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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의사 의거 다음날인 4월 30일 오후 발행된 동아일보 1932년 5월 1일자 2면의 도산 안창호 선생 체포 소식도 동아일보의 특종이었습니다. 동아일보 호외 발행 직후 일제가 보도를 통제, 국내의 다른 신문에는 5월  6일 보도 통제가 일부 해제된 뒤 실렸습니다. A일보는 5월 7일자에 ‘상해 30일발 전보’를, B신보는 5월 8일자에 ‘육군성 발표’를 인용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5월 1일자 2면






상해사건직후

안창호 피체

교민단장 이유필(李裕弼)가(家)에서

일본 영경(領警)에 인도


(상해 신특파원<申特派員>전보) 작일 사건 발생 직후 오후 1시 일본 총령사관 경찰은 불란서 조게 공부국 경찰서에 향하야 엄중 교섭하야 사건의 주모자로 인증되는 교민 단장 리유필(李裕弼)의 체포를 의뢰하얏슴으로 불란서 경찰대는 즉시 하비로 보강리 27호 리유필의 집을 습격하매 마침 리는 업슴으로 그 곳에서 리의 귀택을 기다리든 중 안창호(安昌浩)가 그 집을 방문하려고 드러갓든바 불란서 경관대는 안창호를 체포하야 공부국 경찰서에 데려가서 약 1시간쯤 심문한 후 오후 4시 일본령사관 경찰에 인도하얏다. 5시경 기자는 불란서 경찰을 방문하고 서장을 맛난즉 서장이 말하기를 안(安)을 리유필(李裕弼)로 잘못알고 일본경찰서에 인도하얏다고한다. 그가 체포될때까지 살던 하비로 1014통 29호의 2층에 잇는 좁은방에는 정치시사에 관한 서적과 낡은 양복 두벌이 잇슬뿐이엇다. 그는 화초를 조하하야 그 뜰에는 그의 손으로 재배한 화초가 만발하야 잇섯다. 그의 체포되엇다는 소식은 전 상해에 일대 센세이숀을 일으키고 잇다. (사진은 안창호)

 


  안창호 선생이 체포된 직후 프랑스 경찰에 체포 경위를 알아보고 선생의 집을 방문해 분위기를 스케치한 이 기사는 임시정부 관계자의 제보가 없으면 쓸 수 없는 내용인데 당시 동아일보 상해특파원 신언준이 취재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5월 2일자 1면에 “5월 1일부 발행 본보 제4811호는 기사중 당국의 기위에 저촉된 바가 유하야 발행금지의 처분을 당하얏기로 해(該) 저촉된 기사는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반포하얏삽기 자에 근고함”이라는 사고(社告)가 나간 것으로 보아 이 기사를 포함한 관련 기사 일부가 삭제된 것으로 보입니다.  




  김효숙에 따르면 안창호 선생의 체포 소식은 상하이 시내에 윤봉길 의거 관련 첫 번째 호외와 두 번째 호외 발행 사이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하오 5시경에 하비로 보강리 54호 민단장인 이유필(李裕弼) 집을 암행했다. 이유필(현 동국대학 불문학교수 이만영씨 부친)은 미리 피신하고 없었다. 그 때에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이만영 군과 청소년단 지도 조직관계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고 또 꼭 일러둘 용건도 있어서 잠깐 만나고 피신하려는 생각으로 보강리 54호에 들렀다가 공교롭게 밀파한 일 형사에게 맞닥뜨려 꼼짝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삽시간에 도산 선생의 피포가 우리 한교(韓僑)에게 알려지자 우리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금방 백천(白川)의 죽음을 통쾌했건만 세상은 희비쌍곡이 격식인지 귀하신 도산 선생님의 체포를 슬퍼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도산 선생님과 백천(白川)을 막바꾼 셈으로 되다니 원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號外阿! 號外(호외입니다 호외!)

虹口公園 投彈者是 誰?(홍쿠공원 폭탄 던진 자는 누군가?)

