50원

김윤면씨     금  5원

장두현씨     금 10원

…(중략)…

한준호씨     금 10원

…(중략)…

윤치호씨     금 100원

…(중략)…

윤치소씨     금 100원

…(후략) 




동아일보에서 7월 29일까지 모금한 금액은 3384원96전으로, 7월 16일까지 모금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5533원48전에는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지만 기부자 수에서는 두 배를 훨씬 넘었습니다.




1920년 7월 30일자 3면    




수해구호에 대한 기부금(29일까지)




  그해 8월에는 장덕수 주간도 수해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시흥군 영등포에도 2일 오전 7시 30분 부터 한강물이 넘쳐 들어오기를 시작하여 점점 창일하는 증세가 상오 12시경에는 이미 서른자 가량이나 중수가 되매 구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 등 각지의 조선 사람이 모여 사는 촌락은 전부 무참한 진흙물속에 파묻혀버리고 영등포시가의 일부 도거의 마루밑까지 물이 범람하여 정거장에서 군청으로 가는 길에도 발을 빼이지 않으면 아니될 형편에 이르렀으며 더욱이 구 영등포리 부근의 촌락은 거의 전부가 지난번 홍수에 벽과 온돌이 파손되었음으로 촌민들은 이적지 영등포시가나 혹은 그 인촌에 있는 지친의 집에 묵어가면서 군청에서 얼마씩 나누어주는 보조비를 하늘만 삼아 간신히 벽을 새로이 친다 온돌을 다시 놓는다 하여 요사이 며칠째 불같이 내리 쪼이든 뙤약볕에 간신히 말리게 되였음으로 이제야 간신히 집 없는 설움을 면할까할 지음에 인정 없는 물결은 또다시 그들의 희망과 안식을 빼앗게 되였나니 하늘을 우러러 쓰린 눈물을 뿌리는 그들의 정경은 실로 보는 자로 하여금 동정의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으며…(중략)…이에 우리사에서는 주간 장덕수씨와 구호반 한 사람이 2일 하오에 영등포로 즉행을 하여 피해를 당한 모든 동포를 일일이 위문을 한 후 다시 3일 식전부터는 미곡을 준비하여 구호사업에 착수케되었다.(3일 오전 2시 구호반 갑기자)” (1920년 8월 4일자 3면, ‘니해<泥海>중의 영등포 – 침수가옥이 오백호에 달하고 피난민 팔백을 공청에서 수용, 본사 주간의 정성된 위문’)




“지나간 3일 오전 11시경에 뚝섬을 향하고 출발한 본사 수해구호반은 왕십리 경원선 선로 다리 밑에서 두 척의 배를 띠워서 망망한 홍수의 바다위로 뚝섬 수도국의 붉은 연통을 향하고 길 양편에 서서 있던 양버들의 끝까지만 물 위에서 찰랑찰랑하는 사이로 배를 저어 간다. 배 안에서 피난한 사람에게 구호하여줄 더운 밥과 기타 반찬을 가득이 실도 홍수에 물리어 왕십리까지 피난하여 왔던 사람들도 마침 구호배가 뚝섬으로 간다하는 소문을 듣고 자기집을 염려하여 함께 베에 오른 사람도 적지 아니하다…(중략)…요전 홍수때부터 안면을 익혔든 아해들은 또 동아일보사에서 밥을 싣고 왔다하며 주린 얼굴에 기쁨을 띠우고 바가지와 이남○○푼 등을 들고 뛰어나와서…(중략)…그 중에도 물이 아직 빠지지 못하는 처소부터 구호하기를 먼저하여 점차로 구호를 마치었는데 구호한 호수가 두 대를 합하여 사백십호요 인구수는 이천여명이었는데…(중략)…모두 밥을 받아가지고 서로서로 주리던 배를 취기며 다행히 목숨을 피하였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중략)…구호를 마치고 뚝섬을 떠날 때에는 배를 대었던 데가 길이 드러나고 들에 밭도 많이 보이게 되어 본사의 구호반은 오후 5시에 뚝섬을 출발하여 허리에나 지나는 물을 도보로 두군데나 건너 다시 배를 타고 왕십리에 도착하였다.(3일 오후 6시 구호반 을기자)” (1920년 8월 5일자 3면, ‘망망탁해에 일척선 – 저기 오는 배가 우리를 구할 구호배이다 부르짖는 소리, 안타까운 피난민의 새 기쁨’)




