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3면 창간 축하 만평은 ‘갓 태어난 동아일보’가 ‘언론’ 이란 바구니에 ‘단군(檀君) 선조(先祖)의 유훈(遺訓)’ 을 담아 조선의 민중들에게 전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시(社是)의 하나인 ‘민족주의’의 뿌리를 ‘단군’에서 찾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3면
창간 후 동아일보가 벌인 첫 사업 역시 단군(檀君) 영정(影幀) 현상모집이었습니다.
1920년 4월 11일자 1면
단군 영정 현상모집 사고(社告)
“단군은 우리 민족의 종조(宗祖)이시오. 우리 근역(槿域)에 건국하신 제일인(第一人)이시오. 가장 신성하신 대위인이시라. 건국하신 사업이 역연하시고 경국(經國)하신 역사가 찬연하시고 신성하신 혼령이 엄연하시사 금일 오등(吾等) 자손에 전(傳)케 되시고 승(乘)케 되신지라. 우리는 앙모(仰慕)와 존숭(尊崇)을 난금(難禁)하는 충심으로써 숭엄하신 단군 존상(尊像)을 구하여 독자(讀子)와 공(共)히 배(拜)하려고 자(玆)에 본사는 현상(懸賞)하여 감히 존상(尊像)을 모집하오니 강호형제(江湖兄弟)는 응모하시오.”
응모 주의
1. 존상(尊像)은 고래로 보관되었던 것을 발견하여 모사함도 양호하며 역사적 색채를 포함케 하고 신성(神聖)과 숭엄(崇嚴)과 고상(高尙)을 상징하여 창작한 존상을 특히 환영함.
1. 화본(畵本) 급(及, 및) 화(畵)의 종별은 제한치 아니함.
1. 화본은 일체 차(此)를 환부치 아니함.
1. 화본의 표봉(表封)에는 반드시 ‘현상응모원고’라 주서(朱書)함을 요함.
1. 화본의 응모기한은 4월 30일까지 제출함을 요함.
1. 화본의 심사는 본사 편집국에서 엄정히 차를 행하되 1등 1명, 2등 2명, 3등 3명을 선택하여 당선된 화본은 5월 10일 본지에 발표함.
1. 상은 심사 후 등급을 정하여 본지에 게재된 당선자에게 송정(送呈)함(상의 품종은 추후 발표함).
단군기원 4253년 4월, 동아일보사
단군 영정 현상모집 사고(社告)는 1920년 4월 11일부터 5월 10일까지 무려 11차례 게재됐습니다. ‘단군의 자손’이니 ‘배달민족’이란 말이 잊혀져 갈 때 동아일보는 민족의식을 살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단군 영정 현상모집 사고(社告)를 11차례나 낸 것입니다.
당시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나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시내 숭동례배당에서는 학생대회주최로 ‘인격으로 완전함에는 가정교육에 재(在)하냐? 학교교육에 재하냐?’랴 하는 문데로 녈렬한 토론회가 잇섰다…(중략)…중동학교 신혁익군이 공교로히 ‘단군 자손이니 배달민족이니 참담한 조선이니’하며 한참 웅변을 펼치다가 마참 림석하엿든 일본인에게 중지를 당함이더라.” (동아일보 1920년 5월 31일자 3면)
“단군터천(御天)기념절에 학생 7명 체포, 어텬절을 긔념하랴고 광고지를 써부친 혐의” (1921년 4월 25일자 3면)
“단군어천절기념사건의 학생 계속 검거, 또 륙명이 톄포” (1921년 4월 25일자 3면)
“창신(昌信)학교 교사 김여학(金麗鶴)씨 방면, 경남 마산부에서 단군어천절 지도의 혐의로 잡혓든” (1921년 5월 10일 3면),
“혜산서 활동, 주동진(朱東煥) 오운(吳震) 양 청년 검거, 단군탄신기념 웅변대회 통지문을 경찰 당국의 양해 없이 돌렸다고” (동아일보 1928년 11월 18일자 2면).