韓國靑年 尹奉吉(윤봉길)(한국 청년 윤봉길이다)

一彈爆殺了 白川大將(한 방 폭탄으로 백천대장을 살했다)


거사인이 한국인인 것을 각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자 중국 당국은 감탄했다. 한국인의 항일투쟁을 찬양하며 배후인 임정(臨政)을 추대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은 불란서 조계에 기거하는 한교들의 피해를 면하기 위하여 김구 선생 자신의 단독 행위임을 발표했다.” (김효숙, ‘윤봉길 의사와 도산 선생’, 기러기 1966년 7월호)




 한인애국단이 그해 12월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펴낸 도왜실기(屠倭實記)와 해방 후 엄항섭 선생이 국내용으로 1947년 다시 발간한 도왜실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체포 전후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深表同情於倭奴. 乃不經合法手續. 於同日午後三時許. 卽單獨襲擊霞飛路寶康里五十四號李裕弼氏住宅.” (1932년판 屠倭實記 23쪽)


“一九三二年五月三日大陸報社論

安昌浩案

安昌浩於四月二十九日下午.” (1932년판 屠倭實記 26쪽)




“의외에도 법조계 관헌이 왜놈들에게 깁흔 동정을 표시함으로 합법적 수속을 밟지도 않코 동일 오후 세시경에 용비로 보강리 54호 이유필씨 댁을 단독으로 습격하게 되엿다.” (1947년판 도왜실기 78쪽)


“안창호씨의 해괴한 체포 (1932년 5월 3일부,대륙보사론<大陸報社論>) 안창호씨는 4월 29일 오후 법조계에서 일본 군사 당국에 체포된 후, 그 우인들과 면회도 불가능하게 되었고 근일, 안씨의 체포에 관하야 전해지는 소식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만흐니 풍설에 의하면, 안씨가 체포된 것은 금요일 새벽으로 폭탄사건이 발생되기 전이라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폭탄사건 발생후에 체포되었다.” (1947년판 도왜실기 84쪽)




 도산의 체포에 대한 김구 선생의 기술.


  “나의 편지를 보고도 그날은 아무 일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이씨 집을 찾아갔던 안창호 선생이 체포된 것은 그의 불찰이나, 주모자가 아무 발표가 없는 관계로 사람들이 함부로 체포된다는 원성이 있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여러 동지들에게 주장했다. 앉아 있던 안공근은 펄쩍 뛰면서, ‘형님이 불란서 조계지에 계시면서 이 같은 발표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합니다’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엄항섭으로 하여금 선언문을 기초하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시켜 로이터 통신사에 투고하였다. 이 발표를 통하여 비로소 세계 각국에서는 동경사건과 상해홍구사건의 주모계획자는 김구요, 집행자는 이봉창과 윤봉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년, 339쪽)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체포와 관련, 아래와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최서면 씨는 미국에 있는 한인단체로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동지회는 없어지고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가 안창호 선생이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안창호 선생은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을 예고한 김구 선생의 피신 전갈을 받고도 당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유필의 아들과 생일 케이크를 자르기로 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피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갈을 가지고 간 메신저가 ‘아~ 애하고 한 것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라고 했더니 안창호 선생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놈, 우리가 일본하고 싸우는 이유가 일본 놈들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독립시켜 준다고 해놓고 약속 안 지킨 것 때문인데, 작은 약속이라도 안 지키면 독립운동 그만두어야지’하며 약속을 지키다 결국 일경(日警)에 붙잡혀갔다고 한다.” (‘집중인터뷰 – 한일 막후 괴물 최서면의 현대사 비화’, 월간조선 2002년 6월호). 




  동아일보는 일제 당국의 보도 통제 속에서도 윤봉길 의거 속보를 싣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5월 2일자 1면에는 ‘상해 신공원의 식장 광경’사진과 신언준 특파원의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기사를 싣습니다. 1면 하단에 ‘본보압수’ 알림사고가 나간 것을 보면 5월 1일자 윤봉길 의거 기사가 일부 삭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32년 5월 2일자 1면


  상해 신공원의 식장 광경[사진]


  연맹의뢰(聯盟依賴)? 연로(聯露)?

  국부(國府)의 외교적 고민

  급텝포적 방향전환의 형세

  -상해특파원 신언준-


  본보 압수




1932년 5월 3일자 2면






1932년 5월 3일자 2면 윤 의사 관련 기사가 삭제되기 전 지면






폭탄범인 윤봉길은

예산 덕산면 출생

본집엔 부모와 처자가 있어

부모구존(父母俱存), 아들 형제

상해수류탄사건의 현행범으로 체포된 윤봉길(25)은 충북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백36번지 농업 윤황의 맏아들로 3형제이다. 그의 집에는 그 아내와 영호 담의 두 아들이 있다한다.