  유광렬, 이서구 창간기자의 회고입니다. 이서구 선생은 “내 배를 골아가며 남의 배를 걱정 하러다니는 우리의 걸음 거리에는 밥으로도 도우지 못할 딴 활기가 솟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7월 초부터는 비가 몹시 와서 한강연안 뚝섬 등지에 10년 이래의 홍수가 있었고, 각 신문사에서는 수해구제에 출동하였으니 아마 우리나라 신문 사상에 신문사가 수해구제에 출동한 일로는 처음 되는 일일 것이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39쪽)




“그러함으로 매년 녀름만 되면 각 신문사는 거의 총출동을 하야가지고 홍수를 쫏처다니며 한편으로는 피해상황을 조사 보도하는 동시에 한 편으로는 구호반을 조직하야 재해 맛난 동포를 구호키에 노력을 하게된다. 이를 조차 나는 해마다 거의 수해 때에 나서지 안은 해가 업다. 제일 처음 야단이 나기는 동아일보 창간 제2년(창간 제1년의 착각 – 인용자 주) 녀름이엇다. 나희는 젊겟다. 혈기는 벅차겟다. 한강 일대가 거의 전멸이 되얏슬 때 밥을 지어서 수레에 실고 동아일보기(東亞日報旗)를 날니며 뚝섬 방면으로 출동 사람이 곳 기자이엇다. 쪽박을 들고 뚝박이를 들고 나무숩이나 쓰러진 집속에서 긔여 나아와 주린 배를 잡고서 밥을 밧는 가련한 동포를 대할 때 나는 감격한 나마지에 기사를 쓸 책임까지 닛고 밥만 난호아 주다가 부장 영감께 꾸중을 드른 일도 잇섯다.” (이서구, ‘장마 홍수 사상 그 때에 우리는 이렇케 활동하엿다 – 홍수 중의 보도기자의 고심’,  별건곤 1927년 8월호 35쪽)




“그때 우리들은 보도만을 우리의 직분으로 알지 않았다. 월급은 못 받아도 배는 주려도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쩌랴 하는 자부심이 우리의 전부를 지배했던 것이다. 한강 유역의 치수공사가 지금같이 완비하지 못했든 때라 뚝섬 동막 영등포 일대는 해마다 수해에 우는 사람이 수천수만에 달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네에게 옷을 주고 밥을 주고 집을 주려고 애를 썼다. 뚝섬까지 밥을 지어 ‘구루마’에 실고 우리가 끌고 나가서 피난민 합숙소로 다니며 밥을 손수 퍼 돌렸다. 어느 때인가 점심도 굶은 장덕수씨와 나와는 영등포 이재민에게 백미 10석을 분배하기 위하야 기차를 탔었다. 황토에 물든 한강의 밀리는 물결 위에는 함지박이 떠 내리고, 집 섬이 떠 내리고 초가지붕에 박 넝쿨이 언친 채 닭이 올라앉은 채 떠 내렸었다. 3등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은 설산(장덕수의 아호)은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가 넘게 길은 수염, 꽉 다문 입, 감은 눈두덩 속에서 좌우로 돌고 있는 눈동자. 나는 그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존경함직한 감동을 느꼈었다. 내 배를 골아가며 남의 배를 걱정 하러다니는 우리의 걸음 거리에는 밥으로도 도우지 못할 딴 활기가 솟는 것 같았다.” (이서구, ‘그 때, 그 시절의 회상’, 삼천리 1939년 1월호 104쪽)




1923년 7~8월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관서대수란(關西大水亂)에서는 지국과 분국을 총동원해서 구제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어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함께 구호금을 모집한 지국도 있었습니다.