1920년 6월 6일자 3면
단군 영정 응모기한 연기 사고
단군 영정에 취하여
응모 기한 급 발표기(發表期) 연기
거(去) 1일로써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던 단군 영정의 현상모집 건은 소정 기한 내에 도착한 응모 화폭(畵幅)이 56건에 달하여 예기 이상의 다수한 응모가 유하였으나 원래 단군의 영정을 창작함은 기배의(其配意)와 성안이 실로 용이치 아니하여 차(此)에 비상한 시간을 비(費)하고 차(且) 필(筆)을 집(執)한 후에도 신속히 만족한 결과를 득키 난함으로 상당한 기간의 유예를 희망하는 인사가 다수함을 인하여 일시 발표를 중지하고 응모 기한을 본년 9월 말일까지 퇴정(退定)하여 기후(其後) 신중한 심사를 경하여 구력 10월 초삼일 개천절(開天節)에 본 지상에 발표하겠사오니 유지 인사는 속속 응모하시압. 재(再) 당초의 모집 규정은 응모한 화본(畵本)을 일체 환부치 아니하기로 하였으나 당선된 이외의 화본은 심사 발표 후 응모자의 희망이 유한 시는 차를 환부함. 동아일보사
4월 30일 마감한 공모에 만족할만한 결과가 없어 응모기간을 5월 15일로 연기했고 다시 9월 말로 연기해 1920년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 발표하기로 하였으나, 9월 하순 본보의 제1차 무기정간(1920년 9월 26일~1921년 1월 10일)으로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부득이 중단됐습니다.
단군 영정 응모기간 중인 1920년 6월 22일자 1면 사설은 ‘조선혼(朝鮮魂)과 조선식(朝鮮式)의 역사는 성조(聖祖) 단군(檀君)으로부터 나온다’ 며 ‘그 혼으로 조선인을 생(生)하며, 그 식(式)으로 조선인을 양(養)하나니 그 혼으로 생(生)한 인(人)이 어찌 그 혼을 망(忘)하며 그 식(式)으로 양(養)한 인(人)이 어찌 그 식(式)을 탈(脫)하리오’ 라고 하여 조선 민족에 있어 단군 선조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1920년 6월 22일자 1면 사설
자정신(自精神)을 환(喚)하고 구사상(舊思想)을 논(論)
“조선인의 정신은 조선혼(朝鮮魂)으로 출(出)함이며 조선인의 생활은 조선식(朝鮮式)으로 영(營)함이니 이 조선식과 조선혼은 그 역사가 장차원(長且遠)하니라. 성조(聖祖) 단군(檀君)께서 그 식(式)과 혼(魂)을 창조하신 후 지금 4천여 세(歲)에 반도의 지축(地軸)에 그 혼이 깊이 인각(印刻)되고 반도의 지면(地面)에 그 식(式)이 널리 충만하여 이에 그 혼으로 조선인을 생(生)하며, 그 식(式)으로 조선인을 양(養)하나니 그 혼으로 생(生)한 인(人)이 어찌 그 혼을 망(忘)하며 그 식(式)으로 양(養)한 인(人)이 어찌 그 식(式)을 탈(脫)하리오.”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 최초의 사업으로서 전설적 국조(國祖)인 단군의 영정(초상화)을 일반으로부터 모집하였다. 이것은 한국 민족의 순수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으나, 민족주의를 본령으로 한 동아일보가 외래의 사상보다도 민족 본래의 가치를 탐구, 보존하는 것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규환, ‘일제의 대한 언론 선전정책’, 이우출판사, 1978, 232쪽)
“단군께서는 우리 겨레의 삶과 영의 원천이시다. 우리의 간곡한 정성은 그 거룩하신 존상이나마 길이 보전코저 창간 후 첫 사업으로 그 존상을 공모해 보았으나 아득한 반만년전의 일이오, 첫째 어려운 과제인 만큼 이에 응모한 인원이 겨우 56건으로 그 중에 뽑을만한 것이 없어서 결국은 약속 없는 시간으로 흘려보내게 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1935년 4월 6일자 석간 3면, 창간 15주년 기념 특집)
“근대사에서 단군 영정에 관해 국민의 관심을 고조시킨 민족지 동아일보의 단군 영정 공모를 들 수 있다. 동아일보 1920년(단기 4253년) 4월 11일자 현상 공모 광고문에 의하면 동아일보는 창간 첫 사업으로 전개한 이 영정 공모의 취지를 ‘우리 민족의 종조이시오 가장 신성하신 대 위인인 단군의 존상(尊像)을 구하여 독자(讀子)와 공(共)히 배(拜)하려고 한다’라고 뚜렷이 밝혀 두었다.” (김남극 편, 단군 영정의 역사, ‘단군사적기 – 기타 참고록’, 2000, 13~14쪽)
“1920년대 다만 동아일보가 관심을 기울인 민족문화운동은 주로 ‘단군’ 숭배의식의 고취운동이었다. 단군에 대한 숭배는 이미 대한제국 말기 대종교를 창건한 이들에 의해 강조되었고, 1910년대 주로 국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들 사이에서 대종교와 단군 숭배의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국내에서 단군 숭배운동이 확산된 것은 1920년대였다.” (박찬승, ‘동아일보의 민족문화운동’,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3권 언론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47~148쪽)
1년여 뒤, 1922년 11월 21일자 3면에 한 단군 영정이 게재됐습니다.