 동아일보 5월 3일자 2면은 윤봉길 의사가 칭다오(靑島)에 머물 때의 사진과 가족사진을 처음으로 조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관련 기사는 총독부에 의해 삭제됐지만 윤 의사의 사진만은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윤 의사의 연행 사진이 처음 공개된 것은 오사카 아사히신문이 5월 1일자 호외 앞 면에 실은 것으로 동아, 조선, 매신이 5월 4일자에 전재했으나  이는 진위 논란이 있습니다.  




오사카아사히신문 1932년 5월 1일자 호외 1면

  




  강효백 경희대 교수는 위 사진은 윤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고 김상기 충남대 교수는 아래 사진 처럼 피투성이가 된 윤 의사의 모습을 오사카아사히 신문이  “핏자국을 지운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그러나 당시 여러 신문의 보도를 볼 때 윤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사카아사히신문 1932년 5월 1일자 호외 2면






노스차이나데일리뉴스 1932년 4월 30일자 1면

 




 동아일보는 5월 6일 일제 당국이 보도 통제를 일부 해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날 석간(5월 7일자)부터 기사를 쏟아냅니다. 1월 8일에 발생한 이봉창 의거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1932년 5월 7일자 2면






상해폭탄범 윤봉길의 소속단은 「○○○○당」

재호 중한항일동맹단(中韓抗日同盟團)에 참가

전율할 암살대의 일원

(연합통신) 지난달 29일 상해 신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축하식이 끝나고 관병식이 시작되려할 즈음에 폭발탄을 던지어 야촌(野村)사령관 백천(白川)군사령관 중광(重光)공사 식전(植田)○단장 촌정(村井)상해총영사 천단(川端)민단장 등 기타 참집하였던 일본관민 다수를 사상케한 중대사건은 그간 게재 금지 중에 있더니 6일부로 범죄수사상 지장이 없는 한도 안에서 사건의 내용을 쓸 수 있게 일부가 해금되었다.


정국신사대제(靖國神社大祭)에 일본잠입계획

(연합통신) 폭탄투척 현행법으로 체포된 윤봉길(25)의 소속단체는 ○○○○당 외에 중한

(中韓)재호 항일동맹(抗日同盟)이라고 칭하는 유력한 배일단체로 이 회원중에는 ○○○○○등의 이름도 씌워있다. 맹약은 13조로 되어있고 항상 일본인 거두에 대하여 직접 행동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요전 동경 정국신사(靖國神社)대제에도 이 단체로부터 자객을 보내 고귀한 이에게 일대음모를 실행하고자 선정된 자객 수명은 22일 연락선 상해환으로 도일코저하다가 일본관헌의 경계가 엄중하여 목적을 달하지 못하였는데 그 사람 중의 한사람도 윤봉길이었다고 한다. 상해에서는 촌정 총영사와 육해군 수뇌부를 노리고 있다가 필경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고 한다. 1월 8일 동경의 불경사건도 이 단체원 중의 한사람이다.




범인은 충남 예산출생

부모와 약처치자(弱妻稚子) 26세 된 안해와 아들 형제

경악에 싸인 그 가정

(예산) 폭탄범인 윤봉길(25)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번지 윤황의 장자로서 10년전에 당지 보통학교 2학년을 수업하고 계속하여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 어머니 김씨와 봉덕 영석의 두 동생이 있다. 15세 때에 결혼하였는데 그처 배씨와 사이에 모순 담의 두 아들이 있는데 이 소문을 전해듣고 그 가정은 경악에 싸이었다.


재작년(再昨年)에 이가(離家)

청도 거처 상해에

(예산) 범인 윤봉길이 집을 떠나기는 소화 5년 2월 7일이었다. 동리사람과 집안식구도 모르게 돈 50원을 빗 얻어가지고 출가하였는데 5개월 후에 청도에서 편지와 빗얻어가지고 갔던 돈 50원을 집으로 보내어왔다한다. 그는 그곳 세탁소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작년 2월에 비로소 상해로 옮아가 상해에서 모직물 공장에 직공으로 있었고 최근은 중국인세탁소에 있었다한다.


배후에 ○○등

군부측에 일대충동

범인 배후에…(중략)…그럼으로 즉시 군의 적극적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듯하다고 관측된다.


노동야학과

소년단조직

(예산) 보통학교를 2학년밖에 다니지 못하였으나 신문서적을 독습하여 상당한 상식을 얻었다고 한다. 5년전에 동리에서 동지를 합하여 40,50명의 아동을 모으고 노동야학을 설립하고 월진회(月進會)라는 소년단체를 조직하였다. 월진회는 지금까지 있어 부회장 정종갑 군이 맡아보며 회원이 20,30명이 된다고 한다. 


