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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직후 단군영정 현상모집(1920년 4월)을 벌인데 이어 오다 쇼고(小田省吾)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의 단군 비하 논문에 대해 최남선 선생의 ‘단군론’을 77회나 연재(1926년)했던 동아일보는 1926년 12월 2일자 1면 사설 ‘고적 보전의 요체’ 를 3회에 걸쳐 실으며 고적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허물어져 가던 민족의 뿌리를 찾아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자는 뜻이었고 그 사업 중 하나가 단군유적보존운동이었습니다.  




1926년 12월 2일자 1면




고적 보전의 요체(상)

망각된 그 일대 부면(部面)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여러 시설 중에 오인(吾人)과 후일에 까지 감사를 받을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은 다만 한 가지 고적보존에 관한 노력이다…(중략)…그 보존의 대상이 오로지 기질적(器質的) 방면에서만 심출(尋出)되고, 조그마한 주의도 정신적 방면의 교섭에는 쓰려하지 아니함에서 미상불 편루(偏陋)한 그 심사를 딱하게 알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그런데 일본인이 조선 고적에 대한 관념과 그 시위(施爲)는 과연 어떠하였는가. 순 문화적 경영이라야 할 이 성고(聖高)한 사명을 과연 능히 정략적 예탁(穢濁)에 초월해 수행하였는가. 시방까지의 실적이 과연 그네 문화적 양심의 건전을 이야기하는 것뿐인가 어떠하였는가.…(후략)




1926년 12월 3일자 1면 고적 보전의 요체(중)


민족적 고적의 주의(注意)


(전략)…조선인이 민족적 생활을 시작할 때에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였던 정신적 지주가 이것이었음처럼, 또 조선인이 민족적 생활을 보지(保持)하는 동안에 사회적 통일 원리로 신뢰해온 정신적 배경이 이것이었음처럼, 언제까지나 조선인의 생활에 민족적 의식, 동작이 필요하기까지 설사 가공이오 아무리 환영이라하여도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적 최고 윤리는 더욱 신예(新銳) 심각(深刻)하면 하지 결코 감쇠퇴삭(減衰退削)할리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조선의 단군은 다른 곳의 국조(國祖) 혹은 교권(敎權)과 같이 신화적 산물, 철리(哲理)적 구성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확고한 지반에 건립된 민족적 신앙 신념의 웅려한 전당임에랴.…(후략) 




1926년 12월 4일자 1면 고적 보전의 요체(하) 


첫째 단군의 성적(聖蹟)을 저네의 이른바 조선정책이란 것 중에 가장 크게 실패를 본 것은 대개 사상정책에서 이며, 그 중에서도 대 역사정책에서이며, 그 중에서도 대 단군정책에서이며, 그 중에서도 대성적(聖蹟)정책에서이었다. 사상정책에 있는 반발작용의 미묘(微妙)가 저네의 단군 말삭(抹削)에 대한 우리의 역사애(歷史愛) 앙등에서처럼 현저하기는 거의 유례의 드문 일이었다.…(중략)…탁 터놓고 말하면, 조선심을 없앨 수 없음은 아무보다도 없애보려다가 못한 그네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중략)…역사적 고적에서 단군의 부문을 제외함은 무식도 무식이려니와, 또한 불경도 큰 것이요, 다만 조선의 전통에 대하여 무성의가 될 뿐 아니라, 일본인의 자랑인 경신(敬神)정신에 스스로 논리적 오멸(汚蔑)을 더함이 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에, 우선 자기네의 손으로 훼철(毁撤)시킨 구월산 삼성전으로부터 중흥하고 장엄하여, 자기네의 문화애와 고적애와 신도애와 조선애(祖先愛)가 내외로써 다름이 없음을 단적(端的)히 표증하기를 못내 기대한다. 




최남선 선생은 ‘단군께의 표성(表誠) -조선심(朝鮮心)을 구현하라’ 는 제하의 사설을 3차례 또 썼습니다.




1926년 12월 9일자 1면




단군께의 표성(表誠) – 조선심(朝鮮心)을 구현하라(상)


단군은 조선 급 조선심(朝鮮 及 朝鮮心)의 구극적(究極的) 표지(標識)이다. 역사의 위에서는 그가 조선 국토의 개척자요 조선 문화의 창조자요 조선 생활의 건설자며, 혈연상으로는 그가 조선민족의 도조상(都祖上)이오 조선 권속의 대종조(大宗祖)요, 조선 문화의 주동량(主棟梁)이며, 신앙상으로는 그가 조선 정신의 인격자요, 조선 이상의 최고조요, 조선 원리의 총괄점이시니, 조선의 일체를 수약(收約)하면 단군의 밀(密)로 퇴장(退藏)하고, 단군의 밀(密)을 개방하면 조선의 일체를 현현(顯現)함과 같이 얼른 말하면 단군 즉 조선이시다.…(후략)


1926년 12월 10일자 1면, 단군께의 표성 – 조선심(朝鮮心)을 구현하라(중)


고전에 단군의 천강지(天降地)는 태백산이라 하고, 이 태백산을 후에 묘향산으로 의(擬)하게 되니, 시방도 단군굴이란 것이 거기 있다. 대산 심곡 고봉의 정상에서 앞으로 해(海)에 극(極)한 안계(眼界)를 가지고, 장위(壯偉) 유비(幽秘)한 석굴이 거인의 입처럼 벌어졌으니, 무엇인지 모르되 그 신택(神宅)이요 영적(靈蹟)이요, 단군 유연(有緣)의 성지임을 살피기 어렵지 아니하며, 예로부터 소묘가 있어 건도(虔禱) 범수(梵修)에 게으름이 없었다.…(중략)…그런데 시방 와서 단군굴에는 오직 편복(박쥐)이 옛터의 수복(守僕)노릇을 하고, 비로봉에는 통로조차 끊이게 되었다. 이렇듯 한 국조(國祖) 감모와 성산(聖山) 대우가 과연 싹수 있는 민족의 일이라 할 것이랴. …(후략) 


1926년 12월 12일자 1면, 조선심(朝鮮心)을 구현하라(하)


조선의 건국 고전은 세계에 있는 원시철학, 특히 그 인생관 세계관 중에 가장 순정하고 건전한 것이니, 무릇 삼단(三段)에 분하여 제1단에서는 천국의 인간 확장으로써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고, 제2단에서는 인간의 천리 복종으로써 국민의 생활을 관념하고, 제3단에서는 인간의 천리 복종으로써 국민의 생활을 관념하고, 제3단에서는 민토(民土)의 구경(究竟) 신화로써 인생의 목적을 이상(理想)함이 조선 건국 전설의 골자로, 이 민족의 세계에 관절한(冠絶한 · 뛰어난) 정신적 대건립이다.…(중략)…조선의 부활은 정신으로부터 비롯할 것이요, 단군 감모의 표시는 성적(聖蹟)으로부터 비롯할 것이다. 거룩한 자취를 이리해 놓고는 잠도 입도 달지 않게 되는 때야말로, 진정한 부활이 우리의 마음에 싹돋는 때이다. 단군께의 표성이 이래야 옳을 것일까. 생각하자, 참괴(慙愧)하자. 그리하여 동광(同光)된 조선심을 일단(一端) 일단(一段)씩 고적 존호(尊護)같은 사상(事相)의 위에 구체화해 가자. 




1927년 10월 29일자 3면




개천절(상) – 최남선


오늘로써 조선 일체의 조원(祖元)이신 단군왕검(壇君王儉)의 개천경일을 또 한번 거듭하게 되었다. 개천절이란 얼른 말하면 조선국과 조선 국민과 조선 민족의 생활 급 문화의 생일이요, 또 그 민족 이상의 발단일이요, 또 그 민족적 직사(職司)에의 취임일이다. 우리 조선인이 최고 진리의 파지자(把持者), 최고 사실의 실현자란 의의로서 ‘천제자(天帝子)’ ‘환국인(桓國人)’ 이란 민족격의 자각을 얻은 날이 이날이요…(중략)…단군 민족과 단군국과 단군 문화와 단군 생활 원리의 출현은 이리하여 다만 조선 사상의 일대 흔경(欣慶)일 뿐 아니라, 어느 의미에 있어서는 전 인류적, 전 세계적의 일대 기념적 사실을 짓는 것이다. 온 인류가 정성과 목소리를 어울러서 찬송하며 경축할 이날이려든, 그 직손(直孫)이요 적파(嫡派)라 할 우리 조선인에게 있어서야 그 지정(至情) 심의(深意)가 마땅히 어떠할 것이랴? 보본반시(報本反始·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생활 이상의 근저에 대한 반성 급 진신(振新)의 상시적 노력은 조선 민족 윤리상에 있는 중대한 일 덕목이니, 이 민덕의 구체화된 것이 시간적 행사에 있어서는 일년 일차의 제천(祭天) 중심의 전민적 경절(慶節)이요, 시방 말로 하면 개천절이란 것이다. 부여에서는 ‘영고’ 라하고, 고구려에서는 ‘동맹’ 이라하고, 예(濊)에서는 ‘무천’ 이라하고, 한(韓)에서는 ‘불구내(弗矩內)’ 라 하고, 신라 급 고려에서는 ‘팔관회’ 라하고, 이조(李朝) 이강(以降)으로는 ‘부군제(府君祭)’ 라 하여 그 외면의 각목(各目)은 대(代)로써 다름이 있으되, 그 내용과 실질은 요하건대 혈통적으로는 최고조요, 신앙적으로는 지상 실재요, 생활 윤리상으로는 전일적 도덕 목표로의 단군=천(天)에 대한 억념(憶念)을 새롭게 하며, 각성을 새롭게 하며, 분려(奮勵)를 새롭게 하며, 그 실질 확장과 진가 증상(增上)을 새롭게 하던 그때그때의 민족 일치의 일대 노력이다…(후략) 




1927년 10월 30일자 3면 개천절(하) – 최남선


대저 사람의 군적(群的) 생활은 종종(種種)의 형식으로써 그 의식 사상의 집중점을 요구하며, 그 회동 화합의 표현사실 급 훈련 기회를 요구하며, 그 반성 개화의 신 출발점을 구하나니, 이것이 시간을 의빙(依憑·의거)하여 나타날 때에 국민적(대동적) 경절이 생기는 것이며, 이것이 신앙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날 때에 국민적 제전이 생기는 것이다.…(중략)…보라, 생의 환희가 넘치는 어느 국민에게 전민적 경절이 없는가? 거민동환(居民同歡)하는 대경일이 없는 어느 사회에 대동(大同)의 웃음과 즐거움과 희망과 대긴장이 있는가?…(중략)…이날로써 진실 심절(深切)한 조선의 보편아(普遍我)에 반귀(反歸)하여 해마다 과거 일년의 결산도 하고 장래 일년의 준비도 행하여, 각개와 제반이 얼마나 단군으로 말미암아 제시된 인류 대이상의 실현에 유가치 유의의하였는지를 이날로써 다 한가지 성찰 척려하며, 겸하여 이러한 자축과 동경(同慶)의 의미 하에 떡과 과실을 식구마다가 나누고 노래와 춤을 군데마다서 한가지 하도록 힘쓸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 옛적의 개천절이 해마다의 새 개천일이 되어 마침내 구원(久遠) 전일(全一)의 개천(開天) 표상(表象)이 되게 힘쓸 것이다.




