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하늘을 날았던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1901~1930). 그는 1901년 3월 19일 경성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중퇴한 뒤 1920년 8월 도쿄 고쿠리(小栗)비행학교에 입학, 입학 3개월 만인 11월 비행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창남에게 특별한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1921년 3월 29일자 3면
금춘(今春)에 학창(學窓)을 출(出)하는 동경의 유학생
법률과 출신이 역시 반수 이상
안창남의 비행졸업반이 한 이채
고등사범 출신 없음은 한 유감
동경 부근 각 학교의 학년 시험은 3월 20일 전후로써 거의 다 끝나게 되었음으로 각 학교의 졸업생들도 거의 결정이 된 바 금년에 졸업되는 조선 유학생의 현상을 보건대 각 학교를 통합하여 36명 졸업생이 날 모양이며 이를 학과별로 보건대 36인 중의 18인, 즉 반수는 법과이며 기타 농과가 세 사람, 공업에는 고등공업공과학교 전기 학교를 병하여 다섯 사람, 경제 및 상과대학이 세 사람이고 기타에는 원예 의학 신학 등이 각 한 사람이며 그중에서도 제일 긴급하고 제일 필요한 학과로서 제일 적막한 느낌이 있음은 고등사범의 출신이 없음인대 고등사범으로 말하면 다만 금년 졸업생 중에 한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현재 재학생도 극히 소수인즉 이로부터는 고등사범 지원자를 많이 내어야하겠다는 것이 유학생 간에서도 문제이라 하며 또 금년 졸업생 중에서 특별히 이채를 발하는 것을 소률비행학교를 졸업하는 안창남(安昌男) 군인데 군은 경성 정동 사람이며 조선 사람으로서 비행학교를 졸업한 것은 김경규(金景圭)씨를 효시로 군이 둘째라 하겠더라.
1921년 7월 11일자 3면
신(新) 비행가 안창남
소률비행학교의 조교수
금년 이십세의 조선 청년
조선 사람의 재주가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뛰어나고 조선 민족의 문명이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앞섰던 것은 광휘있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라. 다만 일시의 쇠운으로 한참동안 쇠퇴한 일이 있었으나 원래 탁월한 선조의 피를 받은 조선인은 이제 모든 구속의 멍에를 벗고 세계 민중이 다투는 무대 위에서 장쾌한 그의 재주를 발휘코자하는 중이다.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하여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몇해 전 비행에 뜻을 두고 동경소률비행학교에 입학하여 작년 11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그 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특이한 재주는 그 학교 직원의 인증한바 되여 금년 4월부터 그 학교 조교수가 되여 수다한 일본 청년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중이라.
17인의 선수 중
명예잇는 월계관
공중에는 구속이 없다, 누구든지 자유로 비행할수있다 하던 세상도 비행술이 왕성함을 따라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구속이 생기게 되었다. 금년 4월 25일 일본 항공국에서 비행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여 아무리 유명한 비행가라도 항공국 시험에 합격이 되어 비행면허증이 없으면 절대로 공중을 자유로 비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비행계에 명성이 자자한 민간 비행가 17인은 앞을 다투어 시험을 보는데 그 중에 안창남군도 섞이어 시험을 보게 되었다. 5월 16일부터 18일까지 삼일동안 시험이 있었는바 나는 재주를 부리는 그들에게 시험을 시키니만큼 그 시험은 심히 어려웠으니 첫째는 원거리 비행이니 동경에서 송호(松戶)지방까지 갔다가 다시 동경으로 돌아오는 것이요 둘째는 이천미터나 되는 공중을 나가서 한시간 이상을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요 셋째는 오백미터의 공중에 올라가서 돌연히 기계의 모든 활동을 정지시키고 고요히 내려오는 것이라. 이 시험에 일본 제일류의 비행가들도 뒤를 이어 락태되는데 오직 안창남군은 모든 노련한 비행가를 압도하고 후지나와라는 사람과 함께 제일 먼저 합격되어 영광스러운 승리의 월계관은 20세 청년 안창남군의 머리에 떨어지매 당시 일본 각 청년단체는 그를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성대한 화환으로 그의 수고를 위로하였다.
원래 쾌남아
비행가의 천재는 어려서부터 있어
이와같이 세상을 놀래이는 안창남군은 원래 경성 서대문 밖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미동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중도에 퇴학하여 다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원래 천재를 가진 그는 보통 학문을 닦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장난을 심히 하여 선생에게는 꾸지람을 받고 동무 중에는 장난꾼으로 지목을 받더니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도에 퇴학하여 동경으로 간 후 처음에는 대판지방에서 자동차에 관한 연구를 마친 후 육군 비행기 제작소에 가서 비행기 만드는 법을 자세히 배우고 마지막으로 소률비행학교에 가서 비행술을 배웠는데 본국에서는 그와 같이 장난을 좋아하던 그가 과학에 뜻을 둔 후로는 극히 침중하고 엄숙한 청년이 되여 그 전과 판이한 사람이 되었다.
장래의 포부
비행술을 교육코자
그러나 금전이 문제
넓으나 넓은 관동평야와 검은 연기를 뿜는 동경 시가에 구름을 헤치고 장쾌하게 뜬 비행기 속에는 때때로 안창남군이 타고 있었다. 이백만 동경 시민을 내려다보며 창천에 떠있는 그의 가슴에는 응당 청년의 더운 피가 끓었을 것이다. 그는 말하되 ‘모든 과학이 다 그렇지마는 더욱 비행술에는 정신이 심히 쓰이는 것이니 손으로는 기계를 부리고 바람의 방향을 보아서 키를 돌리고 푸로펠라의 소리를 들어서 만일 병이 낫으면 임시조처를 하는 터이라 만일 자칫 몇분 동안만 정신을 딴곳에 쓰다가는 금시에 비행기와 함께 저 세상으로 떠날 것이라 그런고로 정신을 해하는 술과 담배는 물론이요 여자도 엄금이라 나는 더욱 공부를 계속하여 장래 조선 청년에게 비행술을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돈 일만원만 누구의 보조를 받았으면 비행기 한채를 내 눈으로 보아서 사서 비행술을 가르칠터이나 자기의 현재 형편으로는 어찌할수 없다’고 애석하여하는 얼굴로 말하더라.
1921년 7월 12일자 1면
조선의 과학계를 위하야
항공가의 출생을 축(祝)
우리 조선 사람의 가슴에도 다른 문명 열국의 사람과 다름없는 붉은 피가 흐르며 이상의 불이 붓는 것은 사실이라, 그러나 우리가 과연 온갖 자유를 희망하며 평등을 희망하며 온갖 권리와 행복을 요구하며 추구할진대 다른 문명 열국의 사람이 힘써 행한 바를 또한 힘써 행하여야 할 것이며 그 힘써 이룬 바를 또한 우리 조선 사람도 힘써 이루어야 할 것이니 이는 무엇보다도 명백한 사리이라. 다른 문명한 사람과 같이 행복 누리기를 희망하는 자가 그 행복의 소이연(所以然)을 연구하며 실현하지 아니하고 그 결과만 희망함이 어찌…(중략)…소률비행기학교를 졸업한 조선의 제1 항공가 안창남군은 과연 항공계의 제1인일 뿐 아니라 조선에 자연과학을 촉진하는데 장차 비상한 영향과 비상한 동기를 작(作)할 것이라. 이 조선 형제에게 해방의 참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니 그 어찌 오인의 경하할 바 아니리오…(중략)… 오인은 조선인의 전○를 위하야 또는 인류의 새로운 문명을 위하야 안 군의 건강을 축(祝)하는 동시에 그 예(例)에 종(從)하는 조선인이 배출하기를 희망하여 마지아니하노라.
뒤이어 동아일보는 ‘안창남군 고국방문 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1921년 11월 27일자 3면
비행가를 위하여
2만원 안창남씨의 후원회에 모집
비행가 안창남씨의 후원회에서는 지난 12일 밤에 시내 해동관에 열리었던 환영회 석상에서 유지 제씨의 발기로 되었는데 우선 비행기를 사드릴 돈 1만5천원과 기타 부속품값으로 5천원을 예산하야 합계 2만원을 모집하기로 되었었는데 모 유력자는 한사람이 5천원을 내인 일까지 있서서 이미 예정의 액수가 다 모집되었다는데 이는 실로 조선에서 처음 있는 일 일뿐아니라 비행기계를 위하여 지극히 기쁜 소식이라 하겠으며 그 후원회가 영원히 계속되야 비행기에 공헌이 많기를 일반은 희망한다더라.