(사진)

윤봉길과 그 가정=청도에 있을 때의 범인(좌) 그의 아내 김씨와 아들 형제(우) 범인의 예산 본가


특히 윤의사의 부인 사진과 두 아이의 사진, 예산 본가 사진은 그해 12월 김구 선생이 신문에서 오려 도왜실기에 싣습니다.


윤봉길 의사 주택,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양처현모 일신겸지, 윤부인

유기부필유기자(有其父必有其子), 윤의사 양공자  (1932년판 도왜실기, 사진)


 5월 8일자(5월 7일 오후 발행)에서, 5월 6일 오후 4시에 있었다는 ‘육군성 발표’는 단신으로 처리했습니다.


“폭탄사건범인 군법회의 회부

육군성에서는 6일 오후 4시에 상해폭탄사건의 범인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 범인 윤봉길은 헌병대에 유치하고 대강 심문한 후에 군법회의에 예심을 청구하였다.

2. 사용한 폭탄은 두개로써 한 개는 수통형이오 한 개는 벤도형으로 던진 것은 수통형의 것이다.(기타략<其他略>) ”






1932년 5월 8일자 2면






상해수류탄사건상보(詳報)

영경(領警)과 헌병대 총동원

조선인가택대수색

불조계(佛租界)에 수사본부 두고 활동

김구(金九) 등 주요인 탈주


(상해발 전통) 육군헌병대급 총사령관 경찰서에서는 29일밤까지 체포한 범인에 대하여 취조한 결과 범인의 계통에 관하여 어떤 확신을 얻은 모양으로 30일 오전 3시경에 수사본부를 불란서 조계에 있는 중광공사관저에 옮기고 원전경부를 지휘자로 서원급 헌병대 일동을 총동원한 동시에 불란서 공부국 경관 약 50명의 응원을 얻어서 불란서 조계안에 있는 조선○○당 조선공산당 기타 조선인의 집들을 모조리 수색한 결과 용의자로 조선인 12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을 먼저 불란서 조계경찰서에 인도하였다가 이튿날 오후 3시경에 그들의 시체를 전부 일본 총사령관 경찰로 옮기어 류치취조하는 중이다. 그러나 김구 등 거두들은 중국가남시(中國街南市)로 어느덧 도주한 모양임으로 계속하여 각 방면으로 협력 수색 중이라 한다.




안창호 이유필 거두 등 속속 검거


직접 사주자는 이유필로 판명

이유필은 상해교민단장


19로군(路軍)과 관계?

혹은 공산당 일파?


항일 구국회 비호(庇護)로

가정부 남시(南市) 이전

불조게에 잇는 집은 비어 잇서

김구(金九)와 조소앙(趙素昻) 조종


폭탄사건범인 군법회의회부


각계두령으로 10만당원지도

안창호(安昌浩)경력


윤(尹) 취조부진 함구(緘口)코 불어(不語)


항일회와 제휴

무기도 공급

폭탄도 항일회서 나온 듯

사용수류탄분석중


중광(重光)공사 절망

발열 40도


촌정(村井) 총영사 용태




1932년 5월 8일자 2면 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윤(尹) 취조부진 함구(緘口)코 불어(不語)’란 기사입니다. 




 






윤(尹) 취조부진(不進) 함구(緘口)코 불어(不語)

윤봉길은 체포된 이래 약 10시간 동안이나 헌병대의 엄중한 취조를 받았으나 아직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아니하며 다만 다른 조선인 두명과 ○○운동을 위하여 하였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버틸뿐이라 한다.




‘홍구공원작탄안의 진상’을 보도한 중국 신문 ‘시보’(1932년 5월 10일자)





중앙일보(남경) 1932년 5월 10일자 2면


홍구작안경과상정(虹口炸案經過詳情)

호 각보(各報) 접도(接到) 한인(韓人) 영문(英文) 장신(長信)

(1)여위주동인(余爲主動人)

(2)계획여실행(計劃與實行)

(3)윤봉길역사(尹奉吉歷史)

(4)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5)군지아시수(君知我是誰) 




대공보(천진) 1932년 5월 10일자 3면

상해작탄안한인김구자승주사(上海炸彈案韓人金九自承主使)


이 편지는 신언준 동아일보 상해 특파원이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 내용은 동아일보에는 실리지 못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5월 20일자 2면






이와 관련된 일제의 압수 기록 문건입니다.