최남선 선생은 ‘조선 문화의 일체종자(一切種字)인 단군 신전의 고의(古義)’를 1928년 1월 1일자부터 6일자 까지 5회 연재합니다.




1928년 1월 1일자 기(其) 2~3면




조선 문화의 일체종자(一切種字)인 단군 신전의 고의(古義) (1)


무진년(戊辰年)을 역사적으로 회고하면 그것이 단군 건국이라는 조선사 탄생이 대 사실로써 절대한 감격을 자아내게 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도 무진년(21주 갑전·甲前)의 일이며 이 태조의 위화도 회군도 무진년(9주 갑전·甲前)의 일입니다. 단군의 해라 할 무진년을 기념함에는 오직 순일한 마음으로 단군을 기념하며 단군 원리를 흠구하며 단군 실적을 정해(正解)하여 단군과 그 사실로부터 오는 우리의 전통 생명에 자윤(滋潤)과 새 흥분을 줌이 아무것보다 적절한 일일 것입니다.…(후략)




1928년 1월 6일 3면, 조선 문화의 일체종자(一切種字)인 단군 신전의 고의(古義)(5)


(전략)…천제(天帝)의 자는 무엇을 위하여 인세(人世)로 하강하는가. 그것은 소극적으로는 고뇌에 빠진 인간을 구제함이오 적극적으로는 인간 천화(人間 天化)의 경륜을 실현하려 함입니다. 원시적 의의로 말하면 신정(神政)을 인간에 펴기 위함이오 신정이 인간에 펴지게 된 동기요 뒤집어 보면 원시사회의 통치권이 천우신(天又神)으로부터 나왔다는 관념에 대한 설명일 것입니다.…(중략)… 인세(人世)의 군주는 실로 상천(上天)이 내시는 바인데 이렇게 상천의 내이신 자를 천자(天子), 천왕(天王)이라 일컬음과 왕에게 부천모지(父天母地)의 오랜 신앙이 있음으로써 생각하건대 본대는 실제적인 천(天)의 자(子)로서 역시 ‘홍익인간’의 경륜을 가지고 인세에 강림하는 이라하던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후략)




1928년 8월 1일부터 12월 16일까지 최남선 선생은 ‘단군과 삼황오제(三皇五帝) – 신도(神道)를 통해서 보는 고조선 급 지나(古朝鮮 及 支那)의 원시 규범적 류동(原始 規範的 類同)’을 72회 연재했습니다.




1928년 8월 1일자 3면

 




단군과 삼황오제(1)


단군이란 것은 고어 ‘동갈’의 역(譯)이니 천인(天人) 혹은 사천자(事天者) 내지 대천자(代天者)의 의(義)이었다. 고전은 가로되, 단군의 씨계(氏系)는 신국으로서 나왔다하니, 환이란 것은 천계를 이름이었다.…(후략)




1928년 11월 14일자 1면




개천절 사설도 최남선 선생이 쓴 것입니다.


“10월 3일은 신인단군이 천국을 인간으로 확장하기 위하야 천부와 천중을 데리고 하강하신 날이다. 단군억념 개천 의식의 융쇠가 그대로 조선 문화의 잔망임을 볼 때 누가 저간에 존한 천리의 기미를 두려워하지 아니할자뇨. 더욱 금년 무진(戊辰)으로 말하면 단군조선의 72주 기념에 치하얐음으로 이날의 역사적 의의를 추억코자 함이다.”


 1930년 11월 23일자 5면에는 이윤재(李允宰) 선생이  개천절 단군 강탄 – 4386회 기념 글을 썼습니다.


오늘(음력 시월삼일)은 우리 한배 단군께서 강탄하신 제4386회의 개천절입니다. 말하자면 조선인의 생활 및 문화의 생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날에 우리의 감모가 어떠하며 우리의 환희가 어떠한가. 우리는 이때에 마땅히 본보(本報)의 정성과 추원(追遠)의 생각으로 우리 각자가 반성과 자각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개천절이란 것이 조선 인민의 전통적 관념으로 전 민족적 신앙 중심사상이 굳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후략)




  1930년 11월 23일자 5면




“삼수갑산(三水甲山)에서는 해마다 10월 초순이면 ‘상사제’라고 집집이 햇곡식으로 떡을 해가지고 곡간 정주 등 여러 곳에서 떡을 뜯어 ‘한배님’을 부르며 복을 빌고 태백 성왕께 무병하고 태평함을 빈다는데 10일 동안은 정성의 때라 하여 금전거래와 출입조차 엄금한다 하며 이 상사 제사는 벌써 여러 천년 내려오는 풍속인데 그 내력은 알아보면 10월 2일 단군 개천절을 몇 천년 전부터 순박한 백성들이 숭배해 내려온 것이라 해 역사적으로 자못 흥미 있는 일이라하며 그리고 대안 장백현 이십도구 이주 동포들도 ‘상사제’라고 백두산을 향하여 제사를 지내노라고 야단이라 한다.” (1930년 12월 6일자 7면)고 했으나 일제는 탄압했습니다.  “19일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화신상회 월력(月曆) 1만장과 김윤○상점 월력 6천여○를 압수했다. 그 이유는 단군의 기원(紀元)을 써넣은 까닭이라고.” (1931년 1월 20일자 2면)




“역사적 근거에 기초한 단군유적보존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된 것은 1932년 5월 평안남도 강동 대박산의 단군릉의 수축사업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단군 묘로 알려진 이 능이 일제하에 들어 황폐해지자 이를 증수하고 수호각을 세우기 위해 지방 유지들이 ‘단군릉수축기성회’를 발기하였다. 당시 단군릉수축은 평안도 강동의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이 운동을 단순한 지방의 운동이 아닌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운동으로 전환시킨 것은 ‘동아일보’ 였다.…(중략)…단군릉 수축 움직임이 알려지자 동아일보는 오기영을 현지에 파견하여 기행문을 싣고 이 능이 단군릉임과 이를 방치한 조선 민족 전체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오기영은 강동읍 북쪽에 위치한 대박산이 단군이 하강했다는 ‘태백산’이며 ‘강동읍지’ ‘대동총람’ ‘문헌비고’ ‘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해 조선왕조 정조년간부터 나라에서 춘추로 봉심했던 사실 등을 들어 이 능이 단군릉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조선 민족이 단일민족으로서 단군의 자손임을 인식하는 민족적 각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5월 28일부터 단군릉수축을 위한 성금모집을 촉구하고 같은 해 7월 9일부터 23일까지는 동아일보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을 ‘단군성적순례’의 특파원으로 파견하였다. 행적지는 묘향산, 평양의 단군굴, 강동 대박산 단군릉, 황해도 구월산, 강화 마니산 등이었는데 이 순례기는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연재되었다.…(중략)…당초 단군릉 수축은 강동의 단군릉기성회를 중심으로 1932년 끝낼 예정이었으나, 1933년 말까지도 기금이 822원에 그칠 정도로 자금 마련이 부진하여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1934년 1월 초 동아일보는 영업국장 양원모(梁源模)를 현지에 파견하여 단군릉에 참배하고 성금 500원을 냈으며 사원들도 따로 228원을 모아 성금으로 냈다. 이를 시작으로 동아일보는 단군릉수축성금란을 고정으로 설치하여 11월에는 3000원의 기금을 마련하였고, 이때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35년 10월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단군릉 수축사업은 당시 단군조선과 대일본주의를 연결시키려는 일선동조론적인 단군의식이 부상하는 시점에서 종족적이고 종교적이지만 부여 – 고구려 – 백제로 이어지는 고대 민족 형성상의 원류를 강조함으로써 반일의 정조(情調)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 시기 부르주아 민족주의 진영의 국수적 민족의식을 현양하는 것이었다(각주: 동아일보 1932년 7월 9일 ‘단군성적순례’ 기획연재를 시작하는 글에서 단군 이래 오천년 조선 역사의 맥을 ‘부여 – 고구려 계승’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제기한 단군조선의 ‘부여 계승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이지원 대림대 교수, ‘한국근대문화사상사연구’, 혜안, 2007, 325~327쪽) 




1932년 4월 26일자 3면




조선의 시조 단군 묘 수축(修築)…수호각을 건축하여 영구히 보존코자 발기


 “평남 강동 아달산 밑에 누천년의 풍운곡절 속에 적적히 있는 단군묘는 2백년전 정종(正宗) 병오년 나라에 알린바 되어 본관으로 하여금 춘추로 봉심함을 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는 강동 명륜회에서 봉제를 하고 황폐하고 퇴락한 자취는 강동 김상준씨의 발기로, 무너진 수호각을 건축하여 영구히 보존키로 했다.” 




                                            


황폐한  단군릉 <동아일보 자료사진>




  오기영(吳箕永) 평양지국 기자가 단군릉을 찾아 갔습니다.




1932년 5월 6일자 7면




단군릉봉심기(檀君陵奉審記)(상)


5월 2일 정오 평양선교리역에서 경편차에 올랐습니다. 강동에 있는 단군릉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강동을 가자면 바로 평양에서 강동으로 가는 자동차도 있습니다마는 나는 길을 안내해 줄 강동지국장 김중보(金重寶)씨를 찾아서 승호리로 돌아서 가기로 노정을 정한 것입니다.…(중략)…우리는 4천년 동안을 이렇게 봄이면 밭을 갈아 2천만 명의 한 식구가 살아왔습니다. 나는 이제 우리 조상에게 밭 갈기와 씨 뿌림이며 옷 입는 법과 모든 살림 범절을 가리켜 주시고 우리를 가장 먼저 다스리신 한배님의 능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오후 2시 승호리에서 김중보씨와 함께 다시 자동차로 강동에 도착되었습니다. 이번 단군릉 수축과 수호각 건축을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는 김상준 씨를 찾았습니다. 김씨는 나를 반가히 맞아주었습니다. 여기서 점심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곧 대박산으로 갔습니다.대박산은 강동읍 북쪽에 동리와 거의 맞붙어 있는 산입니다. 단군릉은 이 대박산 밑 기슭에 있습니다. 우리는 상원(上元) 갑자(甲子) 10월 3일 태백산 및 단목 아래 하늘로서 단군이 하강하셨다고 알고 있거니와 이 대박산이야말로 속칭 태백산입니다. 읍지에도 대박산이라고만 쓰지 않고 이와 병서로 태백산이라고도 썼다합니다.…(중략)…오후 4시 10분 나는 태백산 밑 성지에 다다랐습니다. 세상이 강박해 가면서 이 능의 위엄을 몰라보고 야박한 밭 주인의 염치없는 ‘보습’이 바로 능밑까지 범하여 밭을 갈아 놓았습니다. 나이 먹은 소나무가 능을 지킬 뿐 비록 얕은 담속에 둘려 있어도 범연한 고총으로 지나쳐볼 자는 없습니다. 나는 지극히 경건함과 왼 정성을 묶어 능에 나가 두 번 절하였습니다. 내 눈에서는 줄줄이 흐르는 눈물을 구태여 막을 체도 않고 엎드려 있습니다. 설혹 이 무덤 속에 그의 뼈와 살이 묻히지 않았던 들 어떻습니까.…(중략)…기자묘와 동명왕묘를 봉심하면서 이 단군릉은 오늘날까지 이렇듯 초라하게 겨우 대대로 전하는 조상의 말씀이 범연치 않은 고총으로만 여겼으니 내 비록 보잘 것 없는 일개 서생이로되 그의 피와 살을 전해 받은 후손이어든 이 초라한 선조의 무덤 앞에서 한줄기의 눈물을 바침이 어찌 정성 없는 일이라 하오리까(계속)    