1922년 5월 1일자 3면
고국방문 대비행
재동경 安, 金 양씨 장거
오월 중에는 기어히 조선을 방문
동경소률비행학교 교수 안창남씨는 고등비행으로 유명하며 더욱히 야간비행으로는 일본에서 셋째이라 하며 명성이 매우 많은 터인데 그는 작년부터 모국방문 비행을 하기 위하여 오래동안 계획 중이더니 이번에 여러 가지 준비가 되고 비행기까지 준비되었음으로 5월 중에는 그의 제자되는 김용서씨와 같이 동경을 떠나 경성을 방문하고 계속하여 각 지방에도 비행할 터이라는데 이와 같이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에서 비행기를 탐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라 씨의 이번 계획은 매우 장쾌한 일이라 하겠으며 조선 내지 동포의 다수 응원을 바란다더라(동경 특전)
1922년 5월 2일자 1면
조선 공중의 신(新)현상
安, 金 양씨의 장거
(전략) 조선인으로서 조선 공중에서 비행하게 되는 것은 초유의 성사이라 이에 대하여 오인은 무량한 감개가 유(有)하노라…(중략)…미국인 ‘스미스’씨를 위시하여 이태리 비행가 일본인 비행가의 방문이 있었으나 경이의 정(情)보다 차탄의 감이 기(起)하였노니 이는 반도의 공중을 조선인으로 정복치 못하여 신묘한 예술을 조선인으로 발휘치 못하고 다 못 방관하며 경규(驚叫)할 뿐이라…(중략)…이러한 관점과 입장에 있어서 금회 安, 金 양씨의 비행 장거는 조선 사회의 신 현상이며 비행기 사상에 기록적이라 반도의 공중도 이제야 주인의 ○○를 대(待)하야 일층의 광채를 더할 것은 물론이며 운무(雲霧)에 배회하는 조선 남아의 웅자를 앙시(仰視)할 시에 조선 동포의 열렬한 환호가 될 것도 사실이라.(후략)
1922년 10월 19일자 3면
동아일보 주최
안창남군 고국방문 대비행
비행가 안창남씨는 우리 조선 사람 비행가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올시다. 어느 의미로 말하면 공계(空界)의 대표적 조선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우리가 이때까지 조선의 공중에서 이 용맹한 비행가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 것은 얼마나 유감이라 하겠나이까 방금 동경의 소률비행학교에서 교사로 다수한 비행가를 양성하는 안씨는 한번 반가운 고국의 공중에 나라보고저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지난 여름부터 여러 차례 본사에 향하여 직접과 간접으로 주선하여주기를 간청하였음으로 본사에서는 이 일이 비록 비상히 거창하고 다수한 비용이 드는 일이지마는 그 비행이 극히 의미 깊은 것임을 생각하고 여러가지로 생각한 결과 각 사회 유지의 열렬한 찬동을 얻어서 주최로 거행하기를 결정한 바이라. 안씨의 비행기는 본사와 상의한 결과 이미 준비가 되었음으로 관청의 허가와 기타 착륙장의 준비가 되는대로 아무쪼록 속히 거행하고저하오니 동포 제씨는 안창남씨의 이 일에 대하여 따뜻한 동정과 깊은 사랑을 드리우소서. 자세한 일은 추후 발표하오리다.
동아일보는 안창남 고국방문 비행을 거족적으로 개최하기 위하여 10월 29일 YMCA에서 박영효 권동진 등 47명으로 ‘안창남 고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소를 동아일보사 내에 두었습니다.
1922년 11월 22일자 1면 사설은 ‘안창남 고국방문비행’의 의미를 ‘아! 2천만 형제자매여 금일 조선인의 노력할 바 무엇이며 환희할 바 무엇인가 감격할 바 무엇인가. 양전옥토(良田沃土)를 사기 위하여 분투할 것인가 고대광실(高大廣室)을 설(設)하야 만족할 것인가. 미녀소첩을 득하여 귀애(貴愛)할 것인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사람의 가치를 발휘치 못하며 사람으로서 사람의 반열에 참가치 못하고…(중략)…안창남군의 1회 비행이 직접으로 오인의 모든 생활을 개혁 발전한다는 것은 아니나 간접으로 자중자신(自重自信)할 기회를 작(作)할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 하노니…(중략)…조선인도 노력하면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조선인도 분투하면 이와 같이 될 것이라 하는 것은 실지적 교훈으로 오인의 두뇌에 인각(印刻)할 것이 아닌가’고 밝혔습니다.
1922년 11월 22일자 1면 사설
고국방문 비행에 대하여
반만년 래(來) 초유한 성사
1922년 12월 4일자 3면
13도 유지여! 회원되소서
우리 조선 초유의 장쾌사인 안창남군의 고국방문 비행과 아울러 안군이 비행계에 진력하려는 미거(美擧)를 원조하기 위하여 발기된 본후원회에서는 13도의 유지 제씨가 회원되시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1인이라도 다수히 입회하시어 1분(分)이라도 더 많이 원조를 하여 주소서. 회비 2원 이상을 내시면 통상회원, 동 10원 이상을 내시면 특별회원, 동 50원 이상을 내시면 명예회원이 되십니다. 회비는 우편이나 직접으로 본회 사무소에 보내시면 즉시 회비 금액과 회원 씨명을 동아일보에 발표합니다.
경성부 화동 동아일보사 내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후원회
안창남은 고국방문비행 1개월 전, 일본 도쿄 – 오사카 간 우편비행에 성공하여 또한번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살렸습니다. 안창남은 “운수는 하늘에 맡기고 다만 죽을힘을 다하여 다행히 성공함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1922년 11월 8일자 3면
공중의 용자(勇者) 안창남군
동경 대판간 우편비행에 성공
고장 생긴 비행기와 험악한 천후에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무사히 성공
동경 대판의 우편비행을 거행하는 제4일 되는 6일의 동경은 아침부터 날이 흐리고 바람조차 순치못하였으나 용감한 22세의 조선인 비행가 안창남씨는 고장있는 비행기를 수리하여가지고 기어코 처음 뜻을 이루고저 중지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오정 48분에 동경 대대목연병장을 떠나 오후 5시 10분에 험악한 1400리의 공중을 무사히 돌파하고 재류 조선 사람의 열광 덕으로 환호하는중에 무사히 대판 성동연병장에 도착하여 조선 사람 비행가로 최초의 장거리 비행에 성공하였더라. 비행기에서 내린 안창남씨는 희색이 만면하여 비행 중의 경과를 말하되 동경을 떠난 후 날은 더욱 흐려서 상근의 준령은 구름에 가리워 보지 못하였으며 오후 3시 풍교를 지날 때에는 구름이 약간 개였으나 사일시의 공중을 지날때 별안간에 비행기의 발동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고로 만사는 이제 고만인가보다 발동기의 고장이 정히 심하면 할일없이 중로에서 불시착륙을 하리라고 하륙하기 쉬운 해안선으로만 조차서 진행하는 중 팔일시 부근에서는 다행히 발동기의 이상한 소리도 없어지고 비행기의 운전은 여상히 되었으나 험악한 바람에 궂은 비까지 겹쳐서 지척을 분별할수없이 비상히 곤란하던 중 별안간 눈앞에 높은 산이 막히는고로 다시 1500미터의 높은 공중으로 솟아서 나가는 중에 눈 아래에서 거울같이 무엇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이 비파호이던 것입니다. 그 후에 또 얼마를 진행하노라니까 산악이 련하여 눈 아래에 지나가며 한줄기 강물이 보이기에 이것이 정천(淀川)인 줄을 짐작하고 비로소 대판에 가까이 온 줄 알았습니다. 사일시 부근에서 비행기에 고장이 생긴 이후부터 해안선으로만 나갔으며 또한 구름이 뭉퉁하야 대판 근처에 오기까지에는 전혀 방향을 정할수가 없어 운수는 하늘에 맡기고 다만 죽을힘을 다하여 다행히 성공함을 얻었습니다 하더라. (대판 특전)
1922년 11월 15일자 3면
우편비행에 성공한 안창남군
11일 동경 대대목연병장에서
사진의 우는 대판을 떠난지 3시간 25분만에 동경에 도착하는 안창남씨가 11일 오정 30분 수만 군중의 환호 중에 대대목연병장에 내리려하는 광경이오, 아래는 연병장에 내린 안씨가 비행기에 싣고온 우편물을 들고 비행기에서 내릴 때의 광경.
1922년 11월 25일자 3면
안창남씨 수상
거번 우편비행의 성공으로
수교사에서 금 삼천원 상금
향시에 동경 대판간의 우편비행에 안창남군이 참가하여 명예로운 성공을 하였다함은 이미 보도한바어니와 26일 수교사(水交社)에서 각각 성공한 비행가들에게 상금을 줄터이라는데 상금은 왕래 두 편에 무사히 성공한 사람에게는 각 3천원씩을 주고 한쪽길만 성공한 사람에게는 1천5백원씩을 줄터이라는바 상을 탈 사람의 성명은 아래와 같더라.
▲ 왕복비행 성공자 안창남 ▲ 石橋勝波 ▲ 謝文達 ▲ 高岡文三郞 ▲ 島田武夫 ▲ 後藤勇吉 ▲ 宮登一 ▲ 大倉淸雄 ▲ 편도 성공자 高場藤次郞 ▲ 藤原외 10인
동아일보 1922년 11월 18일자 3면
동아일보사 주최
안창남군 대비행
기체와 기사 출발
안창남씨의 고국방문 대비행
여러 가지 준비를 방금 진행 중
비행기는 하일(何日)? 방문지는 하처(何處)?