“내가 조국으로 돌아온 그 해(1923년 – 인용자 주)는 평양지방에 전염병까지 퍼지어 시민들이 모진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홍수의 피해를 입은 온 도시가 형용하기 어려운 곤란을 당하였다. 동아일보는 그 해 홍수로 인한 참상을 전하면서 평양 시내 총 호수의 절반에 달하는 1만여 호의 집들이 물에 잠겼다고 하였다.”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1’ ,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1992, 90쪽)




“금회(今回) 평양 일대의 수재는 실로 고금한유의 일대 참극이라…(중략)…형제의 통심(痛心)이 과연 여하(如何)할까. 형제여 형제는 피와 눈물이 잇거든 뿌리며 의(義)와 정(情)이 있거든 그 힘을 다하여 수해 중에 신음하는 형제를 구출하라…(중략)…제 형제의 재난을 제 동포가 동정치 아니하며 구제치 아니한다하면 그 수(誰)가 동정하며 그 수가 애호아리요. 이 점에 있어서 전국형제의 양심에 소하여 일체 향응하기를 절망하노라” (1923년 8월 7일자 1면 사설, ‘전국 형제에게 고(告)하노라 – 수해 구제에 대하야’)




   수재동정금모집(평양 8. 6~)

   평양수재구제회(사리원 8. 8~)

   평양수재동정금급모(덕천 8. 24~)

   서선수해구제회(안악 8. 24~)

   서선수해동정금모집(광주 8. 25~)

   서북수재구제회(군북 8.30~)

   도쿄이재동포구제회(영동 9. 10~)

   도쿄이재동포구제회(삼랑진 9. 14~)

   수해구제회(당진 9. 18~)

   도쿄재류동포급서선이재민구제회(이원 9. 21~)




1923년 8월 7일자 3면    

 


노천생활을 하는 평양 이재민의 비참한 광경과 본사 특파원과 지국원의 순회위문 광경




 1923년 8월 8일자 3면 사고 




평양 수해구제 동정금 모집소


평양 수해구제회(평양 기독교 청년회관 내)

동아일보 평양지국(평양부 내 창전리) 




이번에도 이서구 기자가 현장취재에 나섰습니다.  “본사에서는 평북 용천군에서 공전의 해일이 유하여 농민 이천여 명이 사생(死生) 불명하라는 보를 접하고 15일 오전 호외를 발행 배포하였더라.” (1923년 8월 16일자 2면, ‘호외 발행’)




“정주에 이르니 얼굴은 이미 잊었으나 정주지국장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수해 통계를 내주며 신의주에서 용암까지 전화는 된다고 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오냐 인제는 내가 1등이다 마음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중략)…나는 정주 수해 통신 한 가지를 더 얻는 동시에 일애 선발하여 마상에 높이 앉아 현장으로 급행하든 두 전우보다 하루 먼저 ‘시체(屍體) 사백!’ 이라는 일대 참보를 본사에 전할 수가 있었다.” (이서구, ‘10년 간의 탐방생활’, 철필 1930년 7월호 77쪽)


1923년 8월 14일자 3면, 해일 진남포를 습함, 가옥 1000 여 호 경낭 중에 들고

선박도 40, 50척이 파선되어 손해 막대, 사상은 아직 미상, 인심 흉흉


본사지국 활동, 구호반을 조직하여 구호 중


조선인 신시가, 400호 전부 침수, 이곳은 전부 조선인 뿐이다, 가옥 도괴 30 여호

– 본사 특파원 이서구(李瑞求)전화







1923년 8월 15일자 3면, 진남포 수해는 제2평양, 침수가옥 1300, 도괴 80호, 물 빠진 뒤에도 집은 자꾸 넘어지는 중이라고

– 진남포 특파원 이서구(李瑞求)발


1923년 8월 16일자 3면, 조수는 퇴거하나, 해일 후의 참상은 눈물거리뿐

– 진남포 특파원 이서구(李瑞求)발


1923년 8월 17일자 3면, 가옥보다도 전답, 용강군 내의 전답 손해가 1500 정보 이상이다

– 용강읍내에서 특파원 이서구(李瑞求)발


1923년 8월 18일자 3면, 500호가 유실 파괴, 정주군 해변 5면의 손해, 사망 인수 근 오십명이다

– 정주에서 특파원 이서구(李瑞求)발


1923년 8월 19일자 3면, 지옥에서 규환하는 일만 명, 집 잃고 가족 잃고 주림에 우는 일만 명의 피해민, 어린자식과 병든 부모를 위하여 가련한 도적질,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욱 참혹한 지옥의 광경, 판명된 용천군 일원의 해일 피해 상황