1932년 5월 11일자 7면, 단군릉봉심기(중), 오기영


능의 주위는 4백여 척에 상당합니다.…(중략)… 능에서 동쪽으로 20정 가량 들어가서 태백산 중턱에는 청계굴이 있습니다. 일명 단군굴입니다.…(중략)…묘향산에 단군굴이 있고 황해도 구월산에서 단군이 화신어천(化神御天)하셨다하거니와 구월산의 속칭이 ‘아사달산’이요 이 태백산과 마주 대하고 섰는 조그만 산이 ‘아달뫼’라는 것도 사학가들의 연구거리가 될까합니다. 평양에 단군전 묘향산의 단군굴 구월산의 아사달산이란 것들을 모두 주어 모아야 이 강동의 태백산뫼를 당할 것입니다.…(후략) 




1932년 5월 12일자 7면, 단군릉봉심기(하), 오기영


정종 병오 이래로 봉심하던 것도 일한합병 이후로 폐지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저 황폐한 산기슭 밑에 외로이 큼직한 무덤 한 개가 풀을 깎을 주인도 없이 바람과 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계해 11월에 강동명륜회에서 2백여원의 경비로써 능 주위에 담장을 둘러쌌으나 이것으로써 어찌 단군릉의 위풍을 다하였다하오리까.…(중략)…이번에 다시 강동 유림을 해심으로 하여 수호각을 세우자는 의론이 기운 있게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원하는 바는 이 일이 비단 강동군의 일이 되지 말고 전 조선 민족의 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입니다. 그에게 농사짓기를 배워 4천년을 살아오며 그를 시조로 동방에 빛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제 어찌 단군을 몰라볼 것이며 그에게 다한 정성이 없다할 것이겠습니까.…(중략)…나는 이제 다시 한번 이 능을 찾는 날 갖추신 위엄 앞에서 오늘 초라한 고총의 신세를 풀 때가 있을 줄 믿으매 구태여 약한 감정이라 그대로 눈물만을 뿌릴 것도 아닌 상 싶어 앞날을 바라보고 돌아섰습니다. 봄날이라 그의 가르치신 유업 그대로 능 바로 앞에서는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다. 




 1932년 5월 28일자 3면




지방논단,  단군릉 수축기성, 강동 인사의 찬조를 촉(促)함 (강동 일기자)


(전략)…수년간 평남유림회에서 단군릉을 봉릉(奉陵)하고 수호각을 건축하기로 발기하고 차(此)에 기성(期成)을 도(圖)하여 성금까지 기천원을 모집한다는 가보(嘉報)를 접하였거니와 아직 유야무야간(有耶無耶間) 실현되지 못한 것만은 유감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금반(今般) 특히 강동 유지의 발기로 숙망 중에 있던 사업을 실현코자 강동군 내 각면 유지 제씨가 거 20일 읍내 명륜당에 회집하여 단군릉수호각건축기성회를 조직하였다 하니 기쁜 소식이다. …(중략)…금차(今此)사업이 단지 강동인의 사업일 뿐 아니라 적어도 민족적 대 사업의 하나이다. 주인공이 된 강동 인사는 대의를 종(從)하여 용진불퇴(勇進不退)할지며 금번(今番) 피선된 기성회 임원 제씨는 사업 달성을 위하여 유종의 미를 거(擧)할지며 군민은 협동정신으로 하루바삐 기성을 달성하기를 망(望)한다.




1932년 6월 17일자 3면


단군릉수축(檀君陵修築) 금년 내로 완료, 일반의 성금을 기대


(강동) 조선에 시조 단군의 성능(聖陵)을 수축하고 수호각을 건축하기로 기성회를 조직하였다함은 누보한 바이어니와 기성회장 김상준씨를 비롯하여 일반 역원들은 불면불휴에 노력을 하는 중 금년내로는 공사를 완성할 예정으로 기성회 사무소를 강동읍내에 두고 활동하는바 일반에 열정의 성금을 기대한다하며 임원씨명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회장 김상준…(후략) 




  황폐해진 ‘단군성적’ 답사에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도 직접 나섰습니다.




  1932년 7월 9일자 1면





단군 성적(聖跡) 순례 사고

◇특파원 본사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반만년 문화의 창조자시오 2천3백만 조선인의 육과 영의 원천이시며 역대 조선 민족의 숭앙의 대상이신 단군 성조의 유적을 봉심하고 아울러 그 신공성훈을 전 조선 동포와 함께 추모하고 환성하옵기 위하야 본사에서는 사회부장 현진건을 특파하기로 하여 금 8일 태백산(묘향산) 평양 강동 강서 구월산 마니산 등지를 향하여 출발케 합니다.…(중략)…흑룡강의 남, 황하의 북, 동해의 서, 망망한 오천리에 어느 산, 어느 강이 단군의 유적이 아니리이까.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이조를 통하여 상하 오천년에 역대 제왕은 관을 설하여 제(祭)를 치(致)하시었고 민초는 방방(坊坊), 호호(戶戶)에 신위를 설하여  추달(追達)의 성(誠)을 바치었습니다. …(후략) 


행정 예정(行程 豫定)

8일 야(夜) 경성 발

9일 조(朝) 신안주역착-태백산 입산-보현사 박(泊)

10일 조(朝) 보현사 발-단군굴-만폭동-금강굴

11일 12일 금강굴-곤로봉-금산사

13일 금산사 발 희천 경유 신안주, 평양

14일 평양 발-강동, 대박산릉, 박갈고지-평양

15일 동명왕릉,숭령전 등

16일 대성산

17일 강서, 세무덤이, 을지문덕 묘 용강

18일 용강 발-사리원 경유 구월산 패엽사-장장평

19일 선천봉, 삼중사-패엽사

20일 귀사

21일 강화

22일 마니산-강화착

23일 전등사

동아일보사




 1932년 7월 29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 (1)

발정제일야(發程第一夜)


단기 4265년 7월 8일 단군성적순례의 길에 오르다. 경의선에 몸을 실으니 밤 10시 40분. 묘막한 상하 반만년 동방문화의 연원이시며, 생생화육(生生化育), 이천삼백만, 단족의 영과 육의 모태이시며, 흑룡강의 남, 황하의 북, 동해의 서, 망망한 오천여리에 개지척지(開之拓之)하신 신공성적(神功聖跡)을 남겼었으니, 이 광범한 문화권을 호고하고 이 방대한 지역원을 봉심하자면, 정말 까마득한 노릇이다. 일년은커녕, 십년은커녕, 일생을 두고 성과 열과 력을 경주하더라도 이 원념의 만분지일이나 아니 만만지일이나 달할까말까. 그러하거늘, 공무와 속루의 틈을 비기 수주의 시일로, 분망한 여정에 몰려 할 수 있는 준비조차 갖추지 못하고, 덮어놓고 발정하고 말았으니, 대담하다면 대담도 하려니와 경솔하고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 믿는 바 있으니, 그것은 성조께 대한 단성(丹誠)과 신념이다. 한배님이 두호하시거니 단애에 수를 철할 대용도 기치 말란 법 없으며, 왕검님이 받드시리니 절벽에 족을 인할 영능인들 생치 않으랴. 반체와 둔족을 의구할 필요도 없거니와 불학과 무지에 주저할 연유도 없다. 현식과 사념을 버리자,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억측과 모색을 함부로 말자, 해심으로 돌아가기라, 백지 같은 적자의 마음으로 님의 앞에 서리라, 끼치신 일괴석(一塊石)과 일배토(一杯土)를 뵈올 적마다, 고동하는 내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경건과 감격으로 묵시와 수교를 터득해보리라, 촌민야로의 구비심서로 옮겨 내려오는 소박하고 홍몽(鴻蒙)한 전설이나마 그대로 새겨 유칙과 성훈과 또는 신앙심과 의지성의 편린을 찾아보리라. 이렇게 맘을 정하매,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며 새벽녘에야 어느 결엔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태양은 높이 솟아 우의 실은 멍울멍울한 구름사이에 숨바꼭질하면서 뜨거운 광선을 이따금 차창으로 들이친다. 좌우에 푸른 벌판이 훤하게 열림은 벌써 안주평야에 들어선 모양이다. 이 백겁산하에 감회를 돋을 겨를도 없이 기차는 벌써 신안주에 닿고 말았다. 구일 오전 팔시.




“‘단군성적순례는…(중략)…7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중략)…11월까지 연재를 계속하였는데, 해방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이러한 순례여행은 그가 재직하던 동아일보사의 단군입론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중략)…이 서두에서, 동방문화의 연원이며 우리민족의 모태인 단군의 성적은 광범하고 방대함으로 이를 호고하고 봉심하는 일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이는 단군성적을 통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 때문이다. 그러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그 성적을 답사하여 묵시와 수교를 터득하겠다고 했다. 한 조각의 돌덩이 흙이나 대민의 구전심서가 드러나는 이야기 한 토막이라도 그대로 새겨 유칙과 성훈과 신앙심과 의지성의 편린을 찾아보겠다는 자세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과 단군성적을 대하는 신앙과 같은 태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경주 순례의 경우와 같이, 유물 유적에 대한 애정과 거기서 얻는 교감을 더 중시하여 역사를 실체로서 인식하려 했기 때문이다. 빙허(현진건)는 단군성적순례를 통하여 우리 5천년 역사 전체를 현재에 접맥시켜놓고, 과거의 화려한 역사와 황폐한 당대의 현실을 통일적으로 인식한다. …(중략)…이러한 역사의 통찰에서 일관된 작자의 태도는 소멸되어가는 역사에 대한 갈등을 통하여 오히려 현실의 황폐함을 극복하려는데 있다. …(중략)…마지막 마니산 제천단 앞에서 반만년 역사의 흥망성쇄를 돌이켜보면서, 나철선생이 시 한수로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원을 대신하였다. 이렇게 우리 역사를 통찰하는 가운데서 흥망과 성쇠라는 역사의 회귀성에서 발전적 역사를 인식했다.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거나 황폐한 현실을 위무하려는 도피가 아니라, 미래의 역사에 대한 참여자로서 확신인 것이다.” (현길언 한양대교수, ‘소멸과 생성의 미학-국토순례기의 의미’, 현진건산문집, 한양대출판부, 2003, 282~285쪽)