(사진 : 안창남씨가 사용할 ‘뉴폴’식 비행기)
1922년 12월 4일자 3면
고국방문 비행의 반향
평화의 이기로 장려
안창남군 비행 후원에 대하여
이상재(李商在)씨 담(談)
안창남씨 고국방문 비행에 대하여 이상재씨는 말하되 “조선 사람의 힘으로 이때까지 과학상 아무 성적이 없는데 조선 청년이 그와 같은 재주가 있다니까 매우 좋소. 그러나 남들은 비행기가 몇천대씩 있다는데 우리 조선 사람에게 겨우 한 사람쯤 있는 것이 그리 장할 것이 없으나 아무렇든지 매우 좋소. 그러나 너무 칭찬을 하면 안창남군이 하나님에게 이미 상금을 다 받는 것이니까 실지로 후원을 하는 것이 좋겠소. 대개 구미 각국에서도 비행기가 발달되여 인류 문명에 대한 공헌이 많으나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마는 어데까지든지 평화스러운 생각으로 사람에게 이롭게 쓰면 좋겠고 배우는 사람도 그러한 마음으로 배워야 하겠소. 만일 그렇지 못하고 남하고 싸우기 위하야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배운다 하면 못 쓰겠소. 비행기에 우편물을 실어다가 각사람에게 기쁜 소식이나 긴요한 말을 알려준다 하면 매우 좋지마는 만일 비행기에 폭발탄 같은 것을 실코 다니면서 사람 죽이는데 쓴다 하면 그러한 문명은 우리 인류를 불행케 할 뿐이라 나는 찬성치 아니하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조선 사람은 반드시 좋을 뜻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세계 문명에 공헌이 있기를 바라오” 하더라.
1922년 12월 5일자 3면
안창남군 금 5일밤 경성에 도착
비행가 안창남씨는 동행 두 사람과 함께
3일 동경을 떠나 4일 저녁 부산에 도착하여
하루밤을 자고 금 5일 오전 10시 부산을 떠나
오후 7시50분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입경하기로 결정되었더라
각 사회 공전(空前)의 대환영 준비
후원회원의 열성
성대히 환영할 방법을 결정
안창남씨에게 화환을 선사
장치 중의 금강호
작일부터 여의도 격납고에서
안창남군이 탈 뉴풀식 비행기는 재작일로 노량진 여의도에 도착하여 작일 오전에 고교기사와 사단사령부 사람이 입회하고 일일히 상고한 후 여의도 육군비행기 격납고에서 주야 병행으로 꾸미는 중이라더라.
경성 전시를 거(擧)하여
성대한 안창남씨의 환영
굉장한 금일밤의 정거장
대환영회 개최
7일 오후 7시 공회당에서
유지 인사의 다수 출석을 희망
1922년 12월 6일자 3면
현해(玄海)가 동(動)하는 만세성 중
안창남군의 부산 착발
안창남씨 일행의 부산 도착과 성대한 환영
부산 인사의 열성으로 성대한 환영회 개최
부산 유지의 열성
부산에 비행기를
열심으로 희망해
입경 후 평양에
항공대를 방문
안군은 비행의 천재
동행하는 소률씨의 감상
안창남씨의 일에 대하여 당초 그의 선생이던 소률(小栗)씨는 말하되 “이번의 비행은 안군 개인이 조선사람의 자랑이 될뿐 아니라 우리들 안군을 아는 사람도 영광으로 생각하노라. 안군의 비행술이 일본 안에서 제일류됨은 무론이오 확실한 비행술의 천재로 이번의 우편비행에 명백히 그 재주가 증명되었으며 나는 장래에 조선에 다수한 안창남군이 생기리라고 믿으며 또한 그리되기를 희망하는 바이오. 최후에 조선의 여러분이 이번의 비행에 진력하심에 대하여 나는 안군의 친구로서 깊이 감사하는 바이라” 하더라.
철저한 후원을 간망(懇望)
‘스미스’에 대일 것은 아니오
조선인이라 함에 참말의 의미
한용운(韓龍雲)씨 담(談)
안창남씨 고국방문 비행에 대하여 한용운씨는 말하되 구미 각국에서는 비행기가 극히 왕성하여 도처에서 그것을 쓰게된 오늘날 조선인 중에 오직 한 사람인 안창남군이 처음으로 조선의 하늘에서 날는다는 것은 일변 반가운 동시에 일변 남의 형편과 내 형편을 비교하여 통절한 수치를 느끼는 바이외다. 안군의 장래를 위하여 금번 비행을 성대히 하기 위하여 우리 조선 사람 중에서 후원회가 발기되었는데 그 후원회는 조선인 각 계급의 명사를 망라한지라 더욱 정성을 다하여 금번의 비행을 성대히 할뿐아니라 아무쪼록 그에게 완전한 비행기를 사주어 세계 비행계에 새로운 기록을 짓고 조선인도 문명한 사람의 행렬에 들게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즉이 미국 비행가 ‘스미스’를 환영하여 본 일이 있으나 이번의 일이야 어찌 그런 일에 대일 수가 있습니까. 설사 재주가 미국 비행가 ‘스미스’만 못할지라도 조선인이 저와 같이 한다는 의미로 심절한 환영이 있을 줄 믿는다 하더라.
1922년 12월 7일자 3면
◇ 기차에서 내리는 안창남군 (상) 〓 5일 밤 남대문 정거장에서
공전의 대 환영 중, 안창남군 입경
고국로(路) 일천리에 연긍(連亘. 길게 뻗친)한 만세성(萬歲聲)
남문역두에 열광한 수만 군중의 환호
인산인해의 남문역
두어시 전부터 환영 온 군중
일행의 도착 전 군중의 조급
산설고물선 이역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달 저녁에 고원을 그리던 몸으로 한번 고국의 산천만을 밟아도 희비의 끓는 정을 금치못하려든 하물며 2천만 형제의 뜻깊은 환영 가운데서 고국의 푸른 하늘까지 높히 솟아 수륙공 삼계에 가득찬 ○○의 소리를 듣는다 함이랴. 5일은 이번에 고국방문하는 공중의 용사 안창남씨의 입경한 날이라. 의미 깊은 본사의 주최와 2천만 형제의 대표로 각반 사회의 열렬한 후원 아래에서 5천년 사상에 새로운 기록을 더할 공중을 정복하는 장절쾌절한 막을 연출할 고국방문대비행의 주인공은 언제나 입경하는가 이에 대한 본사의 연일 기사에 대하여 긴장에 긴장을 더한 만도의 인심은 이를 형용할 말이 없을 지경이라. 12월 5일을 손꼽아 기다리기에 손○이 풀렸다함은 지나간 말이라 하거니와 7시 50분을 기다리기에 시계 가진 사람은 호주머니가 다를 지경이었다. 전차 수효가 적어져서 교통이 매우 불편하게 된 우에 더욱 너도나도 다투어 남대문역을 향하는 사람이 물밀듯하는 통에 넓은 거리에는 실로 여간한 혼잡이 아니었다. 두어시간 전부터 남문역 넓으나 넓은 마당에 들어찬 수만군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각 단체의 높이 든 환영의 깃발은 저녁바람에 날리고 수천 학생의 정성을 모은 환영의 등불은 때아닌 꽃밭을 이루었다. 조요한 불빛에 화환이 빛나고 웅장한 음악에 장내가 뒤집히니 물끓듯하는 광경이 실로 전에 없던 대성황이라. 우리의 용사 안군을 비롯하여 소률 방정환씨 등 일행을 태운 기차는 한시간 연착으로 8시 50분에야 하늘이 무너질듯한 만세소리가 일어나는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정거장 구내 대합실 광장 등 이 골목 저 골목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남산이 명(鳴)하는 만세성
공중에 떠서 차에 내린 안군
환영 절차를 마치고 평양에
차에서 내린 일행은 도무지 발을 옮길수가 없었는데 맞으러나간 본사 기자와 다수한 유지들은 안군을 전후좌우로 옹호하여 거의 공중에 받들어 간신히 구름다리를 지났는데 각각으로 밀리는 군중의 물결은 도로혀 무서울 지경이었으며 앞뒤를 이어 일어나는 만세소리와 본사에서 특별히 만들어 일반에게 나누어준 수만개의 깃발은 하늘을 덮은 듯하였다. 본사를 비롯하여 본 대회 후원회 조선신문사 국수회 등 여러 단체에서 환영하는 뜻으로 아름다운 화환을 기증하니 기골이 탁발한 안군은 얼굴에 넘치는 기쁜 웃음과 만강에 타오르는 감사한 뜻으로 일일히 수응하였다. 잠시 역장실에 들어가서 본사 사장 송진우씨로부터 간단한 인사가 있었고 이어 조선신문사장 목사경장(牧山耕藏)씨 외에 후원회 국수회 간부 일동 기타 각반 사회를 대표한 유지 제씨의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에 구내를 지나 정거장 앞에 광장에 나오니 머리만 아물 보이는 군중의 만세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에 안군은 환영하여주는 일반 형제에게 대하여 이 사람이 일본에 있을 때에 하루도 끊일 사이 없이 바란 것은 비행기를 타고 고국의 형제를 만나보려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이렇게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되었으니 무엇이라고 감사한 말씀을 드려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일히 여러분의 다수한 손목을 잡아보고 싶습니다마는 경우가 허락지 아니하여 뜻대로 못하니 용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라는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에 특별히 준비한 자동차를 몰아 여관에 들어 잠깐 쉰 뒤에 예정과 같이 다시 11시 10분차로 평양을 향하여 출발하였더라.