– 18일 오후 3시 용암포에서 특파원 이서구(李瑞求)발


“용천군 내의 해일로 인한 손해를 각 면으로 구별하여 보면…(중략)…그중 용천일군 내에 긴급히 구제하지 아니하면 안될 사람이 만 명이나 되는데 그중 삼천 명은 불이농장에서 조밥과 소금 등을 공급 중이나”


  1923년 8월 20일자 3면, 연연 세세히 차월차일은, 강월이 실색하고 해파가 오열하리라, 행방불명이라고 일조의 희망을 부쳤던 사람들은, 날마다 때마다 참혹한 시체로 변하여 나타나온다

– 귀기(鬼氣)가 예인(藝人)하는 용천에서 특파원 이서구(李瑞求)




“다음의 큰 수해는 1914년(1923년의 착각 – 인용자 주) 8월일이다. 평양이 수란(水亂)에 빠저 대동강안의 전멸된 어촌을 순찰코자 평양에 출장 갓든 기자에게 돌연히 용암포로 급행하라는 지급전명이 왓다. 긔가 막켜 평남경찰부에 무러보니 평북 해안선에는 대해일이 잇서 용암포를 중심으로 피해가 막대하다는 것이다. 가슴이 덜넝거리고 발이 땅에 붓지를 안느다. 엇더케 하면 이 대사건을 완전히 보도를 할가하는 공명심과 엇더케 드러서야 한시 속히 피해의 진상을 알가하는 불안이다. 곳곳에 수란이 이러나 사람의 자최가 끈친데 가서 신문재료가 나아올 리가 업다. 더욱히 드르니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는 부장급이 출동을 하야 임의 용암포으로 향하얏다 한다. 시간을 보니 임의 북행차 시간은 지냇다. 나는 가슴에서 불이 날 지경이엿다. 동아일보의 불명예는 엇지하며 자기자신의 불명예는 또 엇지 하겟는가? 그날밤은 자는지 마는지 우춘(又春)여관 일실(一室)에서 조바심을 하다가 겨우 날을 발켜 새면 차를 탓다. 차 속에서 생각하니 선행한 두 특파원에게 밋칠 길이 업다. 거긔서 새로운 꾀가 낫다. 그것도 여러 해 수해를 격거난 덕이다. 본시 수해란 그 현상이 대동소이하다. 집은 떠나려가고 사람은 빠저 죽고 전답은 니해(泥海)에 덥혀바린다. 그러함으로 용암포의 참상도 보지 안코 그럴 뜻하게 그려내일 수는 잇다. 그러나 다만 속히지 못하고 어림치지 못할 것은 피해통계이다. 익사자 몇천 유실가옥 몃만이라고 아모럿케나 쓰는 수는 업다. 그럼함으로 잡관(雜觀)은 보나마나 일반이니 우선 피해통계나 알아보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통계는 소관 경찰이 제일 속하게 꾸몃슬 것임으로 위선 차중에서 신의주 지국으로 전보를 노화 용암포경찰서와 전화가 통하느냐 무럿더니 통화가 된다는 희보가 이르럿다. 나는 속으로 퍽 깃벗다. 경쟁심리에 빠진 나는 천 명에 갓가운 동포의 시체가 떠도는 비극에 임하야 오직 신의주 용암포 간의 전선이 끈이지 안은 것만 한울께 감사하얏든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기차에서 나려 용암포로 가려면 적어도 무릅까지 빠지는 길에 일주야(一週夜)는 걸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신의주로 직행을 하야 전화로 피해통계를 무른 후 잡관을 좀 붓처서 전보를 노흐면 선행한 제군보다 오히려 12시간은 일늘 것을 확신한 것이다. 과연 내 계획은 마젓다. 나는 룡암포 초유의 대비극의 제일보(第一報)를 어느 사의 누구보다도 제일 몬저 京城에 전하기를 어든 것이 잇섯다. 이 때의 깃붐은 아즉도 못닛는다. 그러나 깃붐의 뒤를 이여 닥치는 고생사리는 나의 평생에 다시 맛보지 못할 辛苦와 공포를 주엇다. 그것은 제일보를 보내고 나서 제이보(第二報)를 엇고자 급류에 배를 띄우고 겨오 용암포에 이르럿스나 가장 피해가 심한 불이(不二)농장은 오히려 수십리 밧기엇다. 때는 임의 져므럿스나 그 밤에 드러가지 안으면 익일(翌日)에 다시 용암포에 도라와 본사에 전보를 노흘 시간이 업다. 나는 하는 수 업시 결사적 용기(?)를 내엇다. 비는 부슬부슬 나리고 버레소래는 요란하야 갓득히나 마음 내이키지 안는 들벌판길을 익사자의 시체가 곳곳이 훗터지고 뱀(蛇)의 꼬리가 곳곳이 서리어 잇는 산비탈 숩속으로 방향도 잘 모르는 젊은 신문기자가 드러서는 것을 보고 용암포 친고들은 구지 말렷섯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하로 밤이 신문기자의 천직을 다하는 귀중한 시간이엇다. 나는 긔를 쓰고 적은 석유등 하나를 들고 지국장을 억지로 끄러서 불이(不二)농장까지 차서 그러갓다. 평지로 가면 발은 무릅까지 빠지고 산비탈노 가면 송장이 발핀다. 압헤서 『익키!』하면 뒤에 선 나는 따라서 물러 안는다. 이리하야 밤 새로 한시에 겨우 불이농장에 물빗을 보니 송장 밟기에 혼이 빠지고 진흑길 것기에 긔운이 빠저 고만 그 자리에 주저안저 바렷다. 다음에 기막키는 것은 신문전보 놋는 데 경쟁이엇다. 도회지 우편국 가트면 전신기 수도 넉넉하고 솜씨도 빠르지만 시골로 드러스면 신문 전보 요금의 계산도 못하는 전신계원이 만타. 이갓치 굼된 분의 손에 걸녀서는 분각(分刻)을 닷호는 지급전보도 아모 보람이 업서진다. 그러함으로 세 사람의 기자의 전보일망정 몬저 내고 나종 내는데 시간상 큰 차이가 잇다 .그래서 재료 보는데도 땀을 흘녓거니와 재료를 어더가지고 전보로 쓰는데도 손끗헤서 불이 날 때가 만핫섯다. 이럿케 긔막히게 서로 싸호다가 그 날 통신을 다 맛치고는 인력거를 나란히 하고 안동현으로 놀너갈 때의 우정은…우리의 천직을 모르는 분이 볼 때에는 기가 맛켯을지도 모를 것이다.“ (이서구, ‘장마·홍수·사상 그 때에 우리는 이렇케 활동하엿다 – 홍수 중의 보도기자의 고심’, 35~37쪽)