금일(今日), 개천성절(開天聖節)
금 이십일일은 음력으로 십월 초삼일이라 이날은 우리 조선 민족의 선조가 되시는 단군께옵서 태백산 단목하에 탄강하신 날이므로 자래로 우리 풍속에 십월 상달이 되면 집집마다 떡을 하여 먹는 것도 이날을 기념함이오 금일 하오 한시에는 시내 계동에 있는 대종교 남도 본사에서 개천경배식(開天敬拜式)을 거행한다는데 금년은 단군기원 사천이백오십오년이라더라. (사진은 단군 천제의 영정)
이 기사가 영정의 출처를 밝혀 놓지않아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수 없으나 ‘최고(最古) 단군 영정’ 논란을 일으켰던 단군 영정과 유사합니다.
민가서 보존 햇빛 본 성조상
일제때 서울 휘문의숙에 유학했다는 해남의 한 청년이 구월산 수학여행길에 그곳 삼성사에서 가져왔다는 단군 영정.
“(전남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422 이가우) 저희 재당숙인 이종철씨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니셨는데,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로 수학여행을 가셨다가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인솔 교사가 홍암 김 선생이라는 분이였다고 합니다. 가보니까 건물은 넘어질 듯 허물어져 있는데다가 관리자도 없어서 단군 영정은 누가 가져가 버려도 모를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정을 몰래 모셔와 이곳에 성전을 지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때 구월산의 제기와 솥도 가져왔다고 하는데 지금 제기는 동네 새마을회관 창고에 있습니다…(중략)…현진건의 ‘단군성전 순례기’를 보면 일제는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에 구월산 삼성사를 공매에 붙여 헐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종철씨는 그 전에 삼성사에 가서 영정과 제기를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박성수<朴成壽>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단군기행’, 교문사, 1988, 116~117쪽)
1925년 11월 18일자 1면 머리 사설 제목은 ‘개천절(開天節)’이었습니다.
1925년 11월 18일자 1면 사설
개천절 – 조선심경(朝鮮心鏡)의 중경일(重慶日)
‘시월상달’ 은 우리 조상이 5천년, 아니 1만 년 전 부터 일 년에 한 번씩 조선심(朝鮮心)을 깨끗이 하고 가다듬고 반성하는 성스러운 날로 기념하는, 단군 성조가 조선을 이 땅에 세운 기원절이다.…(중략)…각인(各人)의 생명은 짧다. 그렇지만 각 조선인의 사명은 길다.…(중략)…조선인 우리가 ‘동방의 빛’의 사도이기는 아득한 옛 날 옛 적에서나 4천 3백년전쯤으로 끊어 말하는 단군의 개천 기원 당시에서나 해모수 때에나 을지문덕 때에나 화랑 때에나 동학(東學) 속에서나 똑같고 털끝만큼 다를 리 없는 것이다.
1920년 9월 25일자 1면 사설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에서 ‘혹은 경(鏡)으로, 혹은 주옥(珠玉)으로, 혹은 검(劒)으로, 그 타(他) 하등(何等) 모양으로든지 물형(物形)을 작(作)하여 혹처(或處· 어떤 장소)에 봉치(奉置)하고 신이 자(玆)에 재(在)하며 혹 영(靈)이 자(玆)에 재(在)하다 하여 이에 대하여 숭배하며 혹 기도함은 일절(一切) 우상숭배라 할 것이니…’ 라고 하여 일본 황실의 상징인 경(鏡) 주옥(珠玉) 검(劒), 소위 ‘3종의 신기(神器)’를 모독하였다는 이유로 창간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던 동아일보를 1차 무기정간 시켜 3개월 이상 신문을 낼 수 없게 하여 단군 영정 현상모집도 끝낼 수 없게 했던 일제.
그 일제의 한 지식인(오다 쇼고<小田省吾>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이 1926년 2월 총독부의 어용단체인 조선교육협회 기관지 ‘문교(文敎)의 조선(朝鮮)’ 2월호 ‘소위 단군전설에 대하여’ 에서 단군 이야기는 ‘6백여 년 인각사(麟角寺)의 주지 일연선사(一然禪師)가 지은 책, 삼국유사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그 후 과장, 확대된 전설에 불과한 것이며 조선 병합의 결과 내선이 한 집을 이룬 오늘, 이 단군 숭배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또 별개의 문제’라는 요지의 글을 게재하자 동아일보는 당대의 국학자이자 동아일보 촉탁기자이던 최남선 선생을 통해 즉각 반박했습니다.