1922년 12월 9일자 3면
비행장은 일반에 공개
과학에 관한 취미와 지식을 보급케 하고저
10일의 여의도 비행장에는 누구든지 무료로 관람
10일의 안창남씨 제1회 고국방문비행 당일에는 여의도 비행장에 와서 비행기의 실지와 쾌활한 용사의 공중에 오르고 나리는 광경을 가까이 보는 이에게는 상당한 관람료를 받기로 당초에 후원회 위원회에서 결정하였으나 본래 이번의 고국방문비행으로 말하면 민족적으로 응원하는 아래에 거행되는 것일뿐아니라 이번에 일반 과학에 관한 지식과 취미를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보급케 하고저함이 그 본의임으로 다시 협의한 결과 당일 비행장에서는 한푼의 입장료를 받지않고 일반에 널리 공개하기로 결정하였음으로 전차비나 기차삯만 가지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하게 되었더라.
(사진설명) 안군의 환영회
정담에 꽃이 핀 식탁과 감격에 쌓인 안군의 답사하는 태도 〓 7일 밤 공회당에서 〓
경성과 인천 간에 왕복비행을 실행할 예정
기차 이용이 편의
비행장에 왕래하는 가까운 길
왕복승차권으로 임시 열거에
임시열차 운전
조석에 두차례씩
보통 열거도 편리
열성과 감격의 횡일(橫溢, 흘러 넘침)로
성황을 극(極)한 안군 환영회
7일밤 당곡 천정 공회당에서
2백여명 유지가 모여 대환영
윤치호 선생은 그러나 이 행사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당시 표시했습니다.
“안창남이라는 청년이 일본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매우 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엄청난 일은 아니다. 안 군이 새로운 형태의 비행기를 발명했거나 1만 명 중에 1명 나올까말까 한 출중한 비행사가 되었다면, 우리 조선인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안 군은 그저 다른 사람이 발명한 비행기의 조종술을 배운 1천 명 중의 1명일뿐이다. 따라서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지난 몇 주 동안 많은 지면을 할애해 그를 치켜세웠다. 안 군이 비행기를 몰고 조국을 방문하는 걸 도우려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성금이 걷혔다. 멍청이들 같으니! 이건 조선인들의 유치함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행위일 뿐이다. 안 군이 오늘 비행기를 몰고 날아오기로 되어 있다. 이 비행사에게 비행기 한 대를 사주려고 4만 원을 모았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 1916~1943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1988, 239쪽 1922년 12월 9일 토요일)
1922년 12월 10일자 1면
조선문화사상으로 관찰한 안군의 비행
과학운동의 촉진을 망(望)함
금 10일은 안창남군의 제1회 비행일이라 오인의 염두에는 일층 새로운 감상을 기(起)케 하는 도다…(중략)…본사의 주최한 소지가 결코 일시적 인심수람의 정략이 아니오, 적어도 조선 문화사에 일 기록을 치(置)할 의미가 있다하면 이상 오인이 제언한 일례의 ‘과학운동’ 같은 일신 기운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망하는 동시에 이와 같은 실질적 효과가 안 군의 평소 간곡한 충정에 부(副)하는 일도(一途, 하나의 길)인가 생각하는 바로다.
1922년 12월 10일자 3면
동아일보 주최로 노량진 여의도 비행장에서
금일! 안창남군 고국방문 대비행
오전 10시부터 제1회 경성방문, 제2회 경성 인천 왕복비행, 제3회 고등비행
관람 무료
3회에 분한 금강호의 장기
만도의 인사가 모인 여의도 비행장에
금일 쾌기를 자랑할 안창남군의 대비행
관(觀)하라! 차(此) 역사적 초유의 광경을
기능껏 열성을 진(盡)하여
금일의 비행을 하겠다하는
시험비행에서 성공을 한 안군
학생만 무려 수만
금일 여의도에 모일 관중은 얼마
넓은 벌판이 오히려 좁아질 염려
중등교와 보교(普校)학생
남학생만 만명이 참가
여생(女生) 수천
각 학교에서 대개 참관
◇ 시험비행을 하기 전의 안군, 8일 여의도에서
고국동포에게 충정을 소(訴)하노라
숙원이던 방문비행의 제1일에 임하여
금일을 당하기까지의 지난 일과 감동된 일
비행계의 장래와 고국동포에게 바라는 일
안창남 수기
정깊은 고국에서 형제와 함께 지내지 못하고 이역타관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애달픈 심정이야 누구나 더하고 덜함이 있겠습니까마는 그중에도 남달리 고독히 지내는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고 일본의 공중을 날아다닐 때마다 멀-리 서편 하늘을 바라보고 ‘언제나 언제나 내 고국에 돌아가 내곳의 하늘을 날아볼고’하야 고국 그리운 정에 혼자서 눈물을 지우며 지냈습니다. 참으로 동경이나 대판같은 크나큰 시가가 내발밑에 아름아름 내려다보일때 나는 몇번이나 비행기 머리를 서편으로 돌리고 조선쪽을 바라보았는지 아지 못합니다. 내 고국 조선! 이렇게 생각할뿐만으로 벌써 가슴을 뛰놀리던 내 고국에 돌아오게된 기쁨은 참으로 어떻게 말할수없이 어떻게 지탱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더구나 부산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남대문에 도착하기까지 정과 뜻을 다하여 맞아주시는 여러분을 뵈올때 또 여러분이 불러주시는 만세 소리를 들을 때 내몸에는 소름이 쭉쭉 끼치고 아지못할 눈물까지 핑 돌았습니다. 형제의 정리 동포의 정리 무엇보다도 강하고 뜨거운 그것이 내몸을 못견디게까지 소름이 끼치게까지 내 몸과 내 혼을 에워쌀때에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먼-먼-곳에 외롭게 방황하던 어린 고아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다시 안기는 것같은 생각과 느낌밖에 아무 것도 전부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뜨겁게 그렇게까지 반갑게 맞아주시는 여러분이 내가 늘 하루도 잊지못하고 그리워하던 형제임을 생각하면 그냥 그대로 달려들어 오래 그립던 정을 하소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남대문까지에는 시간이 바빴고 남대문에서는 어떻게 한걸음도 내 자의로 할수없이 되어 일일이 인사도 말씀도 드리지 못하게 된 것이 이번 길에 제일 큰 유감입니다. 비행기에 관하여는 이번에 처음 타는 것이 아닌고로 별로 새삼스럽게 할 말씀도 없으나 원래 이 고국방문비행은 년전부터 계획하던 일이나 여러가지 관계로 차츰 밀려서 이번에 동아일보사의 주최와 기타 각 방면 인사의 유력한 후원으로 결정된 일은 기쁜 일이나 비행의 시기로는 몹시 좋지못한 때입니다. 경성에는 남산과 북악산이 있어서 마치 병풍치듯 되어 기류의 형세가 극히 위험할뿐 아니라 바람이 센 것 날이 찬 것 등이 모두 비행에는 적지아니한 장해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보다도 염려되는 것은 비행기입니다. 물론 고국방문비행이 이때까지 밀려온 이유는 내 소유의 비행기가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기술은 아무리 하늘을 뚫는다한들 비행기가 없은즉 그 기술을 부릴 곳이 있지아니할 뿐외라. 자기 비행기가 있어서 자주 연습을 쌓아가지 아니하면 점점 서툴러지는 것이라 항상 그것을 초조히 생각하여오던 터이라 고국방문에 쓸 비행기가 있을 리가 없어 이리저리 여러가지로 주선하여 보았으나 우리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라 빌려주는 사람도 없어서 이날까지 미루어오다가 이번에 학교에 있는 헌 비행기를 간신히 빌려얻게 되어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비행기의 식은 ‘뉴-폴’식인데 크기가 다른 보통 비행기의 반 밖에 되지못하는 아주 작은 비행기이며 80마력에 한시간 110비행마일의 속력을 가진 것이 ○넘어 기계가 경쾌하여서 조종하기에 극히 주의하지 아니하면 위험한 것이라. 다른 이는 별로 타지 아니하던 것이므로 비교적 용이하게 빌어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원래 헌 비행기이라 발동기는 또다른 헌 비행기의 것을 떼어내여서 여기다 뜯어맞춰논 것이여서 다소 불안은 떠나지 아니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헌것 저 헌것을 뜯어맞추어놓은 누더기 비행기인고로 염려가 떠나지 아니하나 동경서도 나는 몇번 타보았고 서울서도 8일에 시험비행을 무사히 마쳤으니까 금일이라도 발동기의 고장만 생기지 아니하면 여간 바람이 분대도 과히 겁일 것은 없습니다. 아무것보다도 마음 아픈 일은 내 마음대로 쓸 내 비행기가 없는 일입니다. 몇해 전에는 조선에 왔던 ‘아-트 스미스’씨의 재주부리는 비행술도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인즉 나는 내 비행기로 연습만 자유로 할수있다 하면 무슨 재주라도 할수있다는 자신을 가졌습니다(이번에도 이 불완전한 비행기로라도 될수있는 재주는 몇가지 해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습을 마음껏 해보지못하고 하고저 하는 일을 하나도 마음껏 해보지 못하는 것이 제일 한되는 일입니다. 