1932년 7월 30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2)


백겁산하밀성(百劫山河密城)


차에서 내리자 지국장 김병량(金秉亮)씨가 반가이 맞아 준다. 향산행 자동차편을 물으니 십이시경에 있다기에 지국에 소게(小憩)하던 차에 사로부터 전보가 내려왔다. 그것은 미쳐 수습하지 못하고 떠난 여구를 부쳤으니 찾아가란 전문(電文)이다. 즉시 역으로 알아보매 짐은 금일이나 명조에 도착할 듯. 일일(一日) 연기를 천추같이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에라, 이 기회에 안주읍이나 구경하리라 하여 지국장의 인도로 구안주읍으로 향하였다. 신안주 역에서 경철을 타니 약 십오리 거리에 삼십분이 걸린다. 안주의 고호(古號)는 식주, 밀성 등으로 서방(西方)의 대읍이요, 변방의 요지다.…(후략)




1932년 7월 31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3)


백상루(百祥樓)


칠불사에서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질펀한 광야가 우뚝한 소구(小丘)를 지은 지점에 익연히 솟은 정자를 백상루라 한다. 몇 층 돌 층층대를 더듬어 누상에 오르매 난데없는 일진청풍이 옷소매를 스치며 축축히 땀 밴 흉금으로 상연히 기어든다. 안계는 끝없이 넓어지는데 한창 무성한 전곡(田穀)들이 벽파(碧波)인양 굼실거리며 멀리멀리 운산의 기슭으로 스러진다. 옛날에는 청천강이 바로 이 누 발뿌리를 씻으며 흘러갔다 하나 이금엔 아득하게 서편으로 물러나, 점점의 청산을 너흘며 만폭백련을 널어 놓은 듯 은색으로 번쩍인다.…(후략)




1932년 8월 16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13)

어허, 단군굴


(전략)…나도, 활(滑)하기 빙판(氷坂) 같은 그 거대한 석신(石身)에 파충(爬蟲)처럼 배를 깔고 달라붙었다. 이야말로 유진무퇴(有進無退)! 상승이 아니면 추락이 있을 뿐인데, 족하(足下)는 천인단애(斷崖)다. 생과 사의 관념이 번갈아 명멸하는 찰나, 무서운 원력(願力)이 선풍과 같이 전신을 뒤흔들며 수십 보를 줄달음으로 기다가 일어서니 몸은 표표연(飄飄然) 반공(半空)에 뜬 듯한데 발은 광활신이(廣闊神異)한 일대석굴(一大石窟)의 최종단의 일부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졌다. 이 석굴은 ‘굴(窟)’이라기보다는 창궁(蒼穹)의 ‘궁(穹)’자나 우주(宇宙)의 ‘우(宇)’자나 떼어 ‘석궁(石穹)’ 또는 ‘석우(石宇)’라고 부름이 그 실감을 방불케 할 만큼 거궁하다. 높이는 네 길이 넘을 듯, 전면의 넓이는 50척(尺), 깊이는 35척 가량이니 굉걸(宏傑)한 전각(殿閣)한둘을 넉넉히 들여앉힐 만하다. 석질은 아름다운 화강석으로 녹색 백색 무늬 문의(文儀)가 각양각색의 선을 둘렀다. 우리는 씨근벌떡거리는 숨을 죽이고 옷깃을 여미며 엄연숙연히 한 걸음 두 걸음 안으로 들어서매 습습(習習)한 청풍이 옷소매를 날리며 이 세상 것 아닌 이상야릇한 습기가 끓는 가슴을 헤치고 선선하게 엄습한다. 물이끼가 파랗게 덮인, 동편 석(石)벼레로부터 일조(一條)의 옥류(玉流)가, 광선과 같이 번쩍이며 흘러내린다. 타는 듯한 갈증에 나는 우선 그 수정 같은 물 한 바가지를 떴다. 한 모금! 두 모금! 빙수도 이보담 더 찰까, 감로(甘露)도 이보다 더 달까. 냉기와 이향(異香)이 심신에 스미는 듯하며 열화와 같은 육신이 냉회(冷灰)처럼 식어 버리자 이는 쓰리고 몸은 떨린다. 손끝 발끝이 저리다. 나는 분명히 홍로(烘爐)의 진세(塵世)를 떠나, 임 계신 광한궁(廣寒宮)에 귀명(歸命)한 모양이다. 일행은 어느 결엔지 나무를 찍어다가 화톳불을 피우고,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쪼인다. 화씨 100도를 상하하는 요즈음의 혹서에 불을 쪼인다는 것부터 정말 기경(奇景)이다. 사진설명-단군굴에서 황웅천왕, 단군천신의 두 위패를 옆에다가 모시고 기념촬영한 것. 인물은 좌(左) 기자, 우(右) 차남두(車南斗)씨(영변지국장-편집자 주)




1932년 8월 23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14)


단군천신지위


(전략)…우리는 의논이나 한 듯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낫추낫추 고개를 숙이었다. 나는 만감이 전신에 소용돌이를 치며 고개를 다시 쳐들 수가 없었다. 약자(弱子)로 잔손(殘孫)으로 어버이 앞에 엎드린 것이다. 무안하고, 얼없고, 부끄럽고, 무섭고…해서, 숙인 고개를 감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물적 유산은 그만 두자.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 – 고구려와 신라에 와서 찬란한 탈목(奪目)의 색(色)과 복욱(馥郁)한 경세(驚世)의 향(香)을 발하던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이 막상 인천(人天)을 흔동할 대과(大果)를 맞으려 할 중대시기에, 지니지 못하고 조잔(凋殘)과 영락(零落)에 맡기었으니 얼마나 황공한 일이냐. 이런 잔손은 대(大) 천세계(千世界)를 샅샅이 둘러보아도 그 유례와 비주를 찾을 수 없으리라. 지옥겁(地獄劫)과 도탄고(塗炭苦)를 열 만 번 더 치르고 더 겪어도 이 죄를 다 싹 치지 못하리라. 참회의 화편(火鞭)이 양심을 후려갈기매, “이제는 다시, 이제는 다시!” 열 번, 스무 번, 골백번, 잘천번 줄항복을 하고, 맹서 맹서하였다. 무슨 낯으로, 무슨 염의로, 무슨 주제로, 여기 온고, 올 생의(生意)라도 하였던고? 하도 기막히고 답답하기에 집안 어른을 뵈오려 온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지니신 한배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 뼈가 내 뼈여든 뼈인들 아니 저리시며, 그 피가 내 피어든 핏줄인들 아니 당기시랴. 역정도 나시지만 그래도 눌러 보시리라. 괘씸도 하시지만 그래도 거두어 주시리라. 미웁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엇들고 받들고 주시리라.…(후략)




1932년 9월 26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30)

대박산단군릉


(전략)…16일 정오가 겨워 강동지국 총무 김중보씨 인도로 강동에 도착. 수정천반에서 이 고을 유지 여러분이 일부러 원객을 기다려 주신다.…(중략)…이 고을의 유지 김상준 김상화 장운경 김천우 원용제 김경선 장운익 김이초 조병운 여러분의 발기로 단군릉보존회를 조직하고 동릉의 수축과 수호각 등 여러 가지로 성적 보존을 구체적으로 강구한다는데 금추(今秋)에는 자진성금의 대대적 모집에 착수하리라한다.…(중략)…사진은 대박산릉과 전하(殿下)의 기념촬영




1932년 10월 12일자 5면




단군성적순례(41)

단군대 (기 1)


22일 조반을 마치고 주지대리(住持代理) 이명교(李明敎) 씨와 박태지(朴泰智)군(신천지국 총무-편집자 주)과 일행 3인이 단군대에 오르다. 비는 오늘도 쾌청치 않아 이따금 흑운(黑雲)이 어둑하게 모여들면 영락없이 폭우가 쏟아진다. 그래도 계속적이 아니요, 간헐적인데 우리는 반등할 용기를 얻은 것이다.…(중략)…나는 석상 위에 위태위태하게 올라앉아 보았다. 이 돌, 이 자리! 까마득한 반만 년 옛날에 성조께서 앉으셨던가 하매 경건의 정(情)과 감격의 회(懷)가 다시금 새로와진다. 이 바위, 이 석벽은 분명히 성조를 뵈었으련마는 지금에 덤덤히 말이 없으니 끼치신 성적이 어디어디임을 누구에게 물으랴. 비를 몰고 지나가는 일진풍이 두상(頭上)의 송림으로 우 하고 울리니 ‘거위다! 거위다!’ 하는 천뢰인 듯하였다. 묵상의 고개를 들어보매 안계(眼界)는 끝없이 멀리멀리 열려진다. ◇사진은 단군대에 앉은 이명교, 박태지 양씨와 기자.


1932년 10월 13일자 5면 단군성적순례(42)


단군대 (기 2)


(전략)…거수와 교목이 소봉과 소구에 고대로 착 달라붙은 양하여 완연히 물이끼처럼 깔리었고 대하와 장류(長流)가 가느다란 은사로 번쩍인다. 소봉 몇 개를 넘어 아득한 운산(雲山) 아래 의질처럼 곰실거리는 사리원, 정면으론 질펀한 신천평야, 좌편으로는 넓은 들판이 끝난 곳에 사마귀처럼 박힌 듯한 안악, 우편에는 당장경(唐莊京)의 큰 내들이 철기 날애같이 가물거린다. 코앞에 닥친 듯한 사태 난 산기슭을 돌아들면 삼성사(三聖祠)의 옛 터전을 찾을 수 있다던가.…(후략)




1932년 10월 19일자 5면 단군성적순례(43)


삼성사 (기 1)


단군대에서 내려와서 소게(小憩)하다가 오반(午飯)도 건둥건둥 다시 삼성사로 향하였다. 패엽사를 서(西)로 두고 개천과 개울을 뛰고 건너고 이수(泥水)의 곡경(曲徑)을 돌고 돌아 15리 나마를 내려오니 삼성리(三聖里)란 마을이 있고 삼성리를 지나매 전동(殿洞)이란 조그마한 동네가 있다. 이 전동을 안은 듯이 슬며시 솟은 청수(淸秀)한 일좌(一座) 토산(土山)이 곧 삼성사(三聖祠)를 모셨던 삼성봉이라 한다. 우리는 봉하(峰下)에서 삼성사 철훼(撤毁) 당년의 면장이던 김채형(金彩瀅) 씨를 방문하였다. 씨는 육순이 넘은 노인이다. 삿자리 방에서 어린 손자를 어루만지다가 온 뜻을 고(告)하매 은근히 우리 일행을 맞아들인다. 그는 당시를 추억하며 감개무량한 듯이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철훼하기 전 삼성사에는 전감(殿監) 1인, 수복(守僕) 1인, 장의(掌儀) 2인, 감관(監官) 2인을 두었었고 달마다 삭망(朔望)에 봉심(奉審)하며 춘추로 연 2회의 제향(祭香)을 올렸다. 춘에는 2월, 추에는 8월로 달은 정해 있었으되 날짜만은 일정하지 않아 나라에서 택일하여 전물(奠物)을 내리는 것이 항례이었다고 한다. 최근의 중창은 60년 전 병자(丙子)년으로 문화주민들이 물력(物力)을  개수하였는데 당시 면유(面有)인 전(田) 17두락(斗落)과 답(沓) 16두락을 위토로 올려 제향에 보태 쓰게 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명치(明治) 44년 곧 합방하던 이듬해에 별안간 철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고 노면장(老面長)의 어성은 자못 침통하다.  “당시 군(郡)에서 삼성사 건물을 공매에 부쳤습니다. 그때의 군수는 장휴(張烋) 씨요, 재무주임은 상삼(上森)이란 사람이었습니다. 군에서 공매에 부쳤으니 차라리 우리 문화 주민이 낙찰을 시켜 보관하자는 의논도 있었으나 그때나 이때나 어디 물자가 넉넉지 못한 탓에 주저주저하던 차에 천도교인 박관하(朴寬河)란 사람이 60원에 건물 4동을 사가지고 천도교구실(天道敎區室)을 짓고 말았습니다.”  전 면장은 잠깐 말을 끊고 당시를 추억하는 듯이 멍하게 눈을 뜨는데 그 노안엔 눈물이 떠도는 듯하였다.