1926년 2월 11일자 1면 사설
단군 부인(否認)의 망(妄)(상) – ‘문교(文敎)의 조선朝鮮)’의 광론(狂論)
“조선의 역사로서 단군을 삭거(削去)하려 함은 일본 학자의 전통적 유견(謬見·잘못된 견해)일 뿐 아니라 또 일본 위정자들의 조선 정신을 잔학(殘虐)하는 그의 일 필요(一 必要) 수단을 삼는 바니 여기 대하여 곡학첨관(曲學諂官·학문을 곡해하여 관에 아첨함)의 추학구(醜學究·추한 학문 연구)가 학문의 탈을 씌운 비학문의 꼭두각시를 만들어 낸 것은 일(一), 이(二)에 그치지 않는다.”
1926년 2월 12일자 1면 사설
단군 부인의 망(하)
“이것은 결코 감정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최근의 학적(學的) 특히 민족학적 연구에 의하여 단군의 정체 실증이 확연 무의(無疑·의심할 것이 없음)한 것을 모르고, 진부한 방법과 애루(隘陋·비좁고 누추함)한 관념으로써 이 중대한 방면에 대하여 맹장(盲杖· 분별없이 매질함) 독설을 나불거린 것이기 때문에 그 광패(狂悖· 미친 사람처럼 사납고 막됨)를 탄정(彈正)치 아니치 못하는 것이라, 적당한 기회에 저네의 우몽(愚蒙)을 헤쳐 주기도 하려니와, 이 잡지가 널리 조선인 교육자의 눈에도 걸려 이 변변치도 못한 의론(擬論)을 혹 학적 근거나 있는 줄로 생각하고 유신(謬信·잘못된 믿음) 맹종하는 이가 일인이라도 있을까하여 위선 몇 마디 파사(破邪·그릇된 것을 깨뜨림)의 부리를 딴다.”
이어 최남선 선생의 ‘단군론,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연원연구’를 1926년 3월 3일자부터 7월 25일자까지 77회를 연재했습니다. 연재 사실을 알리는 1926년 2월 17일자 1면 사고(社告)에서 동아일보는 “우리는 진리를 요한다. 그럼으로 만일 일인 학자의 그 말이 진리라 하면 우리는 허심탄회로 그것을 수용하리라. 그러나 그의 설(說)은 망설(妄說)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양심을 위하여 묵(默)하지 못할 것이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926년 2월 17일자 1면
사고(社告)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단군사론(檀君史論)
일간(日間) 본지(本紙)에 연재
◇단군이 우리 조선 민족의 혈육의 조(祖), 정신의 조(祖), 문화의 조(祖)로 우리 민족의 숭앙의 표적이요, 조선 역사의 근원이요, 중심 문제임은 물론이어니와 육당 최남선 씨의 심혈을 뿌린 연구의 결과로 단군 문제는 일본 역사, 중국 역사, 일반 동양 제 민족의 역사 문제의 관건인 것이 분명히 되었다. 육당의 단군 연구로 하야 조선사, 일본사 및 동양사는 근본적으로 개조되리라고 한다.
◇근래에 천식(淺識)하고 편견한 일본의 모 학자는 단군말살론을 감히 첩첩하였고 이에 대하여 자국의 역사에 정견이 없는 우리들은 소조(所措)를 모르고 아연하다. 이 무슨 수치인가, 이 무슨 비애국인가.
◇우리는 진리를 요한다. 그럼으로 만일 일인학자의 그 말이 진리라 하면 우리는 허심탄회로 그것을 수용하리라. 그러나 그의 설(說)은 망설(妄說)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양심을 위하여 묵(默)하지 못할 것이오 또 우리는 우리의 혈(血)을 사랑하고 우리의 민족심을 사랑한다. 이에 일면으로 피체(彼體)의 상(象)을 계(啓)하고 일면으로 오조(吾祖)의 정신을 계시하여 오족(吾族)의 민족적 이상을 확립하려함이 육당 최남선의 분연히 집필하는 소이(所以)다.
◇김부식(金富軾) 기타 부유(腐儒)의 흐려놓은 조선사는 이번 최 육당의 단군사론(檀君史論)으로 하여 그 진면목과 본(本)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최 육당은 ‘이 글을 쓴 뒤에 나는 붓대를 내어 던져도 좋다’고 말하였다.