이번길에도 비행기만 좋고 발동기만 훌륭한 것이었으면 경성서 떠나 개성 수원 등지뿐 아니라 한숨에 의주까지 다녀오겠는 것을 기계가 완전치를 못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것입니다. 원래 이 비행사업이라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일반 민중 전체로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완전한 발달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개인이 아무리 천재를 가졌다하고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하여도 일반 민중이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열렬한 후원이 없으면 아무래도 그 발달을 잘 이루지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더구나 우리 조선서는 유달리 여러가지 관계가 넉넉치 못하고 여의치 못한 터이라 몇갑절 더 조선사람 여러 어른의 이에 대한 이해와 후원이 없이는 결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아 조선에 계신 여러분- 세계를 통틀어 비행사상의 싹은 우리 조선에서 먼저 싹돋기 시작한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의 조선 청년들이 이 비행술에 특별한 천재를 가지고 있는 것을 기뻐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다-함께 힘을 합하여 이 사업에 힘을 쏟으면 다른 아무 곳의 비행계라도 능히 압도할 수 있는 것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일본 비행학교에도 우리곳 청년이 세사람이나 나에게 배우고 있고 또 그외에도 배우게해달라는 청년이 많이 있습니다. 내마음대로 될수있다던지 또 내 소유의 비행기가 따로 있다면 어데까지든지 내 힘껏 가르쳐드리겠으나 그리도 못하고 그네도 학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용이히 허락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한두사람이 아닙니다. 그럴때마다 넓디나 넓은 비행장 한구퉁이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몇번이나 따라 울었는지 아지못합니다. 아아 이렇게하여 천재를 품은 조선청년은 이국타역에서 눈물을 지우고 있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쓰리여 견디지 못합니다. 될수만 있으면 그리 비싸지도 아니한 것이니 비행기를 장만하여 조선에 비행학교나 안되면 강습소라도 세우고 우리끼리 정답게 연구에 종사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몇해 후에 조선의 천재들이 다 각각 공중에 나선다 하면 그날의 우리 형편이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나는 아무때나 그 생각으로 가슴을 뛰놀리며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고 빌고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여러분의 더할 수 없는 뜨거운 맞음과 뜻을 받고 그 자신을 더 굳게 짓고 몇배나 더한 원기를 얻었습니다. 이 기세로 나아간다 하면 그것은 미구에 실시될수 있는 일인 것을 믿고 있습니다. 최후에 이르러 여러분이 그처럼 후의를 주시고 또 열렬히 후원하여주시는 그 이면의 기대에 벗어나지 아니하도록 일심전력을 다하여 이 일에 일생을 바칠 일을 여러분 앞에 맹세하오며 거듭 많은 후원을 끝까지 주시기 마음을 다하여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비행으로하여 우리 조선사람도 하면 된다! 하면 남보다 낫다! 하는 신념을 두터히하시고 또 전민족적으로 이 일에 착수하실 한 동기를 지어주신다 하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당시 경성 인구는 30만, 이날 경성 사람 6분의 1인 5만여 명이 그를 보기 위해 여의도로 몰려들었습니다.
1922년 12월 11일자 3면
고국방문비행 화보
1. 안군을 축하하는 화환들
2. 남대문역의 학생단체
3. 제1차 비행을 떠나는 금강호
4. 관중의 일부 = 여자석의 장관
5. 여의도에! 여의도에 몰려가는 군중
0. 천미터(1000m)의 공중에 높이 뜬 금강호
반도의 천공(天空)에 최초의 환희
혹한을 정복한 동포의 열성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의 왈(曰)
관중 5만 경성 공전(空前)의 대성황
고대하든 한양에 죽기를 무릅쓰고 방문비행
오만 관중을 열광케한 안창남씨의 고등비행
5만 관중의 환호
여의도 벌판에 모인 군중
조선에 처음보는 대성황
주악과 폭죽으로 개회
비행하기 전에 간단한 식사
여의도에 노량진에
열채의 객차를 연결한 임시차
어제아츰 남대문역의 대복잡
전차로만 근 만명
나도 가자 너도 가자 여의도에
축전 답지
간도에서까지 백여장의 축하 전보
인천 방문 중지
풍세로 인천 방문을 중지한 안군
관람석을 일일히 순회하며 사례
오채영롱한 지화 중(紙花 中)의 묘기
만여 장의 오색 선전지가 날니는 곳에
위대하고도 어려운 가지가지의 재주
제2차의 고등모험비행
안창남은 직접 쓴 전단을 창공에서 뿌렸습니다.
“비행기의 발명, 항공기의 발달은 이제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케하고 있습니다. 이 문명의 진운(進運), 이기(利器)의 발달에 선각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합니다.”
(전문)
기차와 기선이 발명됨으로 세계 인류의 생활이 얼마나 변화가 되고 발달이 되엇슴니까. 비행기의 발명, 항공술의 발달은 이제 세계 모든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케하고 또 향상케 합니다. 이 문명의 진운, 이기(利器)의 발달에 선각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합니다. 조선사람도 이 세계적 문명회전운동에 참가하여 우리의 생영(生榮)을 보지(保持)할 도리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발명과 창작에 독특한 천재를 발휘하야 인류사상에 대서특필할 기다(幾多)의 기록을 끼친 우리의 조선(祖先)은 비행기의 발명에 잇서서도 세계에 가장 압섯든 일은 문헌 이 소증(昭證)하는 바이라 그러나 우리의 현재가 과연 엇더함니까 조잔(凋殘)이 아니면 쇠퇴가 잇슬 뿐이올시다 이 엇지 선인에 대한 죄과가 아니며 세계에 대한 수치가 아니오리까 위대한 조선(祖先)의 피는 우리의 혈관에 흐르나니 우리도 노력만하면 왕시(往時)의 영광을 중휘(重輝)하야 인류 공동의 행복증진에 큰 공헌을 기여할 수 잇슬 것이올시다. 우리는 이 뜻으로 고국방문의 이번 비행을 실행하는 동시에 조선이 과학의 조선이 되고 아울러 다수한 비행가의 배출과 항공술의 신속한 발달을 요망하야 마지 아니함니다. 공중에서 경성시민에게 건강을 빌고 다시 금번 환영에 대하야 깁흔 사의(謝意)를 표합니다.
안창남(安昌男)
1922년 12월 14일자 3면
3회의 위험고등비행에
경탄한 30만 경성시민
작일 오후 4시 10분경 한양의 하늘에
유감없이 기술을 자랑한 안군의 비행
대 성공한 인천왕복비행
4시 23분에 인천에
경성시가의 비행은 19분간
오후 4시 42분 무사히 인천 방문
5분간 저공비행을 하야 인천 시민들은 크게 만족
◇ 다녀오겠습니다! 〓작일 경성방문 전의 안군, 여의도에서
1922년 12월 15일자 3면
◇ 제2회 비행화보
(상) 창덕궁 상공을 방문한 금강호
(하) 인천을 향하여 떠나는 안창남군
안창남은 경성비행, 서울~인천간 왕복비행 외에 평양, 대구, 부산 등 지방 방문 비행까지 계획했으나 기상과 기체의 문제로 중지하고 26일 도쿄로 떠났습니다.
1922년 12월 18일자 3면
비행은 일시중지
기후와 기체 관계로
방문비행은 우선 끝을 마치고
새 비행기를 기다려 다시 계획
비행가 안창남씨의 제1회 고국방문비행은 우리 동포의 열성으로 환영을 받아 경성방문비행과 경성 인천 사이의 왕복연락비행은 기왕에 보지못하던 대성황으로 무사히 마치게 되었음은 이미 세상에서 아는 바어니와 당초의 예정은 경성을 중심으로 실행할 비행을 제1차에 마치고 그다음에 평양 부근 지방과 대구 부근 지방을 위시하여 주요한 여러 도시를 공중으로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기후관계와 경성의 방문비행에 경험한 바를 합하여 여러가지 관계자편에서 연구하고 협의한 결과 일기는 앞으로 더욱 추워질 뿐인데 이번에 안창남씨가 동경에서 가지고 온 비행기 ‘금강호’로 말하면 구조가 온난한 지방에서 비행하기에는 적당하나 추운 지방에는 적당치못하야 경성방문 비행의 당시에 이미 만분 위험한 것을 깨달았음으로 그때부터 심히 추운 이후에 비행을 계속하는 것은 극히 위태한 일일뿐 아니라 조선의 공중을 조선인의 비행가가 고국방문비행을 하다가 만일의 낭패가 있다하면 안씨에게 당하여 미안한 일일뿐 아니라 조선항공계의 장래에까지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겠음으로 안씨의 방문비행을 고대하던 각 지방 인사에게 대하여는 매우 유감되는 일이나 이번에는 단연히 비행을 계속치 아니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후원회의 활동과 일반 동포의 열성으로 다행히 완전한 비행기 한 채를 얻을 수가 있다하면 그때에는 이번보다도 계획을 크게 하여 주요 도시의 연락대비행을 실행하여 안씨의 비행에 대한 놀라운 천재를 각 지방의 공중에서 보게될 날이 있겠더라.