“얼마 안 되는 동안 수만의 동포들로부터 푼푼전전이 모은 것이 일만원을 돌파하고도 삼천여원, 입었던 옷까지 벗어 내놓아 모인 의류와 물품이 일천사백팔십여점에 달하여 구조를 받은 이재동포는 오만여명에 달하였든 것이다” (본보 창간 15주년 특집 – ‘경경미충<耿耿微衷>의 15성상 – 관서대수란<關西大水亂>’, 동아일보 1935년 4월 7일자 석간 3면)




  1925년의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는 7월 12일부터 25일까지 경성과 그 주변의 수해지역에 막사를 지어 이재민을 수용하고 침식을 제공하는 구호대책에 나섰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호외를 발행하는 ‘호외 홍수’시절이기도 했습니다.




1925년 7월 12일자 임시호외 2면 




칠야폭우하에 생도를 구하는 연강 주민의 규고비명 – 니해(泥海) 탁류 중에 칠전팔기하는 본사 호위반의 철소활동


비는 꾸준히 끊임없이 내리는 중 사고로도 기위 발표한 바와 같이 본사에서는 편집국원 중 일반독자에게 상항보도에 관한 책임을 지운 편집국원 6,7인을 남긴 외에 사원전부가 일이삼사 네반으로 나뉘어 일반은 이촌동, 이반은 뚝섬, 삼반은 마포로 출동하여 피해동포를 위하여 밤은 지척을 분변하기 어렵게 어둡고 비는 억척같이 쏟아지는 중임도 불구하고 교통두절된 곳에는 목선을 대어 구조에 당하며 밥을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밥을 지어 공궤하며 양식이 없는 이에게는 식료품을 공급하는등 작일 오전부터 금일까지 밤을 새워가며 구호사업과 위문에 노력하였으며 제사반은 경성시내에 있어 가지고 수재이재동포를 조사구호하기에 진력하는 동시에 이에대한 모든 정황을 편집국에 보고하여 제일보로 독자의 궁금한 회포를 풀게 하였더라.