1926년 3월 3일자 1면
단군론(1)
조선이 동아(東亞) 최고(最古)의 일국(一國)으로 단군이 그 인문적 시원(始源)이라 함은 조선인이 오래 전부터 전신(傳信)하는 바이다. 유문(遺文·남겨진 문헌)이 간략하야 그 상(詳)을 얻기 어려우나 조선 민족의 연원과 문물의 내력을 오직 여기에서 징고(徵考)할 밖에 없을진대 독일(獨一)한 유주(遺珠·잃어버린 구슬)이기에 더욱 그 보배로움을 볼지니…(중략)…더욱 조선은 동아에 있어서 중국 이외에 수천년 통관(通貫)한 국토와 문물의 유일한 보유자요, 겸하야 그 인문지리적 위치가 민족 및 문화 유동의 간선(幹線)에 당(當)하야 사방의 풍우(風雨)가 대개 흔적을 여기 머물렀으니 단군이 어찌 조선사 만의 문제며 조선이 어찌 동앙사 만의 문제랴.…(후략)
1926년 7월 25일자 1면
단군론(77)
전략)… 필자로서 독자께 – 처음에 ‘단군론’을 40회의 예정으로 그 요약을 술(述)하려 하였으나, 곡변상잉(曲辯相仍·그른 것을 옳다고 꾸며대는 말이 쌓임)의 여(餘)와 군의전자(群疑轉滋·많은 의심이 늘어남)의 제(際)에, 문헌과 민속의 양방으로 오인(吾人) 입론(立論)의 근거를 시(示)함이 또한 긴요할 것을 사(思)하여 이렇게 번쇄(煩碎·너저분함)와 장황을 무릅쓰게 된 것이라, 일반 독자의 염고(厭苦· 싫어하고 고통스럽게 여김)를 살는지는 모르되, 단군의 학적(學的) 파현(破顯·사견과 사도를 깨고 정법을 드러내는 일)과 합리적 호지(護持·보호하여 지님)가 어떻게 오인 당면의 대사건임을 생각하면 다소 원량(原諒·용서)하심이 있으리라 합니다. 이제 백두산 참근(參覲)을 위하여 앞으로 잠시 속론(續論)을 정휴(停休·쉼)치 아니치 못함은 더욱 죄송한 일이나, 성적(聖蹟)의 답험(踏驗·실지로 답사함)은 본론의 상(上)에도 다소의 새로운 색미(色味)를 기대할 듯합니다. 왕험성신설(王險城神說)은 아직 인명으로의 왕검(王儉)에 대한 고찰이 남았으며, 이것이 필(畢)하면 묘향산 신설(神說)에 대하여 약간 검핵(檢覈·조사하여 밝힘)을 시(試)하여 말삭론(抹削論)의 전량을 마치고, 비로소 본론에 입(入)하여 우리의 견해를 피력하게 됩니다.
1926년 11월 7일자에도 ‘개천절’이란 제목의 1면 머리사설이 나갔습니다.
1926년 11월 7일자 1면 사설
개천절 – 전민적(全民的) 명절
조선의 오랜 신앙을 거(據)하건대, 그 종성(種姓)과 문화의 대원(大原)은 천(天)에 있고 천주(天主)는 그 도시조(都始祖)라 하여 우주의 섭리자인 천은 아울러 민족의 원조(元祖)와 국가의 창업자로 최고의 숭봉(崇奉)을 받았는데, 그네의 고어(古語)에 천을 주로 ‘밝’이라 하고, 천주(天主)를 주로 ‘당굴’이라 하고…(중략)…그네의 의식한 인문의 기원은 요하건대 천제자(天帝子)의 손에 천국을 인간에 연장한 것이 그것이요, 조선인은 그 선민(選民)이라 함인데, 이 인문 최초의 출발점을 ‘밝은’ 이라 일컬어 인간에 있는 최고 제일의 대사실로 이를 감모(感慕)하고 이를 앙대(仰戴)하니, ‘밝은’은 역하면 ‘개천’이라는 의(意)이었다.…(중략)…더욱 조선인의 민족적 의식이 신예와 한 가지 심밀(深密)을 가하려하는 금일에, 정신 쉬려(淬勵·스스로 힘써함)상의 모든 시간적 기회를 읽은 처지로 인류 양심의 발로이자 겸하여 민족정신의 결정인 단군(壇君)의 개천절을 그전보다도 더 탄앙(嘆仰) 송축함은 우리의 당연한 생활 추향(趨向)이라 할 것이요, 불탄일과 크리스마스가 다 상당한 감념과 실행력을 가지는 우리로서 우리의 정신적 창조요 역사적 가치인 천주(天主)이자 성조(聖祖)의 개천대절이 그보다 더한 건성(虔誠)으로 의식 우(又) 천리(踐履)되지 아니해서 아니될 것은 노노(呶呶·구차한 말로 자꾸 지껄임)를 수(須)치 아니할 바이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