1932년 10월 20일자 5면 단군성적순례(44)


삼성사 (기 2)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내려오던 성조의 사당을 왜 철훼를 하고 말았는가. 지금도 그 까닭을 잘 모릅니다마는 공매에 부친 전 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 해라면 경술년(庚戌年)이지요. 경술년 8월입니다. 나철(羅喆) 선생이 제자 일곱 분을 데리고 삼성사에 오셨습니다.  방 한 칸을 치우고 10여 일 동안 공부를 하였는데 때가 그때라 헌병들이 따라와서 같이 수직(守直)을 하고 있었습니다. 8월 11일인가 봅니다. 나 선생이 방 하나를 따로 치워 가지고 들어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며칠 동안 절식 수도를 해야 되겠으니 내가 문을 열고 나오기 전에는 너희들이 먼저 들어오지는 말라” 하더랍니다. 나 선생은 방으로 들어가면서 방문을 닫아 걸어 버렸습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이틀이 지났습니다.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선생의 신상을 염려하는 제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리 절식 수도를 하신다기로 전후 3일간이나 물 한 모금 자시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아무리 나중에 꾸중을 뫼시는 한이 있더라도 문을 열어 보자고 하여 급기야 문을 열고 보니…”하고 노 면장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나 선생은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그때 유서 12통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알 수도 없거니와 설령 안다한들 어찌 이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긴 한숨을 내어 쉰다. “사당은 철훼를 하였거니와 모셨던 위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물었다.  “네, 그 위패는 우리가 잠깐 보관을 해두었습니다. 적당한 기회를 보아 다시 사당을 신축하고 봉안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미룩미룩 지나는 동안에 대종교인(大倧敎人) 심근(沈槿)이란 이가 찾아왔습니다. 성신의 위패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니 차라리 나를 주면 대종교(大倧敎)로써 봉안하겠다기에 내어 주었습니다.”  




1932년 10월 21일자 5면




단군성적순례 (45)

삼성사 (기 3)


고로(古老)의 감회 깊은 이야기에 때가는 줄도 몰라 어느 결에 석양이 겨웠다. 일행은 폐허의 삼성사나마 봉심할 차로 길을 재촉하였다. 반전반산(半田半山)의 구릉으로 얼마쯤 기어오르니 인적이 오래 그친 양하여 길로 자란 잡초와 잡목이 우거질 대로 우거져 행보조차 어려웠다. 이윽고 널리 펀펀한 초원이 절정 위에 번뜩하게 열린다. 앞에 가던 이명교 씨가 우뚝 서며, “바로 여기가 삼성사 옛터요” 한다. 황량한 이 광경! 딸기덩굴과 사리떼가 한데 어우러지고 나무처럼 자란 초림 위에 칡덩굴이 뻗을 대로 뻗었다. 둘러막았던 담들도 무너지고 쓰러져 흔적만 남았을 뿐. 풀 속으로 자므는 발 끝에 차이는 석괴(石塊)들은 잔초(殘礎)와 퇴체이리라.…(중략)…(사진은 삼성사 폐허에 앉은 일행)




  1932년 10월 25일자 2면


단군릉 수축 기성회 대활동, 각면으로 순회활동 중 각지의 성원을 열망


[강동] 성조(聖祖) 단군 성릉(聖陵)을 수축하기 위하여 강동 유지들이 기성회를 조직한 이래 산업진행을 촉진코저 회장 김상준씨와 부회장 김이초씨등은 군내 각면 유지와 이사 역원들을 몸소 역방하고 대활동을 개시하여 실행에 필사적 노력을 기울이어 금년내로는 대사업을 완성할 작정이라는데 이 사업이 강릉군내에만 그치면 너무 소홀한 일이라하여 전조선 각지에서 있기를 바란다 한다.  




 현진건 사회부장은 7월 8일부터 23일까지 단군성적순례를 마칠 계획이었으나 말년의 거주지 구월산까지 오르고 1차 순례를 끝냅니다. 현진건은 같은 해 10월 23일 사진기자 문치장(文致暲)과 함께 2차 순례에 나서 제천단이 있는 강화도로 향합니다.




  1932년 11월 1일자 5면




단군성적순례 (47)

강화도 (기1)


10월 23일 오전 9시 문치장(文致暲)군과 함께 경성발 자동차로 강화에 향하다. 작일의 대박 섞인 폭풍우도 하룻밤사이에 가뭇없이 개이고 벽옥과도 같이 영롱히 번쩍이는 하늘은 청추답게 상쾌하다. 음우와 장림에 부대끼는 하절의 등섭고(登涉苦)를 생각하매 얼마나 복받은 일기냐. 그때에는 채 발수도 못 하고 기룸기룸한 녹발을 풀어헤치고 있던 벼들이 이제는 누런 고개를 추스르지 못하며 수확을 기다린다. 비록 회유(會遊)의 지(地)는 아닐망정 ‘증일월(曾日月)은 기하(幾何)요, 이강산(而江山)을 불가복식(不可復識)’이란 탄을 저절로 발하게 한다. 오후 1시경 김포에 도착. 똑딱선으로 바다를 건너 들어간다. 문수산성을 조망하며 완연히 봉소와 같은 돈대를 지점할 사이에 배는 어느덧 갑관진에 대였다. 이 갑관진은 강화읍의 인후로, 해양의 풍운이 번복할 때마다 백전의 겁토이니 고려 당년 몽고가 입구할 때 몽장이 돌아가 그 주장에게 보고하기를 강폭이 좁아서 갑주를 쌓아도 건너갈 수 있다 하여, 이 명칭을 얻었다든가. 이 전설을 보더라도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배에서 내려 연락하는 자동차를 다시 얻어 타고 강화읍까지 이르렀다. 폭넓은 도로, 즐비한 점포만 보아도 부읍의 면목이 약여한 듯하였다. 전등사까지의 거리를 물으매 삼십 리. 홀망한 행정이라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자동차의 객이 되니 차는 외성을 끼고 돌아 월관성 문루 조해루를 빠져나가는데 외굉한 건물들이 고색창연한 개와를 이고 여기저기 우뚝우뚝 솟은 것은 궁전과 관아의 구지(舊趾) 들이리라. 강화의 고명은 갑비고차로 고구려 때에 처음으로 군을 두어 혈구라 일렀고 신라 경덕왕 때엔 해구군이라 개칭하였으며 원성왕 때에 혈구진을 베풀었고 고려 초엽에 진을 고쳐 열구현을 만들었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하여 천도하면서 강도라 호한이래로 역대 군왕의 몽진 행계가 가끔 있은 관계상 행궁과 이궁의 시설이 비교적 완비하였으니 그 구적이 의연히 남은 것이다. 건둥건둥 보는 듯 마는 듯 지나치는 것을 고어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 하였지만 ‘주마(走馬)’보다 몇 곱절 더 빠른 차를 달리며 차창 밖으로 휙휙 은현하는 풍물을 별견하는 것이매 환영보다도 더 부정확성을 가졌다 할 것이다. 그러나 고색창연한 구건물과 산성의 초루가 안계에서 홀현홀몰(忽現忽沒)할 적마다 감회는 자못 새롭다. 군데군데 산란한 성허는 한양과 송경의 인후 요지인 까닭으로 관방을 게을리하지 않은 표시이어니와 성곽과 진보와 돈황을 쌓고 또 쌓고 모으고 또 모은 반면에는 비풍과 참우가 이 서해의 일엽도를 얼마나 번롱하였는가. 사진은 강화도 초지포대지와 기자




1932년 11월 2일자 5면 단군성적순례 (48)


강화도 (기2)


상고는 그만두고라도 고려 시대의 몽고란과 왜구, 이조에 들어와서 임진란과 병자호란! 백겁의 산하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그 중에도 더욱 참절한 것은 병자호란이니 한성부가 실수(失守)하매 군주는 산성에 몽진하고 빈궁은 여기 파천하셨다. 수만으로 헤아리는 사녀가 울고불고 설한과 빙풍에 전지도지(顚之) 도지(倒之)하며 난을 피하였다가, 여기마저 적군의 마제(馬蹄)아래 유린하게 되매 만고의 비극은 빚어내지 않았느냐.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중략)…이것은 외래의 병란이 자아낸 참극이려니와 이보다도 더욱 비분의 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은 금지옥엽과 인인의사(仁人義士)가 군사(群邪)의 모함으로 이 섬에 유찬(流竄)하였다가 이내 원령(怨靈)을 지은 허다사실이다. 춘원의 ‘단종애사’로 새삼스럽게 만곡의 눈물을 짜낸 안평대군 용과 그 아들 우직도 여기서 사사(賜死)되었고 임해군도 여기서 변사하였다. 8세의 영창대군 의를 밀실에 가두고 불을 질러 질색치사케 할 제, 천진(天眞)의 대군은 벽을 손으로 긁어 손톱조차 탔다는 대 비극도 여기서 연출된 것이다. 이 외 무수한 참사를 매거(枚擧)하기에도 진절머리가 나거니와 전화의 겁지로 유찬의 배소로 가슴이 막히고 분통이 끊어지는 처참한 비극의 무대를 혼자 가로 맡은 셈이다. 음모의 암찬과 정변의 비막도 팽배한 파도성을 격하여 거침없이 꾸며내고 지어낸 것이다. 반도산하의 눈물과 한숨과 비통과 원한의 일결정체라고나 할까. 차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어여쁘게 물들은 단풍도 내 눈에 반반한 혈루인 듯하였다.


◇사진은 초지포대앞바다, 석주에 부서지는 노도가 당년의 풍○을 일러주는 듯하다. 