1925년 7월 12일자 2면 사고




◇시내외 수해이재민◇


임시구호위문반

“장마는 내일까지 계속할 듯하다하니 한강연안의 일대는 물론이어니와 시내 각처에도 피해가 점점 커질듯합니다. 이제 본사는 일시나마 어려운 경우를 당한 동포를 위문하는 동시에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구호에 노력하고”




1925년 7월 13일자 2면  




본사 구호반 위문대


(사진설명) 본사 구호반이 이촌동 수해민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상)과 서빙고보교 피난민들에 양식을 주는 것(중)과 뚝섬면소에서 구호하는 것(하)과, 뚝섬 물난 광경




“한강 증수 삼십여척도 어느 듯 12일 오전 11시 한강증수 삼십오척 사촌을 보하였다. 본사편집국의 전령소리도 각각으로 증수되는 한강의 수준을 따라 더욱 요란. 일시 감세를 보이던 한강의 수세는 동월 18일 오후 4시 전날밤 한강상류의 폭우와 한강하류의 조수의 역상으로 별안간 증수 사십이척 구촌 마포의 증수는 사십칠척 오촌을 최고기록으로 하는 동안 화동 본사 앞골목을 달리는 호외배달부들의 걸음을 얼마나 빨리 하였고 본사 구호반의 활동은 어떠하였던고!” (본보 창간 15주년 특집 – ‘경경미충의 15성상, 을축대홍수’)


“그때는 아직 라디오가 보급되지 않았던 때이라, 시급한 뉴우스는 신문의 호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러지 않아도 라이벌 의식이 강렬했던 조선과 동아의 두 신문사에는 시간시간마다 호외를 발행해서 10분이 빨랐느니 5분이 늦었느니 하고 서로 수선을 떨고 있었다. 호외라야 한강수위가 몇자 더 불었느니, 살꼬지 다리가 어쨌느니, 익사자가 몇 사람 났느니 정도의 것이었으나, 두 신문사는 그 호외를 다른 신문보다 1분 1초라도 더 빨리 내고자 갖은 애를 다 써서 독자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였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당시는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사회의 중심은 언제나 민간 신문에 있었으므로 남녀학생은 물론, 기생 권번까지 총동원해서 위문품을 모집하고 이재민을 구호하는 데도 서로 눈에서 불이 날 만큼 격렬한 경쟁을 하였었다.” (김을한,‘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 일조각, 1971,19~20쪽)


“달포를 두고 내리붓던 비는 필경 대홍수를 내고 말았다. 종일을 두고 줄다름질하는 호외 배달부의 소란한 종소래 호외를 읽고 난 뒤의 흉흉한 인심 그들을 사고 도는 무거운 공기…이것은 우리 족속에게 일대시련을 주는 것이라 하면 너무나 가혹치 아니할까! 파멸의 지함으로 떨어지려하는 조선민족아!…(중략)…그러나 동포야! 낙심치 말라 우리의 두뇌가 결코 우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때 아닌 안개가 끼어 잠간 도를 잃었음이다. 아! 조선 민족아! 나아가자 개척하자! 환경과 싸우자. 열정아(熱情兒)” (1925년 7월 24일자 3면, 자유종-아 이것 무슨 시련인고)




1925년 7월 17일자 호외 제2호  




위기 절박한 칠천여 생령(生靈)




 1925년 7월 18일자 임시호외 2면




독도 침수 가옥 전멸




1925년 7월 24일자 호외 2면




  집중폭우는 서울뿐 아니라 조선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이재민 구호에서도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 소방대 호외 기사는 총독부에 의해 압수됐습니다.