조선출판경찰월보(朝鮮出版警察月報) 제45호

문서제목 불허가(不許可) 차압(差押) 출판물 요지 – 동아일보  

발송일 1932년 05월 20일


동아일보 7년(1932년) 5월 20일

차압(差押) 


상해폭탄사건진상(上海爆彈事件眞相)

직접 명령자는 김구

두개의 은화 4원을 주어, 김구의 명의로 발표

상해에서 발행되는 각 신문지(新聞紙)에는 김구의 서명으로 상해폭탄사건진상(上海爆彈事件眞相)이라고 불리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것에 따르면 상해폭탄사건진상이라는 것은 4월 29일에 김구가 윤봉길을 불러…(후략) 


1932년 5월 20일자 2면 삭제된 기사




 


상해폭탄사건진상

직접 명령자는 김구

폭탄 두개와 은화 4원을 주어

김구의 명의로 발표

 

  상해에서 발행하는 각 신문지에는 김구의 서명으로 상해폭탄사건진상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그것에 의하면 상해폭탄사건 진상은 이러하다.

  4월 29일에 김구는 윤봉길을 불러 상해파견군 수뇌부 암살을 명령한 후에 폭탄 두개를 주어 한 개는 암살에 쓰고 다른 한 개로는 자살할 것을 명하고 은화 4원을 주고 자동차를 태워 홍구공원 천장절 봉축식장으로 보낸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글에 의하면 김구는 일본대관의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당의 수령이라 하며 그는 자기의 내력을 설명하야 자기는 21세 때(1896년)에 안악에서 일본인 대위를 타살하고 벽상에 자기의 주소와 씨명을 써 부치었으며 그 죄로 붓 들려 사형선고를 밧고 인천감옥에 잇다가 3년 만에 파옥 탈주하야 중노릇을 하였고 그 후에 안중근 사건에 체포된 일이 있었고 암살음모사건, 안명근 사건 등으로 15년 징역에 처함이 되었고 감형으로 5년 만에 출옥하였고 안악양산학교 교장으로 잇은 적도 있었으며, 기미운동이 일어나매 중국으로 망명하야 금일에 이른 것이라고 하는데 동경불경사건 범인 리봉창도 자기가 명령하야 파견한 것이라고 하였고 그가 주재하는 ○○○○당은 비밀결사로서 오직 자기 한사람만이 각 당원을 알 뿐이오 당원 서로 간에 누가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하였다. (사진은 김구)




  김희곤(金喜坤) 안동대 사학과 교수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의역사 제23권 대한민국임시정부 Ⅰ’(독립기념관, 2008, 298쪽)의 내용.


  윤봉길 의거가 독립운동계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다. 첫째, 이봉창 의거에 이어 독립운동계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외교투쟁방략과 전쟁준비방략에 이어 전개된 의열투쟁방략이 하나의 금자탑을 이룸으로써 침체되었던 독립운동계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다. 둘째 영향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게 된 점이다. 1931년 말부터 1932년 10월까지, 특히 윤봉길 의거 이후에 중국의 각계로부터 3만 달러 가까운 지원금이 들어왔다. 중국의 지원은 이러한 자금에만 그치지 않고 한국독립당의 요구인 한국 청년의 군사교육까지 가능케 했다. 장개석이 김구를 찾아 회견할 때, 김구는 한국의 사관 양성 사업에 대한 원조를 청하였고, 그 뒤 1934년 10월에 중국 정부가 동의하며 중국 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서 한국 청년을 교육시키도록 했으니, 이렇게 훈련된 청년들이 장차 광복군의 기반이 된 것은 물론이다. 셋째, 만보산(萬寶山)사건 이후 쌓인 한중 양 국민 사이의 긴장감과 불화감이 깨끗이 해결되었다. 따라서 이전 시기에 비해 대일항쟁에 있어 양국의 동맹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넷째, 양대 의거로 인한 일제의 철저한 응징 때문에, 1910년대 이후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던 상해를 떠나야만 했다. 즉 임시정부의 상해시기를 끝내는 시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윤봉길 의거 직후인 5월에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와 더불어 항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더 타임스 1932년 5월 6일자 13면






Nationalism in Korea

The Influence of Japan

from our special correspondent

Seoul, Korea


The attempt upon the life of the Emperor of Japan and the bomb outrage against the Japanese authorities in Shanghai, both perpetrated by Koreans, call attention to the  Nationalist movement in that country….