1932년 11월 9일자 1면




단군성적순례(51)

마니산 제천단


이십삼일 조조(早朝), 행장을 재촉하여 마니산으로 향하다. 점운도 없는 정유리(淨琉璃)를 깐 듯한 하늘을 우러러보고, 풍엽(楓葉) 너머로 넘실거리는 창해에 은하 금파를 끌어올리는 홍일(紅日)을 굽혀보매 성역을 관참하기에 축복된 일기임을 못내 기뻐하였다. ‘순무천홀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홀梁公憲洙勝戰碑)’각을 보고 병인양요의 비희극을 추억하고 사고의 옛 자취를 밟으며 선원록 등 국사를 간수하기에 얼마나 주도한 용의를 쓴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삼랑성의 서문을 빠져 나와, 애기산 두어 개를 오르고 넘으니, 길은 논두렁 위일 망정 탄탄대로다. 한 이십리나 왔을까. 하도면 문산리란 골짜기로 들어서니 검정돌 너덜이에 맑은 시내가 소리치며 흘러내린다. 여기야말로 마니산의 기슭. 개울판에서 발이 자므는 모래에 허우적거리기 수십 분. 경사 급한 비탈길에 매어달리기 시간 남짓. 쇠초에 곱게 물들은 단풍과 올립 횡와한 기암괴석에 눈 줄 겨를도 없이, 뚜렷이 내려다보이는 제천단을 치어다보며 걷고 기고하였다.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우리는 마니산 최고봉 제천단 위에 올라서니, 정오가 겨웠다. 하늘에서 바로 쏟아지는 듯한 청풍에 옷깃을 여미며, “해활천요만리개(海闊天遙萬里開)”의 실경에 직면하고 보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동방으로는 인천과 경성이 역력히 보인다. 월미도 조탕의 지붕이 일광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백금으로 번쩍이고 말 안장 같은 취봉은 남산이 분명하다. 구름 사이에 헤엄치듯 늘어선 것은 삼각산 연봉이리라. 북쪽으로는 개성이 보이고, 송악이 보이고, 정서(正西)는 끝없는 운해다. 몇 십 리, 몇 만 리 바다 또 바다! 문자 그대로 수광(水光)이 접천(接天)하였는데 저 멀리 나비 날개처럼 하늘거리는 편주(片舟)들은 이 바람에 불리어 은하수까지 치오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서북으론 연백평야가 한 가닥 허리띠처럼 떠 보이는데, 해주 건너 파름파름한 운봉이 병풍처럼 반공에 솟은 것은 구월산 군봉이 갈데 없다. 남쪽으로 손바닥만한 강화도의 전용을 일모에 걷을 수 있고, 점점 도(島)가 굽이치는 은파에 자므러드는 듯하다. 제천단은 일명 참성단 또는 첨성대로 납작납작한 돌로 쌓았는데, 하단 상단이 있고, 상단으로 올라가는 데는 돌 층층대가 놓였으며 단상은 네모가 났으나 쌓아 올리기는 원형으로 되었다. 사방의 길이는 각 칠척 육촌, 높이는 십오척. 아득한 반만년 전에 성조께서 이 단을 쌓으신 후 퇴폐와 수축이 한두 번이 아니었겠으나 뚜렷한 역사적 기록은 없고, 이조에 내려나와 인조 십칠년 기묘에 이 단을 중수하고 사당을 지어 치제(致祭)하였으며, 그 옆에 천재암이 주어있고 재직(齋直)을 두고 제전(祭田) 십여무를 매년 맹춘(孟春)에 제향(祭享)을 올렸는데, 지금엔 당(堂과) 암(庵)은 폐한지 오래고 제전은 군청의 관리로 넘어갔다던가. 성조의 끼치신 이 자취를 뵈옵고, 자아치는 무량한 감개를 어찌 다 적으랴. 나철 선생의 시 한 수로 이 성적순례기를 마치자.


참성단상배오천(參星壇上拜吾天)

천조신령혁혁연(天祖神靈赫赫然).

광개남북동서지(廣開南北東西地)

역소사천삼백년(歷溯四千三百年).

배달족광종고천(倍達族光從古闡)

대종도맥지금전(大倧島脈至今傳).




1933년 10월 21일자 5면




단군릉수축기성회 (강동 일기자)


(전략)…수개월전의 경성 어떤 선생이 고적답사차로 강동에 와서 단군릉을 참배하고 감개무량한 의사로 운(云)하되 차(此)사업이 아직 실현되지 못함은 천만유감이라고 전조선적으로 알리지 못한 소이라 하며 누구나 물론하고 차 사업의 공명치 않을 자 없으리라하여 전례의 이충무공사업이 세상에 알리자 일반의 성금이 답지하여 사업이 예상이외의 성공되었지만 차사(此事)는 전기 사업에 비길 바 아니오 중대하고 귀중한 사업인즉 재정문제는 널리 알리는 날이 곧 해결되는 날이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말인가. 그러면 우리 강동기성회에서는 위선 이를 널리 알리는데 전력할 것이오 따라서 능이 강동에 있으니만치 강동인사가 제일선에서 물자와 정신 모든 방면에 성의를 다하여 할 것이다. 알고야 누가 이 사업을 등한시할 자 누가 있으랴. 기성회 효과를 얻고 못얻는 것은 다만 강동인사의 열성과 기성회 간부의 활려(活勵)에 있는 줄로 믿는다. 


1934년 1월 2일자 2면


단군릉수축사업, 흡연(翕然)한 성열로 진행중 성금이 근 구백원


평남 강동읍에 있는 단군능 수축사업은 수축사업기성위원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의연금이 나날이 답지하야 그 금액이 벌써 9백여원에 달하였는데 새해에는 수축사업이 시작되리라는 기대에 이 지역주민들이 부풀어 있다더라.




  1934년 1월 7일자 석간 2면




단군릉수축에

본사의 미성(微誠)으로 오백원을 바쳐

쓰러진 성묘와 허물어진 담을 성금으로 금춘착공


“평남 강동읍에 있는 단군릉을 수축하자는 운동이 단군릉이 있는 강동주민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어 작년 이 지역 유지들이 단군릉수축기성회를 결성한 이래로 단군릉수축성금이 벌써 8백83원에 이르고 있다. 조선인의 시조 단군성조의 릉이 하루빨리 수축되기를 바라는 정성으로 본사에서는 5백원을 성금으로 현지 수축기성회에 보내었다.”




   1934년 1월 9일자 석간 2면




1934년 1월 11일 석간 2면


단군릉수축성금 본사에 위탁(委託)

간곡한 편지와 함께 돈을 보내

대전읍에 있는 송씨(宋氏)가


단군릉수축사업에 대하여 나날이 진행되는 사실은 날을 거듭하여 보도하여 왔고 또한 본사에서 성금을 바치고 능소참배대표를 현지로 보냈다함도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충청남도 대전읍 천정 5백5번지에 사는 송병기(宋秉己)씨는 이 사업에 적으나마 보태 쓰도록 전하여 달라고 9일 날짜로 곡진한 편지 한 장과 함께 돈 1원을 본사에 위탁하여 보내왔습니다. 본사에서는 보낸이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동되어 곧 강동읍 단군릉수축기성회로 전달하는 동시에 삼가 경의를 표하여마지아니합니다. 




1934년 1월 12일자 2면




반만년 지난 단군릉, 풍마우세(風磨雨洗)로 퇴락(頹落)

능하(陵下)주민이 수축기성회 조직

본사대표 능(陵)참배코 실지사정 조사

폐허에 비친 새 광명


“평남 강동읍 대박산 아래 있는 단군릉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퇴락되어 있는 것을 능아래 사는 주민들이 앞장서서 수축하기로 하고 수축기성회를 결성하여 사업실행을 주도하고 있으며 강동읍 주민들은 너도나도 한푼두푼씩 성금을 내는데도 앞장서고 있다더라.”




능하(陵下) 마슬이름도

지금까지 단군전(檀君殿)

역사적 유물이 지금은 평지화

능지(陵地)는 겨우 사백평(四百坪)뿐

사흘 굶을지라도 전재산(全財産) 받혀

고학생(苦學生)의 눈물담


“이번 단군릉수축사업에 관하여서는 다만 강동뿐 아니라 평남일대가 크게 움직이는 현상인바 어른으로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 사업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또한 나도너도하고 다투어 그 성의를 다하려고 한다. 그러나 불타는 성의를 발하기에는 너무도 그 현실이 군박한 것이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에 더욱 그 참되고 아름다운 점이 많은 것이거니와 이번 성금모집을 싸고도는 눈물겹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처음 이런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본보에 실리자 그것을 듣고 동경에 가서 고학하는 학생으로부터 ‘나는 고학생이므로 하루의 밥도 안심코 먹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비록 이틀사흘을 굶을지라도 성조의 능 수축사업에는 그냥 있을 수 없으므로 지금 나의 전 재산 50전을 보내니 꾸지람 말으시고 받아주소서’ 하는 간곡한 편지와 아울러 일금 50전이 들어온 것을 보아서든지 또는 강동읍의 어떤 늙은이로 20전이라도 채우려고 힘을 다하고 애를 써보아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일전 한 푼이 덜 찾지만 받아줍시오’하며 19전을 내었다.”




경건한 참배와 본사성금전달

특파원 양원모(梁源模) 이은상(李殷相) 양씨

십일 단군릉전에서


“(강동지국)단군릉수축사업의 보도에 접한 본사에서 미성으로나마 일금 5백원을 헌납하기로 되었다는 것과 또한 본사를 대표한 영업국장 양원모씨와 특파기자 이은상씨로 하여금 단군릉에 참배케하였다함은 이미 지상에 발표하였거니와 10일 오전 11시 양씨는 당지 기성회임원제씨와 함께 단군릉에 건숙한 참배식을 끝낸 뒤 능 앞에서 본사헌납금 전달식을 무사히 마치었다.”