 “작 15일 오전에 본사에서는 김해군 대저면 향도(向島)  수재에 대하여 호외를 발행하였었는데 그 일부분이 당국의 기휘에 저촉된바 되어 압수를 당하였습니다.” (1925년 7월 16일자 2면, ‘본보 호외 압수’)




1925년 7월 15일자 2면  




남도(南道) 희유(稀有)의 대 수해


낙동강 향도(向島) 전멸

삼천 주민이 생사불명

제방 붕궤로 침수는 경각간

– 14일 오전 귀포발 철도국 입전


식물(食物)과 음료수 절핍으로 대공황

– 밀양에서 본사 부산특파원 김용진(金龍鎭) 발전


침수 삼천, 도괴 천여 호

– 삼랑진에서 본사 밀양지국 특파원 발전

◇이상 작조(昨朝) 호외 재록 ◇


1925년 7월 15일자 호외, 피난민 차별구제 – 구포 청년과 일 소방대 대 충돌

“14일 새벽 1시 김해 향도(向島)의 제방이 붕괴돼 섬안의 다수 주민의 생명이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하자 구포 소방조와 구포 청년회에서는 이재민을 구호하기 위해 어선 두 척으로 현장에 급행했는데 소방대는 이재민 가운데 일본인 만을 구하고 조선인은 구하지 않자 청년회가 크게 분개하여 결국 소방대와 일대 격투가 벌어져 양측에 부상자도 생겼는데, 물난리 이외에도 싸움이 벌어져 현재 극히 혼란된 상태라고 한다.”  (정진석 편, ‘일제시대민족지 압수기사 모음1’, LG상남언론재단, 1998, 282쪽) 


홍수 피해에 무성의하게 대처하는 총독부를 질타하는 사설도 총독부에 의해 삭제됐습니다.




1925년 7월 22일자 1면 사설




“천재와 조선의 참상 – 조난 형제를 구제하여 부흥사업을 성취하라

7월 12일 있었던 을축 대홍수로 남한 일대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다. 7월 18일에는 용산과 뚝섬 일대가 완전 침수되었고 이튿날은 광주의 선리 주민 292명이 익사했다. 경부선은 10일간 불통이었다. 이 같은 홍수 피해에 총독부는 무성의하게 대처하고 있다. 재작년 일본에 대지진이 있었을 때 조선인들이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빈약하나마 능력껏 구제의 손길을 뻗쳤었다. 그러나 지금 조선에서 홍수의 피해로 각지에서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총독부와 일본인 거류민들은 모른 척하고 있다.” (정진석 편, ‘일제시대민족지 압수기사 모음 2’, LG상남언론재단, 1998, 272쪽)


  수해 현장에서 나눠준 주먹밥 한 덩이로 도난사건이 줄어든 조선 사회의 세태와 관련해 위정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설은 총독부에 의해 압수됐습니다.




1925년 7월 27일자 1면 사설




잔인한 사회상 – 이재민을 수용하는 결과 도난이 6할(六割) 감(減)


“대홍수 피해 이후에 도난사건이 줄어들었다. 이재민 수용소에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 조직과 재산 제도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재민 수용소에서 제공하는 주먹밥에 소금을 찍어 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도둑이 60%나 줄었다는 것은 조선의 사회가 주먹밥 한 덩이를 구하지 못하여 도둑질하는 세태임을 알 수 있다.”  (정진석 편, ‘일제시대민족지 압수기사 모음2’, LG상남언론재단, 1998, 274쪽)


  이들에 대한 동아일보의 의연금 모집은 7월 19일부터 25일까지 계속됐습니다.




1925년 7월 18일자 2면 사고




우부(又復) 습래한 연강 수해와 3사 연합 구위반 활동


“본사는 마포 강서 공덕리 동막 일대를 담당”




1925년 7월 18일자 3면 사고




의연금 모집 – 수해 이재동포를 위하여


“어려운 생활로서 의외의 대천재를 만나 어찌할 길을 찾지 못하는 수재민에게 뜨거운 동정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로써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돕고자 동포에게 호소합니다. 동아일보사”


  의연금은 동정금 4631원 2전과 동정금 취급기간의 예금이자 1원 57전 등 모두 4632원 59전이 들어왔습니다.  이 의연금은 한강 연안 구제품 구입대금으로 2555원 64전, 낙동강 연안 구제품 구입 대금으로 1114원 23전, 수송 및 분배 비용으로 766원 70전, 소년 위문반 김기전(金起田)에게 30원, 서울청년회에 10원, 잡비로 131원 30전, 잔액 24원 30전을 사용했습니다.