기술을 더욱 연마하여
고국동포의 부르시기를 고대
비행중지와 안창남씨의 결심
경성과 인천의 연락왕복으로 고국방문과 비행을 마치기로 결정함에 대하여 비행가 안창남씨는 말하되 실상은 당초에 공중으로 방문할 의향이 있었던 여러 지방인사께서 본인의 방문비행을 열성으로 환영하여 각처에 지방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하실 의논도 있고 공중방문을 실행하는 날짜가 하루라도 속히 오기를 간절히 고대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에 너무 감격하여 약간 위험이 있더라도 기어히 방문비행을 계속하고 성사는 운명에 부치려고 생각하였으나 후원회편에서와 기타 나를 사랑하시는 여러 선배 유지로부터 간곡히 만류하시며 아무쪼록 완전한 비행기를 장만하기까지 비행을 아직 중지하라 하시며 또한 기후가 날로 추워서 나는 아무리 위험을 돌아보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비행기의 기계가 과연 이같은 혹한에 조금이라도 운전이 될는지도 의문임으로 이사람의 당초 본의는 아니나 이번에는 비행계속을 중지하고 동경에 돌아가서 다시 기술이나 연마하고 있으려 하며 고국동포의 애호하는 은덕으로 다행히 고국방문을 다시 계획하는 날이 하루라도 속히 돌아오게되면 그때에는 자기의 가진 힘과 배운 기술을 다하여 고국동포의 사랑하시는 호의에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할까 한다 말하더라
1922년 12월 27일자 3면
동아일보를 통하여
사의(謝意)를 근표(謹表)
동경에 향한 안창남씨
비행가 안창남씨는 작일 오전 10시 부산행 특급열차로 다수한 전송중에 동경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고국을 다시 떠나는 씨는 감개한 어조로 말하되 이번 고국방문비행에 대하여 사회 유지의 열렬한 찬성과 후원은 실로 감사하오며 면면히 감사한 뜻을 표치 못함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요 특히 미안한 것은 비록 천후관계라 할지라도 지방을 방문치 못함은 매우 섭섭한 일이오나 다음 기회에는 기어히 방문할 결심입니다. 이 뜻을 동아일보를 통하여 유지 제씨에게 전해주기를 바랍니다 하더라(사진은 남대문을 떠나는 안창남씨).
이 행사 진행 경비(비행기 구입비 등 외)는 지출은 6800여 원, 수입은 600여 원으로 나머지를 본사가 부담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안창남 고국방문비행이 일제의 압제로 열패감에 빠져있던 조선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줄 계기가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6200여원의 경비를 부담하고 이 행사를 주최했습니다.
고국비행 한 달 뒤 안창남은 잡지 ‘개벽’을 통해 당시의 심경을 다시한번 밝혔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서 한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몸을 보아 주었을런지…”
안창남은 고국방문비행 다음해인 1923년 1등비행사 면허를 따 일본을 놀라게 했습니다. 1등비행사 자격을 딴 일본인도 일곱 명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때 느닷없이 그의 사망설이 나돌았습니다.
1923년 9월 14일자 3면
안창남씨 사거(死去)
금번 진재 중에 사거하였다고
1923년 9월 15일자 3면
사거를 전하는 안씨
22세의 단촉(短促)한 일생
조선의 과학상 위대한 공로자
비행기술은 일인도 감탄
조선의 비행가 안창남씨가 이번 재변중에 무참히 죽었다고 동경의 전보는 필경 우리에게 야속한 소식을 전하고 말았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는 그가 설마 참으로 불행하였으랴 하는 생각이 스러지지를 아니한다. 작년 12월 10일에 한강가 여의도 벌판에서 수십만 동포의 열렬한 환호 중에 고국방문의 대비행을 하던 광경이 지금도 오히려 우리의 눈앞에 현저히 보이는듯한데 이러한 소식은 정말 야속도 심하다! 동경의 재변 중에 이외의 불행을 당한 사람이 어찌 안씨 한사람이리오 참혹히 죽은 약 10만 생령 중에는 몇천명의 동포가 섞이었는지 알수없는 일이라 우리는 만리이역에서 의지가지없이 불행한 동포를 위하여 만강의 열루를 금치못하는 바이며 안씨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과학상 위대한 공훈이 있을뿐 아니라 아직도 장래에 어떠한 사업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줄지 모르는 터인데 의외에 놀라운 소식을 듣게됨은 실로 통탄하 바이다. 불행한 소식이 과연 참이라하면 그의 최후는 얼마나 참혹하였을고 사고무친한 남의 고장에서 평일에도 눈치와 시기 속에서 외로히 분투하던 그가 재화 중에 변사를 하였다하면 그의 유해는 지금에 과연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하여도 기가 막힐 뿐이다. 안씨의 경력은 작년 고국방문비행 때에 본지에 소상히 소개된 바이라 이제 다시 기록할 것도 없다. 다시 한번 그의 짧은 일생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다. 안창남씨는 금년 23세의 꽃같은 청춘이다. 그는 신축년 정월 29일에 서울 평동 안의관 집에 태어나니 그 부친은 40에 첫 아들이라. 40동이 창남은 애지중지 중에 금지옥엽같이 자라나는중 4살에 자친을 여의고 누이의 손에 길러나서 12살이 되었을 때에 누이가 출가하고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 40동이 귀한 창남은 그만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창남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쾌할하야 조금도 국축함이 없이 전도를 개척한 결과 필경은 조선에서 처음되는 비행가가 된것인데 그는 어려서 미동보통학교를 다니었고 휘문학교를 중도에 퇴학한 후 대판으로 가서 자동차학교를 마친 후 19살에 다시 동경으로 가서 소률비행학교를 다니어 석달만에 삼등비행사가 된 후 그 학교의 교원으로 있다가 이번에 불행한 것인데 그의 비행에 대한 천재는 세상이 공인하는 바이라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금년 6월 초생에 천엽현에서 거행한 민간비행대회에서도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이등의 명예를 얻었으며 성적으로는 일본인 간에도 그를 당할 자가 없이 되었고 더욱이 야간비행에는 특별한 천재를 가졌음으로 그의 묘기에는 동료간에도 감탄치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와 같은 실력을 인정한 일본 항공국에서는 지난 6월 30일에 아무 시험도 없이 일등비행사면장을 하부하였다. 안씨의 불행은 실로 민족 역대 손실이라 하려니와 그는 평생에 말하기를 나는 결코 비행기로는 죽지않을것 같다 함을 보아 그가 얼마나 대담하고 침착하였던 것을 알수가 있었으며 일즉이 기자와 같이 비행기를 타고 동경의 공중을 날아다닐때의 실제 경험으로보면 그는 공중이나 지상이나 조금도 다름 없는데 도로 언제든지 평화한 낯빛으로 장난하듯이 손을 놀리어 기계를 조종함은 그가 얼마나 비행술에 자신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중에 나는 재주가 있어도 죽음에 들어서는 어찌할수가 없다! 안씨를 잃음은 우리의 중대한 손실이오 그 자신으로 생각하여도 원대한 희망을 품고 23세의 청춘으로 세상을 떠남은 ○련의 한사이나 무정한 죽음을 어찌하리오 다만 씨의 일생이 비록 짧다 하나 다소의 성공을 한 것으로써 유명이 서로 쓰린 가슴을 위로할 뿐이다.(한기자)
(사진 : 마지막길의 안창남씨 – 작년 겨울 경성역을 떠날 때 -)
1923년 9월 23일자 3면
안창남씨는 입원 중에 조난
민간비행가로서 불행한 이는 안씨 한 사람 뿐
조선의 비행가 안창남씨가 이번 진재가 일어난 동경에서 세상을 떠났다함은 이미 보도한바어니와 사망한 이유에 대하여는 본사 특파원에게서도 아직 아무 소식이 없어 자세히 알수는 없는 바 작일 모처에 도착한 동경 전보에 의지하건대 씨는 지난 7월부터 신병으로 인하야 동경 신전구 모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던 중 그 후 증세가 매우 회복되어 퇴원하려던 때에 지난 1일의 대진재로 인하여 그만 병원에서 안따까운 죽음을 짓고 말았다 하며 다른 민간비행가들은 한사람도 희생된 자가 없다더라.
10여일 후 관동대지진을 직접 취재하기 위해 동경으로 직접 간 이상협 당시 편집국장이 안창남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안창남은 일본에서 큰 고초를 겪었으며 목숨까지 위협받았다는 사실도 함께 전해졌습니다.
1923년 9월 28일자 3면
안창남씨 무사 판명
진재(震災) 중 군마현 전교로 피난하였다가
◇본사 동경특파원 이상협 특전◇
일시 사거설을 전하여 일반의 가슴을 놀래이던 비행가 안창남씨는 진재가 있으며 즉시 군마현 전교에 무사히 피난하였다가 25일에 동경에 돌아왔더라.
1923년 10월 4일자 3면
안창남씨
작조(昨朝) 부산발
고생은 했으나 원기는 왕성해
일시 사거설을 전하던 비행가 안창남씨는 3일 아침 부산에 입항하는 창경환(昌慶丸)으로 상륙하여 오전 9시에 부산을 떠나는 특별 급행열차로 경성에 향하였는데 씨는 지진 중에 여러가지로 고생을 많이 하였으나 원기는 매우 왕성하여 보이더라.(부산 전화)
1923년 10월 5일자 3면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일본 여자의 도움을 받아
군마현으로 피하기까지
◇안창남씨 경험담◇
구사일생의 위경으로 벗어나서 꿈속같이 고향에 돌아온 안창남씨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이번 고생한 경력담을 다음과 같이 하며 다시한번 감개가 무량한듯 하더라.