일원의 성금

십육아동이 협심


“어린학생들이 1원을 채우려고 서로 권하고 서로 힘써서 아래와 같은 16명이 모여 그 돈을 만들어서는 기성회에 바친 사실이던지, 이러한 이야기들이 성금을 싸고도는 지성의 빛이다. 그리고 또 이 기성회에서는 이 사업을 진행하기에 주야를 불문하는 중 며칠 전…(후략)” 




“한편 본사에서는 사원, 공장원, 배달부에 이르기까지 일동이 성금 228원33전을 갹출하고 전국 동포의 자발적인 참여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에는 일제가 이미 대륙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던 무렵이라 일제의 탄압은 실로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었으므로 합법적인 모금운동이 불가능하여 기탁형식으로 수금하는 등 불편이 적지 않았다. 1934년 1월 12일자부터 연재할 예정이던 이은상의 ‘단군릉봉심기(檀君陵奉審記)’가 삭제 당했는가 하면, 성금 접수 기사마저도 삭제당하는 형편이었다. 본사와 기성회 측이 모집한 금액은 4월 17일 2860원에 이르러 예정총공비 7000원에는 미달하였으나, 계획의 일부인 수호각과 기념비, 능비 수축에 착수했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일부나마 수축을 끝냈던 것은 당시로는 쾌사가 아닐 수 없었다.”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사 1’, 1975, 347쪽) 


“1934년 1월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에 있는 단군릉이 황폐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조단군왕릉에 대한 숭앙심을 겨레의 가슴속에 다시심고 민족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동아일보사는 단군릉수축 성금을 공모했다. 충무공 유적보존운동을 성공적으로 완수한지 이년 만에 펴는 운동이었다. 공모한 성금과 사(社)자체의 기탁금등 오백원을 영업국장 양원모(梁源模)를 통해 전달하게하고 이은상(李殷相)기자를 특파, 현지상황을 취재토록 했다. 총독부는 현충사중건 때 방관했다가 톡톡히 혼이 난 때문인지 국조숭배사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사업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1월 13일 이은상은 단군릉의 황폐한 모습을 기행문으로 엮어 ‘단군릉봉심기’를 시리즈로 게재하기 시작했다. ‘내 역사를 헤아리고 내 조선을 생각하고 억만년후에 자자손손 내 겨레를 위하여.’ 기행문 시리즈 첫 회분은 이렇게 적어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못마땅하게 여기던 총독부는 바로 이 기행문을 삭제 하도록 지시, 윤전기를 세우고 연판을 깎도록 했고. 끝내 기행문 연재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은상, ‘반세기 쌓인 일화, 민족의 표현기관’,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 22면)




  이은상(李殷相) 특파원의 현지 르포기사 ‘단군릉봉심기(1)’은 첫회부터 압수당해 (2) 이하가 없습니다. 삭제당한 ‘단군릉봉심기(1)’ 은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 2’ (정진석 편, LG상남언론재단, 1998, 715~717쪽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압수된 1934년 1월 13일자 석간 2면




단군릉 봉심기(奉審記)(1)

본사특파원 이은상(李殷相) 근기(謹記)


단군강생 4367년 1월 9일. 본사 영업국장 양원모(梁源模) 씨와 나는 단군릉 봉심의 길을 떠났다. 날 흐린 서울 아침을 떠난 기차는 눈송이 차창에 날리는 송도를 지나 바람이 살을 에이는 평양에 갔었다. 평양에서 다시 자동차에 같이 올라 대성산(大聖山) 밑 넓은 벌을 순식간에 지나고, 동으로 동으로 비늘같이 덮이고 막힌 산협속으로 돌아든다. 여기가 어디쯤인고 하고 차밖으로 바라보는 눈에 얼른 보이는 수정교(水晶橋)! 사람의 무식이 함부로 이름 자를 써놓은 것은 어느 곳에 가든지 흔히 보는 일이거니와 이곳의 수정교도 ‘정(精)’ 자를 ‘정(晶)’ 자로 써놓았구나 하고 생각하는 동안 차는 벌써 강동읍에 닿으니, 때는 석양이 눈 쌓인 산과 들에 남은 빛을 던지는 오후 다섯시였다. 우리를 맞아 주신 단군릉 수축기성회의 위원 제씨를 따라가 밤이 깊도록 조선을 말하고 단군을 생각하고 민족을 토론한 것은 내 일생에 잊지 못할 기쁜 일이었고 뜻깊은 일이었다. 그므는 등불 아래 둘러앉은 그들과 우리. 그들과 우리가 주고받는 끝없는 조선 이야기. 그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과 함께 한 자손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 다시금 깊이 맺히는 밤. 밤은 깊어 바람은 더욱 찬데 춥고 곤함을 잊어버리고 다투어 우리 심장을 불 붙이는 때에 내가 적지 아니하고 내가 약하지 아니하고 내가 죽지 않았고 또 아니할 것을 깊이 또 굳게 느끼고 또 믿지 않을 수 없다. 뜨겁게 불을 비웃는 그들의 마음 또한 그들의 신조는 어두운 채 이 밤이 광명한 아침이요, 얼음인 채 지금이 따뜻한 봄인 것을 생각케 한다. 늦게야 우리는 서로 헤어져 등불을 낮추고서 베개 위에 머리를 뉘였으나 무한한 감격이 내 가슴에 차고 오히려 넘쳐 나오는 그것은 뜨거운 눈물이었다. 지금 내가 거룩한 단군의 능 앞에 더 가까이 와서 누웠거니, 아니 그 품속에 들어와 쉬는 것이니 하고 생각하매 더 섧은 생각이 모진 잠을 쫓고도 오히려 내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고 쓰리게 하고야마는 것을 나는 참으로 어찌 할 수가 없다.




거룩한 깊은 누리

줄 뻗고 가지 늘여

그 끝에 나도 너도

열려 맺힘 생각하매

고맙고 아슬아슬하여

도로 눈물 남네다.


눈으로 흘러나매

눈물이라 하나이까

아니오 아닙니다

눈물이 아닙니다

가슴속 밑에 밑에서

솟는 줄로 압소서




젖은 베개를 뒤질 줄도 모르고서 내 역사를 헤아리고 내 조선을 생각하고, 억만년 후세에 자자손손 내 겨례를 위하여 마음 모아 비는 때에 어느 집에선가 광명을 고하고 하명을 아뢰는 닭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찌른다.  오! 이것은 새벽의 사자(使者)로구나.


해설-시인 이은상이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단군릉을 찾아가면서 경험한 바와 단군의 능 앞에서 역사와 조선을 생각하면서 읊은 시가를 담은 글. 


  동아일보는 이은상의 ‘단군릉봉심기(1) 때문에 신문을 압수당하자 ‘단군릉 수축에 본사직원성금’ 기사를 싣고 호수를 지운 뒤 호외를 내려고 했습니다. 그리나 석간 호외에서 이 기사마저도 삭제를 당했습니다.




  1934년 1월 13일자 석간 호외 2면




‘단군릉봉심기(1)’가 삭제된 지면




  1934년 1월 13일자 석간 호외 2면




 ‘단군릉봉심기(1)’와 ‘단군릉수축에 본사직원성금’ 기사가 삭제된 지면


 ‘동아일보 본사직원의 성금’기사는 며칠이 지난 1934년 1월 17일자 석간 2면에 실릴 수 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단군유적인 묘향산 사진 아래 눈에 띄게 게재했습니다.




1934년 1월 17일자 석간 2면




  동아일보의 ‘단군릉수축성금란(檀君陵修築誠金欄)’ 설치도 쉽지 않았습니다. 1934년 1월 19일자 석간 2면의 ‘단군릉수축성금이 답지 누계 1494원’ 기사는 총독부의 처분으로 삭제됐습니다. 성금기탁자명단이 실린 이 기사는 1934년 1월 20일자 조간 2면에 기사 리드가 빠진 채 ‘단군릉수축성금 기성위원회 접수분’ 이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1934년 1월 19일자 석간 2면.




‘단군릉수축성금이 답지 누계 1494원’ 기사에 총독부 삭제처분 도장이 찍힘




  1934년 1월 19일자 석간 2면.




단군릉수축성금이 답지 누계 1494원’ 기사가 삭제




1934년 1월 20일자 조간 2면




리드가 빠진 ‘단군릉 수축성금 – 기성위원회 접수분’ 기사




 1934년 1월 21일자 석간 2면 




단군릉 수축성금 – 금일 본사 접수분


(전략)…일금 10원 김용무(金用茂)


해방 후 미군정청 대법원장을 지낸 김용무 변호사는 당시 동아일보 취체역이었습니다.   


 1934년 6월 단군성적지 순례에 나선 민세 안재홍(安在鴻) 선생은 동아일보 1934년 7월 11일자부터 7월 16일자까지 6회 구월산 등람지(九月山登覽誌)를 기고했습니다. 구월산에 앞서 들른 장수산 기행은 7월 25일자부터 7월 29일자까지 4회에 걸쳐 장수산유기(長壽山遊記)란 제목으로 연재했습니다.




1934년 7월 11일자 1면




단군성적(聖蹟) 구월산 등람지(1), 패엽사에서 안민세(安民世, 안재홍)

금고영장(今古靈場)인 백악궁(白岳宮)


(6월) 25일 오전 현암을 떠나 조철로 신천읍에 와서 오찬, 자동차로 문화폐읍을 지나 유천서 내려 도보로 패엽사를 향하였다. 예서 보매 더욱 또렷한 구월산의 장엄한 산악미가 원추형의 첨예한 촛대봉의 영자(英姿 ·뛰어난 자태)에서 훨씬 영상한 감을 주고, 이 장려한 대산휘를 기점으로 삼아 동남으로 툭 트인 수백리 대야(大野)가 연운 속에 창망하여 광원한 감을 일으킬 때, 맥수가 당장경의 빈 벌에 숙고 송백은 삼성전의 묵은 터에 거칠었는가 하면 공산적막한 속에 두견이 목 놓아 울고 적은 골물은 무심코 흘러만 간다.해질 골 내리는 비에 우장을 고쳐가며 패엽사의 동구를 찾아 이제는 삼성리의 시른등을 넘는다.  5,6백년 늙은 느티나무 그늘, 부도와 석비가 고스란히 선 산벌의 밑을 지나 긴 숲이 하늘을 가린 청계의 곁으로 시원스런 청장(靑장· 푸르고 가파른 산)의 높은 봉을 보며 산문을 향하여 들어가니, 일좌 흙다리를 건너는 곳에 익연한 대고루(大高樓)를 앞에 놓은 고색창연한 대가람은 즉 패엽사니, 고래 선종의 대본산이라 오늘부터 예 와서 투숙키로 하였다.…(후략)




1934년 7월 12일자 1면 단군성적 구월산등람지(2)


사황봉과 제천단


오봉에서 보는 구월산의 전경과 그 전망은 자못 좋다. 동으로 대야(大野)를 전개하고 장수 자비의 모든 산맥이 둘러 천성의 병장이 험고한바 있는데다, 북으로 재령강 유역을 통하여 동서 교통 길이 된 것은 그 지형 지리의 대교(大較)요, 서에는 대동강의 하류 한 줄기 해만이 내륙 깊이 들어 진남포 개항장은 시가가 역력히 보인다. 패엽사 너머 삼성리 마한동 전동 화장동이 모두 단군 인연 혹은 고사관계로 사적과 전설을 남긴 고장이요, 마한동 서남으로 박달리 거문동의 촌락도 모두 상대사와 고문화에 유연함 같은 지명이며, 마한동 박달리 선에서 동으로 개울을 따라 평야부를 행하기 7, 8리에 기복한 구릉을 기점으로 전답이 널브러진 일대의 원야가 있으니…(후략)




1934년 7월 13일자 1면 단군성적 구월산등람지(3)