  1928년 9월 함남을 중심으로 한 관북대홍수 때는 먼저 호외를 통해 수해 상황을 알리는 동시에 구호반을 파견하고 500원을 구제금으로 내놓으면서 모금을 위한 사고를 실었습니다.


“함남 수해 참상에 대한 호외를 작일 오후 1시 발행 시내 독자에게 배부” (1928년 9월 4일자 1면)




1928년 9월 5일자 1면 사설 




동포애를 발휘할 시기 – 수해 구제금을 보내자


“홍수 일퇴후의 사토를 밟다가 빠지는 동포를 구하려던 동행도 마저 빠져 양인이 같이 익사하는 일도 많다함은 참상의 극을 정(呈)한 함남의 소식이다. 아, 이것이 동포의 난을 보고서 좌시하는 우리에게 주는 일편의 암시적 교훈인가. 위난에 든 동포를 구출코자 함은 이편의 적심(赤心)의 표현이다.”




1928년 9월 5일자 1면 사고    


관북 수해 이재동포 구제금 모집




1928년 9월 5일자 2면 




본사에서 구호반 조직 – 제1대 재지(災地)에 급행




1928년 9월 8일자 2면




구제물품 휴대코 제3구호반 급행




1928년 10월 31일자 2면 




관북일대 12군 3만여 재민 구호 – 구호반 출동도 전후 8대, 총 호수는 6398호 – 본사 구제사업 일단락, 동족애를 체험코 감격에 우는 이재동포


“본사에서 관북수재의 참상을 직면하여 이재동포의 곤경을 만분의 일이라도 완화시키고자 하는 미충을 발표하자 만천하의 동정이 답지하여 예상이상의 성적을 나타내 본사에서는 제7대 구호반까지 출동시켜 응급구호를 마치었으나 동정금이 계속 답지해 다시 제8대의 구호반을 조직, 함남 일대 12개 군의 피해지 동포들을 구호했다.




 동아일보의 수재구호사업에 미국의 동포들도 함께 했습니다.




1928년 11월 10일자 2면 




관북 이재민 구호로 현금 1천원을 환송, 위문 전보와 함께 본사를 통하야 – 재미동포의 동족애


  “본사에서 관북 수재 구제사업을 하는 보도를 보고 미국 뉴욕의 동포들이 삼일신보사를 통해 1천원을 본사에 보내왔다.”


  다음해 1월 구호활동을 결산하면서 동포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구제금은 5만239원 56전, 물품은 8161점에 달했습니다.




1929년 1월 26일자 1면 사설




 관북 수해구제금 결산에 제하야 – 2천만 동포에 감사하노라


“작년 9월 관북 일대에 긍한 홍수의 재해는 실로 근래 희유의 대 참사였다. 1천여 명의 생명이 희생되고 무수한 가옥과 가축이 유실되었으며 수십만 정보의 전답이 매몰되었다. 본보는 일찍이 재해지에 특파원을 파견하야 참황을 조사케하는 한편 동포 제위로부터 끓는 정열로 나오는 동정금 5만2백여만원을 모집하여 3개월 간 전후 7차에 걸쳐 구호반을 파송하여 분배하였다. 운반비 이외의 전 비용은 본사가 부담하고 모금액 전액은 이재민에게 전달됐다. 여기서 감사한 것은 국내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걸인들까지도 모금에 참여한 끓는 동족애요, 이재민 지역 동포들의 발분망식적 활동이다.”




1929년 1월 26일자 5면 




관북 수해 구제 결산 – 7반이 활동, 4회에 분배




1929년 11월 14일자 7면   




관북수해 구제 동정금 결산, 일월이후 자진동정금


수입지부(收入之部)

 일금 2113원 78전

지출지부(支出之部)

일금 2113원 78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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