4인의 좌이대사(坐而待死)
지진 중에 병실에서
나는 몸에 병이 있어서 지진이 나기전 약 3주일 전부터 경교구에 있는 지천병원이라 하는 곳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던 일일에는 나와 나의 친구 한사람과 이웃방에 있는 환자 한사람과 간호부 한사람 도합 네사람이 내 방에 모여서 점심밥을 먹으려 하는데 돌연히 집이 흔들리기를 시작하더니 차차 지진이 커져서 방바닥이 들썩 하고 방 네귀가 어긋나기를 시작하기로 창밖을 내다본즉 앞에 있는 건축청부영업하는 삼층 벽돌집이 와글하며 전차길로 무너집디다. 이 광경을 본 우리 네사람은 밖으로 나아가도 살길은 없을 것을 짐작하고 방 한가운데에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죽더라도 같이 죽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얼마 아니하여 지진은 그치었음으로 우리 병원에서는 아무 연고도 없이 의사와 환자가 모두 거리로 뛰어나아갔습니다.
선편으로 지포(芝浦)에
바다에서 하루밤
거리로 나아가본즉 벌써 전차길에는 사람으로 진을 쳤고 앞뒤 집이 모두 무너졌는데 ‘돌아가는 지진은 정녕 또 있을 것이오 이만큼 큰 지진이 있었으니 의례히 불이 날 것이라’는 공론이 분분하여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줄을 몰라할때 벌써 여기저기서 불이 일어나니 순식간에 우리가 서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이때에 나는 부근 내쪽에 빈 배가 있는 것을 보고 두말할 것 없이 그리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이때에 나와 같이 뛰어나온 환자와 간호부 몇 명이 나의 탄 배로 뛰어들었습니다. 물에서 위험을 피하려 하였으나 화세는 점점 맹렬하여 도저히 조그만한 배속에서는 아니될줄을 안 우리는 배를 띄워가지고 달아나기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아니가서 곧 불보다도 무서운 해일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배가 좁음으로 별일은 없었으며 그길로 바로 품천으로 도망을 하여 그날밤은 지포 해안에서 불안 중에 지냈습니다.
호구(虎口)에서 호구(虎口)에
품천에서 겪은 위경
그 이튿날 2일 정오쯤하여 우리는 모두 배가 고픔으로 무엇을 조금 먹으려고 품천에 배를 대이고 상륙하였으나 위험은 갈수록 더 심하여졌습니다. 오후 두어시가 되니까 소방대의 종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들리더니 남녀노소 할것없이 사람이란 사람은 모두 바닷가로 밀려나옴을 보고 우리는 웬일인가 또 불이 났나 하였으나 나중에 알고본즉 어떠한 일이 생겼다 하여 그와같이 소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할수없이 다시 배를 탔더니 청년단인지 누구인지 알수없는 사람들이 와서 조사를 너무 심하게 함으로 나는 이제는 그만이다! 하였으나 요행히 위경을 면하고 그 밤은 역시 바다에서 새인 후 그 이튿날 3일에는 다른 환자들과 함께 품천에 있는 품해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찌할수가 없이 그 자리에서 안등창남(安藤昌男)이라고 일본 이름으로 행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인으로 변장하고
일본 여자의 구제로
그 병원에도 3, 4일 있으니까 있지못할 형편이 있어서 이제는 어데로 갈지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는데에도 살약이 있다는 셈으로 나의 목숨을 구원해준 사람은 어느 젊은 일본 여자올시다. 그는 나와 같은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이곳까지 같이온 죽전(竹田)이라는 일본 청년의 아내인데 내가 조선 사람인 것도 알고 살아날 도리가 업는 것을 동경하여, 자 안등씨 별수없으니 나와 같이 갑시다. 저이(자기 남편)는 일본사람이니까 상관없이 나와같이 부부처럼 차리고 갑시다 하는 소리를 들은 나는 고맙다 할것도 없이 ‘그럽시다!’하고 일본 상인처럼 변장을 한 후 가방을 같이 들고 정거장까지 무사히 걸어가서 품천에서 차를 타고 군마현 전교시에 있는 죽전의 형님 집으로 갔습니다. 그날 일은 ○일줄로 생각합니다.
통신도 부자유하여 죽었다는 소문까지
전교시에 가서는 거의 3주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그 주인에게까지 자기가 조선 사람인 것을 알리지않고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아무데도 통신할 자유가 없어서 필경 동경에서는 내가 죽었다는 소문을 내게된 것이외다. 생각하면 이번 일은 살았어도 산듯 싶지도 않고 죽었다는 소문도 무리는 아니외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24일에야 처음으로 동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급한 마음에는 그날로 라도 귀국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허락지 아니하야 이제야 라도 오게 된 것이오 그 동안에 이만사람을 위하여 많이 근념해 주신 여러분에게는 무엇이라고 감사한 말씀을 여쭐 길이 없습니다.
1923년 10월 5일자 3면
기쁨에 지쳐 말조차 없는 안창남씨의 남매 상봉
1924년 9월 30일자 2면
박해받는 안창남씨
무한한 직례파 가담설로
일본 적화방지단원이 단도를 가지고 습격해
27일 오후 8시반경에 천엽현 진전 소정 이등비행장에 있는 일등비행사 안창남씨와 삼등비행사 령목국웅(領木菊雄) 양씨가 그곳 어느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던 중 3명의 청년이 돌연히 나타나서 좀 볼일이 있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하여 ‘그대들이 중국 전쟁 중 직례파에 가담한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질문함으로 양씨는 전연 그러한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으나 그중 한사람은 다짜고짜로 지팡이를 들어 령목씨를 난타하는 등 한동안 기세가 위험하다가 서로 양해가 되어 3명 중 2명은 악수까지 하려하였으나 한명은 단도를 끄집어내어 령목씨의 손목을 찌르고 도망하였는데 이 급보를 들은 주교서에서는 범인을 염탐하던 중 적화방지단원 길전관을 정범으로 체포하여 방금 취조 중인데 안창남씨는 아무 별일이 없었다더라.(천엽 전보)
1924년 10월 1일자 2면
안씨 박해와 일부 일본인의 심사
조선인으로 일등비행사의 면허장을 가진 안창남씨에게 대하여 천엽 한구퉁이에 있는 사람을 중국 동란의 배일파로 지목되는 직례파에 가담한다는 말을 한참동안 퍼뜨려놓더니 뒤를 이어 안창남씨를 칼을 들고 습격한 자가 있다고 전한다. 안창남씨가 일본 민간비행계에 적수가 없을만치 그 재주가 갸륵하고 이에 따라 여러 일본 비행가에게 시기를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말이 퍼지자 칼을 가지고 들어가 사실을 보니 그런 허무한 사실을 퍼뜨린 자의 심사가 미리 안씨에게 박해가 오기를 바라고 일부러 이런 말을 퍼뜨린 것이나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이같이 허무한 말이 어데로부터 나올 것이랴? 만일 그러타하면 일부 일본인의 잔학한 심사를 웃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저들이 말하는 것같이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이 살아나가야한다고 치면 조선사람의 하는 일을 더욱 도와주어야 할것이 아닌가. 만일 그러한 아량이 없으면 무슨 말로 눈가리는 수작을 떠들수 있으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볼때마다 일본 사람들의 편협한 심리를 의심치 아니할 수 없다. 더욱 조선 사람은 지금 모든 방면으로 현대 문명에 뒤지지 아니하였는가. 이렇게 뒤진 사람이 다소간이라도 과학에 힘쓰는 것이 있다 하자 이것이 능히 일본 사람의 앞길을 압도할만한 아무 힘도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이런 악랄한 수단을 쓰는 자가 있는가 모든 일을 장부적 태도로 임하라.
1924년 10월 19일자 2면
위기일발 호구를 탈출한
안창남씨 귀국
풍설의 출처는 어느곳에서
위경 당시의 광경은 어떠해
조선의 천재비행가 안창남씨가 중국 동란 중 직례파에 가담하여 참전한다는 이상한 소문이 일본통신으로부터 한번 퍼지자 일본의 일반 비행계는 물론이요 조야에서도 매우 주시하던 중 얼마전에는 어떤 폭학의 무지한 칼날에 위험까지 당한였던바 씨는 소무를 띄고 작일 아침 차로 고국에 돌아왔는데 수송동 113번지 씨의 자택에 방문한 기자에게 대하여 씨는 아래와 같이 말하더라.
직파에 가담은 비행가 안강(安岡)씨
소문이 오전되어
작년 진재 때에 들어왔다가 금년 정월에 다시 와본 뒤 열달만에 이번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뒤 조선 형편에 대하여는 아직 도착할 뿐이므로 말할 거리가 없습니다. 내가 중국 직례파에 가담하여 북경지방으로 건너간다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전혀 없는 사실인데 이렇게 오전된 이유는 우리 이등 출신으로 안강(安岡)이라는 비행사가 이번에 참전하였는데 그 뒤에 일본 모 신문기자가 이 말을 듣고 또 우리 지방의 농부에게서 듣던 말로 추측하고 령목 비행사와 나까지 참가한다고 한듯합니다. 이 소문이 일본 국민신문에 기재되자 적화방지단 그외 여러 단체에서 협박장도 여러 장이 왔습데다 그 후 다시 신문기자가 와서 참전 여부를 묻기에 나는 절대 그러한 일이 없고 다만 항공국이 민간비행가를 박대한다 하여 그 불평은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즉 시험에 신장 오척일촌 이상이 아니면 이등 이상의 면장을 안준다는 규정 등이 있기 때문에 공격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아마 이러한 불평도 있고 하니 중국 같은 너른 천지를 바라고 간다고 추측하야 사실을 만든듯 합니다. 그래서 신문사 편집국장까지 찾아서 정정을 청구까지 하였습니다.(하략)
◇ 귀경한 안창남씨〓작일 수송동에서〓
이러한 일들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조국 독립의 힘이 되고자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후 안창남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한편 산시성 태원(太原)에서 중국 군부 염석산 비행학교 교관이 됐습니다.