단군대와 마한동


(전략)…사원의 서측에서 십여 척 쏟아지는 세심폭의 웅덩이를 스쳐 서봉 위에 있는 단군대를 순력키로 한다. 석등송애로 절정을 지나 남안에서 동으로 암벽을 돌 새 지팡이 물병 모자를 다 벗어놓고 절정의 밑에 천성한 감실처럼 된 석대의 위를 몸을 굽혀 자칫 내려섰다. 동향한 위치에서 남북으로 5,6간의 펀펀한 현반이라할까? 넓이 수삼 척의 화강암 바닥이 수련자가 정좌 명상키에 좋을 만하고 움쑥한 암옥이 적이 풍우를 피하게 하니, 여기가 즉 단군대로 3자의 서투른 조각이 남아 있다. 한 손에 등걸을 잡고 배 깔고 엎드려 대 아래를 내려다보니 단애천인(斷崖千인) 향명삭막(香冥朔寞)함에 늠연히 놀란지라, 일어서 정좌하며 가가대소를 깨닫지 못하였다.…(중략)…이날은 26일 패엽에서 자고 이튿날 두 필 말을 세내어 삼성전으로부터 월정사로 돌아 단군조천의 전설지인 아사봉을 등람키로 하였다. “이러봐라 어이! 이러봐라 어이!” 고삐를 잡은 농촌의 마부들은 이렇게 말을 몰며 우리를 순력의 길에 보내준다. 패엽리를 나와 화장동을 지나 전동(殿洞)에 오니 즉 삼성리라, 말을 내려 마부에게 맡기고 또 하나의 마부를 앞장세워 산허리에 있는 이제는 빈 터인 삼성전 고적을 보러간다.…(중략)…삼성전은 어느때의 창건인지 모르나…(중략)…일시 평양에 삼성전을 이설한 후 마침 황해 일대에 나쁜 전염병이 유행하므로 인민의 뜻과 소원을 좇아 다시 구월산 성전을 존치하고 매년 춘추로 치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폐허된 지 벌써 수십 년이다.…(후략)




1934년 11월 11일자 석간 2면




오십여명 참예하에 단군릉제를 거행

상달 초사흔날 오전 구시부터, 강동각면의 유지가 모여


(강동) 기보=강동대박산 단군릉제를 예정과 같이 9일 상달 초사흘 오전 9시에 강동 원탄 고천 삼등 봉진 만달 각 면에서 모인 제관이 기성회장 김상준씨를 비롯하여 50여명 참석으로 동 11시까지 엄숙한 제향을 성대하게 무사히 마치었다는데 제관순서는 아래와 같다고 한다.…(후략)


단군릉 수축 소식


석물은 거의 완성, 능수축(陵修築)은 명춘에, 모혀든 성금은 겨우 삼천원, 기성회서 위원회 개최


(강동) 지난 9일 12시부터 강동 명륜당에서 위원 50여명이 회집하여 회장 김상준씨 사회로 경과보고와 상황을 보고하고 능 수축과 수호각 건축에 대하여 토의하고 석물에 대한 상황을 의논하였는바 전부 총예산이 7천원가량인 바 아직 3천원에 지나지 못하므로 앞으로 일층 더 활동하여 사업에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임원제씨에게 부탁하고 동 오후 5시에 무사히 산회하였다한다. …(후략)  




 단군릉 수축에 대한 기사는 1935년 10월 31일자 2면에 상석을 안치하고 ‘음력 시월삼일’에 대제향을 올렸다는 소식을 전하는 등 계속됐습니다.




  서울대 문리대교수와 학술원회원을 지낸 박종홍(朴鍾鴻) 선생은 박사점(朴士漸)이라는 필명으로 1935년 1월 1일부터 8회 연재한 신춘특별논문 ‘조선의 문화 유산과 그 전승의 방법’에서 “과거의 문화유산을 수집 발굴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935년 1월 1일자 부록 7-1면




조선의 문화유산과 그 전승의 방법(1)


첫째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을 묻고 있는가. 주저할 것도 없이 조선의 문화유산에 관하여 묻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조선의’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벌써 일반적 문화유산에 대한 일정한 태도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왜 하필 ‘조선의’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관점을 ‘조선의’ 문화유산에 국한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1935년 1월 8일자 3면 조선의 문화유산과 그 전승의 방법(7)


조선의 과거의 문화유산을 들추어내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무도(無道)한 침공×××××으로 말미암아 그의 문화유산의 분실(焚失), 퇴폐(頹廢)분산이 심한 우리 조선에 있어서는 이러한 수집, 발굴 등의 사업도 그 전승의 예비적 단계로서 불가결할 노작(勞作)이라 할 것이다.


백남운에 대한 비판적 극복은 맑스주의 역사학의 발전에 있어 가장 긴급한 과제로서 간주되었다. …(중략)…그 비판의 요점은 백남운의 관점이 보편성을 강조하는 ‘기계적 공식주의’이며, 따라서 그것은 사적유물론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관념론이라는 데 있었다. 백남운의 입장을 공식주의로 언급한 것은 기전외(旗田巍)가 처음인데, 이후 박사점(朴士漸), 한흥수, 이청원, 김광진 등 맑스주의 연구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고, 경성제대 교수 삼곡극기(森谷克己)가 이에 가세하였다(박사점<朴士漸>, ‘조선의 문화유산과 그 전승의 방법(1)~(8)’, 동아일보 1935년 1월1~9일자). 이들은 백남운이 사적 유물론을 전면에 표방하게 되었던 1930년대 초의 학계 및 사상 상황과 이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보다는 맑스주의 학문의 확립과 관련하여 부각시킨 ‘일원론적 역사법칙’ 개념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일원론적 역사법칙을 한국사에 적용시키는데 급급하여 한국사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공식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예컨대 박사점은 한국사의 과학적 이해와 민족의 진로를 위해서는 오히려 한국사의 특수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거의 동궤적(同軌的)인 발전 과정을 경과하여 왔다는 의미에서 세계사적(世界史的), 일원론적(一元論的) 역사법칙만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야 특수성(特殊性)을 외면적(外面的)인 중요치 못한 사소한 차이로 간과(看過)할 것인가, 특수성(特殊性)을 운운(云云)함이 마치 역사법칙에 대한 반동(反動)과도 같이 생각되어야 할 이유가 어데 잇는가.……조선의 현단계(現段階)에 잇어서는 문화유산(文化遺産)의 특수성(特殊性)을 시인하며 천명(闡明)하는 것이 노예화(奴隸化)로 빠지는 사도(邪道)이기커녕 유일한 갱생(更生)의 활로(活路)인 것이다(박사점, 앞의 글 (4) (5), 동아일보 1935년 1월 5~6일자). 물론 박사점의 백남운 비판은 특수성론의 가장 극단적인 예였다. 그리고 이들이 강조하는 ‘조선의 특수성’은 대개 한국사의 정체적 타율적 성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중략)…공식주의 외에 이들이 거론한 것은 실천적 위상(位相)의 문제였다. 이들은 백남운을 당파성에 기초하지 못하고, “학자적인 소위 진리탐구적인 학적(學的) 노력”에만 한정되어 “현실적 실천을 자각적으로 유리(遊離)한……학문을 위한 학문, 이론을 위한 이론”을 추구하는 상아탑 속의 관념론자로 비판하였다.(박사점, 위의 글(3), 동아일보 1935년 1월 3일자)” (방기중,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59쪽)


  논설반 촉탁 기자를 역임하기도 했던 위당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1935년 1월부터 1936년 8월 27일까지 283회에 걸쳐 ‘오천년간의 조선의 얼’을 연재하면서 단군의 의미를 부각하는 한편 1935년 개천절 칼럼에서 단군의 가르치심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세상에 널리 펼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1935년 1월 16일 조간 1면, 5천년간 조선의 얼-시조단군(1), 정인보


단군의 시조는 단군이시니 단군은 신이 아니요 인(人)이시라. 백두의 고산(高山)과 송화의 장강(長江)을 시기(始基)로 하여가지고 조선을 만드시매 조선의 ○류-단군으로부터 생기고 조선의 정교(政敎)-조선으로조차 열리었나니 무릇 우리 선민(先民)으로서 어떠한 일이던지…(후략)




1935년 10월 29일자 1면 




 단군 개천(開天)과 시월 – 정인보(鄭寅普)


음력 10월은 조선인 제선(祭先)의 성삭(聖朔)이니 내외문헌에 아직껏 남은 바가 많으며 경향각지를 통하여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보사(報祀)를 행하는 것이 그대로 고속(古俗)의 유존(留存)이니 그 침투 보편의 도(度) 원체 극한지라 아니 사무친 곳이 없고 아니 미친데가 없어 무처 불연(不然)한 동시 도리어 항(恒)으로만 여기어 내려올수록 그 속(俗)은 있으되 그 속의 소본(所本)함을 거의 범시(汎視)하게 된 지도 오래다.…(중략)…10월이라 상달, 흰무리 시루 앞에 정(正)히 밝은 참기름불이 몇몇 곳인지 알랴? 자녀를 비는 주인부녀 단군이 누구신지도 모를 수 있으리라마는 그 정성은 홍익인간(弘益人間) 옛 심인(心印)에로 향하는 것이다. 침투에서 보편에서 범연한 듯한 속에 두렷한 옛 전형(典型)이 있다.


 “이에 대해 정인보는 ‘조선의 얼’ 서두에서 “조선의 시조는 단군이시니 단군은 신이 아니요 사람이다. 백두산과 송화강을 터전삼아 조선을 만드시니, 조선민족은 단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여 단군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며 백두산에 도읍한 한민족의 시조요 한민족의 영광과 번영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위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면서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는 현존하는 척발씨(拓跋氏)의 위서가 아니라 왕침(王沈)의 ‘조위서(曺魏書)’임을 논증한 다음 현존하는 ‘위서’만 가지고서 단군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단군신화의 근거가 되는 단군기사에 대해 정인보는 신화적 부분과 사실적 부분으로 구분하여 파악함과 동시에 사실부분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켰다. 즉, 그는 단군신화에서 환인(桓因)에서부터 웅녀까지의 부분은 신화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삼국유사’의 “단군왕검이 당고(唐高,요<堯>) 즉위 50년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칭했다”는 부분과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단군이라 명하고 조선지역을 점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고시라(故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는 모두 단군의 후예이다”라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사실로 간주해야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시조가 단군임은 의심할 바가 없는 사실이며 기록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사실은 없어지지 않고 민간에 남아있게 된다고 주장했다.…(중략)… 이상 정인보의 단군론은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파악했으며, 단군에 관한 기록을 신화부분과 사실부분으로 분리시켜 신화속에서 역사성을 추출하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주장은 최남선의 단군론과 신채호의 단군론에 기초한 것으로서 독창적인 의미는 적은 편이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일제 관학자와 그 아류들의 단군말살론을 비판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경인문화사, 2007년, 387~389쪽)




  동아일보는 창간 후 첫 사업으로 단군영정 현상모집을 한데 이어 황폐해진 단군릉 수축운동에 이르기 까지 일제하에서 단군에 대한 사설, 논문, 기사를 4백여 차례에 걸쳐 게재했습니다. 





2 Comments »

  1. 민족의 조상이신 단군성제에 관련한 너무 소중한 자료와 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Comment by James Hahn — 2015/11/06 @ 10:04 오전

  2. famous lesbian actresses list…

    D-Story 74 : 민족의 뿌리 찾아(2) 단군 유적 보존운동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트랙백 by famous lesbian actresses list — 2015/12/02 @ 1: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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