조선에서의 민족주의

일본의 영향

특파원 발

경성, 조선


일본에서 국왕의 생명을 노린 폭탄사건과 상하이에서 일본 당국자를 겨냥한 폭탄사건은 모두 조선인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이 나라의 민족주의운동에 관심을 끌게 하고 있다.…(후략)




윤봉길 의사에 대한 동아일보의 후속보도입니다.


1932년 5월 27일자 2면

상해 폭탄범 윤봉길 제1회 군법회의


1932년 5월 30일자 2면

상해 폭탄사건 범인

윤봉길 일본호송

백천의칙(白川義則)대장의 유골과 때를 가티해

28일 조(朝) 모선(某船)으로


1932년 11월 21일자 2면

상해사건 윤봉길 18일 장기(長崎)로 호송


1932년 11월 22일자 2면

상해 폭탄범 윤봉길 대판(大阪)에서 사형집행

20일 상륙 대판(大阪)위수감옥에 수용 행형 시일은 아즉 미정


  그해가 저물어가던 12월 20일, 동아일보는 “윤봉길은 17일 저녁때 ·오사카(대판<大阪>) 위수구금소에서 가네자와(금택<金澤>)로 호송되어 19일 아침 7시 40분에 금택형무서에서 총살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전했습니다.




1932년 12월 20일자 2면






상해폭탄범 윤봉길 작조(昨朝) 금택(金澤)서 총살

17일 대판(大阪)서 금택(金澤)에 호송

사건후 8개월 만에 




  광복 후 윤봉길의 유해는 가네자와 쓰레기소각장에서 발굴돼 1946년 백범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자 2면


조국광복에 바친 세 혈제(血祭)!

조기(弔旗) 아레 전 시민이 애도

3열사에 유골 효창원 정역(淨域)에 안장


천고에 빛날 세 열사의 유혼이 고국에 돌아오시었다. 장할 손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세 분의 의기(義氣)야말로 조국광복의 피로서 마친 혈사의 바탕인 것이다. 이제 세 분의 육신과 의로운 넋을 혁명원로와 더불어 순혈 어린 3천만 겨레의 가슴속에 안기어, 7월 7일에 국민장으로서 서울 효창원 승지에 고이고이 잠들었다. 3열사의 국민장은 서울의 승지 효창원에서 이승만 박사와 김구(金九)주석, 오세창, 이시영, 여운형 제씨와 한국민주당, 조선공산당, 한국독립당, 민전(民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평(全評), 부총애국부인회, 여자국민당 등 각 정당단체 대표자와 각 학교 대표자 합 5만여 명이 참여하여 하오 1시부터 엄숙히 거행하였다. 먼저 애국가를 합창하고 이강훈씨의 개회사가 있은 후 주악이 끝나자 조완구 씨가 식사를 낭독하고, 분향한 다음에 신현상씨가 목메인 소리로 제문(祭文)을 낭독하고, 김구 주석은 3열사 영전에 분향한 후 애끓는 제문을 낭독하신 다음에 이어 하오 3시까지나 하관입토(下官入土)하여 30여 년 품었던 원한을 풀어, 이 땅에 고이 잠드신 감격의 국민장은 의의 깊게 끝을 마치었다.  

2 Comments »

  1. 그대는 역사를 왜곡하고 국민을 속이고 윤봉길 의사를 능멸하고 있음

    나는 거사 3일전에 태극기 앞에서 백범김구와 촬영한 진짜 윤봉길 사진(1932.4.26)이
    일본 아사히신문 1면과 2면에 나온 가짜 사진과 틀리다고 밝힌 바 있음.

    제발 백범 김구의 [도왜실기]라고 왜곡하지 말라! 엄항섭이 편집가필한 [도왜실기]이니
    엄항섭의 [도왜실기]마저 일본 통신사 [니혼뎀포]가 배포한 가짜 사진임.

    그리고 왜 일본 아사히 신문 1면의 가짜 인물사진의 다리 아래는 끊어버리고 싣는가!
    그 가짜 인물은 게다를 신었다 말이다.

    Comment by 강효백 — 2011/01/15 @ 1:03 오전

  2. 문제의 가짜 윤봉길 사진은 5월 4일이 아닌(제발 속이지 말것!), 5월1일 아사히 신문(호외)에 나온 사진을 동아일보가 그대로 올린 사진 아닌가! 그러한 원죄의식으로 말미암아 동아일보는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앞장서는게 아닌가? 마치 보온병을 포탄이라고 우기듯!

    Comment by 강효백 — 2011/01/16 @ 2: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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