1925년 2월 17일자 2면
안창남씨 상해에
임시정부 수뢰자와 밀의하고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어
천재비행가로 명성이 자자하던 안창남씨가 최근에 돌연히 상해 불국조계에 나타나 약 1주일간 동안이나 그곳 임시정부의 수뢰자들과 만나서 ○○○을 획책하고 어데로인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는데 상해 일본 총영사관으로부터 경무국에 달하였음으로 크게 놀라 지금 해외 각지와 연락을 취하여 경계 중이라더라.
일거(一去) 무소식
사냥간다고 나간 후
근심 중의 편모
이 소식을 듣고 시내 수송동 안창남씨의 자택을 방문한즉 그 집 사람은 근심하는 태도로 음력 작년 섯달 초생에 시골로 사냥을 간다고 졸지에 떠나갔는데 그때는 총도 아무것도 아니 가지고 갔습니다. 그 뒤로 두달 가까이 되지마는 아무 소식이 없어 궁금하던 차이외다 하더라.
1925년 12월 5일자 2면
조선의 네 비행사
풍군에 가담 활약
안창남, 장덕창, 이기연, 민성기
무대는 북경장가구간
중국 동란을 기회로 하여 시내 원남동 66번지 민성기씨와 돈의동 이기연씨 등 두 삼등비행사는 북경 방면으로 밀행하였다는데 전기 민성기씨의 부친되는 민병길씨는 작년 3월경에 죽동궁 민정식씨를 따라 상해로 건너가서 상해가정부와 연락을 취하여 가지고는 북경으로 올라가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바 요사이 중국동란으로 풍운이 날로 급박하여 가는 것을 보고 풍옥상씨와 자주 교제를 하면서 그의 실자인 전기 민성기씨를 풍옥상 군대에 참가케할 약속을 한 까닭에 민성기씨는 그의 친구 이기연씨와 서로 의논한 후 같이 북경으로 간 것이라 하며 이씨 이외에도 조선비행사로 이름이 자자하던 안창남 장덕창 양씨도 풍옥상군에 가담하여 목하 북경장가구 사이를 왕복하면서 활약중이라더라.(모처 착전)
1926년 5월 21일자 2면
중국 창공에 조선의 붕익(鵬翼, 붕새의 날개)
중국 하늘을 정복하는 조선 용사
그 중에 꽃 같은 여류 용사도 있어
중(中)에도 여류비행사
한참동안 중국 천지에 풍운이 소란할 때에 북경을 중심으로 맹렬히 활약하던 조선 사람 비행가 안창남씨 등 3, 4명과 그 중에는 꽃같은 여류비행사까지 국민군에 참가하여 그 동안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던바 최근 어느 방면으로부터 전하는 그들의 소식을 듣건대 안창남씨는 그의 제자인 류기석 비행사와 함께 방금 산서비행대에서 맹렬한 활동을 계속하고 서왈보씨는 그 동안 국민군의 육군비행소좌로 맹렬히 활약을 하다가 최근에는 북경을 떠나 양가구 방면으로 들어갔다 하고 오직 한 사람뿐이던 조선여자비행가로 한번 진중에 나타날 때에는 군인의 정신을 빼리만큼 미인의 용모를 가진 권기옥양도 그의 연인 이영무 비행사와 함께 금년 2월에 상해로 부터 광동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 국민군 제일비행대에 나서서 남다른 천재를 발휘하여 많은 공뇌를 나타냈었는데 그들도 또한 요 다음의 기회를 얻으려고 지난 4월 15일에는 어데로인지 갔다 하며 그 외에 민성기 최용덕 두 명만 아직 오패부 진중에서 활약을 한다더라.
그러던 중 1930년 4월 안창남은 비행훈련 교육을 하다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단순한 사고사로 알려졌으나 최근 언론보도에 의하면 안창남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중국인 항공학교 교장이 문제가 있는 비행기를 안창남에게 타도록 명령했고, 비행기 정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던 안창남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했으나 교장이 ‘군사명령’이라며 안창남에게 비행을 강요해 사고가 났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KBS 역사스페셜, ‘떴다 보아라 안창남’, 2011년 1월 27일 방영)
1930년 4월 12일자 2면
조선 창공의 최초 용사
안창남씨의 부전(訃電)
조선의 상공을 정복한 최초의 용사
안창남씨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
만리이역 중국 태원에서
◇ 고국방문비행 당시의 고 안창남씨(상), 최근 중국 태원(太原)에서 박힌 사진(좌측이 안씨)(하)
20세기 과학의 정수인 항공술을 응용하여 조선 사람으로 조선의 공중을 처음으로 정복하여 조선 사람으로의 만장의 기염을 토한 비행가 안창남씨가 그가 이상한 포부의 일단을 펴보려고 애를 쓰던 중 중국 산서성 태원천지단에서 사망하였다는 전보가 9일 밤에 경성에 있는 그의 유일한 친척인 옥천동 126번의 1호 최영희씨에게로 왔다. 전문에는 ‘안창남군이 비행기에서 서거하였다. 군의 절친한 친구가 뒷일은 보나 속히 들어오라’는 명문전보임으로 어느날 참변을 당하였는지 어떻게 불행을 보게되었는지 알수없으나 전보친 날이 6일일부로 되어 있으며 비행에서 사망하였다 하였음으로 보아 추락참사나 아닌가 의심된다. 어쨌든 별세한 것은 사실이니 조선 공중 최초의 용사로 30세를 일기로 불꽃같이 짧은 일생을 누리고 불귀의 객이 된 모양이다.
기억에 갱신한 고국방문비행
파란중첩한 짧은 일생
최근엔 염군(閻軍)에서 활동
안창남씨는 세상에서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공중을 정복’하라는 현대 문명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조선에서 제일 먼저 응하고 일어난 용사로 씨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조선인의 항공술에 천재있음을 발양하였다. 대정 11년 12월에는 본사 주최로 고국방문비행을 단행하여 조선에 사는 많은 사람의 사랑과 환영과 갈채를 일신에 거두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비행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결심한 바 있어 대정 13년 12월경에 상해로 건너가려 여운형씨의 인도로 오패부 군대에 참가하기로 하였었으나 때마침 패부군대가 장작림과 싸워 몰락하는 때이었음으로 풍옥상 군대설도 있었으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면 비교적 세력이 튼튼한 큰 군대에 가입함이 좋겠다고 하여 결국 산서왕국을 일우어 놓고있는 염석산 군대에 참가하여 항공학교 교관으로 최근까지 60여 명의 중국인 연습생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가 중국에 건너가기 전 일본에 있을 때 그 친구인 일본인 령목은 안창남과 같이 중국 군대에 가담할 계획이 있다는 혐의를 받다 어떤 일본인에게 칼로 상해를 당한 일도 있었으며 안씨도 그때 신변이 매우 위태하였었는데 중국을 건너갈 때에는 안동현 이륭양행의 힘을 입었으나 결빙으로 직행치 못하고 대련과 상해를 경유하였다고 하며 거기서는 안호(安虎)라고 이름하였다.
1930년 4월 13일자 1면
조(弔) 안창남군
항공계의 귀한 희생
一
조인(鳥人) 안창남군은 전시 중국 태원에서 비행중에 사망하였다 한다. 비행기 이 희생은 그 예가 허다하여 그다지 전사회적 ○○가 될 것이 아니로되 군이 조선항공계 개척의 제1인이었던만큼 군의 부보(訃報)는 오인에게 큰 슬픔을 주는 것이다. 하물며 군은 고국을 떠나 만리이역의 일 진영(一 陣營)에서 최후를 지었음에랴 이런 의미로 군의 금번의 사(死)는 정히 조선의 일 비애(一 悲哀)라 않을 수 없다.
二
군은 일즉 조선의 항공계의 장래를 생각하고 일본서 비행학을 연구한 바 있었다. 그 후 군은 1922년 본사 주최의 고국방문비행을 감행하여 조선인 최초의 조선○空者가 되고 이어 일본서 연구를 계속하던바 생각하는바 있어 돌연히 중국에 건너가 혹은 ○○○에게 혹은 염석산에게 당대 제 장령(將領)의 진영에서 중국인에게 비행술을 전수하였다. 이제 군의 부(訃)를 받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한바 있다.
三
그러나 군이 30의 약년(弱年)으로 일생을 마쳤다 할지라도 군의 조선의 항공계를 위한 공헌은 남아있는 제씨의 호범(好範)을 뵈었고 이로써 군의 영명(令名)은 우리 항공사상의 첫 페이지를 점(占)할 것이니 빌건대 명목(暝目)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